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론肇論 부진공론不眞空論 ⓶
조론肇論 부진공론不眞空論 ⓶
본질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진여성공이 緣會의 緣起法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단멸의 공이 아님을 논변하여 관찰할 대상인 眞諦의 세계로 하였다.
不眞이란 말에는 2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연회의 유위법은 인연으로 생기기 때문에 假法이며
가법이기 때문에 실제로 존재하지 않고 그 자체는 본래 진여성공인 것이다.
이는 연기의 俗諦는 진실이 아니기 때문에 性空인 것이니
이를 속제의 가법은 진실이 아니기 때문에 성공이라 한 의미로서 不眞空이라 말한다.
그러나 속제의 가법이라 해도 진여성공이 연기하여 일체 차별적인 현상의 만법을 이루었다.
따라서 진여성공이 연기한 그 자체는 정말로 공이 아니기 때문에
진여성공의 진제는 진실한 공이 아니라는 측면에서 부진공不眞空이라 부른다.
둘째는 진여의 성공이 연기한 속제의 유위법은 있다 해도
가법으로 존재해 있기 때문에 實有가 아닌 妙有가 되며 진여성공은
단멸의 공이 아니기 때문에 진제의 측면에서는 實空이 아니라 妙空이 된다.
이것이 眞空卽妙有이고 妙有卽眞空으로서 實有도 아니고 斷空도 아닌 中道第一義諦인 것이다.
妙空의 眞諦로써 <心無論>과 <本無論>의 두 종파를 타파하였고
묘유인 俗諦로써 <卽色遊玄論>의 한 종파를 부정하였다.
그렇다면 不眞空이란 명제는 진제의 성공이 속제의 묘유인 이치를 극진히 하여
眞俗이 둘이 아닌 중도의 종지에 오묘하게 계합하였다 하리라.
이는 승조법사가 현묘하게도 그윽한 중도의 이치를
신령하게 비춰 보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런 경지에까지 이르렀으랴.
부지허무생자夫至虛無生者 지극히 텅 비어 생멸이 없는 중도는
(중도제일의제는 인식의 사량으로 분별할 세계가 아님을 지적하였다)
개시반야현감지묘취蓋是般若玄鑑之妙趣
實相반야의 자체에서 일으킨 觀照반야의 작용으로 현묘하게 조감하여 오묘하게 취향한 곳이며
유물지종극자야有物之宗極者也 유위법인 사물이 종극으로 여기는 것이다.
자비성명특달自非聖明特達 하능계신어유무지간재何能契神於有無之間哉
스스로 성스러운 총명으로 특수하게 통달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계합할 수 있었으랴.
시이지인통신심어무궁是以至人通神心於無窮 궁소불능체窮所不能滯
그러므로 至人은 중도의 무궁한 묘취에 현묘하게 조감하는
관조반야의 신령한 마음을 통하여 斷空(단멸의 공)이 다한 데에 막히지 않고
극이목어시청極耳目於視聽 성색소불능제자聲色所不能制者
방편반야로서 보고 듣는 데에
이목의 종극을 삼아 들리는 소리나 보이는 색깔이 제압하지 못한다.
기불이기즉만물지자허豈不以其卽萬物之自虛
어찌 성인은 만물이 스스로 텅 빈 성공의 실상에 나아감이 아니었겠는가.
고물불능누기신명자야故物不能累其神明者也
그 때문에 지인은 사물이 그의 신명에 누를 끼치지 못하는 자인 것이다.
(神心은 實智반야(실상반야)에서 일으킨 관조반야로
內照함을 말하고. 玄鑑이나 無窮은 중도를 말한다)
시이성인是以聖人 승진심이이순乘眞心而理順 즉무체이불통則無滯而不通
그러므로 성인은 진실한 마음을 타고 만물의 이치를
고르게 순종하면 막히는 곳마다 통하지 않음이 없다.
심일기이관화審一氣以觀化 1眞의 1氣인 진실한 마음에 처하여 현실 만법의 변화를 관찰한다.
고소우이순적故所遇而順適 그 때문에 만나는 사물마다의 이치를 따르며 자적한다.
무체이불통無滯而不通 고능혼잡치순故能混雜致湻
막히는 사물마다 통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異流중생과 혼융하여 一眞의 순일함을 이룰 수 있고
소우이순적所遇而順適 만나는 사물마다의 이치를 순종하며 자적하기 때문에
고즉촉물이일故則觸物而一 부딪치는 사물마다 진실이다.
