한산시寒山詩에 대하여
한산시寒山詩에 대하여/최동호崔東鎬
<한산시寒山詩>는 한산자寒山子라는 전설적인 隱者가
천태산의 나무와 바위에 써 놓은 시를 국청사國淸寺의 중이 편집했다고 전해지는 시집이다.
한산자의 作이라고 전해오는 약 300여 首 외에 豊干의 작품 2수,
拾得의 작품을 약 50여 수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三隱詩集>이라고도 불린다.
소수의 7言詩와 三字詩가 포함되어 있지만 5言詩가 대부분이며
詩體로서는 樂府에 가까운 古詩이며 소위 近體詩나 律詩나 絶句는 거의 없다.
350여 수라는 분량은 대체로 당나라 시인들의 보통의 편수이다.
시의 내용들은 꽤 복잡하고 다양하여 여러 가지 題材가 취급 되고 있다.
<한산시寒山詩>의 전형적인 부분인 자연과 함께 있는 즐거움을 노래한 것 외에
세상과 승려에 대한 비판, 불교적인 교훈시, 도교에 대한 비판의 시,
여성의 변덕을 노래한 시 등을 통하여 허망한 삶을 깨우치고
진정한 道를 구하라는 주제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한산자가 어떠한 인물인가 하는 것은 분명하지 않다.
이 책의 서문에서 여구윤閭丘胤은 한산자를 문수보살의 再現으로
신비하게 묘사하고 있으나 그 신빙성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여구윤이라는 인물은 다른 문헌에 전혀 나타나지 않아 그 실재가 의심스럽다.
(<속고승전> 권25에 나오는 같은 이름의 인물은 전혀 다른 사람이다.)
여구윤의 존재가 의심스러운 또 하나의 증거는 문장의 치졸함에서 찾을 수 있다.
즉 태주자사台州刺史라면 상당히 높은 관직으로 꽤 고급한 문장을
구사할 수 있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원문의 문장은 매우 거칠다.
이러한 증거들로 미루어 보아 이 시집의 서문은
편집자가 책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가공의 인물을 내세웠을 가능성이 많다.
또한 한산자에 대해서는 다른 계통의 이야기가 <太平廣記> 권55 <仙傳拾遺>에 전하고 있다.
이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한산자는 대력大曆 때 천태天台의 취병산翠屛山에 은거하여 좋은 시를 지었는데
일편일구一篇一句를 얻으면 나무와 바위 위에 써 놓았다.
호사가들이 300여 수를 모으고 桐柏의 隱者 서령부徐靈府가 편집하여 서문을 달았다.
산림유은山林幽隱의 취흥을 노래한 것이 많고 세상을 풍자하고 풍속을 훈계한 시들도 있었다.
그는 십수년 후에 행방이 묘연하였다가 함통咸通 12년에
道士 이갈李褐이라는 사람의 처소에 갑자기 나타났다가 자취를 감추었다.
대력大曆은 당나라 代宗의 연호(776-779)이고
함통咸通은 당나라 말기 의종懿宗의 연호(860-873)로 그 12년은 871년이다.
시대가 약 1세기가 틀리고 있어 이 기록도 신빙성은 적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요컨대 한산자라는 인물의 실재를 시사하는 신빙성 있는 傳記적 증거는 거의 없다.
지금까지 전하는 전기적 자료로서는 한산자가 구체적으로 어느 시대 인물인지
또한 佛家의 인물인지 道家의 인물인지
佛家의 인물로 보더라도 승려인지 居士인지 알 길이 막연하다.
습득이나 풍간도 그러한 구체적인 전기적 자료는 없다.
그래서 혹자는 습득이란 실제의 인물이 아니고 한산자의 詩에서 누락된 부분을 편집자가
찾아내었다는 의미로 拾得(주워서 얻었다)이란 이름을 붙였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정도이다.
어떻게 보면 <한산시寒山詩> 전체가 여러 사람의 합작품일 가능성도 있다.
여하튼 현대의 독자에게 한산자나 습득이 어떤 인물인가 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보다 실제적인 것은 <한산시寒山詩> 자체의 내용일 것이다.
<한산시寒山詩>의 내용을 추적하다 보면
한산자가 어떠한 인물이었던가 하는 가장 구체적인 해답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산시寒山詩>에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불우한 선비에 관한 시편들이다.
