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經/비파사나 수행

초기불교에 있어 止觀의 문제

by 空空 2024. 3. 13.

초기불교에 있어 止觀의 문제/조준호 동국대 불교학과

2014-01-21 01:01:47

 

Ⅰ. 서론

 

止(Samatha) 觀(Vipassanā)이 불교 수행의 중심이라고 그 중요성은 감지하면서도

구체적으로 그 내용과 관계가 무엇인지 정확히 밝히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 구체적인 내용은 간과한 채 止와 觀의 관계에 있어

止觀均等이니 止觀雙修니 하는 말을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이제까지 止觀의 의미와 내용

그리고 서로간의 관계를 다룬 대부분의 논문이나 단행본에 잘 나타나 있다.

 

최근의 한 발표에서도 비슷한 사정이 잘 반영되어 있다.

예를 들면 본 논문의 제목과 거의 비슷한 발표의 서론에서

“초기불전에 나오는 지관은 용어만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실제 지관을 닦는 방법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지 않다”

 

라고 시작하여 본론에서 이를 설명하고 다시

“초기불전에서는 지관이 확립된 수행체계로서

구체적인 서술이 나타나지 않는다”라고 결론짓고 있다.

 

이러한 결론을 내리기까지 권위 있는 일본 학자인 中村 元이나 武邑尙邦의 止觀에 관한

초기불교의 논문도 참고하고 나아가 우리나라의 오형근 교수의 저서 또한 검토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이제까지의 선행 연구에 있어 초기불교의 止觀 修行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과 관계가 불분명하게 서술되었거나 생략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그렇지만 본 논문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초기불교 경전은 止觀의 용어와 함께

그 내용과 실천 수행 방법이 매우 구체적이고 조직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Ⅱ. 본론

 

1. 전통적인 이해

 

止觀이라는 용어가 초기불교 경전의 이른 층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그러한 수행법 자체까지 없었다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止를 통한 觀의 내용 자체가 如實知見(yathābhūtañāṇa-dassana)의

불교이기에 止觀이 없이는 불교가 없기 때문이다.

 

초기경전 곳곳에서 止觀이라는 직접적인 용어는 사용하지 않은 채 그 내용이 강조되어 있다.

예를 들면 경의 시작에 있어

 

방편선사方便禪思 “방편을 써서 선사하고

내적기심(已)內寂其心(已) 안으로 그 마음을 고요히 하면

여시실지현현如是實知顯現 있는 그대로 드러남의 지혜가 있다”라든가

 

또는 후반부의 如是實如顯現 대신 如實觀察이 더해져

“‧‧‧‧ 있는 그대로 관찰할 수 있다”의 문구나

 

수무량삼마제修無量三摩提 정근계념이精勤繫念已 즉여실현현則如實顯現

“한량없는 삼매를 닦고 생각을 집중시키면 곧 있는 그대로 드러난다.”

등과 같은 표현을 들 수 있다.

 

앞부분은 禪과 定에 의한 止 그리고 뒤 부분은 觀에 의한 如實知見이 표현되었다.

구체적으로 이후에 설명될 四禪과 四念處로 조직화되었다.

 

즉 止는 四禪을 通稱하는 용어로 觀은 四念處를 通稱하는 평이한 말인 것이다.

따라서 마음을 쉬고 고요히 하여[止] 참된 모습을 보려고[觀] 하는 四禪과

四念處 수행의 總稱으로 止觀이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초기불교의 부파시대 문헌인 俱舍論, 法蘊足論, 衆事分阿毘曇論 등에 의하면

四禪 안에 止․觀 모두가 포함되어 수행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나아가 김동화의 俱舍論연구에 의하면 四禪은 止觀均等으로 四無色定은 止多觀少로

四禪과 四無色定의 모든 단계에서 止․觀이 이루어진다는 매우 구체적인 설명까지 하고 있다.

 

이것은 대승의 唯識派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에 대한 이유 중의 하나는 앞에서 인용한 경문에서처럼 Vipassanā라는

직접적인 말이 생략되어 있기 때문에 Vipassanā를 위한 형식인 선수행과

그 선수행의 내용인 삼매를 바로 如實知見의 직접적인 원인처럼 생각하려는 오해일 수 있다.

 

더 나아가서는 근본적으로 止觀 개념과 함께 선과 삼매 개념

그리고 如實知見에 대한 혼돈으로도 여겨진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서인지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이후 한자 문화권의 止觀이해는

四禪이나 四無色定 속에 포함시켜왔으며 이는 다시 전통적인 이해로 굳혀져 있다.

 

마찬가지로 현재 우리의 止觀 이해도 이 같은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근본적인 의미 즉 초기불교에서는 이 같은 근거는 찾아 볼 수 없다.

반대로 이를 반박할 수 있는 止觀의 문제를 초기불교 경전은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止의 내용을 四禪으로 보는 것은 쉽게 인정할 수 있지만

觀수행까지 四禪 속에 포함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사실 초기불교의 부파들이나 대승불교는 止觀을 말하면서도

止觀이 구체적으로 어떤 수행법이며 止와 觀이 각자 목적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대상이 무엇인지를 초기불교에서처럼 분명히 하고 있지 않는 듯하다.

 

그러므로 초기불교 이후 止․觀 설명에 있어 오히려 구체성은 결여된 채

각기 종파적인 입장에 따라 매우 산만하며 추상적인 설명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2. 止觀의 내용에 대한 경전적 근거

 

초기불교 경전에서 止觀의 내용과 수행방법

그리고 양자 간의 관계는 놀랄 만큼 체계적으로 조직되어 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正定과 正念으로 四禪과 四念處觀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언급과 설명들은 수많은 경전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러한 초기불교의 止觀의 구체적인 내용과 관계가 초기불교 부파나

대승의 부파에 이르기까지 후대로 갈수록 해이하게 쓰이고 있는 듯 하다.

 

불교의 僧院化에 따른 불교의 철학화‧현학화가 빚은 맹점으로 생각된다.

특히 대승경전에 가서는 수많은 종류의 삼매가

마치 최고의 수행법처럼 강조되면서 무성하게 설해져 있다.

 

초기불교에서처럼 삼매가 바탕이 되는 止와 함께 다음의 四念處의 觀이

균형 있게 일관되게 강조되어 있지 않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대승에 가서는 마치 삼매가 불교 수행의 최고의 경지라도 나타내는 용어로 느끼게끔 한다.

 

초기불교 경전에서 止觀의 내용을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는 대표적인 경전은

Mahā-Satipaṭṭhāna Suttānta인데 이 경은 觀(Vipassanā) 수행의 구체적 내용과 방법

그리고 그 대상을 설명하는 것으로 경전 전체가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Satipaṭṭhāna(念處 또는 念住, 念의 확립)는 바로 Vipassanā를 의미하며

Vipassanā의 구체적인 대상은 인간 존재의 모든 것으로서 五蘊을 다시 身受心法으로 나눈 것이다.

 

그 중요성으로 경의 서두에서 ekāyana magga(一乘道)로서 열반에 이르게 하는

유일한 수행법이라고 시작하여 말미에서는 팔정도의 구체적인 내용이 설명된다.

 

여기서 正定(Sammā-samādhi)의 내용은

四禪으로 正念(Sammā-sati)의 내용은 四念處觀으로 분명히 언급된다.

 

팔정도의 正念이 四念處觀을 의미하는 것은

Mahā-Satipaṭṭhāna Suttānta라는 경명과 함께 그 내용에서도 나타난다.

다시 말하면 Satipaṭṭhāna는 ‘sati의 확립(念住)’를 의미하는 말로 바로 팔정도의 正念을 지시한다.

 

그리고 正定은 四禪의 第二禪의 내용으로 cetaso ekodibhāva(마음이 집중된 상태)라는

문구와 이를 뜻하는 용어인 samādhi가 직접적으로 쓰여진 것을 통해서 잘 드러낸다.

 

이렇듯 正念은 四念處觀을, 正定은 四禪을 의미하는 바이었음은

초기불교 경전의 여러 맥락을 통해 의심할 수 없지만 문제는 어떻게

四禪과 四念處觀이 止觀을 의미하는 말인지 설명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四禪과 四念處觀을 설명하는 언어와

그 내용을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3. 止는 곧 四禪

 

四禪과 四念處觀의 내용은 초기불교의 여러 경전에서 반복적으로 설명된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四禪이 止라고 四念處는 觀이라고 언급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인지 초기불교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본 논문이 문제 삼고 있듯이

止觀의 내용이 四禪과 四念處라는 사실이 간과되거나 나아가서는

양자가 次第關係임이 고려되지 않은 채 각각 별개의 수행법으로 설명하려는 경향까지 있어 왔다.

