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apanasati sutta(出入息念經) 평온-지혜(사마디) 명상에 대한 서문
Anapanasati sutta(出入息念經)
2013-12-30 09:31:14
Prelude to Tranquil Wisdom (Samadhi) Meditation
평온-지혜(사마디) 명상에 대한 서문
명상을 시작하기 전에 계율(sila)에 대한 확고한 토대를 쌓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수행자가 5戒조차 실천하지 않는다면
수행 방법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수행에 대한 흥미를 잃고 결국 수행을 중단할 것이다.
붓다의 방법을 따른다면 수행은 매우 잘 되어갈 것이다.
다만 수행자가 철저하게 수행을 하지 않거나 올바른 방법으로 수행하지 않을 따름이다.
계율들을 지키는 것은 마음을 계발하고 정화시키는데 필수적이다.
계율을 어긴다면 죄책감으로 인해 많은 후회, 불안, 침착하지 못함을 경험할 것이다.
이것은 마음에 긴장을 만들고 생각을 흐리고 어둡게 한다.
이러한 계율들은 정신적 도달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계율은 마음에 사띠와 알아차림을 제공한다.
그래서 잘못된 행동에 의한 후회에 시달리지 않고 평화로운 마음을 갖게 돕는다.
평화롭고 고요한 마음은 긴장이 없고 맑은 마음이다.
그래서 계율을 어떤 의례나 의식 형태가 아니라 매일매일 수행을 기억하게 하는 것으로 여겨라.
계율들을 매일 지키는 것은 향상된 마음, 말, 행동을 유지하도록 돕는다.
이러한 계율들을 빨리어로 암송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수행자가 빨리어를 완전히 이해하지 않는다면 헛된 노력이 될 수 있다.
분명한 의미로 의심 없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매일 이 계율들을 암송해라.
이것이 진지한 수행자를 위한 최선의 방법이다.
이 계율들은 다음과 같다.
1. 나는 살아있는 존재들을 죽이지 않는 계율을 지킬 것을 서약합니다.
이 계율은 개미, 모기, 바퀴벌레 같은 존재들에 대한 불살생을 포함한다.
2. 나는 주어지지 않는 것을 취하지 않는 계율을 지킬 것을 서약합니다.
이 계율은 직장에서 허가 없이 연필을 가져가거나 개인적인 사용으로 복사기 같은 기기를 사용하는
그 어떤 형태의 도둑질을 포함한다.
3. 나는 잘못된 성적 행위를 하지 않는 계율을 지킬 것을 서약합니다.
일반적으로 모든 성적인 행위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성적 상대자나 부모 보호아래 있는 사람과 성적 행위를 갖는 것을 말한다.
또한 그 나라의 성에 대한 법을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존재에게 부당한 고통을 일으키는 모든 성적 행위는 후회와 죄책감을 일으킨다.
4. 나는 거짓말, 험한 말, 비방하는 말, 수다거리, 무의미한 말을 삼가는 계율을 지킬 것을 서약합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거나 다른 사람에게 유익하지 않는 그 어떤 형태의 말을 삼가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하얀 거짓말을 삼가는 것을 포함한다.
5. 나는 마음을 혼미하게 하는 약물이나 술을 먹지 않는 계율을 지킬 것을 서약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인 한 잔의 맥주나 와인이 마음에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명상을 수행한다면 매우 민감해져서 무해한 아스피린조차 영향이 미친다는 것을 알 것이다.
술과 다른 약물들은 얼마나 더 심할 것인가!
그러나 아플 때 의사가 어떤 약물을 약으로 먹어야 한다고 하면 부디 그 약을 먹어라.
이 계율은 하루의 스트레스를 회피하고 완화시키기 위해 약물이나 술을 먹는 것이 해당된다.
하나의 계율을 깨뜨렸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먼저 자신을 용서하고 완전하지 않는 것을 인정해라.
이것은 마음이 다소 이완되도록 돕는다.
그리고 나서 가능한 빨리 계율을 다시 마음에 갖고 계율을 깨뜨리지 않을 결심을 해라.
다시 계율을 갖는 것은 마음을 다시 정화하게 도울 것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수행자는 더 잘 알아차리게 되고
계율을 깨뜨릴 때의 해로운 영향을 깨닫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삼가게 될 것이다.
부디 한 번에 한 가지 수행방법으로만 수행하기 바란다.
수행자가 다양한 수행법을 섞어 맞추어 나가려 하면 마음은 매우 혼란스럽게 되기 때문이다.
섞어 맞추는 것은 수행자의 진전을 막을 뿐이다.
최선의 방법은 명상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스승 가운데 단지 한 명을 고르는 것이다.
