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經/비파사나 수행

Vipassanā의 인식론적 근거

Vipassanā의 인식론적 근거

- 빠알리(Pāli) 경전을 중심으로 - 조준호 동국대 불교학과

2014-01-21 01:03:27

 

I. 들어가는 말

 

<초기불교에 있어 止觀의 문제>라는 글이 발표된 이후

여러 측면에서 시비가 일어 논쟁점이 부각되었다.

 

주로 sati(念)라는 용어의 해석과 용례에 있어 이의가 많았다.

그리고 이러한 현재의 논자의 sati이해에 따른 지관의 일방적인 차제

수행만을 강조하는 주장에 대해서도 또한 다양한 이견이 있었다.

 

그것은 몇 몇 경전과 전통적인 지관 이해에 따라 觀수행에서 止수행이 처음부터 가능하다는

근거를 들어 전통적인 입장을 다시 확인 또는 대변하는 입장에 서서 비판하고 있다.

 

사실 현재의 논자가 경전과 전통적인 주장에 반하는 주장을 하기까지

그러한 경구나 전통적인 이해를 무시하거나 간과한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그러한 도식적인 설명을 납득하기에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문제가 많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스스로 비판의 여지를 만들어 답을 얻기 위해

필요 이상의 단정적이고 한정적인 주장을 던진 것이다.

 

많은 선수행의 이론가나 실천가에 자문을 구하였다.

하지만 충분히 납득할 만한 설명을 아직까지 얻지 못하고 있다.

 

나아가 2편의 논평 모두 논문의 전반부를 중심으로 기존의 전통적인 입장에 따라 비판하였지

실질적으로 止에서 觀이라는 일방적인 차제를 논증하고 있는

후반부의 교리적 검토에 대해서는 모두 침묵하고 있다.

 

그리고 좀 더 체계를 갖추어 이후에 발표된 졸고에 대한 반비판 형식의 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극히 제한된 몇 개 경전과 후대 논서를 들어 반론을 제기하고 있지만

크게 설득력이 있다고 볼 수 없다.

 

하지만 “2300년이라고 하는 장구한 세월동안 무수한 인간들에 의해 시험되고 검증된 가르침”이라는

전통의 권위를 앞세워 “독단적인 태도를 갖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라고

주의는 물론 심지어 “유사종교”의 사례까지 언급하고 있다.

 

이에 귀 기울 필요가 있을지 모르지만 과연 2300년 동안 불교사에 있어 교리와 실천수행에 있어

상반된 견해가 없었던가하는 문제는 굳이 답변이 필요가 없을 상식적인 문제이다.

 

더 나아가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라는 명언(?)까지 들어 전통적인 입장을

대변하고 고수하려는 데는 당혹스러울 따름이다.

 

그렇듯 2300이라고 하는 장구한 세월동안 무수한 인간들에 의해

검증되었기에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는 것일까!

 

본 논문은 이러한 반론에 대해 이전 논문의 주장을 변함없이 다시 반복한다.

오히려 강화시키는 것을 꾀하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현재의 주제 <Vipassanā의 인식론적 근거>는

Vipassanā를 통한 진리 인식의 방법과 체계를 초기불교 경전에서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를

살펴봄으로써 기존 논문의 입장을 더욱 공고히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II. 본 론

 

1. 두 가지 인식 방법

 

“身․受․心․法에 대한 四念處는 五蘊을 修行處로 삼는 것이다.

五蘊이 인식주관인 동시에 인식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는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오로지 念의 확립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觀의 주관이 五蘊 중에 行蘊이든 識薀이든 간에 스스로를 대상화시켜

볼 수 있다는 것이 Vipassanā의 인식론적인 근거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초기불교 경전에 나타난 인식론은 크게 2가지로 분류하여 설명할 수 있다.

첫째, 보통사람들의 일상적인 인식 방법이요,

둘째는, 진리 탐구에 눈이 뜨인 자들의 선수행을 통한 인식 방법이다.

 

구체적으로 앎(인식)과 관련된 빠알리어 용어로서

경전에서 빈번하게 사용되는 용어는 다음과 같다⁵

 

[5) 초기불교의 인식론에 관한 중요한 저서는

K. N. Jayatilleke의 Early Buddhist Theory of Knowledge가 있다.

그리고 P. D. Premasiri의 Early Buddhist Analysis of Varieties of Cognition

(Sri Lanka Journal of Buddhist Studies, vol. Ⅰ, 1987. pp.51-69)은

본고와 관련해서 참고할 만하다]

 

① saññā (명사) sañjānāti (동사) ← saṁ + ña

② viññāṇa (명사) vijānati (동사) ← vi + ñā

③ abhiññā (명사) abhijānāti (동사) ← abhi + ñā

④ pariññā (명사) parijānāti (동사) ← pari + ñā

⑤ paññā (명사) pajānāti (동사) ← pa + ñā⁶

[6) 이외에도 vindeti, jānāti, sambujjhati, sampajānāti, ājānati, vedeti, ceteti, cinteti

등이 문맥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쓰이고 있다]

 

첫 번째의 saññā는 五取蘊이나 十八界 緣起 가운데

想取蘊이나 想으로 한역된 말이며 sañjānāti는 想에 대한 동사형이다.

 

두 번째의 viññāṇa는 마찬가지로 오취온이나 십팔계나 십이연기에서

각각 識取蘊과 (意)識 또는 識으로 한역된 말에 vijānati는 이에 대한 동사형이다.

 

세 번째 abhiññā는 六神通(chaḷābhiññā)에서 신통이라는 말로 한역한 것과

같이 ‘매우 비범한 초능력’을 말하거나 또는 ‘특별한 인식이나 지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abhijānāti는 이 말에 대한 동사형이다.

 

네 번째로 pariññā는 ‘知’로 한역되었고 빠알리 경전에 나타난 쓰임새는 탐진치의

滅로 이끄는 것과 같은 ‘정확하고 완전한 인식이나 지식’을 의미하는 말로 쓰인다.

마찬가지로 parijānāti는 이에 대한 동사형이다.

 

마지막의 paññā는 주로 ‘慧’로 한역되었고 한역대승불교 경전에는 빠알리 paññā의

산스끄리뜨인 prajñā를 音寫한 ‘般若’라는 말로 매우 중요하게 취급된다.

그리고 pajānāti는 paññā에 대한 동사형이다.

모두 ñā라는 어원에 유래하는 말들로 이외에도 ñāṇa의 jānāti 등이 있으며

‘dis'를 어원으로 passati 나 dakkhati 등이 인식과 관련해 많이 쓰이고 있다.

 

이들이 문장에 따라 미세한 차이로 서로 호환해서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다섯 가지 용어에 있어서는

인식 활동의 수준과 내용의 차이를 현격하게 구별해서 사용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앞에서 분류한 2가지 종류의 인식론 가운데

첫째의 보통 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의 일상적인 인식활동은

첫 번째와 두 번째인 sañjānāti와 vijānati에 해당된다.

 

그리고 이러한 일상적인 인식활동을 뛰어 넘어 (또는 쉬거나 단절한다는 표현도 가능)

진리에 대한 인식 활동은 나머지 abhijānāti, parijānāti 그리고 pajānāti로 표현된다.

 

먼저 sañjānāti와 vijānati가 보통사람의 일상적 또는 일반적 인식 활동임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경전을 들면 다음과 같다.

 

“눈은 色을 緣하여 眼識이 있고

이들 3가지 和合으로 觸이 그리고 다시 觸에서 受가 일어난다.

 

그는 그의 느낌에 대한 想이 일어나고(sañjānāti 개념적 인식 활동),

想이 일어난 것에 思가 일어나며(vitakketi 일상적인 사유 활동),

思가 일어난 것에 念이 일어나고(papañceti 虛僞나 妄想 또는 戱論이라고도

한역되었지만 일상적인 사유 활동에 따른 왜곡 활동으로 설명할 수 있다)

 

念이 일어난 때문에 分別(papañca-saññā-saṅkha 왜곡(papañca)된

개념적 인식활동(sañjānāti)과 분별(saṅkha)

또는 왜곡과 분별이 개입된 개념적 인식활동)이 일어난다.

 

이렇게 일어난 분별은 그를 (쉬지 않고) 몰아쳐

과거미래현재에 걸쳐 눈에 보여 지는 색과 함께 계속된다.”

 

마지막의 ‘왜곡된 인식 활동’으로 연기하는 과정에 sañjānāti가 있고

그 이전에 根․境․識이 화합한다는 tiṇṇa saṅgati(三事和合)에서

식의 활동인 vinjānati가 마찬가지로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왜곡된 개념적 인식 활동과 분별로 말미암아 苦로 향해있는 流轉緣起의 한 형태로서

이외에도 六六法(chachakkadhamma)의 여러 형태에서도 sañjānati와 vijānati는

모두 인간고라는 질곡으로 향하는 인식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5가지 강렬한 집착(取 upādāna)으로 모여진 자체로서 인간 존재를 표현하는 五取蘊

(pañcupādānakkhandha)의 활동 가운데 vijānati 등이

기본적으로 苦의 集으로 욕망과 관계하고 있다

 

그렇기에 수많은 경에서

sañjānāti와 vijānati의 想蘊과 識蘊이 포함된 五蘊의 활동을 반성시키고 있다

이는 이 같은 용어들과 관련해 있는 인식 활동을

초기불교 경전에서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지 분명히 나타내 준다.

 

다음으로는 五取蘊과 다양한 종류의 六六法이나 十八界 緣起나

그리고 緣起의 여러 지분에서 나타나는 sañjānāti와 vijānati의 인식 방법이나

인식 활동과는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대표적인 경전을 들면 다음과 같다.

 

“비구들이여,

(진리의 인식으로) 존재를 바르게 파악해야 할 법(pariññeyyā dhamma)에 대해 설명하겠다.

잘 듣도록 하라. 무엇이 ‘바르게 존재를 파악해야 할 법인가?

色이라는 존재에 대해 바르게 파악해야 할 법과 감각(受)이나 감정에 대해 바르게 파악해야 할 법,

개념적 인식(想)과 의지(行) 그리고 의식(識) 대해 바르게 파악해야 할 법이다.

이것이 (진리 파악으로) 바르게 존재를 파악해야 할 법이다.

