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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조론肇論

조론肇論 물불천론物不遷論 ⓶

조론肇論 물불천론物不遷論 ⓶

현상을 어떻게 관찰할 것인가?

 

여기서는 속제가 진제와 상즉한 점을 논변하여 이를 관찰할 대상의 세계로 하였다.

‘物’이란 관찰할 객관인 현상의 만법을 지적하였고 ‘不遷’은 모든 만법의 자체는 성공실상인데도

일상적인 범부의 허망한 마음으로 모든 만법을 보면 흡사 천류함이 있는 듯도 하다는 말이다.

 

만일 반야로써 이를 관찰한다면 모든 법의 실상은

당체가 寂滅한 眞常이어서 끝내 천류하며 움직이는 모습이 없다.

 

이른바 본문에서 ‘움직이면서 구를 만한 법은 하나도 없다.’한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의타기로 연생하는 제법은 자체가 性空이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만법마다의 당체가 본래 스스로 천류하지 않는 것이지

현상의 차별적인 모습은 천류하나 그 자성은 천류하지 않는다 함은 아니다.

 

이처럼 사물마다 천류하지 않는다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사물에 나아가 바로 진여의 성공인 것이다.

 

사물의 자체가 진여의 성공이라면 허망한 마음에 해당할 만한 법은 끝내 하나도 없다.

이러한 이치로서 속제를 관찰한다면 속제가 바로 진제이다.

 

실로 진여성공의 전체 이치로써 현상의 사물을 이루었으므로 사물마다 모두가 진여이다.

모든 법의 성공실상이 여기에서 나타났다 하리라.

 

論主인 승조는 <유마경·법화경>을 으뜸으로 삼고 제법의 성공실상을 심오하게 깨달았다.

그리하여 <물불천론>은 속제에 해당 시키고 천류하지 않는 속제에 나아가서

바로 진여성공이라 하였으니 <물불천론>의 종지가 환하다 하리라.

 

 

[原文]

부생사교사夫生死交謝 대저 생사가 교대로 뒤바뀌고

한서질천寒暑迭遷 한서가 번갈아 천류하면서

유물유동有物流動 사물은 움직이면서 유전함이 있다 함은

인지상정人之常情 사람의 일상적인 감정이다.

여즉위지불연余則謂之不然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하자何者 방광운放光云 왜냐하면 <방광반야경>에서 말하였다.

법무거래法無去來 제법은 현재가 과거로 흘러가지도, 과거가 현재로 흘러오지도 않는다.

무동전자無動轉者 (제법은 無動하기 때문에)시간의 흐름을 따라 움직이면서 전변함도 없다.

(제법은 제 위치에 안주하여 세간의 모습이 변치 않고 영원히 안주한다./<법화경>)

 

심부부동지작尋夫不動之作 <방광반야경>에서 말한 ‘움직이지 않는다.’ 했던 것을 연구해 보자.

기석동이구정豈釋動以求靜 어찌 움직이는 것을 버리고 고요함을 찾았겠는가.

필구정어제동必求靜於諸動 반드시 움직이는 모든 현상의 모습에서 고요한 眞空을 구해야만 한다.

 

필구정어제동必求靜於諸動 반드시 제법이 움직이는데서 고요함을 구해야만 한다.

고수동이상정故雖動而常靜 고로 비록 움직이지만 항상 고요하고

불석동이구정不釋動以求靜 움직임을 버리지 않고 고요함을 구하기 때문에

고수정이불리동故雖靜而不離動 비록 고요하나 움직임을 떠나지 않는다.

(보리의 도량을 떠나지 않고 일체의 세계에 보편한다./<화엄경>)

 

연즉동정미시이然則動靜微時異 그러한즉 動靜이 처음부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혹자부동而惑者不同 그런데도 미혹한 범부는 動靜이 동일하지 않다고 한다.

