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제자들 20 안무요顔無繇 21 상구商瞿 22 고시高柴
20 안무요顔無繇(BC545?-?)
1. 공자의 수제자 안회의 부친
노魯나라 사람으로 자는 노路, 이름을 유由이고 孔門72賢 중 한 사람으로 안회의 아버지이다.
안회와 함께 공자의 제자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부자가 함께 배운 것이 아니고 시기를 달리 해서 배웠다.
문헌 기록에는 제나라 왕과 성씨가 같은 강씨姜氏 성의 아내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 아내와 제나라 공족이 연관 있음을 증명할 자료는 없다.
그렇게 유능한 인물은 아니었던 듯하다.
안회가 죽자 가난했던 안로顔路는 공자에게 수레를 팔아 장례를 치르길 청했다.
공자는 자신의 아들 공리가 죽었을 때의 상황을 들며 이를 거부했다고 한다.
공자는
“재능이 있든 없든 각자 다 자기 자식들이 아닌가.
(내 아들) 공리孔鯉가 죽었을 때 관으로 널만 쓰고 겉 널은 쓰지 않았다.
내가 수레를 팔아 겉 널을 마련해주지 않은 것은 내가 대부가 된 이후로 걸어 다닐 수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2. 후대의 추앙
당나라 현종 開元 27년인 739년에 ‘기백杞伯’에 추봉되었고
송나라 진종 大中祥符 2년인 1009년에는 ‘곡부후曲阜侯’에 추봉되었다.
원나라 문종 天歷 3년인 1330년에 ‘기국공杞国公’에 봉해지고 ‘문유文裕’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의 아내도 동시에 기국부인杞國夫人으로 추봉되었다.
21 상구商瞿(BC522-?)
1. <주역>을 전수하여 역학 발전에 공헌하다
노魯나라 사람으로 字는 자목子木으로 공자보다 29세가 적은 그는 공자에게서 <춘추>를 배웠고 <주역>을 좋아했다.
그는 공자가 전해준 <주역>을 초楚나라 사람 한비자홍馯臂子弘에게 전하여 역학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그러나 <논어>에는 상구에 대한 언급이 없다.
상구는 구瞿씨 성의 시조 중 한 갈래로 꼽히기도 하며
그의 초상화가 타이완(臺灣) 타이베이(臺北) 고궁박물원에 소장되어 있다.
2. 후대의 평가와 논란
<주역>의 전수는 상구로부터 한비자홍에서 교자용자嬌子庸疵, 주자가수周子家竪,
광자승우光子乘羽, 전자장하田子莊何, 왕자중동王子中同, 한천漢川 사람 양향楊向으로 이어졌다.
한 무제가 제자백가들을 축출하고 유가의 학술을 존숭하던 시기인 원삭元朔 연간에
역학에 정통했던 양향楊向이 中大夫로 임명되다.
그로부터 역학을 배워 벼슬길에 오른 사람은 묵성墨成, 맹단孟但, 주패周霸, 주보언主父偃 등이 있다.
상구는 당 현종 開元 27년인 739년에 ‘몽백蒙伯’으로 봉해졌고
송 진종 大中祥符 2년인 1009년에는 ‘수창후須昌侯’로 추봉되었다.
남송 도종 때인 1267년에는 ‘수창후’란 작위로 공자 제사에 함께 모셔졌고
명 세종 가정嘉靖 9년인 1530년에는 ‘先賢商子’로 호칭이 바뀌었다.
송나라 때 학자 엽몽득은 안연(안회)이나 자공(단목사)보다 나이가 위인 상구가
<논어>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에 의문을 품었다.
이 때문에 만년에 <주역>에 심취했던 공자가 역학을 상구에게 전수한 것은 물론 상구의 실존 여부가 의문시되기도 한다.
22 고시高柴(BC521-?) 자고子羔
1. 작고 못생겼지만 우직하고 성실했던 제자
孔門72賢 중 한 사람인 고시高柴 자를 자고子羔 또는 자고子高, 자고子皐, 계고季皐, 계자고季子臯 등으로 불렀다.
공자보다 서른 살 아래였다.
동주 춘추시기 제齊 文公의 18세 후손인 그는 노, 위衛나라에서 4차례 벼슬을 살았는데
노나라에서 비재費宰, 성재郕宰, 무성재武城宰를 지냈고 위나라에서 사사士師를 지냈다.
►동주東周시대는 춘추전국시대라고도 불리는데 춘추전국시대는 다시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로 나뉜다.
당나라 현종 때는 ‘공백共伯’에 봉해졌으며
송나라 진종 大中祥符 2년인 1009년에 공성후共城侯에 추봉되었다.
고시는 난릉兰陵(지금의 山東성 란링현) 지역에서 제자들에게 공자의 가르침을 전파했고 죽은 뒤에도 난릉에 묻혔다.
고시는 키가 5尺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작고 못생겼지만 우직하고 성실하였다.
옥관獄官이었을 때도 옥사를 공정히 처리했고 공자도 그를 우직한 사람으로 보았다.
자로와 친분이 깊어 자로가 그를 비읍費邑의 員(수령, 사또)으로 삼았다.
효성 또한 지극하여 부모의 그림자를 밟지 않았으며 부모의 상을 당했을 때 3년 동안 슬프게 울며 웃지 않았다고 한다.
2. 고시에 대한 <사기>의 기록
<사기 중니제자열전>에 고시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고시는 자가 자고이고 공자보다 30년 연하이다.
자고는 신장이 5척에도 못 미치었다.
공자에게서 가르침을 받을 때 공자가 그를 우직하다고 생각했다.
자로가 자고를 비읍費邑의 재宰(우두머리)로 삼자 공자가 ‘남의 자식을 해치는구나’라고 탄식했다.
이 말에 자로가 ‘백성이 있고 사직社稷이 있으니 어찌 꼭 책 읽는 것만을 학문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반문했다.
그러자 공자가 ‘이렇기 때문에 나는 말 잘하는 자들을 미워하는 것이다’라고 꾸짖었다.”
3. 고시의 저작
기록상으로 고시의 저작은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다 고고학 발굴성과로 확인된 전국시대 초나라 죽간竹簡 중에서 <자고子羔> 한 편과 공자와 제자들 사이에 오간 <시경>에 관한 토론집 <공자시론> 및 노나라가 큰 가뭄을 겪은 뒤 공자와 노나라 애공 및 제자들이 나눈 토론집 <노방대한>을 고시의 저작으로 보는 학자들이 많다.
►공자시론孔子詩論 공자와 제자들 사이에 오간 <시경詩經>에 관한 토론
►노방대한魯邦大旱 노나라가 큰 가뭄을 겪은 뒤 공자와 노나라 애공哀公 및 제자들이 나눈 토론
4. 고씨와 시씨의 시조
고시는 고高씨 성의 조상으로 받들어지고 있으며
아내와의 사이에서 난 아들은 고시의 이름 자인 ‘시柴’를 성으로 삼아 시씨 성의 시조로 받들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