 

무엇이 (바르게 존재를) 아는 것(pariññā)인가?

비구들이여,

탐진치를 끊는 것이야말로 (진리 파악으로) 바르게 존재를 아는 것(pariññā)이라 한다.”

 

여기서 sañjānāti의 sañña와 vijānati의 viññāṇa를 포함한 五蘊을

‘대상화된 객관적 존재’로서 파악하는 인식을 pariññā로 언급되고 있다.

더 나아가 탐진치를 멸하는 것으로 pariññā의 인식활동을 정의하고 있다.

 

다음으로 위의 pariññā와 함께 abhiññā와 함께 언급되면서 쓰여지는 경우를 살펴보자.

“비구들이여,

색이라는 존재에 특별한 인식을 갖지 못하고 바르게 파악하지 못하고,

애착을 버리지 못하고, 벗어나지 못하면 苦를 멸할 수 없다.

수상행식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색이라는 존재에 특별한 인식을 갖고(abhijānaṁ) 바르게 파악하여(parijānaṁ)

애착을 버리고(virājayaṁ), 벗어나는 것(pajaham)으로 고를 멸할 수 있다.

수상행식도 마찬가지이다.”

 

parinā와 abhiññā는 비슷한 뜻으로 같은 문장에 반복하여 사용되어 강조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앞의 경전과 같이 saññā와 viññāṇa를 대상화된 객관적 존재로서 파악하는

인식 활동으로 분명하게 sañjānāti와 vijānati와 구별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더 나아가 abhijānāti와 pajānāti는 애착을 버리게 하고 끝내는 고까지 멸할 수 있다고 하여

고의 멸에 있어 직접적인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paññā의 pajānāti는 굳이 경문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오랜 불교사에 갖는 지중한 무게를 느끼고도 남는다.

 

이는 초기불교 경전을 포함하여 모든 불교 전통에 있어 眞理라는

가장 불교적인 표현의 yathābhūta에 대한 인식 활동으로 쓰이고 있다.

 

yathābhūta는 한역으로 如實이다.

우리말로 ‘(세계와 존재의) 있는 그대로’라 할 수 있는데

빠알리 경전을 통털어 yathābhūta와 함께 pajanati는 가장 많이 쓰인다.

 

흔히 yathābhūtaṁ pajanati로서 pariññā가 언급되어 있는 앞의 경전과

거의 비슷한 내용의 다른 경문에서 五取蘊의 yathābhūtaṁ pajanati10)라는

문구가 사용되어 abhijānāti와 parijānāti와 동의어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2. 如實知見(yathābhūtañaṇadassana)

 

초기불교의 인식론은 위와 같이 크게 2가지로 대별하여 설명될 수 있다.

이는 빠알리 경전 전체에 걸쳐서 yathābhūta라는 말과 함께 sañjānāti나 vijānati가

함께 쓰여지는 용례는 찾아볼 수 없고 대부분 pajānāti이며

그 밖에 사용되는 것은 pajānāti와 대등한 수준의 용어들 뿐 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후자의 이러한 특별한 수준의 인식활동의 내용을

ñāṇadassana(한역의 知見 또는 智見) sammappaññā(한역의 正慧)

abhiññā(한역의 神通 또는 智通 등) 그리고

sammāsambodhi(한역의 等正覺이나 正覺 또는 三菩提)로 표현되었다.

 

여기서 ñāṇadassana는 yathābhūta와의 복합어로 흔히 쓰이면서 yathābhūtañāṇadassana는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알고 봄’ 또는 ‘있는 그대로의 보는 것에 따른 지혜’로 풀 수 있다.

 

vipassanā의 목적과 결과는 바로 yathābhūtañāṇadassana에 있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vipassanā는 yathābhūtañāṇadassana나 sammappaññā나 abhiññā

그리고 sammāsambodhi를 성취하기 위한 방법이다.

 

이러한 성취는 불교의 목적이고 모든 수행 체계가

이러한 목적을 향해 매우 조직적으로 체계화되어 있다.

따라서 초기불교의 모든 수행의 문제나 체계는 이를 중심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불교에서 yathābhūtañāṇadassana가 강조되며 그에 다른 말인 sammappaññā나 abhiññā

그리고 sammāsambodhi가 강조되는 이유는 보통의 일반사람들이

‘세계와 존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를 알지도 보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기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아는 것’ 자체가 그대로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지혜(paññā)이고 보리(bodhi)라는 것이다.

 

이렇게 ‘세계와 존재의 있는 그대로’라는 말속에는

‘어떤 것이든 더해진 것도 빠진 것도 없고‘

’그 어떠한 의도도 개입시키지 않아 왜곡되지 않은 상태‘

즉 작위적이거나 인위적인 활동이 배제된 상태라는 뜻이 담겨있다.

 

다시 말해 더하고 빼는 의지의 작용이 쉰 상태를 말한다.

그러한 점에서 인류 역사상 석가모니 붓다는

매우 특별하고 독특한 세계와 존재의 인식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를 조작시키는 의지를 쉬게 하고서 ‘있는 그대로’를 드러나게 하는 방법이었다.

즉 諸行(sabbasaṅkhāra)을 쉬게 하는 것이다.

제행이라는 三行인 身․口․意行 또는 身․口․意 三業이라고도 표현된다¹¹

 

[11) 김재성은 발표장과 그의 웹 사이트에서 身․口․意 三業을

제행의 범위 속에 넣는 것은 “잘못을 범하는 것”으로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하지만 교리적으로 일체(제)가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와 왜 12연기의 두 번째의 행에서

身․口․意 三行만이 언급되는지 그리고 이에 대한 逆觀

또는 滅觀으로서 vipassanā라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경전에서는 五取蘊의 行取蘊의 설명에서

諸行無常(Sabbe saṅkhārā anīcca)라는 말이 사용된다.

(한 예를 들자면 S. Ⅲ. p. 43) 마찬가지로 선학회의 졸고에서 인용한 잡아함의

<伽摩經>에서도 止觀 수행과 관련하여 왜 三行만이 설명되는 이유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있는 그대로가 드러나지 않는 것은 身․口․意의 三行이 끊임없이 작용하여

‘있는 그대로’를 왜곡시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있는 그대로를 보려면 諸行을 쉬어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vipassanā는 제행이 쉬는 조건을 필요로 한다.

그러한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vipassanā는 성립될 수 없다.

 

그리고 여기서 止 즉 samatha는 vipassanā의 전제 조건으로

제행의 활동을 쉬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다.

 

3. 止는 곧 諸行의 滅

 

止 즉 samatha는 제행의 멸을 의미한다.

三業의 제행이 멸하는 것이 samatha의 목표이며 samatha의 완성이다.

 

경전의 많은 곳에서 ‘모든 행을 멸하는 것 자체를 samatha'라 불려지고 있는데

sabbasaṅkharasamatha라는 말이 그것이다.

그로부터 vipassanā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마찬가지로 vipassanā를 마친 후 일상생활로 돌아와 조작이 없고

왜곡 없는 삶으로서 sabbasaṅkhārasamatha의 삶이다.

그래서 열반과 동의어로 또한 無爲 즉 asaṅkhata라는 과거분사형이 사용된다.

이와 동의어를 대표적으로 意行 중심의 ceto samatha라는 말도 쓰이고 있다.

 

또한 saṅkhanūpasama, saṅkharanirodha, saṅkhārānaṁ atthagamo

등의 말로도 모두 行의 쉼이나 멸을 뜻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vipassanā룰 위한 준비조건으로서 samatha는

sabbasaṅkhārasamatha에 대한 통칭 또는 평칭이고

yathābhūtaṁ pajānāti에 대한 통칭 또는 평칭으로는 vipassanā라는 것이다.

 

samatha가 vipassanā을 위한 전제조건의 수행임을 잘 보여주는 것은

三行이 멸해가는 순서와 깨어나는 순서가 일치하는 것을 통해서이다.

 

즉 samatha-vipassanā 수행에 있어 三行은

口行(vacā-saṅkhāra)에서 身行(kāya-saṅkhāra) 그리고 意行(mano-saṅkhāra)으로 멸하고

samatha- vipassanā로부터 일어날 때는 반대의 순서가 된다고 경전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이러한 순서는 다시 samatha와 vipassanā가 四禪과 四念處를

각각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는 것과 일치한다고 강조하였다.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경전의 어느 곳에서나 四禪의 初禪에서 口行이 단절되고

口行과 관련되어 있는 vitakka-vicāra가 第二禪에서 단절된다고 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第四禪에서는 身行의 단절도 호흡이 쉰다고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이는 四念處 수행의 시작이자 기본 토대인 身念處와 엇갈려 연결된다는 점이다.

 

四念處를 설명하는 어떠한 경전에서나 처음의 四念處에서

호흡의 身行이 멸한다고 반복해서 설명되는 것이 그 이유이다.

 

또한 호흡에 대한 수동적 주의집중이 다른 念處수행의 완성을

가져다준다는 중요성에 대해서도 이미 충분하게 설명되었다.

 

마지막으로 意行의 멸을 의미하는

‘受와 想의 멸은 身念處에 이어 受念處 에서부터 멸해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意行이 멸한다는 것은 受와 想의 능동적인 작용이 쉰다는 의미에 있어서도

sati나 satipaṭṭhāna와 관련하여 이미 잘 설명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想受滅定(saññāvedayita nirodha-samāpatti)을 의미하여

18界의 연기에 있어 환멸還滅되는 순서와 정확히 일치하여

왜 受想滅定이라는 말이 아니라 想受滅定이라는 순서로 쓰여지는 가도 설명하였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교리체계는 止와 觀이 차제관계 밖에 될 수 없는 근거로 들고 있다.

想受滅定은 意行의 멸을 의미하는 다른 말이다.

다시 말해 四念處수행에 있어 五蘊의 想과 受가 멈춘다는 의미이다.

 

vipassanā를 위한 준비로서 samatha가 완성된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想과 受가 쉬지 않고서는

결코 존재와 세계가 대상화된 객관적인 관찰대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三行 가운데 意行의 멸로서 諸行의 멸이 완성되는 것으로 마찬가지로 samatha의 완성이며

이는 samatha를 통해 vipassanā로 가는 결정적인 내용이 되는 것이다.

