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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詩/도연명陶淵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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晦峯 河謙鎭의 <和陶詩>와 東坡 蘇軾의 <和陶詩> 比較硏究 晦峯 河謙鎭의 和陶詩>와 東坡 蘇軾의 和陶詩> 比較硏究/이영숙李永淑 경상대학교 한문학과 회봉과 동파는 몇 백년의 간극을 뛰어넘어 ‘和陶詩’라는 하나의 시형식으로 遭遇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도연명이라는 인물의 도덕적 청렴함과 인품의 고결함, 은자로서의 삶에 같은 공감대를 느끼며 ‘화도시’를 짓게 되었고 특히 회봉은 소동파에게도 상당히 경도되어 있었는데 이도 화도시를 짓는 하나의 動因이 되었다.  시대의 간극을 뛰어넘고 ‘화도시’로 만난 이들은 각자 처한 시대와 현실에 고민하고 갈등하며 그 내면적 고뇌들을 시에 加減 없이 담아내었다.  그러므로 ‘화도시’는 그들의 정신적 고뇌의 산물이면서 한편으로는 현실의 고민과 갈등을 해소해가는 일종의 정신적 해방구이기도 하였다.  회봉은 화도시에서 유학자로의 자세를 견지..
회봉晦峯 화도시 회봉晦峯 화도시하겸진의 자는 숙형叔亨 호는 회봉晦峯 본관은 진양晉陽으로 1870년 진주晋州 사곡리士谷里에서 태어났다.그가 출생한 시기는 1866년 병인양요로 인해 위정척사 운동이 확대되던 시기였다.나라가 일제에 의해 강제 병합된 후에 회봉은 파리 장서 사건과 2차 유림단 사건에 관여해 두 번의 옥고를 치렀다.그러나 그가 궁극적으로 추구한 것은 道를 부지하고 지켜서 후일을 기약하는 것이었다. 망국이라는 시대적 상황 앞에서 회봉은 지식인으로서의 소명을 항일과 저술 활동, 후학 양성으로 나타내었으며이러한 그의 의식들은 문학에 그대로 녹아들어 한문학의 종장을 갈무리하는 문학적 결정으로 승화되었다. 화도시和陶詩는 도연명의 시에 화운한 시를 말하는 것으로 중국의 송대 동파 소식이 처음 시도한 시 형식이다.소식이 화..
호방한 작풍, 거침없는 필치 - 소동파의 시 호방한 작풍, 거침없는 필치 - 소동파의 시/ 류종목(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올해도 서른 명의 소동파가 나왔다"올해도 서른 명의 소동파가 나왔다." 이것은 고려 시대의 문학가 이규보가 그의 에인용한 것으로 당시 과거 시험 합격자를 발표하는 날이면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던 말이라고 한다. 서른 명이라고 한 것은 과거 시험 합격자의 수인 33명을 개략적인 숫자로 나타낸 것이니당시 젊은 학자들이 과거에 합격하기만 하면 모두 소동파蘇東坡의 시풍을 배우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이 말은 과거에 합격하기 전에는 시험 준비로 시간을 낼 수가 없어서 부득이하지만 일단 과거에 합격하기만 하면그때부터 너도나도 소동파의 시풍을 배우기에 여념이 없었던 고려 문단의 기풍을 엿보게 하거니와조선 시대의 대학자 김종..
소식蘇軾 차운시次韻詩의 특징 소식蘇軾 차운시次韻詩의 특징文學碩士 學位論文 서울大學校 大學院 中語中文學科 文學專攻 이다연李多娟 2016年 8月 【국문초록】차운시次韻詩는 화운시和韻詩의 일종으로 原詩의 운자를 순서대로 사용하여 창작한 시를 말한다. 차운시는 唐代의 원진과 백거이로부터 시작되었고 만당晩唐의 피일휴와 육구몽이 적극 받아들여 주변 문인들과 함께 실천함으로써 하나의 詩體로 굳어져갔다.  이후 宋代 초기에는 서곤파西崑派의 등장으로 화의불화운和意不和韻의 풍조를 이루다가 구양수와 매요신 등의 문인들이 다시 차운시를 활발하게 짓기 시작했다. 이것은 소식에 이르러서는 보편화되며 송대 사대부들의 유희를 통한 교유를 만족시켜 주는 놀이 수단이 되었다.이 시기에는 교유시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차운의 교유적 기능과 맞물려 차운시가 성행하는 모습..
