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비파사나 수행

안세고의 역경, 중국불교 참다운 ‘시작’

空空 2023. 2. 4. 19:25

안세고의 역경, 중국불교 참다운 ‘시작’

 

석존釋尊의 正覺으로부터 시작된 불교는 사상적 경향과 문화적 풍토가 다른 중국으로 전래되면서

중국 본토에 형성된 사상문화와의 충돌과 융합의 과정을 통하여 중국적 변용을 이루었다.

 

이러한 변용은 여러 측면에서 인도나 서역의 불교와는 상당한 차별상이 나타난다.

이는 일부 학자들에 의하여 ‘非佛敎’라고 비판되기도 하며

특히 조사선은 老莊사상에 입각한 불교의 아류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중국불교와 중국선의 사상사를 전공으로 하는 필자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견해들이 오히려 중국불교와 조사선을 깊게 이해하지 못함에 기인한 단견이라고 평가하며

그와 반대로 석존께서 施設하신 敎義가 중국에 와서야 비로소 참답게 완성되었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는 과정으로부터 지극한 마음으로 歸命하여

중국의 불교를 살아있게 만든 역대 宗匠들의 행적과 사상을 논하고자 한다.

 

또한 이를 통하여 중국불교와 조사선의 참다운 진제眞諦를 논하여

석존의 혜명慧命이 중국에서 어떻게 전개되는가를 밝히고자 한다.

 

중국에 불교가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西漢의 무제武帝(재위 B.C141~B.C87)에 의하여 서역과의 교통로,

이른바 실크로드가 개척되면서부터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것은 서역로가 개통된 이후 수많은 상인들이 왕래하면서

당시 서역에서 유행하고 있었던 불교의 문화와 敎義가 자연스럽게 전달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의 역사에 최초로 기록되는 것은

東漢 명제明帝(재위 57~75)시기의 초왕楚王 영英의 기사[영평 8년(65)]이고

본격적인 불교의 기록이 나타나는 것은 환제桓帝(재위 146~167)의 건화 2년(148)에

安世高에게 경전을 번역하라고 명한 이후이다.

 

따라서 중국인들에게 불교가 알려진 이후 최소한 150년의 잠복기를 거쳐서 역사 기록에 등장하고

또한 그로부터 80여 년이 지난 환제시기에 갑자기 국가적인 사업으로 불교의 경전을 번역하게 되었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지 200여 년이 지난 이후인 환제시기에 이르러

갑자기 불교가 주목받게 되었고 국가적 사업으로 역경을 했을까?

 

중국은 黃河와 楊子江과 같은 지리적인 이점으로 형성된 비옥한 땅으로 인하여 농경을 바탕으로 한 고도의 문화를

일으켰고 그에 따라 상고시대로부터 척박한 지역에 거주하는 주변의 소수민족들의 침탈에 직면하고 있었다.

 

이러한 까닭에 선진시기로부터 일종의 정신적인 방어의식을 형성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오랑캐[夷]’의 저급한 문화가 ‘중국민족[華夏]’의 우월한 문화를 망치기 때문에 방어해야 한다는

‘이하지방夷夏之防’의 의식이고 이로부터 점차 이하론夷夏論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까닭에 종교사상적으로 뛰어난 불교가 전래되었어도 화하華夏의 것이 아니기에 쉽게 수용될 수 없었다고 하겠다.

 

한편 중국은 <周易>의 ‘풍지관괘風地觀卦’에서

성인이신도설교聖人以神道設敎 이천하복의而天下服矣

“聖人은 신묘한 도[神道]로써 敎를 세우니 천하가 그를 따른다.”

라는 말과 같이 제국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성인의 ‘신묘한 도’를 통치이념으로 설정하는 전통을 세우고 있었고

그에 따라 열국이 각축을 벌이는 전국시대에 제자백가가 출현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 法家를 채택한 진秦이 비록 천하를 통일하였지만

법가 사상의 지나친 적용으로 실패하였고

그 뒤를 이은 西漢은 道家의 黃老學을 통치이념으로 채택하였지만

결국 한계를 노정하여 武帝에 의하여 儒家의 사상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유가의 통치이념도 제국을 통치하는데 실패하게 되어 서한은 망하게 되었다.

