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詩/도연명陶淵明

도연명과 동시대의 인물 고개지顧愷之

空空 2025. 2. 27. 00:58

도연명과 동시대의 인물 고개지顧愷之

 

고개지顧愷之(?-?)

자는 장강長康·호두虎頭이고 장쑤성[江蘇省] 우시[無錫]에서 태어났다.

 

생몰연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의희연간義熙年間(405-418) 초기에

산기상시散騎常侍가 된 얼마 후 62세로 죽은 듯하다.

 

364년(興寧2) 건강建康(지금의 南京)에 있는 와관사瓦官寺 벽면에

유마상維摩像을 그려 처음으로 화가로서 이름을 나타내었다.

초상화와 옛 인물을 잘 그려 중국회화사상 인물화의 최고봉으로 일컬어진다.

 

“고개지는 됨됨이는 어리석지만 그림에는 뛰어났다.

장욱은 미치광이였으나 글씨에는 뛰어났다.

 

이 두 사람이 뛰어난 경지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신령스럽기 때문이다.

장자의 말에 ‘뜻을 한곳에 쓰고 딴 데로 나누지 않으면 곧 신의 경지에 들어간다’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나오는 말이다.

과연 중국 최고의 인물화가라는 고개지는 오직 그림에만 몰두하여

다른 일은 돌아보지 않았던 ‘광화사狂畵師’였을까?

 

 

◾6조시대의 개막

후한 말의 난세는 위, 촉, 오 삼국의 정립으로 귀결되었으나 수십 년 만에 진晋(서진)의 통일천하로 바뀌었다.

하지만 진나라 역시 반세기 만에 북방민족의 공격을 받아 궤멸했으며 다만 옛날 오나라의 수도였던 건업을

통치하던 사마예가 스스로 황제가 됨으로써 동진東晋이 화북의 근거지를 잃은 채 한족 왕조의 맥을 잇게 되었다.

 

이후 화북에서는 북방민족이 세운 오호십육국을 거쳐 북방민족 왕조가 한족과 연합한 북위, 북제, 북주의 北朝가,

강남에서는 동진, 송, 제, 양, 진의 남조南朝가 흥망을 거듭하며 남북조 시대를 엮어간다.

 

남조의 경우에는 삼국시대의 오나라까지 포함하여 6朝시대라고도 하는데 6조는 화북에서 내려온 왕실과 지배세력이

이질적인 강남의 풍토와 문화 그리고 강남 토착 세력과 갈등과 조화, 화합과 분열을 이루면서 독특한 세계를 형성해 갔다.

 

◾재절才絶, 화절畵絶, 치절痴絶

4세기 후반에 활동한 고개지顧愷之의 정확한 생몰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은데

지금의 장쑤성에 포함되는 강동 진릉현의 무석 출신이다.

 

고顧씨는 강동의 대표적인 세족 중 하나로 사마예가 동진을 세울 때 협력했으며

그 대가로 지배귀족집단의 일익을 차지해왔다.

 

하지만 강남 토착 세족들은 대개 그랬듯 그 출세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사마씨 왕족이나 다른 화북 출신 명문세족의 힘에 기대려는 경향이 있었고

고개지의 아버지인 고열지는 회계왕 사마욱의 측근인 은호의 가신으로 일했다.

 

고개지 스스로는 역시 화북 세족으로 촉을 병합하고 북벌을 성공시켜

세력이 임금을 덮을 정도가 된 환온의 부하가 되어 참군의 벼슬을 했다.

환온은 고개지와 그림을 토론하기 좋아하여 밤늦게까지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고 한다.

 

고개지가 화가로서 이름을 떨치게 된 계기는 364년에 수도 건강의 와관사 벽에 유마힐의 초상을 그리고부터다.

그림을 그리니 유마힐의 눈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듯했고 이를 구경하려고 전국에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이후 동진의 여러 왕들과 고관들의 초상을 그려 명성이 당대에 진동했다.

 

환온의 부하였다가 나중에는 정적이 되는 사안은 고개지에게

“당신의 그림은 인간이 생긴 이래 일찍이 없었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그림 솜씨와 관련된 설화도 많이 생겨났다.

