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디가니까야

<빠야시 경 Pāyāsi Sutta D23> 업과 윤회

空空 2023. 1. 8. 19:10

<디가 니까야> 제2권 대품 Maha vagga

<빠야시 경 Pāyāsi Sutta D23> 업과 윤회

2013-12-27 02:49:56

 

과연 저세상이란 존재할까?

과연 내세란 존재할까?

금생에 이 몸이 죽어서 없어져 버리면 모든 것은 그것으로 끝나 버리는 것이 아닌가?

과연 도덕적 인과율이라는 것은 존재할까?

이런 것은 현대인들이 가지는 의문들이며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도덕적 인과율을 좀처럼 믿지 않으려한다.

 

그것은 부처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던 듯하다.

여기 빠야시라는 태수도 그러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이다.

 

그래서 그는 대놓고

“저 세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화생하는 중생도 존재하지 않는다.

선행과 악행의 업들에 대한 열매도 과보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본경은 이러한 사고에 물들어 있던 빠야시라는 태수에게 꾸마라깟사빠 존자가 한 법문이다.

꾸마라 깟사빠 존자는 태양과 달의 비유 등 대략 14개 정도의 비유를 들어서 마침내 태수를 설복시킨다.

 

태수는

“저는 깟사빠 존자께서 해 주신 바로 처음의 비유로 마음이 흡족하고 크게 기뻤습니다.

그래도 이러한 여러 가지 뛰어난 답변을 듣고 싶어서 깟사빠 존자께 이의를 제기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라고 하면서 불교로 귀의한다.

 

본경은 특히 재가자들에게 인과의 이치를 분명히 믿게 하기 위한 목적이 크다.

불교는 한결같이 내세도 있고 보시를 베푼 공덕의 과보도 있다고 가르친다.

 

불교는 찰나생멸을 거듭하면서 흘러가는 것으로 윤회를 설명한다.

이런 윤회를 서양 사람들은 재생再生(rebirth)이라고 표현한다.

 

물론 불교는 어떤 불변하는 자아나 영혼이 있어서 금생에 이 몸을 받고 죽어 내생에 또 다른 몸으로 들어가는 재육화再肉化(reincarnation)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갈애가 있는 한 재생의 흐름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그래서 여러 경들에서는 갈애를 뽀노바위까(ponobbhavika 다시 태어남[再生]을 가져오는 것)라고 부른다.

특히 아비담마는 이전의 심찰나에 지은 의도적 행위는 업의 조건[業緣]에 따라서 그 과보를 반드시 다음의 어느 찰나에서 생기게 한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본경이 흥미롭고 중요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사실 자이나 문헌과 불교 문헌 가운데서 서로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경은 극히 드물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본경과 내용이 아주 흡사한 문헌이 자이나 문헌에 나타난다.

 

역자가 인도에서 유학할 때 범어학과 교수님과 개인적으로 본경을 읽었는데 그때 그분은 어떤 노교수님이 쓴, 본경과 자이나 경전에 나타나는 어떤 경을 비교 연구한 글을 보여주었다. 아쉽게도 마라티로 쓰여 있어서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교수님이 간략히 소개해준 것을 노트에 적어두었고 역자가 직접 해당 자이나 경전을 열람하여 몇 가지 사실을 기록해 두었는데 한국으로 짐을 옮기는 와중에 그 노트가 분실되어 지금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서 아쉽다.

 

역자가 자이나 경전의 자료를 다시 찾아보니 자이나의 <우빵가숫따 Uvangasutta>에 포함된 <라야빠세나이야 Rāyapasen*aiya, 빠세나디 꼬살라 왕을 뜻함) 품>의 <빠에시 까하나감 Paesi-kahāṇagaṁ>이다.

본경의 빠야시 태수는 자이나의 이 자료에서 빠에시 라자(Paesi Rāja) 즉 빠에시 왕으로 언급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