 

이는 왜 samatha에서 vipassanā samatha로

逆行할 수 없는 근본적이고 원론적인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

 

경전 곳곳에서 설명되고 있는 四禪에서 口行의 멸로 시작하여 身行의 멸을 말하는

第四禪이 四念處의 身念處의 연결 고리로 위치하고 있으며

다시 受念處에 있어 意行의 멸을 말하는 一連의 단계를 주의 깊게 읽어 낼 필요가 있다.

 

그리고 四禪 가운데 아직 意行의 멸을 이야기하지 않고

四念處 가운데 口行을 이야기하지 않는 이유도 이러한 점에 있다 할 것이다.

 

4. 觀→止 移行에 관한 재검토

 

현재의 논자는 止觀 차제에 대한 교리적 근거를 제공하면서

如實知見을 중심으로 止觀의 수행구조가 설명되어야 한다는 점과 함께

“止觀의 관계는 먼저 기본적이고 원론적인 측면에서 고찰되어야 한다”라고 전제하였다.

 

그리고 止觀均等․止觀雙修 등의 말로부터 vipassanā를 먼저 닦고

samatha를 이후에 닦는다거나 동시에 닦을 수 있다는데 이의를 제기하였다.

 

하지만 초기불교 경전에 매우 드물게 vipassanā를 먼저 닦고

samatha로 이행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해 주는 경전이 있다.

 

물론 현재의 논자는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이러한 사실을 간과하고 일방적인 止觀 자체를 강조한 것은 아니다.

 

止→觀, 觀→止, 止↔觀의 설명 형식은 거의 상식화된 전통적인 설명 방법인데다

불교 선수행을 다루는 글에서 흔히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지관 次第論을 강조하는 이유도 이 점을 문제 삼고 고민해 왔기 때문이다.

 

觀에서 止를 포함한 위의 3가지의 지와 관의 관계를 말하고 있는 초기불교 경문은

한역 잡아함의 <同法經>과 Aṅguttara Nikāya의 두 개의 경전 정도이다.

 

먼저 한역 <同法經>의 경우 Akanuma Chizen에 의하면 대응되는 빠알리 경전은 없다.

그리고 석가모니 붓다의 친설로 설명되기보다 아난다가 상좌들에게 설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위의 3가지 止觀 수행이 가능하다고 하는 전제 조건에서 한적한 곳이나 나무아래

또는 고요한 방에서 專精思惟가 언급되고 있는 점을 觀→止라 하더라도

이미 止의 禪定이 전제되는 경우로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설하는 대상이 止․觀 수행에 있어

‘기본적이고 원론적인 단계’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보기보다는

오랜 수행 경력을 갖춘 사람에게 칭하는 上座들이었음이 나타나 있다.

 

마찬가지로 Aṅguttara Nikāya의 2개의 경전 가운데도 하나는 한역 <同法經>과 같이

아난다가 비구들에게 설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Akanuma Chizen에 의하면

한역 대응경으로 한역 잡아함의 <度量經>이 제시되고 있다.

 

하지만 “지와 관을 화합해 함께 행하고 이와 같이 바르게 향하고 깊이 머무르면

곧 부림(번뇌)를 끊게 된다” 정도로 전적으로 내용을 달리한다.

 

문제의 이러한 Aṅguttara의 경은 후대 논서 성격의 Paṭisambhidāmagga에 중복되어 나타난다.

경명까지 Yuganaddha로 같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Paṭisambhidā magga라는 용어가 같은 Nikāya 가운데

Dīgha나 Majjhima 그리고 Saṁyutta Nikāya는 나타나지 않는데 반해 오로지

Aṅguttara Nikāya에만 몇 번에 걸쳐 나타나며 그것도 같은 Nipāta에

아주 근접해 위치해 있다는 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觀→止를 이야기하는 또 다른 경 또한 같은 Aṅguttara의 같은

Nipāta에 배치되어 있으며 한역 대응경은 찾아볼 수 없다.

 

대신 같은 Theravāda 부파 소속의 논서인 Puggalapaññati에 중복되어 나타난다.

이렇게 부파적 논서와 겹쳐있는 Aṅguttara Nikāya를 한역 증일 아함과 함께

여러 가지 이유에서 상대적으로 다른 Niāya나 아함보다 그 성립 시기

또는 최후의 편찬 시기가 늦는다는 것은 밝혀지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른 시기의 초기불교 경전과 달리 Aṅguttara Nikāya와

잡아함의 문제의 경전은 늦은 시기에 더해졌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초기불교 경전에서 말하는 전체적인 맥락의 止觀 차제 수행의 내용과는

매우 예외적이기 때문이며 증일 아함이나 Aṅguttara Nikāya 자체가 숫자를 더해가는

도식적인 경전 편찬의 과정에서 당시의 지관의 이해가 부가된 것으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Aṅguttara Nikāya와 내용적으로나 성립시기에 있어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Puggalapaññati 또한 Aṅguttara처럼

다양한 종류의 존재를 도식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주된 내용인데

이러한 경향은 그 이후의 부파적 논서의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더 나아가서 samatha와 vipassanā라는 전문 용어와 쓰임새를 살펴보면 빠알리 경전이나

한역 아함에 있어 이른 층으로 보여지는 경전일수록 아예 나타나지 않거나 그 횟수가 적다.

또한 止觀의 개념에 대해서 구체적인 설명도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전공자에 따라서

“초기불전에서는 止觀이 확립된 수행체계로서 구체적인 서술이 나타나 있지 않다”

라고까지 결론을 내리는 경우도 있는데 무리는 아니다.

 

이에 반해 현재의 논자에 의해 止와 觀은 그 내용에 있어 正定과 正念의 四禪과

四念處로 보아야 한다고 역설되었지만 사실 samatha와 vipassanā가 전문용어로 정착되어

현재와 같이 하나의 쌍으로 대칭 설명되고 있는 것은 Nikāya와 아함이 거의 성립된 시기로 보인다.

 

그렇기에 설령 나타난다하더라도 Nikāya와 아함의 대응경전 간에서도

거의 일치하지도 않은 경우가 많을뿐더러 나아가 구체적인 설명도 없이

samatho ca vipassanā 정도로 간단히 언급된다.

 

그 가운데는 성립시기가 늦은 경전으로 보이는 것일수록 많이 나타나고

그것도 다른 불교 전문 용어들과 함께 도식적으로 法數로 나열되고

그것도 경의 끝 부분에 마치 부록처럼 첨가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止觀 수행에 있어 3가지 형태가 가능하다고 설하고 있는

몇 개의 경전은 모두 止觀이라는 전문 용어가 하나의 쌍으로 대칭적으로

그리고 도식적으로 설명되는 후대에 부가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결국 이러한 경향이 만연해 있었던 부파적 영향을 의심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이 같은 samatha-vipassanā라는 말의 쓰임새 때문에

“止는 四禪을 通稱하는 용어로 觀은 四念處를 通稱하는 평이한 말”로 사용된다고 하는 점을 밝혔다.

 

그러한 구도에서 止觀을 처음부터 동시에 닦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다만 止의 四禪에서 발현되고 완성되는 ‘수동적 주의 집중의 상태’를 말하는

‘念(sati)의 확립 또는 완성(satipaṭṭhāṇa)'의 단계에 가서야 만이

vipassanā가 가능하다는 止→觀의 차제 수행론을 강조하였다.

 

즉 “念이 발현되고 확립되어 작용하기 전에는 결코 온전한

vipassanā 수행이라고 할 수 없다”라고 단정하였다.

이는 vipassanā의 구체적 내용과 방법을 담고 있는 經名인 Satipaṭṭhāna Sutta나

Mahāsatipaṭṭhāna Suttānta에서 이미 시사해 주고 있기도 한다.

 

문제는 두 논평자에 의해 ‘sati의 발현과 확립’만이 vipassanā를 가능하게 한다고 하는

그래서 止→觀의 차제 방향이라고 하는 주장에 대해

sati는 이미 止의 四禪 가운데 初禪부터 있다고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계속해서 그러한 논평 이후에 발표된 최근의 글에서는 'sati의 확립‘만이 vipassanā가 가능하다는

일방적인 止→觀차제 수행의 주장에 의의를 제기하고 sati가 초선에서부터 있다는 것을 들어

관→止 또는 止↔觀이 가능하다는 전통적인 혹은 기존의 입장을 반복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sati가 제삼선에서 언급되는 四禪에서 완성된다는 데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 sati는 初禪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있었다고 양보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제삼선에 이어 제사선에서 sati가 포함되어 표현되는

upekhā-sati-pārisuddhi와 다음의 satipaṭṭhana라는 말이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sati의 청정‘ 다시 말해 ’sati의 완성’과 같은 ’sati의 확립‘을 말하고 있다.

이는 계속해서 四念處의 vipassanā는 경명에서 뿐만이 아니라 내용에 있어서도 분명히

“parimukhaṁ satiṁ upaṭṭapetva"라는 문구가 四念處의 시작마다 반복적으로

설명되고 있다는 맥락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 점인가 하는 점이다.

 

더 나아가 初禪에서부터 sati의 존재를 말하는 것으로 일방적인 止→觀

차제 수행론에 이의를 제기하는데 사용된 전거는 초기불교 경전이라고도 볼 수 없다.

 

Paṭisambhidāmagga는 Nikāya 가운데 마지막인

Khuddaka Nikāya에 배속되어 있지만 사실은 논장의 논서에 들어가야 할 문헌이다.

 

성립시기도 학자에 따라서 대략 AD. 2세기로 보고 있으며 왜 논장이 아닌 Khuddaka Nikāya에

포함시켰는가의 이유에 대해서는 초기불교 문헌 성립사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³⁴

 

[34) 하지만 임승택(앞의 논문)은 학위 논문의 Text로 연구한 Paṭisambhidāmagga의

문헌적 성격을 그의 학위논문에서 논의된 것과 달리

Paṭisambhidāmagga를 초기불교 문헌에 포함시키고 있다.

 

Theravāda라는 부파 논서인 Patisambhidāmagga를 논문의 전거로

<초기불교의 경전에 나타난 사마타와 위빠싸나>라는 제목에서처럼

‘초기불교’라는 용어의 사용은 물론 다음과 같이 문구에서도 또한 잘 나타나 있다.