 

연사진언체어경변緣使眞言滯於競辯

이 때문에 진리의 말씀은 시비를 다투어 변론하는 데서 막히고

 

종도굴어호이宗途屈於好異

종지로 통하는 길이 부질없이 動靜이 다름을 좋아하는 데서 굴복을 당하게 하였다.

 

소이정조지극所以靜躁之極 미역언야未易言也

그런 까닭에 動靜이 둘이 아닌 극치의 경지는 말을 하기가 쉽지 않다.

 

하자何者 부담진즉역속夫談眞則逆俗 왜냐하면 진리를 담론하면 세속의 속된 견해를 거슬리고

순속즉위진順俗則違眞 세속적 견해를 따르자니 진리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위진고미성이막반違眞故迷性而莫返

진리에 위배되기 때문에 본성에 미혹하였는데도 근원으로 돌아올 수 없고

 

역속고언담이무미逆俗故言淡而無味

세속적인 견해를 거슬리기 때문에 말이 담담하여 맛이 없다.

 

연사중인미분어존망緣使中人未分於存亡

이 때문에 보통 근기의 사람은 도가 있는지 없는지를 분간하지 못하고 반신반의하고

 

하사무장이불고下士撫掌而弗顧

최하근기의 사람은 손뼉을 치면서 비웃으면서 되돌아보지도 않게 되었다.

 

근이불가지자近而不可知者 기유물성호其唯物性乎

가까우면서도 알지 못할 것은 사물의 본성이리라.

 

연불능자이然不能自已 료복기심어동정지제聊復寄心於動靜之際

그러나 이 문제를 그만두지 못하고 부족한 대로나마 마음을 動靜의 즈음에 의탁해 보긴 하겠지만

 

기왈필연豈曰必然 어찌 나의 말이 꼭 그렇다고 긍정하겠는가.

시론지왈試論之曰 시험 삼아 이를 의론해 보겠다.

 

도행운道行云 <도행반야경>에서 말하였다.

제법본무소종래諸法本無所從來 제법은 본래 과거에서 현재로 흘러 온 유래가 없으며

거역무소지去亦無所至 (인연이 흩어지면 사라지기 때문에) 과거로 흘러간다 해도 이를 곳이 없다

 

중관운中觀云 <중관론>에서 말하였다.

관방지피거觀方知彼去 갈 방향을 관찰하고 그가 간다는 것을 아나

거자부지방去者不至方 가는 자는 끝내 그 방향에 이르지 못한다.

(방향을 초월한 절대의 방향은 방향이 없으므로 본래 단정적인 방향이란 없다.

그런데 방향을 향해 가는 사람은 어느 방향이라고 허망하게 지적하나

실제론 이르러 갈 만한 단정적인 방향이란 없다)

 

사개즉동이구정斯皆卽動而求靜 이는 모두가 제법의 움직임에 나아가서 고요함을 찾은 것이다.

이지물불천以知物不遷 명의明矣 이로써 사물은 천류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부인지소위동자夫人之所謂動者 대저 사람들은 소위 움직이며 변화한다라고 말들 하는데

이석물부지금以昔物不至今 이는 과거의 사물이 현재에 이르러 오지 않기 때문이다.

고왈동이비정故曰動而非靜 고로 ‘움직이면서 고요하지 않다.’라고 한다.

 

아지소위정자我之所謂靜者 내가 말하는 사물은 움직이지 않고 고요하다 함은

역이석물부지금亦以昔物不至今 과거의 사물이 현재에 이르러 오질 않기 때문이다.

고왈정이비동故曰靜而非動 그러므로 ‘사물은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는다.’ 라고 말한다.

 

동이비정動而非靜 사람들이 움직이며 고요하지 않다라고 한 것은

이기불래以其不來 과거의 사물이 현재로 흘러오지 않았기 때문이며

정이비동靜而非動 내가 사물이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는다 한 것은

이기불거以其不去 현재의 사물이 과거에로 흘러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즉소조미상동然則所造未嘗同(異)

이와 같다면 일반 사람과 내가 나아간 대상은 아직 차이가 나지 않았는데도

소견미상동所見未嘗同 이를 보는 견해는 일찍이 동일하지 않았다.

