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시대적 배경
공자의 시대적 배경
孔子는 기원전 551년에 태어나 기원전 479년에 죽었다.
시대적으로 말하면 春秋時代(BC770-404) 말기에 해당한다.
공자가 생존했던 춘추시대는 주周나라가 이민족의 공격으로 수도를 호경鎬京(長安, 오늘날의 西安 일대)에서
동쪽의 낙양洛陽으로 천도한 시점부터 진晉나라의 대부大夫인 한韓·위魏·조趙 삼씨가 진나라를 분할하여
제후로 독립할 때까지의 시대를 말한다.
孔子가 저술한 역사서 <春秋>에서 명칭이 유래됐다.
春秋時代에 접어들면서 주왕조의 봉건제도는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했다.
혼란의 시작점은 경제적 혁신이었다.
농사에 소가 쓰이기 시작했고 서양에 비해 수백년이 늦었지만 새롭게 발견된 철이 농기구로 등장했다.
비료를 만들어 쓰기 시작했고 관개 시설이 훨씬 좋아져서 농토에 물을 대기가 쉬워졌다.
전 인구가 농사를 지어야만 먹고 사는 시기를 벗어나 높은 농업 생산성에 의해 농업에 종사하던 일부
인구는 타 업종에 종사하게 되고 농업, 공업, 상업의 분화가 활발하게 일어난다.
이러한 변화는 고도의 경제발전은 사회구조에 변화를 가져와 은殷·주周로 대표되는 씨족 사회가 사라졌다.
부족 수준이던 문명들이 엄청나게 치열한 경쟁에 휘말리며 다른 문명에선 보기 어려운 수준으로 혁신이 일어났다.
한편 사회 경제적 배경을 바탕으로 지방분권적인 봉건제도가 해체되고 결국 주 왕실의 세력이 약해지자
제후들이 분립 항쟁을 되풀이하며 이른바 春秋五霸라고 하는 막강한 권력과 뛰어난 능력을 패자가 등장하였다.
강한 제후국들은 더 많은 토지와 그 토지에서 일할 수 있는 더 많은 인력을 구하기 위해
이웃 제후국을 넘보게 되고 전쟁이 벌어졌다.
땅과 사람을 빼앗기 위한 전쟁은 동시 다발적으로 전 지역에서 일어났다.
이러한 상황은 신분제를 비롯한 기존의 많은 제도를 무너뜨렸고 그 결과 엄청난 혼란이 일어났다.
대부분의 제후들은 부국강병을 위한 온갖 정책을 동원하여
민중으로부터 가혹하게 세금을 거두어들이면서 그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힘이 약한 제후국은 금방 무너졌고 신하들은 틈이 생기면 제후를 쓰러뜨리고 땅을 나누어 갖기도 했다.
혼란이 가중되던 이 시기에는 부국강병과 민생안정을 위해 신분보다 능력 위주로 인재를 등용하여
학문·사상이 발달하게 되었으며 諸子百家라고 하는 사상가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춘추 시대의 엄청난 사회 경제적 변화와 여기서 비롯된 어마어마한 혼란을 보면서
세상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살아간 사람이 공자였다.
비록 제후들이 각자 독립적으로 정치를 하였으나 그 제후국 내에 국정을 관리했던 卿大夫 및 말단 관리와
軍官 계급인 士는 전부 세습했으며 모든 것이 정해진 禮法에 의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던 것이다.
그게 공자 시대에는 이미 파괴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禮法의 구속을 받지 않고 제멋대로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완전히 붕괴된 상태는 아니었다.
비록 그렇기는 하더라도 공자 시대에는 그 禮法을 벗어나는 정도가 그리 심한 편은 아니었다.
무언가 잘 하면 잘 될 것도 같았기 때문이다.
<논어>에 보이는 공자의 한적한 태도는 바로 당시 사회의 분위기를 잘 반영하는 것이다.
맹자 시대의 난폭한 분위기와 비교해 보면 공자 당시는 상당히 평온한 편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이런 이유로 공자는 克己復禮를 외쳤던 것이다.
자신의 탐욕, 개인적인 욕심. 이런 것들을 극복하고 예법禮法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당시 사회가 잘만 되면 질서를 회복할 수 있다고 공자는 믿었음을 의미한다.
물론 자신의 주장대로 잘 되지 않자 공자로서도 넋두리를 한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말들을 듣지 않으니 아예 뗏목이나 타고 저 멀리 바다로나 나갈까 보다.”
이러한 공자의 이상과 그 실현을 위한 노력이 집약되어 있는 책이 바로 <논어>라고 할 수 있다.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 추구한 것은 객관적 도덕규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