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詩/寒山詩

寒山의 詩世界 硏究 Ⅴ. 寒山詩의 禪思想

空空 2024. 8. 4. 10:21

寒山의 詩世界 硏究-禪文學的 입장에서

李日宰(慈明) 東國大學校 大學院 1993 寒山詩 博士學位論文

Ⅴ. 寒山詩의 禪思想

寒山詩의 禪思想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唐代는 詩學의 황금시대이며 또한 禪學의 황금시대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禪과 詩가 만나고 자연스럽게 융합될 수 있었던 것은

당대문화의 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정신적인 깊은 세계를 이룩할 수 있었고

이러한 역사적 상황에서 태어난 인물이 寒山이다.

 

이제까지 寒山은 경세적인 인물 혹은 은둔자로서 탈속한 인물로만 文學的 관심을 기울여 왔으나

이런 것은 寒山의 진정한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기에는 부족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寒山에 대한 진정한 이해는 그의 禪思想에 대한 이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이제까지 寒山에 대한 硏究는 주로 文學的 측면에서만 다루어져 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寒山의 眞面目은 禪思想에 바탕한 그의 禪詩에서 찾아볼 수 있다.

 

寒山의 생존 년대를 8세기로 보는 경우 대략 南宗禪의 발흥과 때를 같이 한다.

寒山詩에서 禪思想의 자취를 엿볼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역사적 상황과 함께 살펴져야 할 것이다.

 

그가 은둔했던 天台山은 본래 天台宗의 발생지이며 천태교학이 가장 성했던 곳이다.

그런 사정으로 인하여 寒山을 天台宗의 사상에 깊이 경도 돼 있는 것으로 지적하고 있는데

이는 매우 피상적인 견해라고 생각된다.

 

실제로 寒山詩에 나타나는 천태사상에 관해서는 그렇게 두드러진 것이 없다.

산명에서 天台山을 들어 시에서 이야기 하고 天台宗의 소의경전인 <법화경>에 대하여

화택의 비유 등을 들어 시에서 인용하고 있을 뿐 크게 천태사상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시의 전반적인 면에서 나타나는 점은 禪思想이 짙게 드러나고 있다.

이런 禪思想을 바탕으로 寒山은 매우 뛰어난 禪詩를 남겨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고 열었던 것이다

寒山詩의 가장 뛰어난 시들은 禪思想을 바탕하여 자연과 어우러진 선시들이라고 할 수 있다.

 

寒山이 살았던 시대는 선종이 시작되던 시대이기도 하다.

그래서 寒山은 선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본다.

실제로 寒山의 시 전부가 禪詩라고 불릴 수 있다고 본다.

그만큼 寒山詩는 선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다.

 

이 장에서는 寒山의 南宗禪과의 관계, 청산 백운의 상징세계, 體와 用의 구조,

그리고 그의 독특한 禪思想을 담고 있는 任運思想과 자연의 인식을 드러내주는

자연관을 알아봄으로서 寒山詩의 禪思想을 약간이나마 천착해보고자 한다.

 

1. 南宗禪과의 關係

 

南宗禪은 慧能에서부터 비롯된 禪宗으로서 祖師禪으로 전개 되는 과정이

대략 7세기를 전후하여 시작되어 9세기쯤 완성을 보인다.

 

寒山의 생존을 700-800년대로 추정할 때 당시 선가가 남․북종으로 나누어지고

神會에 의해 남종이 크게 일어나기 시작 하던 때와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과연 寒山은 어떻게 禪思想을 받아들였는지 살펴보자.

慧能사상의 특징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無一物思想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잘 알려져 있듯이 慧能의 心偈에서 보여 지고 있다.

 

神秀의 禪思想과 慧能의 禪思想이 대비되는 가장 강렬한 모습을

보여 주는 현장이 바로 心偈를 통하여 연출되었다.

 

慧能에 대한 硏究는 그동안 꾸준히 이루어져 왔으나 慧能이 워낙

의문을 많이 갖고 있는 인물이라서 그의 사상 또한 많은 의문을 안고 있다.

 

우선 그의 생존 년대 자체가 불분명하며

또 그의 語錄인 <壇經>의 성립과 유통과정이 매우 불확실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이 중국 선종의 근간을 이루고 마침내 선종이

中國佛敎의 주류를 형성하게 된 것은 바로 慧能의 사상에 의해서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러한 慧能이 있기까지에는 神會의 숨은 노력이 있었음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慧能을 남종의 조사로 받들게 된 데에는 神會가 6조 현창운동을 기울인 덕분이다.

 

慧能이 내세운 사상은 바로 頓悟思想이기도 하다.

本自具足한 自心을 몰록 깨달으라고 慧能은 가르친다.

 

頓悟란 자심이 본래 공적한 것을 깨닫는 것이며 마음에 얻을 바가 없는 것이며

공을 설하는 것을 듣고 공에 집착하지 않고 불공에도 집착하지 않고

我에도 無我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며 생사를 버리지 않고 열반에 드는 것이다.

 

無念은 자성을 깨닫는 것이며 無所得이며 여래선이다.

여래는 미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고 과거로 가는 것이 아니며 현재에도 또한 무주인 것이다.

다음 시는 한산의 頓悟思想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195

가외삼계륜可畏三界輪 아아 두려워라 삼계의 수레바퀴

념념미증식念念未曾息 생각 생각에 일찍이 쉬지 못하는구나

재시사출두纔始似出頭 겨우 거기서 벗어났나 했더니

우극조침익又隙遭沈溺 어느새 다시 잠기고 마는구나

 

가사비비상假使非非想 가령 저 비비상의 유정천에 나더라도

개연다복력蓋緣多福力 그것은 다만 복의 힘을 인연한 것

쟁사식진원爭似識眞源 어찌 저 진정한 근원을 알아

일득즉영득一得卽永得 한 번 얻어 곧 영원히 얻지 않으랴.

 

한번 얻으면 영원히 얻게 된다는 것은 곧 돈오의 깨달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한산의 시에서는 돈오사상이 잘 배어 있다고 본다.

 

분명히 그의 시에는 천태사상보다는

南宗禪의 祖師禪 사상의 영향을 깊이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남종선의 대표적인 사상 중에 一物思想을 들 수 있다.

一物思想은 慧能과 관계되어 나타나고 있다.

다음의 시는 한산이 남종선의 一物思想과 관련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165

한산유일택寒山有一宅 한산에 집 한 채 있어

택중무란격宅中無蘭隔 그 집에는 난간도 벽도 없나니

육문좌우통六門左右通 여섯 문은 좌우로 통해

당중견천벽堂中見天碧 방안에서도 푸른 하늘 보이네

 

방방허색색房房虛索索 방은 모두 텅 비어 쓸쓸한데

동벽타서벽東壁打西壁 동쪽 벽은 무너져 서쪽 벽을 치는구나

기중일물무其中一物無 이 가운데는 한 물건도 없나니

면피인래차免被人來借 빌리러 오는 이의 보챔이 없네.

 

아래 시 역시 一物 思想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158

여가유일굴余家有一屈 우리 집에 하나 굴이 있으니

굴중무일물屈中無一物 이 굴 속에는 아무것 없네

청결공당당淸潔空堂唐 깨끗하고 비어 씩씩한 기운

광화명일일光華明日日 빛은 밝고 빛나 밤낮이 없네

 

소식양미구蔬食養微軀 나물밥으로 약한 몸을 기르고

포대차환질布袋遮幻質 누더기 옷으로 환의 물질 가리나니

임이천성현任爾千聖現 일천 성인이 나타나건 말건

아유천진불我有天眞佛 내게는 원래 천진 부처 있어라.

 

이처럼 한산시에서는 남종선의 일물사상과의 밀접한 관련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한산시가 선사상에 매우 깊이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일물사상의 시는 풍간에 있어서 더욱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으니

다음 시를 보면 여실하게 알 수 있다.

 

한산시집에는 한산과 풍간과 습득의 시가 함께 실려 있는데 풍간의 시는 2수가 있다.

사실 寒山과 豊干의 시는 서로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사상적인 차이가 없다.

다음은 豊干의 시로서 南宗禪과의 깊은 관계를 잘 알 수 있는 시이다.

 

316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본래에 한 물건이란 물건도 없거니

역무진가불亦無塵可拂 떨어 버려야 할 티끌도 또한 없네

약능료달차若能了達此 만일 이 뜻을 깨달아 안다면

불용좌올올不用坐兀兀 구태여 꼿꼿이 앉을 것도 없느니라.

 

寒山의 사상적 핵심은 역시 그가 가장 크게 정신적으로 뿌리를 내린 禪思想이라고 하겠다.

一物思想은 南宗禪의 독특한 사상이다.

 

위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일물사상은 南宗禪의 중심 사상으로

神會에 의해 확립된 사상이며 후에 선종에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

 

이와 같이 寒山은 깊게 남종의 禪思想을 영향 받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때로는 一物이 天然物로 나타나기도 한다.

