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반무명론·구절십연자九折十演者 변차辯差 제9
변차辯差 제9
무명왈無名曰 무명은 말한다.
연구경지도然究竟之道 리무차야理無差也 그러나 구경인 열반의 도는 이치가 차이가 없다.
법화경운法華經云 <법화경>에서는 말하였다.
제일대도무유량정第一大道無有兩正 제일의 大道엔 둘의 最上昇이란 없다.
오이방편위태만자吾以方便為怠慢者 어일승도분별설삼於一乘道分別說三
그러나 나는 방편의 도로써 태만한 사람을 위하여 一乘道에서 三乘을 분별하고 설명하였다.
삼거출화댁三車出火宅 즉기사야即其事也
세 수레(三乘)가 三界火宅에서 벗어났다한 비유가 바로 그 사건이다.
<註解>
여기서는 질문자의 의도가 이치는 본래 하나라 했던 것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삼승이 있게 된 것은 일승에 相卽한 삼승으로서
삼승인 權敎와 一乘인 實敎의 의미일 뿐이다.
이는 바로 <법화경>에서 말한
'일승의 도는 공적한 경지여서 둘의 최상층이란 없다'라고 한 경우인데
논에서 말한 열반과가 <법화경>에서 말한 最上昇으로 더불어 모두 극과極果인 것이다.
<묘법연화경>에서는 말하기를
'부처님은 求道者가 求道하는 도중에 게으름을 부리며 그만두는 것 때문에
방편의 힘으로써 一乘의 最上昇道에서 분별하여 三乘을 설명하셨다'라고 하였다.
三界火宅의 비유는 삼승의 비유인
하나의 큰 수레를 평등하게 하사 받았음을 우선 인정한 것이다.
이는 일승의 도엔 본래 삼승이 없었으므로 삼승은 실제의 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구출생사以俱出生死 고동칭무위故同稱無為
삼승이 함께 생사를 벗어났기 때문에 동일하게 무위법이라고 호칭하였다.
소승불일所乘不一 고유삼명故有三名
삼승 각자가 탔던 수레는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삼승의 차별적인 명칭이 있긴 하나
통기회귀統其會歸 일이이의一而已矣
그들이 회통하여 귀결하는 것을 통괄한다면 일승일 뿐인 것이다.
<註解>
여기서는 삼승이 하나의 극치인 일승으로 회귀함을 말하여 이로써 답변했던 의도를 거듭 폈다.
이난운而難云 그러나 질문하여 말하기를
삼승지도三乘之道 개인무위이유차별皆因無為而有差別
'삼승의 도는 모두가 무위법을 의지하여 셋의 차별이 있다'라고 하였다.
차이인삼此以人三 삼어무위三於無為 비무위유삼야非無為有三也
이는 사람이 셋이기 때문에 무위법을 셋으로 분별하였을지언정
무위법에 셋의 차별이 있는 것은 아니다.
고방광운故放光云 그러므로 <방광반야경>에서는 말하였다.
열반유차별야涅槃有差別耶 답왈答曰 열반의 무위법엔 차별이 있는가라고 묻자 이에 답변하기를
무차별無差別 ‘차별이 없다.
단여래결습도진但如來結習都盡 그러나 여래는 번뇌를 일으키는 無明의 結習이 모두 다하였고
성문결습부진이聲聞結習不盡耳 성문은 無明의 結習이 아직 다하지 않았을 뿐이다.’
<註解>
여기서는 질문한 의도에 정면으로 답변하였다.
즉 사람에게 셋의 차별이 있을지언정 열반의 도엔 본래 셋의 차별이 없다.
그런데 셋의 차별이 있는 까닭은 여래는 번뇌를 일으키는 무명의 결습結習이 이미 다 하였고
삼승은 아직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셋의 차별이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無明의 結習이 다한 곳에서 마음이 무위법에 契合하는 것을 열반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다음에서 이 문제를 비유로써 밝혔다.
청이근유請以近喻 이황원지以況遠旨
청컨데 비근한 비유로써 원대한 열반의 종지에 비교해 보겠다.
여인참목如人斬木 이는 마치 어떤 사람이 나무를 잘라내는데
거척무척去尺無尺 한 자를 제거하면 한 자 만큼의 나무가 없어지고
거촌무촌去寸無寸 한 치쯤 제거하면 한 치만큼의 나무가 없어져
수단재어척촌脩短在於尺寸 길고 짧은 길이가 자와 치수에 있을지언정
부재무야不在無也 본래 없는 無에 있지 않음과도 같다.
<註解>
이 비유에서 가장 환하게 드러났다
無엔 長短의 길이가 없다.
말한 의지가 더욱 오묘한데 이처럼 이 무위법엔 본래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이다.
부이군생만단식근불일夫以群生萬端識根不一
여러 중생들의 근기가 만 가지 단서이고
따라서 그들의 6식과 6근의 認知 작용도 한결 같지를 않다.
지감유천심智鑒有淺深 덕행유후박德行有厚薄
그들의 지혜로 조감하는 데는 淺深이 있고 德을 실천함은 厚薄의 차이가 있다.
소이구지피안所以俱之彼岸 이승강부동而升降不同
그 때문에 그들 모두가 열반의 彼岸으로 가긴 하지만 피안에 오르고 내려옴이 동일하지 않다.
피안기이彼岸豈異 피안이야 어찌 차이가 있으랴,
이자아이異自我耳 차이는 나로부터 나온다.
연즉중경수변然則眾經殊辯 기치불괴其致不乖
이와 같다면 여러 경전에서 다르게 논변했어도 그 이르러 가는 이치는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註解>
여기서는 본래 법은 차이가 나지 않지만 차이가 중생들 근기의 다름에 있으며
그리하여 지혜에는 천심이 있고 덕에는 후박의 차이가 있어 이것이 바로 한결같지 못한
까닭일지언정 피안이야 어찌 차이가 나겠는가라고 말했다.
이는 열반의 무위법은 하나이나 여러 경전에서는 중생들이 처한 상황에 따라서
설명하였으며 그 때문에 서로가 어긋나지 않음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