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詩/도연명陶淵明

왕안석王安石의 도원행桃源行

空空 2025. 2. 21. 23:18

왕안석王安石의 도원행桃源行

망이궁중록위마望夷宮中鹿爲馬 망이궁望夷宮 가운데에서 사슴을 말이라 하니

진인반사장성하秦人半死長城下 진나라 사람들 절반은 長城 아래에서 죽어갔네.

피세불독상산옹避世不獨商山翁 세상을 피하여 숨은 자들 商山의 노인뿐 아니요

역유도원종도자亦有桃源種桃者 또한 桃源에 복숭아 심어 기른 자 있었네.

 

일래종도불기춘一來種桃不記春 한 번 와서 복숭아 심은 뒤로 햇수 기억하지 못하니

채화식실지위신采花食實枝爲薪 꽃 따고 열매 먹으며 나뭇가지로 섶 만들었네.

아손생장여세격兒孫生長與世隔 자손들 생장하여 세상과 단절되었으니

지유부자무군신知有父子無君臣 부자가 있음만 알고 君臣은 없다오.

 

어랑방주미원근漁郞放舟迷遠近 어랑이 배 가는 대로 가다가 遠近을 잃었는데

화간혼견경상문花間忽見驚相問 꽃 사이에서 갑자기 그를 보고 놀라 물었네.

세상공지고유진世上空知古有秦 세상에서는 부질없이 옛날 秦나라 있음만 알 뿐이니

산중기료금위진山中豈料今爲晉 산중에서야 어찌 지금이 晉나라임 알겠는가.

 

문도장안취전진聞道長安吹戰塵 장안에 전쟁의 먼지 날려 漢나라 망했단 말 듣고

동풍회수역점건東風回首亦沾巾 동풍에 머리 돌려 회상하며 눈물로 수건 적시네.

중화일거녕부득重華一去寧復得 중화가 한번 가버리니 다시 어찌 얻을런가

천하분분경기진天下紛紛經幾秦 천하는 분분히 몇 번이나 秦나라의 폭정 만났는가.

 

►망이궁望夷宫 진대晋代의 궁전.

환관宦官 조고趙高가 어린 호해胡亥를 황제로 옹립擁立해 권력을 찬탈簒奪한 곳.

 

►록위마鹿爲馬 지록위마指鹿爲馬.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우김.

진시황秦始皇이 죽자 宦官인 趙高가 先皇의 유조遺詔를 위조해 부소扶蘇를 죽이고 어리석은 호해胡亥를

내세워 황제로 옹립擁立하여 자신이 실질적인 권력의 찬탈簒奪을 했었다.

승상丞相이었던 이사李斯와 重臣들을 처치하고 스스로 丞相이 된 뒤 사슴을 망이궁望夷宮의 어전御前에

끌고 와서 대신들 앞에서 “저것은 말입니다”우겼었다.

이에 趙高의 억지를 거부하고“사슴이 아닌 말”이라 대답한 신하들은 모두 척살刺殺 하였다.

나중에 趙高는 胡亥를 죽인 뒤 扶蘇의 아들 자영子嬰을 3대 황제로 옹립하나 子嬰은 趙高를 주살誅殺하였다

 

►장성長城 만리장성萬里長城.

秦始皇은 중국통일 이후 북방 흉노족匈奴族의 남침을 막으려 엄청난 규모의 성곽을 쌓았다.

長城은 높은 산과 골짜기를 통과, 작업환경이 매우 열악劣惡해 동원된 수많은 백성이 죽어 나갔다.

 

►피시避時 도피난세逃避亂世.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서 숨어서 삶.

►商山翁 상산사호商山四皓. 진말한초秦末漢初의 亂世를 피해 상산商山(지금의 陝西省 商縣 동남쪽)에

숨어서 살았던 4명의 박사博士 백발노인들. 동원공東園公·기리계綺里季·하황공夏黃公·녹리선생.

秦이 망하고 漢나라가 건국돼 한漢 고조高祖 유방劉邦이 불렀지만 商山四皓는 계속 은거隱居했다

 

►도원종도桃源種桃 이상적인 인간세상을 만드는 사람.

신선세계 무릉도원武陵桃源에서 복숭아나무를 심는 사람

 

►경기춘經幾春 몇 번째 봄을 보냈나. 세월이 얼마나 흘렀나.

