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詩/매월당집梅月堂集

김시습金時習 전傳/이이李珥

空空 2023. 12. 9. 08:12

김시습金時習 전傳/이이李珥

금시습자열경金時習字悅卿 강릉인江陵人 김시습의 자는 열경이니 강릉江陵 사람이다.

신라알지왕지예新羅閼智王之裔 신라 알지왕閼智王의 후손으로

유왕자주원有王子周元 왕자 김주원金周元이라는 이가

읍우강릉邑于江陵 강릉의 고을을 받았으므로

자손잉적언子孫仍籍焉 인하여 적관籍貫으로 하였다.

 

궐후厥後 유연유태현有淵有台鉉 그 후에 김연金淵이라는 이와 김태현金台鉉이라는 이가 있어

개위고려시중皆爲高麗侍中 다 고려의 시중侍中이 되었고

태현지후구주台鉉之後久柱 관지안주목官止安州牧 김태현의 후손으로 金九桂라고 하는 이가 安州牧使가 되어

생겸간生謙侃 종오위부장終五衛部將 김겸간金謙侃을 낳았는데 오위부장五衛部將에 그치었으며

겸간생일성謙侃生日省 김겸간이 김일성金日省을 낳아서

이음보충순위以蔭補忠順衛 음직蔭職으로 충순위忠順衛에 보직되었다.

 

일성취선사장씨日省娶仙槎張氏 김일성이 선사仙搓 장씨張氏에게 장가들어

어선덕십년於宣德十年 선덕宣德 10년(1435년 세종17년)에

생시습우한사生時習于漢師 김시습金時習을 서울에서 낳으니

 

생품이질生稟異質 나면서부터 특이한 체질을 가진 그는

리포팔월離胞八月 자능지서自能知書 세상에 나온 지 여덟 달에 스스로 능히 글자를 알므로

최치운견이기지崔致雲見而奇之 최치운崔致雲이 보고 기이하게 여겨

명명왈시습命名曰時習 이름을 ‘시습時習'이라고 지었다.

 

어지이신경語遲而神警 림문臨文 말은 더디면서 정신은 놀라워서 글에 임하여

구불능독口不能讀 의즉개효意則皆曉 입으로 읽지는 못하여도 뜻인즉 다 알았고

삼세三歲 능철시能綴詩 3살에 능히 시를 짓고

오세五歲 통중용通中庸 대학大學 5살에 <중용中庸><大學>을 통달했으므로

인호신동人號神童 사람들이 神童이라고 불렀으며

명공허조배名公許稠輩 다취방언多就訪焉 이름난 재상 허조許稠 같은 이들이 많이 찾았다.

 

장헌대왕문지莊憲大王聞之 장헌대왕莊憲大王(세종)께서 들으시고

소치승정원召致承政院 시이시試以詩 승정원承政院에 불러들여 시로 시험하니

과첩이가果捷而佳 하교왈下敎曰 과연 민첩하고 잘 하는지라 下敎하여 말하기를

 

여욕친견予欲親見 공해속청恐駭俗聽 “내가 친히 보고 싶지만 시속 사람들이 듣고서 놀랄까 염려되니

의욱기가宜勖其家 도회교양韜晦敎養 마땅히 그 집에 권하여 재지를 감추어 가르치고 기르게 하라.

대기학성待其學成 장대용將大用 그 학문이 성취되기를 기다려 장차 크게 쓰겠다.” 하고

 

사백환가賜帛還家 비단을 주어 집으로 돌아가게 하니

어시於是 성진일국聲振一國 이에 명성이 온 나라에 떨쳤고

칭왈오세이불명稱曰五歲而不名 칭稱하기를 ‘五歲’라 하고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였다.

 

시습기몽時習旣蒙 예장睿奬 김시습이 이미 임금의 장려하심을 받았으므로

익무원업益懋遠業 더욱 큰 학문에 힘쓰더니

 

경태년간景泰年間 경태연간景泰年間(1453-1455)에

영릉英陵 현릉顯陵 상계이훙相繼而薨 영릉英陵(세종)과 현릉顯陵(문종)이 서로 잇달아 훙薨하시고

 

로산이삼년손위魯山以三年遜位 노산魯山(단종)이 3년 만에 왕위王位을 양위하시니

어시於是 시습년이십일時習年二十一 그때에 김시습은 나이 21세로

방독서우삼각산중方讀書于三角山中 바야흐로 三角山 중에서 글을 읽고 있었다.

 

인유자경성래자人有自京城來者 이때에 서울에서 오는 자가 있어서

시습즉폐호불출자삼일時習卽閉戶不出者三日 김 시습이 즉시 문을 닫고 나오지 아니하기 사흘이나 하더니

 

내대곡乃大哭 진분기서盡焚其書 이에 크게 울고 그 서적을 다 불사르며

발광함어혼측이도지發狂陷於溷廁而逃之 발광하여 뒷간에 빠졌다가 도망가서

 

탁적치문托跡緇門 승명설잠僧名雪岑 치문緇門(佛家)에 종적을 의탁하였는데 그 僧名은 설잠雪岑이나

루변기호累變其號 그 호는 여러 번 변경하여

 

왈청한자曰淸寒子 왈동봉曰東峯 왈벽산청은曰碧山淸隱 왈췌세옹曰贅世翁 왈매월당曰梅月堂

청한자淸塞子·동봉東峯·벽산청은碧山淸隱ㆍ췌세옹贅世翁·매월당梅月堂이라 하였다.

 

위인모침신단爲人貌寢身短 호매영발豪邁英發

그 사람됨이 모양이 못나고 키는 작으나 호기롭고 준수하며 영특하고 뛰어났었다.

 

간솔무위의簡率無威儀 간략하고 탄솔하여 위엄 있는 거동은 없으나

경직불용인과勁直不容人過 굳세고 곧아 사람의 과실을 용납하지 못하며

상시분속傷時憤俗 시대를 슬퍼하고 세속을 분하게 여기었다.

 

기울불평氣鬱不平 자도불능수세저䀚自度不能隨世低䀚

기氣가 서려 불평이 많아서 스스로의 생각에도 세상을 따라 높낮임을 하지 못할 줄 알고

 

수방형해유방지외遂放形骸遊方之外 역중산천域中山川 족적태편足跡殆遍 우승즉서언遇勝則棲焉

몸을 버리어 세상 밖에 놀아서 국내의 산천에는 발길이 거의 편답하였는데 좋은 곳에서는 살기도 하였다.

 

등람고도登覽故都 즉필척촉비가則必躑躅悲歌 루일불이累日不已

옛 도읍 땅[故都]을 올라 보고서는 반드시 머뭇거리며 슬피 노래하기를 여러 날이 되어도 마지아니하였다.

 

총오절인聰悟絶人 기어사서륙경其於四書六經 즉유시수업우사則幼時受業于師

약제자백가若諸子百家 즉불사전수則不俟傳授 무불섭렵無不涉獵

 

총명하고 깨닫는 것이 남보다 뛰어나서 그 四書·六經은 어릴 때에 스승에게 배웠다 하더라도

諸子百家 같은 것은 가르치고 배우는 것을 기다리지 아니하고서도 섭렵涉獵하지 아니함이 없어

 

일기이종불망一記而終不忘 고평일미상독서故平日未嘗讀書

역불이서급자수亦不以書笈自隨 이고금문적而古今文籍 통관무루通貫無漏

 

한 번 기억하면 끝내 잊지 아니한 까닭에 平日에는 한 번도 글을 읽지 아니하고

또한 책상자[書笈]를 가지고 다니지도 아니하나 고금의 서적을 관통하여 빠침이 없으므로

 

인유거문자人有擧問者 응구설무의應口說無疑

뢰괴강개지흉磊塊慷慨之胸 무이자선無以自宣

 

사람이 들어 묻는 것이 있으면 응구첨대應口輒對하여 의심이 없었지만

기상이 활달하고 비분강개한 가슴속을 스스로 풀어 헤치지는 못하였다.