그러한 까닭에 서한을 계승한 동한의 최고 권력기관인 황실에서는 새로운 통치이념의 수립을 위하여

이미 100여 년 전에 전래된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뿌리 깊은 ‘이하론’에 기인한 민족적 저항감으로 불교를 통치이념으로 채택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에 따라 <後漢書>에

“초왕은 黃老의 미언微言을 읽고 다시 부도浮屠(佛)를 숭상하여

사당에 모셔 神과 함께 3개월을 결재潔齋하기를 맹세하였다.”

라는 최초의 기록이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부터 중국의 사서史書에 불교와 도가에서 중시하는 黃帝와 老子와 융합하려는 다양한 기록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를 통하여 ‘이하론’의 저항감을 해소시키고자 하는 황실의 의도를 짐작하게 한다.

 

환제도 역시 ‘황로’와 ‘부도’의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으며 그에 따라 불교가 통치에 도움이 된다는

상소가 올라오게 되었고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드디어 본격적인 역경을 국가적인 사업으로 추진하게 되었다고 하겠다.

 

이렇게 서역으로부터 전래된 불교경전이 중국어로 번역이 되어야

비로소 중국불교가 시작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는데 황권으로부터 최초로 번역을 맡은 이가 바로 안세고이다.

 

안세고는 다양한 전적에 그 이름이 언급되지만

양대梁代 때 혜교慧皎가 찬술한 <고승전> 권1과

승우僧祐가 찬술한 <출삼장기집> 권13에 온전한 그의 전기가 실려 있다.

 

그에 따르면 ‘세고世高’는 자字 즉 아명이고 본명은 청淸이며

安息國의 국왕과 정후正后 사이에서 태어났고 그에 따라 太子의 지위에 있었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五行과 醫方 등의 다양한 분야에 뛰어났으며

짐승들이나 새들의 소리에도 통달하여 서로 소통하였다고 한다.

또한 외국의 전적들에도 능통하였다고 하니 어학에도 상당히 뛰어났음을 짐작할 수 있다.

 

부왕이 승하하자 왕위를 계승하였지만 불법에서 논하는 苦와 空을 깊게 사유하여 숙부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출가하였다.

출가한 이후에는 모든 經藏에 밝았지만 특히 아비담阿毘曇 교학과 禪經에 뛰어났다.

 

그 후에 서역의 여러 나라를 유행하며 법을 펴다가 환제가 즉위한 다음해인 건화 2년(148)에 낙양에 도달했다고 한다.

이 시기에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황권에서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에 따라 당시에 서역으로부터 많은 승려들이 중국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이때 지루가참支婁迦讖은 안세고보다도 1년 먼저 낙양에 도착한 것과 같이

이미 많은 승려들이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불교를 신앙하던 이들도 존재했었다고 추정된다.

 

이렇게 안세고는 낙양에 도착한 이후 본격적으로 불전의 번역을 시작하였는데

이후 영제靈帝(재위 168~189)시기에도 번역을 지속하였지만

그 시기에 관중關中과 낙양에 중대한 변고가 발생하면서 중지하게 되었다.

 

바로 초기 도교도들에 의한 황건적黃巾賊의 난이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도교도들의 반란은 불교를 통해 새로운 통치이념을 제시하고자 했던 동한 황실을 좌절케 하였지만

이후 남북조와 수대에 이르기까지 불교를 통치이념으로 삼게 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고승전>과 <출삼장기집>의 전기에서는 안세고가 난을 피하여 강남으로 향했으며

계속 남하하여 광주廣州에 이르러 시장에서 싸움판을 지나다가 잘못 맞아 입적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황건적의 난으로 인하여 전국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도교도들에 의하여 화를 당한 것이 아닐까 하는 짐작도 해보지만 전혀 근거를 찾을 수 없다.

 

안세고가 번역한 경전들은 <고승전>에서는 39부라고 하지만 양대梁代까지 번역된 불전을 모두 종합한

<출삼장기집>의 ‘신집찬출경율론록新集撰出經律論錄’에 따르면 34부 40권이라고 하며

진대晋代의 道安이 편찬한 <중경목록衆經目錄>에서는 35부 41권이라고 한다.

 

그러나 현존하는 경전은 아함부에 속하는 17부와 <佛說大安般守意經> 2권

<陰持入經> 2권 <禪行法想經> 1권 <道地經> 1권 <阿毘曇五法經> 1권 등이다.