서판전비약書判全非弱 글과 글씨는 모자라지 않았지만
혐신부득관嫌身不得官 이상해라 벼슬자리 얻지 못했네.
전조피요절銓曹被拗折 돌아가다 꼼꼼한 시험관試驗官에 꺾였으니
세구멱창반洗垢覓瘡瘢 때를 씻어 가면서 헌데를 찾았구나.
필야관천명必也關天命 이는 반드시 하늘의 운수리니
금년갱시간今年更試看 금년에도 한번 또 다시 치러 보라.
맹아사작목盲兒射雀目 눈먼 아이가 참새의 눈에 화살을 쏘아도
우중역비난偶中亦非難 우연히 맞는 수도 있느니라./寒山詩 110
위의 시는 실력이 있으면서도 과거에 낙방한 불우한 선비를 동정하는 내용이다.
이러한 내용의 詩로는 <117> <125> <144> 등 여러 편이 있는데
모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빈한하게 살아가는 불우한 선비들의 통분을 노래하고 있다.
<寒山詩>의 작자 역시 이러한 유형의 인물로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다.
출생삼십년出生三十年 세상에 태어난 지 30년
상유천만리常游千萬里 늘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노닐었네.
행강청초합行江靑草合 강에 가니 싱싱하고 푸른 풀이 우거졌고
입새홍진기入塞紅塵起 변방邊方으로 접어드니 흙먼지가 이네.
련약공구선煉藥空求仙 단약丹藥을 만들어 부질없이 신선神仙이 되려고 했고
독서겸영사讀書兼詠史 책도 읽고 역사도 읊었네.
금일귀한산今日歸寒山 오늘에야 한산寒山으로 돌아와
침류겸세이枕流兼洗耳 손초孫楚처럼 흐르는 물을 베개 삼아 허유許由처럼 귀를 씻네.
/寒山詩 281
이 시는 대상을 관찰하여 얻은 시가 아니라
체험에 의해 얻어진 즉 작자 자신이 직접 체득한 시이다.
다분히 자신의 자전적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寒山詩>의 작자가 선비 계층이었다는 사실은 문체나 詩語에서도 증명될 것이다.
<寒山詩>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文選>(양나라 昭明太子 蕭統(501-531)이 편집한 詞華集)인데
이 책은 과거시험의 필독서로 당시의 모든 선비계층이 읽지 않으면 안 되었다.
<寒山詩>가 <文選>의 영향을 받았다는 구체적인 증거로는
<寒山詩 2>의 제4구 ‘白雲抱幽石’ 등 수없이 많다.
위의 구절은 六朝의 시인 사령운謝靈運(385-433)의 유명한 시에서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또 <寒山詩 51>의 ‘垂柳暗如烟 늘어진 버들은 연기처럼 어둡고’에서
제5구 ‘各在天一涯’는 <古詩十九首> 중 첫 번째 것인 ‘相去萬餘里 各在天一涯’
(<文選> 권29)에서 그대로 인용한 것이며
제7구 ‘寄語明月樓’에서 明月樓는 조식曹植의 <七哀詩> 중
‘明月高樓照 流光正徘徊’(<文選> 권23)에서 인용한 것이고
제8구 ‘쌍비연雙蜚鷰’은 <古詩十九首>의 제12首 중 結句
‘사위쌍비연思爲雙蜚鷰 니함군옥소泥銜君屋巢’(<文選> 권29)에서 인용한 것이다.
위에서 열거한 것은 조그만 예에 불과하며 <寒山詩> 전체에서
<文選>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寒山詩>가 영향을 받은 것은 <文選>뿐만 아니라
<장자> <시경> <서경> <논어> <사기> <한서> <삼국지> <포박자> <안씨가훈> <법화경>
<유마경> 등 여러 분야 서적에서 광범위한 영향을 받고 있다.
또한 당나라의 이백(701-762) 두보(712-770) 백거이(772-846) 시의 영향도 보인다.
따라서 <寒山詩>의 작자는 中唐(779-836) 시기거나 그 후의 인물로 볼 수 있는데
晩唐(836-907) 시기에는 오히려 <寒山詩>가 다른 시인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중당시기의 인물로 봄이 적당할 듯하다.
