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추린 아나빠나사띠 Anapanasati sutta(出入息念經)
간추린 아나빠나사띠 Anapanasati sutta(出入息念經)
2014-01-20 22:51:19
The Bare-Bones Instructions to “Mindfulness of Breathing”
맛지마 니까야 118번째 경에서 인용함.
/위말라람시 스님 지음/연방죽선원 옮김
►소개(Introduction)
이 작은 책자는 초보수행자와 명상경험자 모두를 위한 것입니다.
이 책에서 말하는 가르침은 오늘날까지 현존하는 가장 오랜 붓다의 설교(경전)를 인용한 것입니다.
지금 말하는 것이 과거에 읽거나 접해온 가르침과 약간 다를지 모르지만
이것이 붓다가 2500년 전에 가르친 것이라고 안심해도 좋습니다.
이 가르침은 사념처를 포함합니다.
(빨리어로 사념처는 사띠빳타나입니다. 즉 몸에 대한 사띠, 느낌에 대한 사띠, 마음에 대한 사띠, 담마에 대한 사띠입니다.)
이 경전에서 붓다가 말하는 명상법으로 수행하면 자연히 선정(자나)이라 불리는 명상단계를 경험합니다.
(선정은 빨리어로 명상경지 또는 명상단계를 뜻합니다.)
붓다의 원형 가르침들이 담긴 초기경전에서
‘사념처 경’과 ‘아나빠나사띠 경’(호흡에 대한 사띠를 말한 경전)은 서로 의지하며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방법으로 수행하면 통찰(insight), 지혜(wisdom), 평온(tranquility), 평정(equanimity)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들은 깨어남의 최종 목적지인 열반을 체험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입니다.
►명상이란 무엇입니까?(What is meditation?)
명상은 사람마다 다르게 알고 있는 말 중 하나입니다.
명상수행 하는 사람들도 종종 무엇이 명상인지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럼 이제 붓다의 가르침에 맞게 명상을 정의하겠습니다.
명상은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지켜보는 기술입니다.
마음이 아주 행복하고, 평화롭고, 고요하다가, 갑자기 어떤 것이 마음에 일어납니다.
그래서 슬프고, 걱정스럽고 화가 난 마음이 됩니다.
그것이 “어떻게” 일어났습니까?
마음이 “어떻게” 행복, 평화, 고요에서 슬픔, 걱정, 분노로 바뀌었나요?
“어떻게” 이것이 일어나는지 지켜보는 것이 명상입니다.
그리고 나서 슬프거나 걱정하거나 화 내지 않고 “어떻게” 놓아 버리는가? 이것이 명상입니다.
명상은 ‘관찰하고(observation) 이완하는(relaxing)’ 기술입니다.
►주석서에 대하여(Commentaries)
지금 말하는 가르침은 다른 곳에서 배운 것과 다를지 모릅니다.
그것은 수많은 학자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서 명상에 관한 글을 썼기 때문입니다.
그 글들을 ‘주석서’라고 합니다.
명상수행을 하지 않고 배타적으로 연구해 온 사람들이 종종 주석서를 쓰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명상수행에서 직접 체험한 앎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많은 다른 방식의 명상을 하는 이들에게 듣고 얻은 것을 베껴 썼습니다.
학자들은 이 주석서들은 아주 신뢰하지만 원전인 초기경전에서 가르친 것과 비교해보면 아주 큰 차이점이 있습니다.
때때로 붓다가 가르친 완전한 부분이 주석서에는 생략되어있고
주석서를 쓴 저자 자신의 방식으로 기술되기도 하였습니다.
또 그들이 생각하기에 적당할 것 같은 다른 형태의 명상을 첨가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명상법이 마치 붓다가 설한 올바른 가르침이라고 말합니다.
꾸준히 수행한다면 모든 형태의 명상은 정말 유익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도에서 모든 길이 같은 곳에 이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세요.
선택할 수 있는 다른 많은 길이 있지만 그것들 모두 원하는 목적지에 이르게 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붓다가 설한 가르침으로 돌아가 그것을 면밀하게 따르면
모든 괴로움의 소멸에 곧바로 이르는 지도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붓다가 원래 가르친 방식으로 명상을 이해하고 수행하고자 했습니다.
