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론肇論> 序文
<조론肇論>의 조肇 자字는 이 논서를 지은 사람의 이름인데 그의 이름은 僧肇(384-414)이다.
그 시대에는 그를 조공肇公이라고 호칭하였다.
論은 승조가 자기의 견해를 수립한 논문이다.
이는 지은 사람의 이름으로써 논문의 명칭을 붙였으리라.
조공은 구마라집鳩摩羅什(344-413) 문하의 뛰어난 제자였다.
그는 구마라집이 불경을 번역했던 도량에서 모든 경전을 漢譯하면서
오랫동안 구마라집 대사를 참례하고 불교의 실제 모습(實相)을 심오하게 통달하였다.
그 즈음엔 서역에서 건너 온 불법의 경전이
매우 희소하여 불교의 대의가 환하게 드러나지 못하였었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老莊學에서 말하는 虛無主義의 담론을 숭상하였다.
그리하여 부처님의 제자인 沙門들까지도 이를 고상하게 여기면서 허무주의를 으뜸의 근간으로
여기고 이로써 불교의 의미를 담론하면서 각자 자기의 견해를 따라 종파를 수립하였다.
가령 진晋나라의 도항道恒(346-417)은 <無心論>을 저술하였고
동진東晋의 도림道林은 <즉색유현론卽色遊玄論>을 저술하였고
진晋의 축법태竺法汰(320-387)는 <本無論>을 조론造論한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들 모두의 견해는 현상의 차별적인 모습(相)에 떨어져
有에 상대적인 無를 말하며 다들 斷滅의 空에 떨어졌던 것이다.
조공은 大乘의 道가 세상에 밝혀지지 못하는 것을 민망하게 여겼다.
그 때문에 불교의 현상론으로 <물불천론物不遷論> 본질론으로 <부진공론不眞空論>
이 두 논문에 대한 인식론으로서 <반야무지론般若無知論>
인식의 결과론으로서 <열반무명론涅槃無名論>을 지어 그들의 빗나간 집착을 타파하였다.
이것이 조공이 논리를 수립한 근본 의도이다.
論이란 賓과 主를 가설적으로 수립하여 문제를 따지고 분석하고 의론하고 인식하여
진정한 이치를 발현하고 빗나간 집착을 타파하여 꺾는다는 의미이다.
<조론>이라는 제목의 두 글자는 작자로서 사람과 논리에서 나타난 법을 쌍으로 드러냈다.
때문에 <조론>이라고 말한 것이다.
<후진장안석승조작後秦長安釋僧肇作> 후진의 장안에 사는 석승조는 짓는다.
부견苻堅(338-385)이 나라를 세우고
관중關中 지방의 장안에 의거하여 국호를 대진大秦이라 하였고
후진의 요장姚萇(330?-393)은 부견의 왕위를 찬탈하고
왕위에 오르자 역시 국호를 진秦이라 하였다.
그 때문에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이 전진前秦과 후진後秦으로써 이 둘을 구별하였다.
요장이 죽고 나서 그의 아들인 요흥姚興(366-416 재위 394-416)이 나라를 계승하였다.
구마라집의 역경사업은 바로 요흥의 시대에 해당한다.
때문에 그의 제자인 조공은 후진後秦 사람이다.
<양고승전梁高僧傳>에서 ‘조공전肇公傳’을 조사해 보고 그의 내역을 간략히 말해 보겠다.
법사法師 승조僧肇는 서울 장안 사람이다.
어려서는 집이 가난하여 다른 사람의 책을 베껴 써 주는 품팔이를 하다가
이윽고 제자백가와 모든 역사서적을 방대하게 관람하였다.
그가 지향했던 뜻은 허현虛玄의 경지를 좋아하여 매양 노장학으로써 心要를 삼았으며
노장학을 익히고 나서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용이 훌륭하긴 하나 높은 경지에 정신을 깃들게 하는 처방에 있어서는
아직도 훌륭함의 극치는 아니로구나.’ 하였다.
그 뒤로 <구역유마경舊譯維摩經>을 보고는
환희하는 마음으로 경전을 정대수지頂戴受持 하였다.
그리고는 말하였다.
‘내가 귀의해야 할 곳이 어디인 줄 이제서야 알았다.’
이로 인해 출가하여 20살에 沙門이 되어 그의 명성은 장안 지방에 진동하였다.
그때 나집 公은 서역 지방인 고장姑藏에 있었다.
조공은 그에게로 달려가 의지하였는데 나집이 그와 말을 나눠 보고는 깜짝 놀라며 말하였다.
‘불법 가운데 가장 뛰어난 龍象大德이로구나’
나집이 관중 지방의 장안으로 돌아와 경전과 논서를 자세히 살피고
의미를 판정하자 사방에서 학자들이 그를 찾아왔다.
그들 서로가 질문을 던지자 조공은 문제를 맞이하는 대로 풀이하였는데
그의 답변은 모두가 일상적인 의식 밖으로 초월하였다.
조공은 그때 <반야무지론般若無知論>을 저술하였는데 나집은 이를 보더니 말하였다.
‘내가 견해로야 그대에게 양보하겠는가마는
문학적인 문장의 경지에 있어서는 그대에게 양보 해야겠군.’
그가 지은 <반야무지론般若無知論>이 유전하여 광산匡山에 이르자
유유민劉遺民이 이를 혜원법사慧遠法師(332-414)에게 드렸더니
혜원은 무릎을 치며 찬탄하며 말하였다.
‘이런 저술은 일찍이 없었다.’
조공은 다시 <물불천론物不遷論> 등 네 논문을 저술하였는데
이들 모두가 불법대도의 정미함을 오묘하게 더 하였다.
진왕인 요흥은 그 가운데서도 그가 혜원에게 보낸 편지를
더욱 소중히 여겨 中外의 여러 지방으로 전파하였다.
그의 나이 서른하나에 죽으니 당시에 너무 세상을 빨리 떠났다고 애석히 여겼다고 하였다.
/明·匡山沙門 憨山 釋德淸 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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