 

이는 四禪 가운데 止觀 모두를 설명하려고 하는 오래된 전통과 함께 四念處

(Cattāro Satipaṭṭhāna)라는 말에 직접적으로 觀(Vipassanā)이라는 말이 결부되어 있지 않는 것에

四念處수행과 觀法수행이 서로 다른 것으로 보려는데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四禪에서 止의 samatha라는 용어를 찾아볼 수 없다고 止와 四禪이 별개라고 한다면

이것은 매우 단순한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다음의 설명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먼저 四禪의 내용에 대한 정형적인 문구부터 살펴보자.

 

初禪(paṭhamajjhāna)

모든 감각적인 욕망(kāma)으로부터 벗어나고(vivicca) 不善法(akusala dhammā)으로부터

벗어났지만 일상적인 사유작용(vitakka와 vicāra)은 계속된다.

하지만 감각적인 욕망이 벗어난 것(viveka)으로 희열감(pīti)과

행복감(sukha)이 일어나는 제1선을 성취하여 거기에 머문다.

 

第二禪(dutiyajjhāna)

일상적인 사유작용이 차츰 가라앉고(vūpasa mā) 맑고 안정된 마음의 상태(sampasādana)와 마음이

집중된 상태(cetaso ekodibhāva)가 이루어지면서 일상적인 사유작용이 단절(avitakka avicāra)된다.

마음이 집중된 상태 즉 三昧(samādhi)에서

오는 희열감과 행복감이 있는 제2선을 성취하여 거기에 머문다.

 

第三禪(tatiyajjhāna)

희열감이 사라지는 것으로(pītiyā ca virāgā) 평정한 마음(upekhako)에

머물러 念(sato)과 正知(sampajāno)가 갖추어지는 것에 머문다.

그러면서 온 몸으로 행복감을 느끼면서 성인들이 말하는 ‘평정한 마음(upekhako)과

念(satimā)이 갖추어지는 행복스러운 머뭄’이라고 하는 제3선을 성취하여 머문다.

 

第四禪(catutthajjhāna)

행복감이 없어지고(pahānā) 괴로움도 없어지고(pahāna) 이전에 있었던 기쁨과

슬픔도 제거되고(atthagama) 괴로움도 그치고(adukkha) 행복감도 그친다.(asukha)

그러므로서‘(완전한) 평정심(upekhā)으로 인해 念(sati)이

완성된(parisuddhi 맑고 깨끗해진)’ 제4선을 성취하여 머문다.

 

이상과 같은 四禪의 내용은 止를 뜻하고 觀을 뜻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四禪의 내용에 있어 初禪부터 第四禪까지의 모든

내용이 의식상의 단계적인 그침[止]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禪을 실천하기 전의 감각적 욕망과 좋지 않은

身․口․意의 행위(활동)의 그침[止]이 바로 初禪의 내용이며

 

初禪에서 작용하였던 vitakka와 vicāra로 표현되는 일상적인 사유작용

또는 내용의 그침[止]이 바로 第二禪의 내용이 되며

 

다시 初禪에서 第二禪까지 계속되어온 희열감과 행복감 가운데

희열감의 그침[止]이 바로 第三禪의 내용이 되며

 

마지막으로 第四禪은 初禪에서 第三禪까지 계속되어 온 행복감마저

그리고 더 나아가 괴로움․기쁨․슬픔 모두가 그치는[止] 상태임을 잘 보여준다.

 

이렇듯 四禪의 내용을 설명하는 데 있어

‘벗어나고’(vivicca) ‘벗어난’(viveka) ‘가라앉고’(vūpasanā)

그리고 vitakka와 vicāra에 대한 부정 접두사 a-로서 ‘~이 없어진 또는 제거된’ 것과

‘사라져(virāga)’와 같은 말은 모두 止(samatha)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四禪의 次第는 보다 더 발전적인 수행을 위해 그것이 기쁨이 되었든

행복감이 되었든 간에 모두 단계적으로 멈춰지는 상태를 설명하고 있다.

 

그것이 뒤에 기술될 觀의 예비 조건을 만들기 위한 것으로

이제까지의 주관적인 감정 상태가 차례로 모두 멈춰진[止] 것을 말한다.

이렇게 四禪의 전체적인 모습은 止라는 평이한 용어로 불렸던 것으로 알 수 있다.

 

이에 반해 四禪만의 단계적인 내용에 있어 그 어떠한 것도 觀

즉 Vipassanā의 의미가 들어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俱舍論을 위시한 초기불교의 부파문헌이나

대승에서 四禪을 止와 함께 觀까지 관련시켜 설명하는 것은 재고가 필요하다.

 

특히 第三禪부터를 止觀均等으로 보려는 데는 적절한 근거를 찾을 수도 설명할 수도 없다.

第三禪에서는 念이 발현되었지만 아직도 행복감이 남아 있어 완전한 念의 상태가 아니다.

행복감이라는 주관적인 느낌마저도 개입되지 않은 상태가 되어야 한다.

 

이에 반해 第四禪은 행복감을 포함한 모든 주관적인 느낌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念이 완전해진 단계이다.

이 때에 이르러서만이 다음의 四念處 수행으로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단계는 ‘마음의 집중’을 의미하는 samādhi가 완전해져 바른 선정[正定]이라 했으며

다음의 正念의 四念處 즉 觀으로 연결된다.

 

나아가 止라는 말이나 ‘마음집중’을 의미하는 samādhi의 기본적인 語義에 있어서도

원래 觀이라는 의미가 전혀 들어있지 않음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에 있어 四念處를 四念處禪이라는 말은 엄밀한 의미에서 옳지 않다.

차라리 四念處觀이라는 말이 적절하다.

 

1) 四無色의 문제

 

四無色(定)의 방법은 일종은 觀想法이다.

作意的으로 觀의 대상인 想(saññā)을 만들어 머물다가 다음 단계나 대상으로 옮겨가는 수행법이다.

이 같은 내용은 경에 잘 나타나 있다.

 

四禪을 色界로 연계시키는 것과 함께 四無色定을 無色界로 연계시키는 것은

초기경전에 뚜렷한 근거도 없는 듯 하며 불필요하다.

 

그것은 실재하는 존재의 한 세계나 영역으로 생각하게끔 하거나

또는 수행의 경지를 신화적인 세계와 관련시켜 신비화하는 것을 초래한다.

 

더 큰 문제는 이와 같은 연계가 四無色과 四禪의 관계를

더욱 난해하고 추상적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즉 四禪 위에 四無色을 배치시킴으로써 四禪과 四念處와 次第關係를 흐리게 하고 있다.

이러한 배대는 후대에 첨가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Ālāla Kālāma나 Uddaka Rāmaputta에게 붓다가 되기 전에 수행하다 버렸던 四無色定이

뒤에 끼어 든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하기 힘들지만 초기 논장이 성립될 때까지도

붓다의 순수한 가르침의 한 부분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四禪의 第四禪에서 Vipassanā를 위해 발현‧완성된 念(sati)이

四無色定에 이용되도록 하여 sati의 본래 성격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말았다.

 

원래 四禪의 第四禪에서 완성된 念[sati]은 마음을 일으켜

특정한 대상을 그려내어 觀想하는 것을 위해 준비된 것이 아니다.

 

더 궁극적인 것은 sati-paṭṭhāna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念을 확립하여 如實한 것을 觀하는데 있다.

이러한 Satipaṭṭhāna는 다름 아닌 Vipassanā의 바탕이 된다.

 

물론 초기불교에서 四禪이 四念住만이 아닌 四無色을 위한

준비 단계로도 이용되어 왔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그렇지만 四無色 등은 作意(ceta, abhisañcetayīta)나

有爲(saṅkhata, abhisaṅkhara)적인 것으로 궁극적으로 버려야 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결론적으로 초기불교 문헌에 따르면 四禪은 四無色과 四念處와 같은

두 行法을 위한 예비 단계와 관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四禪의 내용으로 볼 때 四禪은 四無色(定)보다는

四念處와 직접적인 관계에 더 큰 비중이 놓여 있다.

