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띠(sati)의 의미와 쓰임에 관한 고찰/임승택 동국대 인도철학과
2014-01-21 00:48:13
I. 시작하는 말
‘八正道’에 ‘正念’이라는 지분이 있다. 정념의 원어는 sammāsati이다.
여기에서 sammā는 ‘적절한’, ‘올바른’의 뜻이며 sati는 ‘념’으로 번역되는 그것이다.
이 ‘정념’이라는 번역술어는 거의 모든 한문경전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본 고는 바로 여기에서 ‘념’으로 번역되는 ‘sati’의 의미와 쓰임에 관해 논의에 초점을 맞춘다.
念이라는 한자어는 ‘생각하다’ ‘외우다’ ‘읊다’라고 하는 기본적인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정념’이라는 한역술어 역시 ‘바른 생각’으로 풀이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동국대학교 역경원에서 번역한 한글대장경의 경우
“사무구유捨無求遊 정념정지이신각락正念正智而身覺樂”라는 구절을
“모든 것을 버리고 구함이 없이 노닐며 바른 생각과 바른 지혜이면서도 몸에 즐거움을 느낀다”라는 식으로 옮긴다.¹
[¹ 이 번역 문장에서 문제되는 것은 비단 ‘바른 생각’으로 번역된 ‘正念’뿐만이 아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일단 논의의 범위를 정념에 국한시켜 두기로 한다.
정념에 대한 이러한 번역의 예는 이곳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며 한글대장경 전체를 통해 무수히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동국대역경원, 한글대장경 중아함경 권1(서울: 동국역경원1985) p5 등]
그런데 sati가 이렇게 이해될 때 일반적인 의미의 ‘생각(thought)’과 혼동될 여지가 있다.
실제로 변상섭 선생은 正念을 그와 같은 ‘바른 생각’으로 오해한 까닭에 이를 禪家에서 말하는 ‘一念不生’ 즉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음’이라는 구절에 대비시킨 듯한 당혹스러운 논리를 펼치고 있다.²
[² 八正道의 正念과 관련하여 필자를 당혹케 한 변상섭 선생의 견해를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여덟 가지 바른 길을 실천하는 것을 지극한 도인 줄로 착각하고 이러한 보조적인 수단에 얽매여 참다운 선정을 수행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어 바른 생각(正念)을 닦는 것을 실천한다는 허구적인 분별사유가 일어날 때 ‘아!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지, 끊어야 돼’하고 그 생각을 끊고 바른 생각을 하려고 노력한다고 하자. 이때 ‘아!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돼, 끊어야 돼’하는 생각도 곧 분별적 사유로써 의식의 작용인 것이다. 이렇게 수행한들 어떻게 우리가 목표하는 모든 의식의 작용이 끊어진 참다운 선정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겠는가? ···” 변상섭, 禪 신비주의인가, 철학인가?(서울: 컬처라인 2000) pp.262-263]
나아가 “간화에서 볼 때 위빠싸나에서 말하는 느낌이나 감정 등의 알아차림은 하나의 망심에 불과하다”는
종호스님의 주장 또한 ‘sati’ 즉 ‘념’이라는 말에 대한 오해로부터 비롯된 것이다.³
[³ 그와 같은 종호스님의 주장에서 ‘알아차림’이라는 표현이 ‘sati’를 의미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을 부연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문구에 기술된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아야 전도된 마음이 끊어지며···”라는 서술에 비추어 볼 때 이것이 念 즉 sati를 두고 한 말임에 분명하다. <선수행법의 비교고찰> 한국불교학제25집(서울: 한국불교학회1999) p.292]
그러나 이러한 오해들은 sati의 의미와 쓰임에 대해 조금이라도 주의를 기울인다면 어렵지 않게 해소될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초기불교의 전형적인 명상법의 하나로서 ‘ānāpānasati’라는 것이 있다.
‘安般念’ ‘入出息念’ 등으로 한역되는 이 술어에서 sati란 ānāpāna
즉 ‘호흡’에 대한 ‘생각’이 아니라 ‘호흡’에 대한 ‘주의집중’ 혹은 ‘마음지킴’을 뜻한다.
따라서 sati란 “화두를 일념으로 든다”는 표현에서⁴[종호스님, 앞의 논문p.929 인용]
“-를 일념으로 든다”는 것에 비견할 수 있다.
이러한 비유는 ānāpānasati 수행의 공덕으로 일컬어지는 漏盡智의 언급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즉 화두 수행과는 다른 맥락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아야 전도된 마음이 끊어진다”⁵는
언급과 마찬가지로 ānāpānasati 또한 일체의 번뇌가 다한 경지인 漏盡智를 얻기 위한 행법으로 언급되고 있다는 것이다.⁶
[⁵종호스님, 앞의 논문p.929 인용]
[⁶ ānāpānasati 즉 入出息念이 일체의 번뇌가 다한 경지인 漏盡智를 얻기 위한 것임을 나타내는 경구를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如是修安那般那念 得大果大福利 是比丘欲求第二․第三․第四禪 慈․悲․喜․捨 空入處․識入處․無所有入處․非想非非想入處 具足三結盡 得須陀洹果 三結盡 貪․恚․癡薄 得斯陀含果 五下分結盡 得阿那含果 得無量種神通力 天耳․他心智․宿命智․生死智․漏盡智者 如是比丘 當修安那般那念 如是安那般那念 得大果大福利” 대정장, 권2, 209b]
다시 말해서 ‘화두’라고 하는 것에 몰입해 들어가는 행법으로서의 간화선에서와 같이
ānāpāna sati 또한 호흡이라는 것에 마음을 집중하여 몰입해 들어가는 방법론적 특징을 지닌다는 것이다.
물론 일부에서 주장하듯이 화두를 통해 얻어지는 경지가 ānāpānasati의 그것보다 더 수승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초기불교의 수행체계 내에서 누진지란 분명 釋尊이 성취한 궁극의 경지로 인정된다.
따라서 ānāpānasati와 누진지의 관련성을 밝히는 경구의 언급이 존재하는 이상
念으로 번역되곤 하는 sati가 호흡이나 느낌 따위에 관련된 망념으로 취급될 수는 없는 문제이다.
그런데 이러한 sati가 모든 한역경전에서 위에서와 같이 ‘-한 생각’ 따위의 念의 의미로만 풀이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중아함경 등에는 “··· 부망심지소응不忘心之所應 시명정념是名正念” 즉
“··· 마음에 응하는 바를 잊지 않는 것으로 이것을 정념이라 한다”⁷는 구절이 있다[⁷ 대정장 권1, 469b 인용]
이 문구는 비록 正念이라는 기존의 번역어를 차용하고 있지만
不忘이라고 하는 또 다른 번역술어의 가능성을 내비추는 경우이다.
실제로 sati는 念으로 번역되는 예가 많지만 억념憶念 지념持念 수의守意 의지意止 등의
또 다른 한역어들도 함께 사용된다.
이들은 念이라는 말만으로는 sati의 의미를 충분히 담지해 내지 못한다는 고심 끝에 고안된 용어들로 판단된다.
따라서 이들 모두의 원어인 sati의 온전한 뜻을 종합적으로 점검해 보고
그와 같은 다양한 번역이 있게 된 배경을 고찰해 보아야 할 필요성이 대두된다.
sati라는 술어는 팔정도의 正念(sammāsati)이라든가 入出息念(ānāpānasati) 따위에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초기불교의 실천론을 하나의 틀로써 집약한 것으로 四念處(cattāro satipaṭṭhānā)라는 것이 있다.
