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詩/도연명陶淵明

연구聯句/권필權韠

空空 2025. 2. 20. 14:44

연구聯句/권필權韠

(여장汝章)

하처난망주何處難忘酒 어딜 가든 한잔 술 없을쏘냐

천애세모시天涯歲暮時 하늘 끝 먼 타향 한 해가 저무는구나

 

(자민子敏)

일침관설암日沈關雪暗 해 지니 국경엔 눈 내려 어둑하고

풍급수가비風急戍笳悲 바람 불어 어느 병사의 피리 소리 구슬프다

 

(여장汝章)

새어문환관塞語聞還慣 경계를 강화하라는 말은 들어서 외려 익숙한데

향서견교지鄕書見較遲 고향의 서신은 이다지도 느리단 말이냐

 

(자민子敏)

차시무일잔此時無一盞 한 잔 술마저 없다면

하이위기리何以慰羈離 고달픈 타향살이 어찌 달래리오

 

 

권필權韠(字 여장汝章)과 이안눌李安訥(字 자민子敏)이 읊은 련구시聯句詩

 

 

►권필權韠(1569-1612)

본관은 안동安東. 자字는 여장汝章, 호號는 석주石洲.

승지 권기權祺의 손자이며 습재習齋 권벽權擘과 경주 정씨 사이에서 난 다섯째 아들이다.

 

석주 권필은 정철鄭澈의 제자로 성격이 자유분방自由奔放하고

구속받기 싫어하여 벼슬하지 않은 채 野人으로 일생을 마쳤다.

 

선조 때 시인으로 목릉성세穆陵盛世로 일컬어지는 당대 문단에서 이안눌李安訥과 함께 ‘이재二才’로 불렸다.

젊었을 때에 이안눌과 함께 평안북도 강계에서 귀양살이하던 정철을 찾아갔다.

 

19세에 과거 시험을 보았는데 초시初試와 복시覆試에 장원壯元을 하였다.

그러나 글자 하나를 잘못 적은 일로 인해 내쫓김을 당하자 술과 시로 나날을 보냈다.

그러다가 권필의 부인이 그에게 금주를 권하자 권필은 <관금독작觀禁獨酌>을 지었다.

 

권필은 동료 문인들의 추천으로 제술관製述官·동몽교관童蒙敎官 등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강화에서 송희갑宋希甲 등 많은 유생儒生을 가르쳤다.

 

권필은 시를 짓는 재능이 뛰어났다.

이 때문에 그는 1601년(선조 34) 원접사遠接使 이정귀李廷龜의 추천을 받아 1602년(선조 35)

명나라 사신 고천준顧天埈·최정건崔廷健이 왔을 때 백의제술관白衣製述官으로 참여했다.

그리고 1606년(선조 39) 주지번朱之蕃과 양유년梁有年이 중국 사신으로 왔을 때는 한강 접빈接賓에 참여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구용具容과 함께 주전론主戰論을 강경하게 주장했다.

광해군 초에 권신權臣 이이첨李爾瞻이 권필에게 서로 가깝게 지내길 청했으나 권필은 이를 거절했다.

 

한편 임숙영任叔英이라는 인물이 과거 시험의 <책문策文>에서 전란 후의 현실에 대한 분노와 저항을

표출하면서 유희분柳希奮 등 권신들이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에 대해 공격했다가

광해군의 뜻을 거스르게 되어 삭과削科된 일이 있었다.

 

이 사실을 들은 권필은 분함을 참지 못하여 <궁류시宮柳詩>를 지어서 이를 풍자諷刺하고 비방하였다.

이 때문에 광해군이 크게 화를 내며 시의 출처를 찾았다.

그러던 중 1612년 김직재의 옥에 연루된 조수륜趙守倫의 집을 수색하다가 권필이 조수륜과 연관되었음이 밝혀졌다.

 

이로 인해 권필은 전라남도 해남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고 귀양지로 가던 도중 동대문 밖에서

그를 동정하는 행인들에게 받은 술을 폭음暴飮했다가 이튿날 44세로 죽었다.

 

시를 짓는 재주가 뛰어나 자기성찰을 통한 울분과 갈등을 토로하고

잘못된 사회상을 비판 풍자함으로써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호방하면서 어딘가에 얽매이지 않는 성품으로 중국 당나라 시풍의 낭만적인 서정과

당대 현실을 풍자한 사회성 높은 시를 많이 남겼다는 평을 듣는다.

 

<석주집>과 한문소설 <주생전>이 현재 그의 저서로 전해진다.