 

역지소위색逆之所謂塞 순지소위통順之所謂通

진리를 거역함을 막힘이라 말하고 진리를 수순함을 통함이라 말한다.

구득기도苟得其道 부하체재復何滯哉 굳이 그 도를 체득하기만 한다면 다시 무엇에 막히랴.

 

상부傷夫 한심스럽구나.

인정지혹야구의仁情之惑也久矣 사람들의 허망한 마음의 미혹함이 오래 되었음이여

목대진이막각目對眞而莫覺 눈으로 진상의 도를 마주하면서도 깨달을 수 없다니 ···

 

기지왕물이불래旣知往物而不來 과거의 사물이 현재로 흘러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위금물이가왕而謂今物而可往 현재의 사물이 과거로 흘러간다고들 말한다.

 

왕물기불래往物旣不來 과거의 사물이 현재로 오지 않았다면

금물하소왕今物何所往 지금의 사물인들 어디로 흘러가겠는가.

 

하즉何則 왜냐하면

구향물어향求向物於向 과거의 사물을 과거에서 구해 보았으나

어향미상무於向未嘗無 과거에 일찍이 없지는 않았었고

책향물어금責向物於今 과거의 사물을 현재에서 따져 보았더니

어금미상유於今未嘗有 현재에선 아직까지 있지 않았다.

 

어금미상유於今未嘗有

(현재와 과거가 서로 왕래하지 않는 측면에서) 과거의 사물이 현재에서 있지 않기 때문에

 

이명물불래以明物不來 이로써 과거의 사물이 현재로 오지 않았음이 분명하고

어향미상무於向未嘗 현재의 사물이 일찍이 과거엔 없었기 때문에

고지물불거故知物不去 현재의 사물이 과거로 흘러가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복이구금覆而求今 이를 뒤집어서 현재에서 찾아보았더니

금역불왕今亦不往 현재도 과거로 가지 않았다.

 

시위석물자재석是謂昔物自在昔 이는 과거의 사물은 스스로 과거에 있었고

부종금이지석不從今以至昔 현재로부터 과거에로 이르러 간 것은 아니며

금물자재금今物自在今 현재의 사물은 절로 현재에 있고

부종석이지금不從昔以至今 과거로부터 현재로 이르러 오지 않았음을 말한다.

 

고중니왈故仲尼曰 고로 중니(공자)가 제자 안회에게 말하였다.

회야견신교비비고回也見新交臂非故

회야, 너와 내가 새롭게 스치는 팔은 옛날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보았느냐.

 

여차如此 즉물불상왕래則物不相往來 명의明矣

이와 같다면 사물이 서로 왕래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일체법은 찰나 찰나에 유전하기 때문에 반드시 자성이란 없다.

자성이 없기 때문에 찰나 찰나에 유전 천류 하는

일체법이 생겨남이 없는 不生不滅의 眞如性空이다.

<유마경>에 ‘제법의 불생불멸이 진여성공인 무상의 의미이다’)

 

기무왕반지미짐旣無往返之微朕 유하물이가동호有何物而可動乎

이미 흘러갔거나 되돌아오는 희미한 조짐도 없는데 무슨 사물이 있어서 움직이겠는가.

 

(제법은 고요하게 담연하여 흘러오고

흘러가는 모습이 가느다란 털끝만큼의 희미한 조짐도 없는데

무슨 사물이 있어 움직이며 구르겠는가함을 말한 것이다.

시간의 흐름은 한량이 없지만 한 찰나 사이에 포섭된다.

