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經/禪

話頭 수행법(1)

話頭 수행법(1)

 

안녕하십니까?

행복하십시오.

붇ㄷ하빠-라입니다.

 

이번 시간에 우리가 다루는 주제는 話頭禪입니다.

일반적으로 看話禪 이라고도 합니다.

한국을 제외하고 중국에서는 이미 간화선이나 화두선이 없어졌습니다.

일본에도 조금 남아있고요.

 

주로 세계적으로 간화선 법에 의해서 수행하는 곳은

우리나라, 특히 대한불교 조계종이 전부다 ! - 이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우리는 간화선을 이해할 경우에 흔히 부처님이 수행한 것과 다른 것으로 이해하고 있고

한국스님들도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간화선 또는 화두선 이라고 불려지는 이 수행법은 부처님이 수행하던 수행법을

중국인들이 중국식의 이름으로 그렇게 불렀을 뿐입니다.

 

부처님은 부처님의 수행법을 Sati, 알아차림이라고 했었고.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에 부파 불교도들이 이것을 위빠사나Vipassana라고 했습니다.

대승불교시기에는 자냐 Dhyana, 번역하여 禪定, 靜慮라고 했습니다.

싸띠, 알아차림 또는 자각, 한문으로 번역하면, 생각할 念이나 자각할 念으로 번역하죠.

 

위빠사나라는 용어를 한문으로 번역하면 관觀, 觀法 - 이렇게 번역됩니다.

자냐 Dhyana 라는 용어를 중국어로 번역하면 禪, 禪定, 禪那 이렇게 되죠.

 

이것을 중국에서 서기 1100년 무렵에 大慧宗杲스님이 활동하실 때

위빠사나의 볼 觀자를, 대혜 선사는 볼 看자로 썼습니다.

 

주로 눈으로 본다, 마음으로 본다 - 이리하는데요.

看話禪 할 적에 볼 看자를 썼습니다.

看話 - 화두를 보는 거나

觀法 - 알아차림의 대상을 보는 거나 똑같습니다.

 

觀法으로 표현하거나 看法으로 표현되든

[알아차리자], [관찰하자], [대상의 실제를 정확하게 이해하자] -그것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이 사용하던 알아차림 수행법을 중국으로 와서 한문으로 번역하여

觀法, 또는 看話 - 이런 정도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우리가 화두선에 대해서 그 본질을 정확하게 이해를 하려고 하면

중국의 불교가 어떻게 전개가 되었는지를 미리 알아두는 게 좋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는 화두선을 이해하는 전 단계로서 중국 불교사를 20분에 걸쳐서 간략하게 요약하고

다음 시간에 화두선에 대해서 좀 더 본질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화두선을 이해하는데 훨씬 더 도움이 되기 때문이죠.

 

정확하게 언제 불교가 중국에 전해졌는지 알 수 없습니다.

대략 지금부터 2,000년 전에 중국에 불교가 전해진 걸로 알고 있습니다.

기원 4년이라고도 하고 기원전이라고도 합니다.

 

이때 어떤 불교가 전해졌는가에 대한 의문인데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처음부터 대승불교가 전해진 것은 아닙니다.

安世高에 의해서 최초로 중국에 불교경전이 번역되었을 때

바로 참선의 이론서인 안반수의경 Anapana sati sutta이 번역됐습니다.

 

아나빠나 싸띠라고도 하는데요,

알아차림의 기준점을 코끝에 두고 공기가 들어가고 나가는 것을 알아차림 하자.

- 數息觀, 呼吸觀입니다(숨쉴 息을 세거나數, 호흡을 觀하는 것)

이것을 이론적으로 설명해 놓은 경전이 안반수의경입니다.

 

중국에 불교가 최초로 전해져 올 때, 많은 사람들이

<수행을 통해서, 참선을 통해서 마음을 맑히자, 그래서 좀 더 행복하게 살자>

- 이런 불교를 배웠습니다.

 

또한 당시 사람들은 가장 근본경전인 아함경을 통해서 불교를 배운 겁니다.

따라서 당연한 사항이지만 그때 불교에서는 제사도 지내지 않았고 기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중국인들의 조상숭배사상은 - 세계적으로도 유래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강하기 때문에 -

불교에서도 제사를 지내자고 강력하게 요구했습니다.

 

스님들이 200년, 300년 동안 제사를 지내지 않고 버티다가 나중에 결국 타협을 하게 되면서 제사를 지내게 됩니다만

그러나 경전을 아무리 뒤져봐도 제사를 지내자 하는 구절이 없습니다.

 

그래서 중국인들이 역사소설을 하나 쓰게 됩니다.

그것이 유명한 [우란분경] 이고 [목련경]입니다.

 

목련존자가 지옥에 있는 어머님을 구하기 위하여 수행자들을 500명을 청해서 음식공양을 백일동안 올렸고

그것이 공덕이 되어서 어머님을 무간지옥으로부터 구했다는 스토리죠.

 

그랬다고 하더라도 오늘날 스님들이 목탁을 치면서 염불하고 경을 읽는 - 그런 식으로 천도재를 지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서기 200년, 300년 경 쯤 되면 인도에서 발생한 대승경전들이 중국으로 유입되어 번역되기 시작합니다.

 

서기 300년, 400년 무렵에 집중적으로 대승경전이 번역되는데 - 대승경전이 번역되니까 중국인들의 정서에 꼭 맞습니다.

중국인, 인도인도 마찬가지고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세계의 대국이라는 나라의 사람들은 뻥이 큽니다.

과일도 크고요. 그 사람들을 좋게 이야기하면 스케일이 큰 셈이죠.

 

중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소설이 무협지입니다.