원래의 가르침(경전)으로 돌아가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여러 해 동안 직접 얻은 경험을 통해 고심하며 조사하고 연구했습니다.
►정신치료와 불교 명상(Psychotherapy and Buddhist Meditation)
서양 심리학/정신요법은 불교 명상(사띠)과 미묘하지만 분명히 다른 방식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서양 심리학과 정신치료요법이 그릇되고 불교명상이 올바르다’라는 말이 아닙니다.
두 방식 모두 나름대로 장점과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나 최종결과는 아주 다릅니다.
지도에 있는 많은 도로가 다른 곳에 이르는 것처럼 다른 결과를 얻게 합니다.
서양 심리학/정신요법은 정신적 불균형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을 치료하고 좀 더 균형 잡힌 방식으로 사는 법을 보여줍니다.
반면 불교 명상은 정신적으로 건전한 사람들이 완전히 깨어있고
진정으로 행복하고 괴로움에서 자유로워지는 법을 제시합니다.
심리학/정신요법에서는 오직 생각과 느낌만 다루고 그 생각과 느낌을 분석합니다.
심리치료사는 환자들이 느낌과 감정에 자기 정체성과 만족을 갖게 돕습니다.
이것은 심리학자들이 소위 말하는 ‘에고’를 건강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반면 불교는 우리가 겪는 경험이 단지 (연기라고 부르는) 항상 변화하는 ‘과정’으로 보는 법을 가르칩니다.
또 생각과 느낌에 휩쓸리거나 ‘나’ 또는 ‘내 것’ 이라고 여기는 것은 불행과 괴로움의 원인이라고 가르칩니다.
붓다의 가르침이 갖는 궁극의 목적은
‘모든 것을 조절하는 영원한 자아 또는 에고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놓는 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불교 수행자는 삶에서 모든 것을
아니짜(항상 변화하고), 둑카(고통스럽고), 아나따(비아적인), 단지 하나의 ‘과정’(연기)으로 보는 것을 배웁니다.
►‘왜’ 와 ‘어떻게’(Why versus How)
서양 심리학/정신요법과 불교 명상의 목적은 괴로운 사람들의 상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이 2가지 방법은 각기 독특하며 얻어지는 최종 결과가 다릅니다.
이 둘은 생각과 느낌을 더 잘 알아차리도록 가르치지만 바라보는 관점은 아주 다릅니다.
서양 심리학/정신요법은 문제가 “왜” 일어났는지 알기 위해 과거 경험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래서 과거에 일어난 문제를 처리하여 건강한 삶을 사는 법을 제시합니다.
심리치료사는 균형이 깨진 사람이 좀더 조화되고 균형 잡힌 삶을 경험하게 돕습니다.
반면 불교의 초점은 경험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경험의 전 과정이 연기를 보는 가운데 “어떻게” 일어나는지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과정을 비아적인 전개로 이해하도록 가르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가르침의 핵심은 이 과정이 “어떻게”(HOW) 작용하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반면 서양 심리학은 이런 일들이 “왜”(WHY) 일어났는지를 다룹니다.
즉 사건이 나타나게 된 이유와 발상을 주로 다룹니다.
불교는 모든 과정(경험)이 일어날 때 순수하고 밀착된 알아차림으로 관찰하는 마음을 계발합니다.
그래서 좀 더 분명하게 보는 방법을 이해하게 합니다.
이것은 지금 이 순간에 현상들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정확히 관찰하는 진실성과 직접 관계합니다.
그래서 붓다의 가르침은 이 과정을 단지 비아적인 과정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 대한 생각으로 지나치게 개입되거나 잘못 동일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을 보고 놓아버리고, 이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주의를 ‘호흡(breath)과 이완하기(relaxing)’로 부드럽게 다시 향하고
생각과 느낌의 내용에 잘못 동일시하거나 개입되지 않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모든 것을 비아적인 경험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 개입되거나 이 과정을 개인적인 자아 또는 에고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심리학과 불교 이 두 다른 관점은 서로 다른 목적과 목표를 가집니다.
