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哲學/中國哲學

(58)
논나장서論裸葬書 양왕손楊王孫(?-BC133?) 한중漢中 성고城固(지금의 陝西省) 출신으로 언제 태어났는지는 알 수 없다. 전한 중기의 무제 때 인물로 왕손은 字, 이름은 양귀楊貴이며 경조윤 사람이다. 행적 또한 자세히 알려져 있지는 않고 本傳에 약간의 기록만이 전해진다. 일찍이 황로술黃老術을 익히고 양생법養生法을 닦아 상당한 경지에 올랐으나 귀신은 믿지 않았다. 한漢 나라 시절의 반고班固가 지은 에는 장례식에 대한 유명한 문장이 있다. 당시 한무제 때 후한 장례의 풍속이 날로 번성해서 당시의 귀족, 대신, 부호들이 너도나도 후장을 하면서 서로 비교하는 풍습이 만연했다고 한다. 양왕손은 이러한 풍조를 매우 싫어했는데 그는 스스로 나장裸葬(장례를 지낼 때 부장품을 넣지 않고 시신만을 묻는 간소한 장례)을 함으로써 그 폐습을..
<논어論語> 해제解題 해제解題 1. 논어 성립 後漢의 반고班固는 에서 “란 공자가 제자들과 당시 사람들에게 응답한 것과 제자들이 서로 말을 주고받되 공자에게서 들은 것에 관한 말들이다. 당시 제자들이 제각기 기록해놓은 것이 있었는데 공자께서 돌아가신 뒤에 門人들이 서로 모아 논찬論纂하였으므로 그것을 ‘논어’라 부른 것이다.”라고 하였다. 곧 란 공자와 관계가 있는 말[語]을 후대에 문인들이 모아 논찬[論]하여 이룩한 책이라는 뜻이다. 라는 서명이 기록된 가장 오래된 전적은 이다. 에 “에 이르기를 ‘3년 동안 아버지의 道를 바꾸지 않는다면 효도라 할 것이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논어란 공자의 생전 말씀과 잡다한 유자와 증자의 말이 약간 포함된 유교 경전이다. 흔히 공자의 저작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사실 공자가..
공자의 시대적 배경 공자의 시대적 배경 孔子는 기원전 551년에 태어나 기원전 479년에 죽었다. 시대적으로 말하면 春秋時代(BC770-404) 말기에 해당한다. 공자가 생존했던 춘추시대는 주周나라가 이민족의 공격으로 수도를 호경鎬京(長安, 오늘날의 西安 일대)에서 동쪽의 낙양洛陽으로 천도한 시점부터 진晉나라의 대부大夫인 한韓·위魏·조趙 삼씨가 진나라를 분할하여 제후로 독립할 때까지의 시대를 말한다. 孔子가 저술한 역사서 에서 명칭이 유래됐다. 春秋時代에 접어들면서 주왕조의 봉건제도는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했다. 혼란의 시작점은 경제적 혁신이었다. 농사에 소가 쓰이기 시작했고 서양에 비해 수백년이 늦었지만 새롭게 발견된 철이 농기구로 등장했다. 비료를 만들어 쓰기 시작했고 관개 시설이 훨씬 좋아져서 농토에 물을 대기가 쉬워졌..
논어상설論語詳說 논어상설論語詳說 조선 후기의 학자 어유봉魚有鳳이 에 대한 주석들을 넓게 수집·정리한 책. 이 책은 본래 김창협金昌協이 편찬을 계획하여 목록과 편찬체제를 만들고 문인 김시우金時佑와 함께 편찬을 시작했는데 불과 수 편을 정리하고는 김창협이 세상을 떠나자 일이 중단되었다. 김시우는 이 계획이 완성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겨 어유봉을 만날 때마다 이 책의 완성을 권하였다. 어유봉은 스승의 이 같은 권고를 받고 선생의 유업에 착수해 2년 만에 이와 같은 규모의 책을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이 책은 의 편차순서에 따라 편·장의 체제에 맞추어 주석을 모아 편찬하였는데 원문의 장구章句를 표출하고 다음 행을 바꾸어 한 자의 사이를 낮추고 원문 장구에 해당하는 를 그대로 옮겨 실었으며 이어서 다시 행을 바꾸고 한 자를 낮..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 조선 후기의 학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 지은 주석서. 이 책은 정약용이 유배생활을 하던 강진 다산초당茶山草堂에서 1813년(순조 13) 겨울에 완성되었다. 이 저술을 위한 자료 수집은 이보다 앞서 여러 해가 소요되었으며 제자인 이강회李綱會·윤동尹峒 등의 도움이 있었다는 사실이 사암연보俟庵年譜에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의 서명에서 밝힌 바 ‘고금주’란 공자 이후 모든 주석서를 총망라한 것으로서 이를 통해 저자가 이 책에 쏟은 정열의 깊이를 이해할 수 있다. 제2집 제7∼16권에 수록되어 있다. 책머리에 원의총괄原義總括이라 하여 175조항을 들어 각 편 가운데서 변명辨明하려는 요지要旨를 설명한 뒤 각 장章의 全文을 싣고 그 아래에 고금학자들의 주註를 모아 보충 또는 반박反駁하였다. 간간이..
