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조僧肇의 조론肇論
승조僧肇의 조론肇論
도도하게 흐르는 불교사상의 대하大河 격의불교格義佛敎를 넘어서
불교는 인도정신과 중국정신이 합류合流하여 도도하게 흐르는 사상思想의 대하大河이다.
그래서 “동아시아사에서 가장 중대한 문제의 하나는 불교에 의한 중국문화의 변용變容이다”
라고 지적되기도 한다.
우리는 이 두 정신의 대화가 중앙아시아를 가로 지르는 실크로드와 남지나해의 검푸른
파도를 헤치며 오고 간 불교전도자들의 정열과 헌신을 통해서 성취 되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타는 듯한 열기가 가신 사막의 밤하늘 총총히 빛나는 별들을 바라보며
그리고 남지나해의 검푸른 파도를 바라보며 과연 무엇을 생각했을까?
진리의 음성을 전하기 위해 먼 길을 여행해야 했던 그들은
광활한 大氣와 대화를 나누었으며 사막의 모래,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였을 것이다.
무상無常과 영원永遠의 가르침에 눈을 뜬 그들은 이 영혼의 풍경을 조용히 응시하며
붓다의 땅을 순례했으며 새로운 붓다의 시대를 열어갔던 것이다.
4세기경 인도정신과 중국정신의 대화는 한 층 더 활발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시기의 불교이해는 도가道家의 현의玄義,
용어를 차용한 격의格義적인 경전번역과 해석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질적인 인도불교가 한문화薰文化와
중국철학의 두꺼운 장벽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일이었던 것이다.
이 시기의 불교를 격의불교格義佛敎라고 한다.
격의란 “(불교)경전의 중요개념을 외서外書(中國古典)에 의배購配하여 인식하는 것”이다.
불교와 도가는 생명의 근저적인 예지를 지향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지만 아무래도 불교는 해탈의 종교였다.
이 해탈의 가르침을 자연주의적인 도가의 용어로 해석해 봐도
\무언가 석연치 않음을 당시의 불교 학승들은 절감하고 있었다.
도가의 철인哲人들은 어떠한 인위적인 손질에도 오염되지 않는 천지자연天地自然의 흐름 속에
자신들을 해방시키고 유원觸遠한 유무궁遊無窮의 세계로 나아가기를 꿈꾸었다.
그러나 불교는 인간존재에 대한 보다 철저한 반성을 바탕으로
번뇌와 생사윤회로부터의 해탈을 추구하는 종교였다.
불교는 인간의 어두운 숙업宿業과 완전히 개화聞花된 심법心法의 세계를
동시에 응시하는 철인哲人들의 종교였을 것이다.
인류의 대표적인 이 두 예지가 나눈 대화가 바로 격의 불교였다.
격의 불교 그 자체는 인류가 두 번 다시 갖기 어려운 문화접촉 방식의 높다란 수준을 보여준다.
그리고 격의불교는 중국불교사상 그 자체의 거대한 발전을 예비한 전대미문의 실험이었던 것이다.
►철인哲人 승조의 생애
위진남북조(鍵晋南北朝) 약 4백년간 계속된 격의 불교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중국인 자신들의 본격적인 불교해석의 기초를 수립한 혜안慧銀의 불교사상가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승조僧肇였다.
승조(384-414, 374-414)는 쿠마라지바 문하 사철四哲 중의 한 사람으로
그는 인도정신과 중국정신간의 갈등을 예리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승조는 이설異說야 분분한 격의불교의 사상체계가 갖는 문제점을
“옛 성인들 떠나신 지 오래되어 文義多雜하고 경전에 대한 바른 이해가 어렵다”라고 지적한다.
결국 승조의 사상적인 목표는 인도불교와 중국 철학간의 갈등을 화해시킬 수 있는
사상적 원리를 발견하고 불교를 그 자신의 언어로써 표명表明하는 일이 있다.
그 결실이 바로 불멸의 불교고전 <조론肇論>이다.
