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향한 끊임없는 고뇌 <금오신화>/심경호
1. <금오신화>란?
<금오신화金鰲新話>는 조선 전기의 천재 문인이자 사상가인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 창작한 단편소설집이다.
김시습은 현실 상황을 우울하게 응시하고 인간 존재의 문제와
결함缺陷 세계의 본질을 소설구조로 형상화하였다.
모두 5편이 현재 전하는데 인간과 귀신의 만남 남염부주[저승세계]와
용궁으로의 여행을 소재로 인간 삶의 문제를 다룬 전기소설傳說小說 들이다.
김시습은 자신의 이 소설들을 풍류기어風流奇語라고 말하였다.
【전기소설傳奇小說이란 중국 당나라 때부터 발달하기 시작한 소설의 한 양식이다.
당 나라 때 문인들은 온권溫卷을 만들어 문장력을 과시하고 출세의 기회를 잡으려고 하였는데
문장력을 과시하기 위해 전기소설을 창작하는 예도 많았다.
배형裵刑은 기문奇聞을 모아 <전기傳奇> 3권을 엮었다.
명明·청淸 때에는 희곡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였다.
전기傳奇는 기이한 것을 전한다는 뜻으로 이는 기이한 이야기를
창의적으로 재구성하거나 허구적 이야기를 창작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六朝 시대에 괴이한 일을 단순히 기록하고
인과因果를 밝혔던 지괴志怪 소설과는 구별된다.
이렇게 전기라는 용어는 중국문학에서 발생하였지만 이야기를 창조적으로 재구성하거나
창작하는 문학 전통은 우리나라에서도 일찍부터 독자적으로 형성되었다.
각 지역의 설화와 그것을 문헌으로 기록한 서사기록물이 존재하였고
다시 신라 <수이전殊異傳>과 <삼국유사>의 일부 이야기처럼 허구적 창작물이 발달하였다】
‘금오金鰲’는 경주 南山의 금오봉 혹은 남산을 가리킨다.
경주 남산을 금오산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당나라 때 시인 고운顧雲이
신라의 최치원崔致遠에게 준 시에서
아문해상삼금오我聞海上三金鼇 “내가 듣자니 동해에 세 마리 금오가 있어
오두대산고고鼇頭戴山高高 금오가 머리에 산을 이어 높디높다 하네”
라고 한 데서 비롯된다고 한다.
여기서 오鼇는 오鰲와 같다.
본래 금오는 중국인의 신화적 상상체계에서 동해의 봉래산을 떠받치는 존재였는데
우리나라가 중국의 동방에 있으므로 우리나라 전체를 금오와 연관시키기도 하였다.
실제로 금오라는 산은 전라도 광주나 나주(능주)에도 있다.
하지만 김시습 자신은 여러 시에서 경주 남산 일대를 금오라고 표현하였다.
즉 그는 경주 남산의 용장사茸長寺 부근에 은거할 때 지은 시들을 <유금오록遊金鰲錄>이라는
제목으로 엮었고 그 후지後誌에서도 경주 일대를 금오라고 표현하였다.
이 후지는 금번에 발견된 조선 목판본 <금오신화>의 말미에도 그대로 각입刻入되어 있다.
신화는 새로운 이야기란 뜻이다.
<전등신화剪燈新話> 등 당시에 읽히던 기존의 전기소설과는 다른
소재와 발상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엮었다고 밝힌 것이다.
한문고전에서 ‘신新’은 혁신을 뜻하며
기존의 가치를 해체하고 권력화된 사상체계에 저항하는 의지를 반영한다.
2. 김시습
1) 김시습의 삶을 알 수 있는 자료로는 어떠한 것이 있는가
김시습의 생애에 대하여는 김시습 자신이 쓴
<상류양양자한진정서上柳襄陽自漢陳情書 양양부사 유자한柳自漢에게 속내를 토로한 서한>과
윤춘년尹春年(1514-1567)의 <매월당선생전梅月堂先生傳>
이자李耔(1480-1533)의 <매월당집서梅月堂集序>
이산해李山海(1538-1609)의 <매월당집서梅月堂集序>
이이李珥의 <김시습전金時習傳> 등을 통하여 개괄할 수 있다.