발자첨화도시跋子瞻和陶詩 발자첨화도시跋子瞻和陶詩도연명陶淵明의 시에 화답和答한 시’에 간략하게 쓰다./황정견黃庭堅 자첨적령남子瞻謫嶺南 자첨이 영남으로 폄적된 것은시재욕살지時宰欲殺之 당시의 재상이 죽이려고 그런 것인데포끽혜주반飽喫惠州飯 그는 외려 혜주 밥을 배불리 먹고세화연명시細和淵明詩 도연명의 시마다 세세하게 화운했네. 팽택천재인彭澤千載人 도팽택은 천년토록 길이 남을 사람이요동파백세사東坡百世士 소동파는 백대에 길이 남을 인사라네.출처수부동出處雖不同 출사하고 은거한 차이는 있었지만풍미내상사風味乃相似 풍미로 말하자면 둘이 서로 닮았다네.  소식蘇軾이 영남嶺南으로 귀양 가니당시의 재상宰相이 그를 죽이려 했네. 그는 혜주惠州의 음식을 배불리 먹으면서도연명陶淵明의 시에 꼼꼼하게 화답했네. 도연명은 천년에 한 번 나올 만한 인물이요동파는 오..
화도시和陶詩 화도시和陶詩 도시陶詩에 화운和韻하다도시陶詩는 도연명陶淵明(도잠)의 시를 말하는데 대개 자연스럽고 한적한 정취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 화도시和陶詩 즉 화도연명의고和陶淵明擬古 시는 도잠의 시에 화운和韻한 시를 말하는데 송대宋代 시인 소식蘇軾(소동파)에 의해 시도된 형식이다.  지금까지 동양의 많은 문인들이 화도시를 지었는데 이것이 일종의 문학적 유희로 몇 수를 짓는 데 그치는 경우도 있었지만 多作으로 하나의 편篇을 형성할 정도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도잠이라는 인물이 보여준 出處에 대한 모범적 자세뿐 아니라 인간으로서 보였던 절제된 인격미, 인간과 자연의 合一로 나타나는 그의 문학성 때문에 그의 시문은 후대 문인들에게 모방의 대상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1수 이상 화도시를 지은 문인들은 약 67人이며 도잠의..
부끄러워서 이름을 바꾼 도연명 부끄러워서 이름을 바꾼 도연명시인 소동파는 도연명을 중국 역사에서 최고의 시인이라고까지 했다.심지어 시선 이백도, 시성 두보도 도연명의 경지에는 닿지 못했다고 하였다.이렇게 훌륭한 도연명도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공무원이 되어 마음고생을 심하게 한 적이 있었다. 도연명은 동진에서 365년에 태어났다.맏아들 엄儼이 출생한 393년에 지방관인 강주江州의 주제주州祭酒로 공무원에 첫발을 내디뎠다.제주는 학교행정을 담당하는 교육공무원의 직책이었다. 두 번째 출사出仕는 7년 후인 400년에 군벌 환현桓玄의 막부幕府에서 참군參軍의 직책으로 일했다.참군은 참모군무의 줄임말인데 군사軍事의 참의관參議官이다. 장군과 늘 소통하는 직책이다. 당시 환현에 대해서는 불안한 시대를 평정할 인물이라는 평판이 있을 정도로 기대감이 ..
남사南史·은일전隱逸傳·도잠陶潛 남사南史·은일전隱逸傳·도잠陶潛/당唐 이연수李延壽(?-?) 도잠자연명陶潛字淵明 혹운或云 도잠은 자가 연명인데, 어떤 사람은 이르기를,자심명字深明 명원량名元亮 “자가 심명이고, 이름이 원량이다.” 하였다. 심양시상인尋陽柴桑人 진대사마간지증손야晉大司馬侃之曾孫也 심양 시상 사람으로, 진나라 대사마 도간의 증손이다. 소유고취少有高趣 택변유오류수宅邊有五柳樹젊어서부터 고상한 뜻이 있었는데, 집 가에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가 있었다. 고상저오류선생전운故常著五柳先生傳云 그래서 일찍이 을 지어 다음과 같이 읊었다. 기자서여차其自序如此 개이자황蓋以自況 그가 직접 저술한 것이 이와 같았는데, 자신을 비유한 것으로시인위지실록時人謂之實錄 당시 사람들은 그것을 사실의 기록이라고 하였다. 친로가빈親老家貧 기위주제주起爲州祭酒 모친은 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