하늘을 날아다니고 기기묘묘한 - 그런 것들을 아주 좋아합니다.

 

아함경이나 초기경전이나 수행에서는 이런 게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우리의 삶을 통해서 풀어나가고 있는 거죠.

 

대승경전을 번역해놓고 보니 극락으로 갔다, 지옥으로 갔다, 하늘을 날아다니고 신통술 같은 게 나옵니다.

이게 중국인들의 무협지 수준에 딱 맞아떨어진 거예요.

그래서 중국인들이 아함경이나 수행도 좋아하지만 이것보다 오히려 무협지 수준의 대승경전을 더욱 좋아했습니다.

 

금강경 같은 경우는 조금 덜합니다만 아미타경, 화엄경, 법화경

- 이런 경전의 주인공이나 주변여건을 중국식으로 이름만 바꿔 놓는다면, 영락없는 무협지입니다.

극락으로, 지옥으로 날아다니고 신통술을 부리고 하죠.

 

당시의 중국에서는 이미 전제왕조시대가 구축되어 있었으므로

개인의 능력에 따라서 보상받는 사회이기보다는

신분이 세습되는 사회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필연적으로 윤회관념이 많이 강조(주입)되는 거죠.

여기에 다가 조상숭배사상 뿐만 아니라 신과 중생이라는 관념구조들이 고착화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왕과 백성의 관계 - 백성이 왕한테 절대적으로 의존할 때만이 백성의 생존권이 보장된다.

나약한 중생이 절대자인 신에게 의존할 때만이 행복을 신으로부터 부여받을 수 있다.

 

아미타 부처님이나, 문수보살이나, 보현보살이나, 관세음보살과 같은 불교로 각색된

신들이 등장하는 대승경전을 중국 사람들이 선호하기 시작합니다.

 

이리하여 점차로 <마음을 닦아서 행복하게 살자>라고 했던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

근본사상이 그대로 용해되어 있는 아함경이나 수행을 멀리하게 됩니다.

 

이러한 현상에 비례하여 신께 기도를 올리고 - 불교로 각색된 신 -

아미타부처님, 관세음, 문수, 보현보살에게 기도를 올리는 이런 대승불교가 성행을 하게 됩니다.

 

서기 500년을 전후하게 되면 중국에서 부처님 수행법이 거의 자취를 감춰버리고 없어져 버립니다.

서기 520년, 530년 무렵이 되면 그 유명한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오게 됩니다.

오늘날 홍콩 옆에 있는 광동지방으로 들어옵니다.

 

달마스님이 인도에서 중국으로 들어와 보니 중국 사람들이 전부 윤회를 믿고 있고

불교로 각색된 신을 믿고 있고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을 확인합니다.

 

달마스님이 주장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기도하는 법은 없다>

 

왜 기도가 문제가 되느냐면 기도는 그 본질상, 중생의 요소를 강조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도 가지고 있고

불성도 가지고 있고 중생이 될 수 있는 가능성도 가지고 있습니다.

중생으로 길들여지는 것이지 부처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며 부처로 길들여지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기도를 하게 되면 -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 부처님께 기도를 한다는 것은 -

내가 아미타부처님, 관세음보살보다 위대하므로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나약함이나, 나의 모자람이나, 나의 추함이나, 나의 오염됨을 계속 강조하게 되며,

그 절대자로 하여금 나에게 뭔가를 시여해 주도록 요구를 하는 것이 기도의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기도는 그 본질적으로 인간의 가능성중에서 부처의 요소를 강조하기보다는

중생의 요소를 강조 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에 영험이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수행을 해서 부처가 되자> - 부처의 가능성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의 요소를 강조하기 때문에 가장 非佛敎的이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달마대사가 지금의 홍콩 부근에 발을 디디면서 <불법에 기도는 없다>라는 대선언을 하게 됩니다.

외국에서 온 수행자가 2, 3백년 동안 중국에서 성행하고 있는 관행에 대하여 강력하게 문제제기를 하자

당시 양나라 국왕 무제라고 하는 이가 달마대사를 보자고 합니다.

 

달마대사를 양무제를 만나서 [廓然無聖] - 유명한 대화를 통해서 -

기존의 중국불교에서 잘못된 부분을 강력하게 지적합니다.

 

<우리는 수행을 통해서 다시 부처님 당시의 근본불교로 돌아가야 합니다.

참선을 통해서 부처의 가능성을 계발해야 됩니다.>

 

이렇게 주장하자 양무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양무제 주위에 있던 많은 스님들이 달마스님의 추방을 요구합니다.

이에 달마스님은 崇山 少林寺로 내려가서 수행을 하게 되고

그것이 오늘날 숭산 소림사가 중국선종의 시발점으로 자리 잡는 겁니다.

 

야담입니다만 달마스님은 독살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대략 7번의 독살 시도 끝에 돌아가신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는 달마스님이 중국에 최초로 선종을 전했다 - 이렇게 알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수순이죠.

 

참선은 처음 전래될 때부터 불교의 모든 것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이것이 1, 2백년 동안 겨우 대중성을 얻어 불교를 펴다가 서기

2,3백년 무렵 되어 대승불교로 전환이 되면서 기도가 자리를 잡게 된 것입니다.

 

서기500년대 중반에 인도로부터 온 달마 스님이 기존의 기도하는 대승불교에 대해서

<이것은 불교가 아니다. 우리는 참선수행을 통해서 부처로 나아가야 한다.>

이런 주장을 펼쳤던 겁니다.

 

중국에서 사그러지던 수행불교를 되살린 이가 달마대사다 -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정답입니다.