이 사념처는 몸(身)․느낌(受)․마음(心)․법(法)의 전반에 걸친 육체적․정신적 현상을
수행의 과정으로 포괄하는 체계인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sati의 수행체계라 할 수 있다.
따라서 sati의 의미와 쓰임에 관한 고찰을 테마로 하는 본 고는 특정 용어에 대한 개념 분석의 차원을 넘어
초기불교 수행론의 핵심적 내용에 대한 고찰로 이어지는 성격을 지닌다.
II. 사띠에 대한 그간의 번역
근래에 들어 남방상좌부(Theravada)의 위빠싸나(vipassanā) 행법이 새롭게 소개되어 급속도로 보급되는 추세이다.
따라서 관련 서적의 유입과 함께 그에 대한 번역물 또한 활발하게 출간되고 있다.
본 장에서는 그간의 번역물에서 sati가 과연 어떻게 옮겨졌는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sati의 의미에 관한 논의의 실마리를 잡고자 한다.
sati에 해당하는 우리말 번역어를 담고 있는 서적들을 출간 연대순으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거해스님은 <깨달음의 길>을 통해 sati를 ‘마음집중’으로 번역했다.⁸
[⁸거해스님<깨달음의 길>서울: 도서출판 山房1991]
그 다음의 순서로 김열권 선생은 <위빠싸나(I, II)>에서 이를 ‘관찰’ ‘마음집중’ ‘알아차림’ 등으로 번역하였다.⁹
[⁹ 김열권<위빠싸나I>I서울: 불광출판부1993 p.143 등]
나아가 정원스님은 <위빠싸나 수행>에서 ‘마음챙김’으로 번역했고¹⁰[정원스님<위빠싸나 수행>서울:경서원1998]
송위지 선생은 <불교선수행의 핵심>에서 ‘주의깊음’으로 번역했으며¹¹
[¹¹송위지 옮김<불교선수행의 핵심>서울:시공사1989p10 등>
조준호 선생은 <韓國禪學>에 실린 논문에서 ‘수동적 주의집중’으로 번역했다.¹²
[¹²조준호<초기불교에 있어 止觀의 문제>韓國禪學제1호 서울:한국선학회2000p.337]
그러나 모든 연구자들이 sati라는 용어에 대해 우리말 번역을 시도한 것은 아니다.
김형준․김준호 선생 등과 같이 ‘念’이라는 기존의 한자어를 고수한 분들도 있다.¹³
[¹³김준호<初期佛典에 나타난 止觀槪念>韓國禪學제1호 서울 한국선학회2000;
김형준<元始禪의 本質 및 修習構造에 관한 一考>불교학연구창간호 서울:불교학연구회2000]
이와 같이 다양한 우리말 번역어들은 서론에서 언급했던 한역어들 못지않게
sati라는 용어의 범상치 않는 쓰임을 다시금 짐작케 한다.
동시에 이 분야에 대한 전공자들이 하나의 술어를 놓고 이렇게 달리 생각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경탄을 자아낸다.
이상의 번역어들에서 공통점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이들을 애써 관련지워 말한다면 일단 마음집중이라는 표현은
두 연구자가 공감한 것이고 마음챙김이라는 말과도 연결된다.
나아가 주의 깊음과 수동적 주의집중은 강조점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동일한 의미 선상에서 이해될 여지를 남기고 앞서의 마음집중과 미약하게나마 그 뜻이 통한다.
따라서 이제까지는 이러한 표현들의 유사점을 추출하는 속에서 그것의 대략적인 의미를 떠올릴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들 중에서 sati에 대해 나름의 번역어를 선택하게 된 직접적인 이유를 밝힌 연구자로는 조준호 선생이 유일하다.
나머지 연구자들은 이 용어를 번역하면서 그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
따라서 이것에 대해 얼마만큼의 주의를 기울였고 이 용어의 성격과 의의에 대해 어느 정도 고민했는지를 알 수 없다.
바로 이것은 가장 최근의 연구 결과로서 조준호 선생에 의해 비로소 sati 개념이 주목되었고
또한 본격적인 학문적 장에 도입되었음을 뜻한다.
따라서 본 장에서는 일단 그의 견해를 세부적으로 소개하고자 하며
나머지에 대해서는 글을 전개해 나가면서 상황에 따라 다루기로 한다.
조준호 선생에 의하면 念으로 번역되는 sati란
“··· 선정을 통해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아 편안하고 고요한 상태가 지속되어 ···
사유나 감정이 능동적으로 일어나지 않은 상태
그러면서 마음은 분명하게 깨어있는 상태로서 ···
이제까지 스스로의 사유와 감정 그 자체와 하나가 되는 능동적인 행위로부터 벗어나게 되어···
완전히 수동적으로 변화되었음을 뜻한다”¹⁴고 하였다.¹⁵
[¹⁴ 조준호 앞의 논문, pp.337-338 부분 인용]
[¹⁵ 이 대목에 관련하여 보조사상연구원의 제39차 학술발표회 발표문(p.6)에서
필자가 기술했던 원문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조준호에 의하면 念으로 번역되는 sati란, ‘(八正道의 正念과 다른 것으로) ···
선정을 통해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아 편안하고 고유한 상태가 지속되어 ···
사유나 감정이 능동적으로 일어나지 않은 상태, 그러면서 마음은 분명하게 깨어있는 상태로서 ···
이제까지 스스로의 사유와 감정 그 자체와 하나가 되는 능동적인 행위로부터 벗어나게 되어 ···
완전히 수동적으로 변화되었음을 뜻한다.···
여기에서 문제되는 것은 따옴 글의 괄호 안에 삽입되었던 ‘(八正道의 正念과 다른 것으로 ···)’인데
발표가 끝난 이후에 조준호 선생의 <초기 불교에 있어 止觀의 문제>를 다시 확인해 보니 거기에는
“팔정도의 正念이란 四念處觀을 의미하는 것으로···(pp.325-326)”등의 언급도 있었다.
따라서 괄호 안에서 필자가 임의로 삽입한 구절은 조준호 선생의 본래 의도가 아니었음을 밝힌다.
이 점에 대해서는 조준호 선생께 진심으로 사과드린다. 그러나 이 구절을 삭제한다 하더라도, 조준호 선생의 기본 논지와 필자의 견해 자체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된다. 본 교정본의 Ⅱ장 하단에서는 종래의 ‘八正道와 正念의 관련성’을 밝히는 경구의 인용을 삭제하는 대신에 Aṅguttaranikāya에는 나오는 사띠에 관련된 내용을 추가하여 조준호 선생의 견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필자의 논지를 보강하였다.]
그리하여 일상적인 사유작용과 감정에 의해 존재 파악이 왜곡되는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지극하게 주시하는 것을 곧 sati라고 풀이하였다.
또한 선생에 따르면 이제까지의 sati에 대한 우리말 번역어로서 기억․알아차림․주시․관찰․마음챙김․각성 등은
모두 적절하지 않다고 한다.¹⁶
이러한 번역어들은 모두 일상적인 사유작용과 감정상태에서도 가능한 것으로 第四禪에서 완성되는 사띠의 의미를 충분히 담지해 내지 못한다고 한다.¹⁷
[¹⁶조준호, 앞의 논문, p.338. ¹⁷조준호, 앞의 논문, p.338 참조]
이상과 같은 조준호 선생의 주장에서 sati가 완전해지는 상태란 대상에 대해 주관적인 감정을 이입시키지 않는 경지이다.