논어정의論語正義 논어정의論語正義/유보남 유공면 ►유보남劉寶楠(1791-1855) 청나라 강소江蘇 보응寶應 사람. 자는 초정楚楨, 호는 염루念樓. 도광道光 20년(1840) 진사가 되었다. 文安縣令과 삼三河知縣 등을 지냈다. 젊었을 때 숙부 유태공劉台拱에게 수학했고 毛詩와 정현鄭玄의 예학禮學을 깊이 연구했다. 유문기劉文淇와 이름을 나란히 하여 ‘양주이류揚州二劉’로 불렸다. 유문기劉文淇, 매식지梅植之, 포신언包愼言, 유흥은柳興恩, 진립陳立과 함께 경전을 연구했다. 특히 에 정밀했는데 황간皇侃, 형병邢昺의 주소注疏를 배척했다. 하안何晏의 를 저본으로 삼고 역대의 설을 망라하여 초순焦循의 를 모방해 를 저술하다가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 아들 유공면劉恭冕이 父業을 계승해 완성했다. 그 밖의 저서에 와 등이 있다. ►유공면劉恭冕..
논어집주/주희朱熹 논어집주/주희朱熹 宋나라의 朱熹가 논어의 장구章句에 대한 先代 學者들과 自己의 주석註釋을 모아 엮은 책이다. ►주희朱熹(1130-1200) 주희의 자는 원회元晦, 중회仲晦, 호는 회암晦庵, 회옹晦翁, 운곡산인雲谷山人, 창주병수滄洲病叟, 둔옹遯翁 등이 있다. 福建省 우계尤溪에서 출생했다. 선조는 대대로 안휘성安徽省의 휘주무원徽州婺源의 호족으로 아버지 주송은 관직에 있다가 당시의 재상宰相 진회秦檜와의 의견충돌로 퇴직하고 우계에 우거寓居하였다. 주희는 이곳에서 14세 때 아버지가 죽자 그의 유언에 따라 호적계胡籍溪, 유백수劉白水, 유병산劉屛山에게 사사하면서 불교와 노자의 학문에도 흥미를 가졌었다. 그러나 주희는 24세 때 연평延平 이통李侗을 만나 사숙私淑하면서 유학에 복귀하게 된다. 다시 1158년에 주희는 ..
논어주소論語注疏/형병邢昺 논어주소論語注疏/형병邢昺 는 논어를 쉽게 이해하도록 만든 주석서다. 의 구성방식은 각 편이 시작되는 첫머리에 해당 편의 대의를 제시하는데 이것을 '疏'라고 부른다. 그리고 논어 원문을 제시하고 원문 각 구절에 의 注를 붙였다. 그리고 논어 원문에 대한 '疏'를 붙였는데 여기서는 각 장의 대의를 제시하고 글자나 어구를 설명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의 注를 설명하는 '疏'를 붙였다. 남송 말엽 十三經에 대한 권위 있는 주석을 골라서 국가사업으로 를 간행했다. 이때 삼국시대 위나라 하안何晏의 와 논어집해를 상세하게 부연하고 고증한 형병邢昺의 를 대표 주석서로 선정했다. 이 두 책을 합본해서 을 만들었고 보통 라고 부른다. ​ ‘주注’는 經典의 난해한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注釋을 뜻한다. 막힌 水路에 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