►이안눌李安訥(1571-1637. 선조 4-인조 15)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자민子敏, 호는 동악東岳. 좌의정 이행李荇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이원정李元禎이고 아버지는 진사 이형李泂이며

어머니는 경주 이씨로 대호군大護軍 이양李崵의 딸이다.

 

재종숙부인 사헌부감찰 이필李泌에게 입양됐다.

이식李植의 종숙從叔이다.

 

이안눌은 18세에 진사시에 수석 합격한다.

그러나 동료들의 모함을 받자 관직에 나갈 생각을 버리고 오직 문학 공부에 열중했다.

 

이 시기에 동년배인 권필權韠과 선배인 윤근수尹根壽·이호민李好閔 등과 교우를 맺었다.

이들의 모임을 동악시단東岳詩壇이라고 한다.

 

29세 되던 해인 1599년(선조 32) 다시 과거 시험을 봐 문과에 급제했으며

이후 여러 언관직言官職을 거쳐 예조와 이조의 정랑으로 있었다.

 

1601년(선조 34)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에 성균직강成均直講으로 옮겨 봉조하奉朝賀를 겸했다.

공조로 옮겼다가 주시관主試官으로 호서와 관서지방에 나갔다가 다시 예조에 들어온 후 단천군수가 됐다.

 

1607년홍주목사·동래부사를 거쳐 1610년 담양부사가 됐다.

부사가 된지 1년 만에 병을 이유로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3년 후에 경주부윤이 됐고 호조참의 겸 승문원부제조로 임명됐다.

그 후에 다시 동부승지에서좌부승지가 됐으나 사직한다.

이후에 강화부사가 된다.

 

그 후에 어머니의 삼년상을 마치고 인조반정으로 예조참판에 임명됐으나

그를 비방하는 말들이 생겨나자 사직했다.

 

이듬해에 이괄李适의 난을 방관했다는 죄로 귀양을 갔다가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사면됐고 다시 강도유수江都留守에 임명됐다.

1631년에는 함경도관찰사가 됐고 다음해에 예조판서 겸 예문관제학을 거쳐 충청도순찰사에 제수됐다.

 

조정에서 청렴하며 근면한 관리를 뽑혀 숭정대부崇政大夫가 되어 형조판서 겸 홍문관제학에 제수됐다.

같은 해(1636년) 겨울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병든 몸을 이끌고 왕을 호종하여 남한산성으로 갔다.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온 후에 병세가 악화돼 죽었다.

 

그은 작품 창작에 최선을 다하여 문집에 4,379수라는 방대한 양의 시를 남겼다.

두보杜甫의 시를 만 번이나 읽었다고 하며 시를 지을 때에 하나의 글자도 가볍게 쓰지 않았다고 전한다.

특히 당시唐詩에 뛰어나 이태백李太白에 비유됐고 서예 또한 뛰어났다.

 

정철鄭澈의 <사미인곡>을 듣고 지은 <문가聞歌>가 특히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고답적 표현을 버리고 절실한 주제를 기발한 생각으로 표현한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한편 임진왜란이 끝난 다음에 동래부사로 부임하여 지은 <동래사월십오일東萊四月十五日>은

전쟁의 상처를 형상화한 내용으로 사실적 표현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내용은 왜적이 동래에 쳐들어왔을 때 관민이 함께 막으려다 장렬하게 전사한 사연을 담고 있다.

 

이러한 시를 통해 그가 체험한 임진왜란·병자호란의 양란이 가져다준 참상을 그려볼 수 있다.

또한 명나라로 사행가면서 지은 시에서는 명나라에 대한 외교적 자료를 발견할 수 있다.

 

저서로는 <동악집東岳集> 26권이 있다.

1985년 여강출판사驪江出版社에서 영인해 출판했다.

 

그의 문집에 실린 시는 자신이 옮겨 다닌 지방을 중심으로 묶여 있다.

지방의 민중생활사와 사회사 연구에 필요한 자료를 담고 있다.

 

숭록대부의정부좌찬성 겸 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에 추증됐다.

담양의 구산서원龜山書院과 면천의 향사에 제향 됐다. 시호는 문혜文惠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동악 이안눌의 일화

동악 이안눌의 양모 능성구씨는 당시 이름난 갑부였다.

그러나 동악은 40년 가까이 벼슬살이를 하면서도 언제나 가난한 선비처럼 검소하게 살았다.

 

동악은 지방의 수령을 지내면서 세금과 부역을 줄이고 나라의 재물을 다루는 데는

지나칠 정도로 엄격하고 치밀하면서도 그 많은 집안의 재산에 대해서는 일체 돌보지 않았다.