그리하여 모든 존재가 있는 그대로(如實) 드러나는 상태이다.
이러한 상태를 그는 “드러난 존재를 수동적으로 맞이하는 특수한 상황”¹⁸으로 풀이한다.[¹⁸조준호, 앞의 논문, p.341]
필자가 판단하는 바로서 조준호 선생의 이러한 견해는 Mahāsatipaṭṭhāna -Suttanta(大念處經)에 나타나는 것으로
“여기에 한 비구가 있어, 몸(身)에 대해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隨觀) 머문다.
열렬함과 삼빠자나(知)와 사띠(念)을 지니고서 (머문다).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 ”¹⁹는 구절과 내용적 맥락을 같이 한다.
[¹⁹ “idha bhikkhu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ṁ···”
DN. vol.2. p.290; MN. vol.3. p.252; S.N. vol.5. p.173]
인용문에 등장한 ‘따라가며 보는 것(隨觀)’ 즉 ‘anupassin’이라는 말은 어떠한 현상에 대해 주관적 감정을 이입시키지 않고
그것에 순응하여 그 변화의 과정을 피동적으로 관찰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를 부연하는 말로서 ‘sampajāna(知)’와 ‘sati(念)’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인용문 내에서
‘따라가며 보는 행위’에 수반된 동시적인 마음의 작용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드러난 존재를 수동적으로 맞이하는 특수한 상황”으로서의
sati에 착안한 선생의 주장에 일단의 설득력이 실리게 된다.
필자 또한 그와 같은 조준호 선생의 논리에 어느 정도 공감한다.
선생의 논지에 따르면 스스로의 사유 혹은 감정과 혼연의 일체가 되어 작용하는 sati란 온전치 못한 것이다.
따라서 ‘주관적 의지(intention)’의 개입 가능성을 지닌 이제까지의 모든 번역어들은 적절치 못한 것으로 귀착된다.
선생의 주장에서 언급되듯이 대상에 거스르지 않고 대상을 따라가는 수동적 주의집중으로서의 ‘사띠의 확립(satipaṭṭhāna)’이 지속될 때라야 비로소 있는 그대의 현상이 지닌 無常․苦․無我의 실상이 저절로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²⁰
[²⁰ 조준호, 앞의 논문, p.338 참조]
그러나 그와 같은 주장에는 무리가 따르는 것도 사실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선생은 “念의 발현과 완성이 四禪의 목적이다”²ⁱ고 했고
“第四禪에서 완성되는 念은 오로지 일상적인 사유작용이 단절된 상태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²²고 했다.
[²ⁱ조준호, 앞의 논문, p.334. ²²조준호, 앞의 논문, p.338 참조]
그러나 초기불교의 수행론을 집성한 경전으로서 Paṭisambhidāmagga에는
“初禪에는··· 거친사유(尋)가 수반되고 미세한 사유(伺)가 수반되고···
사띠(念)가 수반되고, 마음집중(三昧)이 수반되고···”²³라는 언급이 엄연히 존재한다.
[²³ 이 부분에 관련된 경구의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선정(初禪)에는··· 거친 사유(尋)가 수반되고, 미세한 사유(伺)가 수반되고,
기쁨(喜)이 수반되고, 즐거움(樂)이 수반되고, 마음굳힘(攝持)이 수반되고,
믿음(信)이 수반되고, 정진이 수반되고, 사띠(念, sati)가 수반되고, 삼매가 수반되고, 혜가 수반된다
(paṭhamassa jhānassa… vitakkasampannañ ceva hoti vicārasampannañ ca pītisampannañ ca sukhasampannañ ca cittassa adhiṭṭhānasampannañ ca saddhāsampannañ ca viriyasampannañ ca satisampannañ ca samādhisampannañ ca paññāsampannañ ca).” Ps.vol.1. p.168]
따라서 第四禪에서 완성된다고 역설되었던 sati가 사실은 初禪에서부터 존속하는 것임이 극명하게 나타나 있다.
나아가 Aṅguttaranikāya 등에는 사띠의 성격과 의의에 관한 언급으로서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한다.
비구들이여, 마치 옷에 불이 붙어 있고 머리에 불이 붙어 있어, 옷과 머리(의 불을) 끄려는 것과 같이
극도의 바램과 노력과 정진과 맹렬함과 물러남이 없는 사띠(念, sati)와 삼빠자나(知, sampajañña)를 행해야 한다.
바로 그와 같이 비구들이여, 비구는 그러한 선한 법을 얻기 위해
극도의 바램과 노력과 정진과 맹렬함과 물러남이 없는 사띠와 삼빠자나를 행해야 한다.
바로 그러한 연후에, 그는 안으로 마음의 가라앉음(內心寂止)과 탁월한 혜로써 보는 법(增上慧法觀)을 얻게 된다.²⁴
[²⁴ “seyyathā pi bhikkhave ādittacelo vā ādittasīso vā tasseva celassa vā sīsassa vā nibbāpanāya adhimattaṁ chandañ ca vāyāmañ ca ussāhañ ussoḷhiñ ca appaṭivāniñ ca satiñ ca sampajaññañ ca kareyya: evam eva kho bhikkhave tena bhikkhunā tesaṁ yeva kusalānaṁ dhammānaṁ paṭilābhāya adhimatto chando ca vāyāmo ca ussāho ca ussoḷhi ca appaṭivāni ca sati ca sampajaññañ ca karaṇīyaṁ. so aparena samayena lābhī ceva hoti ajjhattaṁ cetosamathassa lābhī ca adhipaññādhammavipassanāya.” A.N. vol.5. pp.99-100]
이 인용구에 나타나는 내용을 요약하면
‘사띠(念)’라는 것은 ‘삼빠자나(知)’와 더불어 ‘사마타(止)’ 즉
‘내부적인 마음의 가라앉음(ajjhattacetosamatha)’과 ‘위빠싸나(觀)’ 즉
‘탁월한 혜로써 보는 법(adhipaññādhammavipassanā)’을 낳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특히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사항은 목적격으로 표현되고 있는 ‘사띠(satiñ)’인데 이것이
‘의지적인 노력의 대상’으로서 원망형과 미래수동분사형의 ‘마땅히 행해야 한다(kareyya, karaṇīyaṁ)’는 말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이 문장에서 사띠는 ‘극도의(adhimattaṁ)’ ‘바램(chandañ)’ ‘노력(vāyāmañ)’ ‘정진(ussāhañ)’
‘맹렬함(ussoḷhiñ)’ ‘물러나지 않음(appaṭivāniñ)’ 등의 술어와도 동일한 격(case)을 이루어 이들의 수식을 받고 있다.
나아가 ‘그러한 연후에(aparena samayena)’ 비로소 사마타와 위빠싸나를 얻을 수 있다는 언급까지 분명하게 등장한다.
이러한 내용을 고려한다면 선생이 생각한 사띠(念)의 개념에는 경전에서 설명되는
내용과 불일치하는 면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조준호 선생의 주장이 지닌 장점과 단점을 필자 나름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선생은 ‘수동적 주의집중’이라는 표현으로써 사띠라는 용어가 지닌 성격을 밝히는 데에 어느 정도 기여를 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을 지나치게 강조한 까닭에 그것의 영역을 第四禪 이후의 고원한 경지로 국한시키는 우를 범했다.