시간에는 고금이 없으며 제법은 시간을 따라가고 옴이 없다)

 

연즉선남언악이상정然則旋嵐偃嶽而常靜

이와 같다면 선람(우주가 무너지는 괴겁에 부는 바람)의

바람이 수미산을 무너뜨린다 할지라도 항상 고요하며

 

강하긍주이불류江河兢注而不流

강하가 다투기나 하듯이 바다로 흘러들어간다 해도 흐르는 것이 아니며

 

야마표고이부동野馬飄鼓而不動

봄날의 아지랑이가 나부끼며 올라간다 해도 움직이는 것이 아니며

 

일월역천이부주日月歷天而不周

해와 달이 하늘을 지나간다 해도 우주를 한 바퀴를 돈 것은 아니다.

 

부하괴재復何怪哉 다시 무엇을 괴이하게 여기겠는가.

 

(사물마다의 당체가 천류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사물의 모습은 천류하는 데 본성은 천류하지 않는다 한 것은 아니다)

 

희噫 성인유언왈聖人有言曰 아, 성인이 말씀하시기를

인명서속人命逝速 속어천류速於川流 ‘인명이 흐르는 시냇물보다 빠르다’ 하셨다.

 

시이성문오비상이성도是以聲聞悟非常以成道

그러므로 성문은 非常(無常)의 性空을 깨달아 도를 이루고

 

연각각연리이즉진緣覺覺緣離以卽眞

연각은 緣會가 분리하여 사라지는 性空을 깨닫고 진상의 도에 나아간다.

 

구만동이비화苟萬動而非化 움직이는 모든 법이 무상하게 변화하지 않는다면

기심화이계도豈尋化以階道 어떻게 무상하게 변화하는 것을 연구하여 도과에 오르겠는가.

 

복심성언覆尋聖言 미은난측微隱難測

성인의 말씀을 반복해서 연구해 보았더니 은미하여 헤아리기 어렵다.

 

약동이정若動而靜 사거이류似去而留

성인은 움직임을 말씀한 듯하나 고요하고, 흘러감을 말씀한 듯하나 상주하여 머문다.

 

가이신회可以神會 난이사구難以事求

이는 신령한 정신으로 회합해야지 事相에서 찾기란 어렵다.

 

시이언거불필거是以言去不必去

그 때문에 생사가 무상하게 흘러간다고 했으나 반드시 흘러가는 것은 아닌데

한인지상상閑人之常想 이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망상을 막아주려 하기 때문이다.

 

칭주불필주稱住不必住 열반은 상주한다고 말씀해도 꼭 열반에 안주하지 않는데

석인지소위왕이釋人之所謂往耳

이는 사람들이 말하는 생사로 흘러간다 한 것을 버리게 한 것이다.

 

기왈거이가견豈曰去而可遣 어찌 생사가 흘러간다고 해서 생사를 버렸겠으며

주이가류야住而可留也 열반에 안주한다 해서 상주함을 말했으랴.

 

(열반은 상주한다 말씀하셨으나 열반에 상주할 만한 하나의 모습이 정말로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생사와 열반은 둘 다 실체의 모습을 얻지 못하는데

어찌 버려야 할 생사가 단정적으로 있고, 상주해야 할 열반이 정말로 있다고 하셨으랴)

 

고성구운故成具云 고로 <성구경>에서 말하였다.

보살처계상지중菩薩處計常之中 이연비상지교而演非常之敎

보살은 상주불변한다고 헤아리며 집착하는 가운데 처하여 생사의 무상한 가르침을 연설한다.

 

마하연론운摩訶衍論云 제법부동諸法不動 무거래처無去來處

<마하연론>에서는 ‘제법은 부동하여 흘러가거나 흘러 온 곳이 없다.’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사개도달군방斯皆導達群方 양언일회兩言一會

이는 모두가 여러 상대적인 방향을 인도하여 중도로 도달시킨 것으로서

이 두 말의 귀결점은 하나로 회합한다.

 

기왈교수豈曰交殊 이괴기치재而乖其致哉

어찌 표현한 문장이 다르다 해서 그 이치마저 다르겠는가.

