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류유민서答劉遺民書
답류유민서答劉遺民書 류유민에게 답장하는 글
(서유이폭書有二幅 답서는 2폭의 편지가 있었는데
전단차前短劄 후장폭後長幅 앞 편지는 단문이고 뒷 편지는 장문이다)
불면재석不面在昔 저상용로佇想用勞
지난 날 뵙지 못하였을 때 오랫동안 기다리며 상상하느라고 마음이 피로하였습니다.
혜명도인지慧明道人至 득거년십이월소得去年十二月疏 병문並問
혜명도인이 찾아와 거년 11월 疏와 편지를 받아보았습니다.
피심반복披尋返覆 흔약잠대欣若暫對
소와 편지를 펴고 반복해서 살펴보았더니 잠시나마 대면한 듯이 기뻤습니다.
량풍계절涼風屆節 경상여하頃常如何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계절인데 요즈음 일상생활은 어떠하신지요.
빈도로질貧道勞疾 다불가이多不佳耳 빈도는 병든 몸으로 아름답지 못한 일들이 많을 뿐입니다.
신남반불실信南返不悉 심부름꾼이 부탁한 편지를 가지고 남쪽으로 되돌아갔을지 모르겠군요.
팔월십오일八月十五日 석승조소답釋僧肇疏答 8월 15일에 석승조는 疏에 답합니다.
복상수수服像雖殊 묘기불이妙期不二
옷을 입는 겉모습이 다르긴 합니다만 오묘한 깨달음을 기약함은 둘이 아닙니다.
강산수면江山雖緬 리계즉린理契則鄰
강산이 아득히 멀긴 해도 진리에 마음은 하나로 일치하면 바로 이웃입니다.
소이망도치상所以望途致想 허금유기虛襟有寄
그 때문에 먼 길을 바라보고 상상을 하면서 텅 빈 마음으로 그대에게 의탁합니다.
군기수가둔지지君既遂嘉遯之誌 그대는 이미 가둔嘉遁의 목적을 이루어
(<周易·遯卦> 爻辭인 가둔嘉遁(비둔肥遯. 달아날 둔遁=遯)은 고상하게 은일함)
표월속지미標越俗之美 독념사외獨恬事外 환족방촌歡足方寸
세속을 초월한 아름다움을 표시하고 홀로 만상 밖에서 편안하니
그 기쁨이 마음에 충만하리라 여겨집니다.
매일언집每一言集 하상불원何嘗不遠 유림하지아영喻林下之雅詠
남쪽에서 온 사람과 모여서 한번이라도 말을 할 때마다
어찌 일찍이 그곳 林下의 고아한 읊조림을 깨닫지 않았겠습니까.
고치유연高致悠然 고상한 이치가 悠然하기만 하였습니다.
청산미기清散未期 후자보애厚自保愛
회포를 청아하게 흩어버린 모임을 기약하지 못하오니 몸을 후하게 保愛하시고
매인행리每因行李 수유승문數有承問
길을 왕래하는 사람이 있거든 자주 소식이나 받들게 해주십시오,
원피산승무양願彼山僧無恙 도속통가道俗通佳
그곳 산승은 무고하옵시며 道士 속인들까지도 모두가 아름답기를 원하옵니다.
승원법사지승상承遠法師之勝常 이위흔위以為欣慰
혜원법사께서 勝常하시다는 소식을 모셔 들으오니 기쁜 마음으로 위로가 됩니다.
수미청승雖未清承 연복응고궤然服膺高軌 기저지근企佇之勤 위일구의為日久矣
청아한 모범을 뫼시진 못하였으나 고상하신 규범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부지런히 바라보고 기다린 날이 오래입니다.
공이과순지년公以過順之年 담기미려湛氣彌厲 양도유암養徒幽巖
공께서 60이 지난 나이인데도 담담한 이상을 더욱 가다듬고
그윽한 바위에 숨어 제자들을 기르십니다.
포일충곡抱一沖谷 하이앙영遐邇仰詠
마음을 하나로 응집시키고 텅 비우시니 원근 지방의 사람들이 우러러 칭찬하고 읊조립니다.
하미여지何美如之 어떤 아름다움이 그만 하겠습니까.
매역교상일우每亦翹想一隅 현비소안懸庇霄岸
하늘의 한쪽 끝 아득히 먼 곳에서 머리를 들고 바라볼 때마다
무유사경無由寫敬 치개량심致慨良深
공경하는 마음 표할 길이 없으니 비분강개한 마음 진실로 깊어지기만 합니다.
군청대종일君清對終日 쾌유오심지환야快有悟心之歡也
그대는 청아한 규범을 종일토록 마주하면서 깨달음의 환희가 있으리니 통쾌도 하시겠군요.
즉차대중심상即此大眾尋常 십법사여의什法師如宜
이곳 대중들도 변함없이 잘 지내오며 나집 법사께서도 如宜하십니다.
진왕도성자연秦王道性自然 천기매속天機邁俗
진왕秦王은 道性을 천연적으로 타고 나시어 天機는 세속을 초월하셨습니다.
성참삼보城塹三寶 홍도시무弘道是務
그는 삼보를 성곽이나 참호처럼 외호하시며 불도 홍통하시기에 힘을 기우리십니다.
