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수경念受經 ②
염수경念受經 ②
11) 한적한 곳
2.
어느 때 한 비구가 세존을 뵈러 왔다.
공손히 절을 올리고는 한 곁에 앉았다.
3.
그렇게 앉아서는 세존께 다음과 같이 여쭈었다. 존자시여,
제가 한적한 곳에 가서 홀로 앉아있는 중에 문득 이런 생각이 일어났습니다.
`세존께서 세 가지 느낌을 설하셨으니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그것이다.
이 셋을 세존께서는 설하셨다.
그런데 세존께서는 또 느껴진 것은 무엇이든지 괴로움에 속한다고 설하셨다.
' 존자시여, 여기서 `느껴진 것은 무엇이든지 괴로움에 속한다'는 것은 무엇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까?
4.
잘 말했다, 비구여. 잘 말했다!
나는 세 가지 느낌을 가르쳤다.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이 셋을 나는 가르쳤다.
또 한편으로 비구여, 나는 `느껴진 것은 무엇이든지 괴로운 것이다.'라고 가르쳤다.
그런데 이 뒤의 말은 모든 조건 지워진 현상[諸行 sa.nkhaaraa] 의 무상함을 두고 한 말이었다.
`느껴진 것은 무엇이든지 괴로운 것이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니라.
[諸行 원역자는 all conditioned phenomena란 표현을 쓰고 있다.
`모든 조건 지워진 현상'으로 옮겼는데 아래에서는 이미 우리에게 익숙해진 `제행'으로 쓰겠다.
내가 그렇게 말한 것은 제행諸行이 무너지기 마련이며 사그라지기 마련이며 열정이 식기 마련이며
그치기 마련이며 변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니라]
5.
비구여, 나는 더 나아가서 제행의 순차적인 그침에 대해서도 가르쳤다.
[그침: nirodha의 역. 보통 滅로 옮기는데 영어에서는 cease로 옮김. 원뜻은 抑止라는 뜻에 가깝다]
초선初禪에 들면 말(vaacaa)이 그치며
二禪에 들면 생각 일으킴(vitakka)과 추론적 사유(vicaara)가 그치며
[생각 일으킴은 vitakka의, 추론적 사유는 vicaara의 새김.
영역자가 쓰고 있는 말은 thought-conception과 discursive thinking임.
고요한 소리 보리수 잎에서는 생각(thought)과 숙고(contemplation) 등으로 옮겼음]
三禪에 들면 희열(piiti)이 그치며
四禪에 들면 入出息이 그치며
空無邊處에 들면 물질에 대한 인식[色想, ruupasa~n~naa]이 그치며
識無邊處에 들면 공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그치며
無所有處에 들면 식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그치며
非想非非想處에 들면 무소유처에 대한 인식이 그친다.
想受滅에 들면 인식과 느낌이 그친다.
번뇌가 다한 비구에게서는 탐욕[貪]이 그치고 성냄[瞋]이 그치고 미망[癡]이 그친다.
6.
비구여, 다시 더 나아가서 나는 제행의 순차적인 가라앉음에 대해서도 가르쳤다.
[가라앉음: vuupasamaa의 역. 보통 적정寂靜 정지靜止 등으로 옮김.
가라앉는다는 뜻인 바 앞에 말한 nirodha가 억지抑止의 단계라면 이제 억눌려 정지된 것이 그 타성을 잃고 가라앉아 진정되는 것을 가르치는 것으로 이해하고 원역자는 이를 stilling으로 옮긴 것 같다]
초선에 든 자에게서는 말이 가라앉으며
이선에 들면 생각 일으킴과 추론적 사유가 가라앉으며
삼선에 들면 희열이 가라앉으며
사선에 들면 입출식이 가라앉으며
공무변처에 들면 물질에 대한 인식이 가라앉으며
식무변처에 들면 공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가라앉으며
무소유처에 들면 식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가라앉으며
비상비비상처에 들면 무소유처에 대한 인식이 가라앉는다.
상수멸에 들면 인식과 느낌이 가라앉는다.
번뇌가 다한 비구에게서는 탐욕이 가라앉고 성냄이 가라앉고 미망이 가라앉는다.
7.
비구여, 무릇 여섯 가지 고요함이 있나니
[고요함: passaddhi의 역. 칠각지의 다섯 번째 요소로 보통 경안輕安 또는 제除로 번역됨.