가령 인물을 그리고 눈동자를 찍지 않는 경우가 많았는데

“만약 눈동자를 찍으면 살아서 말을 할 것이다”라고 했다는 이야기,

 

은중감이라는 고관이 눈병을 앓았는데

고개지가 눈빛이 맑은 모습으로 초상화를 그려 주자 눈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는 이야기,

 

고개지가 어느 미녀를 연모하여 잊을 수가 없어서 그림으로 그려 벽에 걸어 두었는데 못을 박은 부위가

마침 심장이었고 그 순간 먼 곳에 있던 미녀의 가슴이 찌르는 듯 아팠다는 이야기 등등.

 

고개지를 무척 아꼈던 환온은 끝내 황제까지 갈아치우며 극도의 세도를 부렸지만 373년에 병사했다.

그러자 고개지는 환온의 무덤을 찾아가 대성통곡을 했다.

 

아무리 그래도 정도에 지나칠 정도로 통곡하더라고 주변에서 말하자 그는

“정도에 지나치다는 말로 표현하면 그만이냐?

곡소리는 천둥이 산을 깨부수듯, 눈물은 은하수가 바다로 쏟아져 내리듯 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뒤에도 여러 고위층 밑에 들어가 일하며 그림과 글을 짓고 살았다.

글 솜씨 역시 뛰어나서 오언 고시의 대표작으로 즐겨 읊어지는

<四時 네 계절> 외에도 여러 글이 그의 작품이라 전해진다.

 

춘수만사택春水滿四澤 봄이라 두루두루 연못마다 물이 가득 

하운다기봉夏雲多奇峰 여름 구름 뭉게뭉게 기이한 봉우리인 듯 

추월양명휘秋月揚明輝 가을 달빛은 휘영청 온 누리에 떨치며 

동령수고송冬嶺秀孤松 겨울 산에 빼어날 손 한 그루의 소나무여 

 

그래서 세상에서는 그를 삼절이라 불렀는데 재절才絶, 화절畵絶, 치절痴絶이다.

글재주 종결자, 그림솜씨 종결자, 그리고 미친 짓 종결자라는 뜻이다.

 

글과 그림에 모두 뛰어났을 뿐 아니라 기행을 일삼고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꺼리지 않았기에

치절이라는 별명까지 붙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이수광이 전해들은 대로 ‘어리석은 됨됨이’의 소유자였다는 것일까.

 

◾‘치절痴絶’의 이면

그러나 전해 내려오는 그의 인생사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올곧게 예술에만 힘쓰는 참된 예인’과는 다른 얼굴이 드러난다.

지나칠 정도로 출세를 바라고 명리에 집착하는 모습이 떠오르는 것이다.

 

먼저 그의 아버지는 은호에게 끝까지 충성을 다했으나

고개지는 은호를 죽음으로 몰았던 환온 밑에서 벼슬을 했다.

 

환온이 죽자 그는 “천둥처럼 은하수처럼” 통곡을 했으나 다시 환온 집안과 앙숙인 은중감의 참군이 되더니

환온의 아들 환현이 그를 없애자 다시 환현 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환현이 제위를 찬탈하여 초나라 황제를 칭했을 때도 계속 옆에 있다가 유유가 병사를 일으켜

그를 쫓아내자 다시 새 정권을 섬겨 산기상시라는 벼슬을 살다가 62세로 죽었다.

 

<유유劉裕. 동진의 장군으로 환현을 토벌하고 동진 왕조를 복원했지만

결국 스스로 동진을 멸망시키고 송왕조를 세워 송무제宋武帝로 불렸다.>

 

물론 위진남북조의 어지러운 세상에서는 한 사람의 주군에게

평생 지조를 지키는 일이 드물었고 주군을 해친 적에게 발탁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고개지처럼 변신을 거듭한 사람은 드물다.

또한 그는 예술 활동조차 권력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수단으로 쓴 게 아닌가 하는 의혹까지 없지 않다.

 

환온을 시작으로 숱하게 갈아 친 주공들의 모습을 이상화한 초상을 바쳤을 뿐 아니라 그가 화가로서

명성을 날리게 된 와관사의 <유마힐상> 그림도 불교를 좋아하는 환온의 환심을 사려는 계산 때문이었다고 한다.

 

주공들의 덕을 칭송하는 시도 매번 바쳐 그림과 더불어 관심을 얻었는데 말년에는 사첨이라는

황제의 측근과 집무실을 나란히 쓰게 되자 밤마다 시를 읊어 들려주었다.