훌륭한 스승을 고르는 방법은 그들의 제자들이 친절하고, 쾌활하고, 상냥하고, 협력적인지 알아보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 스승에게 한동안 머물러 스스로 그 자신의 마음이 내내 더 행복하고 평화롭게 되는지 살펴본다.
단지 명상하는 동안만이 아니라 매일 매일의 삶을 통해 돌아보아야 한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마음 상태들의 알아차림이 더 분명해지고 알기 쉬워져서 앉기 수행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마음상태들을 놓아버리게 되는가?
그렇지 않다면 스승과 경전의 가르침이 같은지 확인해 보라.
수행이 깊어지고 명상이 더 진척되면 경전은 더 분명해지고 이해하기 쉬워진다.
스승이 수행지침으로 경전을 사용하고 있다면 이것을 늘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섯 가지 수행의 장애[5蓋]가 일어날 때마다 이것들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들은 [욕망, 탐욕], [미움, 혐오], [나태, 졸음, 둔함], [들뜸, 후회, 걱정, 산만해짐], [회의적 의심]이다.
수행의 장애는 수행을 방해하거나 미혹시키는 것을 말한다.
앉기 수행 또는 일상생활에서 명상 실천을 방해하고 현상들을 지금 이 순간에 분명하게 보는 것을 막는다.
또한 수행의 장애는 무아적인 과정을 자아적인 과정으로 여기게 만든다.
수행의 장애들이 일어날 때마다 수행의 장애들과 자아를 매우 강하게 동일시해서
“나는 졸립다. 나는 침착하지 못하다. 나는 좋아하고 원한다. 나는 싫어하고 미워한다. 나는 의심하고 있다.”
라고 개인적인 것으로 여긴다.
이러한 수행의 장애들은 “나는 그렇다”라는 자아와 관련됨 때문에 마음을 철저하게 흐리게 하고
수행자가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분명하게 보지 못하게 한다.
수행자가 “고정된 집중”을 수행할 때는 모든 미혹됨을 놓아버리고 명상대상에 마음을 다시 되돌린다.
한편 수행자가 “사마디(평온-지혜) 명상”을 수행할 때
미혹을 놓아버리고(이 부분은 “고정된 집중”과 정확하게 같다) 머리에서 긴장을 푼다.
그리고 마음이 열려있음, 넓어짐, 평온하게 됨을 느낀다.
그리고 나서 비로소 수행자는 주의를 명상의 대상으로 다시 되돌린다.
마음이 이완시키고 열려있음과 평온함을 느끼는 것,
이 작은 차이가 전체적인 명상을 “고정된 집중”에서 더 유연함,
사띠, 고요한 알아차림(awareness)으로 변화시킨다.
그것은 깊은 몰입 형태의 수행으로 가지 않는다.
사마디(평온-지혜) 명상을 수행할 때 어떤 것도 억누르지 않는다.
억누름은 밀어 내리거나 밀어 제침을 의미한다.
또한 억누름은 어떤 형태의 경험을 허용하지 않는 것 즉 수행의 장애를 일어나지 않도록 막는 것을 말한다.
그런 방식 대신 수행의 장애가 일어날 때
수행자는 마음을 열려 있게 해서 아니짜(무상), 둑카(고), 아나따(무아)를 보아야 한다.
[아니짜(無常) : 전에는 그와 같았는데 지금은 이와 같이 있다(변화한다),
둑카(괴로움 또는 불만족함) : 수행자는 미혹들이 일어날 때 미혹들이 괴로움이라는 것을 보아야 한다,
아나따(자아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는 것) : 수행의 장애들을 제어하려고 하지 않고 ‘나는 그렇다’라고 여기지 않는 것,
진실한 방법으로 수행의 장애들을 비자아적인 과정으로 보는 것]
그리고 나서 수행의 장애를 놓아버리고 머리에서 긴장을 풀고 마음을 평온하게 하고
마침내 “호흡에 대한 사띠”수행으로 주의를 되돌아오게 한다.
그 결과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고 이것이 지혜의 계발로 이끄는지 분명하게 보기 시작한다.
수행의 장애들을 허용하고 자아와 동일시하지 않을 때
수행의 장애들은 자연적으로 소멸되고 마음은 더 맑아지고 밝아지게 된다.
“나는 그렇다“라는 자아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리는 매순간
마음은 자연스럽게 더 넓어지고 더 깨어있고 사띠하게 된다.
그래서 이 책을 쓴 큰 이유 중 하나는 어떤 것을 억누르는 것은
‘마음을 정화하거나 진정한 모습 그대로 실체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억누르고 있을 때 수행자는 그것을 밀어 제치거나 경험되는 부분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이 열려 있고 넓어지게 하는 대신 마음을 움츠려들게 한다.