 

그래서 동악의 고향인 충남 당진시 면천을 비롯해서 전국에 널려있는 그의 농토를

남들이 제멋대로 차지하는가 하면 어떤 때에는 가난한 친구에게 부상으로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동악의 재산관리를 아주 딱하게 여긴 사람이 그에게

"대감은 나라 살림에는 그렇게 밝으면서도 자기 자신의 재산을 다스리는 데는 어찌 그리도 허술하오?"

하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동악은

"내가 방탕해서 가산을 돌보지 않는 것이 아니오.

내 선대의 토지가 너무나 많아서 이것을 관리하는 데에는 한 고을을 다스리는 것과 같은 노력이 필요하오.

그런데 나는 나아가서는 나라의 정무를 다스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책을 읽고

글을 써야 하는 만큼 언제 가산을 돌볼 틈이 있겠소."하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이렇듯 동악 이안눌은 청렴하고 검소하며 효성이 지극하였을 뿐 아니라 동기간의 우애도 각별하였다고 한다.

동악은 임진왜란에 집이 불타버린 백형을 위해 집을 마련해주고

백형이 작고한 다음에는 질녀들의 혼사를 자기 딸처럼 돋보아 주었다.

 

또 식솔이 많으면서 어렵게 사는 중형을 위해서도 그는 평생을 두고 생계를 돌보아 주었으며

남산 밑에 있었던 큰 저택도 서슴지 않고 조카에게 주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낡은 헌옷과 가난한 식생활로 한평생을 살았다.

 

이러한 청렴 검소한 생활로 동악 이안눌은 인조 14년(1636)에 왕으로부터 정려문을 받고 청백리에 녹선 되자

이를 굳게 사양하였으나 왕은 허락하지 않았다고 할 만큼 청백리라 중의 진정한 청백리였던 것이다.

 

동악 이안눌李安訥의 이러한 부富의 배경에는 동악의 친인척 관계가 아주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즉 친가 쪽 가계를 살펴보면 양가 증조부가 영의정 이기李芑이고 생가 증조부는 좌의정 이행李荇이다.

 

외가로는 양어머니 능성구씨가 세종의 8남 영응대군의 사위인

정국공신 능천군으로 봉해진 구수영具壽永의 증손녀로 연산군의 외증손녀이기도 하다.

 

연산군의 배위 거창신씨는 세종의 4남 임영대군의 사위인 영의정 신승선愼承善의 딸로

오빠가 중종의 국구인 좌의정 신수근愼守勤이며 중종의 원비 단경왕후는 연산군부인 신씨의 조카딸이다.

 

연산군과 거창신씨 사이에는 아들이 있었으나 모두 죽고 딸 휘신공주徽愼公主만 구수영具壽永의 아들

능양위 구문경具文璟에게 시집을 가 아들 구엄具渰을 낳았고 구엄은 아들이 없이 또 외동딸 능성구씨를 낳았다.

이 능성구씨가 덕수 이씨 이필李泌에게 시집을 가 후사가 없자 동악 이안눌을 양자로 삼았던 것이다.

 

연산군 묘를 전주이씨가 아닌 덕수 이씨에서 봉제사를 하는데 그렇게 된 연유가 있다.

연산군의 묘가 방학동에 조성하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원래 이곳은 세종의 4남 임영대군의 사패지였다.

처음에 태종의 후궁 의정궁주 한양 조씨가 후사 없이 죽자 세종의 명에 의하여

임영대군이 봉사손이 되고 의정궁주의 묘를 이곳에 조성하고 제사를 받들게 되었다.

 

이후 중종 8년(1513) 임영대군의 외손녀인 연산군부인 신씨가 강화 교동도에 있던 연산군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하였고 연산군부인의 외손자인 구엄具渰이 그의 부모인 구문경과 휘신공주의 묘까지 이곳에 조성한 것이다.

그리고 연산군과 거창신씨의 봉사손은 능성구씨를 거쳐 현재까지 덕수 이씨 문중에서 봉제사를 하고 있다.

 

연산군 묘역 위쪽에는 덕수 이씨 문중 묘역이 크게 자리 잡고 있는데

임영대군-능성구씨-덕수 이씨로 그 소유권이 변경된 것 같다.

또한 덕수 이씨 문중 묘역 옆에는 지금도 임영대군 종중 묘역이 크게 자리하고 있기도 하다./개미실 사랑방

 

인호조역호人好鳥亦好 인심 좋고 새 또한 좋은데

황내계산기况乃溪山奇 더욱 산수山水까지 빼어나니

산중유한지山中有閑地 산 속에 남은 땅이 있으니

아욕노어사我欲老於斯 내 여기서 늙고자 하노라/이안눌의 산수시山水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