 

범세간풍월운우凡世間風月雲雨 산림천석山林泉石 궁실의식宮室衣食 화과조수花果鳥獸

인사지시비득실人事之是非得失 부귀빈천富貴貧賤 사생질병死生疾病 희노애락喜怒哀樂

 

무릇 世間의 風月·雲雨·山林·泉石·宮室ㆍ衣服ㆍ花果·鳥獸와

人事의 是非·得實, 富貴·貧賤, 사생死生ㆍ疾病, 喜怒ㆍ哀樂과

 

지어성명리기至於性命理氣 음양유현 陰陽幽顯 유형무형有形無形 가지이언자可指而言者

일우어문장一寓於文章 고기위사야故其爲辭也 수용풍발水湧風發

 

심지어는 性命·理氣ㆍ음양陰陽ㆍ유현幽顯, 有形·無形에 이르기까지 지적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은

한결같이 문장에 붙여 놓았으므로 그 文辭가 물이 용솟음치듯 바람이 일 듯하고

 

산장해함山藏海涵 신창귀수神唱鬼酬

간견층출間見層出 사인막지단예使人莫知端倪

 

산이 감추어지듯 바다가 잠기는 듯하며 神이 부르고 鬼가 화답하는 듯

간간히 보이고 층층이 나와 사람으로 하여금 시작과 끝을 알지 못하게 하였다.

 

성률격조聲律格調 불심경의不甚經意 성률聲律과 격조格調에 있어서는 심히 생각하지 않았으나

이기경자즉사치고원而其警者則思致高遠 그 기경奇警한 것은 생각과 운치가 높고 멀어서

형출상정迥出常情 보통 사람의 생각보다 멀리 뛰어나니

비조전자소가기망非雕篆者所可跂望 조전彫篆하는 자가 가히 발돋음 하고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어도리於道理 도와 理에는

수소완색존양지공雖少玩索存養之功 비록 보아 찾고 붙들어 두어서 함양한 공은 적지만

이재지지탁以才智之卓 유소령해有所領解 재주와 지혜가 탁월하므로 이해하는 바가 있어

횡담수론橫談豎論 횡적으로 말하고 종적으로 지껄여도

다불실유가종지多不失儒家宗旨 많이 儒敎의 큰 뜻을 잃지 아니하였다.

 

지여선도이가至如禪道二家 역견대의亦見大意 심구병원深究病源

禪·道 두 敎에 이르러서도 역시 大意를 보아서 그 병 되는 근원을 깊이 연구하였다.

 

이희작선어而喜作禪語 발천현미發闡玄微 영탈무체애穎脫無滯礙

수로석명곤심어기학자雖老釋名髡深於其學者 막감항기봉莫敢抗其鋒

기천자발췌其天資拔萃 이차가험以此可驗

 

禪語를 좋아하여 현미玄微한 것을 밝혀냄에 영탈穎脫하여 막히고 걸리는 것이 없었으며

비록 늙은 중, 이름난 중으로 그 학문에 깊은 자라 하더라도 감히 그 말에 대항하지 못하였으니

그 천품이 뛰어난 것을 그것으로도 증명할 수 있었다.

 

자이성명조성自以聲名早盛 이일조도세而一朝逃世

내고작광역지태乃故作狂易之態 이엄기실以掩其實

 

스스로 생각하기를 “명성은 일찍부터 컸지만 하루아침에 세상을 도피하였고

마음은 유교이면서 행적은 불교이라서 시대에 괴상하게 보일 것이다.” 하여

이에 고의로 미친 짓을 함으로써 사실을 엄폐하려 하였다.

 

사자유욕수학자士子有欲受學者 선비 중에 와 배우려는 자가 있으면

즉역격이목석則逆擊以木石 나무나 돌로 치려하였고

 

혹만궁장사或彎弓將射 혹은 활을 당겨 쏘려 하여

이시기성以試其誠 그 성의를 시험했던 까닭에

고처문자기한故處門者旣罕 문하에 있는 자가 드물었고

 

차희개산전且喜開山田 또 山田 개간하기를 좋아하여

수기환가아雖綺紈家兒 비록 비단 옷 입는 집의 아이라도

필역이운확심고必役以耘穫甚苦 반드시 김매고 거두는 데 역사시켜 매우 괴롭게 하였으므로

종시전업자우선의終始傳業者尤鮮矣 끝내 학업을 전해 받은 자가 더욱 적었다.

 

산행山行 호백수제시好白樹題詩 풍영량구諷詠良久 첩곡이삭지輒哭而削之

혹제우지或題于紙 역불시인亦不示人 다투수화多投水火

혹각목위농부경운지형或刻木爲農夫耕耘之形 렬치안측列置案側

숙시종일熟視終日 역곡이분지亦哭而焚之

 

산에 가면 나무를 벗겨 희게 하고 시를 쓰고서는 외고 읊기를 한참 하다가 곧 통곡하고는 깎아 버렸고

혹은 종이에 썼어도 또한 사람에게 보이지 아니하고 많이는 물이나 불에 던져 버렸으며

혹은 나무로 조각해서 농사군의 갈고 김매는 형상을 만들어 책상 옆에 벌여놓고

종일 익히 보다가 역시 통곡하고 태워 버렸다.

 

 

유시소종화심성有時所種禾甚盛 영률가완穎栗可玩 승취휘겸乘醉揮鎌

진경위지盡頃委地 인방성이곡因放聲而哭

행지파측行止叵測 대피류속소치점大被流俗所嗤點

 

때로는 심은 곡식이 매우 성해서 이삭 진 것이 볼만한데도 술에 취해서 낫을 휘둘러

잠깐 동안에 다 쓰러뜨려 땅에 버리고 인해서 목을 놓아 통곡하였다.

행동거지가 측량할 수 없어서 시속 사람들의 크게 비웃는바 되었다.

 

거산견객居山見客 문도하소식問都下消息 산에 살면서 오는 손을 보고서 서울 소식을 물어

문인유사매자聞人有肆罵者 “사람들이 욕하고 나무라는 자가 있다.”고 들으면

즉필색희則必色喜 반드시 얼굴에 기뻐하는 빛이 있었고

 

약왈若曰 양광이유소온운佯狂而有所蘊云 즉첩찬미불이則輒攢眉不怡

만일 “거짓 미쳐서 속에는 딴마음이 있어 그런다.”고 하는 말을 들으면

눈썹을 찡그리고 기뻐하지 아니하였다.

 

견제목달관혹비인망見除目達官或非人望 즉필곡왈則必哭曰

사민하죄斯民何罪 차인당차임야此人當此任耶

 

제목除目(官吏任免의 보고서)에 높은 벼슬한 자가 혹시 人望 아닌 자임을 보면 반드시 통곡하며 말하기를

“이 백성이 무는 죄가 있어서 이 사람에게 이런 임무를 맡겼는가?”고 하였다.