이 다른 접근 방식들은 우리 삶에 행복과 조화를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불교의 접근 방식은 평범한 알아차림을 능가하고 모든 자아-동일시를 놓아버리는 법을 알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괴로움이 완전히 소멸되는 최종 목적지를 진정으로 보고 경험할 수 있습니다.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이 방법으로 명상한다면
우리 주위 세계가 달리 경험되는 놀라운 붓다의 길을 스스로 알고 이해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붓다는 ‘우리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이 책자에 있는 명상을 직접 해 본다면 그 이유를 스스로 알게 될 것입니다.
►아나빠나사띠 숫따(Anapanasati Sutta)
‘아나빠나사띠 숫따’ 경전에 나타나는 실제 가르침들은
한 단락 길이 정도지만 좀 더 지면을 할애해 그 부분들을 설명할 것입니다.
이 가르침은 문구와 글자를 비교해 볼 때 다른 경전에서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마치 부부관계처럼 그 내용은 ‘사념처경’[사띠빳타나 숫따]과 ‘염신경’[까야가따사띠 숫따]에서도 보입니다.
이 가르침을 읽고 실천해 보면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알고 이해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흥미롭고 즐거운 경험이 될 것입니다.
또한 다른 방식의 명상 수행에서 겪어왔던
두통, 어지러움, 귀에서 울림 같은 것들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것을 알 것입니다.
이 명상수행은 단지 조각상처럼 고요히 앉아서 하는 조용한 형태의 명상만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일상에서 해야 하는 모든 활동에서도 아주 유용할 것입니다.
최고의 결과와 진전을 위해서 이 가르침을 가능한 철저히 따라 주세요.
그리고 한 번에 한 가지 명상법으로 수행하세요.
동시에 다른 형태의 명상을 수행한다면 마음은 변덕스럽고 여기저기 뛰어 다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명상을 수행해야할지 혼란스러워 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단 한 가지 형태의 명상을 해보고서 그것이 올바르지 않아 보이면 다른 형태의 명상을 시도해 보세요.
그 결과 그동안 전혀 못해 온 진정한 명상을 하게 될 것입니다.
부디 괴로움의 소멸을 향한 아주 즐거운 여행을 스스로 준비해 보세요.
가득한 자비가 늘 함께 하기를 ···
위말라람시 스님 담마수카 명상센타
2003년 12월(불기 2547년 12월)
►명상에 대한 가르침들(Meditation Instructions)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a Sambuddhassa
존귀한 분, 공양 받을만한 분, 완전히 깨달으신 분, 그 분께 경배합니다.
몇 가지 빨리어를 소개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그것들을 설명할 것입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경전은 ‘아나빠나사띠 숫따(Anapanasati Sutta)’입니다.
‘아나빠나’(Anapana)는 빨리어로 들숨과 날숨을 뜻합니다.
‘사띠'(sati)는 마음 깨어있음(mindfulness), 주의 깊이 지켜봄(watchfulness), 관찰력(observation power)을 말합니다.
그래서 ‘아나빠나사띠’의 의미는 들숨과 날숨을 주의 깊게 지켜보는 것입니다.
빨리어어 ‘숫따’(Sutta)는 ‘실’을 의미합니다.
‘숫따(경전)’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의 경전은 다른 경전들을 엮는 실입니다.
그래서 경전들은 함께 모여 아주 아름다운 ‘담마(Dhamma)’ 라는 옷을 만듭니다.
(흔히 산스크리트어로 ‘다르마’라고 하지요. 둘 다 같은 의미입니다만 저는 이것을 빨리어로 쓰고 싶습니다.)
‘담마’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진리, 현상(것들)이 존재하는 방식, 붓다의 가르침, 현상(것들)의 본성 등을 의미합니다.
다음처럼 굵은 글씨로 쓰여진 경전구절은 ‘아나빠나사띠 숫따’ 의 일부입니다.
각 경전 문구의 아래 부분에 보통 글씨체로 쓴 설명부분이 이어집니다.