 

“소위 말하는 초기불교의 ‘正典(canon)'으로 분류되는 4부의 阿含과 5부의 Nikāya는

아비달마논서들에 의한 法分類의 움직임이 정착되기 이전에 성립하였다.

그들 모두는 붓다 자신과 그의 직제자들의 가르침을 집대성한 것이며

늦추어 잡는다고 하더라도 2200년 이상의 장구한 세월을 불교의 역사와 함께 해왔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경전의 권위를 넘어서는 주장을 할 수 있단 말인가?” (p.209)

 

Paṭisambhidāmagga가 Khuddaka Nikāya에 있기 때문에 경전이고 아비달마논서

이전에 성립한 초기불교경전으로 보려는 듯한데 이는 초기불교 문헌의 복잡한 성립사에 대한

기존의 많은 연구를 통해 볼 때에도 분명히 많은 재고가 필요하다.

 

Khuddaka Nikāya는 다른 초기불교 부파의 대응 Āgama와의 관계에서도 알 수 있는 것은

물론 같은 Pāli 전통 내에서도 나라마다 상이한 전통을 갖고 있었으며

특히 Abhidhamma Piṭaka와의 복잡한 관계는 앞으로도 좋은 연구주제이다.

 

아무튼 Paṭisambhidāmagga와 같은 논서는 다른 초기불교 부파에서 인정하지 않는

문헌이었음은 후대의 빠알리 전통의 문헌 스스로 반증하고 있기도 한다.

그리고 이 같은 논서를 담고 있는 Khuddaka Nikāya와 Abhidhamma-Piṭaka의 관계에서

왜 후자가 아닌 전자에 배속시켰는지에 대해서도 이미 오래 전에 연구가 많이 있다]

 

이른 시기의 초기불교 경전 가운데 sati가 初禪에서 설명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다만 공통적으로 네 가지만이 언급된다.

① vitakka(尋) ② vicāra(伺) ③ pīti(喜) ④ sukha(樂)가 그것인데 다시 몇 개의 한정된 경전에서는

cittekaggatā(一心 또는 心一境性)을 더해 pañacaṅgika(五(禪)支)로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sati는 아직 없다.

 

하지만 Patisambhidamagga는 初禪에서 10 가지가 이야기되고 있다.

이른 층의 초기경전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5가지에 五力 또는 五根이 더해져 있는 것이다.

 

이는 지속되는 수행의 과정에 있어 四禪 모두에 五根

또는 五力이 병행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이 같은 초기불교와는 다른 양상의 도식적인 발전은 부파불교가 일반적으로

보여주는 전형적인 법수 체계로서 samādhi와 upekhāsatiparisuddhi로 향하는

四禪의 역동적인 수행 차제 과정을 다소 희석시키는 면이 없지 않나 생각된다.

 

그것은 四念處 즉 vipassanā의 결과인 paññā(般若 또는 知慧)가

四禪의 초선부터 이미 병행하는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왜 후대 불교에서 四禪 속에 止觀均等을 이야기하게 되었는가를 알게 해준다.

 

더 나아가 第二禪에서부터 samādhi가 이루어지는 단계로 초기경전은 설명되는데

반해 初禪부터라고 하는 것은 본래의 四禪 설명과 분명히 배치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四禪과 五根․五力간의 도식적인 배치로 인해 第二禪에 있어 samādhi가 다시

중첩되는 것은 물론 第三․四禪에서는 sati를 중첩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이는 언어의 낭비이다.

 

결론적으로 Paṭisambhidāmagga와 같은 후대 논서로써 초기불교의

止觀 수행 차제 구도에 이의를 제기하며 觀에서 止로 이행할 수 있다고 하는

전거로는 크게 설득력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5. 왜 다시 지관 차제론인가?

 

念(sati)을 ‘수동적 주의 집중의 상태’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것은 ‘일상적인 사유와 감정의 흐름이 단계적으로 쉬게 됨으로써 완전한

평정심에 이르러 sati가 맑고 깨끗해지는 완성에 도달한다’는 第四禪의

upekhāsatiparisuddhi라는 결론적 문구에 四禪의 최종적인 목표가 잘 나타나 있다.

 

그러한 상태는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고 서술하였다.

sati란 “자신을 포함한 일체에 대해 의식적으로나 능동적으로 마음을 내지 않은

상태가 되어 단지 모든 것이 철저하게 대상화되어 있는 상태를 뜻한다.

 

그것은 이후의 vipassanā 수행을 위한 단지 바라볼 준비 태세가 완비되어 있는 상태라 할 수 있다.

따라서 sati 그 자체로서 바로 vipassanā를 의미하지 않는다.

sati의 작용적인 측면을 vipassanā라 할 수 있다.”

 

이러한 sati 개념의 맥락에 따라 satipaṭṭhāna(수동적 주의 집중 상태의 확립)를 설하는

많은 경전에 나타나는 정형구인 kāye kāyānupassī, vedanāsu vedanāupassī,

citte cittāupassī, dhammesu dhammāupassī를

“대상화된 몸․느낌․마음․법을 따라 觀하는 것”으로 옮겼다.

 

몸․느낌․마음․법이라는 말이 모두 처소격으로 사용된 이유는 관찰 대상이

관찰 주관과 일정한 거리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계속해서 anupassī라는 말의 anu라는 접두사가 ···을 따라’라는 의미로 쓰여지기에

‘따라 觀하는 것’으로 옮겨지고 隨觀이라 하기도 하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을 따라 수동적으로 주의집중하는 sati가 바탕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sati의 정의에서 보는 것처럼 관찰 주관이 수동적인 입장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을 쫒거나 찾아보는’ 보는 성격으로서 sati가 아니라는 것이다.

 

반면에 보여지는 관찰 대상은 항상 능동적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관찰 주관은 단지

‘···을 따라’ 수동적으로 바라만 보는 데 반해 그 대상은 능동적으로 움직이고 있으며

이렇게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대상을 따라 그저 응시할 뿐이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점에서 四禪에서 보이는 sati의 위치와 관련해서도 sati를

‘수동적 주의 집중의 상태’로 옮긴 것은 매우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第二禪의 三昧 이후 第三禪에서 sati가 언급되는 것은

‘능동적 주의집중’ 이후에 수동적 주의집중으로 전환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또한 이 같은 정형구 이후 경전의 본론에서 각 念處의 항목마다 반복되는 구절로서

“‘atthi kāyo ti' vā pan'assa sati paccupaṭṭhitā hoti

yāvad eva ñāṇa-mattāya patissati-mattāya."에서도 증명된다.

 

해석하면 “‘몸이 있다’라고 하는 수동적 주의 집중 상태가 확립되어

단지 그러한 사실을 알뿐이고 단지 주의 집중만을 뚜렷하게 할 뿐이다.”⁴¹

 

[41) 번역에 있어 Sampadāna(dative)에 의거한 것이다.

영어의 전치사 for나 to에 해당되는데 그러한 의미에서 mattāya는

‘단지 ~을 위하여’ 또는 ‘단지 ~에’로 옮길 수 있다.

따라서 ‘단지 앎을 위한 것이고 단지 뚜렷한 주의 집중만을 위한 것이다’라거나

‘단지 앎에 있을 뿐이고 단지 뚜렷한 주의 집중에 있을 뿐이다’ 라 옮길 수 있다.

여기서는 후자에 가깝게 옮겼다.

그리고 ñāṇa는 지혜의 수준으로서 앎을 의미고 있고 patissati는 학자들마다

이해가 다양한데 논자 또한 여기서는 예전과 달리 ‘뚜렷하게’라는 말을 첨가하여

patissati가 담고 있는 의미에 접근해보고자 한다]

 

다른 念處에서는 ’atthi kāyo'가 ‘atthi vedanā ti'(이것은 느낌이다)

'atthi cittan ti'(이것은 마음이다) ’atthi dhammā ti'(이것은 법이다)로 바뀌어져 반복될 뿐이며

이는 대상화된 身․受․心․法을 그저 수동적 주의에 의해 분명히 파악하는 상태를 말한다.

 

계속해서 vipassanā의 實數가 설해진 다른 경전에도 이 같은 sati의 정의와

kāye kāyānupassī와 같은 정형구의 해석이 적절함은 증명된다.

그것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자신을 다음과 같이 훈련하여라.

보는데 있어 (무엇이든지) 단지 바라 볼 뿐이며(diṭṭhe diṭṭhamattaṁ bhavissati)

듣는데 있어 단지 들을 뿐이며 (냄새․맛․접촉의) 느낌에 있어서도 단지 느낄 뿐이다.

 

인식하는데 있어서도 단지 인식한다는 것을 알 뿐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자신을 훈련시켜라.

만약 보는데 있어 무엇이든지 단지 볼 뿐이고 ···

단지 인식할 뿐일 때 너는 그것과 함께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하지 않을 때 너는 그것 안에 있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하지 않을 때 너는 그것 안에 있지 않을 것이다.

그것 안에 있지 않을 때 이것과 이것의 너머 혹은 그 사이에도 너는 있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苦滅이라”/Udāna p.8

 

거의 비슷한 경문이 설해져 있는 Saṁyutta Nikāya는 이 같은 행법이 sati의 발현과 소실과 관련하여

교설되는 것을 통해서도 볼 때 sati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sati의 확립’으로 이루어지는 vipassanā 수행을 과연 일상적인 삶 속에서

아무 곳에서나 어느 때에 누구나 행할 수 있는 쉬운 수행법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하는 것이다.

 

있다면 그것은 ‘통속화된 대중적 vipassanā’ 이해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samatha와 같은 예비 조건이 없이는 일상적인 눈[肉眼]으로 보는 것은 번뇌의 봄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想(saññā)의 알음알이에 지나지 않는다.

결코 vipassanā의 般若智慧(paññā)가 아니다.

 

이러할진대 samatha를 거쳐 sati의 확립이 전제되지 않고서 바로

觀→止로 이행할 수 있다는 것은 다시 한 번 재고가 필요하다.

 

왜 대부분의 빠알리 경전에서 八正道에서와 같이 sammā(바른)을 더하지 않는

diṭṭhi의 쓰임새가 그대로 micchā-diṭṭhi(邪見) 뜻하는지 그 의미를 살필 필요가 있다.