이것은 이미 살펴본 두 인용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경전에서 설명되는 내용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따라서 조준호 선생이 피력한 sati란 독창적인 것임에 분명해졌다.
그리하여 원래의 사띠는 그 온전함의 정도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지만
第四禪이 발현되기 이전부터 존재하는 것이라는 식으로 수정해야만 될 상황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수정은 거기에서 그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선생의 논지가 흔들린 이상 그에 의해 거부된 기존의 번역어들 또한 외면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까지 번역된 표현들을 통해 사띠의 의미를 규명하고자 했던 필자의 시도는 원점으로 되돌아 갈 수밖에 없다.
III. 새로운 번역어로서의 마음지킴
그렇다면 이제 원점에서부터 다시 sati의 의미를 점검해 보기로 하겠다.
sati란 산스끄리뜨어의 동사 원형 ‘√smṛ(기억하다)’와 같은 기원을 지닌 말이며 ‘smṛti’와 동의어이다.
사전상에 나타난 sati의 의미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될 수 있는데
첫 번째의 의미는 ‘기억(memory)’이나 ‘회상(rememb rance)’이고
두 번째의 의미는 ‘주의집중(intentness of mind)’ 혹은 ‘주의깊음(mindfulness)’이다.25)
첫 번째 부류의 ‘기억’이라는 말은 이미 경험하여 개념적으로 고정된 사실에 대한 마음의 작용을 의미하고
두 번째 부류의 ‘주의집중’ 혹은 ‘주의깊음’은 현재의 사물에 대한 마음의 작용을 나타낸다.
이와 같은 sati는 이미 언급했듯이 念․憶念․意止․持念․守意 등으로 한역되었고
마음집중․관찰․알아차림․마음챙김․주의깊음․수동적 주의집중 등으로 풀이되었다.
여기에서 念이라든가 持念, 憶念 등의 한역어는 첫 번째 부류의 의미에 가까운 것이며
守意와 意止 따위를 비롯한 나머지의 우리말 번역어들은 대체적으로 두 번째의 것에 근접해 있다.
sati의 의미가 이와 같이 분류될 수 있는 예는 주석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Visuddhimagga에서는 이 용어에 대해
“그것에 의해 (사람들이) 기억하거나 스스로 기억하므로 혹은 단지 기억 자체, 이것을 사띠라 한다”²⁶고 말한다.
[²⁶ “saranti tāya, sayaṁ vā sarati, saraṇamattaṁ eva vā, esā ti sati” Vism. p.464]
즉 sati의 일차적인 의미를 ‘기억’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Visuddhimagga의 이어지는 구절에서는 sati가 다음과 같이 부연된다.
즉 “이것(sati)은 들뜨지 않음을 특징으로 하고 잊지 않는 것을 기능으로 한다.
보살핌을 나타남으로 하거나 대상을 향한 상태를 나타남으로 한다.
견고한 생각을 직접적인 원인으로 하고 몸 따위에 대한 사띠의 확립을 직접적인 원인으로 한다”²⁷고 설명한다.
이러한 언급은 sati의 의미가 단순히 과거의 것에 대한 기억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²⁷“sā apilāpanalakkhaṇā, asammoharasā, ārakkhapaccupaṭṭhānā,
visayābhimukhabhāvapaccupaṭṭhānā vā : thirasaññāpadaṭṭhānā, kāyādisatipaṭṭhānapadaṭṭhānā vā···” Vism. p.464]
이와 같은 sati의 의미에 대해 Saddhammapakāsinī에서는
“사띠란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 산란하지 않게 하는 원인이 되는 것을 사띠라 한다”²⁸고 정의한다.
[²⁸ “satīti ajjhattabahiddhāvikkhepahetubhūtā sati” PsA. p.471]
따라서 이 용어는 ‘기억하다’라고 하는 기본적인 의미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거기에서 진전되어
‘마음상태’ 혹은 ‘마음조절’에 관련한 개념으로 확장되어 사용된 것으로 판단된다.
즉 Visuddhimagga의 인용구에서 볼 수 있듯이 ‘잊지 않음(saraṇa, asammoha)’이라는 마음의 ‘기능(rasā)’을 통해
‘들뜨지 않음(apilāpana)’이라든가 ‘산란하지 않음(avikkhepa)’을 낳는 행법의 의미로 정착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러한 의미의 sati가 ‘마음상태’ 혹은 ‘마음조절’에 관련한 용도로 사용될 때에는
과거의 것에 대한 기억이나 회상의 의미가 배제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의 쓰임에 관련한 언급으로 Paṭisambhidāmagga에는
“바른 사띠(正念)란 무엇인가?
여기에 한 비구가 있어 몸에 대해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삼빠자나(知)와 사띠(念)를 지닌 (비구는)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식별할 수 있다 ···
이것을 바른 사띠라 한다”²⁹라는 구절과
“들숨을 따라가는 것, 날숨을 따라 가는 것이 곧 사띠라네 ··· ”³⁰라는 구절이 있다.
[²⁹ “katamā sammāsati?
idha bhikkhu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ññ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ṁ···
ayaṁ vuccati sammāsati (Ps. vol.1. p.41)”를 원어로 하는 본 인용문은 Mahāsatipaṭṭhāna-Suttanta(D.N. vol.2. pp.290, 313.; M.N. vol.3. p.252; S.N. vol.5. pp.9-10, 173) 등에 등장하는 “idha bhikkhu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ṁ, ··· ”라는 문구에 등장하는 내용과 다르다. 이 부분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拙稿 <Paṭisambhidāmagga(無碍解道)의 수행관 연구, -들숨․날숨에 관한 논의(Ānāpānakathā)를 중심으로-> (동국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청구논문, 2000), pp.95-96에 실린 각주를 참조할 것]
[³⁰ “anugacchanā ca assāsaṁ passāsaṁ anugacchanā sati···” Ps.vol.1. p.164]
이들은 sati의 대상이 현재적인 것임을 분명히 해준다.
즉 ‘몸’이라든가 ‘숨’ 등에 관련된 ‘내부적․외부적’ 현상은 현재 진행되는 사태인 것이다.
이상에서 인용한 주석서의 해설을 통해 드러난 sati의 의미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sati란 먼저 기억에 의해 개념적으로 고정된 사실에 대한 마음의 작용을 의미한다.
그리고 현재의 사물에 대한 마음의 작용을 포함한다.
그러나 sati라는 용어가 마음상태에 관련한 의미로 사용될 때에는
과거의 것에 대한 마음작용의 의미가 배제되는 경우가 지배적이다.
따라서 이들 내용을 통해 사띠를 번역하자면 현재적인 마음작용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기억 따위의 의미를 포섭하는 형식이 되어야 한다.
즉 어느 한쪽에 일방적으로 치우친 번역어는 일단 배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기존의 번역어들을 이러한 관점에서 재분류해 보면
念․憶念 등은 분명 과거의 것에 대한 마음의 작용으로 기울어 있는 표현이다.
그리고 意止․마음집중․관찰․알아차림․마음챙김․주의깊음․수동적 주의집중 등은
현재적인 마음의 상태 혹은 마음의 기능만을 나타내는 경향이 짙다.