►‘섶 신薪’ 시화柴火. 장작. 땔나무. 땔감

►아손兒孫 아들과 손자. 후손後孫

►어랑양주漁郞漾舟 출렁거리는 고깃배. 출처는 陶淵明이 지은 <桃花源記>로

진태원중晋太元中 무릉인포어위업武陵人捕魚爲業

연계행緣溪行 망로지원근忘路之遠近 홀봉도화림어랑忽逢桃花林漁郎

진나라 태원연간<361~396>에 무릉에는 고기를 자아 생계를 꾸리는 어부가 살았는데,

계곡을 따라 가다가 어딘지 모를 곳에 닿아 홀연히 복숭아 꽃나무 숲을 만났다”

 

►세상世上 어부들을 말함.

►산중山中 복숭아밭[桃源]의 사람. 출처는 陶淵明의 <桃花源記>로

문금시하세내불지유한問今是何世乃不知有漢 무론위진無論魏晋

“여기가 어디냐고 물으니, 한나라인 줄은 물론 위나라나 진나라인지도 몰랐다”

 

►장안長安 서한西漢의 수도.

►吹戰塵吹戰塵 전란戰亂이 발생함. 291년의 서진西晉의 8王之亂이다.

이 戰亂에 뒤이어 외족外族의 침입이 잇달았고 西漢末期에는 西晉과 빈번한 戰亂을 벌여서

西晉은 결국 317년에 멸망하고 말았다.

 

►‘더할 첨, 젖을 점, 경망할 접沾’ 젖다. 적시다. 묻다. 배다

►중화重華 순舜임금의 이름. 중국 상고시대 전설적 현군賢君.

►‘편안할 녕(영)寧’=‘어찌 기, 개가 개豈’ 어찌. 반어反語 조사

►천하분분天下紛紛 세상이 어수선함

 

 

진나라 망이궁에서 사슴을 말이라 하니, 진나라 사람들은 반이나 만리장성 아래서 죽었다.

세상을 피한 이는 상산사호만이 아니고, 또한 도원에서 복숭아를 기른 사람도 있었다.

 

한번 와서 복숭아를 기르니 봄도 기억 못하고, 꽃 따고 열매 먹고 가지는 땔나무로 했다.

자손이 자라나자 세상과 멀어지게 되어, 부자가 있는 것을 알되 군신은 없었다.

 

어부가 배를 띄어 원근을 모르다가, 꽃가지 사이에서 갑자기 그를 보고 놀라 물어보았다.

세상엔 헛되이 옛날 진秦나라 있음을 알지만, 산중엔 어찌 지금이 진晉나라인 줄 알리?

 

장안에 전쟁이 일어났다는 말 듣고, 동풍에 머리 돌려 눈물로 수건을 적신다.

순임금이 한번 가면 어찌 다시 오겠는가? 천하는 어지러워 몇 번의 진秦나라를 거쳤는가?

 

 

이 詩는 송나라 재상이자 문필가이며 당송 팔대가의 한사람인인 왕안석이 당시 송나라 백성들의

피폐한 삶을 新法으로 혁파하고 무릉도원으로 만들고자 했다는 심경을 시로 피력한 것이다.

 

이 시는 <왕임천집王臨川集>4권에 실려 있는 바 무릉도원武陵桃源을 읊은 것이다.

제목 밑의 주에

“고금에 도원을 노래한 자들이 神仙說에 현혹되어 도원을 長生不死하는 곳이라고 여긴 자가 많은데

형공荊公의 〈도원행〉에 秦나라의 난리를 피하여 숨은 자들이라고 한 것을 보니

신선설에 빠진 자가 아니고 사리를 아는 자이다.” 하였다.

 

이 시는 대략 세 부분으로 나눠볼 수 있다.

처음 넉 줄은 진秦나라를 피해 도원桃源에 숨어 사는 사람을 소개한 것인데

첫째 줄은 진秦나라 망이궁望夷宮에서 조고趙高가 二世皇帝에게 사슴을 끌고 와

말이라고[指鹿爲馬] 속인 난정亂政을 펴자 진나라 사람들은 만리장성을 쌓느라고 동원되어 죽었다고 했다.

 

둘째 줄에서 이런 진나라 세상을 피하여 商山四皓 뿐만 아니라 도원桃源으로 피한 사람도 있었다고 했다.

이 점이 왕안석의 독특한 견해라고 앞에서 지적했다.

 

셋째 줄에는 복숭아를 기르며 세월(세상)이 변하는 줄도 모르고 살았다고 했다.

넷째 줄에서는 그 자손도 속세와 멀어져서 부자 관계는 알지만 군신 관계는 몰랐다고 했다.