다음 시를 보자.

 

157

가귀천연물可貴天然物 아아 귀하여라 천연의 물건이여

독일무반려獨一無伴侶 홀로 하나이어서 짝이 없어라

멱타불가견覓佗不可見 그를 찾아보나 볼 수는 없고

출입무문호出入無門戶 들어가고 나오는데 문이 없구나

 

촉지재방촌促之在方寸 이것을 모아 쥐면 방촌에 들고

연지일체처延之一切處 이것을 뻗쳐 놓으면 없는 곳 없네

이약불신수爾若不信受 그대 만일 이것을 믿지 않으면

상봉불상우相逢不相遇 서로 만나더라도 만나지 못하리라.

 

이 한 물건은 홀로 짝할 것이 없으며 찾아도 드러나지 않으며 출입에도 문이 없다.

세상에 없는 곳이 없으나 모으면 바늘구멍보다도 작은 것이다.

이를 믿지 않으면 만나도 서로 알 수가 없다.

 

이러한 사상은 바로 一物思想과 맥을 같이 한다고 하겠다.

다음의 시 역시 마찬가지로 남종선과의 관계를 드러내주고 있다.

 

259

본지모도륜本志慕道倫 본뜻은 도의 벗을 그리워하나니

도륜상획친道倫常獲親 도의 벗은 언제나 친할 수 있다

시봉두원객時逢杜源客 때로는 근원을 막는 사람 만나고

매접화선빈每接話禪賓 매양 선 이야기의 손을 대한다

 

담현월명야談玄月明夜 달 밝은 밤에는 깊은 진리 이야기하고

탐리일임신探理日臨晨 해 뜨는 새벽에는 도를 찾는다

만기구민적萬機俱泯寂 모든 마음 모조리 자취 멸하면

방식본래인方識本來人 본래의 사람을 비로소 아나니.

 

위 시는 한산시중에서 드물게 선과의 관계를 나타내주고 있으며

상당히 철학적인 냉용을 담고 있는 시이다.

 

본래인의 사상은 남종선의 사상을 나타내주고 있다.

여기서 한산이 선객을 손님으로 맞이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을 밝히고 있다.

 

다음은 그의 禪詩와 연관이 깊은 祖師禪에 대하여 살펴보고

과연 어떤 사상적 맥락이 있는지 알아보자.

 

<능가경>에서 설한 一字不說이나 指月의 손가락의 교시는 교묘하게도

중국의 사유가 산출시킨 득어망전得魚忘筌이라는 道生의 頓悟說과 종합되어

달마의 <二入四行論>의 二入이나 적교오종籍敎悟宗의 설법과 함께 전개 되었다.

 

神會는 달마로부터 시작되는 중국선종의 본질적인 전통을 <능가경>의 여래선을 가지고

南宗禪의 내증을 주장하고 있으며

마조도일은 <능가경>의 불오심을 종으로 하는 새로운 祖師禪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선종 초기에 있어 <능가경>의 수용은 마조를 경계로 하여 새로운 세대로 옮겨가고 있다.

남종선의 발전은 조사선에 이르러 완성을 보게 되는데 조사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더할 나위 없이 馬祖라 할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마조는 바로 조사선의 기치를 드러낸 인물이며

그의 사상은 한마디로 平常心是道라고 할 수 있다.

그의 祖師禪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시를 보자.

 

94

증사의작반烝砂擬作飯 모래를 삶아 밥을 지으려 하고

임갈시굴정臨渴始掘井 목이 마르자 비로소 샘을 파네

 

용력마록전用力磨㼾甎 아무리 애써 기왓장을 갈아도

나감장작경那堪將作鏡 끝내 거울은 되어 지지 않나니

불설원평등佛說元平等 부처님 말씀에 원래 평등하여

총유진여성總有眞如性 모두 진여성이 있다고 하셨네

 

단자심사량但自審思量 다만 안으로 자세히 생각하고

불용한쟁경不用閑爭競 함부로 다투어 밖으로 닫지 말라.

 

위 시는 祖師禪의 중요한 위치에 있는 馬祖와 南嶽과의

깨달음의 기연을 담은 고사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을 보아 이미 祖師禪이 상당히 보편화되었음을 알 수 있고

한산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보여 진다.

 

다음의 시도 그가 祖師禪에 연관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 볼 수 있다.

祖師禪에서 話頭를 들되 모기가 쇠로 된 소의 등에 올라 타 빠는 것처럼 온 몸의 힘을 다 하여

話頭를 의정으로 몰고 가면 자연히 깨달음의 계기가 온다고 하는 말을 그의 시에서도 볼 수 있다.

 

62

약인봉귀매若人逢鬼魅 비록 그대 귀신을 만나더라도

제일막경구第一莫驚懼 첫째로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날경막채거捺硬莫采渠 그를 꼭 잡으려고 하지도 말라.

호명자당거呼名自當去 그 이름 부르면 스스로 떠나리라.

 

소향청불력燒香請佛力 향불을 살라 부처님 힘을 빌고

례배구승조禮拜求僧助 예배를 드려 스님의 도움을 구하라.

문자정철우蚊子釘鐵牛 마치 모기가 쇠로 된 소를 찌르듯

무거하취처無渠下嘴處 거기에 주둥이 댈 곳이 없으리라.

 

모기가 쇠로 된 소를 빨듯 하라는 이 소식은

말길이 끊어지고 이치의 길 또한 끊어진 조사선을 나타내는 것이다.

 

위 시는 단순한 시가 아니라 선의 格外의 소식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格外의 정신을 話頭 공부하는데 직절하게 가르치고 있다.

 

모기가 쇠로 된 소의 등에 앉아 부리를 박고 빨다 보면 몸 통째로 쑥 들어가는

소식이 있음은 주둥이 댈 곳이 없는 데서 참으로 살아나는 본분 소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산의 시세계에 나타나는

선사상은 남종선과 깊이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靑山 白雲의 象徵構造

 

寒山의 詩世界에서 가장 보편적인 상징 언어를 든다면 청산과 백운을 들 수 있다.

한산시에서 청산 백운은 어떤 상징구조를 갖고 있는 것인가?

 

寒山은 많은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寒山은 天台山중에 있는 寒山이 살았던 바위일 수도 있고, 寒山 그 자신일 수도 있고,

또 깨달음으로 향하는 목표라고 볼 수도 있고, 어떤 은사의 은거하는 행위를 지칭한다고

볼 수도 있으니 실로 寒山이 상징하는 바는 대단히 많은 포괄성을 갖고 있다.

 

寒山子는 寒山을 통하여 깨달음을 상징하고자 한다.

그는 頓悟의 입장에 서있으며 寒山을 오름은 곧 깨달음에 나아가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한산이 도달한 경지는 보통사람이 오르기에는 몹시 험준하다.

겨울에는 흰 눈이 나무에 꽃 피고 항상 구름이 뒤 덮혀 있는 것이다.

 

때로는 비가 내리기도 하여 곱게 채색이 아름답지만

맑은 날이 아니면 사람이 오를 수 없는 것이다.

 

이같이 한산에 오르는 길은 여러 가지 상징을 갖고 있다.

다음 시를 보면 이러한 상징이 잘 드러난다.

 

150

한산다유기寒山多幽奇 한산은 몹시 깊숙하고 험준해

등자개항섭登者皆恒攝 오르는 사람 모두 언제나 저어하네

월조수징징月照水澄澄 달이 비치면 물은 차거이 맑고

풍취초렵렵風吹草獵獵 바람이 불면 잎은 떨어 스산하다.

 

조매설작화凋梅雪作花 마른 매화 덩굴에는 눈이 꽃을 붙이고

올목운충엽兀木雲充葉 꺾인 나뭇가지에는 구름이 잎을 단다.

촉우전선령觸雨轉鮮靈 가끔 비를 만나면 산 빛 더욱 곱지만

비청불가척非晴不可陟 맑은 날이 아니면 오르지 못하나니.

 

이와 같이 한산은 도를 닦는 마음으로 상징되어 시 속에 표현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역시 마찬가지로 白雲도 이런 상징성을 띄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의 시에서 白雲에 대한 이미지는 초월적인 상징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다음 시도 그러한 상징을 읽을 수 있게 한다.

 

237

시인심운로時人尋雲路 세상사람 구름길 찾고 있건만

운로묘무종雲路杳無踪 구름길 아득하여 자취 없나니

산고다험준山高多險峻 산으로 가랴 산은 높아 험하고

간활소영롱澗闊少玲瓏 강으로 가랴 강은 넓어 흐렸네

 

벽장전겸후碧嶂前兼後 푸른 뫼 뿌리 앞뒤로 막아 있고

백운서부동白雲西復東 흰 구름은 동서로 흘러 도네

욕지운로처欲知雲路處 구름길 있는 곳 알고자 하는가

운로재허공雲路在虛空 그 구름길은 저 허공에 있느니라.