진정된 다음에 육체적 정신적으로 가뿐하고 평안함을 말한다.
영역자는 quietening으로 옮기고 있는데 빠알리어 사전들은 대개 calmness, tranquillity 등을 쓰고 있다.
일단 고요함이라 새기기로 한다]
초선을 이룬 자에게서는 말이 고요해지며
이선에 들면 생각 일으킴과 추론적 사유가 고요해지며
삼선에 들면 희열이 고요해지며
사선에 들면 입출식이 고요해지며
상수멸에 들면 인식과 느낌이 고요해진다.
번뇌가 다한 비구에게서는 탐욕이 고요해지며, 성냄이 고요해지며, 미망이 고요해진다.
[`고요해짐'(pa.tippassaddha)의 절에선 네 가지 無色定이 언급되지 않는다.
주석서에 따르면 이 네 가지 정은 `상수멸'에 포함되고 있다는 것이다
(상수멸을 성취하는데 이 네 가지 定은 조건이 되니까]
12) 허공(1)
3.
비구들이여, 허공중에는 갖가지 바람이 불고 있다.
동에서, 서에서, 북에서, 남에서 불어오는 바람,
먼지 섞인 바람, 먼지 없는 바람, 더운 바람, 찬바람, 부드러운 바람, 거센 바람들이다.
마찬가지로 비구들이여, 이 몸속에서도 갖가지 느낌들이 일어난다.
즐거운 느낌들이 일어나기도 하고 괴로운 느낌들이 일어나기도 하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들이 일어나기도 한다.
저 위의 허공중에는 온갖 바람들이 불고 있어
동에서 오는가 하면 서에서도 오고, 북에서 오는가 하면 또 남에서도 불어 닥치고
먼지 섞인 바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것도 있고, 찬바람인가 하면 더운 것도 있으며
거센 바람인가 하면 부드러운 바람도 불고 ―가지가지로 바람이 불고 있다.
그와 같이 여기 이 몸속에서도 가지가지로 느낌이 일어나나니,
즐거운 느낌들, 괴로운 느낌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들이라.
그러나 비구가 열심이어서 분명히 살피어 다시 태어남의 기반을 허물기에 열심이라면
마침내 모든 느낌을 두루 통찰하는 賢者가 되리니
그는 느낌을 두루 통찰함으로써 바로 이 생에서 번뇌가 다하여
몸이 무너질 때엔 법에 확고히 주하며 헤아림으로는 미치지 못할 지혜의 달인일지니
13) 허공(2)[앞의 경과 동일한데 뒤의 게송만 없다]
비구들이여, 허공중에는 가지각색의 바람이 불고 있다.
동에서, 서에서, 북에서, 남에서 불어오는 바람,
먼지 섞인 바람, 먼지 없는 바람, 더운 바람, 찬바람, 부드러운 바람, 거센 바람들이다.
마찬가지로 비구들이여, 이 몸속에서도 가지각색의 느낌이 일어난다.
즐거운 느낌들이 일어나기도 하고 괴로운 느낌들이 일어나기도 하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들이 일어나기도 한다.
14) 객사客舍
비구들이여,
객사에는 동에서 온 사람들이 묵기도 하고, 서에서 온 사람들이 묵기도 하며,
북에서 온 사람들이 묵기도 하며, 남에서 온 사람들이 묵기도 한다.
무사계급 사람들이 와서 묵기도 하고, 바라문들이 와서 묵기도 하며,
평민들이 와서 묵기도 하며, 노예들이 와서 묵기도 한다.
그와 같이 비구들이여, 이 몸에도 여러 종류의 느낌이 일어난다.
즐거운 느낌들이 일어나기도 하고, 괴로운 느낌들이 일어나기도 하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들이 일어나기도 한다.
세간적인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기도 하며
세간적인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기도 하며
세간적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나기도 한다.
출세간적인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기도 하고
출세간적인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기도 하며
출세간적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나기도 한다.
15) 아난다(1)
►P.T.S. 빠알리어본의 원제명은 Santakam, 영역본은 Property라 옮겼고 일역본은 이것이 내용과 무관하다해서 止息이라 제하였다. 본경과 다음경 6절에 vuupasamo는 止息이라 옮기고 어근 s#am에서 온 것으로 봐 이를 제목으로 취했다는 설명이다. 본문에서는 원역자 냐나뽀니까 스님의 용례를 따랐다.