<寒山詩>의 작자는 대체로 중당시대의 사람으로 본격적인 문학수업을 한
선비계층의 인물이라고 설정할 수 있는 것은 위의 여러 문헌적 자료에 근거한 것이다.
그는 과거에 응시를 하여 영달을 원하였으나 그 꿈은 좌절로 끝나고 말았다.
평화시기라면 계속되는 과거를 통하여 꿈을 실현해 보는 것도 가능했겠지만
중당 시기는 중국의 반이 끊임없는 전란이 되풀이 되는 혼란한 때였다.
그는 江南으로 북쪽의 국경으로 방랑을 거듭하였으며 道家에 귀를 기울여 보기도 하였다.
이런 방황 가운데서 그는 혼란하고 오염된 세상을 떠나 은둔의 길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詩 281 참조)
그가 은둔의 길을 택했을지라도 그에게는 사상적으로 두 가지의 선택이 기다리고 있었다.
불교냐, 도교냐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당나라 때는 儒佛道가 그 어느 것도 확실한 시대적 조류가 되지 못하고 혼류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과거에 의한 정계 진출이나 현세적 원리에 인한 행동을 버린 즉 유교를 버린 그가
도교와 불교의 선택에 처 할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것은 분명히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寒山詩>에서 老莊 사상에 깊은 관심을 나타내는 싯구가 보이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곧
장자설송종莊子說送終 장자는 자기 죽어 장사 치를 때
천지위관곽天地爲棺槨 천지를 안팎 널로 삼는다 했다./<寒山詩 8>
선서일양권仙書一兩卷 선서 한 두권 잡히는 대로 펼쳐
수하독남남樹下讀喃喃 나무 밑에서 읽히는 대로 읽는다./<寒山詩 16>
能益復能易 능히 더하고 또 능히 바꾸면
當得上仙籍 신선의 장부에 실릴 수 있지만/<寒山詩 78>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寒山詩>의 가장 매력적인 부분인 한산에서의 은둔생활,
한산의 분위기를 노래하고 있는 自然詩的 부분은
실제로 도교와 불교 중 어느 쪽이라고 그 사상적 근거를 정하기 어렵다.
물론 한산자는 도교와 불교 두 종교 사이에서 동요하다가 최종적으로는 불교에 기울어지게 된다.
그 뿐만 아니라 결국은 역으로 불교적 입장에서 도교의 허망함을 고발하기도 한다.
앞에 인용한 시 281에는 그가 도교에 실망한 것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하겠다.
즉 약을 만들어 신선이 되고자 했으나 그것은 결국 헛된 것이었다는 이야기다.
仙藥을 만들어 신선이 된다는 것. 그것은 중국 도교의 큰 특징이다.
당나라 중기에는 도교에 의한 鍊金術의 전성시대였다.
중국의 연금술의 목적은 不老長生의 단약을 만드는 데 있었다.
고래의 신선사상, 노장사상 등이 불로장생을 위한 주술적 의학과 결합하여 도교의
한 부분으로 정립되었고 당나라 중기에는 이 이론과 기술이 점점 정교하게 되어 제조되는
단약의 효험은 광범위하게 믿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연금술과 단약의 성행은 황제 헌종憲宗(778-820)에서 시작되어
몇 사람의 황제가 단약에 의한 중독으로 사망할 정도였으므로
광범위한 영향력을 끼쳤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도교는 단약에 의한 불로장생을 무기로 일세를 풍미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역으로 도교의 큰 약점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종교가 현세적 이익을 고집하는 한 결국은 그 종교의 허망함이 나타나고 마는 것이다.
단약의 효과가 없다는 것이 황제를 비롯한 무수한 인체실험의 결과로 증명되어 버리면
도교의 허망함도 실천적으로 폭로되어 버리게 된다.
한산자가 포착한 것이 바로 그것이디.
말하자면 도교의 최대 약점을 겨냥한 것이다.
시 153에서는 사람이 늙음을 두려워해서 부질없이 약을 구해 신선이 되려고
뿌리와 싹을 모조리 뒤져 속절없이 세월만 흘려보내는 모습을 노래하고 있고
시 228에서는 더욱 비약하여
‘너 비록 신선이 된다더라도
송장을 지키는 귀신과 다름없다.’고
불로장생의 사상을 그 근저에서부터 비판하고 있다.