윤춘년의 <매월당선생전梅月堂先生傳>은 조선 목판본 <금오신화金鰲新話>의
권두에 실려 있고 또 활자본 <매월당집>의 권두에도 실려 있다.
윤춘년의 문집인 필사본 <학음고學音稿>에는 <매월당서梅月堂序>라는 제목으로 들어 있다.
이이의 <김시습전金時習傳>은 선조 15년(1582) 4월에 찬수령撰修令이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이는 평소 김시습을 ‘동방의 백이伯夷’라고 칭하였다고 한다.
<상류양양자한진정서上柳襄陽自漢陳情書
양양부사 유자한柳自漢에게 속내를 토로한 서한>에 대하여는
김시습이 고려 때의 시중 김태현金台鉉(광산김씨)을 자신의 조상이라고 한 점이
옳지 않기 때문에 이 서한 자체가 위작이라고 보는 설이 있다.
김시습의 기억에 착오가 있었던 듯하지만 그렇다고 이 서한이 위작인 것 같지는 않다.
더구나 <매월당문집>에는 김시습이 유자한에게 보낸 다른 서한들이 더 실려 있어서
정황으로 보아 이 서한도 김시습이 쓴 것임에 틀림없다.
윤춘년의 <매월당선생전梅月堂先生傳>은 이 서한에 근거하여
김시습의 일생을 서술하였고 이이의 <김시습전金時習傳>도 이 서한에 근거한 바가 많다.
2) 김시습의 어릴 적은
김시습은 자字가 열경悅卿이고
호는 청한자淸寒子와 매월당梅月堂, 동봉산인東峯山人 등을 사용하였다.
근본은 명주溟州 즉 강릉의 오래된 가문이라고 한다.
그 집안은 일찍부터 많은 명공과 문장 석학을 배출하여 왔다.
증조 김구주金久柱는 고려 때 안주목사를 지냈다.
조부는 겸간謙侃 혹은 윤간尹侃이라고 하며 오위부장五衛部將을 지냈다.
부친 일성日省은 음직으로 충순위忠順衛에 봉해졌으나 병약하여 취임하지는 않았다.
김시습의 가까운 시기의 직계는 무반武班의 직을 받았으나
그렇다고 그 집안이 무계였다고 할 수는 없다.
이를테면 충순위는 1445년 7월에 유음자손有蔭子孫을 위하여
특별히 설치된 병종兵種으로 가자加資되는 기간이 매우 짧았다.
조선초에는 경제력 있는 士子들이 무과를 통하여 발신하려 한 예가 많았으므로
무반 직을 받았다고 하여 가계가 무계였다고 단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김시습이 무계 집안에서 태어나 장성하면서
좌절을 맛보았다고 보는 설이 있는데 수긍하기 어렵다】.
모친은 선사장씨仙槎張氏이다.
김시습에게는 후사가 없었고 고조부 한신漢臣의 아우
한경漢卿의 현손 덕량德良이 계자系子로 들어와 가계가 오늘에 이어진다.
김시습은 1435년 반궁(성균관) 북쪽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는 외조부의 훈도를 입었다.
천품이 뛰어나 족조族祖인 최치운崔致雲이
‘시습’이라 명명하고 설說을 지어 장래를 기대하였다.
세 살 때부터 한문을 지을 수 있었으며
다섯 살 때는 크게 문리에 통하여 ‘五歲’라고 불렸다.
‘오세’는 ‘오세悟歲’와 발음이 같으니
다섯 살이 곧 문리를 깨달은 해라는 의미이다.
다섯 살 되던 해인 1439년 그는 수찬 벼슬로 있던
이계전李季甸(1404-1459)의 문하에서 大學과 中庸을 공부하였다.
이계전은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손자이자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외손자이다.
김시습은 이계전의 큰 아들 이우李堣와 함께 수학하였는데
이우는 한산 이씨의 才子로서 세조ㆍ성종조에 활약한 이파李坡ㆍ이봉李封의 형이었다.