유사이전승승방원이지由使異典勝僧方遠而至 령취지풍췌어자토靈鷲之風萃於茲土
이로 인해 異域의 佛典과 뛰어난 스님들이 사방 멀리서 찾아와
영취산의 가풍이 이 국토에 모였습니다.
령공원거領公遠舉 내천재지진량야乃千載之津梁也
영공領公께서 먼 길을 떠나신 것은 千載의 나루터가 될 것입니다.
(혜원의 제자 支法領이 서역으로 가서 불경을 가져왔기 때문에 먼 길을 떠났다 했음)
어서역환於西域還 득방등신경이백여부得方等新經二百余部
그가 서역에서 되돌아와서야 새로운 經 2백여 部의 <方等經>을 얻게 되었습니다.
청대승선사일인請大乘禪師一人 삼장법사일인三藏法師一人 비바사법사이인毗婆沙法師二人
大乘禪師 1인, 삼장법사 1인, 비바사 법사 2인을 청하여
십법사어대석사출신지제경什法師於大石寺出新至諸經
나집 법사가 대석사에서 서역에서 새로 도착한 여러 경전을 역출하였습니다.
►大乘禪師는 불타파타라佛陀婆陀羅이며 覺賢으로 번역.
각현은 禪業을 계빈국의 佛大仙에게 배웠다.
홍시弘始 중에 진나라로 들어와 瓦官寺에서 禪道를 敎習하였다.
강남지방의 慧嚴 慧觀 관중지방의 玄高 등이 모두 대사를 따라 수업하였다.
승조도 그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유민공이 편지에서
깨달음이 발현한 그릇이라고 호칭하였던 것이다.
►三藏法師는 佛若多羅며 姚興이 상빈의 예로써 대접하고
<十誦律>을 번역케 했으나 끝내지 못하고 죽었다.
►毗婆沙法師二人 담마야사曇摩耶舍와 담마굴다曇摩掘多.
두 사람은 <비바사론>에 정통하였다.
법장연광法藏淵曠 일유이문日有異聞
그 법장은 심오 광대하여 매일 같이 새롭게 들음이 있습니다.
선사어와관사교습선도禪師於瓦官寺教習禪道 대승선사는 와관사에서 禪道를 교습하시어
문도수백門徒數百 숙야비해夙夜匪懈 수백 명의 문도들이 밤낮으로 게으름을 피우지 않습니다.
옹옹숙숙邕邕肅肅 치가흔락致可欣樂 화기롭고 공경스러워 기쁜 마음으로 즐길만합니다.
삼장법사어중사출률장三藏法師於中寺出律藏 본말정실本末精悉
삼장법사께서는 中寺에서 四重禁戒 등 根本律藏과
그 나머지 지말적인 율장을 정미하고 극진하게 역출하십니다.
약도초제若睹初制 마치 여래께서 최초로 계율을 계정하던 날을 보는 듯합니다.
비파사법사어석양사출사리불아비담호본毗婆沙法師於石羊寺出舍利弗阿毗曇胡本
비바사 법사는 석양사에서 소승논서인 <사리불아비담론舍利弗阿毗曇論> 범본을 역출하십니다.
수미급역雖未及譯 시문중사時問中事 발언신기發言新奇
아직은 다 번역하지 못하였으나
수시로 하는 문답이 實事에 적중하여 꺼내는 말이 신기할 뿐입니다.
빈도일생외참가운貧道一生猥參嘉運 우자성화遇茲盛化
빈도의 일생에 외람되게도 이런 아름다운 운수에 참예하고 성대한 교화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자한부도석가기환지집自恨不睹釋迦祇桓之集 여부하한余復何恨
한스러운 것은 석가여래 기원정사의 집회를 직접 뵙지 못한 것일 뿐
그 나머지야 무엇이 한스럽겠습니까.
이개부득여청승군자동사법집이而慨不得與清勝君子同斯法集耳
그리고 슬픈 것은 청승清勝하신 군자와 함께 이 집회를 함께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생상인경재차生上人頃在此 동지수년同止數年
도생스님은 지난 날 여기에 있으면서 함께 여러 해를 머물렀습니다.
지어언화지제至於言話之際 상상칭영常相稱詠 중도환남中途還南
그와 대화를 하는 즈음에 이르러서는 항상 칭찬하며 노래하다가 도중에 남쪽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열반경>을 번역하다가 ‘천제는 불성이 없다’는 의미에 이르러서 도생은 말하였다.
“굼실굼실 움직이며 살아있는 모든 유정류에는 불성이 있다 하였다.
천제는 불법을 믿지 않지만 어느 땐가는 善根이 발현한다.
무엇 때문에 불성이 없다고 말했겠는가.
아마도 범본 <열반경>의 전부가 아직 도착하지 않아서 그러했으리라.”
대중들은 모두가 그의 말을 긍정하지 않자 이윽고 도생은 번역장을 떠났다.
때문에 승조는 도생이 도중에 남쪽으로 되돌아갔다고 말했다.
군득여상견君得與相見 미경근문未更近問
그대는 그를 만나 보았겠지만 다시는 가까이서 문안을 드리지 못하였습니다.
망읍하언惘悒何言 망연하고 답답한 마음 어떻게 말로 표현하겠습니까.