그 결과로 그것은 무명의 마음을 정화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는 마음을 정화하는 과정을 멈추고 있는 것이다.
수행자가 일어나는 모든 것을 놓지 않고 “나는 그렇다”라는 자아의 믿음을 갖는 마음을 정화하지 않을 때
조건 되어 지지 않은 출세간적 열반 상태를 경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붓다는 어떤 경험을 억누르는 방식으로 가르치지 않았다.
또 마음을 명상 대상에 고정하거나 몰입하는 명상법을 가르치지 않았다.
붓다는 모든 형태의 ‘집중 명상’을 올바른 길이 아닌 것으로 거부했음을 기억하라.
실제로 모든 종류의 고통, 감정적 동요, 신체적 불만족 그리고 죽음조차도
평정(우뻬카 upekkha)
선명한 알아차림(삼빠잔냐 full awareness)
확고한 주의(strong attention)를 가지고 받아들이고
고통을 자아의 것으로 받아들이거나 동일시하지 않아야 한다.
일상생활에서도 마음을 열고 넓히고, 모든 장애와 고통, 괴로움, 긴장을 놓아버릴 때 진정한 존재성의 변화가 일어난다.
이것은 알아차림을 열려있고 확장시켜서 긴장과 자아적 집착에서 벗어난 고요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관찰하는 것이다.
특히 일상생활에서 더 그렇지만, 마음에는 많은 재잘거림이 있다.
수행자는 마음의 재잘거림이 없는 행복과 평온한 삶에 점진적으로 이른다.
“집중 명상”을 수행할 때, 깊은 명상을 하는 동안 매우 편안하고 행복함을 느낄지 모른다.
그러나 그 고양된 상태에서 나올 때, 그들의 존재성은 전과 동일하게 남아있다.
(이것은 수행의 장애들이 공격할 때 수행자가 수용하지 않고, 마음을 열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은 움츠려지고 심지어 더 공격적으로 된다)
그들은 자만심이 가득하고 비판적으로 되기 쉽다.
이것은 명상하는 동안 수행의 장애가 일어 날 때마다
수행자가 이것을 불완전하게 놓아버리고 곧장 명상의 대상으로 되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들은 미혹으로부터 생긴 긴장을 고요하게 하고 완화시키지 않고 행한다.
대신 마음이 더 깊이 ‘집중’ 될 때까지 앉기 수행에서 경험되는 현상에 대해 닫혀있거나 움츠려 있고 긴장해 있다.
그 결과 이것은 수행의 장애를 억누른다.
그래서 그들은 그 미혹에 대한 자아적 집착을 완전히 놓아버리지 않는다.
또한 그들은 그 미혹들을 열린 마음으로 관용하지 않고 닫힌 마음으로 투쟁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은 긴장하고 굳어 있다.
이것이 요즘 수행자들이 머리에 엄청난 긴장이 있다고 불평하는 이유이다.
실제로 모든 미혹을 진정으로 놓아버릴 때 머리에 어떤 긴장이 없을 것이다.
이 억누름의 결과로 진정한 마음의 정화가 없고 그래서 존재성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아나빠나사띠 경에 대한 준비가 거의 다 되었다.
하지만 시작하기 전에 경전을 더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의미가 달라졌던 몇 가지 단어들을 살펴보자.
예를 들면 “환희(rapture)”라는 말은 “기쁨(joy)”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즐거움(pleasure)”은 “행복(happiness)”로 바꾸었다.
또한 “집중(concentration)”은 “평온함(stillness)” “마음의 평정(composure of mind)”
또는 “하나된 마음(unified mind)”으로 바꾸었다.
이 책에서 말하는 붓다의 지침에 따라 수행한다면 경전의 내용을 체험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결과 이 심오한 문구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한 가지 주] 앞 개론부분에서
몰입(고정) 집중삼매(아빠나 사마디),
근접 집중삼매(우빠짜라 사마디),
순간 집중삼매(카니까 사마디)에 대해 반대하는 견해를 폈다.
독자들이 혹시라도 그에 대한 어떤 실수를 발견하고
이 다양한 집중 수행법을 언급한 경전을 지적해준다면 매우 감사할 것이다.
‘사마디(평온-지혜) 명상’은 명상의 대상에 되돌아오기 전에 수행의 장애
또는 미혹으로 생긴 긴장에 대하여 마음을 열고 마음을 넓히고 받아들인다.
그리고 나서 긴장을 푼다.
이 열려있음과 관용은 수행자가 고통과 괴로움을 일으키는 것을 더 잘 알아차리고 깨어있도록 돕는다.
그래서 더 열려있고 더 확장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알아차림으로 존재성의 변화가 있고 그때서야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이라는 붓다의 권고를 성취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