 

四無色은 四禪과 四念處 사이에 부수적으로 끼어 있는 觀想法으로

후에 八禪定이나 九次第定과 같이 samādhi의 범주로 넣었지만

nava anupubbavihārasamāpatti라는 원어를 통해볼 때

samādhi라는 말은 없고 samāpatti 즉 성취라는 의미가 전부이다.

 

따라서 초기불교 경전에서 samādhi 범주에 四禪만이 있고

四無色(定)은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은 여러 경전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四無色은 四禪과 四念住의 수행 속에 나타나는 단조로움을 해소하고

힘을 북돋아주는 방편적인 지위의 수행이 아닌가 생각된다.

 

四禪의 第二禪부터는 일상적인 사유작용이 끊기고

삼매가 이루어진 상태이므로 의식이 능동적으로 활동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第四禪에 이르지 않더라도 四無色과 같은 觀想수행을 하면

평상시보다 훨씬 깊이 관상의 내용이 우리의 마음속 깊이 刻印되는 효과가 있다.

 

즉 우리의 의식상에 있어 높은 수준의 수용적인 마음상태가 이루어져

관상의 내용 그 자체가 인격변화에 큰 영향을 미친다.

 

사실 慈悲喜捨와 같은 四無量心도 일종의 관상법 수행의 범주에 속하며 엄격한 의미에서

또는 근본적인 의미에서 초기불교의 삼매나 Vipassanā 개념에 속한다고 볼 수 없다.

 

따라서 四無色이나 四無量心은 四禪 가운데나 또는 四禪 전후의 Vipassanā 수행을 위한 방편적이며

보조적인 수행으로 볼 수 있지 진정한 의미의 Vipassanā 수행 방법으로는 간주할 수 없다.

 

그것은 뒤에 설명하겠지만 진정한 Vipassanā는 마음을 일으켜 만들어낸 대상을 觀하는 것이 아니다

철저하게 마음이 쉬었을 때에 이르러서야 드러나는 존재의 모습을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또한 俱舍論 등이 四無色이 止觀에 있어 止多觀少로 보는 것도 재고되어야 한다.

 

2) 四禪의 목적

 

아직까지도 四禪의 내용에 따른 四禪의 목적 또는 최종적인 결과

또는 성취에 대해서는 놀랄 만큼 간과되어 온 듯하다.

 

먼저 四禪은 다른 수행법의 설명과는 달리

次第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初禪(paṭhamajjhāna) 第二禪(dutiyajjhāna)

第三禪(tatiyajjhāna) 그리고第四禪(catutthajjhāna)이 그것이다.

 

이렇게 次第로 배열되어 설명되고 있는 四禪에 있어서는 각각의

第一․二․三禪의 단계에 궁극적인 의미가 들어 있음을 함축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단지 마지막의 第四禪 속에 四禪의 최종적인 결과가 있으며 그러므로

第四禪의 내용이야말로 四禪 수행의 목적과 성취가 담겨져 있음을 의미하고 있다.

 

따라서 앞에서 언급했듯이 초기불교 경전에서 第四禪까지의 四禪을 正定(sammā-samādhi)의

내용으로 보고 있다(三學의 定學의 내용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sammā가 ‘바른’[正]이라는 뜻으로 번역되었지만 원래는 ‘완전한’(perfect)

그리고 ‘모든 것에 이른’(thoroughly)이라는 뜻이 있다.

완전하고 궁극적인 삼매의 내용은 바로 第四禪이라고 하는 것이다.

 

正定의 범위에 들지 않은 몇 가지 종류의 samädhi가 초기불교경전 내에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이다

결국 第四禪에서 삼매는 완성되고 완전해져 正定이라한 것이다.

 

그러한 第四禪의 내용은 捨念淸淨(upekha-sati-parisudhi)이라는 말에 요약된다.

四禪 수행의 마지막 결과이며 성취이다.

四禪 수행을 통한 최종 목적이기도 한다.

 

捨念淸淨의 한역어가 빠알리로 upekha-sati-parisudhi와 같은 복합어이다.

일상적으로 지속되는 사유작용과 함께 모든 감각적인 욕망과 좋지 않는(身․口․意의)

행위의 그침으로부터 오는 희열감과 행복감(初禪)으로 인해 일상적인 사유작용이

차츰 가라앉으면서 끝내 단절되어 마음이 집중된 삼매가 이루어지며(第二禪)

 

평정한 마음과 함께 念(sati)과 正知(sam pajana 수동적인 알아차림)가 갖추어져(第三禪)

마지막으로 이제까지 계속되어 왔던 일체의 주관적인 감수 작용

-행복감, 괴로움, 기쁨, 슬픔마저 모두 멈춤으로서

“지극한 평정심이 이루어지고 그리고 이로 인해 念이 완성되어진

(또는 맑고 깨끗해진) 상태(第四禪)가 성취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四禪의 第四禪의 목적이며 내용이며 성취이며 결과이다.

이렇게 念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가장 중요한 관건은 初禪에 이전부터 시작하여

第二禪의 단계에서 끊어지는 ‘일상적인 사유작용’繭箚 볼 수 있다.

 

이로써 바로 念이 준비되는 第三禪의 맥락에 비춰볼 때 ‘일상적인 사유작용’을 끊은

상태와 念이 준비되는 단계는 직접적인 상관관계에 놓여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러한 vitakka와 vicāra에 대한 한역의 舊譯은 覺과 觀, 新譯은 尋과 伺이다.

영역에 있어 initial and sustaining thought, applying and sustaining thought,

analytic and investigating thought processes, discursive and initial thought

등으로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한역과 영역 모두 俱舍論이나 대승의 論師들에게 尋과 伺를

각각 추상麤相과 細相으로 註釋하는데 따른 번역으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빠알리 論書들 또한 다양한 비유를 들어 이 같은 영역과 한글 번역에 있어

‘거친 사고 작용’과 ‘미세한 사고 작용’으로 해석할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최소한 초기불교경전 내에서 이 같은 註釋적 설명은 아직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동의어로 쓰인 것인지 아니면 서로 다른 의미로 쓰였는지도 정확하지가 않다.

아마 동의어로 쓰인 듯이 보인다.

 

vitakka와 vicāra가 초기불교경전 내에서 어떻게 쓰였는지는 여러 맥락에서 살펴 볼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 있어 ‘일상적인 사유작용’으로 번역을 시도하는 것은 초기경전 내에서 vitakka와

vicāra가 十八界의 緣起에 있어 觸→ 受→ 想(saññā) 다음에 배치된다는 점과 三行과 관련하여서는

口行 즉 언어를 통한 사유작용을 의미하고 있는 초기불교경전내의 근거에 따른 번역이다.

 

모두 일상생활 속에서 진행되는 流轉緣起의 범위 내에 있다.

그렇지만 선정수행의 중요한 관건은

이러한 사유작용을 포함한 일상적인 모든 흐름이 쉬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일상적인 사유 작용’이 最適의 譯語가 아닌가 생각된다.

 

念은 곧바로 止觀에 있어 止의 四禪이 觀의 四念處 또는 四念住 수행과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 보여주는 결정적인 열쇠의 말이기도 하다.

 

이처럼 초기불교에 있어 止를 위한 禪定 수행의 목적은 그 어떤 추상적 의식 상태나

신비한 정신세계의 경험도 아닌 매우 분명하고 구체적인 의식의 변화 단계를 나타내주고 있다.

 

그것은 다음 수행을 위한 예비과정으로서 念(sati)의 발현과 완성이 다름 아닌

四禪의 최종적인 목적이며 내용이며 성취이며 결과라고 압축할 수 있다.

 

4. 觀은 곧 四念處(또는 四念住)

 

1)念(sati)이란?

 

念의 발현과 완성이 四禪의 목적이라면

念이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점을 아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이것은 觀法수행의 중심인 四念處나 四念住라는 말을 통해 볼 때도

念이 갖는 중대성을 짐작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까지도 八正道의 正念을 ‘바른 생각’이나 ‘바른 기억’으로, 五根, 五力,

七覺支의 念根, 念力, 念覺支를 각각 ‘생각’ 또는 ‘기억’으로 번역하고 있는 것을 비롯하여

四念處 설명의 맥락에 있는 경전의 한글 번역에서조차 ‘생각’이나 ‘기억’으로

일관하는 것을 보더라도 얼마만큼 오랫동안 念에 대한 바른 이해가 결여되어 왔는가를 알 수 있다.