여차즉만상수수如此則萬象雖殊 이불능자이而不能自異
이와 같다면 삼라만상이 다르다 해도 스스로 차이가 나지 않는다.
불능자이不能自異 고지상비진상故知象非眞象
삼라만상이 스스로 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에
만상의 형상은 진실로 존재해 있는 형상이 아님을 알 수 있으며
상비진상고象非眞象故 즉수상이비상則雖象而非象
만상이 진실한 존재로서의 형상이 아니기 때문에 만상이라 해도 만상이 아니다.
연즉물아동근然則物我同根 시비일기是非一氣
이와 같다면 만물과 내가 동일한 근원이며, 긍정과 부정이 一氣의 중도이다.
잠미유은潛微幽隱 태비군정지소진殆非群情之所盡
이러한 중도의 경지는 그윽하고 은미하여 일반 뭇 중생들이
허망하게 헤아리는 망정으로는 극진히 할 바가 사뭇 아니다.
고경이담론故頃爾談論 그 때문에 요즈음 천박한 지혜로 하열하게 이해를 한 사람들의 담론이
지어허종至於虛宗 매유부동每有不同
허종虛宗에 이르러선 중도의 심오한 이치와는 매양 동일하지 않음이 있는 것이다.
부이부동이적동夫以不同而適同 유하물이가동재有何物而可同哉
그들이 동일하지 않는 담론으로써 大同의 중도로 가려 하나
어떤 사물이 있어 그들과 동일해지겠는가.
고중론경작故衆論競作 이성막동언而性莫同焉
그러므로 여러 사람들의 의론이 다투듯이 일어났으나
실제의 성품과는 동일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즉何則 심무자心無者 왜냐하면 心無宗을 의론한 자는(진나라의 도항이 지은 <심무론>을 타파)
무심어만물無心於萬物 인식의 대상인 만물에 있어서 주관적인 인식의 마음이 없을지언정
만물미상무萬物未嘗無 만물은 일찍이 없는 것은 아니다 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차득재어신정此得在於神靜 실재어물허失在於物虛
이는 주관적인 정신이 고요하여 번뇌가 없는 데서는 옳았으나
사물의 자체가 性空인 데에 있어선 잘못하였다.
(그의 논지는 주관적인 마음은 공하였으나 六境의 세계는 그대로 實有로서 존재한다고 하여
만물은 緣生으로서의 성공임을 알지 못하였다. 이는 중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즉색자卽色者 명색부자색明色不自色 고수색이비색야故雖色而非色也
즉색종卽色宗을 의론한 자는(진나라의 도림이 지은 <즉색유현론>을 타파)
색은 스스로 색이라 여기지 않는다.
부언색자夫言色者 단당색즉색但當色卽色
그 때문에 색이라 헤아린다 해도 색은 색이 아니다 라고 밝혔다.
(단지 사람들이 적황백 등의 색이라고 이름 붙였기 때문에 각자 차별적인 색이 되었음을 말한다.
그 자체는 색이라는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기대색색이후위색재豈待色色而後爲色哉
차직어색부자색此直語色不自色 미령색지비색야未領色之非色也
이는 색이 스스로 색이라고 여기지 않는 것만 직선적으로 말했을 뿐,
색의 자체가 색이 아님을 아직 알지 못하였다.
(그는 緣生의 依他起性에 붙여진 名假만 일렀을 뿐,
의타기성의 자체인 圓成實性을 몰랐기 때문에 올바른 논리가 아닌 것이다)
본무자本無者 본무종本無宗은(진나라 축법태의 본무종을 타파)
정상어무情尙於無 다촉언이빈무多觸言以賓無
정적情的으로 無의 경지를 숭상하여 부딪치는 말마다 無에는 공순하게 복종하는 경우가 많다.
고비유故非有 유즉무有卽無
그 때문에 속제는 연생이기 때문에 실유가 아니다(非有)라고 말하면
속제의 유가 바로 없는 것이다 라고 하며
비무非無 무역무無亦無
진제의 공은 정말로 없는 것은 아니다(非無)라고 하면 없다 한 개념마저 없다라고 한다.
(그는 속제는 연생이기 때문에, 非有라고 말하는 것은 그 자체가 성공이기 때문에
실유가 아니라는 뜻을 모르고 있어도 실은 없는 것이다라고 헤아린다. 斷見의 공에 떨어진 것이다)
심부립문지본지자尋夫立文之本旨者
비유비무非有非無의 논리를 수립한 문장의 근본 종지를 연구해 보자.