나아가 이들 중에서도 특히, ‘관찰’이라는 표현은 ‘vipassanā(觀)’의 뜻에 더 가까운 것이고
‘알아차림’은 ‘sampajāna(知)’라는 용어와 혼동을 초래할 염려가 있다.
그리고 ‘마음집중’은 선정의 상태를 나타내는 용어인 ‘samatha(止)’ 혹은 ‘samādhi(三昧)’로 오해될 여지를 남긴다.
한편 ‘마음챙김’은 ‘챙기다’라고 하는 기본형의 사전적 의미가
“어떤 일에 소용될 물건이 있고 없음을 따지어 건사하거나 보살피거나 찾아서 한데 모으다”이다.³¹
[³¹ 우리말사전편찬회編 우리말대사전(서울:도서출판삼성문화사,1995) p.1577]
즉 ‘따지다’‘건사하다’‘보살피다’‘찾다’‘한데 모으다’ 등과 같은 일상적 의미를 광범위하게 함장한 말로서
이제까지 논의한 사띠의 의미를 벗어나는 측면이 많다.
따라서 전문용어로서 사용되기에는 부적당하다고 판단된다.
더구나 ‘마음챙김’은 ‘챙기다’라고 하는 말의 쓰임과 관련하여 문헌적 용례 또한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상에서 언급한 모두는 sati의 의미를 담아내는 데 적절하지 않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거론되었던 번역어들 중에서 念․持念․守意의 한역어만이 남은 셈인데
이들 중에서도 念은 애당초 ‘생각’이라는 의미가 지배적인 말이며 또한 그렇게 오용되고 있다.
결국 持念과 守意만이 위에서 거론한 sati의 내용을 온전히 담아 낼 수 있는 용어로 남는다.
따라서 持念과 守意라는 한역어와 동일한 의미 선상에 놓인 우리말 번역어를 선정하는 것이 과제로 남는다.
이미 언급한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sati란
“특정한 대상을 지속적으로 관찰하거나(anupassī) 따라가는 것(anugacchanā)으로서 마음의 방황을 멈추게 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³²
[³² 拙稿 앞의 논문 p.97]
그리고 이 정의에 바탕하여 과거의 것에 대한 마음작용까지도 담지해 낼 수 있는 말이 요구된다.
바로 여기에서 필자는 이러한 조건들을 충족시킬 수 있는 말로서 ‘(-에 대한) 마음지킴’
혹은 ‘(-을 통한) 마음지킴’라는 번역어를 새롭게 제시하고자 한다.
필자가 제시하는 ‘마음지킴’이라는 번역어에서 ‘지킴’이란 ‘지키다’라고 하는 기본형에 근거를 둔 말이다.
이러한 ‘지키다’의 사전적 의미는
“①잃지 않도록 살피다. 수호하다.
②눈 여겨 보다. 조심하여 보살피다.
③절개나 정조를 굽히지 않고 굳이 지니다.
④약속, 규칙, 법, 예의 등을 어기지 않고 그대로 준수하다”이다.³³
[³³ 우리말 사전 편찬회 편, 앞의 책, p.1534]
따라서 ①과 ④의 의미에 준하여 과거의 것에 대한 기억을 포함하면서도 다시
①②③④ 전체의 의미에 준하여 현재의 대상에 대한 마음의 작용까지를 충분히 담아 낼 수 있다고 판단된다.
아울러 이와 같은 ‘지킴’이라는 용례와 관련하여 Visuddhimagga에는
“(사띠란) ··· 눈의 문(眼門=根門) 등을 지키므로 문지기와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³⁴고 하는 언급이 등장한다.
[³⁴ “··· cakkhudvārādirakkhaṇato dovāriko viya ca daṭṭhabā.” Vism. p.464]
즉 사띠의 구체적인 쓰임에 관련된 용례로서 ‘지키다(rakkhaṇato)’라고 하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으며
또한 ‘문지기(dovāriko)’라고 하는 술어까지 나타난다.
따라서 ‘마음지킴’은 사띠에 대한 이제까지의 다른 번역어들을 대신할 만한 내용을 지님과 동시에 유사한 문헌적 용례 또한 확보하고 있다.
IV. 사띠 수행의 의미와 실제³⁵
[³⁵ 본 Ⅳ장은 필자의 박사학위논문에 실린 내용의 일부를 발췌․정리한 것이다. 拙稿 앞의 논문, pp.98-103 참조]
지금부터는 ‘마음지킴’으로 번역된 sati가 구체적인 행법에 적용되는 경우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그것의 의미와 실제가 규명될 것이며 또한 마음지킴이라는 번역어의 타당성이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마음지킴(sati)에 의한 수행법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ānāpānasati’
즉 ‘들숨과 날숨에 대한 마음지킴(入出息念)’에 관련한 Paṭisambhidāmagga의 경구를 인용해 본다.
‘들숨’이란 마시는 숨으로 내쉬는 숨이 아니다.
‘날숨’이란 내쉬는 숨으로 마시는 숨이 아니다.
마음지킴(念)이란 마시는 숨의 힘에 의해 확립하는 것(近住)이다.
마음지킴이란 내쉬는 숨의 힘에 의해 확립하는 것이다.
마신다는 그것은 (마음지킴을) 확립한다는 것이다.
내쉰다는 그것은 (마음지킴을) 확립한다는 것이다.³⁶
[³⁶ “ānan ti. assāso no passāso. apānan ti. passāso no assāso. assāsavasena upaṭṭhānaṁ sati,
passāsavasena upaṭṭhānaṁ sati: yo assasati tass upaṭṭhāti, yo passasati tass upaṭṭhāti.” Ps. vol.1. p.172]
본 인용구는 ‘ānāpānasati’라고 하는 용어를 ‘āna(들숨)’와 ‘apāna(날숨)’
그리고 ‘sati(마음지킴)’라고 하는 세 가지로 분석하여 이들 각각에 대해 설명한 대목이다.
이 인용구에서 가장 먼저 주목되는 것은 마음지킴(sati)의 대상으로 상정되고 있는
그러한 ‘숨’이 자연적인 들숨과 날숨이라는 사실이다.
즉 ‘마음지킴’에 의해 ‘마시고 내쉬는 숨’을 확립하는 것이 아니라 ‘마시고 내쉬는 숨’에 의해 ‘마음지킴’을 확립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은 Ⅱ장에서 언급했던 것으로 ‘따라가며 보는 것(隨觀)’ 즉 ‘anupassin’이라는 말을 연상케 한다.
즉 호흡이라는 현상에 대해 주관적 감정을 이입시키지 않고 그것에 순응하여
그 변화의 과정을 수동적으로 관찰하는 상태가 곧 마음지킴이라는 뜻이다.
또한 이와 관련하여 Paṭisambhidāmagga에는 “그와 같이 비구는 코끝에 혹은 면상에 마음지킴을 확립하고 난 후 앉는다.
오고 가는 들숨과 날숨에 대해 마음을 내는 것(作意)은 아니지만 오고 가는 들숨과 날숨을 감지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³⁷···”³⁸는 구절이 있다.
[³⁷ 본 인용문에 등장한 “ -것들을 감지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는 말의 원어는 “na ··· aviditā honti”이다.
원래는 수동형 문장으로서 직역하면 “-들이 감지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는 형식이 되지만 우리말 관행에 따라 능동형 문장으로 바꾸어 번역한 것이다.
이 경우 문장의 동사의 동작을 받는 주어는 목적어로 전환되며 동사 자체는 수동형에서 능동형으로 그 쓰임이 바뀌게 된다.