 

안세고의 역경은 그의 전기에 언급되는 것과 같이 중국에서 최초의 번역은 아니지만

황권으로부터 공식적인 지원에 의한 번역은 최초라고 할 수 있다.

그에 따라 中土의 첫 번째 역경가로 알려지게 된다.

 

이렇게 불경이 중국어로 번역이 되어야 비로소 중국불교의 참다운 시작이라고 할 수 있으며

실제로 동한 시기에 안세고가 번역한 경전에 따라 불교가 상당히 유행하게 되었다고 하겠다.

 

안세고가 번역한 경전들은 주로 아비다르마에서 논하는 禪定을 중시하는 경전들이다.

특히 <안반수의경>은 당시에 가장 유행하였으며 이 경전에서 논하는

‘안반수의’는 바로 ‘數息觀’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를 통하여 선정에 들어가는 과정을 설한다.

 

또한 <음지입경>에서는 사제四諦, 五蘊, 十二緣起, 37道品 등의 법을 설하여 선정으로 번뇌를 퇴치함을 제창하고 있다.

그에 따라서 안세고의 역경으로부터 유행한 불법을 ‘禪數學’이라고 칭한다.

 

東晋의 명승 道安은 안세고가 번역한 경전을 높이 평가하여 서문을 쓰는데

<음지입경>의 서문에서 안세고의 역경을 “오직 禪觀을 펴는 데 힘썼다.”라고 하고 있고

 

다시 <안반수의경> 서문에서

“옛 학문을 널리 배웠고 특히 阿毘曇에 뛰어나 그 譯出한 경전의 禪數에 관련된 것이 가장 많았다.”고 하며

 

<십이문경> 서문에서는 “안세고는 선수학을 열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안세고는 중국에 본격적으로 불교를 유행하게 하였으며 그의 역경으로부터 유행한 선수학은 이후

남북조시대에 이르기까지 중국불교에 있어서 하나의 중요한 축을 담당하였다고 하겠다.

 

비록 수隋·당唐 代에 이르러 안세고 계통은 거의 사라져 명맥조차 남지 않게 되지만 그의 역경으로부터 비롯된

선수학은 이후 중국불교가 최종적으로 祖師禪으로 귀숙歸宿+되는 초기화를 담당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현대불교신문/김진무

 

▶김진무 교수는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동산법문東山法門과 그 선사상 연구’라는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중국 남경대학 철학과에서 〈불학과 현학의 관계연구〉(中文)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부교수를 역임했다. 저서로 〈중국불교거사들〉〈중국불교사상사〉 등이 있으며 번역서로 〈조선불교통사〉(공역)

〈불교와 유학〉 등이 있다.

 

 

●安世高

본명은 안청安淸 자는 세고世高.

안식국의 태자였으며 어려서부터 효행이 지극하였으며 학업에 뛰어났고 배우려는 욕망 또한 대단히 왕성하였다.

불교에는 특별히 심취하였다.

 

외국의 서적들과 칠요七曜(일월화수목금토의 학문)의 학문, 의술, 그 밖의 진기한 술법은 물론이요,

나아가 새나 짐승의 울음소리에 이르기까지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어느 날 길을 걷다가 떼 지어 앉아 지저귀는 제비들의 소리를 듣고 동행하던 사람에게 말하기를

"조금 있으면 먹을 것을 가져오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 때문에 저 제비들은 저렇게 지저귀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과연 얼마 안 있어 먹을 것을 가져다주는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에게는 그런 안청이 신기하게 보였다.

그러므로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소문은 일찍이 서역 전 지역의 여러 나라에 퍼져 있었다.

 

세고(안청)는 집에 있어서도 계율을 지키는 데 있어서는 엄격하였다.

부왕이 세상을 떠나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러나 인생이란 괴롭고 空한 것을 깨닫고는 자신의 육체를 혐오하게 되었다.

 

부왕의 상을 마친 후에 숙부에게 왕위를 선양하고 출가하였다.

특히 아비담阿毘曇에 정통하였으며 선관禪觀을 설하는 경전을 완전히 외어 그 경전의 진수를 속속들이 깊이 연구하였다.