 

이것의 중요성은 모두 三十七菩提分 또는 三十七助道品에 속하는

불교수행의 중심에 놓여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마찬가지로 한역 捨念淸淨을 해석하는데 있어 念의 해석에 대한 애매함 때문에

그저 ‘평등하고 청정한 경지’라 하여 念을 아예 빼버리거나 아니면

원래 복합어였던 것을 捨와 念 그리고 淸淨으로 각각 떼어서 설명하기도 한다.

 

즉 捨는 마음의 평등성과 정직성을 의미하며 念은 마음의 明記性

그리고 청정은 마음은 깨끗함 정도로 第四禪의 내용을 분해하여

그 복합어로 쓰여진 본래의 의미를 되살리지 못하고 있다.

 

나아가 念의 설명에 있어 한결같이 俱舍論 등의 論書에 근거해서인지 心明記性으로

뜻은 ‘어떠한 것을 보고 들어도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는 것’ 정도로 설명하고 있다.

 

더 나아가 ‘선정에 의하여 마음을 어둡게 하고 장애하는 번뇌심이 정화되면

더욱 더 기억력이 좋아지고 정신적인 능력발휘가 충만해진다는 것이다’라 하여 부연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왜 이토록 오랫동안 念을 한자 그대로 ‘생각’이나

‘기억’으로 번역할 수 있었던가 하는 이유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극히 예외적으로 四念處 수행과 관련하여 산스끄리뜨 smṛti(빨알리의 sati)를

念이 아닌 ‘守意’나 ‘意止’로 한역한 경우가 있다.

각각 ‘뜻을 지킴’ 그리고 ‘뜻의 그침’으로 옮겨볼 수 있는 말이다.

安般守意經, 增一阿含의 漢譯者가 여기에 해당된다.

 

smṛti라는 말이 갖는 심상치 않는 의미를 파악해서인지 아니면 한자 念이 초래할 수 있는

훗날의 오해를 생각해서인지 대부분의 한역에서 이루어진 念의 한역보다는 낫다.

 

아무튼 불교수행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용어인 念에 대해 깊은 천착이 없이

소홀히 취급되어 왔음은 빠알리 전통에 있어서도 크게 차이는 없는 듯 보인다.

 

그것은 테라와다 전통에 있어 최고의 수행서라 일컫는 Buddhaghosa의 Visuddhimagga도

念에 대한 간단한 설명은 ‘기억’이라는 말과 관련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은 비슷한 상황이다.

 

이것은 한역과 마찬가지로 念이 ‘기억’이라는 뜻의 빠알리어 sati나

산스끄리뜨의 smṛti에 대한 1차적인 語義에 붙들려 있었던 이유로 볼 수 있다.

 

sati에 대한 영역으로서 P.T.S.의 Pali-English 사전 등은 기본적으로 ①memory

②recognization ③consciousness ④intentness of mind ⑤mindfulness 등을 들고 있다.

 

이렇게 여러 가지 뜻을 제시한 것은 쓰여진 맥락에 따라 뜻을 달리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四不壞凈의 buddhānussati, dhammānussati, saṁghānussati,

sīlānussati는 모두 sati 즉 念이라는 말이 들어가 念佛, 念法, 念僧, 念戒 등으로 번역된다.

 

후대에는 관법 수행 즉 Vipassanā의 범위에도 넣어서 잘못 설명되지만 이때 쓰여진 念과

四禪의 第四禪에서 완성된 念이나 四念處의 念 또는 八正道의 正念과 같은 의미로 봐서는 안 된다.

 

여기서는 앞에서 언급한 俱舍論의 心明記性과 같은 뜻으로 念佛 등을 해석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제까지 보고 들었던 불법승 삼보와 계율을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는 것을 뜻한다.

 

최근에는 sati라는 말이 mindfulness나 awareness 등으로 영역된 것을

다시 우리말 번역 과정에서 ‘알아차림’ ‘주시’ ‘관찰’ ‘마음챙김’

그리고 ‘각성’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하고 있다.

이러한 한글역 또한 四禪과 四念處라는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sati의 뜻을 정확히 살리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sati 즉 念에 대한 구체적인 그리고 정확한 의미를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四禪의 내용을 거슬러 살펴보거나

四念處 수행의 내용과 성격을 깊이 분석해보면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

 

즉 四禪의 목표가 sati의 발현이라고 했을 때 그 조건은

첫째 모든 감각적인 욕망과 좋지 않은 身口意의 행위가 단절되고

禪수행에 들기 전부터 지속되는 일상적인 사유작용(vitakka와 vicāra)이 그치고

삼매(Samādhi)가 이루어지면서 동시에 주관적인 모든 감각 활동 또한 쉼으로써

평정심이 완전해져 드디어 조성되는 의식이나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다시 요약하면 일상적인 사유와 감정의 흐름이 완전히 쉬었을 때

드러나는 의식 상태 또는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마치 바람 때문에 항상 출렁이는 호수가 바람이 잠잠해지다가

결국에 가서는 그쳐 그야말로 맑고 고요해진 상태로 비유할 수 있다.

일상적인 사유와 감정은 바로 바람이다.

 

선정을 통해 지극히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아 편안하고 고요한 상태가 계속되면

언제부터인가 사유나 감정이 능동적으로 일어나지 않는 상태

그러면서 마음은 분명하게 깨어있는 상태가 이루어진다.

 

이렇게 念이란 자신을 포함한 일체에 대해 의식적으로나 능동적으로 마음을 내지 않은

상태가 되어 단지 모든 것이 철저하게 대상화되어 있는 상태를 뜻한다.

그것은 이후의 Vipassanā 수행을 위한 단지 바라볼 준비 태세가 완비되어 있는 상태라 할 수 있다.

 

따라서 念 그 자체로서 바로 觀을 의미하지 않는다.

念의 작용적인 측면을 觀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念을 ‘수동적 주의집중’의 상태라 할 수 있다.

 

이제까지 스스로의 사유와 감정 그 자체와 하나가 되는 능동적인

행위로부터 벗어나게 되어 이제부터는 일정한 거리를 두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의식상에 있어 완전히 수동적으로 변화되었음을 뜻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念 즉 sati는 일체(五蘊․十二處․十八界)를 대상화시켜

바라볼 준비 태세를 갖춘 ‘수동적 주의집중’의 상태로 정의할 수 있다.

 

이러한 ‘수동적 주의집중’의 상태는 무엇보다도 vitakka와 vicāra로 표현되는

일상적인 사유작용과 주관적인 감정이 사라지고 비워지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럼으로써 일상적인 사유작용과 감정에 의해 존재 파악이

왜곡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 상황이 철저하게 대상화되어 있는 상태에서 身受心法으로 분류되는

존재 일반이 일어나 머무르다가 사라지는 것[生住滅]을 지긋이 주시하는 것이다.

 

먼저 이러한 生住滅의 수동적 주의집중을 통해 無常을 깨닫고

다음으로 苦와 無我의 속성을 간파하고 궁극적으로는

집착으로부터 벗어난다고 하는 것이 경전에 잘 서술되어 있다.

 

따라서 念을 글자 그대로 ‘생각’이나 ‘기억’으로 번역하거나

‘알아차림’ ‘주시’ ‘관찰’ ‘마음챙김’ ‘각성’ 등의 우리말 번역은 모두 적절하지 않다.

 

이러한 譯語들은 모두 일상적인 사유 작용과 감정의 상태에서도 가능한 마음의 작용과 상태이다.

하지만 第四禪에서 완성되는 念은

오로지 일상적인 사유 작용이 단절된 상태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2) 구체적 내용과 방법

 

四禪의 목표는 念 즉 sati의 발현과 완성이라는 것이 확실해졌다.

그리고 그러한 sati의 완성은 그 자체가 목적이라고 간주할 수 없다.

 

그것은 다음의 四念處 또는 四念住와 같은

觀수행을 위한 예비 조건 또는 견인차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四念處 또는 四念住의 원어는 satipaṭṭhāna로서 기본적인 語義는 ‘念의 確立’을 뜻한다.

觀 즉 Vipassanā란 四禪에서 완성된 念이 확립되어 작용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念이 Vipassanā 수행에 있어 가장 중요한 기본 요소임을 알게 해준다.

따라서 念이 발현되고 확립되어 작용하기 전에는 결코 온전한 Vipassanā 수행이라고 할 수 없다.