직이비유直以非有 비진유非眞有
이는 곧장 非有이고 속제의 사물은 연생이기 때문에 진실하게 존재해 있지 않다 한 것이며
비무非無 비진무이非眞無耳
비무非無는 眞空이면서 妙有이기 때문에 진실 공으로써 없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였을 뿐이었다.
하필비유무차유何必非有無此有 하필이면 非有라고 했다 해서 속제의 유가 없다고 하였겠으며
비무무피무非無無彼無 비무非無라고 해서 진제의 무마저 없다 하였겠는가.
차직호무지담此直好無之談 이는 무를 정적으로 좋아하는 담론일 뿐이다.
기위순통사실豈謂順通事實 어찌 사물 실제의 이치에 순종하고 통하여
즉물지정재卽物之情哉 사물의 실정에 나아갔다 말할 수 있으랴.
부이물물어물夫以物物於物 사물을 사물이라는 명사로 이름을 붙인다면
즉소물이가물則所物而可物 이름을 붙인 사물의 자체는 사물이라 하겠지만
이물물비물以物物非物 사물을 사물이라 한 명칭은 사물의 자체는 아니다.
고수물이비물故雖物而非物
그러므로 사물에 붙인 명칭은 있다해도 그 명칭에서 사물의 실제 모습을 얻지 못한다.
시이물부즉명이취실是以物不卽名而就實
그 때문에 사물의 실제는 사물의 명칭에 나아가서 사물의 실제를 이루지 못하며
명부즉물이리진名不卽物而履眞
사물의 명칭도 사물의 자체에 나아가 사물 자체의 진실을 증험하지 못한다.
연즉진제독정어명교지외然則眞諦獨靜於名敎之外
이와 같다면 진제는 홀로 세간의 명칭이 있는 言敎밖에서 고요하다.
기왈문언지능변재豈曰文言之能辨哉 이를 어떻게 문장과 언교로써 분별할 수 있겠는가.
연불능두묵 然不能杜默 이와 같기는 하지만 나는 말을 아니 하지는 못하고
료부조언이의지復厝言以擬之 부족하나마 다시 논리를 펴서 진제의 경지를 헤아려 보리라.
시론지왈試論之曰 시험 삼아 이를 의론해 보리라.
마하연론운摩訶衍論云 <마하연론>에서는 말하였다.
제법역비유상諸法亦非有相 모든 만법은 연생의 성공이기 때문에 차별적인 모습이 있지 않으며
역비무상亦非無相 성공이지만 연생이기 때문에 모습이 없지도 않다.
중론운中論云 <중론>에서 말하였다.
제법불유불무자諸法不有不無者 모든 법은 연기이기 때문에 實有가 아니고(不有)
제일진제야第一眞諦也 연생이기 때문에 實無도 아니다(不無)
(속제는 假有로서 진실이 아니기 때문에 性空이며
진제는 속제로 緣生을 하기 때문에 정말로 확실하게 단멸한 공이 아니다.
그 때문에 제목을 不眞空이라 한 데는 두 가지 의미를 포함한 것이다.
이는 유무의 상대적인 양쪽을 부정하고 이를 통해 중도를 나타낸 것이다)
심부불유불무자尋夫不有不無者
<중론>에서 ‘실유도 아니고(不有), 실무도 아니다(不無)’라고 한 말을 연구해 보았더니
기위척제만물豈謂滌除萬物 두색시청杜塞視聽
어찌 만물을 씻은 듯이 제거해 버리고 주관적으로는 보고 듣는 것을 막아 버려
적요허활寂寥虛豁 연후위진제자호然後爲眞諦者乎
객관과 주관을 텅 비고 고요하게 한 뒤에야 이를 진제라고 말하였으랴.
성이즉물순통誠以卽物順通 고물막지역故物莫之逆
진실로 사물에 나아가 순통하기 때문에 사물이 그를 거역할 수가 없고
즉위즉진卽僞卽眞 고성막지역故性莫之易
거짓에 나아가서 바로 진실이기 때문에 본성이 변역될 수가 없다.