달마대사가 중국에 와서 참선을 지도할 때 - 오늘날 한국스님들이 이해한 것처럼 -

話頭禪을 지도했던 것은 결코 아닙니다.

 

부처님이 지도하셨던 사띠, 위빠사나의 수행을 지도하신 것입니다.

달마대사는 자기 수제자를 한 분을 남겨놓고 돌아가십니다.

 

그분이 유명한 혜가 스님이십니다.

二祖 慧可 스님이시고

삼조 승찬 僧璨스님이시고

사조 스님이 道信 스님이십니다.

 

도신 스님 대에 와서 많은 대중들이 불교 수행법에 눈을 돌리기 시작합니다.

[500명의 수행자가 한곳에 모여서 수행을 했다]라는 기록이 발견되기 시작하는 거죠.

 

600년대 오조 弘忍 스님의 무렵이 되면 중국의 불교도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맞아!  불교는 기도를 통해서 중생이 되는 것이 아니라, 참선을 통해서 부처가 되자고 하는 것이야”

- 드디어 이해하게 됩니다.

이에 수행법에서 한발 비껴 서있던 지식인들이 수행을 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에서 한마디 하고 지나가겠습니다.

지식인들의 가장 큰 장점은 열심히 연구하는 것입니다.

또한 최대의 단점은 연구하지 않아도 될 것을 열심히 연구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마음은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변화의 대상이라고 바라 보셨습니다.

참선이라는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서 마음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했던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참선을 통해서 마음을 변화시키는데 - 지식인들이나 학자들은 1시간 참선을 하면, 10시간 분석을 합니다.

분석, 비교, 사유는 지식의 자양분은 될지 몰라도 지혜의 자양분은 되지 않습니다.

 

이들은 수행에 대하여 또 옛 어른들이 수행했던 것을 문자로 적어 놓습니다.

하라는 수행은 안하고 수행을 대상으로 논문이나 잔뜩 써놓고 - [문자선]이것도 땀 흘려가며 열심히들 파고듭니다.

 

학자들의 또 다른 특징은 이렇게 논문을 발표하고 나면 온 사방에 다니면서 알려야 합니다.

그래야 직성이 풀리는 거죠.

 

이렇게 직접수행은 하지 않고 입으로만 떠든다. - 口頭禪 이라고 하죠.

그래서 문자선, 구두선이라는 용어가 나왔습니다.

 

어른스님들의 지도를 받으며 수행을 하다보면 문자선이나 구두선은 死句다, 活句가 아니다,

죽을 死자 - 이런 표현을 자주 들을 겁니다.

 

입이나 귀로는 수행하는 것이 아니고 직접 몸으로 수행하는 것이다.

그것은 정확한 지적입니다.

 

중국에서 달마스님에 의해서 2번째로 중흥하게 된 불교수행은 이제 광범위하게 대중성을 획득하면서 퍼져나가게 되죠.

700년대 중반쯤에 馬祖도인이 등장하면서 선종은 주류에 편입됩니다.

 

서기 745년이 되면서 세계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건이 중국 長安에서 일어납니다.

그것이 바로 사사명과 안록산 - 安史의 亂이라고도 하죠.

 

그때까지만 해도 唐 帝國이 거의 전 세계를 제패하고 있었습니다.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제국이었습니다.

팽창하던 제국의 중심부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극도의 혼란에 빠집니다.

 

팽창하는 제국이 팽창을 중지하게 되면 제국의 외곽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기 마련이죠.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사회전반이 급속하게 보수주의로 회귀하는 것은 역사적, 사회학적으로 증명이 되고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외국문화에 대한 배척, 국수주의로 빠져들게 됩니다.

당나라는 국제주의, 개방주의였지만 唐을 이은 宋은 외국문화에 배척적인 입장과 국수주의를 취했다는 겁니다.

 

오늘날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미 제국이 일본과 독일에 경제적으로 추월당하기 시작합니다.

1980년대 레이건 정부가 들어서면서 급속하게 팽창하게 되던 제국이 수축을 하기 시작하니까,

이제 부시정권에 들어와서는 국수주의수준으로 가는 게 아닌가 하는 거죠.

 

마찬가지로 팽창하던 당제국이 수축하기 시작하니까 당제국 백성들의 열린 가슴이 움츠려들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 서기 802년 무렵이 되면, 외국문화 접촉 금지 법안이 만들어집니다.

 

요즘 우리 식으로 말하면 국가보안법입니다.

백성들이 외국문화를 접촉하면 법적으로 제재를 가하게 됩니다.

이런 법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이미 사회분위기를 그대로 반영하는 거죠.

 

그 주된 목표가 불교였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관세음보살님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당시 민족주의적 성향을 가진 중국인들의 입장에서는 거의 반민족행위에 해당했을 겁니다.

 

광풍이 휘몰아치면서 - 서기 843년, 845년이 되면 수 만개의 사찰이 파괴되고 약 30만 명의 승려를 죽여 버리게 됩니다.

그 와중에서 활동했던 분이 유명한 임제 의현스님입니다.

 

임제스님은 당시의 난을 피하고자 산으로 들어가서 수행을 합니다.

이렇게 존멸,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된 거죠.

그렇다 보니, 가르침의 용어사용마저 격렬해져 버립니다.

 

[지나치게 형식에 얽매이지 말고 내용에 충실하자]라고 해도 될 말을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자>

라는 극단적인 용어를 써서 표현합니다.

얼핏 들으면 시원한 용어 같지만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이해한다면 아픔이 있는 용어이기도 한 거죠.

 

이렇게 40, 50년 동안 민족주의, 외국문화배척 분위기가 휩쓸고 난 결과로 중국에서 모든 敎宗은 소멸해 버립니다.

