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반무명론·구절십연자九折十演者 힐점詰漸 제12
힐점詰漸 제12
힐詰은 따져 묻는다는 의미이다.
앞에서 '무위법을 극진히 하지 못했기 때문에 삼승의 차이가 있다'라고 말하였다.
이는 漸修의 의미이다.
그 때문에 여기에서 이 문제를 따져 물은 것이다.
유명왈有名曰 유명은 말한다.
만루자창萬累滋彰 본어망상本於妄想
만루의 枝末 번뇌가 더더욱 나타나는 것은 根本번뇌의 망상에 근본 하였기 때문이다.
망상기거妄想既祛 즉만루도식則萬累都息
근본번뇌의 妄想이 제거되고 나면 만루의 지말枝末 번뇌가 모두 쉬게 된다.
[여기서는 三乘이 二惑을 끊음은 동일하다고 말하였다]
이승득진지二乘得盡智 보살득무생지菩薩得無生智
성문, 연각인 이승은 盡智를 얻고 보살은 無生智를 얻는다.
[여기서는 삼승의 지혜가 동일함을 말하였다]
시시망상도진是時妄想都盡 결박영제結縛永除
이때에 망상이 모두 다하고 번뇌의 결박이 영원히 제거된다.
결박기제結縛既除 즉심무위則心無為 번뇌의 결박이 제거되고 나면 마음은 무위이며
[三乘이 증오한 이치가 동일함을 말하였다]
심기무위心既無為 리무여예理無餘翳 마음이 무위라면 증오한 이치엔 나머지의 가리움이 없다
<註解>
여기서는 삼승이 미혹을 끊고 지혜를 증득하고 이치를 증득함이 모두 동일하며
동일하다면 涅槃果를 취함에 있어서 차이가 있어선 안 된다고 따졌다.
만루萬累는 지말번뇌를 가리키고 妄想은 근본번뇌를 지적하였다.
근본번뇌가 끊겼다면 지말번뇌는 발생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모두 쉬게 된다.'라고 말하였다.
'이승은 盡智를 얻는다.'한 것 등등은 新疏에서는 <대품반야경>에서 설명한 것을 인용하였다.
즉 삼승인은 모두 함께 十一智인데 아홉 번째를 盡智라고 말한다.
이는 괴로움의 실제를 이미 다 보았음을 말하며 열 번째를 無生智라 말하는데
괴로움의 실제를 이미 보고 나서 다시는 보지 않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11智 가운데서 10智까지는 聲門 모두가 소유하게 되며
이 가운데서 盡智는 이판지已辦地에 있으면서 얻는다.
그런데 지금은 '보살이 無生智를 얻는다.'라고 말했던 것은
2地이상에서부터 제9보살지(9地)까지의 아비발치阿鞞跋致(8地의 不退位)는
모든 법은 본래 인연 따라 발생하지 않았으며
지금 또한 인연의 분리를 따라서 소멸함도 없음을 여실하게 안다.
이를 무생지라 부르며 이는 2昇의 진지와 함께 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위에서 인용하기를 '성문도 무생지를 증득한다' 하였다.
그런데 지금 보살이 성문의 무생지와 함께 하지 않는다라고 <新疏>에서 말한 것은
이승은 我空 즉 생사가 다한 것을 無生이라 말하고 보살은 모든 법이 적멸하여
무생인 法空을 통달하였기 때문에 성문과 지혜의 정도를 함께 하지 않은 것이다.
통체적으로 '삼승이 미혹을 끊고 증득한 이치는 모두가 동일하므로
취하는 열반과도 차이가 있어선 안 된다' 말한 것은 유명가가 의미의 편에서 따진 것이며
실제로는 삼승이 끊은 미혹의 정도가 같지는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이승은 見思惑만을 끊었고 보살은 진사혹塵沙惑을 끊고
無明을 조복 받아 그 정도가 천지처럼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어떻게 동일할 수가 있겠는가, 학자라면 이를 몰라서는 안 된다.
경왈經曰 경에서는 말하였다.
시제성지불상위배是諸聖智不相違背 이 모든 聖智는 서로가 위배하지 않는다.
불출부재不出不在 기실구공其實俱空
성지는 因쪽에서도 나오지 않고 緣쪽에서도 나오지 않아
실제로 양쪽 모두 함께 空하다.<在는 生이 되어야만 한다.>
우왈又曰 무위대도無為大道 평등불이平等不二
또 말하기를 '무위의 대도는 평등하여 둘이 없다'라고 하였다.
<註解>
여기서는 삼승이 증오한 이치는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인용하고 증명하였다.
<신소>에서는 <방광반야경>에서 인용하여 말하기를 '성문, 벽지불, 보살, 불, 세존이신
이 모든 성인들의 지혜는 서로가 위배하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며
내지는 '성지는 因 쪽에서도 緣 쪽에서도 출생하지 않아
실제로는 공한 것이어서 차이가 없다'라고 말하기까지 하였다.
이는 본문에서 재在 자字는 생生 자字가 되어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智度論>에서는 이 문제를 해석하여 말하기를
'인 쪽에서 일어나지 않는 것을 不出이라 말하고
연 쪽에서 일어나지 않는 것을 不生이라 말한다'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또 말하기를(又曰)'이라 한 다음부터는 이도 <대품반야경 三慧品>에서 그 의미만을 인용하였다.
즉 삼혜품에서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무위법 가운데서 차별이 있을 수 있을까요?'
부처님은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 때문에 그 의미만을 말하여 '대도는 평등하여 둘이 없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기왈무이既曰無二 이에 대도는 평등하여 둘이 없다라고 말했다면
즉불용심이則不容心異 대도를 증득하는 주관적인 마음에 다름을 용납하지 못하리라
불체즉이不體則已 대도를 증득하지 않으면 그만이겠지만
체응궁미體應窮微 증득했다 하면 대도의 은미함을 끝까지 추궁해야만 한다.
이왈체이미진而曰體而未盡 그런데도 '증득은 했어도 아직 극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시소미오야是所未悟也 이는 내가 깨닫지 못하는 바이다.
<註解>
證俉할 객관의 이치가 둘이 아니라면 증오하는 주관적인 마음인들
어떻게 다름을 용납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였다.
다르지 않은 마음으로써 둘이 아닌 이치를 증득하면서 증득하지 않으면 그만이겠지만
증득했다 하면 은미한 이치를 철저하게 끝까지 추궁해야만 한다.
그런데도 '증득하긴 했어도 아직 극진하지 못하다'라고 말하였다.
이를 깨닫지 못하는 바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