 

그에게 있어 白雲은 이와 같이 진리의 길을 말하기도 한다.

상징의 문제는 인간의 삶에 있어 대단이 복잡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寒山詩에 나타나는 여러 상징적 의미 가운데

靑山과 白雲은 寒山의 가장 깊은 정신의 세계를 나타내고 있다.

寒山詩에 나타난 상징 언어 가운데 주로 자연적 사물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산, 바람, 물, 달, 나무, 꽃, 비, 봄 등

주로 자연의 사물을 통하여 심상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그 중에서 靑山과 白雲은 가장 많이 등장하는 말 중에 하나이고

또한 가장 깊은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

 

시어에서 서로 잘 어울리는 것으로 산과 구름은 옛부터 많이 운위 되어 왔다.

그래서 소재끼리 어울리는 것을 보면 산=구름, 산=물, 물=구름, 꽃=봄의 공식성을 볼 수 있다.

 

산과 물은 자연소재 중 제일 많이 나타나는 소재로 자연 소재를 대표하고 있는데

산이 있는 곳에 물이 있고, 물이 흐르는 곳에 산이 있다는 점 에서 산수는 복합소재로 나타난다.

 

선승들이 주로 심산 고찰을 수도장으로 삼고 있는데서

산수의 자연소재를 禪詩에 사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동양의 수행자의 심성 속에 보편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 靑山과 白雲의 이미지이다.

다른 선사의 시에는 靑山과 白雲의 이미지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살펴보자.

太古 스님의 雲山이란 시를 보자.

 

흰구름 속 靑山은 첩첩이 솟고

靑山 그 속에 흰 구름 많아

날마다 구름 산과 벗을 하나니

몸이 편안하니 어딘들 집이 아니리.

 

대체로 白雲은 세 가지 禪詩적인 심상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즉 白雲이 원래 본체가 없는 것이란 점에서

인간을 포함한 일체만물의 본체가 공한 假有임을 나타내고

白雲이 정처 없이 유랑한다는 점에서 無爲無事한 가운데 逍遙自在하는 禪僧의 행적을 나타내며

 

白雲이 희고 깨끗한 본성을 지녔다는 점에서

무심무사의 청정한 선심의 심체를 나타내는 표상이 될 수 있다는 점 등이다.

 

이러한 경지의 白雲은 단순한 자연물이 아닌 선의 관조를 거쳐 나온 자연물인 것이다.

寒山詩에 있어 白雲이 어떤 의미를 띠고 있는지 살펴보자.

 

19

수필태종횡手筆太縱橫 붓을 들면 가로 세로 걸릴 것 없고

신재극괴위身才極瓌瑋 일 꾀하면 두루 통해 뛰어나더니(괴瓌 불구슬)

생위유한신生爲有限身 살아서 기껏 백년을 넘었던가?

사작무명귀死作無名鬼 죽어서 또한 이름 없는 귀신 되네.

 

자고여차다自古如此多 옛부터 이러한 일 많았으니

군금쟁내하君今爭奈何 그대여 그대는 지금 어찌 하려는가

가래백운리可來白雲裡 오라 여기 이 구름 속으로 오라

교니자지가敎你紫芝歌 내 그대에게 자지가를 가르쳐주리.

 

이와 같이 그의 시에서는 세상의 무상함과 무의미함을 말하고

그를 극복하기 위하여 白雲 속으로 오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가 말하는 白雲은 자연의 경계를 뛰어넘어

세속적인 삶의 세계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靑山도 마찬가지로 그에게 있어서는 매우 일상을 벗어난

저 먼 참다운 가치의 세계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238

한산서은처寒山棲隱處 寒山에 깃들어 숨어 사는 곳

절득난인과絶得難人過 세상사람 발자취 끊겨 좋아라

시봉림내조時逢林內鳥 때로는 숲 속의 새들을 만나

상공창산가相共唱山歌 서로 더불어 산 노래 부르네

 

서초연계곡瑞草聯谿谷 아름다운 풀은 시냇가 연해 있고

노송침차아老松枕嵯峨 늙은 소나무 골을 베고 누워 있네

가관무사객可觀無事客 이 일 없는 손은 볼만 하구나

게헐재암아憩歇在巖阿 바위 모퉁이에 비스듬히 누워 있네

 

이와 같이 그에 있어 靑山은 돌아가 의지할 수 있는 곳으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이미 그에게는 靑山과 白雲이 하나로 어우러져 세속을 벗어난 학과 같이 삶을 사는 존재이다.

 

241

자이산간락自羡山間樂 산중의 즐거움을 스스로 원해

소요무의탁逍遙無倚託 아무 의지도 없이 홀로 지나네

축일양잔구逐日養殘軀 그 날 그 날 쇠약한 몸을 기르고

한사무소작閑思無所作 생각은 한가해 번거로움 없네

 

시피고불서時披古佛書 때로는 읽은 불경 뒤적여 보고

왕왕등석각往往登石閣 가끔 수각으로 올라 보나니

하규천척애下窺千尺崖 밑으로 천 길 벼랑 바라보노라면

상유운방박上有雲旁礡 위에는 비껴 도는 구름이 있네

 

한월냉수수寒月冷颼颼 어느새 올랐던가 차거운 달빛

신사고비학身似孤飛鶴 몸은 외로이 날으는 학과 같나니

 

스스로 靑山을 찾아 홀로 도 닦으며 번거로움과

속박을 벗어난 생활을 靑山과 白雲에 비유하여 드러내고 있다.

 

그러기에 그의 삶의 세계는 이미 세속을 벗어나 까마득히 멀리 떨어져 있다.

이미 걸림 없이 하늘을 나는 학과 같이 자유인이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에게는 산은 이 세상에서 제일 귀한 존재이며 보배이어서

더 이상 어떤 것도 비유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미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고 가장 귀한 세계에 들어가 있는

그에게 靑山과 白雲은 둘이 동시에 하나를 이루는 것이기도 하다.

 

244

가귀일명산可貴一名山 아 귀하여라 이름 있는 이 산이여

칠보하능비七寶何能比 일곱 가지 보배인들 어이 여기 겨누랴

송월수수냉松月颼颼冷 솔가지에 달은 걸려 차거운 빛에

운하편편기雲霞片片起 구름 안개는 조각조각 일어나네

 

암잡기중산匼匝幾重山 첩첩이 산은 쌓여 몇 겹이던가

회환다소리廻還多少里 산굽이 돌 때마다 마을이 있네

계간정징징谿澗靜澄澄 산골 개울물은 맑고 고요해

쾌활무궁이快活無窮已 시원하고 유쾌하기 끝이 없어라.

 

산과 구름이 어우러져 이미 하나를 이룬 세계에서

그는 시원하고 유쾌하게 세상의 삶을 훤출히 벗어나 있다.

 

그러면 靑山 白雲이 사원의 생활 속에 어떻게 구체적으로 의미를 갖고 있는지 살펴보자.

사원생활의 중심은 큰방이라고 하는 대중이 공동으로 모여 정진하고 공양하는 곳이다.

큰방의 가운데인 어간을 중심으로 하여 대중들이 좌차에 따라 자리를 정하여 앉는다.

자리를 나누는데 있어 어간을 중심하여 좌측은 靑山이라 하고 우측은 白雲이라 한다.

 

靑山은 체를 상징하고 白雲은 용을 상징하기도 하고 또 靑山은 부동의 모습이요.

白雲은 움직이는 모습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와 같이 靑山과 白雲은 여러 가지의 상징성을 갖고 생활 속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靑山과 白雲은 體와 用을 상징한다.

靑山은 如如不動이요 白雲은 自由自在로 흐른다.

그러기에 절에서 白雲은 禪修行을 하는 雲水衲子를 의미하기도 한다.

 

반면 靑山은 오랫동안 절을 지키며 움직이지 않는 事判을 비유하기도 한다.

물론 이것은 상징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理判과 事判의 형태가 큰 방의 靑山과 白雲을 자리하여

상징적으로 이어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생활 속에 깊이 뿌리 내린 體․用 사상의 변형이라고 볼 수 있다.

 

寒山의 시에서 靑山과 白雲이 한 세계 속에서 잘 어우러져

높은 경지로 고양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시를 살펴보자.

 

그에게 있어 寒山은 모든 것을 초월한 절대 자유의 경지이기에

만물의 體가 되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다음의 시는 그런 경지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282

한산무루암寒山無漏巖 寒山의 이 번뇌 없는 바위여

기암심제요其巖甚濟要 생사 나루 건너는 나룻배일세

팔풍취불동八風吹不動 여덟 바람 불어도 움쩍 않나니

만고인전묘萬古人傳妙 만고에 모든 사람 그 묘를 전해 왔다.

 

적적호안거寂寂好安居 고요하고 한가해 안거에 편안하고

공공리기초空空離譏誚 비고 그윽해 남의 시비 떠났다.