 

불교적 견지에 따르면 samatha를 통한 vipassanā 이전의 눈은

단지 무명과 욕망이 투사되어서 보여지는 육안(maṁsa-cakkhu)일 뿐이다.

 

대신 경전에서 法眼(dhamma-cakkhu) 天眼(dibba-cakkhu)

그리고 慧眼(paññā-cakkhu)이 이야기되는데

모두 samatha-vipassanā 수행을 통해 성취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를 앞에서 논의한 2가지 종류의 인식 활동과 대응시킨다면

육안은 sañjānāti와 vijānati로 일상적인 인식 활동에 그리고 abhjānāti와 parijānāti 그리고 pajānāti는

법안․천안․혜안과 같이 수행을 통해 진리를 보는 눈이 트인 인식활동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6. 어떻게 참된 인식은 드러나는가

 

1) pātubhava(드러남)라는 말을 통해서

 

한 마디로 말해서 참된 인식은 수동적 주의 집중이 확립된 상태(satipaṭṭhāna)에서

‘저절로 드러나는’ 인간과 세계의 모습을 인식하는 것으로 이를 바로 vipassanā라 정의할 수 있다.

 

이렇게 ‘저절로 드러나는 있는 그대로’를 인식하는 것을 표현하는 말로

경전의 많은 곳에서 pajānāti가 사용되었다.

 

그리고 pajānāti의 내용 그 자체를 pajānāti의 명사형인 paññā(般若)로 이름 하였다.

그렇다면 경전에서 “있는 그대로 저절로 드러나는 모습”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석가모니가 우루벨라 마을 네란자라 강가의 보리수 아래서

진리 체험을 하고 붓다가 된 후 다음과 같이 감탄사를 남기고 있다.

 

“지극한 마음으로 선정에 든 수행자에게 諸法이 환희 드러날(pātubhavanti) 때

그에게 모든 의혹은 사라져 버린다.

제법의 인연에 대해 참되이 알았기(pajānāti) 때문이다.”

 

이후에 두개의 비슷한 게송이 12연기의 順逆觀과 함께 계속되고 있는데

그것은 順逆의 12연기가 如實知見으로 드러나고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수동적 주의 집중이 확립된 상태로부터 인간과 세계의 있는 그대로 모습이 어떻게

드러나지를 보여주는 좋은 용어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저절로 드러난다’고 옮긴 pātubhavanti이다.

 

이 말의 쓰임새는 ‘세상에 찬란한 빛이 갑자기 나타나듯’

또는 ‘梵神이 하늘로부터 빛과 함께 나타나 듯’

또는 보살의 탄생과 관련하여 ‘하늘로부터 두 물줄기가 나타나는 것’

그리고 ‘전륜왕이 될 사람에 하늘로부터 신묘한 법륜이 나타나는 것’

더 나아가 ‘하늘에 두 번째 태양이 갑자기 나타나는 것’

또는 ‘신통력을 써서 다른 사람 앞에 힘센 사람이 팔을 오므렸다 펴는 순간에

갑자기 나타나는 것’등을 나타낼 때 만 한해 빠알리 경전에서 쓰여진다는 점이다.

 

모두 예상하지 않았던 어떤 것이 갑자기 나타날 때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드러난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여기서 석가모니 붓다에 있어서도 ‘수동적 주의 집중의 확립’에 따라

12연기법이 諸法으로 ‘그대로 드러나’ 正覺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머지 3번째 게송에 있어서는

“마치 태양이 하늘에서 밝은 빛을 비추는 것과 같이 지극한 마음으로

선정에 든 사람은 제법이 훤히 드러난다”라는 비유적인 표현을 쓰고 있다.

 

앞의 인용문에서도 볼 수 있듯이 드러나는 것은 ‘있는 그대로’이고

이를 인식하는 데에 pajānāti라는 말이 사용되었으며 그러기에 그 자체로 paññā임이,

그래서 ‘진리를 인식한 또는 깨달은 사람‘으로 선언하였고

수많은 제자들에 의해 계속해서 증명되었던 것이다.

 

다시 좀 더 구체적으로 ‘수동적 주의 집중의 상태’를 담고 있는 samādhi와 관련 있는

samāhita라는 말이 pātubhavati와 어떻게 쓰이는지를 잘 보여주는 경전 구절은 다음과 같다.

 

“마음의 삼매가 없으면 諸法이 드러나지 않는다.”

(asamāhite citte dhammā na pātubhavanti)/S.Ⅳ. 78.

 

여기서 samāhita라는 말을 삼매로 옮겼지만 주로 四禪의 第二禪에서부터 발현되는 samādhi보다

좀 더 심화된 상태로서 四禪 이후의 三明六通을 설명할 때 정형적으로 쓰여지는 말이다.

 

다시 말해 三明六通은 누진통을 두고 볼 때도 최고의 경지를

나타내는 말로 vipassanā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말이다.

 

결론적으로 깊은 삼매를 통하지 않고서는

‘있는 그대로의 진리의 세계는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드러난다는 것’은 마치 거울이 맑아질 때 갑자기 사물이 드러나는 이치와 비슷하다고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 경전은 마치 옹기에 담긴 물이

움직일 때 얼굴을 비춰볼 수 없는 것에 비유하고 있다.

 

긴 경을 정리해 보면 마음이 감각적 욕망에 들떠 있거나 강한 열망에 사로 잡혀 있거나

미워하고 해치려는 마음과 五蓋(pañca nīvaraṇa)등이 제거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있는 그대로를 인식’할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그와 같은 이치는 바로 옹기에 담긴 물에 갖은 종류의 염색물질이 첨가되거나

불에 덮여져 부글부글 끓을 때, 거품이 일어날 때, 옹기에 이끼나 다른 물풀들이 살 때

휘저어 잔물결이나 소용돌이가 일 때, 바람이 불어 출렁일 때 등으로 세세한 비유를 주고 있다.

 

다만 이러한 상태에서 벗어났을 때만이 자신의 얼굴을 비추어볼 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도 물론 yathābhūta와 pajānāti라는 말이 사용되었음은 두 말할 나위 없다.

적어도 이러한 여덟 가지 마음 상태- 감각적 욕망에 들떠 있거나 강한 열망에 사로 잡혀 있거나

미워하고 해치려는 마음과 五蓋등이 제거되었을 때만이 ‘있는 그대로 바르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2) Samādhi는 Vipassanā의 전제 조건일 뿐.

 

samatha는 samādhi의 시작이며 끝이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四禪의 다른 말로 볼 수도 있으며 이후의 四念處 즉 vipassanā의 전제 조건이다.

이에 앞의 pātubhava와의 쓰임새에서도 증명되지만 좀 더 다른 경구들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비구들이여, 삼매를 닦아라.

깊은 삼매에(samāhita)에 있는 비구는 ‘있는 그대로의 존재(yathābhūta)'를 바르게 알게 된다.”

(samādhiṁ bhikkhave bhāvetha samāhito bhikkhave bhikkhu yathābhūtaṁ pajānāti.)

/48) S.Ⅲ. 14; S.Ⅴ. 414.

 

이러한 문구는 많은 경전의 서문에서 역설되고 있다.

 

samādhi → samāhita → yathābhūta → pajānāti를 samatha -vipassanā라는

말은 쓰지 않으면서 그대로 samatha에서 vipassanā로 발전하는 수행법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즉 samādhi와 samāhita는 samatha를 의미하며

yathābhūta의 pajānāti는 그대로 vipassanā에 적용되는 말이다.

이는 samādhi나 samatha가 vipassanā의 전제 조건이 됨을 분명히 보여준다.

좀 더 결정적인 경구를 들면 다음과 같다.

 

“사념처는 삼매에서 나타나는 것이고 四正斷은 삼매에 부속된 것이다.”

(cattāro satipaṭṭhānā samādhinimittā cattāro sammappadhānā samādhiparikkhārā)

 

samādhi-nimittā를 삼매의 모습이나 모양 또는 삼매의 현상으로도

직역할 수 있지만 문장의 내용상 ‘삼매에서 나타나는 것’이 적절한 번역일 것이다.

 

vipassanā가 samādhi 즉 samatha가 바탕이 되어 나타남을 분명한 문구로 나타내고 있다.

마찬가지로 四禪의 第四禪에 이어 四念處의 身念處에 연결되는

‘호흡에 대한 수동적 주의 집중 상태의 삼매 (ānāpāna-satisamādhi)라는

표현 또한 vipassanā가 samatha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좀 더 체계적으로 그리고 일률적으로 많은 경전에서 설명되고 있는

samatha → vipassanā 차제 수행체제는 먼저 윤리 도덕적인 생활로서

‘戒의 성취 또는 완성’(sīlasampanna)으로 시작하여

善法(kusala dhamma) → 五蓋(pañca nīvaraṇa)의 제거 → 四禪․三昧

→ (三明․六通)→ 如實知見 → 解脫知見으로 마치고 있다.

 

Dīgha 나 Majjhima와 같은 긴 경전은 대단히 긴 분량으로 이와 같은 차제 구조가

잘 설명되고 있으며 Saṁyutta나 Aṅguttara Nikāya같은 경우는

몇 개의 경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부분적으로 설명하거나 아니면 압축해서 설명된다.

 

이러한 정형적인 설명 방식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samatha에서

단계적으로 vipassanā로 이행․발전해 가는 매우 역동적인 구조를 보여준다.

 

마치 12支의 유전연기를 설명하는 방식처럼 조건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五蓋 등을 제거하지 못하면 초선에도 들 수도 없고 如實知見도 할 수 없다고 한다.

이는 오로지 samatha에서 vipassanā로 가는 일방적인 차제 수행 체계임을 나타낼 뿐이다.

 

四禪의 samādhi와 같은 samatha를 결여한 채

일상적인 의식 상태로서는 如實知見의 vipassanā가 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samādhi 수행을 하지 않은 범부는 如實知見할 수 없다고까지 경전은 말한다.

 

止없이 觀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觀의 쓰임새가 해이하게

사용된 예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던 것은 매우 정확하다.