 

그는 각 지방을 돌면서 부처의 가르침을 널리 펴고 또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많은 공부를 하였으며

後漢 환제桓帝(147~167) 초기에는 마침내 중국에 이르렀다.

 

그는 재주와 깨달음이 남달리 기민해서 한번 들으면 그것을 완전히 이해하였다.

그래서 중국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중국말을 유창하게 구사하고 완전히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경전을 번역하였는데 범어를 한문을 옮긴 것이

<安般守意經><음지입경陰持入經> 대소 이종의 <十二門論> 등이다.

 

처음에 외국의 삼장법사인 중호가 여러 경전의 긴요한 뜻들을 모두어 만든 27장중에서 7장을 뽑아 한문으로 역출하였는데 그것이 <道地經>이다.

 

安世高의 <十二門經>과 주역서 필사본이 일본에서 발견됐다.

석가가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12단계의 명상을 기록한 <십이문경>은 최초의 한문 경전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수隋나라 시대 경전목록인 <인수록仁壽錄>(602년)이 이미 ‘사라졌다’고 적었고

중국에서는 사본조차 발견되지 않는 등 ‘환상의 경전’으로 여겨져 왔다.

 

오사카(大阪) 가와치나가노(河內長野)시 곤고지(金剛寺)가 소장한 가마쿠라(鎌倉·1192~1333년)시대의 <일체경一切經> 약 4,000권을 조사하던 오사카대학 고토 아키오(後藤昭雄)교수 연구팀이 <대안반경大安般經>이란 표제가 붙은 같은 내용의 2권의 책속에서 찾아냈다.

 

각각 한 줄에 약 17자씩 모두 584줄로 이뤄진 이 책의 284~366 줄이 <십이문경>

367~584줄이 그 주해서인 것으로 밝혀졌으며

주해서는 중국 불교 확립에 기여한 도안道安(312~385년)이 쓴 <십이문경 주해>인 것으로 확인됐다.

 

고토교수는 6세기 초 중국의 불교논문집인 <홍명집弘明集>이

인용한 <십이문경>의 일부 내용과 대조한 결과 기술이 거의 일치했다고 밝혔다.

 

언제 누가 베껴 썼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일체경>과 함께 보관돼 있던 점이나

서체로 보아 가마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인도에서 중국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기원전 1세기경이나

경전은 2세기 중엽 안세고가 번역한 것이 처음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의 이란 부근에 있었던 팔티아왕국 즉 安息國의 왕자였던 안세고는 왕위 계승자 지위를 버리고

인도에서 수행한 후 147년경 後漢의 도읍지인 낙양洛陽에서 35부 41권의 불경을 번역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국제불교학대학원대학 가마타 시게오(鎌田茂雄)교수는 ‘대량의 불경이 가지런히 갖춰진 돈황敦煌사본도 남북조시대에서 당唐시대에 걸친 경전일 뿐 후한 시대의 불경은 없었다’면서 ‘획기적인 발견’이라고 평가했다.

 

 

●安世高의 <安般守意經>

 

이 경전은 <佛說大安般守意經><대안반경><안반경><수의경> 등으로 불리는 경전이다.

한역으로는 후한시대 安世高가 상하 2권으로 번역한 것이 있다.

 

‘안반수의安般守意’란 범어 ‘아나빠나싸띠(Anapanasati)’를 소리와 뜻에 따라서 한자로 번역한 말이다.

이 의미를 분석하면 ‘아나(ana)’는 들숨이고 ‘아빠나(apana)’는 날숨이고 ‘싸띠(sati)’는 의식집중이다.

 

한자로 보면 ‘안반’은 들숨과 날숨이고 ‘수의’는 의식집중이므로

‘안반수의’란 곧 들숨과 날숨에 정신을 집중하는 선정 수행이라는 의미이다.

 

이처럼 경의 제목으로 본다면 초기 선정수행의 오정심관五停心觀 중의 하나인 數息觀과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방법적으로도 이 선정은 들어오고 나가는 숨을 세는 것부터 시작하나

내용상으로 볼 때 이 선정법은 ‘안반수의법’ 또는 ‘안반념법’이라고 하는 것이 합당하다.

 

전체의 내용을 보면 상권은 안반수의법의 이론과 실제를 설명하고

하권은 상권의 내용을 강조하면서 그 공덕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행법만을 설명한 것이 아니라 안반수의법을 통하여 많은 교학적인 사상을 함께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일견 매우 복잡한 듯 하나 그 전체의 구성은 상하권이 다음과 같이 유기적인 체계로 구성되어 있다.