 

사첨이 “좋군요” 하고 몇 번 칭찬하니 고개지는 더욱 신이 나서 멈출 줄을 몰랐는데 사첨이 나중에 하인에게

대신 추임새를 주라고 이르고 자신은 들어가 잤지만 고개지는 그것도 모른 채 밤새도록 시를 읊었다고 한다.

 

“늘 스스로를 자랑하고 뽐내는 일이 도가 지나쳤으므로 생각 없는 젊은이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는 평가가 남아 있다.

 

그와 관련된 전설들도 어쩌면 그 자신이 스스로를 신비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지어낸 호언장담의 산물일 수 있다.

 

“내가 눈동자를 그려 넣으면 살아 움직일 것이다”라고 했다는 말도 그렇고

“여자를 그려 그 가슴에 못을 박으니 실제의 여자가 괴로워했다더라”는 말도 그렇다.

 

또 한 번은 환현이 고개지가 애지중지하던 진귀한 옛 그림들에 탐을 내어 상자를 뜯고 훔쳐갔다.

그러자 고개지는

“봐라! 그림이 실체를 갖춰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예술의 수준이 지극하면 이렇게 되는 것이다”라고 떠들고 다녔다고 한다.

 

그에게 ‘치절’이라는 별명이 붙은 까닭도 우직하게 그림만 파고들어서라기보다

이처럼 어이없고 경박한 행동이 많았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고개지의 ‘전신론’을 계승했던 남제南齊의 화가 사혁은 정작 고개지를 가리켜

“제법 심오한 경지를 개척했으며 붓놀림이 정밀했다.

하지만 뜻만큼 작품을 만들지 못했으며 명성은 실제보다 과장되어 있다”면서 그를 역대 화가들 중 제3품에 놓았다.

 

◾동양 미술의 중요한 전통을 세우다

그러나 고개지의 인간적인 참모습이 어쨌든 그는 중국미술사에 지워질 수 없는

큰 전통의 초석을 마련했으며 그 영향은 동양미술 전체에 미쳤다.

 

그것이 바로 그의 <전신론傳神論> 즉 그림은 대상의 외형을 묘사하기보다

그 의미를, 정신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한다는 관점이다.

 

고대 중국의 회화론은 되도록 대상을 외형적으로 닮게 그렸어야 좋은 그림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비자>에는

“개나 말 같은 동물이 가장 그리기 어렵고 귀신이나 도깨비는 가장 그리기 쉽다”는 말이 나온다.

 

개나 말은 실체가 있지만 귀신이나 도깨비는 아무도 실제 본 사람이 없으니

닮았는지 아닌지를 따질 수 없으므로 쉽게 그린다는 말이다.

 

그러나 고개지는

“사람을 그리기가 가장 어렵다.

그 다음은 산수, 다음은 개와 말 같은 동물이며 누각이나 정자는 가장 쉽다”라고 <논화論畵>에 썼다.

누각이나 정자는 생명이 없는 조형물이므로 그 정신을 묘사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어서 쉽다는 것이다.

 

개와 말은 생명이 있지만 사람과 같이 심오한 정신은 없으며 산수도 사실 무기물이지만 동양에서는

생기의 원천이며 사람이 감정을 이입하는 배경으로 여겼으므로 동물보다 더 오묘하다.

 

그리고 사람을 묘사할 때는 그 성격, 신분, 도덕이나 재능의 수준, 감정이며

정치적 입장까지 두루 묘사해야 하므로 가장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개지에 따르면 영웅호걸은 늠름함을 표현하도록 덩치가 크고 눈이 부리부리하게 그려야 하며

성인군자는 인자함과 고결함이 드러나도록 얼굴이 희고 눈이 가늘게 그려야 한다.

 

땅딸막한 호걸, 가무잡잡한 군자도 실제로는 많을 텐데 말이다.

같은 사람이라도 우울한 상황에 처해 있는 장면에서는 얼굴이 수척하고 옷이 후줄근해져야 하며

격정적인 상황이라면 낯빛이 불그레하고 옷자락이 바람이라도 부는 듯 나부껴야 한다.

 

고개지는 자연을 묘사할 때도 보이는 대로가 아니라 자연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에 따라 그릴 것을 주장했다.

“운대산의 서쪽과 북쪽에도 언덕이 둘러싸도록 그리고 두 개의 커다란 돌을 그려 궁궐 문처럼 보이도록 한다.