2.
어느 때 아난다 장로가 세존을 뵈러 갔다.
공손히 절을 올리고는 한 곁에 앉았다.
3.
그렇게 앉아서는 세존께 여쭈었다.
"존자시여, 느낌이란 무엇입니까?
느낌의 일어남이란 무엇입니까?
느낌의 그침은 무엇입니까?
느낌의 그침에 이르는 길은 무엇입니까?
느낌에 있어 달콤함이란 무엇입니까?
느낌에 있어 위험함이란 무엇입니까?
그들로부터 벗어남이란 무엇입니까?"
4.
아난다여,
이 셋이 느낌이나니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이것을 일러 느낌이라 한다.
촉이 일어나면 느낌이 일어나고 촉이 그치면 느낌이 그친다.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이 `느낌의 그침에 이르는 길'이니
바른 견해[正見],
바른 생각[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노력[正精進],
바른 마음 챙김[正念],
바른 선정[正定]이 그것이다.
느낌으로 인해서 즐거움과 기쁨이 생기나니 이것이 느낌의 달콤함이다.
느낌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하기 마련이니 이것이 느낌에 있어 위험함이다.
느낌에 대한 욕탐을 제어하고 끊어버리면 이것이 느낌으로부터 벗어남이다.
5.
아난다여, 더 나아가서 나는 제행의 순차적인 그침에 대해서도 설했다.
초선에 들면 말이 그치며
이선에 들면 생각 일으킴과 추론적 사유가 그치며
삼선에 들면 희열이 그치며
사선에 들면 입출식이 그치며
공무변처에 들면 물질에 대한 인식이 그치며
식무변처에 들면 공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그치며
무소유처에 들면 식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그치며
비상비비상처에 들면 무소유처에 대한 인식이 그친다.
상수멸에 들면 인식과 느낌이 그친다.
번뇌가 다한 비구에게서는 탐욕이 그치고 성냄이 그치고, 미망이 그친다.
6.
아난다여, 다시 더 나아가서 나는 제행의 순차적인 가라앉음에 대해서도 가르쳤다.
초선에 든 자에게서는 말이 가라앉으며
이선에 들면 생각 일으킴과 추론적 사유가 가라앉으며
삼선에 들면 희열이 가라앉으며
사선에 들면 입출식이 가라앉으며
공무변처에 들면 물질에 대한 인식이 가라앉으며
식무변처에 들면 공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가라앉으며
무소유처에 들면 식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가라앉으며
비상비비상처에 들면 무소유처에 대한 인식이 가라앉는다.
상수멸에 들면 인식과 느낌이 가라앉는다.
번뇌가 다한 비구에게서는 탐욕이 가라앉으며 성냄이 가라앉으며, 미망이 가라앉는다.
7.
아난다여, 다시 더 나아가서 나는 제행의 순차적인 고요함에 대하여 가르쳤다.
초선을 이룬 자에게선 말이 고요해지며
이선에 들면 생각 일으킴과 추론적 사유가 고요해지며
삼선에 들면 희열이 고요해지며
사선에 들면 입출식이 고요해지며
공무변처에 들면 물질에 대한 인식이 고요해지며
식무변처에 들면 공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고요해지며
무소유처에 들면 식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고요해지며
비상비비상처에 들면 무소유처에 대한 인식이 고요해지며
상수멸에 들면 인식과 느낌이 고요해진다.
번뇌가 다한 비구에게서는 탐욕이 고요해지고 성냄이 고요해지며, 미망이 고요해진다.
16) 아난다(2)
2.
어느 때 아난다 장로가 세존을 뵈러 갔다.
공손히 절을 올리고는 한 곁에 앉았다.
3.
그렇게 앉은 아난다 장로에게 세존께서 물으셨다.
느낌이란 무엇이냐?
느낌의 일어남이란 무엇이냐?
느낌의 그침은 무엇이냐?
느낌의 그침에 이르는 길은 무엇이냐?
느낌에 있어 달콤함이란 무엇이냐?
위험함이란 무엇이냐?
벗어남이란 무엇이냐?
4.
존자시여,
우리들의 법은 세존을 근원으로 하며 세존을 봇도랑 내는 이로 하며 세존을 귀의처로 합니다.