교종은 경전을 통해서, 경전에 기초하여 형성되는 종파인데 경전을 읽고, 그 내용을 설명하려면

- 그 배경이 인도이기 때문에 - 인도를 설명, 이야기해야 하는 거죠.

 

인도문화에 대해서 소개하고 인도를 이야기하게 되면 반외세 금지법안에 - 외국인 금지법안 - 저촉되기 때문에

교종은 800년대 중반에 사실상 소멸하고 명맥만 겨우 유지하게 됩니다.

 

교종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는 것이 淨土宗 계열뿐입니다.

아미타 부처님이나 지장보살을 내세웠던 것만 살아남습니다.

 

외국문화를 극도로 배척하고 싫어하지만 자기조상을 지옥에 보내지 않고 극락으로 보내준다고 하니 살려둔 거예요.

이에 따라 스님들이 급속하게 아미타신앙으로 경도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이 광풍 속에서 살아남고 사회적인 집단광기의 터널을 뚫었던 불교유형이 바로 禪宗이었습니다.

선종은 경전을 중요시하지 않았습니다.

경전 속에 깨달음이 있다고 보지 않았거든요.

깨달음으로의 방향이나 지침정도가 들어있다고 생각했던 거죠.

 

불교의 창시자인 부처님을 내세울 수도 없었고 중국에 들어와 수행을 지도했던 달마스님조차도 내세울 수가 없었습니다.

전부 외국인이었기 때문이죠.

 

궁여지책으로 선종에서 전면에 내세운 분이 바로 六祖 慧能스님입니다.

육조 혜능스님은 본인도 수행을 열심히 하셨으며 최고의 도과를 성취했기도 했습니다만,

이런 사회적 분위기로 말미암아 이미 돌아가신 육조스님이 중국불교의 사활을 양어깨에 걸머진 형국이 됐죠.

 

이런 임기응변으로 광풍의 터널을 통과했습니다.

이런 소용돌이의 한가운데 마조도인과 임제스님이 있었던 겁니다.

그분들의 불같은 신심으로 불교가 명맥을 유지할 수가 있었던 거죠.

그래서 참선이 좋아서, 참선을 하시는 이들도 있었고

불교 중에서 마땅히 선택할 종파가 없어서 참선을 하는 이들도 있게 됩니다.

 

주제를 文字禪, 口頭禪으로 옮겨가 보면 깨달음을 대상으로 써놓은 논문들이나

수행자들의 행적을 기록한 논문들 모두가 쓰레기인 것은 결코 아닙니다.

 

어떤 논문들은 아주 기막힌 논문들이 있었습니다.

깨달음의 지침이 되고, 깨달음으로의 사다리와 같은 역할을 해주는 귀중한 논문들이 수집되어 책으로 엮어졌습니다.

 

이런 책들이 그 유명한 禪語錄입니다.

그 중에도 碧巖錄, 無門觀이 유명하죠. 귀에 쟁쟁한 저작들입니다.

이후에도 수없이 엮어졌습니다만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부처님과 인도 수행자들, 경전을 전면에 내세울 수가 없다보니까 이에 대신하여

중국수행자들의 수행경험이나 중국인들이 수행을 대상으로 쓴 논문들을 전면에 내세우게 됩니다.

 

경전 대신으로 중국수행자의 어록이나 부처님과 인도수행자들에 대신하여

중국스님들을 전면에 내세울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800년대를 거치면서 중국불교가 직면한 위기상황 때문인 거죠.

 

이게 우리나라로 들어오면서 우리 스님들은 이런 역사적인 배경을 전혀 도외시한 채

오히려 어록과 중국의 祖師스님들을 더 중요시해 버리게 됐던 겁니다.

 

부처를 대신해서 祖師를 - 중국의 고승을 일컬음 -

경전을 대신해서 이들의 어록을 전면에 내세웠던 것만을 쳐다봤던 거죠.

그 연원은 제켜 놓고 눈앞에 벌어지는 현상과 결과만 봤던 거죠.

 

다시 되돌아가서 어록 가운데서 매우 요긴한 것들을 모아서 따로 논문을 만들었는데

- 벽암록이나 무문관 - 같은 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제대로 판단하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어록의 내용에는 단지 깨달음에 관련된 지침만 들어있지 깨달음 그 자체는 들어 있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것을 수행으로 전환시킬 수 없을까?

- 수많은 사람들이 고민을 하기 시작합니다.

1,050년-1,100년 무렵에 활동하던 大慧宗杲스님이 여기에 해답을 줍니다.

 

대혜스님은 임제 스님으로부터 약 200년 후에 활동한 스님입니다.

그 답은 바로 유명한 話頭입니다.

여러분들은 여기서 2가지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를 하셔야 합니다.

公案과 話頭라는 개념입니다.

 

제가 조금 전 서두에 수행을 대상으로 써놓은 논문, 수행자의 어록을 기록해놓은 논문, 이것을 공안이라고 했습니다.

요즘 식으로 이야기하면 관공서의 문서입니다.

 

왜 공안이라고 했느냐?

관공서의 문서는 법적인 효력을 가지는 것처럼 이 몇 편의 논문들은 우리가 깨달음으로 가는데

중요한 계기를 만들어 주고 사다리와 같은 역할, 자동차핸들역할을 해준다.

 

그래서 이 논문에 따라서 수행을 하게 되면 우리는 틀림없이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로 공안이라고 하는 개념을 붙였습니다.

 

화두라는 것은 무어냐?

공안은 대개 고승의 일화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문장이 깁니다.

예를 들면 가장 유명한 공안 조주 문자공안입니다.

 

조주 스님이 수행하고 있는 사찰에 어떤 수행자가 찾아옵니다.

