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반무명론·구절십연자九折十演者 명점明漸 제13
명점明漸 제13
번뇌의 結使習氣는 단박에 다하지 못하고 따라서 무위법은 홀연히 증득하지 못한다.
이를 비유하면 거울을 닦을 때 더러운 때가 다 닦여야만 거울의 광명이 발현함과도 같다.
무명왈無名曰 무명은 말한다.
무위무이無為無二 즉이연의則已然矣 무위법이 둘이 없음은 이미 그대가 말한 그대로이다.
[이치는 어긋남이 없다고 따졌던 것을 받아들였다]
결시중혹結是重惑 가위돈진可謂頓盡
번뇌의 결사는 겹겹의 미혹인데도 단박에 다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역소미유亦所未喻 이도 깨닫지 못하는 바이다.
[경에서 말하기를 이치는 단박에 깨닫고 乘과 悟가 나란히 소멸해야만 한다.
일이란 점진적으로 제거해야 하는데 차례를 의지해서 다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경왈經曰 경에서는 말하였다.
삼전중적三箭中的 삼수도하三獸渡河
세 종류의 화살이 과녁을 적중시키고 세 마리의 짐승이 강물을 건넌다 하자.
중도무이中渡無異
세 화살이 과녁에 적중하는 것과 세 마리의 짐승이 강물을 건넌 것은 차이가 없다.
이유천심지수자而有淺深之殊者 위력부동고야為力不同故也
그러나 심천의 다름이 있는 것은 각자의 능력이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註解>
두 가지 비유에 대해 <신소>에선 <비바사론毗婆沙論>의 의미를 인용하여 말하였다.
'비유하면 하나의 과녁에 나무화살, 무쇠화살 등등
여러 화살을 적중시키는 것처럼 하나의 무위체에 세 망상이 진행한다.'
그리고는 다시 말하기를
'매우 깊은 12因緣의 강물을 건너면서
강물 밑바닥까지 다 밟고 건널 수 있는 것을 부처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승은 이와 같지 못하여 마치 세 마리의 짐승이 강물을 건너는 것과 같다.
세 마리의 짐승은 코끼리, 말, 토끼를 말한다.
토끼는 몸을 껑충 뛰어 건너고 말은 강 밑바닥을 다 밟기도 하고 혹 다 밟지 않기도 하나
향상香象은 어느 때이건 밑바닥까지 다 밟지 않음이 없다‘라고 하였다.
삼승중생三乘眾生 구제연기지진俱濟緣起之津
삼승과 중생들이 모두 함께 12연기의 나루터를 건너서
동감사제지적同鑒四諦之的 절위즉진絕偽即真 동승무위同升無為
사제의 과녁을 동일하게 조감하여 거짓을 단절하고 진실에 나아가 무위법에 같이 오른다.
연즉소승불일자然則所乘不一者 이와 같다면 삼승이 타는 수레가 한결같지 않은 것은
역이지력부동고야亦以智力不同故也 그들의 지혜와 능력이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註解>
여기에서는 법으로써 비유에 합치시켰다.
緣起法인 12因緣은 사제四諦를 좀 더 광대하게 설명한 것이다.
그 때문에 四諦는 生滅, 無生, 無作, 無量의 四種四諦가 동일하지 않음이 있는 것이다.
이는 원래 三乘이 동일하게 관찰하기 때문에 '모두 함께 건너가 동일하게 照鑑한다' 말하였고
조감하고 나선 迷惑을 끊고 眞如를 證得하여
무위에 함께 올라 삼승이 각자 자기가 탄만큼 증득한다.
그 때문에 '삼승이 탄 수레가 한결같지 않은 것은
그들의 지혜와 능력이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다음에서는 유위법을 다하기 어려움을 들어 무위법에 견주었다
부군유수중夫群有雖眾 연기량유애然其量有涯
뭇 유위법이 중과하긴 하나 그 수량은 한계가 있다.
정사지유신자正使智猶身子 변약만원辯若滿願
그런데도 身子같은 지혜와 미륵보살 같은 변재가 있어
궁재극려窮才極慮 막규기반莫窺其畔
재능을 다하고 사려를 끝까지 한다 해도 그 끝을 엿볼 수가 없는 것이다.