[16] 그리고 비구는 어떻게 들숨날숨에 대한 사띠를 계발하고 닦아야 큰 결실과 이익이 있겠는가?
[17] “비구들이여, 여기 한 비구는 숲이나 나무 아래 또는 빈 오두막에 간다.
그리고 앉아서 가부좌를 하고 상체를 곧바로 세우고 전면(in front of him)에 사띠를 확립하여 앉는다.
그는 확고한 사띠를 가지고 숨을 들이쉬고, 숨을 내쉰다.”
이 부분은 명상의 준비단계입니다.
수행자가 거의 또는 전혀 방해받지 않는 조용한 장소에 찾아가 앉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TV, 라디오, 전화를 끄세요. 그리고 당신이 앉아서 명상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 소음이 거의 없는 장소를 찾으세요.
초보자에게 소음은 큰 미혹거리가 되어
호흡(breath)을 지켜보고 이완하는(relaxing) 수행에서 주의를 떠나게 할 수 있습니다.
명상자가 이 수행에 더 친숙해진 후에는 소음이 더 이상 방해거리가 안될 것입니다.
그때 소음은 단지 명상 수행의 일부분이 될 것입니다.
그 다음 구절은 다리를 엇갈려 접어 앉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미국 사람들이 다리를 교차하여 바닥에 앉는데 익숙하지 못합니다.
가부좌로 앉으려 할 때 많은 고통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명상자는 쿠션을 이용하거나 원한다면 의자에 앉을 수 있습니다(그러나 뒤로 등을 기대지는 마세요)
어떤 명상 지도자는 제자들이 ‘가부좌 또는 반가부좌’ 자세로 앉기를 바라지요.
그러나 그 자세가 정말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바닥에 다리를 꼬고 앉는다고 해서 마술이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붓다가 바닥에 앉기를 권한 이유는 그 당시에 의자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바닥에 앉는데 익숙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문화권에서는 바닥에 앉아 있는 것이 너무 힘들고 우리 몸이 익숙하지 못합니다.
또 바닥에 편안하게 앉는 것이 익숙해지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릴지 모릅니다.
다리가 유연해지고 편안하게 될 때까지 오랜 시간동안 고통스러운 경험이 될 수 있습니다.
바닥에 앉을지 아닐지 여부는 명상자의 선택입니다.
앉기 명상에서 척추 뼈가 위아래로 잘 쌓이도록 등을 아주 똑바로 하고 앉는 것이 최선입니다.
불필요한 고통과 등에 문제를 일으킨 체로 등이 지나치게 똑바르게 하면서 경직된 체 앉지 마세요.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로 고통은 명상의 핵심이 아닙니다.
진리와 거리가 먼 의미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고 마음이 이것에서 저것으로 어떻게 이동하는지 아는 것이 명상의 전부입니다.
부디 다리가 편안한 자세로 앉아서 등이 잘 쌓인 채로 똑바르게 하세요.
이제 다시 경전의 가르침으로 돌아가겠습니다.
[18]
“길게 들이쉴 때 ‘길게 들이 쉰다’고 이해하고(understand) 길게 내쉴 때 ‘길게 내 쉰다’고 이해한다.
짧게 들이쉴 때 ‘짧게 들이 쉰다’고 이해하고 짧게 내쉴 때 ‘짧게 내 쉰다’고 이해한다.”
여기서 “이해한다”라는 말이 핵심입니다.
이것은 당신의 주의를 코끝이나 배에 두는 것을 결코 말하지 않습니다.
이 가르침은 호흡을 세거나 코끝에서 목과 폐를 거쳐 배에 이르렀다가
다시 되돌아가면서 몸의 여기저기로 호흡을 따라가는 것을 결코 말하지 않습니다.
이 가르침은 호흡이 지금 이 순간에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라’고 단순하게 말할 뿐입니다.
결코 주의를 어느 한 지점에 집중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가르침이 말하는 것은 ‘그/그녀가 호흡이 길게 또는 짧게 들이쉬고 내쉬고 있을 때 이해한다.’라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면 당신의 주의를 어디에 놓아야 할까요?