존자시여,
부디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의 뜻을 (친히) 밝혀주시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세존으로부터 듣게 되면 비구들은 마음에 새겨 지닐 것입니다.
그러면 아난다여, 듣고 잘 유념하도록 해라, 내가 말 할테니.
네, 존자시여. 아난다 장로가 대답했다.
5.
세존께선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세 가지 느낌이 있나니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다.
이를 일러 느낌이라 한다.
촉이 일어나면 느낌이 일어나고 촉이 그치면 느낌이 그친다.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이 `느낌의 그침에 이르는 길'이니
바른 견해,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노력,
바른 마음 챙김,
바른 선정이 그것이다.
느낌으로 인해서 즐거움과 기쁨이 생기나니 이것이 느낌의 달콤함이다.
느낌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하기 마련이니 이것이 느낌에 있어 위험함이다.
느낌에 대한 욕탐을 제어하고 끊어버리면 이것이 느낌으로부터 벗어남이다.
6.
아난다여, 더 나아가서 나는 제행의 순차적인 그침에 대해서도 설했다.
초선에 들면 말이 그치며
이선에 들면 생각 일으킴과 추론적 사유가 그치며
삼선에 들면 희열이 그치며
사선에 들면 입출식이 그치며
공무변처에 들면 물질에 대한 인식이 그치며
식무변처에 들면 공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그치며
무소유처에 들면 식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그치며
비상비비상처에 들면 무소유처에 대한 인식이 그친다.
상수멸에 들면 인식과 느낌이 그친다.
번뇌가 다한 비구에게서는 탐욕이 그치고 성냄이 그치고 미망이 그친다.
7.
아난다여, 다시 더 나아가서 나는 제행의 순차적인 가라앉음에 대해서 가르쳤다.
초선에 든 자에게서는 말이 가라앉으며
이선에 들면 생각 일으킴과 추론적 사유가 가라앉으며
삼선에 들면 희열이 가라앉으며
사선에 들면 입출식이 가라앉으며
공무변처에 들면 물질에 대한 인식이 가라앉으며
식무변처에 들면 공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가라앉으며
무소유처에 들면 식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가라앉으며
비상비비상처에 들면 무소유처에 대한 인식이 가라앉는다.
상수멸에 들면 인식과 느낌이 가라앉는다.
번뇌가 다한 비구에게서는 탐욕이 가라앉으며 성냄이 가라앉으며, 미망이 가라앉는다.
8.
아난다여, 다시 더 나아가서 나는 제행의 순차적인 고요함에 대하여 가르쳤다.
초선을 이룬 자에게선 말이 고요해지며
이선에 들면 생각 일으킴과 추론적 사유가 고요해지며
삼선에 들면 희열이 고요해지며
사선에 들면 입출식이 고요해지며
공무변처에 들면 물질에 대한 인식이 고요해지며
식무변처에 들면 공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고요해지며
무소유처에 들면 식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고요해지며
비상비비상처에 들면 무소유처에 대한 인식이 고요해지며
상수멸에 들면 인식과 느낌이 고요해진다.
번뇌가 다한 비구에게선 탐욕이 고요해지며 성냄이 고요해지며 미망이 고요해진다.
17) 비구 다중(1)
2.
어느 때 여러 비구들이 세존을 뵈러 갔다.
공손히 절을 올리고는 한 곁에 앉았다.
그렇게 앉아서는 세존께 여쭈었다.
3.
존자시여,
느낌이란 무엇입니까?
느낌의 일어남이란 무엇입니까?
느낌의 그침은 무엇입니까?
느낌의 그침에 이르는 길은 무엇입니까?
느낌에 있어 달콤함이란 무엇입니까?
느낌에 있어 위험함이란 무엇입니까?
그들로부터 벗어남이란 무엇입니까?
4.
비구들이여,
세 가지 느낌이 있나니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다.
이를 일러 느낌이라 한다.
촉이 일어나면 느낌이 일어나고 촉이 그치면 느낌이 그친다.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이 `느낌의 그침에 이르는 길'이니
바른 견해,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노력,
바른 마음 챙김,
바른 선정이 그것이다.
느낌으로 인해서 즐거움과 기쁨이 생기나니 이것이 느낌의 달콤함이다.
느낌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하기 마련이니 이것이 느낌에 있어 위험함이다.
느낌에 대한 욕탐을 제어하고 끊어버리면 이것이 느낌으로부터 벗어남이다.