시 253에는 漢 의 武帝나 秦의 始皇帝가 신선술을 좋아해서 수명을 연장하려 했으나
결국 무위로 끝나 죽고 말았다는 역사적 사실도 노래하고 있다.
여기에서 생각하여야 할 것은 唐代는 淨土나 禪 등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종파가 일어나서
불교가 다른 종교보다 훨씬 일찍 고대적 종교에서 탈피를 추구했다는 사실이다.
유교의 탈피는 韓愈(768-824)에 의해 시도되었지만 宋代에 가서야 꽃을 피우게 된다.
형이상학과 인식론의 지지를 받지 않는 유교적 합리주의는 不可知論에 떨어지기 쉽다.
당나라 유교사상의 대표격이었던 한유가 단약을 먹고 죽었다고
전해지는 것은 상당히 상징적인 이야기일 것이다.
이에 반해 불교 시인이었던 王維와 백거이는 도교의 연금술에 맹렬한 비판을 가했다.
한산자 역시 도교의 주술성 비판을 통하여 불교신자로서의 자신을 확립하게 된다.
그러나 불교에 귀의했다고 해서 한산자가 불교적 목소리만 가다듬은 것은 아니다.
그는 두 개의 목소리를 가지게 되는데 그 두 목소리가 이율배반적인 것은 물론 아니다.
그 하나는 한산의 정적에 禪的인 명상에 잠겨 있는 불교적 은둔자로
또 하나는 민중의 생활에 근거를 둔 민중주의자로 나타난다.
여기에는 시대적 배경의 설명이 필요하다.
당나라는 六朝的 문벌귀족체제에서 근세적 과거체제로의 이행시기였다.
거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가세에 의해 관직을 세습하여 권력을 장악하던 문벌귀족으로부터
과거에 의해 선발된 신흥 사대부 층으로 정치의 담당자가 변하고 있던 과도기적 시대였던 것이다.
그러한 권력 교체기에 으레 있기 마련인 복잡한 권력투쟁이
당나라 300년을 통하여 지속 되었다.
후에 사대부로 발전하는 계층은 당나라 이전에 寒門士族 이라고 불리던 중소지주층이다.
대체로 당나라 시인들은 이 계층에 속했다.
한산자도 이 계층 출신일 것이다.
이러한 권력 투쟁의 과정에서 신흥계급은 권력을 가진 상층계급과 대항해야 하기 때문에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피지배계급을 옹호해야만 했다.
당나라의 신흥 사대부도 그러했을 것이다.
두보, 원결元結(723-772), 백거이 등이 농민을 중심으로 한 근로민중의 비참한 생활을
노래한 작품을 많이 남긴 것은 위의 사실을 뒷받침하는 시대적 증거라 할 수 있다.
물론 당나라 시대 모든 문인들이 민중 지향적 문학을 했던 것은 아니다.
현대적인 시각으로 보면 그들의 문학은 대부분 귀족적인 문학일 것이다.
그러나 盛唐(713-779) 시인 중 가장 귀족적인 王維의 시에서도
육조시대나 초당시대의 시인들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던 농민생활에 눈을 돌린 시편들이 있다.
세속정치를 부정하는 한산자가 귀족적인 문학에 머물지 않고
민중 속으로 눈을 돌린 일면이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이것이 <寒山詩>의 내용에 당시 당나라 사회의 다양한 모습이
반영될 수 있었던 큰 이유가 될 것이다.
체재에 반대하여 불교신자가 된 한산자는
신자가 되어서도 체계적인 사원불교에는 통렬한 비판을 가한다.
그가 믿는 불교는 귀족적 불교인 사원불교가 아니었던 것이다.
심고여산악心高如山岳 마음에 품은 뜻이 험준險峻하게 솟은 산처럼 높아서
인아불복인人我不伏人 사람들은 남들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네.
해강위타전解講韋陀典 베다Veda 경전經典 훤히 알아 가르칠 수 있고
능담삼교문能談三敎文 유교儒敎·불교佛敎·도교道敎의 글월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네.
심중무참괴心中無慚愧 마음속으로 부끄러워하지도 않으면서
파계위율문破戒違律文 계율戒律을 깨트리고 울문律文을 어기네.