 

시명경금수온時名卿金守溫 서거정徐居正 상이국사賞以國士

그때에 이름난 대관인 김수온金守溫이나 서거정徐居正 같은 이는 國士라고 칭찬하였다.

 

거정방추조居正方趨朝 행벽인行辟人

시습의람루時習衣藍縷 대호색帶蒿索 대폐양자戴蔽陽子

[천부소착백죽립賤夫所著白竹笠 칭폐양자稱蔽陽子]

 

서거정徐居正이 바야흐로 조회에 들어가는데 “사람은 물러가라.”고 하는 때에

김시습이 누더기를 입고 새끼로 띠를 매고 패랭이[蔽陽子]를 쓰고

[蔽陽子 천한 사람이 쓰는 흰 대[白竹]으로 만든 것인데 세상에서 패랭이라 한다]

 

우제시遇諸市 범전도犯前導 앙수호왈仰首呼曰

시가에서 만나 앞의 인도하는 자를 헤치고 들어가며 머리를 쳐들고

 

강중剛中 거정자居正字 안온安穩 “강중剛中(서거정의 자)은 평안한가?”하니

거정소응지居正笑應之 주헌어駐軒語 서거정이 웃으며 대답하고 초헌貂軒을 세워 한참 말하므로

일시개해목상시一市皆駭目相視 온 저자 사람들이 모두 놀란 눈으로 서로 쳐다보았다.

 

유조사수모자불능감有朝士受侮者不能堪 조사朝士로서 업신여김을 당한 자가 있어 견디지 못하여

견거정욕계치기죄見居正欲啓治其罪 서거정을 보고서 말하되 “그 죄를 다스리자.”고 하니

 

거정요수왈居正搖首曰 서거정이 머리를 흔들며

지지止止 광자하족여교狂子何足與較 “말라. 말라! 미친 사람과 무엇을 따진다는 거요?

 

금죄차인今罪此人 백대지하百代之下 필루공명必累公名

이제 이 사람을 형벌한다면 백년 뒤까지 그대의 이름에 누累가 될 것일세.”라고 하였다.

 

김수온지관사金守溫知館事 김 수온이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가 되어

이맹자견량혜왕론以孟子見梁惠王論 ‘孟子가 양혜왕梁惠王을 보았다.’는 글귀로

시태학제유試太學諸儒 태학의 여러 선비를 논시論試하였는데

 

유상사생견시습우삼각산왈有上舍生見時習于三角山曰

상사생 하나가 김시습을 삼각산으로 찾아가 보고 말하기를

 

괴애乖崖[수온별호守溫別號] 호극好劇 “괴애乖崖[수온의 別號]는 심한 것을 좋아합니다.

맹자견량혜왕孟子見梁惠王 기합론제豈合論題

맹자가 양혜왕을 보았다는 것이 어찌 논문 제목[論題]에 합당합니까?” 하니

 

시습時習 소왈笑曰 김시습이 웃으며

비차로非此老 불출차제不出此題 “그 늙은이가 아니면 그런 제목을 내지 않을 것이다.” 하고

내주필성편乃走筆成篇 곧 붓을 들어 한 편篇을 써서 주며

왈생원위자제자曰生員爲自製者 시만차로試瞞此老 “生員이 자작한 것처럼 하여 그 늙은이를 속여 보라.”

 

상사생여기언上舍生如其言 상사생이 그 말과 같이 하였더니

수온독미종守溫讀未終 거문왈遽問曰 김수온이 끝까지 읽지도 아니하고 갑자기 묻기를

열경주경산하사悅卿住京山何寺 “열경이 京山의 어느 절에 있는가?” 하니

상사생불능은上舍生不能隱 상사생이 숨기지 못하였다.

기견지여차其見知如此 그 알아주는 것이 그와 같았다.

 

기론其論 대략이위량혜참왕大略以爲梁惠僭王 그 論의 대략은 '양혜왕은 참람하게 왕이라 한 자이어서

맹자불당견운孟子不當見云 맹자가 보지 않아야 마땅하였다고 한 것이나

금일불수今逸不收 지금은 없어져서 수록收錄하지 못한다.

 

수온기졸守溫旣卒 인유언좌화자人有言坐化者 시습왈時習曰

김수온이 죽은 뒤 사람들 중에 “앉아 죽었다.”고 말한 자가 있으므로 김 시습이 말하기를

 

괴애다욕乖崖多慾 녕유시寧有是 “괴애乘崖는 욕심이 많은 자인데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취령유지就令有之 좌화비례坐化非禮 가령 그런 일이 있다 하여도 앉아 죽는 것은 예절이 아니다.

 

오단문증자역책吾但聞曾子易簀 나는 단지 曾子가 댓자리[역책易簀]를 바꾸었다는 것과

자로결영이이子路結纓而已 자로가 갓끈을 매었다는 것을 들었을 뿐

부지기타不知其他 그 외의 다른 것은 알지 못한다.”하였으니

개수온호불고운蓋守溫好佛故云 대개 김수온이 불교를 좋아한 까닭으로 그렇게 말했다.

 

성화십칠년成化十七年 시습년사십칠時習年四十七

홀장발忽長髮 위문이제조약부爲文以祭祖若父

 

성화成化 17년(1481년 성종12년) 김시습의 나이 47세 때에

홀연히 머리를 기르고 글을 지어서 조부와 아버지에게 제사지냈는데

 

기문략왈其文略曰 그 제문의 대략은

제부오교帝敷五敎 유친거선有親居先 “순舜임금이 五敎를 베푸셨는데 부모 있다는 것이 앞에 있고,

죄렬삼천罪列三千 불효위대不孝爲大 죄 되는 것 3천 가지를 나열하셨는데 불효가 큰 것이었습니다.

 

범거복재지내凡居覆載之內 숙부양육지은孰負養育之恩

대체로 하늘과 땅 안에 살면서 누가 양육하신 은혜를 저버리겠습니까?

 

우애소자愚騃小子 사속본지似續本支

침체이단沈滯異端 말로방회末路方悔 내고례전乃考禮典

수성경搜聖經 강정추원지홍의講定追遠之弘儀

 

어리석고 못난 小子가 본집, 작은 집을 이어 받들어야 할 것이온데

이단異端에 침혹沈惑되었다가 말로末路에 겨우 뉘우쳐 이에 예전禮典을 상고하고

성경聖經을 찾아보아 조상에 따르는 큰 의식을 강정講定했습니다.

 

참작청빈지활계參酌淸貧之活計 무간이결務簡而潔 재전이성在腆以誠

한무제칠십년漢武帝七十年 시오전승상지설始悟田丞相之說

원덕공일백세元德公一百歲 내화허로재지풍운운乃化許魯齋之風云云

 

청빈淸貧한 생활을 참작해서 간략하면서도 깨끗한 것을 힘썼고 많이 차리는 것을 정성으로 바꾸었습니다.

한漢 무제武帝는 70살에야 전승상田丞相의 말을 깨달았고

원덕공元德公은 1백살에야 허노재許魯齋의 풍도風度에 화했다 하옵니다.”고 하였다.

 

수취안씨녀위처遂娶安氏女爲妻 인다권지사人多勸之仕

시습종불능굴지時習終不能屈志 방광여구放曠如舊

 

안씨安氏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내로 삼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벼슬하라고 권하였으나

김 시습은 끝내 뜻을 굽히지 아니하고 방랑하는 것이 예전과 같았다.

