哲學/中國哲學

공자의 제자들 24 공백료公伯寮 25 사마경司馬耕 26 번수樊須

空空 2023. 6. 22. 10:30

24 공백료公伯寮(?-?)

 

노魯나라 사람으로 자는 자주子周라 했다.

공자의 제자로 전해지지만 제자가 아니라고 보는 설도 있다.

<사기 중니제자열전>에 공자의 제자로 기록되어 있고 <논어>에 공백료公伯寮의 이름이 등장한다.

자로子路를 계손씨季孫氏에게 참소한 일이 있어 공자에게 ‘소인’이라 평을 들었다.

 

자로子路(중유)와 더불어 계씨季氏(공자를 높여 부름)의 가신이 되었으나 계손씨季孫氏에게 자로를 모함한 적이 있다.

이 일은 제14편 <논어 헌문편憲問篇> 38장에 나온다. 해당 대목을 보면 이렇다.

 

공백료소자로어계손公伯寮愬子路於季孫 자복경백이고子服景伯以告 왈曰

공백료가 계손씨에게 자로를 참소하자 자복경백이 이를 공자께 말씀드렸다.

►자복경백子服景伯 노나라의 大夫(상류층 관리)로 성이 자복, 이름이 하何, 자가 백伯이고 경景은 그의 시호이다.

 

부자고유혹지어공백료夫子固有惑志於公伯寮

“계손 부자夫子가 공백료의 모함으로 인하여 자로에 대한 마음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오력유능사제시조吾力猶能肆諸市朝

제 능력이 미력하지만 공백료 같은 사람은 처형하여 그 시신을 저자거리에 내걸어둘 수 있습니다.”

 

자왈子曰 그러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도지장행야여道之將行也與 명야命也 “道가 장차 이뤄지는 것도 天命이요,

 

도지장폐야여道之將廢也與 명야命也 도가 없어지려고 하는 것도 천명인데

공백료기여명하公伯寮其如命何 공백료 따위가 그 명을 어찌한단 말이냐!”

 

이어서 “군자는 3가지를 두려워한다.

天命을 두려워하고 大人을 두려워하고 성인의 말씀을 두려워한다.

반면에 소인은 천명을 모르니 두려워할 줄 모르고 대인을 업신여기며 성인의 말씀을 경시한다.”라고 하였다.

 

 

25 사마경司馬耕(?-BC481?)

 

1. 송 권력자 환퇴의 동생

 

孔門72賢으로 송宋(지금의 허난성 商丘시)나라 사람이며 성은 子이고 씨는 向이었다.

이름은 리犁이고 자는 자우子牛라고 했다.

아버지는 향라向羅이고 송나라의 권력자 환퇴의 동생이다.

환퇴가 송나라의 사마司馬로 임명되자 사마를 성으로 삼았다.

 

기원전 481년 사마환퇴가 전권을 휘두르며 난을 일으키자 사마경은 봉읍을 내놓고 송나라를 떠나 제나라로 갔다.

사마환퇴가 난에 실패하여 위衛나라로 도망쳤다가 다시 제나라로 오자 사마경은 이를 피해 다시 오나라로 갔다.

그러면서 다시는 형과 한 군주를 모시지 않겠노라고 맹서했다.

진晋나라의 대부 조간자와 제나라 승상 진성자가 그를 불렀으나 가지 않았다.

 

2. 성격에 관한 일화

 

사마경은 당초 사마환퇴가 난리를 일으키려 할 때 이를 몹시 걱정했다.

이에 공자가 내성무구內省無疚 부하우하구夫何憂何懼

“마음을 살펴 허물이 없는데, 어찌 걱정하고 두려워하겠느냐.”고 위로했다.

 

한 번 일러주면 바로 믿지 못하고 거듭 확인하는 성격이었다.

 

가정이 낭패를 당하고 뿔뿔이 흩어져 고독해하자 자하(복상)가

“생사가 천명에 달려 있고 부귀가 하늘에 있으며”

“사해가 모두 형제 아닌가”라며 그를 위로했다고 한다.

 

자우는 성격이 조급하고 말이 많은 편이었다고 한다.

공자에게 仁을 물은 적이 있는데 공자는 “인덕이 있는 사람은 말을 조심스럽게 한다.”라고 했다.

“말을 조심스럽게 하면 인덕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라고 다시 묻자

공자는 “행하기도 어려운데 말할 때 조심스럽지 않을 수 있겠느냐?”라고 했다.

 

군자에 대해서 묻자 공자는 “군자는 걱정도 두려움도 없다.”라고 했다.

“걱정도 두려움도 없으면 군자라고 할 수 있겠네요?”라고 다시 묻자

“마음으로 반성하여 잘못이 없으면 무엇을 걱정하고 두려워하겠느냐?”라고 했다.

 

3. 후대의 평가

 

반란에 반대하고 위계질서를 지키려 한 그의 사상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동한 명제 永平 15년(72)에 공자와 72제자에게 제사할 때 제자 중 한 사람으로 추앙되었고

당 현종 開元 27년(739)에 향백向伯에 봉해졌다.

송 진종 大中祥符 2년(1009)에는 초구후楚丘侯로 추봉되었다가

휘종 정화正貨 6년(1116)에 수양후綏陽侯로 바뀌었다.

명 가정嘉靖 9년(1530)에 다시 先賢司馬子로 바뀌었다.

 

 

26 번수樊須(?-?)

 

모략과 용기, 상무정신을 갖춘 제자

 

노魯나라 사람이며 일설에는 제齊나라 사람이라고도 한다.

자는 자지子遲, 번지樊遲이며 孔門72賢 중 한 사람으로 공자보다 36세 어리다.

 

그는 농민 출신으로 공자의 제자가 되기 전에 20세 무렵 계씨季氏 밑에서 일하고 있던 염구에게 가서 벼슬을 했다.

공자가 천하 주유를 끝내고 노나라로 돌아오자 스승으로 모셨다.

 

비교적 공자의 측근으로 일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공자의 수레를 몰았다는 기록이 <論語 爲政篇>에 나온다.

 

번수는 모략이 있고 용기와 상무 정신을 갖추고 있어 기원전 484년 제나라가 노나라를 공격하자 참전하여 염구에게 앞장설 것을 건의하여 승리를 거두는데 역할을 했다.

 

번수는 학업에서는 큰 성취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상무 정신으로 공자의 제자들 중 나름대로의 명성을 얻었다.

그가 관심을 가졌던 분야는 앎(知)과 어짊(仁)의 문제였던 것 같은데 그다지 총명한 제자는 아니어서 엉뚱한 질문

예컨대 농사짓는 법이나 채소 가꾸는 법 따위를 공자에게 물어 小人이라는 비난을 듣기도 했다.

재치는 없었어도 비교적 성실하고 순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당나라 개원 27년인 739년에 ‘번백樊伯’에 봉해졌고

송나라 대중상부 2년인 1009년에 ‘익도후益都侯’가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