또한 여기에 묘사된 ‘aviditā’의 긍정형으로서 ‘viditā’라는 용어는 수행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육체적․정신적 현상에 대한 인식의 문제와 관련된 것으로 번역의 엄밀성을 요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 말을 ‘diṭṭha(보다)’라든가 ‘ñāta(알다)’라는 말과의 중복을 피하고, 일반적인 의미의 ‘경험’과 구분해 줄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어, ‘감지感知하다’라고 하는 형식으로 달리 번역하였다]
[³⁸ “evamevaṁ bhikkhū nāsikagge vā mukhanimitte vā satiṁ upaṭṭhāpetvā nisinno hoti,
na āgate vā gate vā assāsapassāse manasikaroti,
na āgatā vā gatā vā assāsapassāsā aviditā honti” Ps. vol.1. p.171]
이 대목 역시 들어오고 나가는 숨이 인위적인 조작의 대상이 아님을 분명히 해준다.
즉 들숨과 날숨 자체는 마음냄(作意 manasikaroti)의 대상이 아니며 오로지 感知(viditā 알아차림)되어야 할 대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다시 앞에서 제시한 원래의 인용구로 돌아간다.
인용된 내용 중에는 “마음지킴이란 마시는 숨의 힘에 의해 확립하는 것(近住)”이라는 표현이 실려 있다.
여기에서 필자는 마음지킴의 성격을 분명히 하는 것으로 ‘확립하는 것’ 즉 ‘우빳타나’라는 용어에 주목한다.
이 ‘확립하는 것(upaṭṭhāna)’이란 ‘upa(가까이, 밀착하여)’와 ‘√sthā(서다, 머물다)’를 원형으로 하는 말이다.
한역에서는 이를 ‘近住’로 번역하는데 이것은 어원적 의미에 포괄적으로 접근한 번역이라 할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우빳타나의 의미와 관련하여 Saddhamma pakāsinī에는
“우빳타나란 마음지킴으로서 그것의 대상에 밀착하여 선다는 것이며
마음지킴을 우빳타나라고 이름한다”³⁹라는 설명과 함께
“하나의 것에 대한 우빳타나(一性近住)란 하나의 대상에 대해 움직이지 않는 상태를 지녀 확고하게 머무는 것으로
나아가 믿음의 근(信根)의 연이 되(는 것이다)”⁴⁰라는 언급이 있다.
[³⁹ “upaṭṭhānaṁ satīti taṁ ārammaṇaṁ upecca tiṭṭhatīti sati upaṭṭhānaṁ nāma” PsA. p.510]
[⁴⁰ “ekattupaṭṭhānanti ekārammaṇe acalabhāvena bhusaṁ ṭhānaṁ uparūpari saddhindriyassa paccayo hoti” PsA. p.539]
이와 같은 ‘확립하는 것(近住)’이라는 표현에 관련한 주석서의 설명들은
마음지킴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내 준다.
즉 “특정한 대상을 지속적으로 관찰하거나 따라가는 것으로서 마음의 방황을 멈추게 하는 것”이라
앞서 정의했던 ‘마음지킴’의 의미를 강화하여 ‘대상에 밀착하여 서는 것(ārammaṇaṁ upecca tiṭṭhati)’
혹은 ‘움직이지 않는 상태로써 확고하게 머무는 것(acalabhāvena bhusaṁ ṭhānaṁ)’으로 이 말을 부연하고 있다.
나아가 ‘마음지킴(sati)’이라는 말과 ‘확립하는 것(upaṭṭhāna)’이라는 술어는 동의어로 표현되기도 한다.⁴¹
[⁴¹ ‘sati’와 ‘upaṭṭhāna’가 동의어로 사용된 경우의 전형을 보이는 예로서 바로 앞서 언급한 PsA.(p.510)의 구절을 들 수 있겠다. 즉 “우빳타나란 사띠로서, 그것의 대상에 밀착하여 선다는 것이며, 사띠를 우빳타나라고 이름한다(upaṭṭhānaṁ satīti taṁ ārammaṇaṁ upecca tiṭṭhatīti sati upaṭṭhānaṁ nāma)”는 구절이 그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내용을 고려할 때 ‘마음지킴’이란 “화두를 일념으로 든다”는 말에서
“-를 일념으로 든다”는 표현에 비견할 만한 것임에 분명해졌다.
그런데 마음지킴이라는 술어가 이러한 형식으로 정의될 때 그것이 단지 ‘대상에 대해 집중된 상태’
즉 사마타(samatha)만을 추구하는 행법으로 오해될 여지가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서도 해명해야 할 필요성이 요구된다.
이와 관련하여 Paṭisambhidāmagga에 등장하는 것으로
“숨이 닿는 곳(因相)과 들숨과 날숨은 하나된 마음(一心)이 의지하는 바(所緣)가 아니다.
그러나 (이들) 세 법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닦음을 얻지 못한다.
숨이 닿는 곳과 들숨과 날숨은 하나 된 마음이 의지하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이들) 세 법을 알아차리면 닦음을 얻는다”⁴²는 구절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⁴² “nimittaṁ assāsapassāsā anārammaṇāmekacittassa ajānato ca tayo dhamme bhāvanā nupalabbhati,
nimittaṁ assāsapassāsā anārammaṇāmekacittassa jānato ca tayo dhamme bhāvanā upalabbhatīti”
Ps. vol.1. pp.170-171]
인용된 내용은 ‘숨이 닿는 곳(因相)’⁴³과 ‘들숨’과 ‘날숨’이
‘하나 된 마음의 대상이 아님(不一性所緣 anārammaṇāmekacitta)’을 직접적으로 표명한 것으로
‘마음지킴(sati)’의 수행이 지닌 성격의 단면을 또 다른 각도에서 분명히 해준다.
[⁴³ 여기에서 ‘숨이 닿는 곳’으로 번역한 말의 원어는 ‘nimitta’이다. 한역에서는 이 말을 통상 ‘因相’으로 번역하곤 한다. 그러나 이 한역어만으로는 nimitta의 정확한 의미를 옮기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이를 ‘숨이 닿는 곳’으로 번역하였다. PsA.의 정의에 따르면 여기에서 사용된 ‘nimitta’는 ‘숨이 닿는 곳’으로서, ‘코끝’ 혹은 ‘윗입술’이다. 해당 구절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니밋따란 들숨과 날숨이 닿는 장소이다. 긴 코를 지닌 이에게 들숨과 날숨은 코끝을 스치며 발생하고, 짧은 코를 지닌 이에게는 웟입술(을 스치며 발생한다)(nimittanti assāsapassāsānaṁ phusanaṭṭhānaṁ. assāsapassāsā hi dīghanāsikassa nāsāpuṭaṁ ghaṭṭentā pavattanti, rassanāsikassa uttaroṭṭhaṁ).” PsA. p.471 인용]
즉 그와 같은 대상들을 ‘알아차리는 것(jānato)’이
곧 마음지킴의 수행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하나 된 마음(心一境性)’
즉 ‘마음의 평정’이라든가 ‘선정의 상태’와 직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나아가 이와 관련된 용어로서 Paṭisambhidāmagga에 자주 등장하는
‘감지되는 것(viditā)’이라는 개념에 대해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즉 “긴 들숨과 날숨의 힘에 의해 마음의 하나 됨과 산란하지 않음을 알아차릴 때
감지되는 것으로서 느낌(受)이 일어난다”⁴⁴는 구절과
앞서 인용했던 것으로 “그와 같이 비구는 코끝에 혹은 면상에 마음지킴을 확립하고 난 후 앉는다.