 

치월야値月夜 희송리소경喜誦離騷經 송파필곡誦罷必哭

혹입송정或入訟庭 지곡작직持曲作直

궤변필승詭辯必勝 안성案成 대소파기지大笑破棄之

 

달밤을 만나면 이소경離騷經을 기뻐 외었고 다 외면 반드시 통곡하였다.

혹은 송사하는 재판정에 들어가 잘못된 것을 가지고 옳은 것이라고 주장하여

궤변으로 반드시 이기고는 일이 결정되면 크게 웃고 찢어 버리곤 하였다.

 

다여도달시동오유多與挑達市童傲遊 취도가상醉倒街上

일일一日 견령의정정창손과시見領議政鄭昌孫過市 대호왈大呼曰

피한의휴彼漢宜休 창손약불문자昌孫若不聞者

 

흔히 시정의 까부는 애들과 놀다가 거리 위에 취해 쓰러지는데

하루는 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이 거리를 지나가는 것을 보고는 크게 불러 말하기를

“네놈은 그만 쉬어라.” 하였는데 정 창손은 듣지 못한 것같이 하였다.

 

인이차위지人以此危之 상식자절교相識者絶交

유종실수천부정정은惟宗室秀川副正貞恩

남효온南孝溫 안응세安應世 홍유손배수인洪裕孫輩數人 종시불투終始不渝

 

사람들이 그런 것으로 위태하게 여겨 알던 자도 절교하였는데

오직 宗室의 수천부정秀川副正 정은貞恩과

남효온南孝溫·안응세安應世·홍유손洪裕孫 등 몇 사람이 끝내 변하지 아니하였다.

 

효온문시습왈孝溫問時習曰 남효온이 김시습에게 묻기를

아소견여하我所見如何 “나의 보는 바가 어떠하오?” 하니

시습왈時習曰 혈창규천穴窓窺天 김시습이 대답하기를 "“창에 구멍을 뚫고 하늘을 엿보는 것이오." 하였다.

언소견소야言所見小也 [보는 바가 작다고 하는 말]

 

동봉소견여하東峯所見如何 “동봉東峯의 보는 바는 어떠하오?” 하니

왈曰 광정앙천廣庭仰天 “나는 너른 마당에서 하늘을 쳐다보는 것이지.”라고 하였다.

언견고이행미도야言見高而行未到也 [보는 것은 높으면서 행하는 것은 따르지 못한다]

 

미기처몰未幾妻歿 부환산復還山 얼마 안 되어 아내가 죽으니 다시 산으로 돌아가

작두타형作頭陀形 두타형상[頭陀形]을 하였다.

승가僧家 전발제미자위지두타翦髮齊眉者謂之頭陀 중이 머리를 잘라 눈썹에 내려오는 것을 頭陀라 함.

 

희유강릉喜遊江陵 양양지경襄陽之境 다주설악多住雪岳 한계寒溪 청평등산淸平等山

강릉과 양양 지경에 노는 것을 좋아하여 많이는 설악산·한계산寒溪山ㆍ청평산淸平山 등지에 있었는데

 

류자한재양양柳自漢宰襄陽 대이례待以禮 유자한柳自漢이 양양襄陽의 수령이 되어 예절로 대접하고

권부가업행우세勸復家業行于世 “가업家業을 회복하고 세상에 행세하라.”고 권했더니

 

시습이서사지時習以書謝之 유왈有曰 김시습이 편지로 사례했는데 말하기를

장제장참將製長鑱 “장차 긴 꼬챙이를 만들어

용착령출用斲苓朮 그것으로 복령伏塔과 삽주[朮]를 캐어다가

서욕만수응상庶欲萬樹凝霜 일만 나무에 서리가 엉키면

수중유지온포修仲由之縕袍 중유仲由의 온포縕袍(수삼 옷)를 수선하고

천산적설千山積雪 천산에 눈이 쌓이면

정왕공지학창整王恭之鶴氅 왕공王恭의 학창의鶴氅衣를 정돈하겠습니다.

 

여기락백이거세與其落魄而居世 숙약소요이송생孰若逍遙而送生

기천재지하冀千載之下 지여지소지知余之素志

 

낙오落伍되어 세상에 사는 것과 마음대로 오락가락하며 일생을 보내는 것과 어느 것이 나을는지?

천년 뒤에 나의 본뜻을 알아주기 바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홍치륙년弘治六年 와병우홍산무량사臥病于鴻山無量寺 종언終焉 년오십구年五十九

홍치弘治 6년(1493 성종24년)에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에서 병들어 누웠다가 끝마치니 나이 59세였다.

 

유계무소장遺戒無燒葬 권조사측權厝寺側 유언으로 화장하지 말라 하여 임시로 절 옆에 묻었다가

후삼년後三年 장장계기빈將葬啓其殯 3년 후에 장사지내려고 그 빈소殯所를 여니

안색여생顏色如生 치도경탄緇徒驚歎 얼굴빛이 산 것 같아서 중들이 놀라 탄식하여

함이위불咸以爲佛 모두 “부처이요.” 하고

 

경의이교다비竟依異敎茶毗 승가소장지명僧家燒葬之名

취기골작부도取其骨作浮圖 소탑명小塔名

 

끝내 그 敎의 다비茶毘(중들은 화장하는 것을 다비라 한다)의 예식대로 하여

그 뼈를 모아 부도浮圖(작은 탑 이름)를 만들었다.

 

생시生時 수화로소이상手畫老少二像 살았을 때에 손수 늙고 젊은 두 화상을 그리고

차자찬且自贊 류우사留于寺 찬지란왈贊之亂曰 또 스스로 贊을 지어서 절에 두었는데 찬의 난亂에 말하기를

이형지묘爾形至眇 이언대동爾言大侗 “너의 형상이 지극히 작고 너의 말은 크게 지각없으니

의이치지구학지중宜爾置之丘壑之中 마땅히 언덕과 구렁에 두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소저시문산실所著詩文散失 십불능존일十不能存一 저술한 詩文은 흩어져 없어지고 열에 하나도 있지 아니한데

리자李耔 박상朴祥 윤춘년尹春年 이자李耔·박 상朴祥·윤춘년尹春年 등이

선후부집先後裒集 인행우세운印行于世云 先後하여 모아서 인쇄해 세상에 행하게 되었다.

 

신臣 근안謹按 인체천지지새人體天地之塞

이청탁후박지부제以淸濁厚薄之不齊 유생지학지지별有生知學知之別

 

臣이 삼가 생각한즉 사람은 하늘과 땅의 충만한 것을 받아서 몸으로 하였으나

청탁淸濁과 후박厚薄이 고르지 못하므로 생지生知와 학지學知의 구별이 있다 하겠는데

 

차이의리언야此以義理言也 그것은 의리義理를 말하는 것이고

약여시습자若如時習者 어문천득於文天得 김시습 같은 이는 文에 있어 천부天賦로 얻었은즉

즉문자역유생지의則文字亦有生知矣 文字에도 또한 生知가 있는 것입니다.

 

양광피세佯狂避世 미의가상微意可尙 거짓 미쳐서 세상을 피하였으니 속마음은 가상하나

이필포기명교而必拋棄名敎 반드시 名敎를 버리고 방탕해서

탕연자자자蕩然自恣者 스스로 방자하게 군것은 무엇입니까?

 

하여何歟 수장광닉영雖藏光匿影 비록 빛을 감추고 그림자를 감추었다 하더라도

사후세부지유김시습使後世不知有金時習 후세에 김시습이 있었던 것을 알지 못하게 하려 하였으니

억하민언抑何悶焉 또한 어찌 민망하지 않겠습니까?