바위 위에는 생동하는 봉황을 그린다.

 

가뿐히 춤추는 듯 나는 듯 그리고 깃털은 빼어나며 정밀하게,

꼬리와 날개는 높이 치켜든 채로 가파른 절벽을 내려다보는 자세로 그린다.

뒤쪽으로 붉고 가파른 바위가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로 서 있게 한다.

 

운대산 서쪽의 절벽 맞은편에는 계곡을 그린다.

계곡 아래 물이 맑게 흐르는 모습을 그리고 절벽 바깥쪽에 백호 한 마리가

바위 위에서 몸을 굽혀 물을 마시는 모습을 그린다.

산의 형태는 급격히 경사지도록 그려 험준하게 느껴지게끔 한다.”/화운대산기

 

아마 오늘날 중학교 미술 시간에 오늘은 산의 모습을 그리자면서

미술 선생이 이런 설명을 했다면 ‘미친 짓 종결자’라는 딱지가 붙으리라.

 

그러나 사물의 외관에 구애되지 말고 화가가 해석한 의미에 따라

나아가 화가의 내면에 느껴지는 심상에 따라 형태를 변형시켜 그린다는 생각은

서양미술에서는 19세기 말의 후기 인상주의나 표현주의에서 비로소 이루어진다.

 

또는 대상의 외형을 과장 왜곡하여 정치사회적인 의미를 담도록 하는 식이라면

캐리커처(풍자화)에서 쓰는 화법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고개지는 대상을 임의로 그릴 것이 아니라 대상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골법骨法을 파악해서

화폭에 재현해야 하며 얼마나 대상의 골법을 꿰뚫어볼 수 있느냐가 화가의 기량을 크게 좌우한다고 여겼다.

 

고개지의 <전신론>은 중국미술사에서 큰 전환점을 마련했으며

이후의 중국화 특히 남종화는 사실보다 정신을 묘사하는 것을 과제로 삼게 된다.

 

한국과 일본에도 그런 사상이 전해져서

한국의 경우 18세기에 진경산수화가 나타나기까지 관념적 화법 위주로 그림을 그렸다.

 

◾복잡하고 혼란한 시대의 인간 그리고 예술

오늘날 고개지가 직접 그린 그림은 한 점도 남아 있지 않다.

 

영국박물관에 있는 <여사잠도권>은 당나라 때의 모작이며

베이징 고궁박물원의 <낙신부도권>은 송나라 때의 모작이다.

(<낙신부도권>의 경우 동진 명제의 작품이라는 설도 있다).

 

<여사잠도권>은 서진의 장화가 혜제의 황후 가씨의 행실을 경계하기 위해

“부녀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을 정리해 지었다는 <여사잠>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낙신부도권>은 삼국시대 위나라의 조식이 형수인 견황후에 대한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낙수의

선녀와의 비극적 사랑 이야기로 풀어냈다는 <낙신부>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두 그림 모두 거침없고 부드러운 곡선으로 인물을 묘사했으며

날아갈 듯 생동하는 분위기 속에서 대상의 의미와 감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

하지만 그림의 성격에 맞게 <여사잠도권>에서는 인물의 표정이나 배경 표현이 절제되고 간결한 반면

<낙신부도권>에서는 현란하고 격동적이다.

 

생각해 보면 <여사잠도권>은 유교의 사상을 <낙신부도권>은 도교의 사상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에 지금은 사라진 고개지의 또 하나의 대표작 <유마힐상>은 불교의 것이다.

6조의 문화를 계승하고 집대성한 당 왕조 때는 시성詩聖, 시선詩仙, 시불詩佛이 나타났다.

 

시성 두보는 현실 정치와 도덕 문제에 대한 관심에 사로잡혀 있었고

시선 이백은 어느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스스로의 감정에 충실하게 살았다.

그리고 시불 왕유는 자신과 세상의 경계가 없어지는 흔연한 경지를 그렸다.

 

고개지에게는 이 3가지의 성격이 동시에 갖춰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6조시대라는 시대의 ‘골법’이었다.

 

유, 불, 도의 가르침이 마구 겹치고 뒤섞이던 시대, 중화와 오랑캐의 구분이 모호해진 시대,

두루 정해진 표준보다는 저마다 개인의 처세술에 따라야 했던 시대의/네이버 지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