위도인지威道人至 백련사에서 위도인이 찾아와
득군념불삼매영得君念佛三昧詠 병득원법사삼매영급서並得遠法師三昧詠及序
그대가 지은 <염불삼매영>과 원법사가 지은 <삼매영>과 그 서문을 얻어 보았습니다.
차작흥기기고此作興寄既高 사치청완辭致清婉
이 작품에 의탁한 감흥이 높아 표현한 문장도 청아하고 완미하였습니다.
능문지사솔칭기미能文之士率稱其美
관중지방에서 문장을 잘하는 선비들도 모두가 따라서 그 아름다움을 칭찬하였습니다.
가위유섭성문可謂遊涉聖門 구현관지창야扣玄關之唱也
이 문장은 聖門을 거닐고 玄關을 두드리고 나서 唱導하였다고 말할 만하였습니다.
군여법사당수유문집君與法師當數有文集 인래하소因來何少
그대와 혜원법사는 여러 권의 문집이 있을 터인데도 보내오는 것은 무엇 때문에 그리도 적은지요
십법사이오년출유마경什法師以午年出維摩經
집법사는 午年(弘始 8년) <유마경>을 역출하였습니다
빈도시예청차貧道時預聽次 빈도는 이때 참예하여 강의를 들었습니다.
참승지가參承之暇 첩부조기성언輒復條記成言 이위주해以為註解
강의에 참예하여 모시는 여가에 집법사가 설명하신 말씀을
그대로 조리 있게 기록하여 註解를 만들었습니다.
사수불문辭雖不文 연의승유본然義承有本
표현한 말은 문채롭지 못하나 그 의미를 계승한 근본이 있었습니다.
금인신지일본왕남今因信持一本往南
지금 편지를 가지고 가는 사람에게 한 본을 지니고 남쪽으로 가게 하였습니다.
군한상君閑詳 시가취간試可取看
그대는 문장에 익숙하고 의리를 자세히 살피시므로 시험 삼아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래문완절來問婉切 보내오신 질문은 완미하고 절실하였습니다.
난위영인難為郢人 제가 영인이 되긴 어렵군요.(►영인郢人/莊子◄)
빈도사불관미貧道思不關微 겸졸어필어兼拙於筆語
빈도의 사고는 은미한 이치에 通關해 들어가지 못하였고
겸하여 문장으로 표현하는 데도 졸렬한 솜씨입니다.
차지취무언且至趣無言 언필괴취言必乖趣
또 지극한 취향인 중도는 말이 끊겼으며 말을 했다하면 반드시 그 취향이 어긋나게 됩니다.
운운불이雲雲不已 경하소변竟何所辯
그런데도 시끄럽게 떠들어댄다면 끝내 어떻게 논변하겠습니까?
료이광언聊以狂言 시수래지이示詶來旨耳
부족하나마 허망한 말로써 보내오신 깊은 뜻에 보답하겠습니다.
►나는 너에게 허망하게 말해 주리니 너도 허망하게 듣는 것이 어떻겠느냐/장자◄
소운疏云 소疏에서 말하였습니다.
칭성심명적稱聖心冥寂 리극동무理極同無
“성인의 마음은 그윽히 고요하여 이치가 극치에 가면 무無와 동일하다.
수처유명지중雖處有名之中 유명有名의 속제 가운데 처한다 해도
이원여무명동而遠與無名同 아득히 무명無名과 함께 동일하다.
사리지현斯理之玄 고상미매자固常彌昧者
이러한 현묘한 이치는 실로 일반 사람들에겐 더욱 어두워 알지 못한다.”
이차위회以此爲懷 공께서 이러한 경지를 가슴 속에 간직하셨다면
자가망언내득自可忘言內得 취정방촌取定方寸
표현한 말을 잊고 그 뜻을 마음속으로 체득하여 마음속에 취하고 단정해야 할 것입니다.
부하족이인정지소이復何足以人情之所異 이구성심지이호而求聖心之異乎
다시 무엇 때문에 일반 사람의 인정함이 다르다 하여 성인의 마음마저 다르게 찾으려 하십니까.
소왈疏曰 소疏에서 말했습니다.
담자위궁령극수談者謂窮靈極數
“이 문제를 담론하는 유유민은 말하겠습니다.
진제의 진공을 끝까지 증오하고 속제의 상수를 극치까지 단절하여
묘진명부妙盡冥符 별적조지명別寂照之名 고시정혜지체이故是定慧之體耳
오묘함이 극진하고 그윽히 부합하였다면 실지의 고요한 명칭과
권지의 관조라는 명칭이 원래 정혜定慧의 자체일 뿐입니다.”
약심체자연若心體自然 만일 마음의 자체가 인위적인 조작 없이 본래 자연스럽게
령파독감靈怕獨感 즉군수지응則群數之應 고이기호식의固以幾乎息矣
신령하고 고요하여 절대 홀로 감응한다면
속제인 뭇 상수에 대한 감응이 실로 거의 쉬게 될 것입니다.