성막지역性莫之逆 고수무이유故雖無而有
본성을 변역시킬 수 없기 때문에 없다 해도 있으며(정말로 없는 것은 아니다),
물막지역物莫之逆 고수유이무故雖有而無
사물이 거역할 수 없기 때문에 있다 해도 없다.(정말로 있지 않다)
수유이무雖有而無 소위비유所謂非有 있다 해도 없는 것이 이른바 非有이며
수무이유雖無而有 소위비무所謂非無 없다 해도 있는 것이 이른바 非無이다.
여차如此 즉비무물야則非無物也 이와 같다면 사물은 정말로 없는 것이 아니다(단절된 無가 아님)
물비진물物非眞物 물비진물物非眞物 고어하이가물故於何而可物
사물은 진실한 사물이 아니며
사물은 진실한 사물이 아니기 때문에(不眞) 어디에선들 사물이라고 하겠는가.
(有에 나아가서 空을 밝히는 것을 妙空이라 말하고
空에 나아가서 有를 밝히는 것을 妙有라고 말한다)
고경운故經云 그러므로 경에서 말했다.
색지성공色之性空 비색패공非色敗空 색법이 성공이며 색을 부수어서 공한 것은 아니다.
이명부성인지어물야以明夫聖人之於物也
이로써 성인이 사물에 있어서 만물 스스로의 성공에 나아갔음을 밝혔다.
즉만물지자허卽萬物之自虛 기대재할이구통재豈待宰割以求通哉
어찌 만물을 요리하듯 분석하기를 기다려 통하기를 구했으랴.
시이침질유부진지담是以寢疾有不眞之談
그러므로 <유마경>에서는 ‘진실도 아니고 실제 있는 것도 아니다.’한 담론이 있고
초일유즉허지칭超日有卽虛之稱
<초일명삼매경>에서는 ‘사물 자체가 바로 성공이다.’ 한 말이 있다.
연즉삼장수문然則三藏殊文 통지자일야統之者一也
그렇다면 삼장에서 표현한 문장은 다르다 해도 이를 통괄하는 것은 하나의 이치인 것이다.
고방광운故放光云 그러므로 <방광반야경>에서 말하였다.
제일진제第一眞諦 무성무득無成無得 세속제고世俗諦故 편유성유득便有成有得
제일진제는 인연을 떠났기 때문에 성취함도 얻음도 없지만
연생의 세속제는 연생이기 때문에 문득 성취함도 얻음도 있다.
부유득즉시무득지위호夫有得卽是無得之僞號
얻음이 있는 것이 즉시 얻음이 없는데서 얻음이 있다고 거짓 호칭했으며
무득즉시유득지진명無得卽是有得之眞名
얻음이 없는 것이 바로 얻음이 있는 것의 진실한 이름인 것이다.
진명고眞名故 수진이비유雖眞而非有
진실한 이름이기 때문에 진제가 진실이긴 하나 실제로 존재해 있지 않으며
위호고僞號故 수위이비무雖僞而非無
거짓 호칭은(얻음이 있는 俗諦) 거짓이긴 하나 실제로 없지는 않다.
시이언진미상유是以言眞未嘗有 그러므로 진제를 말하면 일찍이 실제로 있는 것도 아니며
언위미상무言僞未嘗無 속제의 거짓 호칭을 말하면 일찍이 없지도 않다.
이언미시일二言未始一 유무有無의 두 가지 말이 애초에 하나는 아니지만
이리미시수二理未始殊 둘이 아닌 이치는 처음부터 다르지 않다.
고경운故經云 고로 경전에 일렀다.
진제속제眞諦俗諦 위유이야謂有異耶 진제와 속제가 다름이 있다고 말하겠느냐,
답왈무이야答曰無異也 답하여 이르되 차이가 없다.
차경직변此經直辯 진제이명비유眞諦以明非有
이 경전에서 곧장 진제를 분별하여 (속제는 있다 해도)실제로 있지 않음을 밝혔고
속제이명비무俗諦以明非無
속제는 (진제가 연생한 것이기 때문에) 없지도 않다는 것을 밝혔다.
기이제이이이어물재豈以諦二而二於物哉
어찌 眞俗 二諦의 말이 둘이라 해서 진속이 둘이 아닌 중도마저 둘로 나누겠는가.
연즉만물과유기소이불유然則萬物果有其所以不有 유기소이불무有其所以不無
이처럼 진속이제가 둘이 아니라면 만물은 정말로 있다 해도
실제로 있지 않은 까닭이 있으며, 없지도 않은 이유가 있다 하겠다.