그러나 승조는 서른 한 살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지금 나의 시선은 승조의 삶과 사상이 표구 되어 있는 불멸의 액자 <조론>에 멈추어져 있다.
짧았던 인생이었던 만큼 그가 남긴 불멸의 액자는 세월이 흐를수록 영롱한 빛을 발한다.
승조는 지금의 섬서성 서안西安시 북서北西지역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은 가난했다.
그래서 서적을 필사수리筆寫修理하는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려야 했다.
그러나 가난으로 인한 이 작업은 승조에게 혜안(醫良)을 열어준다.
그는 서적을 필사수리하면서 맡겨진 경經과 사史를 숙독하고 고전古典에 능통하게 된다.
특히 도가의 심원한 형이상학에 성취해 있었다.
사상가에게 있어 가난이란 무엇일까?
사상가는 그 자신의 사상이 누리게 될 사상적 명예에 대한 보상을 위해서 가난을 피할 수 없다.
특히 고대나 중세 동양에서 혼탁한 정치사회에서 풍을 돌리고 살아갔던
반정치反政治의 사상가들은 가난을 숙명처럼 각오해야만 했다.
가난을 각오하고 고수하는 그들의 안빈락도安貧樂道는 가난을 버티는 사상적 정열로 인정되었다.
나는 승조의 생애와 그의 언어들을 응시할 때마다 그의 예지에 찬
안광眼光과 삶의 질곡을 체험한 젊은 철인哲人의 초상을 느낀다.
그는 4세기경 북부 중국에서 벌어진 五胡十六國의 전란이 몰고 온
살육과 약탈, 기아를 지켜본 고난의 체험자였다.
불교에 대한 승조의 정열은 바로 인세人世에 대한 깊은 절망에서 타오른 것이었다.
우리는 불교와 중국철학이 반복되는 一治一亂의 역사를 체험하고 극복하려는
불굴의 가치관과 의지가 투영되어 있는 종교이며 철학이라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 점이 바로 지적(械)인 사상 이해만으로써는 고전의 완전해독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항상 도가의 서적을 읽던 승조는 말한다.
“아름다운 사상이다.
그러나 죽음과 정신의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충분치 않다.”
그리고 어디선가 구입한 오吳의 삼장三藏 지겸支講이 번역한 <유마경>을 원고 기쁨에 넘쳐
“비로소 사나이 갈 길을 알았다”라고 외친 다음 출가의 삶으로 나아간다.
승조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중국불교사의 年表에 자신의 공간을 남긴 불교의 달인達人들은
모두 중국사상, 예교주의적禮敎主義的 사회체계와 결별을 선언하고 있다.
그들은 국가주의적 예교 즉 공자孔子의 인문주의로 대표되는 스테이트형形 문화의 오염과 허위의
식을 부정하고 불교의 출세간적出世間的인 대하大河에 자신들을 합류合流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 개인적으로 느꼈던 도가 사상의 한계를 이렇게 생각한다.
무심순물無心順願에 의해 순수한 자연의 자족적自足的 상태에 도달하려는
물아일치物我一致의 경지는 어디까지나 체험의 도道였다.
그러나 물物과 아我의 한정限定을 규명하고
그 한정을 초월한 보편지에 대한 논리는 오히려 불교 쪽이 치밀하고 광범위하다.
불교는 물아物我의 한정을 규명하기보다는
물아의 한정을 규정하는 인간의 관념을 부정해 버린다.
그래서 모종삼牟宗三은
“불교는 존재를 부정하기 위한 투쟁(Smlggle for non being)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출가한 승조는 방동方等과 소승의 삼장三藏을 열심히 탐구했다.
조숙했던 그는 이미 20대의 젊은 나이에 타인들이 엿볼 수 없는 경지에 도달한다.
그의 전기傳記는 당시 명예를 다투는 무리들이 그와 논쟁을 했으나 승조는 재사유현才思幽玄,
선담善談으로서 그들을 설복시켰다고 전한다하여 장안長安의 숙유宿橋들과
관외關外의 영언英彦들도 그의 예리한 정신과 변재辯才를 당할 수 없었다.