 

상견기인想見其人 재일기외才溢器外 불능자지不能自持

무내수기풍어경청無乃受氣豐於輕淸 색어후중자여嗇於厚重者歟

 

생각해 보면 그 사람의 재주가 그릇 밖에 넘쳐서 능히 스스로 잡지 못했으니

그 氣받은 것이 경청輕淸한 것에는 풍성하고 후중厚重한데에는 인색하였던 것이 아닌지요?

 

수연雖然 표절의標節義 부륜기扶倫紀 구기지究其志

가여일월쟁광可與日月爭光 문기풍聞其風 나부역립懦夫亦立

즉수위지백세지사則雖謂之百世之師 역근지의亦近之矣

 

비록 그러하나 절의節義를 표방標膀하고 윤기倫紀를 붙들었으니 그 뜻을 궁구해 보면

가히 日月과 빛을 다툴 것이며 그 풍성風聲을 들으면 나약한 사람이라도 또한 立志가 있겠은즉

비록 百代의 스승이라 하여도 또한 근사할 것입니다.

 

석호惜乎 아깝습니다.

이시습영예지자以時習英銳之資 김 시습의 영특하고 예민한 자질資質로

롱마이학문천리지공礱磨以學問踐履之功 학문과 실천하는 공부를 닦고 같았으면

즉기소성취則其所成就 기가량호豈可量乎 그 성취된 바가 어찌 측량할 수 있었겠습니까?

 

희噫 아아!

위언준의危言峻議 위태한 말씀과 준엄한 언론으로

범기촉휘犯忌觸諱 꺼리는 것을 범하고 숨기는 것을 저촉하면서

가공리경訶公詈卿 략무고자略無顧藉 공公을 꾸짖고 경卿을 욕하여 조금도 돌아보고 덮어 두는 것이 없었건만

 

이당시불문유거기비자而當時不聞有擧其非者 당시에도 그 잘못을 擧論하는 자 있음을 듣지 못했으니

아我 선왕지성덕先王之盛德 석보지굉량碩輔之宏量 우리 先王의 성하신 덕과 큰 신하들의 큰 도량은

 

기시계세사사언손자其視季世使士言遜者 대실하여야待失何如耶

그 季世(末世)의 선비[士]로 말을 공손히 하게 하는 자와 비하여 얻고 잃는 것이 어떠하올지!

 

오호위재嗚呼韙哉 아아! 장하시었읍니다.

만력십년칠월십오일萬曆十年七月十五日 만력萬曆 10년 7월 15일

 

자헌대부資憲大夫 리조판서겸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吏曹判書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

지경연성균관사知經筵成均館事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

신리이臣李珥 봉교제진奉敎製進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겸吏曹判書兼 홍문관弘文館 대제학大提學 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

지경연知經筵 성균관사成均館事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官

신臣 이이李珥 교지敎旨를 받들어 올리다.

 

 


김시습의 자는 열경이니 강릉江陵 사람이다. 
신라 알지왕閼智王의 후손으로 왕자 김주원金周元이라는 이가 

강릉의 고을을 받았으므로 인하여 적관籍貫으로 하였다. 

 

그 후에 김연金淵이라는 이와 김태현金台鉉이라는 이가 있어 다 고려의 시중侍中이 되었고 

김태현의 후손으로 김구주金九桂라고 하는 이가 안주목사安州牧使가 되어

김겸간金謙侃을 낳았는데 오위부장五衛部將에 그치었으며 

김겸간이 김일성金日省을 낳아서 음직蔭職으로 충순위忠順衛에 보직되었다. 

►部將 조선시대 오위五衛나 포도청 등에 속해 있던 무관직
오위의 부장은 정원이 25인으로 여절勵節·병절교위秉節校尉 등으로 별칭 되었다.

조선 전기의 오위는 1위가 5부로 편제되었는데 5위는 25부가 되므로 
이 부의 지휘, 감독의 책임을 지는 부장의 수도 부의 수와 마찬가지로 25인이었던 것이다. 

오위의 군사조직이 위-부-통統-여旅-대隊-오伍-졸卒로 이루어진 것을 감안하면 
부장은 부의 장으로서 통을 영솔하는 오위 군사조직상의 핵심을 이루었다.

이들 부장은 각기 자기의 소속부의 병종을 이끌고 입직·행순·시위 등의 책임을 졌으며
전투훈련 등에도 각 부의 병종을 지휘, 감독하였다.

그러나 후기에 오위의 기능이 유명무실하게 됨으로써 
부장은 금군청禁軍廳인 내삼청內三廳에 소속되어 위장衛)과 함께 입직과 행순을 담당하였다. 

또한 그 격도 떨어져 25인 가운데 7품 이하의 참외관參外官이 14인, 
부조父祖의 공에 의해 임관된 남행참외南行參外 1인을 임명하였다.

특히 참외관으로서 8품의 녹을 받는 자는 임기 600일이 차야 6품관으로 승진시켰으며
참외관 임명자 중 한 자리는 도목정都目政 때마다

금군 가운데서 취재시取才試에 추천된 자를 후보자로 임명하였다. 
뒤에는 더욱 격이 떨어졌는데 참외관 11인과 남행참외 1인은 종9품으로 

임기 720일이 만료되어야 6품으로 승진시켰다.

그리고 이들 부장 가운데 2인은 오위 위장소를 주관하던 조사위장曹司衛將에 속해 
기병騎兵의 분배거행分排擧行을 했는데 이를 분군부장分軍部將이라 하였다. 
또한 가장 으뜸 되는 행수부장行首部長과 남행부장 등 2인은 입직·순경에 참여하지 않았다.

대신 의장고儀仗庫로 보내어 이를 전관專管 거행하도록 했는데 이를 의장고낭청儀仗庫郎廳이라 하였다. 
특히 남행부장은 의장도식儀仗圖式으로 시험을 본 뒤 근무성적에 반영하였다.

이러한 부장제도는 <속대전>에 법제화된 이후 좌·우 포도청에도 

각각 부장 4인, 무료부장無料部將 26인, 가설부장加設部將 12인 등이 있었다. 
이들은 도성문 밖의 금군을 지휘하고 기찰譏察하는 책임을 졌다.

이 밖에도 서울의 8개 도성문, 목멱산木覓山의 봉수 및 오간수문五間水門 등을 

지키는 금군 등도 일반적으로 부장이라고 하였다.

►충순위忠順衛
조선시대 중앙군으로서 오위五衛의 충무위忠武衛에 소속되었던 병종兵種.

1445년(세종 27) 3품 이상 고위 관리들의 자손을 위해 처음 설치되었다. 
이는 그들에 대한 우대로서 600인을 시취試取해 윤번輪番 입직시키고 
일정한 복무를 마치면 다른 관직에 거관去官되어 관료로서의 진출로를 열어 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의 충순위는 1459년(세조 5) 혁파되었다. 
그 뒤 양반 자제가 일반 양인과 함께 정병正兵에 소속되어 잡역에 동원되는 사례의 부당성이 논의되었다. 

그 결과 1469년(예종 1) 여정위勵精衛가 설치되었는데 東班 6품 이상, 

西班 4품 이상, 문무과출신·생원·진사·유음자손有蔭子孫 등이 소속되었다.