유기소이불유有其所以不有 고수유이비유故雖有而非有
속제는 있어도 실제로 있지 않은 까닭이 있기에 비록 있다 해도 實有가 아니며
유기소이불무有其所以不無 고수무이비무故雖無而非無
(속제의 假有는) 없지도 않은 까닭이 있기에 진제는 비록 없다 해도 정말로 없는 것은 아니다.
수무이비무雖無而非無 무자부절허無者不絶虛
진제는 없다 해도 정말로 없지 않으므로 없다 해도 단절되어 텅 빈 공은 아니며
수유이비유雖有而非有 유자비진유有者非眞有
속제는 있다 해도 정말로 있지 않으므로 있다 해도 진실하게 있다 한 것은 아니다.
약유부즉진若有不卽眞 무불이적無不夷跡
만일 유의 속제가 진실에 상즉한 실유가 아니라면
진제의 무도 유의 자취를 평평하게 쓸어버리고 나서의 무는 아니다.
연즉유무칭이然則有無稱異 기치일야其致一也
그렇다면 유무의 칭호가 다르긴 하나 중도제로 이르러 간다는 점에서는 하나의 이치인 것이다.
고동자탄왈故童子歎曰 그러므로 동자가 찬탄하여 말하였다.
설법불유역불무說法不有亦不無 이인연고설법생以因緣故說法生
설법은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으나 인연 때문에 모든 법이 발생한다.
영락경운瓔珞經云 <영락경>에서 일렀다.
전법륜자轉法輪者 법륜을 굴리는 것은
역비유전亦非有轉 법륜을 굴림이 있는 것도 아니며
역비무전亦非無轉 법륜을 굴림이 없는 것도 아니다.
시위전무소전是謂轉無所轉 이는 굴려도 굴림이 없는 것을 말한다.
차내중경지미언야此乃衆經之微言也 이것은 모든 경전의 은미한 말이다.
하자何者 왜냐하면
위물무야謂物無耶 즉사견비혹則邪見非惑
사물은 실제로 없다라고 말하면 단견의 빗나간 견해가 미혹이 아니며
위물유야謂物有耶 즉상견위득則常見爲得
사물은 실제로 존재해 있다라고 말하면 상견의 잘못된 견해가 옳기 때문이다.
이물비무以物非無 고사견위혹故邪見爲惑
현상의 만물은 정말로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단견의 빗나간 견해가 미혹이며(여기서는 본무종과 심무종을 정면으로 부정)
이물비유以物非有 고상견부득故常見不得
사물은 실제로 있지도 않기 때문에 상견도 옳지 않다.(여기서는 즉색유현론을 부정)
연즉비유비무자然則非有非無者 신진제지담야信眞諦之談也
그렇다면 비유비무는 진실한 진제의 담론이다.
고도행운故道行云 고로 <도행반야경>에서 말하였다.
심역불유心亦不有 역불무亦不無 심의식心意識은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
중관운中觀云 <중론>에서도 말했다.
물종인연고불유物從因緣故不有 사물은 인연을 따르기 때문에 정말로 있는 것이 아니며
연기고불무緣起故不無 실상의 성공이 인연을 따라 일어나기 때문에 진제는 없지도 않다.
심리즉기연의尋理卽其然矣 이치를 깊이 연구해 본다면 그러하리라.
(제법은 假有의 인연을 따르기 때문에 진실이 아닌 性空의 有이며
진여성공이 현상의 인연을 따라 일어나기 때문에 정말로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진제는 진실한 공[眞空]이 아니다)
소이연자所以然者 이러한 까닭은 (여기부터는 유무가 아님을 논변)
부유약진유夫有若眞有 유자상유有自常有 기대연이후유재豈待緣而後有哉
유가 진실한 유라면 유는 스스로 한결같은 常有인데 어찌하여 緣會를 의지한 뒤에 있겠는가.
비피진무譬彼眞無 무자상무無自常無 기대연이후무야豈待緣而後無也
비유하면 단견의 진실한 무인 그 무는 스스로 常無인데
緣離를 기다린 뒤에 무이겠는가. 유는 그와 같은 것이다.