고월야장명孤月夜長明 차고 긴 밤이면 달 더욱 외롭고

원월상래조圓月常來照 때로는 둥근 달빛 한층 정답네

 

호구겸호계虎丘兼虎谿 호구의 도생이나 호계의 혜원

불용상호소不用相呼召 그들 불러 설법하고 웃을 것 없다.

세간유왕전世間有王傳 또 세상에는 임금 스승 있지만

막파동주소莫把同周召 저 주공과 소공에 비기지 말라

 

아자둔한암我自遯寒巖 내 이 한암 틈에 숨어 살 적부터

쾌활장가소快活長歌笑 언제나 쾌활하게 노래하고 웃느니라.

 

이 시의 경지는 모든 세속의 번뇌 망상을 끊은 훤출히 벗어난 경지를 들어내고 있다.

그의 시는 전통적인 운율을 엄격하게 지키지 않는다고

기존의 文學史에서는 열외로 다루고 있으나

그의 시가 보여주는 구어적인 시문은 대단히 훌륭한 것이다.

이처럼 백화문의 시의 전통은 선가의 語錄의 형성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다음 시는 짧게 쓴 3언시로 간결하면서도 산과 구름의 이미지를 아주 잘 나타내주고 있는 시이다

그의 산과 구름이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지를 여실하게 드러내주고 있다.

 

308

아거산我居山 내 산에 숨어

물인식勿人識 아무도 모른다.

백운중白雲中 흰구름 속에

상적적常寂寂 언제나 적적하다.

 

산에 숨어 사는 은자의 삶을 살다 간 寒山이 스스로 아무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는

내면에는 많은 고독과 외로움의 공간이 깔려 있다.

 

그러나 그런 인간적인 한계를 다 극복 하고 그는 의연하게 산과 같이 서 있다.

언제나 흰 구름처럼 자유인으로 적적하게 살아 있는 것이다.

그에게 산은 언제나 돌아가 의지하여 머물 곳이며 흰 구름은 삶의 공간을 채우는 것이다.

 

그래서 靑山은 體요 白雲은 用이 되어

體와 用이 서로 어울려 한 세계를 드러내주고 있는 것이다.

 

體와 用이 하나 되어 이미 모든 생사를 여읜 경지를

간결하게 시로 드러내 寒山의 높은 경지를 말해주고 있다.

 

참으로 생사를 떠난 경지는 그러하고 그러할 뿐이지 달리 무슨 말로 설명할 것인가.

생사해탈을 위해 모든 수행과 정진을 하고 있으며

그는 이미 홀로 언제나 그러하게 생사를 벗어난 경지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그의 시에서 靑山과 白雲은 바로 體와 用의 세계 속에

서로 일치되어 새로운 상징적 구조를 이루고 있다.

 

자연의 세계는 무한한 것이다.

인간이 어떻게 자연을 인식하는가의 문제는 사유의 틀을 어떻게 갖느냐에 달려 있다.

靑山과 白雲이 體․用 의 상징적 세계를 의미하는 데서 새로운 세계관을 발견할 수 가 있다.

다음은 體․用 의 구조를 살펴보자.

 

3. 體․用의 構造

 

寒山詩에 있어 靑山과 白雲이 어떻게 體와 用의 세계에 대하여 상징적 의미를 갖는지를 살펴보자

체용은 본체와 작용으로서 일반적으로는 송대의 유학자들에 의해 쓰여져 철학용어로 되었다.

그런데 당 이전에는 중국문헌에 이런 체용에 관한 자료를 찾아 볼 수 없다.

 

중국에서 體用의 사유가 처음 등장하게 된 것은

아마도 5,6세기경부터 佛敎文獻에 의해서라고 보여진다.

體用의 개념은 순수한 중국적 사상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體用의 논리형식을 정비하고 체계화 시킨 것은 佛敎가 들어온 이후였던 것이다.

 

그래서 體用의 논리는 인도佛敎가 중국에 와서 독자적으로 이룩해낸

사유의 새로운 틀이며 세계와 사물을 인식하는 논리형식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體用의 쓰임이 최초로 보이는 문헌은

梁武帝(502-549년 재위)의 立神明成佛義에서 볼 수 있다.

 

여기서 無明은 體의 위에서 생하고 멸한다고 하며 멸은 용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佛敎문헌에서 體用이 처음 등장한 것은 주지하다시피 僧肇(374-414)에 의해서이다.

 

僧肇는 인도의 大乘佛敎思想의 철학적 대성자인 龍樹의 사상을

본격적으로 硏究하기 시작한 최초의 인물이며 구마라집鳩摩羅什의 제자이다.

 

僧肇의 사상의 핵심은 般若 空의 사상에 바탕하고 있으며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體用相卽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體用의 사상은 본체론적인 생성 또는 변화의 관념을 주체적인 실천의 입장으로 끌어와

현상의 모든 것은 본래적인 무의 작용으로 보는 입장이다.

 

이러한 사상은 그의 <涅槃無名論>에 나오는

物我同根 萬物一體와 같은 정신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僧肇는 <物不遷論>에서 動靜一如를 풀어 말하고 있으며

진리와 세속의 명제 또한 體用의 틀로 되는 것이다.

여기에 用寂 또한 用卽寂 寂卽用 用卽體一이라고 하여 후일 體用論과 일치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僧肇는 중국사상의 고유한 개념과 논리를 갖고

佛敎의 중심사상인 般若思想을 통하여 體用의 논리를 이해시킨 최초의 사람이다.

 

체.용사상의 근거는 <起信論>에 잘 나타나 있다.

기신론의 구조는 一心 二門 三大라고 할 수 있다.

一心에서 二門으로 갈라지고 다시 三大로 나뉘어지는 것이다.

 

일심은 本來淸淨心이고 이 일심을 心眞如門과 心生滅門으로 나누고

眞如門은 다시 두 종류의 진여가 있으니 如實空과 如實不空이다.

이 같은 진여문은 體라고 한다.

 

그리고 生滅門은 다시 染淨生滅과 染靜熏習으로 나누며

염정생멸은 다시 心生滅 生滅因緣 生滅相으로 나눈다.

 

생멸상은 三細 六芻의 相이 있어 相이 된다.

그리고 염정훈습은 用이 된다.

 

이 같은 體用思想은 동양사상의 보편적 사상에 바탕하고 있으니

인간과 자연을 인식하는 사유의 틀로서 매우 광범위하게 깔려 있는 것이다.

 

一心에서 體 相 用의 三大가 나누어지고 이를 體用으로 줄여 말하고 있다.

일심에서 벌어져 이문으로 다시 三大로 내지 重重 無盡의

중생 차별상으로 갈라져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體用思想은 인도불교가 중국에 와서 이룩한 독자적인 논리며 사상이라고 할 수 있으며

중국불교의 여러 종파의 기초를 형성하고 있다.

 

이는 또한 <起信論>의 體․相․用이라는 三大의 조직으로 강력한 이론체계를 강화하게 된다.

기신론의 眞如의 세계가 華嚴에 와서는 현상세계의 근원에 있는

절대적 一者라고 생각하여 현상의 그것의 움직임이라고 이해하였다.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진여의 이해 위에서 중국 선종이 형성 되었던 것이다.

 

體用의 사상은 동양의 사유의 기본을 이루고 있으며 性과 相, 陰과 陽, 理와 事,

能과 所, 主와 客 등으로 대비되는 관계에서 파악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는 더 본질적인 면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반야와 방편, 진제와 속제의 통일은 뒤에 삼론학의 완성자 吉藏(549-623)에 의하여

구체화 되고 體用思想이 더 구체적으로 이론화 되는 것이다.

 

佛敎의 문제 중에 진제와 속제를 나누어 보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때 이러한 二諦의 문제는

서로 상반된 입장에 처할 때 대립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의 문제이다.

 

이는 바로 二元論이 안고 있는 문제이며 오늘날의 현대에서도

아직 문제가 되는 黑白의 논리와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體用의 논리는 바로 이런 이원론의 대립을 해소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體用의 논리는 非二元論的 二元論이라 할 수 있다.

 

非二元論的 二元論이란 둘이면서 동시에 하나인 세계관을 말한다.

이러한 논리는 卽非의 논리라고 할 수 있다.

 

선에서 活發發地의 大機大用의 사상도 이러한 體用思想에 기본 하는 것이며

그 근저에 흐르는 정신도 다름 아닌 體用의 사상에 뿌리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靑山과 白雲이 상징하는 바 體․用의 사상은

동양의 세계인식의 전형적인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다.

 

동양인의 사유구조와 서양인의 사유방식은 살아온 문화풍토의 차이만큼이나 다르다.

이러한 다른 사유구조 속에서 패러다임도 다르게 형성되어 왔다.

 

서구가 늘 이원론적 입장을 취하였다면 동양은 반 이원론적인 태도를 보여 왔다.