조주 스님한테 묻습니다.

“개한테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 스님은 없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한문으로 <無> 입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질문을 할 때는 3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첫째는, 진짜 몰라서 질문하는 경우입니다.

이때는 대개 매우 진지하죠.

 

두 번째는, 자신은 답을 이미 만들어 정해놓고 상대방한테 그 답을 추인 받거나,

상대방도 그 답을 알고 있는가를 떠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개 이때는 좀 건방을 떱니다.

 

세 번째의 경우는 자기가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을 상대방에게 과시할 목적으로 질문을 하는 -

이때는 혼자 떠들다가 끝내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조주스님이 가만히 보니까 자기한테 - 개한테 불성이 있습니까? - 이렇게 묻는 것은

이 사람이 정말 몰라서 물은 게 아니라,

[개도 미물이니까, 개도 생명체이니까,

마음을 갖고 있고 불성이 있을 거야,

따라서 큰스님한테 개도 불성이 있겠지요?] - 이렇게 질문한 거죠.

 

조주스님이 이 말을 듣자마자 이미 그 의도를 간파해 버립니다.

내용을 간파했으므로 그 질문을 무너뜨리는데 초점을 둡니다.

 

선사들이 대화를 할 경우 답 자체로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선사들하고 대화를 할 때는 말의 꼬리를 따라가지 말고,

그 말이 어디를 지칭하는지, 그落處를 정확하게 봐라! 이렇게 말하는 거죠.

 

조주 스님이 상대방이 이미 답을 갖고 온 것에 대해서 답을 엎어버립니다.

그래서 - <없다>- 라고 말씀했습니다.

 

이게 소문이 나다 보니까 이번에는 ‘개는 미물이라서 불성이 없을 거야 ’라는 생각을 가진 수행자가 찾아옵니다.

또 조주 스님한테 묻습니다.

“개는 미물인데, 불성이 있겠습니까?”

 

상대방의 질문의 내용을 간파하고는 “무슨 소리하노? 개도 생명체인데 불성을 가지고 있다!”라고 답합니다.

어떨 때는 불성이 없다 했다가 어떨 때는 불성이 있다 했다고 해서 - 하나의 논문이 만들어 집니다.

이걸 설명하려고 하면 3, 4분 정도는 족히 걸립니다.

 

글을 적어놓으면 한 두쪽 됩니다. 이렇게 해가지고는 수행이 안 되죠.

대혜종고가 이렇게 긴 문장[대화]속에서 단어 하나를 끄집어냅니다.

<없을 無자> 하나를 끄집어냈는데 이걸 話頭라고 합니다.

 

공안은 문장(대화 내용)으로 분량이 길고 상황을 설명해주는 첨부사항은 되겠지만

그 자체를 가지고 수행을 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수행을 할 때는 지금 여러분들이 배나 발을 보는 것처럼 알아차림의 마음을 가져다 놓는 기준점이 필요합니다.

 

이때 그 문장 속에 수없이 등장하는 단어 중에서 無라고 하는 단어를 끄집어내서 앉혀놓고 마음을 가져다놓는 기준점으로 삼자. 이렇게 했는데 - 이 단어를 화두라고 했습니다. 공안에서 화두가 나온 거죠.

화두라는 개념이나 공안이라는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하면 간화선을 이해하는데 훨씬 도움이 됩니다.

 

화두가 몇 개일까? 공안이 몇 개쯤 될까?

대개 1,700공안이라는 말을 들었을 겁니다.

정말 공안이 1,700개가 있었는가? - 그것은 아니죠.

경덕전등록에 등장하는 스님의 숫자가 1,702명인가 그랬습니다.

그래서 1,700공안이라는 용어가 나왔습니다.

 

이를 테면 요즘 컴퓨터 게임하는 이들은 컴퓨터 게임을 공안으로 삼고

거기서 단어 하나를 끄집어내서 화두를 삼을 수도 있습니다.

공안도 고정된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생성되고 소멸될 수 있습니다.

화두도 고정된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생성되고 소멸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화두와 공안을 이해할 경우에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대승경전과 밀교의 관계입니다.

대승경전에서 주장하는 바를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금강경을 읽어보면 수지受持, 독송 讀誦, 공덕 功德이라는 용어가 자주 나옵니다.

요즘 금강경에 대해서 많은 논란이 일고 있고 또 많이 번역하는데 - 그 근본 취지는 간단합니다.

 

금강경의 내용은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열심히 수행하자. 이게 금강경초반부의 대 주제입니다.

반야바라밀이라는 게 바로 그거죠.

 

즉 지혜를 완성하자!

지혜를 완성하려면 결국 수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참선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참선을 통해서 지혜를 성숙시키자.

 

금강경에서 참선을 하는 게 대단히 좋다.

그 대목이 끝나고 바로 다음 장에 나오는 내용이 <참선을 하는 게 좋다는 것을 적어 놓은 경전을 읽으면 좋다>

- 이게 독송공덕이잖아요.

 

그러니 참선을 할까요?

참선을 하면 좋다고 적어놓은 책을 읽을까요?

지금 금강경을 통해서 수행을 하나요?

금강경자체를 읽고만 있습니까?

 

아마 여러분들 거의 읽고만 있을 거예요.

이렇게 하면 수행자체는 전혀 되지 않습니다.

 

좀 더 나아가면 금강경을 읽는 것이 굉장히 좋다.

이 말을 많이 외우면 더 좋다.

그러니 수행을 하지 않고 금강경을 읽게 됩니다.

금강경을 아무리 빨리 읽는다 해도 한 번에 20분 - 30분 정도 걸립니다.