念은 Vipassanā수행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순전히 念의 확립 여하에 따라서 止에서 觀으로 이행하느냐 못하느냐하는 관건이 달려 있다.

 

그러면 ‘念이 확립된 경’인 Satipaṭṭhāṇa Suttānta를 통해서 四念住의 내용을 살펴보자.

경의 시작 부분은 다음과 같다.

 

“비구들이여, 여기에는 ‘대상화된 몸’을 따라 觀하는 것에 머문다.

그것은 세상의 욕망과 고뇌가 제거되어 주의가 열렬해짐과 ‘잘 알아차림’

그리고 ‘수동적 주의집중’이 이루어진 상태에서이다.

 

‘대상화된 느낌’을 따라 觀하는 것에 머문다.

그것은 세상의 욕망과 고뇌가 제거되어 주의가 열렬해짐과 ‘잘 알아차림’

그리고 ‘수동적 주의집중’이 이루어진 상태이다.

 

‘대상화된 마음’을 따라 觀하는 것에 머문다.

그것은 세상의 욕망과 고뇌가 제거되어 주의가 열렬해짐과 ‘잘 알아차림’

그리고 ‘수동적 주의집중’이 이루어진 상태이다.

 

‘대상화된 법’을 따라 觀하는 것에 머문다.

그것은 세상의 욕망과 고뇌가 제거되어 주의가 열렬해짐과 ‘잘 알아차림’

그리고 ‘수동적 주의집중’이 이루어진 상태이다”

 

먼저 언급할 필요가 있는 것은 이러한 수행을 들기까지 처음부터

‘行住座臥 語黙動靜’과 같은 일상생활 속에서 Vipassanā가 가능하다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한적한 곳에서 坐法을 갖춘 후라야 가능함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 같은 반복적인 수행에 따른 念의 확립이 지속적이고 확고해지면서

차츰 일상생활 속에 보편화되어 나중에는 좌법이라는 제한을 떠나

일거수일투족의 일상생활에 연장되고 지속됨을 보여준다.

 

그런데 여기서 심각하게 논의되어야 할 점은 필자에 의한

‘대상화된 몸․느낌․마음․법을 따라 觀하는 것’에 대한 번역의 원어인

kāye kāyānupassī, vedanāsu vedanāupassī, citte cittānupassī,

dhammesu dhammānupassī이다.

 

Kāye kāyānupassī와 같이 반복된 말 가운데 처음은 모두 같은 處所格으로 쓰였는데

이것은 앞에서 설명한 念의 상태에 따라 觀의 대상이 완전히 대상화

또는 객관화되었음을 나타내기 위한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한역 雜阿含에는 身身觀念處(또는 住) 受心法觀念處(또는 住)로 번역되었다.

이에 대한 한글 대장경의 번역은 “몸을 몸으로 관하는 염처와 느낌을 느낌으로,

마음을 마음으로, 법을 법으로 관하는 염처이다”라 했다.

 

長阿含은

관외신관내외신觀外身觀內外身 “바깥 몸을 관찰하고 안팎의 몸을 관찰하기를

정근불해精勤不懈 부지런히 하여 게으르지 않고

억념불망憶念不妄 잘 기억하여 잊지 않음으로써

제세탐우除世貪憂 세상의 탐욕과 걱정을 없앤다.

애의법관愛意法觀 역부여시亦復如是 受와 意와 法의 관찰도 이와 같은 것이다”

 

中阿含은

관신여신념처觀身如身念處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는 염처이니

여시관각如是觀覺 이와 같이 覺을 관찰하기를 각과 같이 하여

심법여법념처心法如法念處

마음을 관찰하기를 마음과 같이 하고, 법을 관찰하기를 법과 같이 하는 염처이니라”

 

長阿含의 受意法觀에서 意는 心으로

中阿含의 如是觀覺心法如法念處의 覺은 受로 바꿀 수 있는 한역어이다.

 

한역 雜阿含과 中阿含ꡕ의 身身觀念處나 觀身如身念處이나 한글 번역에서도

볼 수 있듯이 도무지 무엇을 의미하는지 쉽게 파악하기 힘든 번역이다.

 

물론 빠알리나 산스끄리뜨 원전도 四禪이나 四念處수행의 구체적인

내용과 관련하여 이해하지 않는 한 마찬가지이다.

현재의 영역 또한 마찬가지이다.

 

長阿含의 번역 역시 구체적이지 않고 億念不妄이라는 말은 오히려 앞에서

지적되었듯이 Vipassanā 수행의 근본 뜻을 오해시킬 소지의 한역어이다.

 

이에 대한 영역은 contemplating body as body나

contemplating the body in the body나 원어의 처소격에 따른 번역으로

‘몸과 같이 몸을 응시하는 것’이나 ‘몸에서 몸을 응시하는’

또는 ‘몸 안에서 몸을 응시하는’ 정도로 한역과 마찬가지로

그 정확한 의미를 살려내고 있지 못하다.

 

다시 말해 어떻게 몸에서 몸을 응시하는 것이 가능할까하는 점이다.

이에 대한 身․受․心․法에 해당하는 말이 반복적으로 쓰인 가운데 처음이 모두 처소격으로 쓰인

이유는 앞의 번역에서처럼 ‘대상화된 몸․느낌․마음․법’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왜냐하면 이때는 이미 四禪의 第四禪에서 念이 완전해져 주관적인 감정과

사유가 일어나지 않는 상태에서 모든 존재가 있는 그대로[如實] 드러난

다시 말해 대상화가 이루어진 관(찰)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존재를 좇아가는 일상적인 능동성과는 반대로 드러난 존재를

수동적으로 맞이하는 특수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기준은 행위와 인식의 주관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왜 수동적 주의집중이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한지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다시 이후의 念處의 각 항목마다 반복되는

다음의 문구에서도 더욱 더 분명히 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그것은 yāvad eva ñāṇa-mattāya patissati-mattāya라는 문구이다.

‘단지 알아차리기만 하고 단지 주의만 집중하라‘는 뜻이다.

 

즉 자신의 모든 감정과 사유 작용이 쉬게 됨으로써 자신의 존재 현상과 활동이 대상화

또는 객관화가 이루어져 존재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실을 단지 보고 알아차리라고 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수동적 주의집중의 상태의 표현이 쓰여진 것이다.

이 같은 문구는 각 항목의 염처마다 반복되는 것으로 그 강조의 정도를 분명히 하고 있다.

 

觀하는 대상에 끄달려 어떠한 감정이나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단지 대상을 바라만 보고 알아차리는 상태’를 말한다.

완전한 객관적․수동적 상태가 이루어져 모든 것을 그저 지긋이 지켜보며 알아차릴 뿐이다.

 

그 어떠한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일으켜 적극적으로 좇아서 보는 것도 아니고 찾아서 보지도 않고

그저 일어나고 사라지는 존재의 현상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면서 알아차릴 뿐이다.

 

실은 이것이야말로 Satipaṭṭhāna에 의한

Vipassanā 수행의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내용으로 강조되어야 한다.

 

이에 대한 더 세부적인 표현의 경전적 증거는 다음과 같다.

“자신을 다음과 같이 훈련하여라.

보는데 있어 (무엇이든지) 단지 바라 볼뿐이며(diṭṭhe diṭṭhamattaṁ bhavissati)

듣는데 있어 단지 들을 뿐이며 (냄새․맛․접촉의) 느낌에 있어서도 단지 느낄 뿐이다.

인식하는데 있어서도 단지 인식한다는 것을 알 뿐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자신을 훈련시켜라.

 

만약 보는데 있어 무엇이든지 단지 볼 뿐이고 ‧‧‧

단지 인식할 뿐일 때, 너는 그것과 함께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하지 않을 때 너는 그것 안에 있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하지 않을 때 너는 그것 안에 있지 않을 것이다.

그것 안에 있지 않을 때 이것과 이것의 너머 혹은 그 사이에도 너는 있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苦滅이다”

 

十二緣起 등의 가르침은 보는데 듣는데 냄새 맡는데 맛보는데 접촉하는데

그리고 인식하는 가운데 苦가 緣起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그렇게 보고 듣고 ‧‧‧

인식하는데 貪․瞋․痴가 실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Vipassanā의 목적은 보고 듣고‧‧‧

인식하는데 있어 탐․진․치는 물론 그 어떠한 것도 싣거나 개입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고 듣고 ‧‧‧ 인식하는 데에 길들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보는데 있어 보는 대상은 이미 대상화되어 있어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바라 볼 뿐이다.