대체로 그 흐름이 위와 같이 이원론적인 서구에 대하여 동양은 반 이원론적이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 바로 동양은 이원론을 극복하기 위하여

어떻게 노력하고 논리를 펼쳐 왔는가를 우리는 정확히 알 필요가 있다.

적어도 동양 특히 佛敎에서는 이원론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던 것이다.

 

동양의 體用의 논리에 바탕한 이 사유의 틀은

이분법적 사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다음의 시는 寒山의 體用思想을 잘 드러내고 있는 시이다.

 

221

상문석가불常聞釋迦佛 내 들으니 석가모니 부처님

선수연등기先受燃燈記 일찍이 연등 부처님의 수기를 받았다네

 

연등여석가燃燈與釋迦 그러나 연등 부처님 석가모니 부처님

지론전후지祗論前後智 다만 그 지혜의 앞뒤를 말한 것뿐

전후체비수前後體非殊 앞뒤의 근본은 다른 것 아니거니

이중무유이異中無有異 다른 것 가운데 다름이 없느니라

 

일불일체불一佛一切佛 한 부처는 곧 모든 부처라

심시여래지心是如來地 마음이 바로 여래의 땅이니라.

 

寒山詩에 있어서 자연은 인간과 대립된 관계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그 이전의 본래 순수한 상대적으로 나뉘어지기 이전의 자연인 것이다.

그러기에 그에게는 體와 用이 둘이되 하나이며 하나이되 둘인 세계이다.

 

靑山은 그에게는 영원의 저 본질적 세계이며 동시에

그 세계는 白雲과 더불어 어울려 자연을 이루고 있다.

 

자연에서 靑山과 白雲이

서로 어울릴 때 참으로 진정한 자연의 본래 모습 스스로 잘 조화를 이루게 된다.

그는 자연 속에서 마음의 안심입명을 얻고 세상의 헛것에 팔리지 않기를 가르치고 있다.

그의 시에서 靑山은 白雲과 서로 짝을 이루며 자연과 조화된 하나의 세계를 나타내고 있다.

 

2

重岩我卜居 층층 바위틈이 내가 사는 곳

鳥道絶人跡 다만 새 드나들고 인적은 끊어졌다.

庭際何所有 좁은 바위 뜰 가에 무엇이 있나.

白雲抱幽石 그윽히 돌을 안은 흰 구름만 감돌 뿐

 

住玆凡幾年 내 여기 깃든지 무릇 몇핸고

履春易冬易 봄 겨울 바뀜을 여러 번 보았네

寄語鍾鼎家 그대 부자들에게 내 한말 부치노니

虛名定無益 헛된 이름이란 진정 헛 것 뿐이니라.

 

寒山은 산과 물을 의지하여 마음의 일탈된 경지를 아래와 같이 노래하고 있으니

그에게서는 靑山과 白雲은 자연의 청정한 나툼이며 동시에 한 세계를 들어내 주는

진리 당체이기도 하고 體와 用의 다른 표출이기도 한 것이다.

 

본래 體와 用은 둘이 아니다.

본질의 세계를 현상적으로 나타내 설명하려는 입장에서 생각하다보니

體와 用으로 나누어 말하게 된 것이다.

 

이 세상은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으로 파악하여 不變과 隨緣으로 설명하는 것은 본질과

현상을 하나로 보되 동시에 변화하는 현상에 대하여도 분명히 수용하려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마음을 主로 삼고 육체를 從으로 삼는 것으로 파악할 수 도 있다.

자연현상에 있어서도 변화하는 현상의 이면에는 변화하지 않는 영원의 모습이 존재하는 것이다.

 

사시의 계절이 변하여가지만 영원한 시간의 영속성에서 보면

변화의 속에는 변함없이 흐르는 불변의 사계절의 모습이 내재하고 있다.

 

마치 손톱이 계속 자라면서 변화를 하고 있지만

그 손톱의 형상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과 같다.

 

이러한 것은 만물의 모든 면이 다 함께 갖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상의 가장 완벽한 논리를 八不中道에서 볼 수 있다.

 

불생불멸不生不滅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불상부단不常不斷 단절도 아니고 상주도 아니며

불일불이不一不異 일의도 아니고 다의도 아니며

불거불래不去不來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 희론이 적멸하여 길상한 연기를 설하신 정각의 불타께

설법자 중에서 최승의 분으로서 나는 예경합니다.

 

본래의 세계는 생함도 없으며 멸함도 없고 그래서 영원한 본래의 세계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궁극적인 본질의 세계와 현상의 세계가 둘이면서

동시에 하나인 그러기에 둘도 아니요 하나도 아닌 것임을 드러내주고 있다.

 

참으로 나타낼 수 없는 진리를 부정의 논리로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

八不中道의 논리라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中道에 입각한 體用의 논리인 것이다.

 

그러면 선종에서는 體.用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선종의 입장에서 體用의 사상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南宗禪의 宗祖인 慧能의 단경에는 體用의 사상을 활달하게 드러내고 있다.

 

善知識 定惠 猶如何等 선지식들아 정과 혜는 무엇과 같은가?

如燈光 등불과 그 빛과 같으니라.

有燈卽有光 등불이 있으면 곧 빛이 있고

無燈卽無光 등불이 없으면 곧 빛이 없으므로

燈是光之體 光是燈之用 등불은 빛의 몸이요 빛은 등불의 작용이다.

 

卽有二 體無兩般 이름은 비록 둘이지만 몸은 둘이 아니다.

此定惠法 亦復如是 이 정․혜의 법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이처럼 定․慧는 불교사상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바

이 둘은 또한 동시에 둘이면서 하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체와 용이 둘이면서 하나이듯이 같은 구조로 볼 수 있다.

체용에 대한 단경의 다음과 같은 말도 둘이 아닌 세계를 분명히 설명하고 있다.

 

진여시념지체眞如是念之體 시념진여지용是念眞如之用

진여는 생각의 체요 생각은 진여의 용이다.

 

성기념性起念 수즉견문각지雖卽見聞覺知 불염만경이상자재不染萬境而常自在

그리고 생각이 일어나 보고 듣고 알지만 모든 경계에 물들지 않고 항상 자재하다.

 

정혜유여하등定慧猶如何等 여등광如燈光 유등즉유광有燈卽有光 무등즉무광無燈卽無光

정과 혜는 등과 빛과 같으니 등이 있으면 빛이 있고 등이 없으면 빛이 없다.

 

등시광지체燈是光之體 광시등지용光是燈之用

그래서 등은 빛의 체요 빛은 등의 용이라고 하고 있다.

 

등과 빛을 예로 들어 體와 用의 관계를 명료하게 설명하여 주고 있다.

진여와 생각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이다.

禪家에서도 마찬가지로 體.用을 不異로 보고 있다.

이러한 선가의 不二思想을 요약해서 잘 설명하고 있는 것이 普照의 <眞心直說>이다.

 

용은 체를 떠나지 않고 체는 용을 여의지 않아 다르지 않다.

물의 습한 성질이 체가 되어 움직이지 않으며 파도는 상이 되어 바람 따라 일어나니

물은 성이 되고 파도는 상이 되어 움직이고 움직이지 않음이 하나가 아니다.

 

그러나 파도 외에 물이 없고 물 밖에 파도가 없으니 젖는 성질은 하나이기에 다르지 않다.

체 용의 하나이되 다른 것을 이로 미루어 짐작하여 알 수 있으리라.

 

이와 같이 體와 用은 서로 하나이면서 동시에 다른 양면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마치 서구의 입장에서 보면 현상과 본질과의 관계를 나타내고 있으나

근본적으로 그 틀은 같다고 볼 수 없다.

 

물리현상에서도 빛의 현상이 파동과 입자의 양면성을 갖고 있는 것에 대비시켜 이해할 수 있다.

다음 시는 용의 입장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44

부물유소용夫物有所用 대개 물건은 쓸 곳이 있고

용지각유의用之各有宜 그것을 씀에는 마땅함이 있나니

용지약실소用之若失所 그 쓸 곳을 잃으면

일궐부일휴一闕復一虧 하나는 놀고 하나는 모자란다

 

원착이방병圓鑿而方柄 둥근 구멍에 모난 말뚝 박는 것

비재공이위悲哉空爾爲 아아 그것은 부질없는 일이어라

화류장포서華留將捕鼠 준마가 쥐를 잡으려 해도

불급파묘아不及跛猫兒 그것은 고양이에 미치지 못하니라.

 

모든 물건은 용이 적절한 것이 있어서 그에 맞게 써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쥐를 잡는 데는 천리를 달리는 준마보다 고양이가 훨씬 유용한 것이다.

 

이처럼 체는 하나지만 용은 모든 존재마다 달리하여 나타남을 드러내고 있다.

體用의 사상은 서양의 이분법적인 사유와는 달리

동양의 보편적 사상으로 사유의 독특한 틀을 보여주고 있다.

 

寒山이 바라보는 인간의 삶과 죽음은 어떤가?