여정위는 곧 충순위로 개칭되어 <경국대전>에 오르게 되었다. 
<경국대전>의 규정에 의하면 異姓의 왕족·왕비족 가운데 遠親을 비롯해 實職으로서 

顯官을 거친 사람 등이 충순위에 입속되었다. 
정원은 없고 7교대에 의해 2개월씩 근무하였고 체아遞兒는 없고 

근무일수를 채우면 종5품 영직影職에 거관하도록 되어 있다.

정병은 대체로 일반 양인 계층이 군역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입속하는 병종이었다. 
이에 비해 충순위 고위 신분층에 있는 자로 충의위忠義衛나 

충찬위忠贊衛에 소속될 자격이 없는 자가 이에 속해 군역 의무를 수행했다는 것이 주목되는 점이다.

충순위에 속하도록 되어 있는 동반 6품, 서반 4품 이상의 현질顯秩에 있던 자, 문무과 출신, 

생원·진사 출신자 이외에 양반 계층의 말단에 속하는 자도 정병에 입속되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충순위에는 급보給保의 혜택이 없어 정병에 소속되는 것을 더 좋아하는 사례도 있었다. 
이를 감안하면 정병이 일반 양인의 상층부와 양반층의 말단이 소속되어 군역 의무를 수행한 것에 대해 

충순위는 양반 계층이 군역 의무를 수행했음을 알 수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일성이 선사仙搓 장씨張氏에게 장가들어 선덕宣德 10년(1435년 세종17년)에 

김시습金時習을 서울에서 낳으니 나면서부터 특이한 체질을 가진 그는 세상에 나온 지 여덟 달에 

스스로 능히 글자를 알므로 최치운崔致雲이 보고 기이하게 여겨 이름을 ‘시습時習'이라고 지었다. 

말은 더디면서 정신은 놀라워서 글에 임하여 입으로 읽지는 못하여도 뜻인즉 다 알았고 3살에 능히 시를 짓고 5살에

<中庸>ㆍ<大學>을 통달했으므로 사람들이 神童이라고 불렀으며 이름난 재상 허조許稠 같은 이들이 많이 찾았다. 

장헌대왕莊憲大王(세종)께서 들으시고 

승정원承政院에 불러들여 시로 시험하니 과연 민첩하고 잘 하는지라 下敎하여 말하기를 
“내가 친히 보고 싶지만 시속 사람들이 듣고서 놀랄까 염려되니 

마땅히 그 집에 권하여 재지를 감추어 가르치고 기르게 하라. 
그 학문이 성취되기를 기다려 장차 크게 쓰겠다.” 
하고 비단을 주어 집으로 돌아가게 하니 이에 명성이 온 나라에 떨쳤고 

칭稱하기를 ‘五歲’라 하고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였다. 

김시습이 이미 임금의 장려하심을 받았으므로 더욱 큰 학문에 힘쓰더니 

경태연간景泰年間(1453-1455)에 영릉英陵(세종)과 현릉顯陵(문종)이 서로 잇달아 훙薨하시고 

노산魯山(단종)이 3년 만에 왕위王位을 양위하시니 

그때에 김 시습은 나이 21세로 바야흐로 三角山 중에서 글을 읽고 있었다.

 
이때에 서울에서 오는 자가 있어서 김 시습이 즉시 문을 닫고 나오지 아니하기 사흘이나 하더니 

이에 크게 울고 그 서적을 다 불사르며 발광하여 뒷간에 빠졌다가 도망가서 

치문緇門(佛家)에 종적을 의탁하였는데 그 僧名은 설잠雪岑이나 그 호는 여러 번 변경하여 

청한자淸塞子·동봉東峯·벽산청은碧山淸隱ㆍ췌세옹贅世翁·매월당梅月堂이라 하였다. 

그 사람됨이 모양이 못나고 키는 작으나 호기롭고 준수하며 영특하고 뛰어났었다. 
간략하고 탄솔하여 위엄 있는 거동은 없으나 

굳세고 곧아 사람의 과실을 용납하지 못하며 시대를 슬퍼하고 세속을 분하게 여기었다. 

기氣가 서려 불평이 많아서 스스로의 생각에도 세상을 따라 높낮임을 하지 못할 줄 알고 
몸을 버리어 세상 밖에 놀아서 국내의 산천에는 발길이 거의 편답하였는데 좋은 곳에서는 살기도 하였다. 
옛 도읍 땅[故都]을 올라 보고서는 반드시 머뭇거리며 슬피 노래하기를 여러 날이 되어도 마지아니하였다. 

총명하고 깨닫는 것이 남보다 뛰어나서 그 四書·六經은 어릴 때에 스승에게 배웠다 하더라도

 諸子百家 같은 것은 가르치고 배우는 것을 기다리지 아니하고서도 섭렵涉獵하지 아니함이 없어 한 번 기억하면 

끝내 잊지 아니한 까닭에 平日에는 한 번도 글을 읽지 아니하고 또한 책상자[書笈]를 가지고 다니지도 아니하나 

고금의 서적을 관통하여 빠침이 없으므로 사람이 들어 묻는 것이 있으면 응구첨대應口輒對하여 의심이 없었지만 

기상이 활달하고 비분강개한 가슴속을 스스로 풀어 헤치지는 못하였다. 

무릇 世間의 風月·雲雨·山林·泉石·宮室ㆍ衣服ㆍ花果·鳥獸와 人事의 是非·得實, 富貴·貧賤, 

사생死生ㆍ疾病, 喜怒ㆍ哀樂과 심지어는 性命·理氣ㆍ음양陰陽ㆍ유현幽顯, 有形·無形에 이르기까지 지적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은 한결같이 문장에 붙여 놓았으므로 그 文辭가 물이 용솟음치듯 바람이 일 듯하고 

산이 감추어지듯 바다가 잠기는 듯하며 神이 부르고 鬼가 화답하는 듯 간간히 보이고 층층이 나와 사람으로 

하여금 시작과 끝을 알지 못하게 하였다. 

성률聲律과 격조格調에 있어서는 심히 생각하지 않았으나 그 기경奇警한 것은 생각과 운치가 높고 멀어서 

보통 사람의 생각보다 멀리 뛰어나니 조전彫篆하는 자가 가히 발돋음하고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道와 理에는 비록 보아 찾고 붙들어 두어서 함양한 공은 적지만 재주와 지혜가 탁월하므로 이해하는 바가 있어 

횡적으로 말하고 종적으로 지껄여도 많이 儒敎의 큰 뜻을 잃지 아니하였다. 

►조전彫篆 조충전각彫蟲篆刻의 준말. 

벌레를 새기고 전자를 새김과 같이 문장을 짓는 데 너무 글귀만을 수식하는 일.


禪·道 두 敎에 이르러서도 역시 大意를 보아서 그 병 되는 근원을 깊이 연구하였다. 
禪語를 좋아하여 현미玄微한 것을 밝혀냄에 영탈穎脫하여 막히고 걸리는 것이 없었으며 비록 늙은 중, 

이름난 중으로 그 학문에 깊은 자라 하더라도 감히 그 말에 대항하지 못하였으니 

그 천품이 뛰어난 것을 그것으로도 증명할 수 있었다. 

영탈穎脫 송곳 끝. 