 

7. 진리 인식에 따른 열반․해탈의 구조

 

vipassanā가 목표하는 바는 如實知見이고

주로 yathābhūta pajānāti라는 말로 표현되었음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pajānāti의 명사형이 바로 paññā이듯이

‘있는 그대로를 참다이 아는 것’ 자체가 바로 paññā(智慧)라는 말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 같은 ‘있는 그대로의 진리’는 samādhi 또는 samatha를 바탕으로 발현되고

완성되는 ‘수동적 주의 집중 상태의 확립’(satipaṭṭhāna)으로부터 드러나는 구조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觀에서 止로의 이행은 근본적으로 성립될 수 없음 또한 살펴보았다.

 

다음은 불교의 참된 인식의 목표는 열반‧해탈이다.

이를 향하는 차제 구조를 중심으로 samatha-vipassanā 수행체계의 전반을 살펴보자.

 

먼저 流轉緣起로 시작해서 열반․해탈로 이르는 단계는 다음과 같다.

 

① 12지의 유전 연기에 대한 saddhā (信 또는 苦라는 현실에 대한 확신)

② pāmujja (悅 또는 歡悅 또는 歡 : 작은 수준의 기쁨)

③ pīti (喜 또는 歡喜 중간 수준의 기쁨)

④ passaddhi (輕安 또는 息 또는 止 높은 수준으로 안정되고 경쾌해진 상태)

⑤ sukha (樂 행복감)

⑥ samādhi (三昧 또는 定 또는 寂靜 삼매가 시작)

 

⑦ yathābhūtañāṇadassana (如實知見 또는 見如實 知如實)

⑧ nibbidā (厭離 탐욕과 집착에 대해 싫증)

⑨ virāga (無欲 또는 離貪 탐욕으로부터 이탈하여 탐욕이 없어진 상태)

⑩ vimutti(解脫)

⑪ khayañāṇa(滅盡智)

 

①의 12지의 유전연기에 대한 saddhā는 苦의 현실을

있는 깊이 자각하고 열반․해탈로 나아가는 의미에서 쓰인 말이다.

 

이후의 ②~⑤까지는 初禪의 내용 그대로이고 ⑥ samādhi는 第二禪의 내용으로

이때 시작하여 samatha라는 말로 완성되어 vipassanā의 바탕이 된다.

 

사념처가 삼매로부터 나타난다(cattaro satipaṭṭhānā samādhinimittā)는

표현은 바로 이러한 것을 말한다.

 

여기까지를 第四禪으로 볼 수 있고 ⑦ yathābhūtañāṇadassana가

그대로 vipassanā 수행을 말하고 있다.

 

다음의 ⑧ ⑨ ⑩ ⑪은 모두 열반의 동의어로 사용되는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samatha의 四禪을 걸쳐 ⑦ yathābhūtañāṇadassana에

이르기까지의 vipassanā 차제 구조라는 점이다.

 

그리고 각각의 단계가 paccayā의 다른 말인 upanisā라는 말이 사용되어 뒤의 것은

앞의 것을 이유로 또는 조건으로 나타난다고 하는 차제 구조로 분명히 설명된다.

 

다음으로 언급할 필요가 있는 samatha-vipassanā의 차제구조는 다음과 같다.

앞의 것과 거의 비슷하지만 그것보다는 훨씬 빈번하게 나타난다.

 

① kusalā sīla (올바른 생활, 곧 계를 지키는 삶)

→② Avippatisāra (윤리 도덕적인 문제로 후회하지 않는 것)

③→④→⑤→⑥→⑦→⑧→⑨→⑩은 앞의 경전과 같다.

→⑪ vimuttiñaṇadassana(한역의 解脫知見)

 

마지막의 ⑪은 앞의 경전의 ⑩과 ⑪을 합한 말이다.

앞의 경전과 마찬가지로 해탈로 향하는데 있어 뒤의 것은

앞의 것을 조건으로 나아가는 단계적인 차제 구조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두 경전 모두 四禪를 경유하여 四念處의 yathābhūtañāṇadassana로서

止→觀→般若(paññā)→涅槃→解脫→解脫知見이라는 구도를 확실히 하고 있다.

 

이것은 止의 목적이 觀이고 觀의 목적이 般若智慧를, 그리고 般若智慧는 涅槃解脫이라고 하는

체계로서 vipassanā의 목적이 1차적으로는 如實知見의 반야이며

궁극적으로는 생사윤회의 세계로부터 벗어나는 해탈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줄기찬 如實知見의 vipassanā 수행은 차츰 세계와 존재 -정확히는 五蘊-의

집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지속적인 훈련임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한번의 如實知見으로 열반과 해탈을 단박에 성취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는 如實知見의 般若가 반복되다가 차츰 집착과 탐욕으로부터

멀어지면서 결국 解脫知見임을 선언하게 된다는 구조이다.

 

그래서 수행(bhāvanā : 반복해서 닦아 발전시킨다는 의미)이라는 말이 사용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般若와 涅槃 그리고 解脫이 서로 어떠한 상관관계 속에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결국 불교가 vipassanā를 통해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해탈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열반․해탈의 차제적 성격을 좀 더 역동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경은 다음과 같다.

三學 가운데 계․정․혜의 차제 구도로 분류될 수 있는 8가지 차제 수행 덕목들이 나열되면서

계․정에 해당될 내용은 완전한 또는 궁극적인 경지가 아니고 마지막 8번째 만이라고 설명된다.

 

그리고 매우 중요한 비유로서 Kosala국의 Pasenadi왕이 Sāvatthī성에서 Sāketa성까지 이르는데

7대의 마차를 준비시키고 차례로 번갈아 갈아타면서 마지막 Sāketa에 이른다는 것이다.

 

첫 번째에서부터 여섯 번째 마차도 종착지를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이지만 다만 목적하는 곳의 도상에 있는 것이다.

 

마치 최후의 승자를 위한 릴레이 경주를 연상시킨다.

단계 단계의 완성에 따라 다음 단계로 결국에는 열반․해탈에 이른다는 것이다.

 

止에서 觀으로의 차제 수행의 성격도 바로 이와 같은 역동성에 기초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계를 갖추지 못하면 불교가 의미하는 정을 갖추지 못하고 정을 갖추지 못하면

혜를 갖출 수 없어 결국에는 열반․해탈도 성취할 수 없다는 三學의 엄격한 차제구조가 있는 것이다.

즉 계의 완성이 정의 완성이고 정의 완성이 혜의 완성을 의미한다.

 

이렇게 경전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볼 때 慧를 이루는 觀에서 거꾸로

定의 止로 간다는 것은 마치 자식이 부모를 낳는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전통적으로 三學이 마치 3개의 다리를 가진 가마솥에 비유되는 것도 3개가 모두

열반‧해탈에 없어서는 안 될 ‘필요 충분조건’임을 강조하는 말로 받아들여야 한다.

 

초기불교 이래 현행하는 禮佛文의 시작(五分香禮)에 이르기까지

戒香→定香→慧香→解脫香→解脫知見香의 순서로 정착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따라서 한역 아함의 止觀具足이나 止觀和合具行이라는 말이 계․정․혜 삼학처럼

열반․해탈의 ‘필요 충분조건’이라는 것이지 처음부터 수레의 양 바퀴처럼

또는 새의 두 날개처럼 동시에 닦을 수 있다는 의미의 止觀雙修도 아니고

더 나아가 거꾸로 처음부터 觀에서 止로 이행할 수 있다는 것은 더 더욱 아닐 것이다.

 

8. 진리 인식의 근거

 

vipassanā의 목적은 如實知見이며 이 점은 vipassanā의 실천구조와 성격 모두를 담고 있다.

이것은 ‘봄’ 또는 ‘앎’이라는 인식의 문제로서 어떻게 진리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가하는 점이다.

다시 말해 ‘참된 인식’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로 환원된다.

 

이러한 점에서 인류 역사상에 석가모니 붓다는 그 어떤 종교나 철학체계에서도

제시하지 않는 매우 특별한 인식론과 수행방법론이 제시되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조작․왜곡이 안 된 ‘있는 그대로’를 보자면

먼저 조작․왜곡이 안 된 ‘보는 눈’을 갖추는 기법을 통해서이다.

사실 vipassanā 수행의 실천 구조와 성격의 모든 것은 바로 여기에 담겨있다.

 

‘있는 그대로의 세계’는 바로 진리의 세계로 조작․왜곡이 되어 있지 않다는 의미 그 자체이다.

여기서 조작․왜곡을 의미하는 용어가 바로 saṅkhāra라는 말이다.

五蘊의 行蘊 그리고 十二緣起의 行 그리고 三法印의 諸行無常에 나타나는 말이다.

 

불교 전체가 말하려하는 것은 인간 존재가 行 때문에 ‘있는 그대로 진리의 세계’에

계합하지 못하고 항상 苦로 악순환하는 연기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좀 더 압축한다면 일시적으로나마 samatha-vipassanā는 먼저 조작‧왜곡이 안 된

‘있는 그대로의 존재 상태로 회복시켜 놓는 기법 또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다시 五蘊 가운데 조작․왜곡 활동과 관계있는

‘saṅkhara를 쉬게 하는 것’을 말하며 이는 samatha라는 말로 표현된다.

 

四禪의 第二禪에서 口行의 멸 그리고 第四禪과 四念處의 身念處에 이르러 身行의 멸이 언급되고

마지막으로 受念處에 이르러 意行의 멸이 완결되는 차제로 경전은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三行은 諸行이어야한다.

이러한 諸行의 滅로부터 본격적인 vipassanā가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먼저 saṅkhāra라는 말의 기본적인 의미부터 한번 살펴보자.

saṅkhāra나 saṅkhata(과거분사형)는 원래 어원적으로 ‘하다’ ‘만들다’ ‘작용하다’와

같은 뜻을 갖는 kar[산스끄리뜨의 kṛ]와 관련 있는 말로서

불교경전에서 가장 깊은 의미와 함께 폭넓게 쓰이는 말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samatha-vipassanā수행과 관련하여 먼저 부정형으로 사용되는

asaṅkhata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살펴보면 오히려 saṅkhata라는 말의 이해를 좁힐 수 있다.

 

곧바로 asaṅkhata는 열반이라는 말의 동의어로 쓰인다.

그래서 asaṅkhata에 대한 정의로 탐․진․치 三毒를 멸하는 것이라 한다.

 

四聖諦의 滅聖諦도 열반을 의미하는 것은 탐․진․치 삼독을

渴愛(taṇha)로 묶은 집성제의 소멸이기 때문에 열반이라 한다.