의위意謂 묘진명부妙盡冥符
공께서 의도하고 말한 실지반야가 오묘하게 극진하고 그윽하게 부합하였다면
불가이정혜위명不可以定慧爲名 차별적인 정과 혜라는 두 법으로써 명칭을 삼아서는 안 되며
령파독감靈怕獨感 공께서 신령하고 고요하여 절대 홀로 감응한다 말했다면
불가칭군수이식不可稱群數以息
신령한 마음은 상대적인 의존관계가 끊겼으므로
속제인 뭇 상수에 대한 감응이 끊겼다고 말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량언수수兩言雖殊 그렇다면 공께서는 이상의 두 가지 말이 다르긴 해도
묘용상일妙用常一 오묘한 작용은 변함없이, 즉 관조의 작용에 관계없이 하나여서
적아이괴迹我而乖 나라는 주관적인 자취에서 상대적으로 어긋날지언정
재성불수야在聖不殊也
성인의 경지에 있어선 공께서 하신 두 말씀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모르신 것이 됩니다.
하자何者 무엇 때문에 이 두 가지 말은 차이가 없을까요?
부성인현심묵조夫聖人玄心默照 리극동무理極同無
성인의 고요한 자체인 현묘한 마음은 말없이 관조의 작용을 하면서
이치가 극치에 이르면 무無와 동일합니다.
기왈위동既曰爲同 동무불극同無不極
이미 이치가 극치에 이르러 무와 동일하다 말했다면 동일한 경지는 극치 아님이 없습니다.
하유동무지극何有同無之極 이유정혜지명而有定慧之名
어떻게 무와 동일한 극치에 정·혜라는 두 법의 명칭이 있겠습니까?
정혜지명定慧之名 비동외지칭야非同外之稱也
정과 혜라는 명칭은 무와 동일한 밖에서 이루어진 칭호가 아닙니다.
약칭생동내若稱生同內 유칭비동有稱非同
정과 혜라는 명칭이 무와 동일한 내부에서 나왔다면
존재해 있는 명칭은 동일한 경지는 아니며
약칭생동외若稱生同外 칭비아야稱非我也
정․혜라는 명칭이 동일 밖에서 나왔다면
그 명칭은 나의 마음 즉 반야의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성심허미又聖心虛微 묘절상경妙絕常境
또 성인의 마음은 텅 비고 은미하여 일상적인 세계가 오묘하게 단절되었습니다.
감무불응感無不應 회무불통會無不通
느낌이 다가오면 감응하지 않음이 없고 회합하면 통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명기잠운冥機潛運 기용불근其用不勤
묘지妙智의 그윽한 기미가 가만히 운행하면서 그 작용이 인위적으로 수고롭지 않습니다.
군수지응羣數之應 역하위이식야亦何爲而息耶
속제인 뭇 상수에 대한 감응이 무엇 때문에 쉬겠습니까?
차부심지유야且夫心之有也 이기유유以其有有
범부의 허망한 마음으로 있다 한 것은 있는 것 때문에 그것은 있다고들 합니다.
유부자유有不自有 범부가 있다 한 것은 본래 실제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고성심불유유故聖心不有有
그 때문에 성인의 마음은 자체가 실제 있지 않는 것으로써 있다고 합니다.
불유유不有有 고유무유故有無有
실제 있지 않는 것으로써 있다 하기 때문에 있다 해도 실제의 자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유무유고有無有故 즉무무則無無
있다 해도 실제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실제 없는 것도 없습니다.
무무고無無故 성인불유불무聖人不有不無
실제 없는 것도 없기 때문에 성인은 실유의 유도 아니고[不有] 실무의 무도 아닙니다[不無]
불유불무不有不無 기신내허其神乃虛
이처럼 不有不無의 중도라야만 그 신령한 권지의 자체인 실지가 텅 비게 되는 것입니다.
하자何者 무엇 때문에 그러할까요?
부유야무야夫有也無也 심지영향야心之影響也 유·무는 마음의 영향影響이며
언야상야言也象也 영향지소반연야影響之所攀緣也 言象은 영향이 반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무기폐有無旣廢 즉심무영향則心無影響 영향기륜影響旣淪 즉언상막측則言象莫測
마음의 영향인 유·무가 단절되었다면 마음에 영향이 없게 되고,
영향이 없어졌다면 언상으로 그 마음을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언상막측言象莫測 즉도절군방則道絕群方
언상으로 헤아릴 수가 없다면 절대의 도에는 상대적인 모든 방향이 단절됩니다.
도절군방道絕群方 고능궁령극수故能窮靈極數
절대의 도에는 모든 상대적인 방향이 단절되었기 때문에
진여를 끝가지 증오하고 속제의 상수를 극치까지 단절합니다.
궁령극수窮靈極數 내왈묘진乃曰妙盡
진제의 진공을 끝까지 증오하고 속제의 상수를 극치까지 단절함을
오묘하게 극진함[妙盡]이라고 말합니다.
묘진지도妙盡之道 본호무기本乎無寄 오묘하게 극진한 도는 의탁함이 없는데 근본 하였습니다.
부무기재호명적夫無寄在乎冥寂 의탁함이 없는 것은 그윽히 고요함에 있기 때문입니다.
명절고허이통지冥絕故虛以通之
오묘하게 극진한 도는 그윽히 단절되었기 때문에 텅 빈 것으로써 통합니다.
묘진존호극수妙盡存乎極數
오묘하게 극진한 도는 속제의 상수를 극치까지 단절함 때문에 있습니다.