그의 달관의 경지를 보여주는 시가 있다.

 

97

욕식생사비欲識生死譬 나고 죽음 관계를 알고자 하면

차장빙수비且將氷水比 물과 얼음 비유로 설명하리라.

수결즉성빙水結卽成氷 물이 얼면 곧 얼음 이루고

빙소반성수氷消返成水 얼음 녹으면 도리어 물이 된다.

 

이사필응생已死必應生 이미 죽었으면 반드시 날 것이요.

출생환부사出生還復死 이미 났으면 반드시 죽으리니.

빙수불상상氷水不相傷 물과 얼음 서로 해치지 않는 것처럼

생사환쌍미生死還雙美 남과 죽음 모두 다 아름다워라.

 

생사윤회 하는 인간의 삶의 모습을 담담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의 인간관과 인생에 대한 달관의 경지를 잘 드러내 주는 것이다.

 

佛敎에서 體와 用을 얘기 할 때 물과 얼음에 비유하여 말하기도 한다.

물과 얼음 혹은 파도에 비유하여 體와 用을 말 하는 것은 매우 뛰어난 비유라고 할 수 있다.

 

물을 떠나 파도가 달리 없고 파도를 떠나 물이 달리 없는 것이다.

물이 곧 파도요, 파도가 곧 물이다.

 

이것은 둘이면서 동시에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동시에 둘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體와 用의 세계는 서로 한 세계를 떠받치는 두 받침과 같다.

 

생과 사는 본래 하나인 것이다.

생사가 둘이 아니듯 體․用도 둘이 아닌 것이다.

 

體用의 사상은 寒山의 시 속에 담겨 있는 靑山과 白雲으로 상징되는 세계 속에 나타내지고 있으며

이는 非二元論的 二元論으로서 서구의 합리주의적 이원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제시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4. 任運思想

 

寒山詩의 禪思想의 가장 높은 자유자재한 경지는 任運思想으로 나타나고 있다.

任運이란 산스크리트로는 sva-rasena, aatnena 로서 인위를 버리고 하늘에 맡긴다는 의미이며

어떤 이는 사람의 차원을 초월한 이법 일체를 말하기도 한다.

 

郭象의 莊子注에는 任天, 任理, 任自然 등의 말이 보인다.

이는 老莊의 무위자연사상에 뿌리한 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불전에는 sva-rasena(자신의 성향에 따라, 자연히),

ayatnena(노력을 요구하지 않고, 자연히)의 역어에 해당된다.

예컨대 번뇌와 지혜가 자연히 계속 일어나는 것을 任運相續이라고 말한다.

 

또한 일반에 일이 이법에 따라서 자연히 어떤 것은 자재하게 존재하고 생기하며

성취하는 것을 任運自爾, 任運自發, 任運自省이라고 말한다.

 

더욱 선문에서는 한어 본래의 의미를 따라서 특히 선정해탈의 경지에 있어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일체를 되는대로 맡겨 방척하고 그 위에 자유자재하게 하는 것을 任運自在라고 말한다.

 

뜨거울 때는 맑고 시원한 솔바람 그림자를 짓고

추울 때는 任運으로 따뜻한 기운을 낸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任運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여 풀기도 하다.

任이란 쉽게는 맡긴다는 의미다.

그러나 그러한 일차적 의미는 끝내 소실되지 않는다.

 

허나 맡긴다에서 맡기어진 모습은 당연히 그러해야 하는 모습의 의미가 나오게 되며

또 이러한 의미로부터 책임이나 기능의 의미가 파생한다.

 

그리고 또 하늘이 맡긴다는 의미에서 한 존재가

그 존재로서 구유하는 덕성, 경향성의 의미가 파생한다.

 

A任B라는 구문에서 동사로서의 任은 A가 B에게 맡긴다.

A가 B에게 B의 덕성을 준다는 의미가 되어 실상

A가 B라는 작품을 탄생 시킨다 A가 B를 창조한다라는 의미가 된다.

 

이런 맥락에서 任運은 運에 맡긴다(任)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여기서의 運은 자유자재로 걸림 없는 경지를 말한다.

 

다음은 寒山의 높은 경지를 가장 잘 드러내주고 있는 시로 예부터 많이 회자되어 온 시이다

이 시에서 일체에 얽매임 없는 任運思想의 경지를 읊고 있다.

 

290

일주한산만사휴一住寒山萬事休 한번 寒山에 들자 만사를 쉬었나니

갱무잡념괘심두更無雜念卦心頭 다시 마음에 이는 잡생각 없네

한어석실제시귀閑於石室題詩句 한가히 돌집 벽에 싯줄이나 끼적이며

임운환동불계주任運還同不繫舟 제대로 맡겨 두어 뜬 배 같구나.

 

그에게 있어 寒山은 이미 모든 만사를 다 쉬어버린 경지이다.

그래서 다시는 마음에 잡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한 경지를 시로 적어 한가롭게 즐기면서

간혹 돌 벽에 적기도 하는 마음의 여유를 보여주고 있다.

그야말로 일체가 다 쉬어서 무위함속에 그대로 여여한 것을 즐기고 있다.

 

바로 이러한 자유자재한 경지를 배를 매어두지 않고 그대로 풀어놓아

스스로 임의대로 흐르게 하는 경지에 비유하여 任運이라고 읊고 있다.

 

이러한 경지를 任運騰騰하고 騰騰任運 하며 任運自在하다고 한다.

모든 것은 자연의 법도에 맡겨 걸림 없이 자유자재한 경지야말로

한산의 任運思想이 나타내는 최고의 경지라고 할 것이다.

다음 시에서도 이런 한산의 임운자재한 자유의 경지를 잘 엿볼 수 있다.

 

160

월자거한산粤自居寒山 내 한산에 산 지

증경기만재曾經幾萬載 일찍 몇 만년을 지내었던고

임운둔림천任運遯林泉 세월에 맡겨 임천에 숨고

루지관자재樓遲觀自在 한가한 대로 자재를 관하네

 

한암인불도寒巖人不倒 쓸쓸한 한암에 사람의 자취 없고

백운상애체白雲常靉靆 흰구름만 항시 느릿거리네

세초작와욕細草作臥褥 부드런 풀로 깔개 삼나니

청천위피개靑天爲被蓋 푸른 하늘은 덮개 되어라

 

쾌활침석두快活枕石頭 시원스레 돌베개 베고 누워

천지임변개天地任變改 천지의 돌아감에 맡겨 두노라.

 

한가로이 자연 그대로 맡겨두고 살아가는

한산의 경계는 천지와 더불어 하나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구름 끼면 낀 대로 바람 불면 부는 대로 세상에 맡겨

자재를 관하고 있으니 세월이 얼마나 지나갔는지 모르는 것이다.

다음 시 또한 이러한 자유 자재한 경지를 나타내고 있는 시아다.

 

337

자소노부근력패自笑老夫筋力敗 우습구나 이 늙은이 근력이 다해

편연송암애독유偏戀松巖愛獨遊 숲속을 그려 혼자 놀기 사랑하네

가탄왕년지금일可歎往年至今日 한심스러워라, 옛부터 오늘까지

임운환동불계주任運還同不繫舟 제대로 맡겨 뜬 배처럼 지났구나.

 

여기서도 任運의 어귀를 쓰고 있다.

그러나 약간 부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지만 결국 任運의 본뜻은 충실히 함축하고 있다.

 

50

오심사추월吾心似秋月 내 마음은 가을 달

임운조무방任運照無方 온 세상 차별 없이 모두 비추네

만상영현중萬相影現中 삼라만상 제 그림자 절로 나타나

교광독로성交光獨露成 눈부신 광명이 절로 드러나네

 

寒山은 위의 시에서도 역시 任運이라는 어귀를 쓰고 있다.

 

永明延壽도 그의 <山居詩集>에서

<임운등등무소의任運騰騰無所依 한유장좌성이이閒游長坐性怡怡>

라고 읊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任運思想은

선가의 중요한 깨달음에 이른 무애자재의 경지를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石屋淸供의 任運思想을 나타내고 있는 시이다.

석옥은 고려 太古의 스승이기도하다.

그 또한 山居詩를 남기고 있다.

 

자각종전세념경自覺從前世念輕

노래임운락한정老來任運樂閒情

망혜죽장춘삼월芒鞋竹杖春三月

지장매화몽오갱紙帳梅花夢五更

 

任運思想은 寒山의 자유정신을 나타내고 있다.

寒山의 절대적 자유자재의 세계는 이처럼 任運思想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다음 시 역시 寒山의 任運 사상을 잘 드러내는 시이다.