그들은 별천지에 살고 있었다는 말이다.

 

가운데 석 줄은 어부의 방문과 그들의 생활이다.

다섯째 줄에서는 어부가 도원을 방문하여 그곳 사람을 만났다는 말이고

여섯째 줄은 그곳 사람들의 사정이다.

진秦나라는 알지만 한漢나라를 거쳐 삼국시대 위魏나라, 진晉나라로 세상이 바뀐 것을 모르더라는 것이다.

 

일곱째 줄에서는 그동안에 왕조가 여러 번 바뀌며 장안에 전쟁이 있었다는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더라고 했다.

마지막 줄은 시인의 감회이다.

순임금이 다스리던 태평성대가 가면 천하는 어지러워져서 몇 번이고

진秦나라와 같은 전란과 폭압의 시대를 거치게 된다는 것이다.

 

 

►왕안석王安石(1021-1086)

북송北宋의 문인 정치가로 자는 개보介甫 호는 반산半山이며 당송팔대가의 한 명이다.

강서성江西省 무주撫州 임천臨川에서 나서 19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강녕부江寧府로 이사했다.

어려서부터 문재文才가 있었다.

 

인종仁宗 때(1042) 과거에 합격하여 섬서회남절도판관陝西淮南節度判官을 시작으로 20여 년 지방관을 지냈다.

그는 관개와 재정 관리에 능했고 1058년에 <만언서萬言書>를 올려 당시의 폐단을 지적하고

<주례周禮>에 의거한 개혁을 제안했다.

 

1067년 신종神宗이 개혁을 추진하며 왕안석을 강녕부 지사에서 한림학사로 삼고

1069년에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임명하여 개혁 정책을 펴게 했다.

 

1070년에 왕안석은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어 균수법均輸法 청묘법靑苗法 모역법募役法

보갑법保甲法 방전균세법方田均稅法 시역법市易法 보마법保馬法 등을 실시했다.

그러나 지주와 상인, 고리대업자와 보수파 정치인의 반대에 부딪혔다.

 

1074년 기근이 들고 반발이 커지자 강령부 지사로 좌천되었다가

이듬해 복직했지만 아들을 잃고 1076년 강녕부로 은퇴하였다.

 

1086년 죽은 뒤 형국공荆国公으로 봉해졌고 <임천문집臨川文集>을 남겼다.

 

<시인옥설詩人玉屑> 권17에 ‘호도虎圖’ 조에 이르기를

형공상재구공좌상부호도荊公嘗在歐公坐上賦虎圖

“형공荊公(왕안석)이 일찍이 구양공歐陽公(歐陽修)과 함께

앉아 있는 자리에서 (여러 사람과 같이) ‘호도虎圖’를 읊은 일이 있었다.

 

중객미락필衆客未落筆 이형공장이취而荊公章已就

다른 사람들은 아직 붓도 대지 못하고 있는데 형공은 벌써 다 지었다고 했다.

 

구공극취독지歐公亟取讀之 위지격절칭탄爲之擊節稱嘆

구양공이 즉시 그것을 읽어보고는 무릎을 치며 찬탄하였다.

 

좌객각필불감작坐客閣筆不敢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그 글을 보고는) 붓을 놓고 감히 글을 짓지 못하였다.”라고 했다.

 

이 시가 바로 호랑이 그림을 읊은 시인데 세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면

처음 석 줄은 그림 속 호랑이의 묘사이고

가운데 석 줄은 화공이 그림 그리는 과정이며

끝 석 줄은 호랑이 주변과 그림의 여실함, 그 효과를 가정해 본 것이다.

 

처음 석 줄의 첫째 줄은 눈을 번쩍이는 호랑이의 웅장한 모습이고

둘째 줄은 호랑이의 어슬렁거리는 행동이다.

셋째 줄은 보는 이의 놀라움과 친근감이다.

 

가운데 석 줄에서 화공이 기교를 다하고 다른 사람의 멸시 속에서도

조물주의 솜씨같이 여실하게 호랑이를 그려내었다고 했다.

 

마지막 석 줄에서는 호랑이 주위에 그려진 갈대와 참새, 죽은 나무 위의 까마귀를 말했다.

맨 끝줄에서는 만약 그림을 저녁에 산속이나 들판에 걸어두면 풍부馮婦가 잡으려고 달려들 것이라고 했다.

풍부는 <맹자孟子> 진심장盡心章 下에 나오는 용맹한 장사로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았다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