주머니 속에 든 송곳 끝이 빠져 나왔다는 뜻으로 才智가 뛰어나고 훌륭하여 두드러진 것을 일컫는 말. 
<史記 平原君傳>에 “사수득처낭중내영탈이출使遂得處囊中乃穎脫而出 비특미견이이非特未見而已”라 하였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명성은 일찍부터 컸지만 하루아침에 세상을 도피하였고 
마음은 유교이면서 행적은 불교이라서 시대에 괴상하게 보일 것이다.” 하여 
이에 고의로 미친 짓을 함으로써 사실을 엄폐하려 하였다. 

선비 중에 와 배우려는 자가 있으면 나무나 돌로 치려하였고 
혹은 활을 당겨 쏘려 하여 그 성의를 시험했던 까닭에 문하에 있는 자가 드물었고 
또 山田 개간하기를 좋아하여 비록 비단 옷 입는 집의 아이라도 반드시 
김매고 거두는 데 역사시켜 매우 괴롭게 하였으므로 끝내 학업을 전해 받은 자가 더욱 적었다. 

산에 가면 나무를 벗겨 희게 하고 시를 쓰고서는 외고 읊기를 한참 하다가 곧 통곡하고는 깎아 버렸고 
혹은 종이에 썼어도 또한 사람에게 보이지 아니하고 많이는 물이나 불에 던져 버렸으며 
혹은 나무로 조각해서 농사군의 갈고 김매는 형상을 만들어 책상 옆에 벌여놓고 종일 익히 보다가 

역시 통곡하고 태워 버렸다. 

때로는 심은 곡식이 매우 성해서 이삭 진 것이 볼만한데도 술에 취해서 
낫을 휘둘러 잠깐 동안에 다 쓰러뜨려 땅에 버리고 인해서 목을 놓아 통곡하였다. 
행동거지가 측량할 수 없어서 시속 사람들의 크게 비웃는 바 되었다. 

산에 살면서 오는 손을 보고서 서울 소식을 물어 
“사람들이 욕하고 나무라는 자가 있다.”고 들으면 반드시 얼굴에 기뻐하는 빛이 있었고
만일 “거짓 미쳐서 속에는 딴마음이 있어 그런다.”고 하는 말을 들으면 눈썹을 찡그리고 기뻐하지 아니하였다. 

제목除目(官吏任免의 보고서)에 높은 벼슬한 자가 혹시 人望 아닌 자임을 보면 반드시 통곡하며 말하기를 
“이 백성이 무는 죄가 있어서 이 사람에게 이런 임무를 맡겼는가?”고 하였다. 

그때에 이름난 대관인 김수온金守溫이나 서거정徐居正 같은 이는 國士라고 칭찬하였다. 
서거정徐居正이 바야흐로 조회에 들어가는데 “사람은 물러가라.”고 하는 때에 

김시습이 누더기를 입고 새끼로 띠를 매고 
패랭이[蔽陽子 천한 사람이 쓰는 흰 대[白竹]으로 만든 것인데 세상에서 패랭이라 한다]를 쓰고 

시가에서 만나 앞의 인도하는 자를 헤치고 들어가며 머리를 쳐들고 

“강중剛中(서거정의 자)은 평안한가?” 하니 서거정이 웃으며 대답하고 초헌貂軒을 세워 한참 말하므로 

온 저자 사람들이 모두 놀란 눈으로 서로 쳐다보았다. 

조사朝士로서 업신여김을 당한 자가 있어 견디지 못하여 서거정을 보고서 말하되 
“그 죄를 다스리자.”고 하니 

서거정이 머리를 흔들며 
“말라. 말라! 미친 사람과 무엇을 따진다는 거요? 
이제 이 사람을 형벌한다면 백년 뒤까지 그대의 이름에 누累가 될 것일세.”라고 하였다. 

김 수온이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가 되어 
‘孟子가 양혜왕梁惠王을 보았다.’는 글귀로 太學의 여러 선비를 논시論試하였는데 

上舍生 하나가 김시습을 삼각산으로 찾아가 보고 말하기를 
“괴애乖崖맹자가 양혜왕을 보았다는 것이 어찌 논문 제목[論題]에 합당합니까?” 하니
(수온의 別號))는 심한 것을 좋아합니다. 

김시습이 웃으며 “그 늙은이가 아니면 그런 제목을 내지 않을 것이다.” 하고, 
곧 붓을 들어 한 편篇을 써서 주며 “生員이 자작한 것처럼 하여 그 늙은이를 속여 보라.”하였다.

상사생이 그 말과 같이 하였더니 김수온이 끝까지 읽지도 아니하고 갑자기 묻기를 
“열경이 京山의 어느 절에 있는가?” 하니 상사생이 숨기지 못하였다. 
그 알아주는 것이 그와 같았다. 

그 論의 대략은 '양혜왕은 참람하게 왕이라 한 자이어서 
맹자가 보지 않아야 마땅하였다고 한 것이나 지금은 없어져서 수록收錄하지 못한다. 

김수온이 죽은 뒤 사람들 중에 “앉아 죽었다.”고 말한 자가 있으므로 김 시습이 말하기를 
“괴애乘崖는 욕심이 많은 자인데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가령 그런 일이 있다 하여도 앉아 죽는 것은 예절이 아니다. 
나는 단지 曾子가 댓자리[역책易簀]를 바꾸었다는 것과 子路가 갓끈을 매었다는 것을 들었을 뿐 

그 외의 다른 것은 알지 못한다.” 하였으니  대개 김수온이 불교를 좋아한 까닭으로 그렇게 말했다. 

►역책易簀 댓자리를 말함. 

증자曾子가 임종 때에 깔고 있던 댓자리가 당시 노魯나라의 집권자인 계손씨孫氏가 보내 준 것으로 

大夫가 쓰는 자리이어서 자기 신분에 지나치다 하여 바꾸게 하여 죽었다는 고사.

►자로子路가 전투에서 중상重傷을 입고 죽게 되어서 갓을 다시 바로 쓰고 죽었다는 고사. 
<좌전左傳> 애공哀公 15년에 “자로왈子路曰 군자사君子死 관불면冠不免 결영이사結纓而死”라 하였다.

성화成化 17년(1481년 성종12년) 김시습의 나이 47세 때에 홀연히 머리를 기르고 

글을 지어서 조부와 아버지에게 제사지냈는데 그 제문의 대략은 
“순舜임금이 五敎를 베푸셨는데 
부모 있다는 것이 앞에 있고, 죄 되는 것 3천 가지를 나열하셨는데 불효가 큰 것이었습니다. 
대체로 하늘과 땅 안에 살면서 누가 양육하신 은혜를 저버리겠습니까? 
어리석고 못난 小子가 본집, 작은 집을 이어 받들어야 할 것이온데 
이단異端에 침혹沈惑되었다가 말로末路에 겨우 뉘우쳐 이에 예전禮典을 상고하고 
성경聖經을 찾아보아 조상에 따르는 큰 의식을 강정講定했습니다. 

청빈淸貧한 생활을 참작해서 간략하면서도 깨끗한 것을 힘썼고 많이 차리는 것을 정성으로 바꾸었습니다. 
한漢 무제武帝는 70살에야 전승상田丞相의 말을 깨달았고 
원덕공元德公은 1백살에야 허노재許魯齋의 풍도風度에 화했다 하옵니다.”고 하였다. 

►오교五敎 
계백성불친契百姓不親 오품불손五品不遜
설契아! 백성들이 서로 화친하지 않으며 五品을 따르지 않는다. 