이와 같은 기사를 읽은 우리는 “아니, 약관 20세에!”라는 의혹을 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의혹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입장일 뿐이다.
옛 동양의 영재英才들은 4살 무렵부터 고전을 익히고
사색하는 철인哲人으로서 교육되었던 점을 상기해야 한다.
그래서 <노자주老子註>와 같은 도가의 전범典範을 남긴 왕필王顆(226-249) 같은 인물 역시
23세의 나이로 요절했지만 그가 쓴 <주역주周易註>는
당대唐代에 이르러 국가고시를 위한 국정교과서로 지정될 정도였다.
출가하여 무한대사유無限大思惟의 법계法界에 발을 내딛은
승조는 명성에 자신의 재능을 팔지 않았다.
자신을 이끌어 줄 스승이 필요했던 그는 당시 감숙성의 고장貼藏에 체재하던
희대의 불교사상가이며 經典佛敎의 완성자 쿠마라지바를 찾아간다.
고수高手들의 세계에서는 우열의 차이가 더욱 분명해지는 법이다.
특히 정신세계에서 한 계단의 차이는 엄청나다.
이점을 절감하고 있던 승조는 배움의 길을 찾아서 중앙아시아의 오지로 달려간 것이다.
오직 쿠마라지바 그 한 사람을 바라보며.
쿠마라지바는 이 젊은 중국인 수재의 재능과 열정에 희망을 걸고 성심껏 가르쳤다.
승조는 쿠마라지바를 통해서 대승불교의 정교한 철학적 체계에 대한 훈련을 쌓았다.
401년 전진前奏의 부견符堅에 의해 쿠마라지바가 장안에 초치招致되자
승조는 스승과 함께 장안에 도착한다.
그 후 승조는 스승이 주재하는 역경사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계 된다.
승조의 원숙한 중국 고전 이해와 문장력은 스승의 역경譯經에 크게 기여했던 것이다.
승조는 401년부터 그가 눈을 감은 414년 동안 동시대의 가장 개성적인 불교 그룹이었던
노산의 혜원慧遠교단과 서신왕래를 하기도 하며 자신의 불교이해를 집약한 <조론>을 쓴다.
413년 스승의 입적을 지켜본 승조는 그 다음해인 414년 <조론>이라는 불멸의 명저를 남기고
그가 응시하던 영혼의 풍경(團景) 속으로 사라진다.
그가 왜 그렇게도 서둘러 자신의 삶을 마감해야 했는지 우리로서는 분명히 알 수 없다.
그러나 409년 그는 유유민劉張民에게 쓴 서신에서 자신의 요절을 예감이라도 한 듯이
“빈도貧道는 병든 몸으로 아름답지 못한 일들이 많을 뿐입니다”라고 썼다.
성종의 어록 <전동록> 권29에는 그가 진왕奏王의 노여움을 사
죽음을 당하기 전 남겼다는 유게(遺偏) 4句가 실려 있다.
진위를 가리기는 어려운 문제이다.
그러나 어쨌든 승조는 인세人世의 악몽惡夢을 몽환夢幻으로 보고 있었을 것이다.
몽환에서 깨어날 수 있다면 죽음이 인생의 족쇄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꿈의 고전 <조론>
<조론>은 어떤 책인가?
탕용동은 그의 <위양진남북조불교사(건량진남란불교사鍵兩晋南爛佛敎史)>에서 이렇게 쓴다.
“승조의 <조론>은 <반야><유마> 둥의 경전과 <중론中論><백론百詢>의 융합을
중국의 論學文體로 쓰고 있으며 인도불교의 명상名相을 분석하고 사수事數를 고르게 배열했다.
그의 저작은 문학상의 혁신일 뿐 아니라
불교와 도가의 정화精華를 가리고 뽑아 찌꺼기를 모두 걸러내고 있다.
승조의 학문적 자질은 실로 필적할 상대를 찾기 어렵다.
인도불교의 중국화는 바로 그의 저작에 의해서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다.(------)
승조는 장자의 사상에서 홀로 깨달은 바가 있었으니 그의 사장은 玄學 유행기의 인식을 대표한다.
