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연명과 동시대의 인물 혜원慧遠
도연명과 동시대의 인물 혜원慧遠
혜원慧遠(334-416) 동진의 승.
속성은 하賈씨, 중국 정토교의 선조라고 하며 염불의 결사 <백련사白蓮社>의 시조라고 한다.
여산廬山에 살았으므로 <여산의 혜원>이라고 하며 隋代 지론종地論宗의 정영사淨影寺의 혜원과 구별하고 있다.
13세 때에 고향을 떠나서 허창許昌, 낙양洛陽에서 유학해 유교의 육경을 닦았으며 특히 노장학의 대가이다.
354년 21세 때 호족지배의 혼란이 계속되는 화북에서 강남으로 가서 은사 원선苑宣을 방문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와서 아우인 혜지慧持와 함께 태행항산의 절에서 크게 홍법弘法에 진력한
석도안釋道安 밑에서 제자가 되고 불문에 들어가게 되었다.
석도안을 따라서 각지를 전전해서 365년에 양양으로 옮겼다.
그러나 양양이 379년에 전진의 군대에 습격당해서 석도안들이 장안에 납치되었기 때문에 혜원은 난을 피해서
제자 수십 명을 이끌고 형주 상명사에 이르고 나부산에 가려는 도중 여산의 경승의 땅에서 선배인 혜영慧永에게
만류되어서 강주자사 항이桓伊의 기부로 동림사를 세우고 거기에 머물렀다.
그 이후 416년, 83세로 죽을 때까지 30년 정도 은둔생활을 하였는데
그 종교적 감화는 강남 전역에 미쳐서 많은 승려만이 아니라 지식인이 운집하게 되었다.
인도승인 산가데바가 여산에 오자 <아외담심론阿畏曇心論><삼법도론三法度論>의 중역을 부탁하고
그 자신은 서문을 쓰고 담마류지曇摩流支에게는 <십송율十誦律>의 한역을 의뢰하고
불타 발타라跋陀羅가 장안에서 여산에 오자 <수행방편선경修行方便禪經> 등의 번역을 요청했다.
또한 쿠마라지바가 장안에 오자 서간을 보내서 친분을 맺고 가끔 제자를 보내서 교의를 밝혔다.
이 성과가 <대승대의장大乘大義章>이다.
여산이라고 하면 <백련사의 염불> 혜원이라고 하면 연종(정토종)의 조사라고 할 정도인데
후세에 미친 영향이 큰 것은 123명의 동지와 반야대般若台, 아미타상 앞에서 염불실천을 서약한 사적이다.
그 입서문立誓文은 혜원에 대신해서 유유민劉遺民이 썼다.
그 서약은 무상관無常觀과 삼세인과응보三世因果應報의 교의상에 서 있다.
이 염불삼매실천의 주요한 근거가 된 불전은 <반주삼매경>으로 석도안의 열성적인 반야학을 계승한 혜원은
칭명염불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견불삼매見佛三昧의 염불을 권장하였다.
혜원을 중심으로 하는 여산교단이 융성해짐에 따라서 당시의 국가권력과의 마찰은 피할 수 없었다.
동진의 실력가 환현桓玄이 불교 교단에게 왕권에 대한 종속을 요구하자
혜원은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을 저술해서 반대하고 그 유명한 환현도 강행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시 교단이 비대화됨에 따라서 속화된 것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교단의 자숙을 요구하고
교단생활의 청규淸規라고 할 수 있는 <법사절도서> 등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후세 <원규遠規>라는 것이다.
혜원에서 시작된 정토교를 <혜원류>라고 하며
자민삼장慈民三藏류, 도탁ㆍ선도류와 함께 중국 정토종의 삼류의 하나라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종교학대사전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
어느 날 군벌 환현은 혜원스님을 찾았다.
그러나 혜원스님은 아파서 못 나간다고 말했다.
스님은 30년 동안 누가 찾아와도 절 앞에 있는 개울인 虎溪 이상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환현은 스님을 존경했기 때문에 이를 두고 탓하지 않았다.
나중에 환현이 왕이 되고 나서 사문은 왕에게 절을 하지 않는 문제가 다시 거론되자
환현은 혜원스님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러자 혜원스님은 사문은 세상밖에 있는 사람인데 결이 다른 것 아니냐고 답을 하니
환현은 스님은 왕에게 절을 안 해도 된다고 결단을 내렸다.
그 이후 강남에서 사문은 왕에게 절을 하지 않았다.
이런 내용을 적은 책이 혜원스님의 <사문부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이다.
환현은 상태가 안 좋은 사문은 정리해서 불교의 질을 높이려고 했다.
그래서 여산을 특별지구로 지정해서 손을 대지 않았다.
혜원스님은 정토종의 시조다.
여산에 가면 다보탑도 있고 동림사 앞엔 관세음보살이 계신다는 흰 연꽃도 피어 있다.
그래서 백련결사도 하신다. 우리나라 강진의 백련사는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호계삼소虎溪三笑
혜원은 여산廬山에 위치한 동림사東林寺에 살고 있었다.
혜원이 손님을 배웅할 때 여산의 계곡인 호계虎溪를 건너가면 호랑이가 울었다 한다.
때문에 혜원이 손님을 보낼 때는 이 호계를 경계로 하여 그곳 너머로는 배웅하지 않았다.
어느 날 도사道士 육수정陸修靜과 귀거래사歸去來辭의 시인 도연명陶淵明이 혜원을 찾아왔다.
혜원은 이 두 사람과의 대화에 열중한 나머지 호계를 지나쳐 건너가 버리고 말았다.
호랑이가 우는 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소 그 사실을 알게 된 세 사람이 크게 웃었다.
이 고사故事가 바로 호계삼소虎溪三笑이다.
이후 虎溪三笑는 동양화의 유명한 畵題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사실 혜원스님과 육수정은 너무 나이 차이가 많아 서로 대화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이는 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다.
●삼소도三笑圖/성삼문成三問
호계虎溪에서 혜원 법사慧遠法師, 도연명陶淵明, 육수정陸修靜 세 사람이 웃는 그림.
신교나부유형해神交那復有形骸 정신적으로 사귀었으니 어찌 다시 몸뚱이가 필요하겠는가.
우과계교일소개偶過溪橋一笑開 시내에 걸친 다리를 우연히 지나고 한바탕 웃었다네.
천고풍류여작일千古風流如昨日 오랜 세월 동안 그 風流가 어제 일 같아서
완연상대수장회宛然相對首長回 눈에 보이는 것처럼 서로 마주하고 있으니 늘 고개를 돌리게 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