자언상인법自言上人法 스스로 깨달았다고 하면서
칭위제일인稱爲第一人 제일인자라고 일컫네.
우자개찬탄愚者皆讚嘆 어리석은 자들은 모두 칭찬하며 감탄하고
지자무장소智者撫掌笑 슬기로운 사람은 손뼉을 치며 웃네.
양염허공화陽燄虛空花 번뇌煩惱로 생기는 온갖 망상妄想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데
기득면생로豈得免生老 어찌 태어나고 늙는 고통을 면할 수 있겠는가.
불여백불해不如百不解 아무것도 모른 채
정좌절우뇌靜坐絶憂惱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용히 앉아 근심과 번뇌를 끊어 버리는 것만 못하네.
/<寒山詩 211>
위 시는 근본원리의 탐구를 망각하고 현학적 학문에만 열중하고 계율을 어기면서도
佛法의 일인자로 뽐내는 권력에 보호받는 사원불교의 승려를 비판하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시 155에서는
雲光好法師 ‘저 얼굴 훤하던 운광법사는
安角在頭上 그 머리 위에 두 뿔이 났었네.’
라고 하여 육조시대의 귀족불교의 高僧도 信心이 없는 무리라고 노래하고 있다.
시 255에서는 한층 더 통렬하게
語你出家輩 ‘너희들 집난이(출가자)에게 내 이르나니
何名爲出家 어떤 것 일러 집난이라 하는가?’
라고 꾸짖으며 형식적인 佛事에 전념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추구하는 승려들을 비판하고 있다.
한산자는 형식적인 사원불교보다는 보다 자유로운 민중 속의 불교를 지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寒山詩>의 일부는 당시 유행하던 설화에도 바탕을 두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예를 들면 시 42와 같은 것은
저안氐眼 땅의 추공鄒公의 아내와 한단邯鄲 땅의 두생杜生의 어머니를 대비하면서
영고榮枯의 모습과 그 도리를 설명하고 있는 듯 하지만
이 시만 가지고는 자세한 뜻을 알기 어려운 난점이 있다.
아마도 이 시의 내용을 이루는 이야기가 그 당시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누구나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시 90에서도 매파買婆, 황로黃老, 위씨아衛氏兒 등의 구체적인 인명이 보이는데
이것 역시 그 당시 널리 퍼진 설화나 故事에 기반을 둔 것임에 틀림없다.
시 41, 49, 59와 같은 것들도 역시 설화나 민중 속에 유포되어진
이야기에서 취재되어진 시들일 것이다.
그러나 위의 시편들보다 <寒山詩>의 진면목을 나타내는 것은
시집 후반부에 많이 나타나는 불교의 이치를 설법하는 시편들이다.
가외삼계륜可畏三界輪 가히 두렵기만 하네, 삼계三界의 윤회輪廻
념념미증식念念未曾息 생각 생각에 일찍이 그친 적이 없네.
재시사출두纔時似出頭 겨우 때맞추어 벗어난 듯해도
우각조침닉又却遭沉溺 또다시 빠져들고 마네.
가사비비상假使非非想 가령 가장 높은 하늘인 비비상천非非想天에 태어난다고 해도
개연다복력蓋緣多福力 많은 복덕福德의 힘이 덮어 주었기 때문이네.
쟁사식진원爭似識眞源 어떻게 참된 근원根源을 알 수 있을까.
일득즉영득一得卽永得 한번 얻으면 곧 영원히 얻는 것이라네.
/<寒山詩 195>
이와 같은 깨달음을 밝히는 시에서 윤회의 고통으로부터 시작하여
중생의 우매와 번뇌를 밝히고(213)
본성의 밝음으로 여래가 되는 것을 가르쳐서(219)
마음속에 부처가 있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그러나 <寒山詩>가 설법의 딱딱한 형식으로 불교의 진리를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불교문학으로서 <寒山詩>의 진정한 가치는 풍부한 인생체험을 기초로 하여 세태인정을
교묘히 노래하여 모르는 사이에 독자를 깊은 깨달음으로 유도하는데 있다고 할 것이다.
시 36의 빈부의 교차, 37의 욕심이 가득한 부호의 생태, 72의 생활을 게을리 하고
허영에 날뛰는 남녀 등 가지각색의 인생을 노래하면서 無常한 삶을 깨닫지 못하면
지옥축생에 떨어져 영원한 고통을 받는다는 것을 설법하여
결국은 불교에 의한 해탈을 자연스럽게 노래하고 있다.