여기서 자신의 어떠한 자신의 입장(견해), 의견, 개념이나

좋아하는 것이나 싫어하는 것 등을 더하지 않는다.

 

어떠한 주관적인 관점을 싣거나 개입시키지 말고 ‘있는 그대로’(如實:yathābhūta)

단지 바라보며 이를 알아차릴 뿐이다.

 

듣는데 있어 느끼는데 있어, 인식하는데 있어 모두 마찬가지이다.

이와 같은 상태에서 ‘알아차리는 것’이 ‘있는 그대로 생명 활동의 실상을 보는’

뜻의 如實知見(yathābhūtañāṇa-dassana)이다.

 

이러한 맥락은 念을 ‘알아차림’으로 한글역하는 경우도 있지만

옳지 않다는 것은 앞에서도 지적했다.

 

‘알아차림’의 뜻은 念이 아니라 사실 念과 함께 복합어로 쓰인 sampajañña이다.

따라서 Vipassanā는 다름 아닌 Sati-sampajañña 수행이다.

그러므로 이 말이 Vipassanā수행과 관련한 경에서 빈번하게 나타난다.

 

복합어로 쓰인 사정을 무시하고 memory and wisdom 또는

mindfulness and self-possession으로 영역이 이루어져있고

한역에 있어서도 正知나 分別이라는 말로 念과 떨어져 번역하고 있다.

 

여기서 굳이 번역을 시도해 본다면

‘완전한 수동적 주의집중의 상태로부터 드러나는 五蘊의 生․住․滅에 대한 알아차림’

더 짧게는 ‘수동적 주의집중으로부터 분명한 알아차림’ 정도로 해 볼 수 있다.

 

여기서 ’알아차림‘의 수동적 표현은 알려고 보려고 해서 또는 보고 알려고 해서 아는 것이 아니다.

저절로 알려지고 보여지는 드러남의 세계를 말한 것이다.

 

十二緣起를 포함한 불교의 모든 가르침이 이러한 범위에 놓여 있다.

그리고 止觀의 수행이란 이처럼 반복적인 知見에 따라 如實하게 되어

궁극적으로 苦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이 ‘단지 바라볼 뿐이다’의

ditthe diṭṭhamattaṁ bhavīssati에 해당하는 구절이 온전하게 한역되어 있지 않는 듯하다.

 

예를 들면 위에서 인용한 경문과 거의 비슷한 내용의 Saṁyutta Nikāya와 대응되는

한역 잡아함의 ‘見以見爲量’이라는 문구에 잘 나타나 있다.

 

한글 역은 ‘보는 것은 보는 것으로 분량으로 삼고’라 하였다.

마찬가지로 듣고 느끼고 인식하는데 있어서도 ‘분량’(量)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이것은 四念處라는 관법수행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도록 했던 중대한 誤譯이다.

 

이것은 빠알리 matta나 산스끄리뜨 mātra가 ‘분량’(measure)과 함께

‘단지’(only, a mere, just)라는 뜻이 있는데

이 가운데 전자를 택해 오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Mahā-Sati patthāna Suttānta에 대응되는 한역 경전은 이같이

“단지 알아차리기만 하고 단지 주의만 집중하라”와 같은

중대한 반복적인 주의 문구를 아예 빠뜨리고 있다.

 

최근의 영역이나 한글 번역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많은 영역과 한글역에서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이 같은 문구를 생략하고 있다.

 

이로서 Vipassanā 수행상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 경전에서는

자상하게 반복적으로 강조했지만 안타깝게도 간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동북아 지역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초기불교 경전은 소승경전으로 폄하하여

깊이 연구하지 않았던 것과 함께 이 같은 誤譯은 결국 Vipassanā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발견할 수 없었던 중요한 원인이 아닌가 생각된다.

 

5. 止觀의 次第에 대한 교리적 근거

 

身․受․心․法에 대한 四念處는 五蘊를 修行處로 삼는 것이다.

五蘊이 인식주관인 동시에 인식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는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오로지 念의 확립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觀의 주관이 五蘊 중에 行蘊이든 識薀이든 간에 스스로를

대상화시켜 볼 수 있다는 것이 Vipassanā의 인식론적인 근거이다.

 

만약 실재론적인 입장에서 서서 인식주체는 대상화시킬 수도 객관화시킬 수도 없다고 한다면

Vipassanā의 如實知見은 그 완전한 진리성은 잃게 된다.

 

이와 같은 자세한 교리적 근거에 대한 논의는 초기불교의

전체적인 맥락과 함께 이루어져야겠지만 여기서는 다음으로 미루고

우선 止觀이 次第關係임을 나타내는 중요한 경의 내용만을 먼저 살펴보자

 

1) 三行을 통해서

 

止觀의 관계는 먼저 기본적이고 원론적인 측면에서 고찰되어야 한다.

종래의 입장처럼 止觀이 서로 평등한 위치를 갖는다는

전통적인 설명에 따라 동시에 수행되어야 한다는 점은 재고되어야 한다.

 

止觀均等 또는 定慧均等과 止觀合修나 止觀雙修

그리고 定慧雙修의 표현을 들어 지금까지 강조되어져 왔다.

하지만 이것은 수행상에 있어 혼돈을 가중시킨다.

 

물론 이 같은 표현은 止 이후의 觀이라는 차제 수행이

진행된 이후에야 가능한 표현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止와 觀를 같이하려 한다면 마치 삐꺽거리는 雙輪마차가

서로 뒤엉키고 부딪치는 듯한 심리적인 충돌과 혼란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止와 觀의 수행은 근본적으로 평등하게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止의 완성은 觀과 비례관계에 있어 얕은 수준의 선정은 온전한 觀을 담지할 수 없다.

 

한 마디로 말해서 자세가 또는 조건이 갖추어져 있지 않는 상태라는 것이다.

오직 止가 바탕이 되어야 만이 觀이 가능한 차제 관계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止에서 觀으로 이행할 수 있는 수행은 止를 통해 念이 완성되느냐 못하느냐가

중요한 관건이라는 앞의 설명은 止觀이 함께 수행할 수 없는 성질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나아가 止가 觀의 예비수행임을 더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三行과의 관련 선상에서 설명되는 것이다.

三行은 身行(kāya-saṅkhara) 口行(vacā-saṅkhara)와 意行(mano-saṅkhara)이다.

 

경전에서 滅盡定에 들려고 하는 사람이 반드시 修行해야 할 2가지 법으로

止觀이 소개되면서 동시에 三行이 滅하는 순서와 일치한다고 설명되는데 다음과 같다.

 

口行 身行 意行

 

먼저 口行은 vitakka-vicāra와 관련 속에서 설명된다.

즉 “vitakka-vicāra가 있기 때문에 곧 입으로 말한다.

따라서 vitakka-vicāra가 있는 것을 口行이라 한다”

 

다음 身行은 호흡을 말하며 “몸에 의지해 활동하기 때문에 身行”이라고 하고 마지막

意行은 想(saññā)과 受(vedanā)를 말하며 마음에 의지해 활동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滅盡定은 口行 身行 意行의 순서대로 차례로 멸하면서 이른다고 하는데

이 같은 순서는 정확히 止觀이 각각 四禪이고 四念處이며 양자간은 次第關係로서

止는 觀을 위한 선행조건 또는 필수조건으로 준비되어야 하는 것임을 잘 나타내준다.

 

먼저 三行 가운데 vitakka-vicāra가 口行이라 하여 이를 滅하는 것을 시작으로 하는 것은

정확히 四禪의 第二禪이 初禪으로부터 지속되어 온 vitakka-vicāra의 滅과 일치한다.

 

언어를 끊는 것을 통해 일상적으로 지속되는 사유 작용을 끊는 것을 말한다.

더 구체적으로 初禪에서 말이 그치는 것을 이어 第二禪에서

vitakka-vicāra가 그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는 놀랍게도 일상적인 사유작용이 언어를 매개로 하고 있음을 이미 간파하고 있는 것이다.

후대 중국의 禪家에서 言語道斷이나 不立文字의 경지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일지 모른다.