 

여기서 탐․진․치는 saṅkhata로서 그 자체로

‘있는 그대로’부터 조작․왜곡되어진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saṅkhata와 asaṅkhata는 有爲와 無爲로 한역되었는데 대별해 보면 다음과 같다.

 

有爲 : 탐․진․치로 대표되는 조작․왜곡된 세계.

그리므로 조작․왜곡 이전의 있는 그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無爲 : 탐․진․치가 멈추어 조작․왜곡도 멈춘 상태.

그러므로 조작․왜곡 이전의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 계합해 있다.

 

‘있는 그대로’란 아무 것도 더하거나 빼지도 않는 상태로서 비유하자면 ‘

화장하지 않은 얼굴이며 옷을 입지 않은 赤裸裸한 모습이며,

음식에 간을 맞추거나 양념을 뿌리기 전의 날 음식과 같은 상태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화장을 하고 옷을 입고 간과 양념을 쳐

음식을 먹듯이 우리의 의식세계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끊임없이 자신의 입맛대로 존재와 세계에 옷을 입히고

양념을 뿌리는 것과 같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꾸미고 채색하는 능동적인 마음의 작용을

바로 saṅkhāra(行)로 또는 kamma(業)이라는 말로 설명되고 있다.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도 모르게 행위가 일어날 수 있다고 여기고 싶어 하겠지만

사실 거의 모든 행위가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이미 준비가 잘 되어 있고

그에 따라 쉼 없이 활동하고 있다고 불교는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行과 業은 서로 호환될 수 있는 말로서

불교에서 말하는 구제론의 핵심에 놓여있는 말로 사용되는 것이다.

 

行과 業의 활동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전면적으로 수용하기보다는 자신의 입맛 따라

한시도 쉬지 않고 취사선택하여 끊임없이 축소․과장 등과 같은 재편집이 行해지고 있다.

 

거기에는 탐․진․치라고 하는 것이 깊이 뿌리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며

그렇기에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한다.

 

그것은 탐․진․치가 깊을수록 saṅkhāra(行)의 활동도 깊고

또한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대해 조작․왜곡도 깊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 대한 조작․왜곡이 깊을수록 고통도 크다는 것이다.

그래서 止觀 차제수행의 구도에서 먼저 止의 역할이 강조되는 이유는

이러한 saṅkhāra의 활동을 일시적 또는 일정한 기간이나마 쉬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sabbasaṅkharasamatha (모든 행의 활동을 쉬게 하는 것)라는 말이 쓰였으며

四禪과 四念處의 시작까지 三行을 단계적으로 쉬게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쉰다는 것은 조작․왜곡과 같은 능동적인 활동을 쉬는 것으로 그렇게 될 때만이

’수동적인 주의 집중의 상태가 확립‘된다는 것이며 이러한 상태로부터

’저절로 드러나는(pātubhava) 있는 그대로의 존재와 세계에 대한 vipassanā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조작․왜곡이 쉰 ‘눈’을 갖게 된 것이다.

일상적인 의식 상태의 saṅkhāra의 활동과는 다른

지극히 고요하고 안정된 상태로서 이는 samādhi라는 다른 말로도 표현된다.

 

그래서 止觀修行을 ‘조작과 왜곡이 멸한 상태로 가는

실천 수행법’(asaṅkhatagāmī magga)60)이라고 하는 것이다.

 

특히 여기서 중요한 점은 열반이라는 말의 동의어로 asaṅkhata(無爲)는

止觀의 목적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목적을 향한 수단인 수행법도 asaṅkhata적이어야 함을 의미한다.

 

asaṅkhata의 동의어인 열반은 ’asaṅkhata로 지향하는 수행법‘인

asaṅkhatagāmī magga로서 다시 말하면 수단과 방법이 결국 목적이 된다는 것이다.

 

후대의 중국의 黙照禪에서 ’앉아있는 만큼 부처다’라는 말이 바로 이러한 표현이 아닌가 싶다.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samatha-vipassanā수행으로 차츰 asaṅkhata의 無爲가

일상생활로 확장되고 연장되다가 결국 samatha-vipassanā수행의 제약을 넘어

일상생활에까지 완전하게 완성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asaṅkhata의 완성인 sabbasaṅkharasamatha(諸行의 滅盡)가

渴愛의 滅盡등과 함께 열반의 동의어로 쓰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까지는 三行이 단계적으로 쉬어가다가 완전히 쉬는

그래서 vipassanā수행을 가능하게 하는 ‘수동적 주의집중의 상태가 확립’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sabbasaṅkhara samatha의 일상화’는 완성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無爲로 가는 실천 수행법’ (asaṅkhatagāmī magga)으로

sati와 四念處 그리고 止․觀등이 제시되는 것이다.

 

나아가 ‘그 어떠한 조작[有爲]도 일으키지 말라’(nakenaci paccayena saṅkhataṁ)를 비롯하여

열반의 경지를 asaṅkhata라는 말로 설명하는 앞에서 언급한 Udāna의 게송은

인용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너무나도 유명한 것이다.

 

나아가 열반의 경지에 이른 ‘해탈지견의 내용’에 있어서도 saṅkhāra와 saṅkhata와 같은

어원을 갖는 말인 kataṁ karaṇīyaṁ이 뜻하는 바는 ‘더 이상 짓지 않는다’는 뜻으로

아라한이나 붓다의 경지는 조작이나 왜곡이 완전히 멸했음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더 이상 다시 태어날 일이 없는 것이다.

 

III. 마치는 말

 

경전의 많은 곳에서 如實知見은 ‘참된 인식’(sammappaññā)으로

표현되었으며 ‘참된 인식’이란 그대로 ‘완전한 인식’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불교는 그 자체로서 깨달음과 열반 그리고 해탈을 위한 ‘완전한 가르침’이며

그러한 목표에 이르도록 다시 ‘완전한 수행법’인 vipassanā를 제시하고 있다.

 

아니 vipassanā을 중심으로 모든 가르침이 구성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는 다시 계․정․혜의 삼학의 차제적인 수행체계로 압축되었다.

 

불교적인 바른 의미의 정은 항상 계가 바탕이 되어야 만이

그리고 다시 혜는 정이 바탕이 되어야 만이 진정한 혜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난 후에야 바로 涅槃과 解脫과 같은 궁극적인 목표에 이를 수 있다.

 

그러므로 다시 정리하면 불교의 참된 인식의 근거는 如實知見이고 목표는 열반․해탈에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수행되었던 체계가 바로 samatha-vipassanā였으며

그에 따른 ‘참된 인식’의 내용 자체가 般若智慧이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전체적인 맥락은 四禪과 四念處의 念(sati)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고 觀에서 止로 이행할 수 있다는 止觀 이해는

근본적인 의미에서 성립할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확인된다.

 

결론적으로 석가모니 붓다 이래 수많은 사람들이 苦를 멸하고

‘완전한 존재’(아라한․붓다)가 되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vipassanā는

‘해탈론적 혹은 구제론적 실천 방법 또는 실천 체계’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

다르게 이야기하면 vipassanā는 ‘구제론적 인식 방법과 체계’이고 ‘해탈론적 인식 방법과 체계’이다.

따라서 불교는 그 자체로 ‘구제론적 인식론’ 또는 ‘해탈론적 인식론’으로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언급할 필요가 있는 것은 vipassanā는

분명히 후대 종파불교의 산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불교 수행 전통에 있어 근본이며 중심이 되는 수행법이다.

 

석가모니 붓다의 깨달음[菩提 bodhi]과 열반(涅槃 nibbāna)

해탈(解脫 vimutti)의 내용과 성격 그리고 실천체계 그 자체이다.

그리고 그것은 초기불교경전에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후대 종파불교 수행법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방법이라고도 할 수 없다.

만약 후대 불교에 의해 samatha-vipassanā체계가 해이하게 사용되었다고 한다면 바로잡아야 한다.

 

어디까지나 불교 전통에 있는 후대의 모든 수행법의 근거는

바로 samatha-vipassanā체계 내에서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⁶⁵

 

[65) 본 논문이 2001년 7월에 발표된 이래 Vipassanā 관련 웹 사이트

(특히 http://cafe.daum.net/vipassana)에서 많은 비평이 있었음 알게 되었다.

 

대부분 발표 시 참석자들의 질문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지만

그 중에서는 많은 양에 걸쳐 상당히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지적도 찾아볼 수 있다.

이에 감사한다.

 

하지만 모두 본 논문의 전체적인 논지를 재고할 만큼 도움이 되는 주목할 만한 지적은 없다.

하나하나 모두 문제 삼아 거론하지는 못하지만 다음 논문에서 구체적으로 밝힐 작정이다.

여기서는 본 고의 각주에서는 김재성의 경우만을 언급하여 첨가하였다.

이는 충분한 논의가 발표장에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 다시

그의 웹 사이트 상에서 반복적으로 거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외에 김재성과 함께 웹 사이트상에서 졸고에 대해 제시한 몇 가지 이견을

간략하게 언급하면 앞의 홈페이지에 蓮邦竹이라는 이름으로

“윗빳사나와 사띠(정념 samma-sati)는 다릅니다”라는 제하의 글로서 잘못 오해하지

말기를 당부하고 있으나 실은 이 문제는 이미 止觀이라는 말이 한 쌍의 전문용어로

사용하게 되기까지의 문헌 성립사적 검토는 졸고

<초기불교경전에 나타난 수행에 관한 용어와 개념의 검토(Ⅰ):止觀을 중심으로>

(한국선학회 제3호 2001)에서 이루어졌다.

 

다음으로 같은 홈페이지에 효인이라는 이름으로 졸고에 대한

대단히 많은 양에 걸쳐 논평을 길게 해주었는데 다음 논문에서 답변을 할 것이다.

 

다음으로 당시에 필자와 함께 발표했던 임승택의 발표문 <Sati의 의미와 실제>가운데

필자의 주장을 의식한 몇 가지 이의 제기가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그가 논평했던 졸고

<초기불교에 있어 止觀의 문제>(한국선학회 제1호 2000)의

논지를 잘못 파악하고 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간략히 거론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Ⅴ장의 마치는 말에서 필자의 sati 이해에 대해

“sati를 ···第四禪이후로만 국한시키는 우를 범했다.”라고 하며 다시 그가 준비해온 별지에서도

“(1)sati라는 것이 第四禪 이후의 경지에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반복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졸고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은 필자는 분명히 sati는 第四禪

이후의 경지에서 진행된다는 것이 아니라 第三禪에서부터라는 것을 매우 구체적으로

잘 설명하고 있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앞의 졸고, pp. 327 ff.)