호흡이 길거나 짧을 때 이해하기, 호흡이 미세하거나 거칠 때 이해하기, 호흡이 빠르거나 느릴 때 이해하기 ···
답은 ‘이해한다’입니다.
다시 말하면 수행자가 호흡이 지금 이 순간에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는 것입니다.
명상자는 어느 한 지점에 집중하거나 이곳저곳으로 따라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호흡의 일반적인 특성들을 단지 이해해야 합니다.
이제 그 다음 구절을 계속하겠습니다.
‘온몸(whole body)을 경험하면서 숨을 들이쉬리라.’ 이와 같이 그는 수행한다.(sikkhati)
‘온몸을 경험하면서 숨을 내쉬리라.’ 이와 같이 그는 수행한다.
‘몸의 작용(신행)을 평온(tranquilizing)하게 하면서 숨을 들이쉬리라.’ 이와 같이 그는 수행한다.
‘몸의 작용(신행)을 평온하게 하면서 숨을 내쉬리라.’ 이와 같이 그는 수행한다.
이제 우리는 실재적인 가르침이 담겨있는 부분에 이르렀습니다.
‘이와 같이 그는 수행한다’라고 말할 때 명상자는 관찰력이 더 예민해진 마음으로 수행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들숨과 날숨에서 모든 신체적인 몸의 과정을 보게 됩니다.
명상자는 어쨌든지 호흡을 결코 조절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단지 몸이 자연스럽게 호흡하도록 놓아둡니다.
몸이 경직되거나 긴장하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들이쉴 때, 어깨나 등, 손 등등의 근육이 긴장될 때,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내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명상의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것은 긴장된 근육을 알아차리면서 이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이것을 하는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사람들은 온몸(whole body)은 목에서 시작하여 아래로 내려간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목 윗부분은 마음의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집고 넘어가야 할 잘못된 인식입니다.
온몸은 머리 위에서 시작하고 그 아래를 말합니다.
긴장과 경직을 알아차릴 때 먼저 관찰해야 할 첫 번째는 머리입니다.
모든 생각, 모든 마음의 움직임은 머리에 미묘한 긴장과 경직을 낳습니다.
명상자는 이것을 알아차리고, 들숨과 날숨에서 이완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호흡은 ‘이완하기’(relax)를 기억시키는 것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미소지음(Smiling)
명상자가 명상하기 시작할 때 먼저 부드럽게 눈을 감으세요.
그리고 마음에 약간 미소를 지으세요.
눈은 비록 감고 있지만 눈에 약간 미소를 지으세요.
입술에 약간 미소를 지으세요.
가슴에 미소를 지으세요.
미소를 가지는 것은 명상할 때 아주 중요합니다.
입모양에 대한 어떤 연구에서 입 가장자리 모양이 아래로 쳐지면 마음은 무겁고 고정되고 불행해집니다.
그때 마음은 활기를 잃고 경직되어 매우 천천히 움직입니다.
그러나 입 가장자리가 위로 올라갈 때 마음은 행복하고 활기 있는 생각을 갖습니다.
마음은 더 가벼워지고 더 부드럽게 관찰할 수 있습니다.
기쁨은 깨달음을 도와주는 요소(칠각지)중의 하나입니다.
미소는 명상자를 이 기쁨으로 이끕니다.
저 선한 붓다의 모습을 보세요.
그 붓다의 미소를 보세요.
(붓다의 상을 조각한) 저 예술가는 우리에게 이것은 기쁨이 가득한 경험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미소명상입니다.
들숨일 때 몸(특히 머리)에서 긴장을 이완합니다.
날숨일 때 ··· 이완합니다 ··· 미소지으세요 ··· 들숨일 때 ···
이완하기 ··· 미소지음 ··· 날숨일 때 ··· 이완하기 ··· 미소지음.
이완될 때 마음이 일종의 열려 있고 확장되는 것을 느낍니다.
마치 손으로 어떤 것을 잡았다가 놓을 때 그렇게 느끼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될 때 마음은 매우 맑고 고요하게 됩니다.
이것은 마음이 전에 있던 상태에서 조금씩 고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열려 있는 고요한 마음은 그 속에 생각이 없습니다.