마찬가지로 無心, 無念, 無想의 경지도 사유작용이 끊어진

이러한 맥락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다시 身行(육체의 작용)의 滅이 호흡과 관련하여 설명되는 것은

第四禪과 그 이후의 四念處의 身念處의 내용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즉 다른 경에서 第四禪에서 호흡이 멸한다고 하는 것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호흡이라는) 身行을 가라앉히면서 숨을 쉬는 것’

(Passambhayaṁ kāya-saṁkhāraṁ assasissāmīti)이라는

표현이 身念處 수행의 시작과 함께 잘 나타나 있다.

 

이렇게 四念處에서 身念處는 四禪의 마지막 단계인 第四禪과 연결되어

觀法修行의 시작이면서도 가장 핵심적이고 중심적인 위치에 놓여 있음을 말해준다.

 

이후의 다른 念處 수행도 身念處를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언어를 통한 사유의 작용(vītakka 와 vicāra)이 그치는 口行의 滅과 함께

모든 주관적인 감정이 쉬어 지극히 고요해진 마음의 상태에 이어

호흡 또한 안정되고 순일해진 상태를 身行의 滅이라 말한다.

 

따라서 身行이 멈춘다는 것은 바로 호흡이 멈춘다는 의미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만약 호흡이 말 그대로 멸하는 것이라 한다면 觀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은 생각이 가라앉아야 호흡이 가라앉고 거친 생각 속에

거친 호흡이 따르는 것과 같은 상관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깊은 수준으로 안정된 마음은 깊은 수준의 안정된 호흡을 뜻한다.

이에 연결된 경전의 표현은 ‘온 몸으로 느끼면서 호흡하기’(Sabbekāyaṁpaṭi samveti)라고 하였다.

 

전통적인 註釋書에 따른 설명은

‘호흡의 전 과정을 처음, 중간, 끝 모두 면밀히 살피어 보면서’의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에 만족할 수 없다.

이보다는 더 높고 깊은 수준의 호흡으로

‘자신의 모든 존재가 호흡에 완전한 수동적 주의 집중이 이루어져

마치 자신의 호흡과 하나 되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호흡 이외에는 그 어떠한 것도 일어나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의 상태로서

존재 전체가 단지 호흡 속에 호흡만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사실 이렇게 깊어져 가는 ‘호흡의 수동적 주의집중’(sati)의 정도에 따라

선정과 관찰(수동적 알아차림 sampajañña)의 수준도 미세하고 깊어져 간다.

 

이러한 수준의 호흡에 대한 수동적 주의집중과 비례하여 다른 신체적인

움직임이나 느낌․마음과 같은 다른 念處의 관찰의 수준도 결정된다.

 

그것이 호흡과 관련한 이러한 身行의 滅을 이어 더욱 더

‘수동적 주의 집중으로부터 분명한 알아차림’(sati-sampajañña)이 심화되어

마지막으로 意行까지 滅해 滅盡定에 이르는 단계이다.

 

意行의 滅은 四念處의 受와 心(또는 法)念處 모두에 해당된다.

멸진정 (정확히는 定이라는 말을 쓸 수 없다.

원어 또한 nirodha-samāpatti로 ‘멸진의 성취’라는 말이 더 정확하다)의 다른 말은

想受滅定(saññā vedayita-nirodha-samāpatti

이 또한 정확히는 앞의 멸진정의 말처럼 定의 개념이 아니다)이다.

 

즉 想(saññā)과 受(vedanā)에 관련된 意行이 멸했다는 것은

四念處의 受와 心(또는 法)念處를 통해 五蘊의 想과 受의 참모습(如實)이 드러나

더 이상 끄달리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五取蘊에서 取가 빠진 五蘊만을 뜻하는 것으로 느낌과 지각의 세계에 더 이상 자신의

견해나 의견 그리고 싫어하고 좋아하는 것과 같은 주관적인 입장을 일으키지 않는 상태이다

 

반복하여 말하면 그러한 것들에 지극히 초연해져 휩쓸리지 않고

그 자체로서 철저히 대상화되고 객관화된 상태를 말한다.

결코 想과 受가 완전히 제거 되어 버린 뜻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止觀의 수행속에 口行→身行→意行의 三行이 차례로

滅해간다는 순서는 止觀이 次第關係를 정확히 보여준다.

 

이로써 止觀 수행 안에 三行의 止滅과 함께 四禪과 四念處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초기불교 경전은 분명히 드러내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순일해지는 호흡에 따라 身行이 멸해가는 것은 四禪의 第四禪과 四念處의 처음인

身念處의 시작이 止에서 觀으로 이행하는 연결고리의 위치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第四禪에서 순일해진 호흡을 身念處에서 본격적으로 觀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四禪의 내용은 四念處 수행의 전제 조건이며 예비수행일 뿐이다.

그리고 모두를 포섭하는 말로 止觀이 바로 경전에 잘 나타나있다.

 

그래서 滅盡定으로부터 나오는 순서는 멸진정에 들 때와 반대로

意行→身行→口行이라 하여 止觀 수행에서 다시 일상으로 되돌아오는 과정을 보여준다.

 

身․口․意의 작용과 행위 자체로 진행되는 우리의 일상에 반해 止觀수행을 통해

身․口․意의 작용과 행위를 철저하게 객관화하고 대상화하여 如實知見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2) 十八界의 緣起를 통해서

 

다음으로 十八界의 緣起를 통해 止觀의 관계를 더욱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

十八界란 六根과 六境이 어우러져 六識이 緣起하는 것을 말한다.

十二處를 바탕으로 구체적으로 인간의 인식/의식이 전개되어 가는 기초라 할 수 있다.

十二處와 十八界는 불교에 있어 기본적이며 핵심적인 모든 가르침의 출발점이 된다.

 

이는 어떻게 욕망(탐욕)으로 나아가는가를 보여주는 六六法과 함께

苦라는 질곡으로 가는 十二緣起의 기초를 이루는 법이기도 하다.

 

많은 경전에서 十八界를 기초로 緣起해가는 여러 유형을 통해 불교가 시설되어 있는데

그 중에 止․觀 수행과 관련한 경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눈은 色을 緣하여 眼識이 일어나고 三事和合觸과 觸으로부터 覺(受)이 일어난다.

그는 그의 覺(受)에 대한 想이 일어나고 想이 일어난 것에 思가 일어나며

思가 일어난 것에 念이 일어나고 念이 일어난 때문에 分別이 일어난다.

 

이렇게 일어난 분별은 그를 (쉬지 않고) 몰아쳐

과거․미래․현재에 걸쳐 눈에 보여 지는 색과 함께 계속된다”

 

먼저 漢譯된 경문의 漢譯語에 따른 순서를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①六根과 ②六境 → ③六識 → ④六觸 → ⑤六覺(受의 다른 한역어)

→ ⑥六想 → ⑦六思 → ⑧六念 → ⑨六分別

 

이에 대응하는 빠알리 경전의 빠알리어를 통해 이들의 용어를 살펴보면

①cakkhu, ②rūpa, ③viññāna, ④phassa, ⑤vedanā,

⑥saññā, ⑦vitakka, ⑧papañca, ⑨papañca-saññā-saṅkhā이다.

 

여기서 먼저 第二禪에서 단절된다는 일상적인 사유작용의

⑦vitakka가 ⑦思로 한역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계속해서 ⑧念/papāñca과 ⑨分別/papañca-saññā- saṅkhā로 연기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papañca는 한역에 있어 戱論이나 虛僞 또는 妄想으로 번역된 말이다.

그리고 papañca-saññā-saṅkhā는 복합어로서 分別로 한역되었지만 이는 마지막 saṅkhā만을

번역한 듯하며 정확히는 복합어답게 ‘papañca로 인한 saññā와 saṅkhā’

또는 ‘papañca와 saṅkhā가 개입된 saññā’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이 두 가지 말에 대한 정확한 번역은 많은 논의가 필요하지만 여기서는 대강

한역의 망상이나 분별 또는 분별망상 또는 사량분별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 같다.

 

기본적으로 일상적인 사유작용인 vitakka로 인해

존재의 참모습을 왜곡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로 볼 수 있다.

있는 그대로[如實]와는 달리 발달·전개시키는 마음의 작용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는 대체로 한역의 망상이나 분별 또는 분별망상 또는 사량분별의 뜻과 일치한다.

 

후대불교 (중국의 선불교도 포함)에서 분별망상 또는 사량분별을 끊으라고 역설하는 교리적 근거가

어떻게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초기불교 경전에서 설명되고 있는지를 찾아볼 수 있다.