한산자는 영혼의 정화와 해탈을 추상적인 언어에 의존하지 않는다.
해탈 후의 정화된 세계를 지상의 이상경의 구체적인 묘사를 통해 제시하고 있다.
<寒山詩>에서 반복되어 노래하는 한산이 바로 그것이다.
중암아복거重巖我卜居 내 사는 겹겹의 바위산
조도절인적鳥道絶人跡 새만 드나들 뿐 인적 없다.
정제하소유庭際何所有 바위 뜰에 뭐 있겠나
백운포유석白雲抱幽石 그윽한 돌 안은 흰구름 감도는
주자범기년住茲凡幾年 이곳에 살은지 몇핸고
누견춘동역屢見春冬易 봄가을 바뀐지 여러 번
기어종정가寄語鐘鼎家 부자들에게 한마디 하노니
허명정무익虛名定無益 헛된 이름 득 될게 없더라.
/<寒山詩 2>
이러한 종류의 시는 처음부터 되풀이 되어 전편에 걸쳐 노래되고 있다.
寒山, 그곳은 車馬의 자국이 없는 인적이 끊긴 곳이며(3)
둘린 겹산은 항상 눈을 얼리고 그윽한 숲은 매양 안개 토하는(66) 냉엄한 곳인데
그곳에 가는 것은 한여름에도 얼음이 녹지 않고 해는 떠올라도 안개만 자욱하여(9)
쉽게 갈 수 없는 곳이다.
이러한 장소는 세속의 오염된 생활에서 벗어나 초월하게 살아가는 곳이기에
수도자의 거처로서는 적당할 뿐만 아니라 태고 그대로의 원시·소박한 자연 풍경은
세속적인 탁한 心境과 번뇌를 벗어난 明澄한 각성의 경지로 상징된다.
자연과의 결합은 <寒山詩>만의 특징은 아니지만
중국문학의 보편적 특성임에는 틀림없다.
한산시 역시 이러한 중국문학의 전통적 사고를 바탕으로 구축된 理想境인 것이다.
여하튼 <寒山詩>의 특색 중 하나는
한산이라는 환상적인 해탈의 세계를 의도적으로 설정하고
여러 각도에서 집요하게 되풀이 하여 노래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寒山詩>의 작자는 중당시대의 선비계층의 인물로 지리적·사상적으로
오랜 방황을 거듭한 끝에 ‘한산’이라는 정신적 이상경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방황은 폭 넓은 것이어서 <寒山詩>도 그 체험에 따른 다양한 내용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불우한 선비를 노래한 것, 도교에 흥취를 느낀 것, 허식의 불교를 비판한 것,
서민의 생활을 노래한 것, 불교적인 교훈을 내용으로 한 것,
그리고 그의 시 중에서 백미라 할 수 있는 한산의 자연을 노래한 것 등이다.
여구윤의 序는 앞에서 말한 대로 신빙성은 적으나 그런대로 한산자라는 인물과
<寒山詩>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라 생각되어 이 책의 서두에 수록하였다.
그리고 각 시의 번호는 原詩에는 없는 것이나 편의상 달았으며
‘해설’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추가해 보았다.
혹시 <寒山詩>를 직접 감상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을까 두렵다.
끝으로 한 가지 더 첨가하고 싶은 것은 <寒山詩>는
한국의 옛 禪詩는 물론 현대시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어
정지용, 김달진, 서정주, 김관식, 이원섭, 황동규, 정현종, 박제천, 이성선,
조정권, 최승호, 황지우 등의 시를 형성하는 정신적 토양이 되어
그들의 시에 직·간접으로 변용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들의 시와 <寒山詩>를 대조, 비교하면 그 유사점과 독창성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물질만능에 찌든 오늘날 우리 현대시인들이 추구하는 시적 주제와
<寒山詩>가 지닌 깊은 철학성이 서로 상통하는 점이 있기 때문이다.
물질의 풍요 속에서 속박 당하는 정신의 가치야말로
예나 지금이나 가장 중요한 시적 주제임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寒山詩>의 다양한 내용과 깊은 철학성은
현대의 독자들에게도 신선한 감동을 줄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