寒山詩 39
관거유은처慣居幽隱處 그윽한 곳에 숨어 사는 것 익숙해져
사향국청중乍向國淸中 잠깐씩 국청사를 찾아간다
시방풍간도時訪豊幹道 가끔씩은 풍간을 찾아가는 길에
잉래간습공仍來看拾公 바로 습득을 찾아보기도 한다
독회상한암獨回上寒巖 홀로 돌아오며 한산에 오르며
무인화합동無人話合同 마을 열고 이야기 나눌 사람 아무도 없다
심구무원수尋究無源水 발원지 없는 물길을 찾아보니
원궁수불궁源窮水不窮 발원지는 다해도 물길은 끝이 없다
깊은 곳 숨어살기 길들었지만
문득 국청사國淸寺로 향하네.
때로는 풍간豊干노인 방문도 하고
온 김에 습득공拾得公도 만나보네.
홀로 돌아서서 한암寒巖에 올라오면
합동合同 말할 이 아무도 없네.
근원 없는 물 찾아 밝히니
근원은 끝이 있어도 물은 끝이 없네.
►사乍 잠깐. 잠시暫時. 언뜻. 별안간.
►국청國淸 국청사國淸寺.
절강성 천태현 북쪽 12km 떨어진 곳에 있는 절로 천태산 남쪽 기슭에 있음.
►풍간豊干 국청사의 스님.
►습공拾公 습득拾得. 한산의 친구.
►잉仍 인因하다. 어떤 사실로 말미암다.
►심구尋究 찾아서 밝힘.
한산은 ‘한암寒巖’에서 살았다고 한다.
다음과 같은 전거典據가 그 근거가 된다.
천태天台의 당흥현唐興縣 서쪽 70리에 한암寒巖이라는 곳에 은거했다.
/寒山子詩集序 閭邱胤
시풍현始豊縣에서 서쪽으로 70리 떨어진 곳에
한암寒巖과 명암明巖의 두 암이 있는데 한암에서 살았다/景德傳燈錄
천태산의 취병산翠屛山에 숨어살았는데
그 산은 깊고 험하여 여름에도 눈이 있어 한암寒巖이라 하였다./太平廣記
또 전학렬餞學烈은 한암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한석산寒石山에는 한암寒巖과 명암明巖이라는
천연 바위 동굴을 각각 지니고 있는 두 암이 있는데 ····
한암은 하나의 독립된 바위 동굴을 이루고 있는데 ····
입구는 산 중턱에 있으며 ····
동굴 내부는 넓고 평탄하여 대청大廳 같은데 ····
수 백 명이 있을 만하다.
한산습득시교평寒山拾得詩校評
동굴 내부에 샘이 하나 있는데 지금도 물은 차가우며 달다.”
한산은 이런 한암寒巖이라는 동굴 속에서의 은거 생활에 습관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가끔씩 갑자기 풍간스님이나 습득이 보고 싶으면 국청사로 찾아갔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깊은 곳 숨어살기 길들었지만
문득 국청사國淸寺로 향하네.
때로는 풍간豊干노인 방문도 하고
온 김에 습득공拾得公도 만나보네.”라고 노래했다.
풍간은 한산과 습득을 알아본 국청사 스님으로
한산을 문수보살의 현신現身, 습득을 보현보살의 현신이라고 했다.
국청사의 부엌에서 아궁이에 불 때는 일을 맡아보던 습득은
한산의 친구로서 먹을 것을 마련해 두었다가 그가 오면 주곤 했다고 하다.
풍간스님과 습득을 만나보고는 다시 한산은 홀로 돌아서서 국청사를 나선다.
그리고는 한암 동굴 안에 들어와 선정禪定에 든다.
거기서는 자기 혼자만 있으니 ‘합동合同’에 대해 같이 얘기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런데 ‘합동合同’은 무슨 뜻일까?
한산시에 주석을 단 전학렬餞學烈은
‘합동合同’이 불교용어로 ‘평등平等’과 대등한 말이라고 했다.
불교에서 ‘평등’ 또는 ‘평등성’은 ‘만물에 공통적인 것’
즉 ‘모든 현상을 꿰뚫는 절대의 진리’를 의미한다.
그것은 ‘진리 그 자체’요 ‘차별이 없는 세계’이다.
다른 말로 하면 ‘진여(眞如. tathatā)’이다.
그러므로 “합동合同 말할 이 아무도 없네.”는
‘선정禪定에 들어 체험한 평등성 곧 진여에 대해 함께 말할 사람 아무도 없네.’라는 뜻이다.
이 시구는 그 다음 두 시구를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근원 없는 물 찾아 밝히니
근원은 끝이 있어도 물은 끝이 없네.”
‘근원 없는 물[無源水]’은 무슨 의미일까?
‘근원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고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물’
혹은 ‘근원이 불가사의不可思議하여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곳에서 흘러나오는 물’의 뜻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한산은 그 ‘근원 없는 물’의 근원도 찾아 그 끝을 본 것이다.
그래서 “근원은 끝이 있어도 물은 끝이 없네.”라고 했다.
물의 근원을 찾아 그 끝을 보았는데 거기서 흘러나오는 물은 끝이 없다는 얘기다.
‘물’은 무엇을 상징한 것일까?
앞의 시구 “합동合同 말할 이 아무도 없네.”로 보아
한산은 평등성 즉 진여의 경지에 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
진여는 만물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거기서 흘러나오는 ‘물’은 ‘진여에서 나오는 힘’을 가리킨다.
그 힘은 무한하다.
그것은 만물을 창조하고 운행하는 힘이다.
이 힘은 아무리 써도 결코 고갈되지 않는다.
장자는 이 힘이 나오는 곳을 ‘하늘의 보배창고’에 비유했다.
“누가 말로 나타낼 수 없는 말, 도道로 나타낼 수 없는 도를 아는가?
만약 그것을 알 수 있는 자가 있다면 이를 하늘의 보배창고[天府]이라 할 수 있다.
거기에는 아무리 퍼부어도 가득 차지 않고 아무리 퍼내어도 고갈되지 않는다.
그런데 왜 그런지는 알지 못한다.
이것을 감추어진 빛[보광葆光]이라 한다.”/<莊子 齊物論篇>
/innerlight34님의 블로그
한산시를 읽는 관점은 여럿이다.
眞僞와 出處의 모호함에도 한산시는 역사물이다.
후대로 갈수록 禪家와 문학 방면에서 그 족적이 나타난다.
그 족적들은 점점 美化되어 진실의 옷을 입는다.
사실 근거가 빈약함에도 고정관념으로 편입된 것이다.
왜? 그래 왔으니까.
무엇보다 사용한 흔적들이 역력하니까.
뼈를 세우고 살을 붙이는 것은 일도 아니다.
현실은 돌아볼수록 참혹하고 감당이 안 된다.
신선을 동경하고 得道하고저 하는 마음은 현실을 앞선다.
물은 흐르고 山은 우뚝하며 구름은 흩어진다.
그 속에서 무엇을 하려고 꼬물거린다.
생각은 쉽고 행위는 어렵다.
쑥대밭 되기 십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