나아가 초기불교 경전에서는 止觀의 문제와 함께 자세히 설명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vitakka와 같은 일상적인 사유작용은 계속해서 papañca와 같은 허위나 망상을 일어나게 하고

허위나 망상은 더 구체적인 단계의 분별망상 또는 사량분별로 緣起한다는 것이다.

 

vitakka에 의해 ‘있는 그대로’의 존재의 세계는 쉬지 않고 변질․왜곡되다가 결국

‘있는 그대로의 세계’와 ‘변질․왜곡된 세계’와의 사이에 생기는 간격 때문에

우리는 항상 苦라는 질곡 속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간격에는 바로 욕망이 끼어있고

그러한 간격의 차는 다시 苦와 비례하고 욕망과 비례하여 있다.

이러한 큰 격차는 바로 큰 욕망 때문에 생기고 다시 그러한 욕망은 苦를 발생시킨다는 것으로

十二緣起의 여덟 번째 渴愛[taṇha]가 그것이고 마지막의 생로병사 우비고뇌가 그것이다.

 

그러므로 苦를 끊기 위해서는 papañca와 papañca-saññā-saṅkhā를 일으키지 않도록 해야 하며

이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는 바로 앞 단계의 vitakka를 끊는 것이 무엇보다도 먼저 중요하다.

 

이는 止觀수행에 있어 第二禪의 내용으로 바른 선정수행과 이후의 바른 관법수행을 위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는 조건임을 앞에서 잘 살펴보았다.

 

즉 이는 三行의 口行과 같이 止에 속한다.

그리고 vitakka 앞에 위치한 ⑥saññā(想)와 ⑤vedanā(受)는

觀의 四念處가운데 受와 心(또는 法)念處에 해당한다.

 

결국 이것은 十八界의 緣起로 流轉하는 존재의 일상적인 흐름의 순서를

거꾸로 거슬러 차례대로 제거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즉 존재와 사물의 왜곡을 넘어 ‘있는 그대로의 세계’[如實]는

vitakka와 saññā 그리고 vedanā를 넘은 phassa와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오로지 止觀수행을 통해서이다.

 

이렇게 ⑦vitakka → ⑥saññā → ⑤vedanā와 같은 還滅緣起의 구조는

止와 觀이 次第關係가 될 수밖에 없는 교리적 근거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순서는 왜 想受滅(定)에 있어 五蘊이나 12연기 등의 순서대로 受想滅定이 아니라

saññā -vedayita-nirodha-samāpatti로 쓰이는지 그 이유를 말해주기도 한다.

 

이것은 초기불교의 가르침과 수행이론이 얼마나 조직적이고 논리적으로

그리고 치밀하게 구성되어 전개되는가를 잘 보여주는 한 예로 볼 수 있다.

 

Ⅲ. 결론

 

止觀의 관계는 그 구체적인 내용인 正定인 四禪과 正念인 四念處를 통해서 살펴 볼 수 있다.

특히 四禪의 목적이 일상적인 사유작용을 끊음으로써 念을 발현하고 완성한다는 점으로 볼 때

 

그것은 四禪 자체로서 궁극적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음 단계의 예비적 수행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四禪을 통해 念을 발현하고 완성하지 못한다면 다음의 四念處와 같은 觀 수행은 시작할 수 없다.

止의 四禪은 觀의 四念處를 위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는 조건부의 수행이다.

그리하여 四禪의 念이 기본적으로 바탕이 되어 있는 것은 四念處라는 수행의 Vipassanā이다.

 

四念處의 내용은 五蘊을 觀하여 無常한 진리를 체득하는 如實知見이며

如實知見은 곧 해탈․열반으로 가는 지혜이다.

 

따라서 이러한 止․觀의 관계를 다시 요약하면 ‘禪修行(四禪)이라는 형식을 통한 삼매의

성취(念의 완성)속에 身․受․心․法 또는 五蘊의 Vipassanā가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止觀의 관계는 매우 분명해졌다.

이는 전통적인 주장처럼 결코 止와 觀이 평등한 위치에 있어

처음부터 동시에 닦을 수 있는 수행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동시에 닦을 수 있다는 주장은 Vipassanā를 위한 형식으로서 선수행과

그 선수행의 내용인 삼매의 개념에 대한 혼돈에서 야기한 것이라 보여 진다.

 

하지만 초기불교의 교리와 수행체계의 전반적인 맥락을 통해 볼 때

양자가 평등한 관계로서 처음부터 같이 닦아 서로 보완하는 관계라고 볼 수 없다.

따라서 止觀合修나 止觀雙修 (또는 定慧雙修)와 같은 말은 재고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처럼 止와 觀의 관계는 次第의 관계로서 止가 배제된 觀이 있을 수 없다는 점과 마찬가지로

觀이 배제된 止 다시 말해 觀을 목표로 하지 않은 止 수행은

근본적으로는 불교가 목적하는 바에 있어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止 수행은 반드시 觀으로 연결되어야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觀만이 불교의 궁극적인 입장에서 볼 때 큰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如實知見은 止의 내용이나 결과가 아니라

止가 바탕이 된 觀 수행의 내용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四禪 속에 止․觀을 모두 보려고 했던 전통적인 입장도

四禪의 내용과 四念處와의 맥락상 전혀 근거가 없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상과 같이 초기불교 경전에 근거한 止觀에 대한 이해의 부족은

그 동안 우리나라에서 갖가지 오해를 불러왔다.

 

예를 들면 “망심에 불과한 것” “소승불교의 수행법” “오관을 열고 분별하는 수행법”

“간단하고 일상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니 효력은 있지만 근원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

“부셔져버리고 또 부셔져 버리기 때문에 항상 같은 노력을 해야하는”

“보통사람의 수행법” “하근기의 수행법”

“바람직한 수행법이 아니어서 겉으로 보기에는 수행 같지만 믿을 수 없는 공부” 그리고

“관하는 것과 관하는 대상을 분리한다는 점 때문에 유효하지 않는 수행법”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Vipassanā수행에 대한 모든 비판의 근거는 타당하다고 볼 수 없다.

진정한 의미의 Vipassanā는 결코 일상적인 의미의 보는 것이 아니다.

더 나아가 본 논문의 내용이 시사하는 몇 가지 점을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선정수행[止]에 따른 念의 완성 또는 확립이 없는 Vipassanā는 Vipassanā가 아니다.

이것을 경시하고 Vipassanā을 수행한다고 또는 지도한다고 하는 것은

오히려 Vipassanā의 참된 의미를 흐리게 하고 오해하도록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둘째, 불교의 모든 수행체계가 모두 止觀이라는

용어 속에 總攝될 때 불교수행의 근본적인 의미가 회복된다는 점이다.

 

결코 禪이나 定 또는 禪定이 불교 수행의 모두를 담거나 대표하는 용어로 보아서는 안 된다.

더 이상 불교 수행의 목표가 “생각 끊기”나 “의식의 작용을 끊는 것”으로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셋째, 근본적인 입장의 止觀 수행과 명상이나 요가 또는 갖가지 觀想法과 차별성이 강조되어야 한다

특히 作意적인 성격의 관상법이 止觀의 범위에 해이하게 적용된 경우를 바로 잡아야 한다.

 

예를 들면 大乘의 唯識派의 止觀 설명에 있어 影像[pratibimba]의 觀이,

淨土의 觀想念佛이 그리고 密敎의 五相成身觀 등이 이 범주에 들어가지 않나 하는 점이다.

 

넷째, 철학이 논리적 사유나 추론 또는 (귀납적인) 경험에 따른

이론 체계라면 불교는 철학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불교의 如實知見은 언어를 통한 일상적인 사유작용을 떠난

자리로부터 그 출발점을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양자를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하려는 데에 좀 더 조심스러워야한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화두선의 근거와 구체적인 실천방법을

오히려 초기불교 지관의 내용과 관련시켜서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無念無想 그리고 無心을 강조하면서 한 마음도 일으키지 않고

화두를 觀 또는 看하는 것이라 할 때 화두선의 근거는 Vipassanā로부터 정립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Vipassanā는 화두선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으로 이해하려는 태도는

물론 더 나아가서는 서로가 다르다는 전제 아래 양자간의 차별성만을 강조하고 상대적으로

어느 것이 더 뛰어난 수행법임을 애써 증명하려는 태도는 성급한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