 

조금 전에 말했듯이 금강경의 주제는 두 개,

하나는 열심히 수행해서 지혜를 완성하자.

다른 하나는 열심히 수행해서 지혜를 완성하자 - 라는 이 말을 열심히 하면 더욱 좋다.

이게 독송공덕입니다.

한번 읽는데 20, 30분 걸리죠.

 

법화경 같은 것은 하루 종일 걸립니다.

화엄경 같은 경우는 모르긴 해도 한 달 정도 걸리게 됩니다.

그러다보니까 경전을 방안에서 차분하게 읽을 수 있는 시간적이나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나 가능한 셈이죠.

 

오늘날 책 한 권 살려면 일이만원 정도에 사지만 2000년 전에 책을 한 권 산다는 것은

오늘날 자동차 한 두대 사는 것과 맞먹는 경제적 부담일 겁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계층,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는 계층,

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계층,

결국 상류층, 지식층의 불교가 돼버린 거죠. 대승불교의 또 다른 면입니다.

 

택시운전수나 마차를 끄는 사람이 나는 정말 경전을 소유하고 싶고 경전을 읽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재력이 안 되고 그런 시간적 여유가 없다 - 어떻게 하면 됩니까?

 

경전을 읽고 경전을 소유할 수 있는 수행법을 만들어 주시오.- 인도에서 이런 요구가 강력하게 생겨납니다.

거의 500년 만에 여기에 대한 답이 나옵니다.

 

그것이 바로 밀교입니다.

경전을 다 읽지 않아도 좋다.

주인공의 이름을 한번 읽으면 - 외우면 - 경전 한권을 읽은 걸로 치자.

택시 운전수도 마차의 기수도 경전을 읽을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절에 가면 법화경을 다 읽습니까?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십니까?

모르긴 해도 후자를 하기 마련이죠.

 

‘관세음보살’ 한번 외우면 경전을 한번 읽은 걸로 치자. 이렇게 돼버린 거예요.

이후부터는 모든 불교도들이 대승불교에서 밀교로 옮겨 가버렸습니다.

 

이렇게 경전에 나오는 주인공의 이름을 한번 부르는 것 -

여기서 조금 발전하면 그 목소리를 통해서 참선을 하자,

이렇게 되면 진언불교가 되는 것이고, 염불선이 되는 겁니다.

즉 경전에서 주인공의 이름으로 발전되고 그 주인공의 이름을 통해서 수행법으로 발전되어 나가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공안에서 화두선으로 가고 그 화두를 대상으로 해서 알아차림 수행을 하는 것으로 발전돼 나갑니다.

그래서 화두를 보자! - 볼 看자를 써서 - 看話, 話頭禪, 公案禪 하는 거죠.

 

서기 1,100년 전후에 중국에서 이렇게 변해가는 겁니다.

이렇게 중국불교가 바뀌면서 중요한 전환점이 하나 생깁니다.

- 唐제국이 무너진 후 송이 건국되고 이어 북쪽의 金이 송을 침입합니다.

 

이에 군인들이나 민족 자주파들은 외세에 무력항쟁을 주장하고 문신들은 가능한 우리가 양보를 하고 평화를 유지하자.

- 한쪽에서는 主戰論을 주장했고 다른 쪽은 主和論을 주장을 합니다.

 

이렇게 뒤섞이다보니 공교롭게도 대혜 종고 선사의 수도원에 출입하는 이들은

거의 반 외세민족 자주파이었고 군인들이 좀 많았습니다.

 

당시 기존 수행자들은 육조혜능 이후 마조를 거쳐 임제스님 대를 지나면서

서서히 좌선을 위주로 하는 형태로 옮겨가기 시작합니다.

 

수행은 行住坐臥 語黙動靜 - 생활하는 곳에서 어디든지 눈을 감고 수행하면 그곳이 바로 선방이죠.

그래서 生活禪을 강조했고 勞動禪도 함께 강조한 겁니다.

그러다가 800년대, 900년대 들어서면 서서히 坐禪을 강조합니다.

 

오늘날 한국불교에서도 유달리 좌선을 강조하는 현상을 볼 수 있는데

-좌선이 매우 강조한다는 것은 출가수행자들에게 유리한 수행법이다 - 이리 이해하시면 됩니다.

 

오늘날 한국불교에서 참선을 하고 싶지만

- 반드시 선방에서 좌선을 하자고 하기 때문에 시간적,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계층에서는 이게 쉽지 않는 거죠.

 

중국에서도 그 시절에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참선을 하고 싶지만, 좌선만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니 시간도 없고 경제적 여유도 없었습니다.

 

좌선을 매우 강조하는 분들은 배를 잡고 화두를 잡고 수행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하나의 기법을 빠뜨려 버렸습니다.

그것이 무어냐? - 이름을 붙이면서 관찰하는 겁니다.

 

사이버 수행교실에서 그렇고 출석수업에서도 그렇고 알아차림의 대상을 잡을 때에 이름 붙이는 것을 굉장히 강조합니다.

부처님은 부처가 된 이후에도 끊임없이 이름을 붙였습니다.

숨이 들어가면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그리고 다시 하나, 둘, - 이렇게 숨에 대해서 이름을 붙였다.

숫자를 붙였다고 해서 數息觀입니다.

 

지금까지 화두를 잡는 수많은 수행자들도 이름을 붙이면서 화두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800년대, 900년대 일부 수행자들 알아차림의 대상을 보면서

이름을 붙이지 않고 묵묵하게 마음만 보내 버리는 거예요.

 

이게 5분, 10분 동안은 집중력이 좋아지는 것 같지만 시간이 좀 더 경과하면

집중력은 현격하게 떨어져 버리고 졸음이나 昏沈 속으로 빠져 들게 됩니다.