 

상권에는 안반수의법에 의해서 6가지의 진전 단계를

1) 들숨과 날숨의 수를 헤아리는 數

2) 호흡에 의식이 따라가 하나가 되는 상수相隨

3) 마음이 호흡을 의식하지 않고 고요히 안정되는 지止

4) 사물을 관찰하게 되는 의식집중 상태인 관觀

5) 다시 고요한 자기의 주체로 돌아오는 환還

6) 모든 것에 집착하지 않는 청정한 세계인 정淨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하권에는 이러한 6단계에 이르렀을 때 얻는 공덕을

1) 수의 단계에서는 4가지 마음의 힘을 얻게 되는 四念處

2) 상수의 단계에서는 마음의 힘으로 4가지 악을 없애고 바른 노력을 하는 四正勤

3) 지의 단계에서는 4가지 신통력을 얻게 되는 四神通

4) 관의 단계에서는 5가지 악을 쳐부수는 힘을 얻는 五力

5) 환의 단계에서는 7가지 지혜를 얻게 되는 七覺支

6) 정의 단계에서는 8가지 올바른 길인 八正道를 얻는다고 설명한다.

 

이상과 같은 수행의 진전 단계와 그에 따른 공덕은 최초의 數의 단계에서부터 수동적·자발적인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이 안반념법의 수행의 시작은 단순히 호흡을 헤아리는 행법에서부터 출발한다.

 

선정수행이 이처럼 동물의 원초적인 본능작용에 바탕을 둔 까닭은

선정수행을 모든 중생에게 보편화시키기 위함일 것이다.

 

이 경의 첫머리에

“이때 부처님께서는 앉아서 안반수의를 90일 동안 하셨다.

다시 90일을 홀로 앉아 생각을 가다듬고

온 세상의 모든 인간과 날아다니는 새와 꿈틀대는 동물들을 구제하시고자 하셨다”

 

이 의미는 선정수행을 쉽게 대중화시키고자 하는 의미일 것이다.

또한 수행을 쉬운 방법으로 시작하는 것은 부처님의 중도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부처님의 6년 고행 중에는 숨을 멈추고 참는 방법이 있었는데 이

고행으로 머리는 쪼개지듯이 또는 칼로 베듯이 아프고 몸은 불에 타는 것과 같았다고 한다.

 

이러한 고행은 부처님과 같은 분에게도 궁극적인 해탈을 위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일반 범부로서는 감히 실행하기 어려운 행법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극단적인 고행을 버리고 안반수의라는 중도적 수행을 택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살아있는 인간으로서는 아주 당연한 생명현상인

숨의 움직임에 의식을 집중하는 방법인 안반수의는 선정을 쉽게 일반화한 것이다.

 

그러나 숨을 헤아린다든가 하는 의식집중은 단순한 마음의 안정이나 생각의 멈춤과 같은 상태(止, 사마타)만은 아니다.

여기에는 교학을 바탕으로 한 지혜로 비추어 봄이 있다.

 

예를 들면 들숨인 안과 날숨인 반은 곧 생·멸 또는 유·무와 같은 이분법적이고 상대적인 세계를 의미하고

여기에 집중하는 수의는 중도이고 비춰보는 지혜를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반수의는 지의 수행만이 아니라 觀(위빠싸나)의 수행을 함께 갖추고 있는 지관겸수의 선정법이라 할 수 있다.

 

원래 왕위계승자였으나 숙부에게 양위하고 출가하였다.

그 후에 불학연구에 몰두하여 서역 각지를 돌아다니다 건원초년에 낙양에 도래하여 불경의 역술에만 20년간 매달렸다.

 

그 당시의 낙양에는 불교신봉자가 일종의 신선방술도 연마하는 분위기여서

제축의 대상으로서 기구 장생되고 분향되는 숭배의 대상이었던 시기였다.

 

안세고로 인하여 불경이 번역됨으로서 비로소 불교에 대한 이해가 높아졌다.

중국불교사상 제일위의 역사로 평가된다.

그를 따라서 비로소 중국에서 불학연구가 본격화되었다.

말년엔 소흥에 안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