哲學/中國哲學

공자의 제자들 5 염구冉求

空空 2023. 6. 20. 17:44

염구冉求(BC522-BC489) 자유子有, 염유冉有, 염자冉子

 

1. 염씨 삼형제 중 막내

 

노魯나라 도陶 출신으로 자는 자유子有로 염유冉有, 염자冉子로 불리기도 한다.

춘추시대 말기 공자의 제자로 주 문왕의 열 번째 아들 염계재冉季載의 후예다.

 

<염씨가보冉氏族譜>에 따르면

염옹의 부친 염리冉離가 안씨顔氏를 아내로 맞아 맏아들 염경을 낳았는데 자가 백우伯牛이고

차남으로 염옹을 낳았는데 자가 중궁仲弓이다.

안씨가 죽은 후 공서씨公西氏를 아내로 맞아 염구를 낳았는데 자가 자유이고 염유, 염자冉子라고도 불렸다.

 

훗날 공서씨는 삼형제를 공자에게 맡겨 공부를 시켰다.

염씨 삼형제는 집안이 가난했지만 공자의 격려를 받으며 학문적으로 성공하여 ‘一門三賢’으로 일컬어졌다.

 

2. 권력과 정사에 밝았다

 

계강자季康子가 공자에게 “염구는 어집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1천 호에 이르는 읍과 1백 대의 전차를 가진 집안이라면 염구는

그 군사와 재정을 맡아 관리할 수는 있겠지만 어진 지는 내가 알지 못합니다.”라고 했다.

 

다시 “자로는 어집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염구와 같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염구冉求는 정사政事에 능하고 다재다능하였으며 이재理財에도 밝았다.

공자가 14년간 각 제후국을 떠돌 때 안연·자로·자공과 함께 공자를 도운 제자였다.

 

그는 공자의 門下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다.

공자는 염구冉求를 자로子路와 더불어 자신의 제자들 중 가장 정치政治에 뛰어난 자질과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노魯나라의 권세가인 계강자季康子가 공자에게 염구冉求에게 정치를 맡겨도 괜찮겠는가 하고 묻자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정치를 맡길 만한 인물이라고 말했다.

 

구求(염구)는 재주와 능력을 갖추었습니다.

정치를 한다고 한들 무엇을 걱정하겠습니까?/<論語 옹야雍也>

 

특히 그는 일찍이 노나라의 권력자 계강자의 재상이 되어

BC 487년에 병사를 이끌고 제齊나라 군대의 침입을 막는 큰 공을 세웠다.

그는 계강자季康子를 설득하여 여러 나라를 두루 여행하던 공자를 다시 노나라로 모셔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공자의 도를 실천하는 데 부족한 면이 있었다.

염구冉求는 지나치게 소극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孔子는 소극적인 성격을 지닌 염구冉求의 특성에 맞는 교육 방법을 사용했다.

 

자로가 “의로운 일을 들었으면 바로 실천해야 합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부형이 건재하신데 들었다고 어찌 바로 행동으로 옮길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공자는 자로子路가 했던 “의로운 일을 들었으면 바로 실천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을 염구冉求에게도 받았다.

그런데 공자는 자로에게 한 말과는 전혀 다른 대답을 했다.

즉 공자는 "道를 배우면 즉시 실천해야 한다"고 했다.

 

자화子華가 괴이하게 여기며 “질문은 같은데 답이 달라서 감히 여쭙습니다.”라고 하자

공자는 “구는 머뭇거리기 때문에 격려한 것이고 유는 성급하게 남을 이기려하기 때문에 억제한 것이다.”라고 했다.

 

공자가 이렇게 답변한 이유는 모든 일에서 뒤로 물러나는 염구冉求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적극성을 갖도록 해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의 나쁜 머리를 탓하며 공부를 소홀히 하는 아이처럼

염구는 공자의 가르침을 따르는 일에도 자신의 소극적인 성격을 핑계거리로 삼았다.

 

염구왈冉求曰 염구冉求가 공자에게 말했다.

비불설자지도非不說子之道 "저는 선생님의 가르침을 싫어하는 것이 아닙니다.