5.
비구들이여, 더 나아가서 나는 제행의 순차적인 그침에 대해서도 설했다.
초선에 들면 말이 그치며
이선에 들면 생각 일으킴과 추론적 사유가 그치며
삼선에 들면 희열이 그치며
사선에 들면 입출식이 그치며
공무변처에 들면 물질에 대한 인식이 그치며
식무변처에 들면 공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그치며
무소유처에 들면 식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그치며
비상비비상처에 들면 무소유처에 대한 인식이 그친다.
상수멸에 들면 인식과 느낌이 그친다.
번뇌가 다한 비구에게서는 탐욕이 그치고 성냄이 그치고, 미망이 그친다.
6.
비구들이여, 다시 더 나아가서 나는 제행의 순차적인 가라앉음에 대해서 가르쳤다.
초선에 든 자에게서는 말이 가라앉으며
이선에 들면 생각 일으킴과 추론적 사유가 가라앉으며
삼선에 들면 희열이 가라앉으며
사선에 들면 입출식이 가라앉으며
공무변처에 들면 물질에 대한 인식이 가라앉으며
식무변처에 들면 공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가라앉으며
무소유처에 들면 식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가라앉으며
비상비비상처에 들면 무소유처에 대한 인식이 가라앉는다.
상수멸에 들면 인식과 느낌이 가라앉는다.
번뇌가 다한 비구에게서는 탐욕이 가라앉으며 성냄이 가라앉으며, 미망이 가라앉는다.
7.
비구들이여, 여섯 가지 고요함이 있나니
초선을 이룬 자에게서는 말이 고요해지며
이선에 들면 생각 일으킴과 추론적 사유가 고요해지며
삼선에 들면 희열이 고요해지며
사선에 들면 입출식이 고요해지며
상수멸에 들면 인식과 느낌이 고요해진다.
번뇌가 다한 비구에게서는 탐욕이 고요해지며 성냄이 고요해지며, 미망이 고요해진다.
18) 비구 다중(2)
2.
어느 때 여러 비구들이 세존을 뵈러 갔다.
공손히 절을 올리고는 한 곁에 앉았다.
3.
그렇게 앉은 비구들에게 세존께서 물으셨다.
느낌이란 무엇이냐?
느낌의 일어남이란 무엇이냐?
느낌의 그침은 무엇이냐?
느낌의 그침에 이르는 길은 무엇이냐?
느낌에 있어 달콤함이란 무엇이냐?
위험함이란 무엇이냐?
벗어남이란 무엇이냐?
4.
존자시여,
우리들의 법은 세존을 근원으로 하며 세존을 봇도랑 내는 이로 하며 세존을 귀의처로 합니다.
존자시여,
부디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의 뜻을 (친히) 밝혀주신다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세존으로부터 듣게 되면 비구들은 마음에 새겨 지닐 것입니다.
5∼8.
비구들이여,
세 가지 느낌이 있나니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다.
이를 일러 느낌이라 한다.
촉이 일어나면 느낌이 일어난다.
(앞의 경과 같이 상세히 설하시다.)
19) 목수 빤짜깡가 1
[이 경은 중부 제59경 `많은 종류의 느낌'과 내용이 동일함]
2.
어느 때 목수 빤짜깡가가 우다이 장로를 뵈러 갔다.
가서 공손히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3.
그렇게 앉아서 목수 빤짜깡가는 우다이 장로께 이렇게 여쭈었다.
"우다이 존자시여, 세존께서는 몇 가지의 느낌을 설하셨습니까?"
"오, 목수여, 세존께서는 세 가지 느낌을 설하셨으니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입니다.
이들이 세존께서 가르치신 세 가지 느낌입니다."
4.
이 말을 듣고 목수 빤짜깡가는 우다이 장로께 이렇게 말했다.
"우다이 존자시여, 참으로 세존께서 가르치신 것은 세 가지가 아닙니다.
세존께서 설하신 것은 두 가지 느낌입니다.
즉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입니다. 존자시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적정寂靜하고도 오묘한 유類의 즐거움이라고 세존께서는 설하셨습니다."
5.
다시 우다이 장로가 목수 빤짜깡가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 목수여, 세존께서 설하신 느낌은 두 가지가 아닙니다.
세존께서는 세 가지 느낌을 설하셨나니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입니다."