극수고수이응지極數故數以應之
속제의 상수를 극치까지 단절하였기 때문에 상수로써 감응합니다.
수이응지數以應之 고동여사회故動與事會
상수로써 감응하기 때문에 움직였다 하면 사상事象과 회합합니다.
허이통지虛以通之 고도초명외故道超名外
텅 빈 것으로써 도달하여 통하기 때문에 오묘하게 극진한 도는 명칭 밖으로 통합니다.
도초명외道超名外 인위지무因謂之無
도는 명칭 밖으로 초월하였으므로 그 때문에 무無라고 말하고
동여사회動與事會 인위지유因謂之有
움직였다 하면 사상事象과 회합하기 때문에 이를 유有라고 말합니다.
인위지유자因謂之有者 움직였다 하면 사상과 회합하기 때문에 있다[有]라고 말하는 것은
응부진유應夫真有 진실하게 있지 않는 것[非眞有]을
강위지연이強謂之然耳 억지로 유有라고 말했을 뿐입니다.
피하연재彼何然哉 중도의 일심이야 어찌 이와 같겠습니까?
고경운故經云 그 때문에 경에서는 말하였습니다.
성지무지이무소부지聖智無知而無所不知 무위이무소불위無爲而無所不爲
‘성인의 지혜는 앎이 없지만 알지 못하는 것도 없으며
작위 함이 없지만 작위하지 않음이 없다’라고.
차무언무상적멸지도此無言無相寂滅之道 이는 무언무상無言無相인 적멸의 도입니다.
기왈유이위유豈曰有而爲有 무이위무無而爲無
어찌 앎이 있다고 해서 실재한 앎이 있고 앎이 없다 해서 실제로 앎이 없어서
동이괴정動而乖靜 정이폐용야靜而廢用耶
관조의 작용으로 움직이면 고요한 실지를 어기고
실지의 고요함이 관조의 작용을 폐지하겠습니까?
이금담자而今談者 다즉언이정지多卽言以定旨
그런데도 지금 이 문제를 담론하는 공께서는
표현한 말에 나아가서 근본의 종지를 단정한 경우가 많습니다.
심대방이징우尋大方而徵隅
이를 비유하면 상대적인 방향을 초월한 大方을 찾으면서 한쪽 모서리를 구하며
회전식이표현懷前識以標玄
과거의 경험적인 지식을 품고 그로써 현묘함을 표시함과도 같은데
존소존지필당存所存之必當
이를 간직하곤 그것이 꼭 당연하다고 집착합니다.
시이문성유지是以聞聖有知 위지유심謂之有心
그러므로 성인은 앎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성인은 마음이 있다 말하고
문성무지聞聖無知 위등대허謂等大虛
성인은 앎이 없다는 말을 들으면 허공과 같다고 말합니다.
유무지경有無之境 변견소존邊見所存
그리하여 유지·무지의 상대적인 세계에서 이변二邊에 떨어진 견해를 간직합니다.
기시처중막이지도호豈是處中莫二之道乎
어찌 유·무가 둘이 아닌 중도에 처했다고 하겠습니까?
하자何者 무엇 때문에 유·무가 다르지 않을까요?
만물수수萬物雖殊 연성본상일然性本常一
만물의 외형적인 모습이 다르긴 하지만 자성은 본래 변함없는 하나입니다.
불가이물不可而物 이를 실재하는 만물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연비불물然非不物 그러나 만물은 사물이 아닌 것도 아닙니다.
가물어물可物於物 즉명상이진則名相異陳
만물을 실재한 만물로 취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 명칭과 모습이 다르게 나열됩니다.
불물어물不物於物 즉물이즉진則物而卽眞
만물을 만물로써 취하지 않는다면 만물이 바로 진실입니다.
시이성인是以聖人 불물어물不物於物 불비물어물不非物於物
그러므로 성인은 만물을 만물로 취하는 마음이 있지 않으며,
만물을 만물로 취하지 않음도 아닙니다.
불물어물不物於物 물비유야物非有也
만물을 만물로 취하지 않기 때문에 만물은 실제로 있는 것은 아니며
불비물어물不非物於物 물비무야物非無也
만물을 만물로써 취하지 않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만물은 정말로 없는 것도 아닙니다.
비유소이불취非有所以不取 만물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취하지 않으며
비무소이불사非無所以不捨 실제로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버리지 않습니다.
불사고묘존즉진不捨故妙存卽眞 한 법도 버리지 않기 때문에 오묘한 존재가 진여이며
불취고명상미인不取故名相靡因 한 법도 취하지 않기 때문에 名相이 의지할 수가 없습니다.
명상미인名相靡因 비유지야非有知也
차별적인 만물의 명상이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有知는 아니며(인식으로 알 만한 세계가 없다)
묘존즉진妙存卽眞 비무지야非無知也 오묘한 존재가 바로 진여이기 때문에 無知도 아닙니다.
(만법은 마음의 그림자일 뿐 만법을 진실하게 관조하는 절대 독립하기에 無知도 아니다)
고경운故經云 그러므로 경에서는 말하기를
반야어제법般若於諸法 무취무사無取無捨 무지무부지無知無不知
‘반야는 모든 법에 있어서 취함도 없고 버림도 없으며,
앎도 없고 모름도 없다’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차반연지외此攀緣之外 절심지역絕心之域
이러한 반야는 사량분별로 반연하는 밖에서 心意識의 망상이 끊어진 세계입니다.