단지 순수한 알아차림만이 있습니다.
그것은 특별하게 깨어있고 선명한 것입니다.
수행자는 어떤 것을 움켜쥐거나 조절하려고 하지 않고 ‘호흡(breath)과 이완하기(relaxing)’에 가능한 많이 머무릅니다.
오직 관찰하고 이완합니다.
이것이 제가 지금까지 보고 경험한 수행 중에서 가장 단순하고 즐거운 명상입니다.
►떠오르는 생각 (Arising thoughts)
종종 ‘명상’한다고 할 때 마음은 생각을 갖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특히 명상하기 시작할 때 마음은 모든 곳으로 뛰어다닙니다.
이것에 대해 생각하고 저것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괜찮습니다.
생각은 억눌러 멈추거나 싸워야할 적이 아닙니다.
생각은 단지 생각일 뿐입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생각을 단지 작은 미혹거리로 다루어야 합니다.
명상자가 마음이 이것저것 생각한다는 것을 알아차릴 때
마음이 이 생각이 ‘중요하다’라고 생각하더라도 이 생각들을 단지 놓아버려야 합니다.
생각들을 놓아버리세요.
생각이 만드는 미묘한 긴장을 이완하세요.
그리고 부드럽게 주의를 ‘호흡(breath)과 이완하기(relaxing)’으로 다시 되돌리세요.
처음에는 마음이 오랫동안 떠나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을 알아차리자마자 놓아버리고, 이완하고, 마음을 명상의 대상[호흡(breath),
이완하기(relaxing)와 미소지음(smiling)]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스스로를 비판하거나 비난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이것은 알아차림을 훈련하는 한 과정일 뿐입니다.
그리고 너무 심각해지지 않아야 명상이 즐거운 과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명상 과정을 즐기는 것은 괜찮습니다.
명상을 게임의 한 부분처럼 여기세요.
그리고 미소 지으세요.
►몸의 움직임 (Body movement)
앉아서 명상을 시작할 때 몸의 어느 부분도 움직이지 않아야 합니다.
어떤 이유라도, 손가락이나 발가락을 꼼지락거리거나 몸을 흔들지 마세요.
긁거나 문지르거나 위치를 바꾸지 마세요.
몸의 자세를 바꾸지 마세요.
부디 붓다의 모습처럼 땅에 박혀있는 커다란 바위처럼, 고요하게 앉아 있으세요.
당신은 그것처럼만 움직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앉아 있을 때, 가려움, 목의 간질거림, 재채기, 열, 떨림, 심지어 고통 같은 감각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그 때에 무엇을 해야 할까요?
먼저 감각을 떨쳐버리고 싶은 충동이 매우 강하고, 마음이 그것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이런 생각들은 마치 이렇게 소리를 냅니다.
“나는 이것을 멈추기를 바래!”, “나는 이 느낌이 싫어”, “왜 도대체 이것은 사라지지 않지,
나를 괴롭히지 말아 줘!” “이것들이 나를 내버려뒀으면 해.”
“그러나 여기 가르침은 내가 움직일 수 없다고 말하잖아” 또는 “아, 정말 고문이구나!”
명상자가 먼저 관찰해야 할 것은 감각에 대한 생각입니다.
감각을 조절하려고 생각할수록 그 감각이 더 크고 강렬하게 된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이 가르침은 생각을 놓아버리고 머리와 마음에 미묘한 긴장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리고 나서 이완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명상자는 그 감각을 둘러싼 긴장된 정신적 집착을 알아차립니다.
그 감각에 어떤 저항 없이 그 자체로 있게 합니다.
그 감각이 일어날 때 지금 이 순간의 진실(담마)은 ‘존재하고 있음’입니다.
명상자가 그 감각과 싸우려 하거나 어떤 방식으로 조절하거나, 떨쳐버리고자 한다면,
그 결과 그 감각은 더 커지고 강해질 것입니다.
►감각을 그대로 허용하기(Allowing sensations to be)
명상자는 이 수행을 통해 감각을 있는 그대로 허용하는 것을 배웁니다.
긴장된 정신적 집착을 열려 있게 합니다.