두 번째로 목수 빤짜깡가는 우다이 장로께 이렇게 말했다.
"우다이 존자시여, 참으로 세존께서 가르치신 것은 세 가지가 아닙니다.
세존께서 설하신 것은 두 가지 느낌입니다.
즉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입니다. 존자시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적정하고도 오묘한 유의 즐거움이라고 세존께서는 설하셨습니다."
6.
세 번째로 우다이 장로가 목수 빤짜깡가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 목수여, 세존께서 설하신 느낌은 두 가지가 아닙니다.
세존께서는 세 가지 느낌을 설하셨나니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입니다."
세 번째로 목수 빤짜깡가는 우다이 장로께 이렇게 말했다.
"우다이 존자시여, 참으로 세존께서 가르치신 것은 세 가지가 아닙니다.
세존께서 설하신 것은 두 가지 느낌입니다.
즉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입니다. 존자시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적정하고도 오묘한 유의 즐거움이라고 세존께서는 설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다이 장로는 목수 빤짜깡가를 설복시킬 수 없었고 목수 빤짜깡가도 우다이 장로를 설득시킬 수가 없었다.
7.
아난다 장로가 우다이 장로와 목수 빤짜깡가 사이에 있었던 이 논쟁 얘기를 듣게 되었다.
8.
그러자 아난다 장로는 세존께 나아갔다.
공손히 절을 올리고는 한 곁에 앉았다.
그렇게 앉아서 아난다 장로는 우다이 장로와 목수 빤짜깡가 사이에 있었던 논쟁의 전말을 세존께 아뢰었다.
9.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목수 빤짜깡가가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우다이 비구의 주장은 옳았다.
마찬가지로 우다이 비구가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목수 빤짜깡가의 주장 또한 옳았다.
나는 방편에 따라 느낌들을 두 가지로 설했고 느낌들을 세 가지로 설했으며
다섯 가지로, 여섯 가지로, 열여덟 가지로, 서른여섯 가지로, 때로는 백여덟 가지로 설하기도 했다[제22경 참조]
아난다여, 이와 같이 나는 방편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법을 설했느니라.
10.
참으로 아난다여,
이처럼 나는 법을 방편에 따라 다르게 설했는데 이렇듯 제각기(의 근기에 맞춰) 잘 설해지고
잘 말해진 법에 동의하지 않고 수긍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말다툼을 벌여 신랄한 독설로 서로 상처를 주면서 논쟁과 논박으로 치닫고야 말 것이다.
아난다여, 이처럼 나는 방편 따라 법을 설했는데
제각기 잘 설명되어진 법에 동의하고 수긍하고 아주 흡족해하며 잘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사이좋게 화합하여 언쟁하지 않고 서로를 우정 어린 눈으로 보면서 물과 우유가 잘 섞이듯 할 것이다.
11.
아난다여, 여기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이 있나니 그 다섯은 무엇인가?
눈으로 인식되는 형상들이 있으니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매력 있고, 유혹적이며, 욕심을 짝하고, 탐심을 부추기는 것들이니라.
귀로 인식되는 소리들이 있으니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매력 있고, 유혹적이며, 욕심을 짝하고, 탐심을 부추기는 것들이니라.
코로 인식되는 냄새들이 있으니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매력 있고, 유혹적이며, 욕심을 짝하고, 탐심을 부추기는 것들이니라.
혀로 인식되는 맛들이 있으니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매력 있고, 유혹적이며, 욕심을 짝하고, 탐심을 부추기는 것들이니라.
몸으로 인식되는 닿음[觸]이 있으니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매력 있고, 유혹적이며, 욕심을 짝하고, 탐심을 부추기는 것들이니라.
아난다여, 이것들이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이다.
아난다여, 이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에 의지하여 생겨나는[緣已生] 즐거움(sukkha)과 기쁨(somanassa)을 관능적 쾌락이라 부른다.[관능적 쾌락: Kaamasukha. 한역은 欲樂. 영역은 sensual pleasure]
12.
그런데 아난다여,
만일 어떤 자들이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 말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나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제 아난다여, 이것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난다여,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가 있어 감각적 욕망을 아주 멀리하고
도덕적으로 향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 법[不善法]을 멀리한 채,
생각 일으킴과 추론적 사유를 수반하며
(불선법을) 멀리 떨쳐낸 데서 오는[遠離生] 희열과 즐거움이 있는 初禪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참으로 아난다여, 그 (관능적)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즐거움이니라.