 

(<성구경>에서 ‘보살이 범부가 영원하다고 망상으로 헤아리는 가운데 처하여

그 때문에 덧없는 생사의 무상함을 설명하여 그들의 집착을 타파한 것이지

타파해야 할 생사의 모습이 정말로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시이언상이부주是以言常而不住 그러므로 열반의 상주불변을 말한다 해도 열반에 안주하지 않고

칭거이불천稱去而不遷 생사는 무상하게 흘러간다 해도 실제로 천류하는 것은 아니다.

 

불천不遷 고수왕이상정故雖往而常靜

천류하지 않기 때문에 생사의 세계로 간다 해도 항상 고요하며

(만법의 변화를 따른다 해도 하나인 중도는 고요 담연한 것이다)

 

부주不住 고수정이상왕故雖靜而常往

열반에 상주하지 않기 때문에 고요하면서도 항상 생사의 세계로 가는 것이다.

(번뇌가 사라진 멸진정의 열반에서 일어나지 않고 모든 威儀를 나타낸다)

 

수정이상왕雖靜而常往 고왕이불천故往而弗遷

열반에서 고요해도 항상 생사의 세계로 가기 때문에 간다 해도 생사에 천류하지 않으며

(심의식의 망상이 없이 만행을 나타내기 때문에 항상 생사의 세계로 간다 해도 천류하지 않는다)

 

수왕이상정雖往而常靜 생사의 세계로 간다 해도 항상 열반에서 고요하기 때문에

고정이불류의故靜而弗留矣 고요해도 열반에 머물며 집착하지 않는다.

(무위의 열반에 안주하지도 않고 현상의 유위법도 버리지 않는다)

 

연즉장생지소이장산然則莊生之所以藏山 그렇다면 장자가 산을 늪지대에 숨겼던 까닭과

중니지소이임천仲尼之所以臨川 공자가 흐르는 시냇물에 임했던 까닭은

사개감왕자지난류斯皆感往者之難留 모두가 흘러가는 것을 붙잡아 두기 어려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기왈배금이가왕豈曰排今而可往 어찌 현재의 사물을 밀어젖히고 과거로 흘러감을 말했으랴.

시이관성인심자是以觀聖人心者 그러므로 성인의 마음을 관찰한 자는

부동인지소견득야不同人之所見得也 일반 사람들이 보고 체득하는 것과는 동일하지 않다.

 

(장자가 말하기를 “배는 산골짜기에 숨기고 그 산을 늪지대에 숨겨놓고 이를 견고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힘센 사람이 이를 걸머지고 도망을 했는데도 어리석은 사람은 이를 깨닫지 못한다.

천하를 천하에 숨겨둔다면, 즉 천하가 있는 그대로 둔다면 도망할 곳이 없으리라.”하였다.

 

사람들이 외형의 껍데기를 잊고 본질의 도에 계합하지 않으면 산림 속에 은둔하고

천지에 나의 형체를 의탁한다 해도 나의 몸은 造化가 은밀하게 옮겨간다.

어리석은 사람은 숨긴 곳이 있으면 상대적으로 도망할 곳도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만일 형체와 도가 하나로 합일한다면 숨길 곳이 없고

숨김이 없으면 도망함도 없다. 이는 장자가 의도하고 한 말이다)

 

하자何者 인즉위소장동체人則謂少壯同體 백령일질百齢一質

왜냐하면 사람들은 어린 시절이나 장성한 때의 몸이 동일하므로

백세가 된다 해도 형질은 하나이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도지년왕徒知年往 불각형수不覺形隨

그들은 나이가 젊은 시절의 과거로 흘러간 것만 알았을 뿐,

형체도 나이를 따라 함께 흘러갔다는 점은 몰랐었다.

 

(사람이란 동일한 몸의 하나의 형질이긴 하나 늙음과 젊음이 같지 않다.