약유부자유若有不自有 대연이후유자待緣而後有者
유가 스스로의 유가 아니고 연회를 의지한 뒤에 있다면
고지유비진유故知有非眞有 유비진유有非眞有 수유불가위지유의雖有不可謂之有矣
고로 알 수 있는 것은 유가 진실한 유가 아니며
유가 진실한 유가 아니라면 비록 유라 해도 유라 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불무자不無者 부무즉담연부동夫無則湛然不動
‘없지 않다’ 한 것은 정말로 없다면
변화 없이 담연하여 움직이지 않아야만 없다 말할 수 있으며,
가위지무可謂之無 만물자무萬物者無 이처럼 만물이 아예 없다면 만물은 일어나지 않아야만 하며
즉불응기則不應起 기즉비무起則非無 만물이 일어났다면 정말로 없는 무는 아닌 것이다.
이명연기고불무야以明緣起故不無也 이로써 연기를 밝히기 때문에 정말로 없는 실무는 아니다.
고마하연론운故摩訶衍論云 그러므로 <마하연론>에서 일렀다.
일체제법一切諸法 일체인연고응유一切因緣故應有
일체의 제법은 일체의 인연 때문에 응당 있어야만 하며
일체제법一切諸法 일체인연고불응유一切因緣故不應有
일체의 제법은 일체의 인연 때문에 진실하게 있지도 않아야만 한다.
일체무법一切無法 일체인연고응유一切因緣故應有
일체의 無法은 일체의 인연 때문에 응당 있어야만 하며
일체유법一切有法 일체인연고불응유一切因緣故不應有
일체의 有法은 일체의 인연 때문에 진실하게 있지 않아야 한다.
심차유무지언尋此有無之言 기직반론이이재豈直反論而已哉
여기에서 말한 유무의 말을 연구해 보았더니
어찌 유무가 상반되는 논리를 서술했을 뿐이겠는가.
약응유若應有 즉시유卽是有 불응언무不應言無
일체의 인연 때문에 속제는 있어야 한다면
이는 바로 있는 것이므로 응당 없다 말하진 못하며
약응무若應無 즉시무卽是無 불응언유不應言有
일체의 인연 때문에 제법은 없어야 한다면
이는 즉시 없는 것이므로 응당 있다고 말하진 못하리라.
언유言有 시위가유이명비무是爲假有以明非無 차무이변비유借無以辨非有
유라 말해도 이는 가유이므로 이로써 실무가 아님을 밝히고, 무를 빌려 실유가 아님을 분별하였다
차사일칭이此事一稱二 이 유무의 실제 일은 중도인 하나이나 칭호가 둘이다.
기문유사부동其文有似不同 구령기소동苟領其所同 즉무이이부동則無異而不同
유무를 표현한 문자가 흡사 동일하지 않은 듯하나
유무의 동일점만 안다면 차이 나는 것마다 동일하지 않음이 없다.
연즉만법然則萬法 이와 같다면 만법은
과유기소이불유果有其所以不有 불가득이유不可得而有
있어도 실유가 아닌 까닭이 정말로 있으므로 실유라 하지 못하면
유기소이불무有其所以不無 불가득이무不可得而無
가유로서 실무가 아닌 원인이 있으므로 실무라 하지 못한다.
(현상의 만법은 실제로 존재해 있지 않는데 어떻게 실제 있다고 억지로 집착하겠으며
모든 법은 없지도 않은데 어떻게 정말로 없다고 억지로 집착하겠는가 함을 말하였다.
그러므로 단정적으로 집착하면서 유라 무라 하지 못한다 하였다)
하즉何則 왜냐하면
욕언기유欲言其有 유비진생有非眞生
(유무를 쌍으로 부정한 것) 있다 말하고 싶으나 있어도 진실한 연생은 아니며
욕언기무欲言其無 사상기형事象旣形
없다 말하고 싶으나 현상의 事象이 이미 나타났다.
상형부즉무象形不卽無 비진비실유非眞非實有
현상의 사상이 이미 나타났다면 사상은 없지 않으나
이는 진실이 아니므로 정말로 있는 것은 아니다.
연즉부진공의然則不眞空義 현어자의顯於玆矣
그렇다면 부진공의 의미가 여기에서 환하게 나타났다 하리라.
고방광운故放光云 그러므로 <방광반야경>에 말하였다.
제법가호부진諸法假號不眞 ‘모든 법은 진실이 아닌 거짓 호칭이다.
비여환화인譬如幻化人 이를 비유하면 꼭두각시와 같아
비무환화인非無幻化人 꼭두각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환화인幻化人 비진인야非眞人也 꼭두각시는 진실한 사람이 아니다.’