20) 목수 빤짜깡가 2
13.
아난다여,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나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난다여,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가 있어 생각 일으킴[尋]과 추론적 사유[伺]가 가라앉으면서 제이선에 들어 머무는 바
그 선에는 내면적 확신이 있고 그리고 생각 일으킴과 추론적 사유가 붙지 않는 마음의 단일성이 있으며
삼매에서 생기는 희열과 즐거움이 있다.
이것이 참으로 아난다여,
(앞의 그)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니라.
14.
아난다여,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나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난다여,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가 있어 희열마저 차츰 사라져버리면서 온전히 알아차리는 채 평온에 머문다.
안으로는 즐거움을 느끼면서 성자들이 일컫는바 `평온한 채로 마음 챙겨 즐거움에 머문다'고 하는 제삼선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참으로 아난다여, 그 즐거움과는 다른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니라.
15.
아난다여,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나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난다여, 무엇이 그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인가?
여기 비구가 있어 즐거움을 버렸고 괴로움도 버렸으며 이미 그 이전에 기쁨과 슬픔은 사라져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가운데 평온에 기인한 마음 챙김의 청정함이 있는 제사선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참으로 아난다여, 그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니라.
16.
아난다여,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나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난다여,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가 있어 일체 색에 대한 인식[色想]을 완전히 초월했으며 장애에 대한 인식도 사라졌고
[장애(pa.tigha) 한역은 유대有對. 걸리는 것 또는 저항하는 것이라는 뜻에서 일체 감관에 대한 대경을 의미함.
또 윤리적 면에서 성냄[瞋心]을 의미하기도 함]
그 밖의 다양한 인식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채로
`무한하구나, 허공은'하며 空無邊處(aakaasana~ncaayatana)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참으로 아난다여, 그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니라.
17.
아난다여,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나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난다여,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가 있어 일체 공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무한하구나, 識은' 하며 識無邊處(vi~n~naa.na~ncaayatana)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참으로 아난다여, 그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니라.
18.
아난다여,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나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가 있어 일체 식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없구나, 아무것도'하며 無所有處(aaki~nca~n~naayatana)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참으로 아난다여, 그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니라.
19.
아난다여,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나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가 있어 일체 무소유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비상비비상처(nevasa~n~naanaasa~n~naayatana)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참으로 아난다여, 그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니라.
20.
아난다여,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나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가 있어 일체 비상비비상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想受滅(인식과 느낌의 그침)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참으로 아난다여, 그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니라.¹⁹
[19)주석서: 제사선부터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의 상태다.
그러나 이 무덤덤한 느낌도 `즐거움'으로 불린다. 평화롭고 고상하기 때문이다.
다섯 가지 감각적 욕구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과 여덟 가지 정(定)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은
`느껴지는 즐거움'이라 부르고, 상수멸想受滅의 상태는 `느껴지지 않는 즐거움'이라 한다.
따라서 느껴지는 즐거움이든 느껴지지 않는 즐거움이든 둘 다 고통에서 벗어난 상태란 뜻에서 확실히 즐거움인 것이다.
증지부 아홉의 장 제34경에서 사리불 존자는 단호히 말한다.
"열반은 행복이다. 벗이여, 열반은 행복이다. 진실로!"
그러자 우다이 비구가 물었다.
"느낌이 없는 터에 어떻게 행복이 있을 수 있습니까?"
사리불 존자가 대답했다.
"거기에 아무런 느낌이 없다는 그것이 바로 행복이네, 벗이여."
그 경의 뒷이야기를 본 경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열반이 행복이란 데 대해선 증지부 여섯의 장 제100경 역시 참조할 것]
21.
그런데 아난다여, 때로는 다른 외도 유행자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사문 고따마는 인식과 느낌의 그침을 설한다.
그리고서는 그것을 다시 즐거움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 것이 도대체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아난다여, 이와 같이 말하는 다른 외도 유행자들에게는 이렇게 말해줘야 한다.
"여보게 친구들이여, 세존께서는 즐거운 느낌만을 즐거움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니라네.
오히려 여래는 즐거움이면 그것은 언제 어디서 얻어지건 간에 즐거움이라고 한다네."[중부 59경과 내용이 같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