[⁴⁴ “dīghaṁ assāsapassāsavasena cittassa ekaggataṁ avikkhepaṁ pajānato viditā vedanā uppajjanti” Ps. vol.1. p.178ff]
오고 가는 들숨과 날숨에 대해 마음을 내는 것은 아니지만
오고 가는 들숨과 날숨을 감지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⁴⁵라는 구절에 나타나는 그것이다.
[⁴⁵ “evamevaṁ bhikkhū nāsikagge vā mukhanimitte vā satiṁ upaṭṭhāpetvā nisinno hoti,
na āgate vā gate vā assāsapassāse manasikaroti,
na āgatā vā gatā vā assāsapassāsā aviditā honti” Ps. vol.1. p.171]
이들 인용문은 ‘코끝’ 혹은 ‘면상’에 마음지킴을 확립한 상태에서 ‘들숨과 날숨’을 포함한
‘느낌’ 따위의 여러 ‘육체적․정신적 현상’들이 피동적으로 감지되어지는 상황을 그려내고 있다.
여기에서 ‘감지되는 것’의 원어로 사용된 ‘viditā’는 동사원형
‘√vid(보다, 알다, 경험하다)’에서 기원한 말로, 과거수동분사․복수․주격의 문법형식이다.
따라서 그러한 ‘감지되는 내용’은 행위자의 자발적 의지를 배제하고 있다.
이것은 앞서 각주에서 언급했듯이, “··· 오고 가는 들숨과 날숨을 감지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는 문구의 원어가
“na ··· aviditā honti”라는 형태의 수동형이라는 사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이 구절과 동일한 각도에서 설해지는 문장으로 “그러나 (이들) 세 법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닦음을 얻지 못한다”라는 언급이 있다.
그리고 그 대목의 원어는 “ajānato ca tayo dhamme bhāvanā n’upalabbhati”로 되어 있다.
따라서 “aviditā(감지되지 않는)”라는 말은 현재분사로 사용된 ‘ajānato(알아차리지 못하면)’에 상응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동일한 맥락에서 서술되는 두 문장에서 각기 다른 형식의 표현법이 사용된 이유로서
필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들이 들숨과 날숨의 육체적 현상이 피동적으로 감지되어지는 상황을 그려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달리 채택되었다는 것이다.⁴⁶
[⁴⁶ 사띠에 대한 조준호의 번역어로서 ‘수동적 주의집중’이라는 표현에 대해 필자 또한 일부 공감하는 이유가 여기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이어지는 본문의 내용에서 더욱 구체화되듯이 마음지킴의 수행에서 포착되는 육체적․정신적 현상들은 인식 주체의 의지와 상관 없이 피동적으로 감지되는 것들이다. 그리고 필자 또한 그러한 방식으로 감지되는 현상들의 ‘피동성’ 혹은 ‘수동성’에 일단의 초점을 맞춘다]
마음지킴(sati)이라는 것이 단순히 ‘마음의 평온(samatha)’만을 의도하는 것이라면
대상에 대해 집중된 상태에 논의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Paṭisambhidāmagga에서는 그와 같이 집중된 상태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들숨과 날숨’ 이외에도 ‘느낌(受)’ 따위의 ‘육체적․정신적 현상’들이 피동적으로
‘감지된다(viditā honti)’는 점을 더욱 구체적으로 부각시키는 데에 주력한다.
이를 더욱 구체적으로 확인하면 다음과 같다.
“긴 들숨과 날숨의 힘에 의해 마음의 하나 됨과 산란하지 않음을 알아차릴 때 감지되는 것으로서 느낌(受)이 일어난다.
감지되는 것으로서 (느낌의 특성이) 드러난다.
감지되는 것으로서 (느낌이) 사라진다.
감지되는 것으로서 지각(想)이 일어난다.
감지되는 것으로서 (지각의 특성이) 드러난다.
감지되는 것으로서 (지각이) 사라진다.
감지되는 것으로서 사유(尋)가 일어난다.
감지되는 것으로서 (사유의 특성이) 드러난다.
감지되는 것으로서 (사유가) 사라진다.⁴⁷
[⁴⁷ “dīghaṁ assāsapassāsavasena cittassa ekaggataṁ avikkhepaṁ pajānato viditā vedanā uppajjanti,
viditā upaṭṭhahanti, viditā abbhatthaṁ gacchanti, viditā saññā uppajjanti, viditā upaṭṭhahanti,
viditā abbhatthaṁ gacchanti, viditā vitakkā uppajjanti, viditā upaṭṭhahanti, viditā abbhatthaṁ gacchanti.”
Ps. vol.1. p.178]
마음지킴(sati)을 확립하는 일차적인 대상은 ‘코끝’ 혹은 ‘면상’이다.
따라서 피동적으로 감지되어지는 느낌 따위는 완전한 집중상태에 이르지 못했을 때 발생하는 부차적 현상에 불과하다.
결과적으로 이들 부차적 현상들에 대해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는 ‘마음지킴의 행법’은
단순한 ‘마음집중’ 즉 ‘싸마타의 행법’과 그 궤를 달리함을 알 수 있다.⁴⁸
[⁴⁸ 이와 관련하여 S.N. vol.1. p.136; vol.3. p.133; A.N. vol.1. p.133; Vin. vol.1. p.5 등에는 ‘samatha’의 행법이 ‘상카라의 그침(cessation of saṅkhārā)’을 위한 것이라는 언급이 있다. 그리고 마음지킴(sati)의 행법 또한 결과적으로는 ‘육체적․정신적 현상의 가라앉음’ 즉 ‘상카라의 그침’을 초래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드러나듯이, 마음지킴의 행법은 단순히 ‘상카라의 그침’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즉 이들 상카라를 통해 진리를 자각케 하는 행법으로서의 의의를 지니면서도 종국에 가서는 ‘상카라의 그침’을 낳는다는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拙稿, 앞의 논문, p.113-126 참조]
인용문에 제시된 내용으로서 느낌(受 vedanā)․지각(想 saññā)․사유(尋 vitakka) 등은
수행의 과정에서 포착될 수 있는 모든 것을 망라한다.
그리고 이들 부차적인 포착대상은 제거되어야 할 것들이 아니라
진리를 깨닫기 위한 매개로써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無明의 일어남(集)으로부터 느낌(受)의 일어남이 있다고 하는
緣에 의한 일어남의 의미로 느낌의 일어남(生)이 감지된다. ···
무명의 소멸로부터 느낌의 소멸이 있다고 하는 연에 의한 소멸의 의미로 느낌의 사라짐이 감지된다. ···”⁴⁹는
따위의 언급은 ‘마음지킴’ 다시 말해서 사띠 수행의 원리가 무엇인지를 잘 나타낸다.