부이명구물夫以名求物 물무당명지실物無當名之實
거짓의 명칭으로써 명칭이 붙은 실제의 사물을 찾아보아도
명칭에 일치하는 사물의 실제는 없으며
이물구명以物求名 명무득물지공名無得物之功
반대로 실제의 사물로써 명칭을 찾아보아도
명칭에서는 실제의 사물을 얻을 수 있는 功能의 작용이란 없다.
물무당명지실物無當名之實 빗물야非物也
사물은 명칭에 일치하는 진실한 실제가 없으므로 진실한 사물은 아니며
명무득물지공名無得物之功 비명야非名也
명칭은 사물을 얻는 공능이 없으므로 진실한 명칭은 아니다.
시이명부당실是以名不當實 실부당명實不當名
그러므로 명칭은 실제의 사물엔 해당이 없고, 실제의 사물은 명칭에 해당하지 않는다.
명실무당名實無當 만물안재萬物安在
이름과 실제가 일치함이 없다면 모든 이름이 있는 만물의 실제는 어디에 존재하겠는가.
고중관운故中觀云 그러므로 <중론>에서 일렀다.
물무피차物無彼此 이인이차위차而人以此爲此 이피위피以彼爲彼
‘사물의 자체에는 상대적인 피차가 없는데
사람들이 자기의 주관에 의해서 이쪽을 이쪽이라 하고 저쪽을 저쪽이라고 하나
피역이차위피彼亦以此爲彼 이피위차以彼爲此
상대방에서도 내가 이쪽이라 했던 것을 저쪽이라 하고
내가 저쪽이라 했던 것을 이쪽이라 한다.’
차피막정호일명此彼莫定乎一名 이혹자회필연지지而惑者懷必然之志
피차는 하나의 이름으로 단정할 수 없는데도
미혹한 사람은 자기의 주관에 의해 단정한 피차가 필연적이라는 뜻을 품게 된다.
연즉피차초비유然則彼此初非有 혹자초비무惑者初非無
그렇다면 피차는 처음에는 실제로 있지 않았는데
미혹한 사람은 애초에 없지 않았다 하리라.
기오피차지비유旣悟彼此之非有 유하물이가유재有何物而可有哉
이미 피차가 원래 있지 않았음을 깨달았다면
무슨 피차의 실제하는 사물이 있어서 그를 집착할 만한 것이 있겠는가.
고지만물비진故知萬物非眞 가호구의假號久矣
그러므로 제법의 만물은 진실하게 있는 것이 아니라
거짓으로 만물이라고 호칭하여 부른지가 오래였음을 알아야 한다.
시이성구립강명지문是以成具立强名之文
그러므로 <성구경>에는 ‘억지로 명칭을 붙였다.’한 표현이 있고
원림탁지마지황園林託指馬之況 원림(장자)에서는 지마의 비유에 의탁함이 있었던 것이다.
여차如此 즉심원지언則深遠之言 어하이부재於何而不在
이와 같다면 심오 원대한 말이 불전 이외에도 어디엔들 있지 않으랴.
시이성인是以聖人 승천화이불변乘千化而不變 리만혹이상통자履萬惑而常通者
그러므로 성인은 현상의 모든 변화를 타면서도 자체는 변하지 않고
중생의 모든 미혹의 세계에 거닐면서도 항상 통하는 자이시다.
이기즉만물지자허以其卽萬物之自虛 불가허이허물야不假虛而虛物也
왜냐하면 만물 자체의 성공에 나아간 것이지, 공을 빌려 만물을 비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경운故經云 그러므로 경에서 말하였다.
심기세존甚奇世尊 ‘매우 기이하십니다. 세존이시여,
부동진제不動眞際 위제법립처爲諸法立處
세존께서는 진제에서 움직이지 않으시고 그 자리에서 (속제의) 모든 법 세울 처소를 삼는군요.’
비리진이립처非離眞而立處 립처즉진야立處卽眞也
진제를 떠나지 않고 모든 법 건립할 처소를 삼았기 때문에
제법을 건립한 곳이 바로 진제인 것이다.
연즉도원호재然則道遠乎哉 이와 같다면 성인의 도가 멀다고 하겠는가.
촉사이진觸事而眞 부딪치는 일마다 진제이며
성원호재聖遠乎哉 중도를 체득한 성인이 멀다고 하겠는가.
체지즉신體之卽神 체득하면 바로 신령해지는 것이다.(이는 외부에서 빌린 성질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