이욕이유무힐자而欲以有無詰者 불역원호不亦遠乎
그런데도 유지·무지로써 따지는 것은 실정과는 너무 거리가 멀다 하지 않겠습니까?
청힐부진유무자請詰夫陳有無者 나열했던 유지有知와 무지無知를 따져 봅시다.
부지지생야夫智之生也 극어상내極於相內
범부 망상으로 일어나는 지혜는 육진의 차별적인 모습 내에서 극치의 한계를 이룹니다.
법본무상法本無相 그러나 만법은 無相의 성공입니다.
성지하지聖智何知 성인이 무엇 때문에 인식의 사량분별로 알겠습니까?
세칭무지자世稱無知者 위등목석태허무정지류謂等木石太虛無情之流
세상에서 말하는 無知란 목석이나 허공과 같은 무정물의 종류입니다.
령감유촉靈鑒幽燭 반야는 신령하게 조감하고 그윽한 곳까지 환하게 밝힙니다.
형어미조形於未兆 도무은기道無隱機
일념의 조짐이 나타나기 전에 나타난 도에는 개별적인 상황이 숨을 수가 없습니다.
녕왈무지寧曰無知 그런데도 어떻게 無知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차무지생어무지且無知生於有知 무무지야無無知也 무유지야無有知也
그리고 無知는 상대적인 有知에서 일어나므로
이를 보편의 중도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無知도 없고 有知도 없는 것입니다.
무유지야無有知也 위지비유謂之非有 무무지야無無知也 위지비무謂之非無
有知가 없는 것을 非有라고 말하고 無知가 없는 것은 비무非無라고 말합니다.
소이허불실조所以虛不失照 조불실照不失虛
그 때문에 자체가 비었으나 관조의 공능을 잃지 않고,
관조의 작용을 일으키면서도 자체 실지의 虛를 잃지 않습니다.
파연영적怕然永寂 미집미구靡執靡拘
이러한 반야는 담연淡然하게 영원히 고요하여
有를 집착하지도 않고 無에 구속당하지도 않습니다.
숙능동지령유孰能動之令有 정지사무야靜之使無耶
누구라서 관조의 작용이 움직인다 해서 실제로 있게 하겠으며
실지의 자체가 고요하다 해서 정말로 없게 할 수 있겠습니까?
고경운故經云 진반약자眞般若者 비유비무非有非無
그러므로 경에서 말하기를 ‘진실한 반야는 非有非無이다.
무기무멸無起無滅 불가설시어인不可說示於人
실유로 일어남도 없고 실무로 사라짐도 없으므로
사람들에게 설명을 통해 제시해 주지 못한다.’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하즉何則 경전에서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말했을까요?
언기비유자言其非有者 언기비시유言其非是有 비위시비유非謂是非有
비유라고 말한 것은 실유가 아님을 말한 것이지, 아예 있지 않았음을 말한 것은 아닙니다.
언기비무자言其非無者 언기비시무言其非是無 비위시비무非謂是非無
비무라고 말한 것은 단절된 무가 아님을 말한 것이지, 무가 아닌 유를 말한 것은 아닙니다.
비유비비유非有非非有 비유는 非有·非非有를 말한 것이지 실무實無로서의 비유는 아니며
비무비비무非無非非無 비무는 非無·非非無를 말한 것이지 단절된 무를 말한 것은 아닙니다.
(이 같은 四句를 떠나고 나면 百非는 스스로 버려지게 됩니다)
시이수보리是以須菩提 종일설반야終日說般若 이운무소설而云無所說
그러므로 須菩提尊者는 종일토록 반야를 설법했으면서도
끝내 한마디도 설명한 바가 없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차절언지도此絕言之道 지하이전知何以傳
이처럼 언어가 단절된 도를 사량분별인 경험적인 지견으로서야 어떻게 전할 수 있겠습니까?
서참현군자庶參玄君子 유이회지이有以會之耳
현묘한 경지에 참예한 군자께서는 이를 알아차리시길 바랍니다.
우운又云 또 말씀하시기를
의선정성심宜先定聖心 소이응회지도所以應會之道
‘우선적으로 성인의 마음이 감응하여 회합하는 도를 단정해야만 하겠다.
위당유조무상야爲當唯照無相耶 위당함도기변야爲當咸覩其變耶
성인의 마음은 無相性空의 사물만을 관조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有相의 변화하는 사물을 모두 보기 때문인가’라고 하였습니다.
담자사위무상여변談者似謂無相與變 기지불일其旨不一
이 문제를 담론하신 공께서는 성공의 무상과 유상의 변화가
그 근본 종지가 하나가 아닌 듯도 하군요.
도변즉이호무상覩變則異乎無相 그리하여 유상의 변화를 보면 무상과는 다르고
조무상즉실어무회照無相則失於撫會
무상을 관조하면 유상을 어루만지며
그 상황에 회합하는 작용을 잃게 된다 함을 말씀하신 듯도 합니다.