 

이렇게 이름을 붙이지 않고 화두를 잡거나 이름을 붙이지 않고 수행을 하는 사람들을 흔히 黙照禪이라고 합니다.

묵묵할 黙자죠. - 이름을 붙이지 않고(曹洞宗) 단지 알아차림 하는 마음만 보내는 것을 묵조선이라고 합니다.

이게 간화선을 만들었던 대혜종고선사가 활동하던 무렵쯤 되면 묵조선이 대중성을 획득하게 됩니다.

 

이 묵조선을 따르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지식인들이 많았습니다.

이들은 시간을 내서 좌선을 중요시했고 그리고 문자를 통해서 수행을 이해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대혜종고 선사의 회상에 출입하는 이들은 武人이 주류를 이루었고 무인들이다 보니 - 외세의 시대적 상황에 대해서 -

많은 희생을 치르더라도 민족자주성을 획득하자 이렇게 주장합니다.

 

묵조선을 하는 사람들은 문신이 위주이므로 외세에 가능한 전쟁으로 대항하지 말고 우리가 양보하여 화친을 맺자.

평화와 화친을 맺자 - 이렇게 주장하여 서로 부닥치게 됩니다.

 

대혜종고선사 쪽의 주전론자들이 정치게임에서 패하면서 많은 사람들은 죽거나 귀향을 가고

- 대혜종고선사도 10년 동안 귀향을 가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書狀으로 묵조선의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는 겁니다.

 

<이름을 붙이지 않고 화두를 보면 곧 졸음과 昏沈에 빠지게 된다>

- 이게 서장의 일관된 주제입니다.

 

여러분들이 한글로 번역된 것이 많으니까 언제든지 보십시오.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이 - 혼침, 망상으로부터 탈출하자 - 이거죠.

 

대혜종고 선사가 간화선을 만들면서 주장하는 요점은 끝까지 화두에 대해서 이름을 붙이자.

좌선 위주가 아니고 생활선 노동선 위주로 하자 - 이렇게 했던 겁니다.

물론 이것도 회상을 출입하던 신도들의 요구에 따라서 각각 답을 준 것이다 - 이리 보시면 되겠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서기 1,300년대 - 1,400년대가 되면 화두선은 중국에서 소멸해 버립니다.

그리고 강력하게 일어나던 선법도 중국에서 시들해 버립니다.

 

이때 중국에 달마스님과 같은 존재가 다시 나타나는데 - 그분은 인도에서부터 다시 옵니다.

이분은 이름은 ㄷ하냐바드라, 한문으로 번역해서 指空입니다.

지공선사가 중국에 와서 세 번째로 정통수행법을 되살립니다.

이때 지공선사에게 가서 나옹선사, 무학선사가 (수행)법을 배워옵니다.

 

그리고 그분을 한국으로 모셔옵니다.

한국으로 모셔 와서 楊州 檜巖寺를 창건하고 그곳에서 선법을 가르치게 됩니다.

 

다시 1,200년대의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겠습니다.

대혜종고 선사가 간화선의 획을 그어 놓았던 書狀이라는 책이 우리나라로 흘러 들어오게 되고

그 책을 佛日보조국사가 보게 됩니다.

불일 보조선사는 간화선법의 핵심적인 내용을 서장을 통해서 배우게 되고 이것을 통해서 그 유명한 定慧結社를 만듭니다.

 

위의 양대 산맥이 오늘날 조계종의 뿌리를 형성하게 되는데

이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보조스님이 직접 중국으로 가서 중국의 수행자들로부터,

수행을 배운 게 아니라 단지 책을 통해서 선법을 도입한 겁니다.

 

이렇게 되면 어떤 문제가 생기느냐?

수행법과 수행지도에서 큰 줄기는 함께 할 수 있습니다만 그러나 세세한 기법은 이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한국 불교수행을 지도하는 과정에서

세세한 기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역사적인 결함 때문이 아닌가?

- 저는 그렇게 이해를 하고 있죠.

 

우리 주변의 많은 스님들이 이야기할 때 화두선, 간화선이 한국의 주류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사실인즉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 선법이 들어오고 우리나라에 최초로 불교가 들어온 것은

오늘날 가야지방, 현재 다보선원이 있는 김해지역 일대입니다.

여기는 인도로부터 직접 선법이 들어왔습니다.

그것도 서기 48년 무렵에 - 그리고 800년대 중반, 중국을 통해서 광범위하게 선법이 들어옵니다.

 

흔히 九山禪門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최초는 680년대, 지금 운문사 쪽으로 선법이 들어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몇 세기에 걸쳐 들어온 모든 선법(수행법)은 당연한 사실이지만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위빠사나입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정통 수행법이었습니다.

 

1200년대 무렵에 불일 보조국사에 의해서 대혜종고 선사가 만든 간화선법이 들어옵니다.

그러나 그것도 결국은 觀法 바로 위빠사나라는 용어입니다.

 

우리는 看話라고 해서 특별한 선법이라고 보고 있지만 그것도 결국은 위빠사나를 한문으로 볼 看자를 썼던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지금도 간화선법이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위빠사나] 용어를 看話라고 표현했을 뿐이다.

- 라고 이해하면 되죠.

 

따라서 간화선이 주류니 위빠사나가 주류니 -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오히려 고려말, 조선초에 들어오면서 나옹, 무학스님, 그리고 조선조말로 내려오는 초의선사,

그런 분들은 모두 위빠사나의 대가들이었으며 선법의 대가들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초의선사의 비문을 보시면 <나는 간법수행자였다.> - ‘나는 위빠사나의 수행자였다’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한번 구해서 읽어보세요.