[⁴⁹“avijjāsamudayā vedanāsamudayo ti paccayasamudayaṭṭhena vedanāya uppādo vidito hot ···
avijjānirodhā vedanānirodho ti paccayanirodhaṭṭhena vedanāya atthaṅgamo vidito hoti, ···” Ps. vol.1. pp.178-179;
“‘무명의 일어남으로부터 느낌의 일어남이 있다’···”고 하는 본 인용구 외에도 Ps. vol.1. p.178 이하에서는 “‘무명의 일어남으로부터 지각(想)의 일어남이 있다’···”는 언급과 함께 “‘무명의 일어남으로부터 사유(尋)의 일어남이 있다’.···”는 따위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서술된다. 이들 모두는 ‘緣에 의한 일어남(集)’과 ‘緣에 의한 특성의 드러남’ 그리고 ‘연에 의한 사라짐(滅)’이라는 형식으로 세분화되어 반복적으로 설명된다]
즉 마음지킴의 과정에서 감지되는 모든 ‘육체적․정신적 현상’들이 오로지 ‘viditā’라고 하는 하나의 술어에 의해 설명되고
있으며 그것을 통해 緣起의 이법을 체득하게 되는 과정과 그 이외의 여러 제법의 성취로 나아가는 과정이 이어진다.⁵⁰
[⁵⁰ ‘들숨과 날숨에 대한 마음지킴’의 수행을 통해 緣起의 이법을 체득하게 되는 과정과 그 이외의 여러 제법의 성취로 나아가는 과정에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拙稿 앞의 논문, p.240-241, 역주 참조]
이상의 논의를 바탕으로 ‘마음지킴(sati)’의 의미와 실제를 다시 한 번 정리해 본다.
‘마음지킴’은 특정한 대상으로 마음을 되돌려 방황과 혼돈의 상태를 멈추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지킴’은 마음의 방황을 그치게 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지킴’은 일차적으로 마음의 방황을 멈추게 하는 행법으로서의 의미를 지니지만 그 과정에서
부차적으로 감지되어지는 여러 현상들을 통해 연기의 이법 등 진리에 대한 자각을 유도하는 행법이다.
V. 마치는 말
이상과 같이 ‘sati의 의미와 쓰임’에 관해 살펴보았다.
제Ⅰ장의 서론에서 필자는 念으로 한역된 sati가 과연 어떻게 오해되고 있는지를 소개하였다.
그리하여 ‘생각’이라는 일상적인 용어로 격하되어 禪家에서 말하는 ‘一念不生’에 대비되는 경우가 있음을 보았다.
당연한 귀결로서 단순한 의미의 ‘생각’이나 ‘알아차림’ 따위로 잘못 인식된 sati는
사념처의 위빠싸나 수행에 대한 근거 없는 비난의 구실이 된다.
“간화에서 볼 때 위빠싸나에서 말하는 느낌이나 감정 등의 알아차림은 하나의 망심에 불과하다”는 언급이 그 전형이다.
제Ⅱ장에서는 사띠에 대한 그간의 번역어들을 살펴보았다.
그리하여 憶念․持念․守意․意止 등의 한역어와 함께, 마음집중․관찰․알아차림․마음챙김․주의깊음․수동적 주의집중 따위의 우리말 번역어가 있음을 밝혔다.
특히 제Ⅱ장에서는 조준호 선생의 ‘수동적 주의집중’이라는 말에 주목하였는데 그 이유는 sati에 대해
나름의 번역어를 선택하게 된 이유를 밝힌 유일한 연구자가 바로 선생이었기 때문이었다.
조준호 선생은 ‘수동적 주의집중’이라는 표현으로써 사띠라는 용어가 지닌 성격을 분명히 밝히는 데에 충분한 기여를 했다.
그러나 선생은 이러한 생각을 지나치게 강조한 까닭에 그것의 영역을 第四禪 이후의 차원으로 국한시키는 우를 범했다.
이것은 필자가 확인한 경전의 내용과 선생의 주장이 배치된다는 사실을 통해 분명히 드러난다.
결국 기존의 모든 번역어들은 사띠의 의미를 옮기는데 나름의 역할을 했지만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제Ⅲ장에서 필자는 사띠에 대한 새로운 번역어로서 ‘마음지킴’이라는 용어를 제시하였다.
마음지킴이란 사띠에 대한 정의로서 “특정한 대상을 지속적으로 관찰하거나 따라가는 것으로서
마음의 방황을 멈추게 하는 것”이라는 언급에 일차적으로 근거한 번역어이다.
또한 ‘기억’ 따위의 과거의 것에 대한 마음작용까지도 포괄할 수 있으며
나아가서는 진리를 깨닫는 방법이라는 의미까지도 무리 없이 담아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따라서 기존의 번역어들이 안고 있었던 불완전한 면들을 보완해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제Ⅳ장에서는 필자에 의해 새롭게 제시된 ‘마음지킴’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이것의 의미와 실제를 규명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들숨과 날숨에 대한 마음지킴(入出息念)’ 즉 ‘ānāpānasati’의 실상을 밝히는 경전으로서
Paṭisam bhidāmagga의 관련 내용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였다.
거기에서 필자는 마음지킴의 성격에 관한 표현으로서 ‘대상에 밀착하여 서는 것(ārammaṇaṁ upecca tiṭṭhati)’
혹은 ‘움직이지 않는 상태로써 확고하게 머무는 것(acalabhāvena bhusaṁ ṭhānaṁ)’ 등의
언급이 있음을 일차적으로 확인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그것이 단지 ‘대상에 대해 집중된 상태’만을 추구하는 행법으로 오해될 여지를 남긴다.
따라서 필자는 이 행법이 오로지 ‘하나된 마음(心一境性)’만을 추구하는 실천법이 아님을 밝히는 데에도 상당한 주의를 기울였다.
그리하여 이 행법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으로 피동적으로 감지되는
일체의 육체적․정신적 현상들을 포괄하는 개념으로서 ‘viditā’라는 용어에 주목하였다.
필자가 파악한 바에 따르면 ‘감지되는 것(viditā)’의 세부적 내용으로 묘사되는 여러 가지 부차적 관찰 대상들은
‘코끝’ 혹은 ‘면상’이라고 하는 일차적인 마음지킴의 대상으로부터 의식이 분산될 때 발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깊은 선정의 상태에 이르게 되면 저절로 없어지는 내용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즉 ‘일체의 현상(sabbe saṅkhārā)'이 완전히 고갈된 상태에 이를 때까지 과도적으로 존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의도적인 제거의 대상이 아니라 진리를 깨닫기 위한 매개로써 이용된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부차적인 관찰 대상으로 거론된 내용물로는 ‘느낌(受 vedanā)’ ‘지각(想 saññā)’ ‘사유(尋 vitakka)’ 따위가 있다.
이들은 그리하여 일어남(集)과 사라짐(滅)을 반복하면서 無常․苦․無我의 실상과 緣起의 이법을 자각케 하는 요소로서 기능한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간단없는 주시와 관찰을 본분으로 하는 ‘마음지킴의 행법’은 자연적인 호흡을 대상으로 하는 단계에서부터 시작되어 호흡이 사라진 상태로서 第四禪 이후의 단계를 거쳐 궁극에 가서는 ‘나아감과 성취(道果, magga-phala)’의 경지에 이르기까지를 그 영역으로 하게 된다.
Keywordː
마음지킴(sati), 위빠싸나(vipassanā), 알아차림(sampajañña), 빠띠삼비다막가(Paṭisambhidāmag ga), 위숫디막가(Visuddhimagga), 감지되는 것(viditā), 문지기(dovāriko), 들숨과 날숨에 대한 마음지킴(ānāpānasati), 확립하는 것(upaṭṭhāna), 숨이 닿는 곳(nimitta)/보조사상, Vol.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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