 

271

한산유백운寒山唯白雲 寒山에는 다만 흰구름 뿐인가

적적절애진寂寂絶埃塵 고요하고 그윽해 티끌을 버렸네

초좌산가유草坐山家有 풀 자리는 이 산 집의 살림

고등명월륜孤燈明月輪 외로운 등불은 밝은 달이 대신하네

 

석상임벽소石牀臨碧沼 돌 평상은 푸른 늪에 다달았고

호록매위린虎鹿每爲隣 호랑이 사슴은 언제나 벗이 되네

자선유거락自羨幽居樂 그윽히 살기를 스스로 즐겨 해

장위상외인長爲象外人 길이 형상 세계의 바깥사람 되나니.

 

그윽이 살기를 스스로 즐겨 해 길이 형상 세계의 바깥사람 되나니

‘자선유거락自羨幽居樂 장위상외인長爲象外人’

라고 읊고 있는 寒山의 경지는 무애자재한 任運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

 

이 시 역시 자연 속에서 흰구름과 숲을 의지해 산속의 짐승들과

벗 삼아 유유자적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이러한 경지를 그는 형상 세계의 바깥이라고 말하고 있다.

 

습득에 있어서도 임운 사상은 마찬가지로 잘 나타나 있다.

습득의 시를 통하여 임운 사상을 보자.

 

330

아권출가배我勸出家輩 내 권하노니 집 떠난 이여

수지교법심須知敎法深 모름지기 교법의 깊음을 알라

전심구출리專心求出離 번뇌를 떠나기에 마음을 오로지 해

첩막염탐음輒莫染貪淫 부디 탐욕과 애정에 물들지 말라

 

대유속중사大有俗中士 저 세속에도 큰 선비 있어

지비불수금知非不受金 그릇됨을 알아 금을 받지 않았나니

고지군자지故知君子志 그러므로 알라 군자의 뜻을

임운청부침任運聽浮沈 잘되고 못되는 것 이치에 맡기나니.

 

任運思想은 寒山의 높은 정신세계를 잘 나타내고

禪思想과 詩를 조화롭게 일치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寒山詩에서 任運이라는 어귀가 많이 쓰이고 있지는 않으나

任運思想은 寒山詩의 근본을 이루는 매우 중요한 禪思想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진정한 解脫의 세계를 한산은 任運의 境地로 自由自在하게 살아갔던 것이다.

 

5. 自然觀

자연관이란 인간이 자연을 보고 대하는 견해와 방법, 그 관점을 말한다.

寒山이 바라보는 자연관은 어떤 것인가?

 

인간은 자연 속에서 살아가면서 어떤 형태로든지의 자연에 대한 인식을 갖고 살아간다.

이런 점에서 寒山 역시 나름대로의 자연관을 갖고 있다고 본다.

 

특히 그는 天台山에 은거하여 살면서

인간과 자연을 어떻게 이해하였는지 그의 시를 통하여 살펴보자.

물론 그의 자연관 역시 佛敎的 자연관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음은 사실이다.

 

佛敎의 자연관은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가?

세계인식에 있어서 佛敎는 그 바탕을 緣起的 認識論에 입각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세계와 자아, 인간과 자연을 바라보는 입장에서

佛敎는 어디까지나 연기적 입장에서 본체와 현상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계는 無情物의 器世間과 깨닫지 못한 중생들이 사는

衆生世間 깨달음의 세계인 智正覺世間으로 나누어 말한다.

 

본체계와 현상계의 생성원인과 그 존재 및 변화 양상,

그리고 이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그 당체로서의 자연에 대한 관념은 달라진다.

 

일체의 만유제법은 오로지 인연 생기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실체가 없는 것이며 항상 됨이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일체는 無我이며 無相이며 無一이며 無主宰이다.

 

따라서 이를 공이라 한다.

공은 없다 아니다의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有와 無,

실체와 실재, 원리와 현상의 양극을 포괄 통합한 일원적 이치를 말한다.

 

이와 같은 차원에서 본다면 본체가 곧 현상이요,

현상이 곧 본체이기에 본체와 현상은 상즉의 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자연이라 하는 것도 본체와 현상의 구별되지 않는다.

 

진심은 우주만유의 본원이며 본체이다.

여기에서 중중무진의 연기가 전개되어 나간다.

여기서는 主客이 있을 수 없고 現像과 本體가 따로 없다.

眞俗一如 物我一體의 경지이다.

 

佛敎의 자연관은 이러한 토대위에서 성립된다.

삼라만상은 眞如一心의 나타남이기에 객관적 대상이 아닌 나와 동일체다.

 

자연은 바로 나의 전체요, 나는 또한 자연 그 자체이다.

나는 자연과 대립되지 않으며 일체가 되어 서로 순화된 경지로 승화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볼 때 자연은 그대로 本地風光이다.

 

그러기에 모든 존재는 成, 住, 壞, 空의 커다란 순환의 연기법에 의해 생성되고

변화되고 소멸되며 마침내 허공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반복하여 존재의 순환을 계속 하는 것이다.

 

이것이 연기적 순환론이라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자연관의 가장 완벽한 논리는 4제 8정도 12연기론이라고 할 수 있다.

 

禪詩는 단순한 관념시나 철학시의 단계를 넘어서 자연과의 교감을 통한

禪詩一如의 경지에서 서정적인 자연시를 산출하기도 한다.

 

禪詩에 나타난 자연관은 여기서 간취된다.

寒山이 보여주는 자연관의 경지는 바로 이러한 경지임을 알 수 있다.

 

247

반타석상좌盤陀石上坐 홀로 너럭바위 위에 올라앉으면

계간냉처처谿磵冷凄凄 개울물 소리 차거이 그윽해라

정완편가려靜玩偏嘉麗 고요히 둘러보면 못내 아름다운데

허암몽무미虛巖蒙霧迷 바위 골짜기에는 실구름 헤매이네

 

이연게헐처怡然憩歇處 호젓이 앉아 그윽히 즐기나니

일사수영저日斜樹影低 나무 그림자 해 따라 낮아졌네

아자관심지我自觀心地 내 고요히 내 마음 관하나니

연화출어니蓮華出淤泥 연꽃 한 송이 진흙 속에 피어나네.

 

寒山은 한평생 산에 살면서 산과 더불어 도를 닦았다.

그의 마음에는 이미 인간과 자연이 둘이 아닌 경지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인간의 진정한 세계는 바로 자연과 더불어 하나가 되는 것이다.

 

동양의 자연관은 서양과는 달리 순환적이라 할 수 있다.

서양이 직선적인 시간관에 의한 일회적 자연관이라면

동양은 반복되는 시간과 같이 순환적 자연관을 갖고 있는 것이다.

다음의 시는 그의 순환적 자연관을 잘 나타내고 있는 시이다.

 

97

욕식생사비欲識生死譬 나고 죽음 관계를 알고자 하면

차장빙수비且將氷水比 물과 얼음 비유로 설명하리라

수결즉성빙水結卽成氷 물이 얼면 곧 얼음 이루고

빙소반성수氷消返成水 얼음 녹으면 도리어 물이 된다.

 

이사필응생已死必應生 이미 죽었으면 반드시 날 것이요

출생환부사出生還復死 이미 났으면 반드시 죽으리니

빙수불상상氷水不相傷 물과 얼음 서로 해치지 않는 것처럼

생사환쌍미生死還雙美 남과 죽음 모두 다 아름다워라.

 

寒山의 자연관 역시 자연에 대하여 순응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는 이미 생사도 둘이 아닌 것이다.

 

志南의 서문에 이러한 자연관의 태도를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말이 있으니

豊干의 마지막 당부라고 전해지는 때를 따르라(隨時)는 말은

역시 寒山詩에서 나타내는 자연관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寒山의 자연관이 동양의 佛敎的 자연관을 얼마나 잘 나타내고 있는지 알 수 있으며

寒山이 자연을 대하는 태도는

자연과 내가 일여한 속에서 합일 된 삶을 사는 것을 잘 알 수 있게 한다.

여기에는 자연과 인간을 분리시킨 서구의 이분법적 사고의 자취는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자연관이 잘 나타나 있는 시는 그의 시중에 매우 잘 다듬어진 시로 보여 진다.

한산의 자연을 바라보는 입장을 알 수 있는 다음 시를 보자.

 

78

익자익기정益者益其精 더함이란 그 정을 더하는 것이니

가명위유익可名爲有益 그래서야 더함이 있다 할 수 있고

역자역기형易者易其形 바꿈이란 그 형을 바꾸는 것이니

시명위유역是名爲有易 그래서야 그 바꿈이 있다 할 수 있나니

 

능익부능역能益復能易 능히 더하고 또 능히 바꾸면

당득상선적當得上仙籍 신선의 장부에 실릴 수 있지만

무익부무역無益復無易 더함도 없고 또 바꿈도 없으면

종불면사액終不免死厄 마침내 죽음의 화를 면치 못하리.

 

자연은 고정 불변의 무엇이 아니라 늘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변하며 흘러가는 것이다.

그래야만이 자연은 살아있게 된다. 고인 물이 썩듯이 자연도 흐름을 중단하면 죽어버리게 된다.