 

다만 vipassanā 입장에서 正念, 다시 말해

본격적인 vipassanā 수행은 第四禪이후로 보아야함을 강조하고 있다.

 

필자에 의해 이미 규명된 사실로서 재론할 여지가 없는 것을 자신만의 새삼스러운

발견이라도 되는 듯이 그리고 필자가 큰 우를 범하고 있는 것처럼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다시 “(3)결과적으로 사띠라는 것이 第四禪 이전에도 있는 것이고

이후에도 있는 것이라는 점을 드러낸다.”라고 덧붙이고 있다.

 

여기서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은

“사띠라는 것이 第四禪 이전에도 있는 것이고 이후에도 있는 것”이다라는

그의 주장은 初禪에 들기 전의 일상생활에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sati의 성격을 그는 Ānāpānasati Sutta에 미래시제가 사용된 것을 들어

논자의 ‘수동적 주의집중’으로서 sati 이해 즉 “일상적인 사유와 감정의 흐름이 쉬었을 때

드러나는 의식 상태 또는 마음의 상태”라고 보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이는 이후의 그의 글을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그의 sati 이해는 일상생활 속에

순간순간 의식적이고도 의도적으로 노력을 계속적으로 쏟아 부어야 하는 의지적 활동

-마치 계속적으로 마음을 ‘알아차리고’ ‘챙기고’ ‘제어해야하고’ ‘지켜야하는’ 것과 같은-

자체로서 sati를 이해하고 있다.

 

당시에 이러한 이의에 대해 필자가 반론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아

짤막하게나마 그가 경전 맥락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만 언급하고 말았다.

 

필자는 이에 대해 변함없이 四禪 이전에서는 sati가 발현되지 않는 것으로 본다.

오히려 初禪 이전이나 初禪부터 이미 sati가 작용하고 있다는 임승택 뿐만이 아니라

기존의 일반적인 견해를 재검토해보자는 것이 필자가 주장하는 바이다.

 

사실 본 논문도 이전의 졸고에서 충분히 설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이견이 많아

인식론적인 차원에서 다시 증명해 보이기 위해 본고를 발표하게 된 것이다.

 

필자는 기존의 일반적인 주장과 달리 sati는 四禪의 선정 수행 속에

발현되는 것이지 四禪 이전 즉 五蓋가 활동하는 시점에는 있을 수 없다고 본다.

 

初禪 이전에 五蓋와 sati가 있다는 입장에 대해 앞으로 여러 각도에서 증명할 것이지만 한결같이

필자가 주장하는 바는 五蘊의 想(saññā)에서 般若智慧(paññā)로 전환하는데 있어

관건의 말로 표현되는 것을 바로 sati라 하고 있다.

 

sañjānāti→vitakketi로 緣起하는 流轉緣起의 일상에서 第二禪일 경우

無尋(avitakka)과 함께 第三禪에서 sati가 언급되는 맥락 그리고

‘sati가 확립된 경’으로서의 의미인 Masatipaṭṭhāṇa Suttānta에서

般若智慧(paññā)의 동사형인 pajānāti라는 말이 계속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맥락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치 않는 것이다.

 

더 나아가 불교에서 말하는 世間이란 범부들의 평범한 일상을 의미하며

세간이란 다시 初禪 이전의 五蓋와 함께 하는 流轉緣起의 상태를 뜻한다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교리라 생각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初禪이전이란 五蓋가 관찰 대상으로 분명히 대상화되지 않는 상태이다.

다만 오개와 하나 되어 함께 하고 있으며 오개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sati의 상태란 자신을 포함한 일체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대상화되어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선정수행이 진행되면서 어느 때에

‘의식적으로나 능동적으로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상태’가 갖추어지는 것에 의한 것이며

이로서 단지 바라만 볼 수 있는 형국으로 sati가 이루어진다.

 

즉 ‘능동적 주의집중’에서 ‘수동적 주의집중’으로의 전환이야말로 sati 발현의 관건인 것이다.

다시 말해 보는 자기와 보여 지는 자기로 분명하게 분리된 상태를 말한다.

보는 자기와 보여 지는 자기가 일정한 간격을 이룬 채 명확히 구분된 상태이다.

 

만약 初禪 이전에 이미 이러한 상태라면 굳이 점진적인 발달 체계로서 四禪을 설명할 이유가 없다.

사실 전체적으로 크게 보아 수행이라는 것은

의지적인 노력이 개입되어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역설적인 말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수동적 주의 집중의 상태’는

그러한 의지적인 노력 다시 말해 선정 수행과 같은 노력 후에 도달할 수 있는 경지로서

반드시 능동적인 마음 집중의 의지적 노력이 먼저 요구된다.

 

그리하여 이를 계속적으로 숙련․조건화함으로서 나중에는 쉽게

sati 확립 상태로 진입·유지하여 자신의 삶에 일반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수동적 주의집중’ 상태도 크게 보아서는 精進이라고 하는 힘에 가동되고 있는 것이다.

이를 팔정도에서는 正精進으로 설명하고 있다.

 

더 나아가 임승택의 발표문(p.7)에

“조준호의 주장에는 무리가 따르는 것도 사실이다.

먼저 그는 ‘念으로 번역되는 sati란 八正道의 正念과 다르다”로 시작하여 결론으로

“따라서 조준호가 생각하는 sati란 독창적인 것이라는 점이 분명해졌다.”라면서

“수정해야만 할 상황” “논지가 흔들린” 등의 표현을 자유롭게 계속해서 쓰고 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따로 준비해온 별지에서 八正道에서 正念을

四念處로 설명하는 여러 경구를 친절하게 강독해 주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매우 안타깝게도

그는 이전에 그가 논평했던 졸고의 주요 주장을 놓치고 있다.

 

필자는 "正定(Sammā-samādhi)의 내용은 四禪으로

正念(Sammā-sati)의 내용은 四念處觀으로 분명히 언급된다.

팔정도의 正念이 四念處觀을 의미하는 것은

Mahāsatipaṭṭhāna Suttānta라는 경명과 함께 그 내용에서도 나타난다"

(<초기불교에 있어 ․觀의 문제> pp.325-326)고 분명히 언급하면서

졸고 전채 내용을 이를 바탕으로 전개하고 있다.

 

즉 正定의 내용은 四禪으로 正念의 내용은 四念處觀

그리고 각각 止․觀 차제의 구도로 엄격하게 이루어져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본고와 이전의 논문 발표 이후 여러 가지 점에서 스스로 놀라워하고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아마 필자가 처음으로 正定의 四禪과 正念의 四念處觀을 다시 각각

止觀으로 대응시켜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에 대해 생소하게 받아들이지도 않을뿐더러

이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채 주로 지엽적인 문제에 집중하여

전체적인 맥락이 소홀히 취급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도 필자의 발표와 관련하여 필자를 제외한 인경스님, 임승택, 김재성

등과의 이견이 구체적으로 드러났는데 이는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sati 이해에 있어 필자와 커다란 차이가 있다.

이로서 四禪은 물론 四念處 그리고 止觀의 관계에 대한 이해도 달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본인을 제외한 모두는 선정 수행의 바탕 없이도 sati가 존재하다는 것은 물론

지와 같은 선정 수행의 바탕이 없이도 처음부터 바로 觀을 행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인경스님의 경우 평상시에 心身의 활동을 觀(스님의 표현에 따르면

‘알아차림’)하는 것으로 오히려 禪定에 이른다는 입장이고

 

임승택 또한 마찬가지로 “sati수행을 하고 난 후 止觀수행”을 이야기하고 있어

觀은 물론 止까지도 그렇게 본다.

 

즉 위에서 언급한대로 선정 이전(정확히는 初禪)의 일상에 이미 sati가 존재한다는 식의

그의 이해에 따라 sati와 止觀의 관계를 다른 영역으로 간주하고

sati를 통해 각각 禪定이나 vipassanā를 행하는 것이라는 이해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sati 발현의 중요한 관건으로 第二禪에서 제거된다는 尋伺(vitakka-vicāra)가

初禪은 물론 第四禪에 이어 vipassanā 단계까지 걸쳐있는 중요 요소라고까지 이해하고 있다.

 

분명 일반적인 초기불교경전에 나타나는 이해에 반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논서 성격의 Paṭisambhidāmagga를 초기불교 범위 속에 포함시켜

이를 중심으로 초기불교 수행체계를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止와 같은 선정 수행의 바탕이 없이도 처음부터

바로 觀을 행하여 止로 이행할 수 있음을 설명하려 한다.

 

그리고 김재성의 경우 최근에 발표한 그의 논문에 이르러서야 구체적인 주장을 살펴볼 수 있었는데

그에 따르면 四念處 수행은 四禪과 같은 선정 수행이 전혀 바탕되지 않는

또는 전혀 무관한 수행법으로까지 이해하려고 한다.

 

어떤 의미에서 인경스님이나 임승택 보다도 더 직접적으로

觀 또는 sati 또는 四念處를 통해 四禪에 들어간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는 주)49에서도 논의되고 있지만 필자의 samādhinimittā의 해석에

반하는 그의 주장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49) M.Ⅰ. 301. ; 김재성은 발표 시와 그의 웹 사이트를 통해 이 경문을

“완전히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것으로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즉 nimittā를 ‘원인‘이나 ‘근거’로 해석해야 할 것이라 한다.

이는 간단한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 사념처 수행이 삼매가 바탕 되어 수행된다고 하는

논자의 이해와는 거꾸로 사념처 수행이 바로 삼매를 이루는

원인 또는 근거로 보는 것과 같은 큰 차이가 있다.

 

하지만 이 같은 번역은 초기경전에서의 nimittā의 용례와 함께 삼매가 바탕 되어

사념처 수행을 할 수 있다는 논자의 초기불교 수행론의 이해로 볼 때 크게 문제는 없다.

 

nimittā는 초기불교 수행이론에서 매우 중요한 전문용어 가운데 하나이다.

자세한 논의는 다음 기회로 미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