연즉즉진지의然則卽眞之義 혹유체야或有滯也
이와 같다면 성인의 마음이 진실에 상즉 했다는 의미에 대해 막힘이 있는 듯도 합니다.
경운經云 <반야심경>에서 말하기를
색불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 ‘色이 空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다.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색이 바로 공이며, 공이 바로 색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약여래지若如來旨 관색공시觀色空時 응일심견색應一心見色 일심견공一心見空
만일 질문해 오신 뜻대로 하면 색과 공을 관찰할 때
한쪽 마음으로는 색을 보고 한쪽 마음으로는 공을 봐야만 할 것입니다.
약일심견색若一心見色 즉유색비공則唯色非空
가령 한쪽 마음으로 색을 본다면 색일 뿐 공은 아닐 것이며 즉 색즉시공이 아닐 것이며
약일심견공若一心見空 즉유공비색則唯空非色
한쪽 마음으로 공을 본다면 공일 뿐 색은 아닐 것입니다.
연즉공색량진然則空色兩陳 막정기본야莫定其本也
이와 같다면 공과 색이 양쪽으로 진열하여 <반야심경>가운데서
논리를 수립한 근본 의도를 정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시이경운비색자是以經云非色者
그 때문에 <반야심경>에서 말했던 것은 色蘊을 색色이라 집착하는 것을 부정했을 뿐
성이비색어색誠以非色於色 불비색어비색不非色於非色
색이 아닌 非色을 실제의 색이 아니라고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약비색어비색若非色於非色 태허즉비색太虛則非色
만약 허공인 비색을 색이 아니라고 부정했다면 太虛는 色相이 아닙니다.
비색하소명非色何所明 색상이 아닌 허공을 무엇 때문에 밝혔겠습니까?
약이비색어색若以非色於色 즉비색불이색卽非色不異色
가령 색을 비색의 공이라고 했다면 비색의 공은 색과 다르지 않습니다.
비색불이색非色不異色 색즉위비색色卽爲非色
비색인 공이 색과 다르지 않다면 색이 바로 비색인 공인 됩니다.
고지변즉무상故知變卽無相 무상즉변無相卽變
그러므로 有相의 변화가 바로 성공의 無相이며
성공의 무상이 바로 유상의 변화임을 알아야 합니다.
군정부동羣情不動
여러 중생들이 처해 있는 개별적 상황과 그들이 느끼는 妄情이 동일하지 않습니다.
고교적유이이故教迹有異耳
그 때문에 부처님께서 남기신 가르침의 자취가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고지현적考之玄籍 본지성의本之聖意
현묘한 전적을 참고해 보고 성인이 설법하신 의도에 근본 해 본다면
기부진위수심豈復眞僞殊心 어찌 실지와 권지에 따라서 마음이 다르고
공유이조야空有異照耶 공과 유의 두 세계를 다르게 관조하겠습니까?
시이조무상是以照無相 불실무회지공不失撫會之功
그 때문에 무상을 관조한다 해도 실지는 어루만지며 회합하는 권지의 공능을 잃지 않고
도변동覩變動 불괴무상지지不乖無相之旨
실지에 상즉한 권지로 유상의 변동을 본다 해도 권지는 무상인 실지의 종지를 잃지 않습니다.
조유불이무造有不異無
권지에 상즉한 실지는 유상의 변화에 나아간다 해도 무상의 성공과 다르지 않고
조무불이유造無不異有 무상으로 나아간다 할지라도 유상과 다르지 않아
미상불유未嘗不有 미상불무未嘗不無 실무實有도 아니고 實無도 아닙니다.
고왈故曰 부동등각이건립제법不動等覺而建立諸法
그 때문에 경전에서는 ‘等覺에서 움직이지 않고 제법을 건립한다.’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이차이추以此而推 적용하방寂用何妨
이로써 유추해 본다면 고요의 자체와 관조의 공능이 무엇 때문에 서로 방해가 되겠습니까?
여지하위도변지지如之何謂覩變之知 이무상지조호異無相之照乎
그런데도 무엇 때문에 유상의 변화를 앎이 무상을 관조함과 다르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공담자탈恐談者脫 위공유량심謂空有兩心 정조수용靜躁殊用
아마도 이 문제를 담론하신 공께선 공과 유를 둘로 관조하는 마음에
실지의 고요함과 관조의 작용이 다르다고 말하는 듯도 싶군요.
고언도변지지故言覩變之知 불가위지불유이不可謂之不有耳
그 때문에 유상의 변화를 보는 앎은 有知가 아니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을 것입니다.
약능사이심어봉내若能捨已心於封內 심현기어사외尋玄機於事外
마음속으로 집착하는 자기의 주관적인 견해를 버리고 사상 밖에서 지극한 이치를 찾아야 합니다.
제만유어일허齊萬有於一虛
만법이 한결같이 순수한 진여의 세계임을 평등하게 관찰하면서 지극히 텅 빈 無相法身은
효지허지비무자曉至虛之非無者
일체처에 보편하므로 단절된 무가 아님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당언지인종일응회當言至人終日應會 여물추이與物推移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至人(성인)은 종일 감응하고 회합하여 만물과 함께 推移하면서
승운무화乘運撫化 미시위유야未始爲有也
적절한 시기를 타고 만물의 변화를 어루만진다 해도
처음부터 앎이 있는 것은 아니다 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성심약차聖心若此 성인의 마음은 이와 같습니다.