그 감각이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든지 있는 그대로 놔두고 관용합니다.
이것은 단지 하나의 감각입니다.
그 감각을 있는 그대로 놔두어도 괜찮습니다.
괜찮아야만 합니다. 왜죠?
이것이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진실과 싸우거나 조절하거나 자기가 원하는 식으로 진실을 만들고자 할 때마다 점점 더 괴로움을 일으킵니다.
마치 바람에 실려 떠다니는 비누 방울처럼 그 감각을 있는 그대로 허용하세요.
바람이 이쪽으로 불면 비누 방울은 같은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바람이 바뀌어 다른 방향으로 불면 비누 방울은 그쪽으로 움직입니다.
비누 방울은 아무 저항 없이 그렇게 되는 곳으로 주위를 떠다닐 뿐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명상자는 감각이 그렇게 되는 곳으로 떠다니도록 허용합니다.
이 명상은 마음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것입니다.
명상은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것이 무엇이든 자애롭게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어떤 저항 없이 허용하는 것입니다.
이제 일종의 미묘하고, 때때로 그다지 미묘하지 않는 몸의 긴장과 경직을 알아차립니다.
특히 머리에서 말입니다.
그리고 이완하고 미소 지으세요.
이제 마음이 이완되고 다소 확장됨을 느낍니다.
그리고 나서 열려있고 마음이 약간씩 평화로워집니다.
그렇게 마음은 고요하게 됩니다.
그때 마음은 매우 맑고 깨어있게 됩니다.
마음에 생각이 없고 그래서 청정하게 됩니다.
이제 명상자는 ‘호흡, 이완, 미소’로 다시 주의를 기꺼이 되돌립니다.
물론 이런 감각들의 본성은 즉시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은 그 감각에 다시 이끌릴지 모릅니다.
그러면 명상자는 다시 같은 일을 합니다.
아무리 여러 번 마음이 달아나더라도 이 과정은 항상 같습니다.
먼저 생각을 놓아버립니다.
이완 ··· 미소, 그 다음에 그 감각을 둘러싼 긴장된 정신적 집착을 놓아버립니다.
이완 ··· 미소 ··· 부드럽게 마음을 ‘호흡, 이완하기, 미소지음’으로 되돌립니다.
►맺음말(Conclusion)
이것이 호흡에 대한 사띠(아나빠나사띠)에 대한 간추린 가르침입니다.
이 가르침을 철저하게 따른다면 ‘지금 이 순간, 이완하기,
미소지음’에서 마음을 멀어지게 하는 모든 미혹에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수행은 늘 항상 해야 하는 것입니다.
집에서 차로 걷고 차에서 일터로 향할 때 그때 마음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이것저것 생각하고, 이것을 좋아하고, 저것을 싫어합니다.
이때가 마음이 이리저리 방황하는 하는 것을 알아차릴 때입니다.
생각을 놓아버리고, 이완하고, 미소 짓고 주의를 ‘호흡, 이완하기, 미소지음’으로 다시 되돌릴 때입니다.
날마다 기억날 때마다 가능한 여러 차례 이것을 행하세요.
이것이 항상 명상 수행하는 방법입니다.
이 작은 책자가 깨어남의 길을 찾는 모두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 바랍니다.
모든 존재들이 바로 이 생에서, 열반에 쉽고 빠르게 도달하기를 기원합니다.
다른 이들과 담마를 읽고 나눈 후에 모든 존재들에게 공덕을 나누는 것은 전통입니다.
이 작은 책자를 쓴 공덕을 어머니, 아버지, 모든 존재와 나누고 싶습니다.
고통 받는 이들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엄습한 두려움이 사라지기를 ···
모든 비탄을 벗어버리고 모든 존재들이 안식을 찾기를 ···
모든 존재들이 우리가 이렇게 얻은 공덕을 나누어 행복을 성취하기를 ···
우주와 지구에 사는 존재들, 힘센 천신, 용신(naga)들이 우리가 얻은 이 공덕을 함께 나누기를 ···
그들이 붓다의 가르침을 오랫동안 보호하기를 ···
사두 ··· 사두 ··· 사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