 

이것이 동양적 자연관이며 한산시의 세계도 이와 같은

동양적 자연관에 충실히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佛敎의 第一義諦는 中道이다.

중도야말로 붓다의 영원한 가르침의 출발이며 동시에 귀결점이다.

 

동양의 사유와 자연관에 있어서도 결국은 이러한 중도적 사유에 입각하여 삶을 사는 것이다.

이점에 있어서 동양적 태도와 서양적 태도는 사뭇 많은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어디까지나 동양은 조화와 화합을 중요하게 여긴다.

서양은 대립적인 태도가 강하게 보인다.

 

이러한 서양의 대립적 태도는 결국 자연과 인간 간에 대립을 낳고

마침내 인간에 의해 정복되어야 할 자연으로 전락되어버리고 말았다.

 

동양의 특히 佛敎的 자연관은 體와 用의 논리처럼 非二元論的 二元論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비이원론적 이원론이란 상대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인식의 틀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여 不二의 논리이며 卽非의 논리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生死가 不二요 有無가 不二요 色卽是空 空卽是色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自性을 철저히 깨달은 경지에서는 인간은 곧 자연과 하나인 것이다.

이 점에서 寒山의 자연관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자연을 파악하는데 있어서 체용의 구조를 통하여 이해 할 때

자연과 인간은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서로 의지하는 관계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패러다임은 서구의 어떤 사유 모델보다도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주기에 적절한 것이라고 보여 진다.

 

이는 인간의 생명의 활발발한 살아있는 모습을 여실히 드러내주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드러낸다는 것은 회복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대립을 뛰어넘어 인간과 자연이 하나를 이루는 세계,

이런 통합성의 논리는 體用의 논리이며 中道의 논리로서만이 가능하다고 본다.

 

佛敎的 자연관의 입장에서 불법의 현현으로서의 자연에 대한 본질의 파악,

일체의 자연현상을 나의 전개로 보는 物我一如의 관념,

그리고 그러한 자연에서의 초탈하고 무애한 자재로운 생활관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하여 禪詩에 나타나는 일체의 자연물은 나와 함께 동일시되어

절대평등의 화합 속에 同體大悲로 한 몸이 되어 나타난다.

 

서양의 대립적 자연관과는 달리 동양의 자연관은 대립을 뛰어 넘어

천지가 둘로 나누어지기 이전의 자연을 함께 하는 것이다.

 

이를 혼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다음의 한산시는 이러한 동양의 자연관과 그 정신을 잘 나타내주고 있는 시이다.

 

70

쾌재혼돈신快哉混沌身 상쾌했어라 혼돈의 이 몸이여

불음부불뇨不飮復不尿 마시지도 않고 오줌도 안 누었네

조득수찬착遭得誰鑽鑿 그 누가 있어 파고 뚫고 하여

인자립구규因玆立九窺 여기에 이미 아홉 구멍 생겼나니

 

조조위의식朝朝爲衣食 날마다 날마다 먹고 입기 걱정하고

세세수조조歲歲愁租調 해마다 해마다 세금 내기 걱정하네

천개쟁일전千箇爭一錢 천 사람이 한 푼을 서로 다투어

취두망명규聚頭亡命叫 머리를 모아 달아나며 부르짖네

 

混沌은 장자에서 유래하는 동양사상의 독특한 성격을 잘 나타내주는 우화이다.

 

어느 때 남해의 왕인 숙과 북해의 왕인 홀이 중앙의 임금 혼돈에게 가서 매우 환대를 받아서

그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둘이 상의하여 혼돈이 눈, 귀, 코, 입 등의 기관이 없음을 보고

보답하기 위해 구멍을 뚫어 여러 기관을 만들어주었다.

그러자 혼돈은 일주일이 못되어 그만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 우화가 의미하는 것은 자연과 생명은 논리와 형식으로 분석하고 재단할 때

생명은 이미 죽어버리고 만다는 것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고 본다.

 

바로 동양적 자연은 유기체적 자연관이라 할 수 있으며

한산의 자연관 역시 이러한 맥락 위에 서 있는 것이다.

 

불교의 자연관은 서양의 경우처럼 자연은 신이나 절대자의 의지에 의하여

창조된 것이 아니고 투쟁이나 정복의 대상은 더욱 아니다.

 

자연은 인연의 화합체로서 그것은 스스로 생성된 것이며

스스로 그렇게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며

항상 되는 것도 없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禪詩에 있어서의 자연관은 결국 唯心的인 空思想에 귀일된다.

 

모든 것은 오로지 일심으로 귀일되며

모든 것은 또한 일심의 나타남으로 존재한다.

 

이러한 眞如一心의 妙用으로서의 다양한 자연현상을

禪詩는 비유와 상징을 통하여 미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결국 禪詩는 이러한 佛敎的 자연관을 자연 관조를 통하여 시적으로 승화시켜 禪味와 자연미를 높은

차원으로 통일하여 禪詩一如의 경지를 이룩하고 있는 점에 그 묘오의 특색이 있다고 할 수 있다.

 

寒山의 자연관 역시 인간과 자연의 문제를 충실히 인식하고 절대 불이의 경지에서

자연을 바라보고 있는 점에서 寒山의 자연관은 중도적 자연관이라 할 수 있다고 본다.

다음 시도 寒山의 자연관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시이다.

 

17

사시무지식四時無止息 사시는 쉬지 앉아

년거우년래年去又年來 해는 갔다 해는 오고

만물유대사萬物有代謝 만물은 바뀌어도

구천무후최九天無朽摧 하늘은 변치 않네

 

동명우서암東明又西暗 동이 밝고 서 어둡고

화락우화개花落又花開 꽃은 졌다 피건마는

유유황천객唯有黃泉客 황천으로 간 사람은

명명거불회冥冥去不廻 아득하게 멀리 가고 돌아올 줄 모르네.

 

위 시에서 보여주듯이 寒山은 圓形的 自然觀을 갖고 있다.

이 시는 이러한 寒山의 원형적 자연관을 잘 나타내주는 시라고 할 수 있다.

윤회하는 생명도 모두 이런 원형사관과 자연관과 같은 맥락이라고 보여진다.

자연은 순환하는 것이기에 인간 또한 그러한 이치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의 순환적 자연관은 불교의 윤회사상과 어울려 하나의 독특한 사상을 나타내고 있으니

다음 시는 그런 한산의 면모를 잘 드러내주고 있다.

 

109

변화계무궁變化計無窮 돌고 도는 변화는 끝이 없어라

생사경불지生死竟不止 나고 죽음 마침내 쉬지 않나니

삼도조작신三途鳥雀身 삼도에서는 이미 새들로도 태어났고

오악용어기五嶽龍魚己 오악에서는 이미 고기들의 몸도 됐네

 

세탁작나누世濁作䍲羺 세상이 흐릴 때는 호양도 됐고(호양 나䍲)

시청위록이時淸爲騄駬 세월이 좋을 때는 준마도 됐네(말 이름 이駬)

전회시부아前廻是富兒 이전에는 일찍이 부자였더니

금도성빈사今度成貧士 이번에는 이 구차한 선비 되었네.

 

위 시는 이러한 윤회사상과 동양의 순환적 자연관이 잘 결합되어 있는 사상이라 할 수 있다.

마침내 한산은 다음과 같은 자연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이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즐기는 이상적 경지라 할 수 있다.

 

202

자재백운한自在白雲閑 흰구름 자재로이 한가롭거니

종래비매산從來非買山 어찌 구태여 돈으로 산을 살거냐

하위수책장下危須策杖 위태한 길 내릴 때는 지팡이 짚고

상험착등반上險捉藤攀 험한 길 오를 때는 등나무 더위잡고

 

간저송상취澗底松常翠 새내 언덕에는 솔이 항상 푸르러라

계변석자반谿邊石自斑 개울가에는 돌이 절로 아롱졌네

우붕수조절友朋雖阻絶 길이 멀어 벗은 비록 끊어졌으나

춘지조관관春至鳥관관 봄이 되면 새들은 즐거이 우네.

 

한산의 자연은 인간이 정복해야 할 대상은 이미 아닌 것이다.

그러기에 구태여 돈으로 살 필요도 없는 것이다.

다만 때가 되면 자연은 질서 있고 아름답게 장식되고 그와 더불어 인간은 즐겁게 사는 것이다.

이것이 한산의 자연과 인간이 하나를 이룬 자연관이라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寒山詩의 禪思想을 살펴보았다.

寒山의 詩世界가 禪思想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음은 그가 詩를 통하여 상징적으로 드러냈던

靑山 白雲이 동양사상의 가장 깊은 정신을 담고 있는 體 用 사상을 상징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이분법적 사고의 극복을 위하여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體用사상이 다시 주목되어야 하는 점을 살펴보았다.

 

아울러 寒山의 禪思想의 독특한 성격은

그의 任運思想에서 잘 엿볼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또한 寒山의 자연관은 자연과 인간이 대립을 극복하는 정신을

잘 나타내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