하유가취何有可取 무슨 취할 만한 것이 있겠습니까?
이왈미석불취지리而曰未釋不取之理
그런데도 취하지 않는다한 이치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까?
우운又云 또 말씀하시길
무시無是 내소이위진시乃所以爲眞是 ‘옳다고 인정함 없음[無是]이 진실한 옮음[眞是]이며
무당無當 내소이위지당乃所以爲至當
일치한다고 의식함 없음[無當]이 지극한 일치[至當]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역가여래언이亦可如來言耳 이는 공께서 보내 온 말씀 그대로입니다.
약능무심어위시若能無心於爲是 이시어무시而是於無是 무심어위당無心於爲當
만일 옳다는 데에서 무심하여 옳음이 없는 데서 옳다 하고,
일치함에 무심하여 일치함 없는 데서 일치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당어무당자而當於無當者 즉종일시則終日是 불괴어무시不乖於無是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종일 옳다고 인가한다 해도
옳음 없는 고요한 마음을 어김이 없고
종일당終日當 불괴어무당不乖於無當
종일 대상의 세계가 내 마음에 일치한다 해도 일치함 없음을 어기지 않습니다.
단공유시어무시但恐有是於無是
다만 염려스러운 것은 옮음이 없는 데서 옳다고 집착하는 마음이 있고,
유당어무당有當於無當 일치함 없는 데서 일치한다고 집착하는 마음이 있을까 염려스러운데
소이위환이所以爲患耳 그 집착하는 마음 때문에 병통이 될 뿐입니다.
하자何者 약진시가시若眞是可是 지당가당至當可當
왜냐하면 마음으로는 진실한 옮음을 옳다고 집착하고
대상의 세계에서는 지극히 일치함을 일치한다고 집착한다 합시다.
즉명상이형則名相以形 미악시생美惡是生
그렇다면 옳다, 일치한다는 名相이 나타나고,
아름다움과 추악하다는 상대적인 분별심이 일어나
생생분경生生奔競 끝없는 망상이 경쟁하듯 대상의 세계로 달리게 될 것입니다.
숙여지지孰與止之 누구라서 그것을 중지시켜 주겠습니까?
시이성인是以聖人 공동기회空洞其懷 무식무지無識無知
그 때문에 성인은 그 마음을 텅 비우고 사량 분별적인 선험적 앎이 없습니다.
연거동용지역然居動用之域 이지무위지경而止無爲之境
그리하여 일상생활의 세계에 살고 있지만 마음은 무위의 세계에 머물고
처유명지내處有名之內 이댁절언지향而宅絕言之鄉
有名의 안에 있으면서도 언어가 단절된 곳에 의탁합니다.
적요허광寂寥虛曠 막가이형명득莫可以形名得
고요하고 텅 비어 외형의 명칭으로는 얻을 수 없습니다.
약사이이의若斯而已矣 성인의 마음은 이와 같을 뿐입니다.
내왈乃曰 진시가시眞是可是 지당가당至當可當
그런데도 공께서는 성인의 마음은 진실한 옮음을 옳게 여기고
지극하게 일치함을 일치한다고 여긴다 말씀하시니
미유아지야未喻雅旨也 그대의 고아한 뜻을 나는 깨닫지 못하겠군요.
공시당지생恐是當之生 물위지연物謂之然
아마도 진실한 옳음을 옳다 여기고,
지극하게 일치함을 일치함이라고 하는 것은 범부들이 그렇게 말했으리라 여겨집니다.
피자불연彼自不然
성인의 마음은 일반 사람들이 허망한 마음으로 헤아리는 것처럼 그렇지를 않습니다.
하족이연이何足以然耳 어떻게 그와 같겠습니까?
부언적지흥夫言迹之興 이도지소유생야異途之所由生也
말과 자취가 일어남은 다른 갈래의 길이 생기는 이유입니다.
이언유소불언而言有所不言 말에는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절대의 도가 그 이면에 있고
적유소부적迹有所不迹 자취에는 자취에서 구하지 못할 것이 있습니다.
시이선언언자是以善言言者 구언소불능언求言所不能言
그 때문에 훌륭한 말로써 말을 하는 사람은 말로써는 표현하지 못할 본질적인 도를 구하고
선적적자善迹迹者 심적소불능적尋迹所不能迹
훌륭한 자취로써 자취를 찾는 자는 자취로는 드러내지 못하는 것을 찾습니다.
지리허현至理虛玄 의심이차擬心已差
말과 자취가 끊긴 지극한 이치는 텅 비고 현묘하여,
이를 마음속에 비교하고 헤아리면 벌써 그 이치와는 어긋나게 됩니다.
황내유언況乃有言 하물며 마음을 표현한 말의 경우야 어떻겠습니까?
공소시전원恐所示轉遠
공께서 보여주신 질문의 내용은 명칭과 모습을 잊지 못하였으므로
이치와는 더더욱 멀어질까 염려스럽군요.
서통심군자庶通心君子 유이상기어문외이有以相期於文外耳
마음을 통한 군자께서는 문자 밖에서 서로의 만남을 기약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