실제로 젊은 시절의 얼굴은 스스로 과거 젊은 시절을 따라가 있지

현재의 늙음으로 오지 않았으며 늙음은 스스로 현재에 머물러 있지 젊음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시이범지출가是以梵志出家 그러므로 범지가 젊은 시절에 출가하여

백수이귀白首而歸 머리가 하얀 늙은이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린인견지왈隣人見之曰 이웃집 사람이 그를 보더니 말하였다.

석인상존호昔人尙存乎 ‘지난 젊은 시절의 모습 그대로 있군.’

 

범지왈梵志曰 범지가 말하였다.

오유석인吾猶昔人 비석인야非昔人也

‘나는 지난날 젊은 시절의 사람인 듯하지만 이미 지난날의 사람은 아니다.’

 

린인개악연隣人皆愕然 비기언야非其言也

이웃집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라면서 그의 말이 틀렸다고 비난하였다.

 

소위유방자부지이추所謂有方者負之而趨 매자불각昧者不覺 기사지위여其斯之謂歟

위에서 말했던 ‘힘센 사람이 걸머지고 도망을 갔는데도

어리석은 사람은 깨닫지 못했다’고 한 것이 이런 경우를 두고 말했으리라.

 

시이여래是以如來 인군정지소체因群情之所滯 즉방언이변혹則方言以辯惑

그 때문에 여래께서는 여러 중생들이 허망한 마음으로 막힌 것 때문에

방편의 말씀을 하여 미혹을 분별하셨다.

 

승막이지진심乘莫二之眞心 토불일지수교吐不一之殊敎

둘이 없는 진실한 마음을 타고 하나가 아닌 다른 가르침을 토해 내셨으니

 

괴이불가이자乖而不可異者 기유성언호其唯聖言乎

말씀은 달라도 마음마저 다르다 하지 못할 것은 성인의 말씀뿐이리라.

 

고담진유불천지칭故談眞有不遷之稱

그러므로 진리를 담론하시면 사물은 천류하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었고

 

도속유유동지설導俗有流動之設

세속을 인도하는 데는 사물은 흐르며 움직인다는 말씀이 있었다.

 

수복천도이창雖復千途異唱 이처럼 천 갈래 길로 다르게 말씀하셨으나

회귀동치의會歸同致矣 회합하여 귀결하는 점은 동일하게 이르러 간다.

 

이징교자而徵交者 문불천聞不遷

그런데도 언어문자에서 따지는 자들은 사물은 천류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들으면

 

즉위석물부지금則謂昔物不至今 과거의 사물은 현재로 이르러 오지 않는다 말하고

령유동자聆流動者 사물은 움직이며 유전한다는 말씀을 들으면

이위금물가지석而謂今物可至昔 현재의 사물이 과거에로 이르러 간다고들 말한다.

 

기왈고금旣曰古今 이욕천지자而欲遷之者 하야何也

이미 상대적인 과거와 현재라면 이를 옮기고 싶어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과거가 현재로 흘러오지 않는다는 이치는 보기가 쉽지만

현재가 과거로 이르러 가지 않는다는 말은 가장 밝히기 어렵다)

 

시이언왕불필왕是以言往不必往 고로 시간이 흘러간다고 말해도 간다고 이해할 필요가 없다.

고금상존古今常存 이기부동以其不動

왜냐하면 과거와 현재가 움직이지 않고 변함없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칭법불필거稱法不必去 현재의 시간이 과거로 흘러간다 해서 간다고 이해할 필요가 없는데

위부종금지고謂不從今至古 현재로부터 과거로 이르러 가지 않는 것은

이기불래以其不來 과거의 시간이 현재로 흘러오지 않기 때문임을 말한다.

 

불래不來 고불치빙어고금故不馳騁於古今

과거의 시간이 현재로 흘러오지 않았기 때문에 과거와 현재의 시간으로 서로가 갈리지 않고

 

부동不動 고각성주어일세故各性住於一世

항상 존재하며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각자의 성품이 한 세대에 안주한다.