<註解>
여기서는 유위법은 다하기 어렵다는 점을 들어 이로써
무위법은 단박에 끝까지 다하지 못한다는 것에 견주었다.
즉 유위법인 만물이 衆多하긴 하나 각자에 수량의 한계에 있다.
그런데도 身子처럼 지혜롭고 滿慈(滿願 미륵보살)처럼 변재가 있어
그 재능과 사려를 끝까지 다한다 할지라도 그 유위법의 주변 한계를 엿볼 수가 없다.
한계가 있는 유위법도 이와 같은데 하물며 한계가 끊긴 무위법의 경우이랴.
<열반경>에서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내가 미륵보살 등과 함께 世諦인 유위법을 의론하면
舍利佛(身子) 등은 도무지 식별해서 알지를 못한다.
하물며 무위법인 출세간의 제일의제인 경우에는 어떠하겠는가.
황호허무지수況乎虛無之數 중현지역重玄之域 하물며 허무의 묘수와 重玄의 세계는
기도무애其道無涯 그 도가 한계의 끝이 없는데도
욕지돈진야欲之頓盡耶 그것을 단박에 다하고 싶어 하는가.
<註解>
여기서는 법으로써 윗 문장의 비유에 합치시켰다. 허무와 중현은 노자의 문장을 인용하였다
노자의 문장에 '현묘하고 또 현묘하다'고 말하였다.
그 때문에 重玄이라고 말하였다.
이 모두는 열반무위의 의미에 비유하였다.
즉 유위의 한계 있는 양수量數도 이승의 지혜로는 끝가지 추궁하지 못한다.
하물며 열반 무위의 도인 경우이겠는가 함을 말하였다.
이를 비유해보자.
큰 바다는 끝이 없으나 배를 타고 노를 저으며 가는 데는 거리의 이수里數가 있고
태허는 확연하게 트였지만 훨훨 나는 새는 멀리 가고 가까이 나는 차이가 있는 것과도 같다.
삼승인도 열반의 도에 있어선 이와 같다.
서불운호書不云乎 노자에 말하지도 않았더냐.
위학자일익為學者日益 사변적인 학문을 하는 사람은 날로 망상의 군더더기가 더하고
위도자일손為道者日損 무위의 도를 닦는 자는 매일같이 망상이 덜린다.
위도자為道者 위어무위자야為於無為者也 도를 닦는 자는 무위를 하는 자이다.
위어무위이왈일손為於無為而曰日損 무위를 하는데도 '날로 덜린다.'라고 말하였으니
차기돈득지위此豈頓得之謂 이것이 어찌 단박에 증득함을 말하였겠는가.
요손지우손지要損之又損之 이지어무손이以至於無損耳
요컨대 덜어내고 또 덜어내어 덜어 낼 것이 없는 데에 이르게 하려 하였던 것이다.
경유형일經喻螢日 지용가지의智用可知矣
<방광반야경>에서는 '반딧불과 태양의 비유'가 있는데 지혜의 작용을 알리라
<註解>
노자에서 '학문을 하면 날로 더하고 도를 닦으면 날로 덜린다.
덜고 또 덜어서 덜어 낼 것이 없는데 이르러야 한다.'라고 하였다.
논주는 이를 인용하여 점진적으로 무명의 미혹을 끊고 끊은 만큼
점진적으로 무위를 증득하는 의미를 밝혔다.
'덜어 낼 것이 없는데 이른다.' 함은
덜어 낼만한 것이 없는 데에 이른 것으로써 극증極證을 삼은 것이다.
'반딧불과 태양'은 <방광반야경>에서
'이승의 지혜는 반딧불과 같아 염부제의 세계를 보편하게 비추겠다는 생각을 감히 하지 못한다.
보살의 지혜는 비유하면 해가 솟아 나와 염부제를 보편하게 비추어
눈 뜬 봉사들 모두가 이익을 얻는 것과 같다'고 말했는데
여기에서는 그 의미만을 인용하여 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