 

그러나 오늘날 여러분들이 조계종이 간화선의 주류로 되어있는데 -

간화선법은 중국에서도 그랬고 고려에서 마찬가지로 강한 무인 기질이 있습니다.

 

우직함이 있고 또 태생적으로도 그렇고 외세에 대해서 상당히 거부반응을 많이 보이고

민족자주성을 내세우는 선법이었습니다. 주된 지지계층이 무인들이었죠.

 

무신정권 때 간화선이 우리나라에 도입되었고 그것이 몽고에 대한 반외세 민족자주라는 것과 상당히 부합된 거죠.

그리고 고려말에 들어와서 원나라를 몰아 낼 때도 그랬습니다.

 

결국 이성계를 위시한 성리학, 주자학의 그룹들도 따지고 보면 반외세 자주화그룹이라고 보시면 되고 -

그분들과 같이 맥을 같이 했던 분들이 무학선사인 셈이죠.

 

조선조말 무렵에 들어와서 일본이 우리나라에 침략해 올 때 일본불교 종파인 曹洞宗을 앞세웠습니다.

이 조동종은 묵조선을 위주로 수행했던 그룹입니다.

 

이에 우리나라에서 민족성향을 가지고 있던 수행자들이 <불교는 살아나겠지만 외세에 동참하는 불교는 거부한다>

조동종의 대척점에 서 있던 임제선법[간화선법]을 주창하게 되고 이것이 경허, 만공, 만해로 이어지는 오늘날 조계종의 맥을 형성합니다.

 

그 뒤 한반도에서 일본이 물러나고 해방 정국을 거치면서 일제잔재를 청산하자 해서 만들어진 게 오늘날 조계종입니다.

조계종은 당연히 간화선법, 화두선을 종주로 삼게 됐던 거죠.

따지고 보면 오늘날 조계종이 만들어진 게 불과 40년밖에 안됩니다.

 

지금 조계종은 조선 500년 동안에 침체 되어있던 불교를 이렇게 훌륭하게 복원을 이룩한 겁니다.

그리고 많은 대중들은 조계종을 통해서 불교를 이해하게 됩니다.

 

그 결과 우리는 마치 오늘날 조계종이 주장하는 화두선이 한국불교 2000년을 관통하는 정통 수행법이라고 생각하지만

한국불교를 관통하는 정통 수행법은 화두선이 아니라 바로 부처님의 정통 수행법이었습니다.

 

그것을 알아차림이라고 부르든지, 위빠사나라고 부르든지,

화두선이라고 부르든지, 관을 위주로 삼고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본인이 안타까운 것은 한국불교를 전공하고 대중들에게 한국불교를 전해주는 불교학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의 무지함이

대중을 잘못된 역사를 이해하게 만드는데 앞장을 서지 않았나? - 이렇게 이해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구체적으로 화두를 어떻게 잡을 것인지를 하는 부분에 대해서 이어서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대혜종고大慧宗杲(1089-1163)

 

송대 임제종 양기파, 宣州(安徽省) 영국현寧國縣사람, 성은 奚씨 자는 담회曇晦 호는 묘희妙喜 운문雲門

12세에 鄕校에 들어가 공부하다가 ‘세간공부가 어찌 出世間法 구하는 것만 같겠는가’하고

16세에 東山 혜운원慧雲院에서 득도하고 自力으로 雲門, 睦州등의 說話를 熟讀하였다.

 

출가초기에 曹洞門下에서 선지참구禪旨參究하고 政和원년(1111)경산徑山의 담당문준湛堂文準(眞淨克文의 法嗣)회하에서 공부하고 각범혜홍覺範慧洪(1071-1128), 장상영張商英 등을 배알拜謁하다.

 

담당湛堂의 유탁遺託으로 원오극근圜悟克勤에게 나아가 증오하다.

승상 여순도呂舜徒의 주청으로 ‘佛日大師’의 호를 받고 圓悟가 蜀땅으로 돌아간 후

金과의 전란을 피하여 海昏(강서성)의 雲門庵에 이주하다.

 

선사는 특히 조동의 黙照禪에 대하여 ‘公案禪’을 고취鼓吹하며

徑山의 能仁禪院에서 교화하니 학인이 항상 2천을 헤아려 ‘臨濟의 再興’이라 칭하다.

 

그러나 戰亂이 간상奸相 진회秦檜 등에 의해 和約으로 체결되자 주전론자인 장구성당張九成黨으로 몰려

의첩衣牒을 빼앗기고 형주衡州(호남성)로 유배당하며 10여년을 고생하는 동안 <正法眼藏> 6권을 지었다.

 

그 뒤 사면되어 아육왕사阿育王寺에 주하며 天童山의 宏智와 道交하였다.

1158년 다시 경산에 주하면서 孝宗帝로부터 ‘大慧禪師’라는 호를 받고 남송 隆興원년 75세로 示寂하다.

 

제자들의 간청에 의해 남긴 臨終偈에

생야지임마生也只恁麽 삶이 이러하고

사야지임마死也只恁麽 죽음이 이러하나니

유게여무게有偈與無偈 게송이 있고 없고

시심마열대是甚麽熱大 이 무슨 뜨거움인가? 라 하다.

 

시호는 보각普覺. 그는 특히 五祖演에서 비롯한 公案禪(看話禪)을 확립하여 천동정각과 當代 禪界의 雙璧을 이루었다.

저서 <大慧語錄> 12권 <대혜법어> 3권 <대혜보설> 5권 <大慧宗門武庫> 등.

/大慧年譜, 회요17, 보등록15, 회원19, 통재20, 속전등록27, 속선림승보전6, 명고승전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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