역부족야力不足也 다만 힘이 부족할 따름입니다."

 

자왈子曰 이에 공자가 말씀하셨다.

역부족자力不足者 중도이폐中道而廢 금녀화今女畫

“힘이 부족한 자는 중도에 포기하는 법인데 지금 너는 미리 한계를 긋는 것이다.”

/<논어 옹야雍也>

 

공자는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능력에 한계를 그어 스스로 포기하는 염구를 꾸짖은 것이다.

그리고 학문을 배우고 덕행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적극적인 의지와 강한 의욕이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쳤다.

 

그런데 염구는 계씨季氏의 가신家臣이 된 후부터 공자의 가르침을 저버리는 행동을 저질렀다.

그는 권력과 출세에 눈이 멀어 권문세가인 계씨季氏의 입맛에 맞는 행동만 했다.

그는 권력을 전횡하여 부정을 일삼고 부패에 찌든 계씨季氏 편에 서서 출세 가도를 달렸다.

공자는 철저하게 권세가인 계씨季氏 편에 서서 행동하는 冉求에 대해 '머리 숫자만 채우고 있는 신하'라고 평가했다.

 

훌륭한 신하는 主君을 도리로 섬기고 만약 그렇게 할 수 없으면 그만두고 물러난다.

구求는 머리 숫자만 채우고 있는 신하일 뿐이다./<論語 先進>

 

공자가 보기에 염구는 자신의 부모와 임금을 죽이는 명령만 제외하고

계씨季氏가 내리는 명령만을 따르는 '주구走狗'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염구冉求가 계씨季氏를 위해 백성들에게 세금을 가혹하게 징수하자 공자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계씨季氏는 노魯나라의 제후였던 周公보다 더 많은 富를 소유하고 있다.

그런데 구求는 계씨季氏를 더욱 부유富裕하게 해주려고 백성들에게 세금을 가혹하게 거두어들였다.

이에 공자가 말했다.

"그는 우리의 무리가 아니다. 제자들아!

북을 울려 구求의 잘못을 탄핵함이 옳다."/<논어 선진先進>

 

부귀영화와 출세를 위해 권력에 빌붙어 백성들을 수탈하는 冉求의 행위를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던 공자는

그를 '우리의 무리'가 아니라면서 자신의 門下에서 쫓아내버렸다.

이렇게 해서 冉求는 공자의 제자 중에서 파문破門을 당한 처음이자 마지막 인물이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쓰게 되었다.

 

염구冉求는 한때 공자가 칭찬을 아끼지 않은 제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季氏의 家臣이 된 후 권력과 출세에 눈이 멀어 스승인 공자의 가르침을 저버렸다.

 

冉求는 재여宰予와 더불어 자질과 품성이 갖추어져 있지 않다면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도 별 소용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 인물이었다.

 

3. 후대의 추앙

 

비록 한때 공자에게 배척받았지만 공자의 72수제자를 가리키는 공문72현 중 한 사람이며

후대에는 공자의 10대 제자를 가리키는 공문십철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았다.

 

그래서 東漢(후한) 명제 영평永平 15년인 72년에 공자 사당에 배향되었다.

당나라 현종 개원開元 27년인 739년에 ‘서후徐侯’로 추증되었고

송나라 진종 대중상부大中樣符 2년인 1009년에 또다시 ‘팽성공彭城公’으로 추봉되었으며

남송 도종 함순咸淳 3년인 1267년에 ‘서공徐公’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4. 관련 유적

 

사후에 지금의 산둥성 짜오좡(棗莊)시 쉐청(薛城)구의 혜공산奚公山에 묻혔다.

<정도현지定陶縣志>에는 염자묘冉子墓가 지금의 산둥성 허쩌(菏澤)시의 양지바른 곳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통지通志>에는 “염자묘冉子墓는 허쩌시 딩타오(定陶)구 동쪽 30리 밖에 있다.”라고 하였다.

그의 고택故宅은 허쩌시 딩타오구 동쪽 30리 밖의 란구진(冉堌鎭)에 있다.

그곳에도 염릉冉陵과 사당이 있었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중국인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