 

연즉군적수문然則群籍殊文 그렇다면 여러 서적에서 표현한 문자가 다르고

백가이설百家異設 모든 사상가들이 다르게 말한다 해도

구득기회苟得其會 귀납하여 회합하는 점만 체득한다면

기수문지능혹재豈殊文之能惑哉 어찌 표현한 문자가 다르다 해서 거기에 현혹을 당하겠는가.

 

시이인지소위주是以人之所謂住 그러므로 소위 상주불변하다고 말하는 것을

아즉언기거我則言其去 나는 그것은 무상하게 흘러간다 말하고

인지소위거人之所謂去 사람들이 무상하게 흘러간다고 말하는 것을

아즉언기주我則言其住 나는 그것은 상주불변하다고 말한다.

 

연즉거주수수然則去住雖殊 그렇다면 무상하게 흘러간다, 상주불변 한다 한 말이 다르지만

기치일야其致一也 그것이 이르러 가는 곳은 하나이다.

 

고경운故經云 그러므로 <도덕경>에서 말하였다.

정언사반正言似反 올바른 말은 반대되는 듯도 하다.

 

수당신자誰當信者 이를 뉘라서 믿으려 할까 하였는데

사언유유의斯言有由矣 이 말을 하게 된 까닭이 있었다 하리라.

 

하자何者 인즉구고어금人則求古於今 위기부주謂其不住

왜냐하면 사람들은 옛날을 현재에서 구해보고 옛날에는 안주하지 않는다 말들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현재 가운데서 옛날을 찾아보다가 찾지 못하면

옛날은 천류 했다라고 헤아린다. 이는 범부의 미혹이다)

 

오즉구금어고吾則求今於古 지기불거知其不去

나는 현재를 옛날에서 찾아보고 현재는 옛날로 흘러가지 않았음을 안다.

 

(나는 옛날 속에서 현재를 찾아보니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현재가 옛날로 흘러가지 않았음을 안다. 이는 성인의 깨달음이다.)

 

금약지고今若至古 고응유금古應有今

일반인의 견해대로 현재가 옛날로 이르러 갔다면 옛날도 현재로 흘러 와 있어야만 하며

 

고약지금古若至今 금응유고今應有古

옛날이 현재로 이르러 왔다면 현재도 응당 옛날로 흘러가 있어야만 하리라.

(현재와 옛날이 서로 왕래함이 있다면 서로에게 그 자취가 있어야만 된다)

 

금이무고今而無古 이지불래以知不來

현재에는 옛날이 없기 때문에 이로써 옛날은 현재로 흘러오지 않았음을 알 수 있고

 

고이무금古而無今 이지불거以知不去

옛날에는 현재가 없기 때문에 이로써 현재는 옛날로 흘러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약고부지금若古不至今 금역부지고今亦不至古

옛날이 현재로 이르러 오지 않았다면 현재도 옛날로 흘러간 것은 아니다.

(옛날과 현재가 서로 도달하지 못한다.)

 

사명성주어일세事名性住於一世 그렇다면 사물마다 각자의 성품이 한 세대에 안주한다.

유하물이가거래有何物而可去來 무슨 사물이 있어서 흘러가고 흘러오겠는가.

 

연즉사상풍치然則四象風馳 이와 같다면 사상(일월성신)이 바람처럼 달리고

시기전권㻢璣電捲 선기(북두칠성 가운데 별자리이름)가 번개처럼 걷힌다 해도

득의호미得意毫微 은미한 데서 털끝만큼의 그 의도를 체득하면

수속이부전雖速而不轉 신속하다해도 실제론 구르는 것이 아니다.

 

시이여래是以如來 공유만세이상존功流萬世而常存 도통백겁이미고道通百劫而彌固

그러므로 여래의 공덕은 만세에 유전하면서도 항상 존재하며

도는 영겁에 통하면서 더욱 견고하기만 하다.