승조의 저작은 유려하고 아름다운 문체로써 불교와 도가의 心要를 직달直澾하였으니
중국철학사상 가장 우수한 저작의 하나이다.”
그래서 <조론>은 중국철학과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숙독해야 할 꿈의 고전으로 알려져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론>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을까?
<조론>은 불교의 대의大意를 논하는 〈宗本義〉 운동의 비실재를 논하는 〈물불천론物不遭論〉
존재의 비실체성 즉 부진공不眞空을 논하는 〈부진공론〉
반야의 비언상非言象을 논하는 〈반야무지론般若無論〉
유유민과 승조의 왕복서간인 〈유유민서문〉 〈답유유민서〉
불교의 궁극 열반을 논하는 〈열반무명론〉으로 이루어진 문헌이다.
승조는 〈물불천론〉에서 인간의 지각을 규정하는 시간, 공간의 비실재성을 논한다.
즉 시간과 공간, 물物 그 자체는 인간의 지각을 규정하는 진실한 존재근거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상에 현혹된 인간의 개념적인 착각일 뿐이다.
가령 부동不動을 정靜이라고 생각하는 인간의 개념 그 자체가
그 분석된 개념을 다시 실유화시키는 모순을 낳는다.
그러므로 승조는 물物의 불천, 불거불래不去不來를 설한다.
〈부진공론〉에서 승조는 개념적인 인식에 의한 공空의 체달은 불가능하다고 설한다.
즉 개념이란 분별이며 가명언설假名言說에 의한 방편의 시설이므로 부진不眞인 것이다.
승조는 이와 같은 논의를 통하여 당시 도가의 본체론적인 無와 동일하게 이해되던 불교의 空이란
언식대상의 허망부실뿐만 아니라 그 인식의 비실체성을 지시하는 것이라고 설한다.
승조는 공空의 부진不眞을 다시 개념적으로 실체화시키는
격의 불교의 오류를 지척하고 있는 것이다.
〈반야무지론〉에서 승조는 불교의 반야란
현상계를 단편적으로 인식하여 집착하는 범부의 오염된 지식과는 다른 성지聖智라고 정의한다.
이 〈반야무지론〉을 통해서 표상이나 관념의 가공을 전제로 하지 않는
인도불교의 반야가 깨달음을 표백表白하는 중국적 성지聖地로 변모하게 된다.
이 논의는 후대선종의 돈오설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다.
그리고 이 논문을 원은 쿠마라지바조차
“나의 이해가 그대만은 못하지 않지만 표현방법에서는 따라갈 수 없구나.”라고 평한 名文이다.
〈반야무지론〉의 부록으로 수록된 〈유유민서문〉과 〈답유유민서〉는
노산의 혜원교단에 귀의한 은사慮士 유유민(?-4l0)과 주고받은 왕복서간이다.
유유민은 그 이름처럼 반정치의 세계에서 살다간 망국亡國의 백성이었다(···)
그는 또한 우리가 애호해마지 않는 도화원기와 귀거래혜사(편거래혜소騙去來兮蘇)의 시언
도연명陽淵明(365-427)과 깊은 친교가 있던 인물이기도 하다.
승조, 유유민 ·도연명에게서 우리는 그들의 정신적인 친연관계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열반무명론)은
스승의 입적을 추도하기 위해서 씌어졌을 뿐만 아니라 승조 그 자신의 고별 논문이다.
승조는 이 논문에서 위진남북조의 중국불교가 품었던 이상을 총결산한다.
우리가 여기서 유념해야 할 점은 반야사상에 대해 깊이 천착하던 초기의 승조가
열반의 문제로 관심을 옮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부촉한 지면에 〈조론〉의 심오한 사상을 상세히 그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제 우리는 짧은 삶을 살았지만 동시대의 누구보다도 높고 먼 길을 갔던
젊은 철인哲人 승조를 생각하며 이 글을 끝맺기로 한다./일지스님/각원사불교대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