여작사도汝作司徒 경부오교敬敷五敎 재관在寬
그대를 사도로 삼으니 五敎를 삼가서 펴되 너그러이 하라/ <서경書經 순전舜典> 

►허노재許魯齋 원元나라 때의 거유巨儒 허형許衡(1209-1281). 자는 중평仲平, 호는 노재魯齋. 
주자학자朱子學者로서 오징吳澄과 함께 원대元代 2大家로 꼽힌다. 

안씨安氏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내로 삼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벼슬하라고 권하였으나 
김 시습은 끝내 뜻을 굽히지 아니하고 방랑하는 것이 예전과 같았다. 

달밤을 만나면 이소경離騷經을 기뻐 외었고 다 외면 반드시 통곡하였다. 
혹은 송사하는 재판정에 들어가 잘못된 것을 가지고 옳은 것이라고 주장하여 궤변으로 반드시 이기고는 

일이 결정되면 크게 웃고 찢어 버리곤 하였다. 

흔히 시정의 까부는 애들과 놀다가 거리 위에 취해 쓰러지는데
하루는 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이 거리를 지나가는 것을 보고는 크게 불러 말하기를
“네놈은 그만 쉬어라.” 하였는데 정 창손은 듣지 못한 것같이 하였다. 

사람들이 그런 것으로 위태하게 여겨 알던 자도 절교하였는데 

오직 宗室의 수천부정秀川副正 정은貞恩과 

남효온南孝溫·안응세安應世·홍유손洪裕孫 등 몇 사람이 끝내 변하지 아니하였다. 

남효온이 김시습에게 묻기를 “나의 보는 바가 어떠하오?” 하니 
김시습이 대답하기를 "“창에 구멍을 뚫고 하늘을 엿보는 것이오." 하였다.
[보는 바가 작다고 하는 말] 

“동봉東峯의 보는 바는 어떠하오?” 하니 
“나는 너른 마당에서 하늘을 쳐다보는 것이지.”라고 하였다. 
[보는 것은 높으면서 행하는 것은 따르지 못한다]

얼마 안 되어 아내가 죽으니 다시 산으로 돌아가 

두타형상[頭陀形 중이 머리를 잘라 눈썹에 내려오는 것을 頭陀라 함]을 하였다. 

강릉江陵과 양양襄陽 지경에 노는 것을 좋아하여 많이는 설악산·한계산寒溪山ㆍ청평산淸平山 등지에 있었는데 
유자한柳自漢이 양양襄陽의 수령이 되어 예절로 대접하고 “가업家業을 회복하고 세상에 행세하라.”고 권했더니 

김시습이 편지로 사례했는데 말하기를 
“장차 긴 꼬챙이를 만들어 그것으로 복령伏塔과 삽주[朮]를 캐어다가 일만 나무에 서리가 엉키면 
중유仲由의 온포縕袍(수삼 옷)를 수선하고 千山에 눈이 쌓이면 왕공王恭의 학창의鶴氅衣를 정돈하겠읍니다.
낙오落伍되어 세상에 사는 것과 마음대로 오락가락하며 일생을 보내는 것과 어느 것이 나을는지? 
천년 뒤에 나의 본뜻을 알아주기 바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중유仲由 자로子路의 성명姓名. 
자왈子曰 공자가 말했다.
의폐온포衣敝縕袍 헤어진 솜옷을 입고서도
여의호학자립與衣狐貉者立 여우나 담비 가죽옷을 입은 사람과 같이 서 있어도
이불치자而不恥者 기유야여其由也與 부끄러워하지 않을 사람은 아마 由일 것이다/<論語 자한편子罕篇>

►왕공王恭 동진東晉 때의 사람. 그는 풍채가 잘나기로 유명하다. 
상피학창구嘗被鶴氅裘 섭설이행涉雪而行 (그가 겨울에) 鶴氅裘를 입고 눈을 밟고 간 적이 있는데 
맹창규견왈孟昶窺見曰 맹창孟昶이 보고 말하였다.
차진신선중인야此眞神仙中人也 “이는 참으로 神仙界의 사람이다.”/<진서晉書 왕공전王恭傳>

홍치弘治 6년(1493 성종24년)에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에서 병들어 누웠다가 끝마치니 나이 59세였다. 
유언으로 화장하지 말라 하여 임시로 절 옆에 묻었다가 3년 후에 장사지내려고 그 빈소殯所를 여니 

얼굴빛이 산 것 같아서 중들이 놀라 탄식하여 모두 “부처이요.” 하고 

끝내 그 敎의 다비茶毘(중들은 화장하는 것을 다비라 한다)의 예식대로 하여 

그 뼈를 모아 부도浮圖(작은 탑 이름)를 만들었다. 

살았을 때에 손수 늙고 젊은 두 화상을 그리고 또 스스로 찬贊을 지어서 절에 두었는데 찬의 난亂에 말하기를 
“너의 형상이 지극히 작고 너의 말은 크게 지각없으니 마땅히 언덕과 구렁에 두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저술한 詩文은 흩어져 없어지고 열에 하나도 있지 아니한데 

이자李耔·박 상朴祥·윤춘년尹春年 등이 先後하여 모아서 인쇄해 세상에 행하게 되었다.

臣이 삼가 생각한즉 사람은 하늘과 땅의 충만한 것을 받아서 몸으로 하였으나 

청탁淸濁과 후박厚薄이 고르지 못하므로 생지生知와 학지學知의 구별이 있다 하겠는데 

그것은 의리義理를 말하는 것이고 김시습 같은 이는 文에 있어 천부天賦로 얻었은즉 

文字에도 또한 生知가 있는 것입니다. 

거짓 미쳐서 세상을 피하였으니 속마음은 가상하나 

반드시 名敎를 버리고 방탕해서 스스로 방자하게 군것은 무엇입니까? 

 

비록 빛을 감추고 그림자를 감추었다 하더라도 

후세에 김시습이 있었던 것을 알지 못하게 하려 하였으니 또한 어찌 민망하지 않겠습니까? 

 

생각해 보면 그 사람의 재주가 그릇 밖에 넘쳐서 능히 스스로 잡지 못했으니 

그 氣받은 것이 경청輕淸한 것에는 풍성하고 후중厚重한데에는 인색하였던 것이 아닌지요? 

비록 그러하나 절의節義를 표방標膀하고 윤기倫紀를 붙들었으니 그 뜻을 궁구해 보면 

가히 日月과 빛을 다툴 것이며 그 풍성風聲을 들으면 나약한 사람이라도 또한 立志가 있겠은즉 

비록 百代의 스승이라 하여도 또한 근사할 것입니다. 

아깝습니다. 
김 시습의 영특하고 예민한 자질資質로 학문과 실천하는 공부를 닦고 같았으면 

그 성취된 바가 어찌 측량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아! 위태한 말씀과 준엄한 언론으로 꺼리는 것을 범하고 숨기는 것을 저촉하면서 

公을 꾸짖고 경卿을 욕하여 조금도 돌아보고 덮어 두는 것이 없었건만 

당시에도 그 잘못을 擧論하는 자 있음을 듣지 못했으니 우리 先王의 성하신 덕과 큰 신하들의 큰 도량은 

그 季世(末世)의 선비[士]로 말을 공손히 하게 하는 자와 비하여 얻고 잃는 것이 어떠하올지! 

아아! 장하시었읍니다.

만력萬曆 10년 7월 15일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겸吏曹判書兼 
홍문관弘文館 대제학大提學 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 지경연知經筵 
성균관사成均館事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官 

신臣 이이李珥 교지敎旨를 받들어 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