 

(여래의 공덕이 만세에 유전한다 한 것은 利他의 실천이 항상 존재해 있는 것이며,

도가 영겁에 통한다 한 것은 自利의 행이 더욱 견고하여,

만세백겁이 지나면서 시간이 천류 하는듯하면서도 자리와 이타의 두 가지 형이

썩어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사물이 천류하지 않는 실제이다)

 

성산가취어시궤成山假就於始簣

비유하자면, 산을 이루는 데는 처음 한 삼태기의 흙을 빌려 완성하고,

 

수도탁지어초보修途託至於初步

먼 길을 떠나는 데는 첫걸음부터 시작하여 목적지에 이르러 가는 것과도 같다.

 

과이공업불가후고야果以功業不可朽故也

이는 인에서 과에 이르기까지 결과를 이루었다 하여 인의 공업이 썩어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천리의 길을 가려면 첫걸음부터 시작하나 천리 길에 이르고

나서도 첫걸음은 천리의 끝으로 옮겨가지 않는 것과도 같다.

그 때문에 수행의 공부가 성취되어 성인의 경지에 이르러,

자리이타의 수행이 가득 찼다 해도 처음 보리의 마음을 냈던 것과 다르지 않다.

수행의 因地로부터 성불의 결과에 이르기까지 수행마다 인과가 천류하지 않는다.

선악의 인과도 이와 같다.)

 

공업불가후功業不可朽 성인의 공업은 썩어 없어지지 않는다.

고수재석이불화故雖在昔而不化 고로 수행의 因地는 수행할 때의 과거에 있으면서 변화하지 않고

불화고불천不化故不遷 변화하지 않기 때문에 果地로 천류하지 않는다.

불천고즉담연명의不遷故則湛然明矣 천류하지 않기 때문에 담연하여 인과가 분명한 것이다.

 

고경운故經云 고로 경전에서 말하였다.

삼재미륜三災彌綸 이행업담연而行業湛然 신기언야信其言也

‘삼재가 미륜(충만)하다 해도 수행의 공업은 담연하다’라고 하였는데, 그 말씀은 믿을 만하구나.

 

하자何者 과불구인果不俱因 왜냐하면 과는 인과 함께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인이과因因而果 인은 인 그대로 있는 상태에서 과이며

인인이과因因而果 인은 인 그대로인 채 과이므로

인불석멸因不昔滅 인은 과거에 사라지지도 않았고

과불구인果不俱因 현재의 과는 과거의 인과 함께 하지 않았으므로

인불래금因不來今 과거의 인이 현재의 과로 오지도 않았다.

 

불멸불래不滅不來 즉불천지치명의則不遷之致明矣

과거의 인이 사라지지도 않았고 현재의 과로 흘러오지도 않았다면

인과가 천류하지 않는다 한 이치가 분명하다.

 

부하혹어거류復何惑於去留 지주어동정지간재踟蹰於動靜之間哉

다시 무엇 때문에 흘러가고 머무는 데에서 현혹을 당하고, 동과 정의 사이에서 주저하겠는가.

 

연즉건곤도복然則乾坤倒覆 무위부정無謂不靜

이와 같다면 천지가 뒤집힌다 해도 고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며

 

홍유도천洪流滔天 무위기동無謂其動

홍수가 하늘까지 넘실댄다 해도 움직인다고 말할 수는 없으리라.

 

구능계신어즉물苟能契神於卽物 사불원이가지의斯不遠而可知矣

움직이는 사물에 나아가 천류하지 않는 이치에 나의 정신이

하나로 일치할 수만 있다면 이를 머지 않는 데에서 알게 되리라.

 

(천류 하는 사물에 나아가서 천류하지 않는 사물의 이치를 깨닫고

진여의 세계를 볼 수 있다면 눈에 부딪치는 대로가 제법실상의 상주 아님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