김시습이 다섯 살 때 조수趙須는
그에게 열경悅卿이라는 자를 붙여주고 <자설字說>을 지어 주었다.
조수의 본관은 평양, 자는 향보享父, 호는 송월松月
또는 만취晩翠로 당시 집현전 학사들에게 한유韓愈의 글을 가르치고 있었다.
1401년의 증광문과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나갔으나
1409년에 민무구閔無咎 형제가 제거되고
그의 서형希敏과 아버지(瑚)가 사사될 때 연좌되어 30년간 금고 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1438년에 최만리崔萬理ㆍ김빈金鑌ㆍ이영서李永瑞와 함께 왕명에 따라
<주문공교창려선생집朱文公校昌黎先生集>을 새로 편찬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자는 본래 성인식인 관례冠禮 때에 지어 받는 것이지만
김시습은 조숙하여 일찌감치 자를 받은 듯하다.
바로 이 다섯 살 때 김시습은 세종의 장려를 받았다.
7,8세에는 경전에 통달하였고 아홉 살에는 시문을 즉석에서 지었다.
그 뒤 김시습은 당시의 석학 김반金泮에게서
<논어><맹자><시경><서경><춘추> 등을 수업 받았다.
김반은 권근의 문인이며 세종조의 집현전원으로 명성이 높았는데
김구金鉤·김말金末과 함께 ‘경학經學 3金’으로 일컬어졌다.
또 김시습은 1447년 무렵 윤상尹祥(1373-1455)의 밑에서 <주역><예기>를 공부하였다.
윤상은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대제학까지 지낸 인물이다.
당시 윤상은 이미 75세의 고령이었다.
그런데 김시습은 열다섯 살에 모친을 잃고 말았다.
그는 낙향하여 외조모의 보양을 받다가 탈상한 뒤 18세 되던 1452년에 서울에 올라왔다.
김시습은 이때 조계사曹溪寺에 머물면서 준상인峻上人에게서 불교를 배웠다.
준상인은 곧 고승 함허당涵虛堂 기화선사己和禪師(1376~1433)의 제자인 홍준弘峻이다.
김시습은 아마도 1452년경에 훈련원도정訓鍊院都正을 지낸
남효례南孝禮의 딸을 부인으로 맞은 듯하다.
3) 김시습이 방랑하게 된 것은
1453년 11월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김종서金宗瑞ㆍ황보인皇甫仁을 죽이고
안평대군 용瑢 부자를 강화도에 압송하고 정권을 장악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른바 계유정난癸酉靖難이다.
당시 김시습은 안신安信ㆍ지달가池達河ㆍ정유의鄭有義ㆍ장강張綱ㆍ정사주鄭師周
등과 함께 과거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는 1450년(세종 32년) 17세 때 생원시 초시에 합격하였던 듯하다.
그 뒤 유음자손으로서 성균관에 입학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김시습은 그러나 회시에 합격하지 못한 듯하다.
그 뒤 1453년(단종 원년) 봄의 증광시에 응시하였지만 낙방한 듯하다】.
이때까지만 해도 김시습은 현실정치의 문제를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삼년 뒤 1455년 윤6월 11일에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일이 발생하였다.
삼각산 중흥사에서 독서하던 김시습은 그 소식을 듣고
거짓 미친 체하여 도망해서 그 길로 승려가 되었다.
처음에는 강원도 금화金化 남쪽 사곡촌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1456년 6월에는 성삼문成三問ㆍ박팽년朴彭年 등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사형되었고
이듬해 6월에는 단종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유배되고
10월 24일에는 노산군이 죽음을 맞았다
그 무렵 김시습은 송도 지방을 기점으로 관서지방을 유랑하였다.
그는 당시에 지은 시를 모아 24세인 1458년에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을 엮었다.
이어 금강산ㆍ오대산 및 관동팔경을 돌아보고 1460년에 <탕유관동록宕遊關東錄을 엮었다.
그 뒤 다시 삼남지방을 유랑하고 1463년에는 <탕유호남록宕遊湖南錄>을 엮었다.
1458년 가을에 엮은 <탕유관서록>의 후지後志에서 김시습은
불의의 세간을 차마 보지 못하는 까닭에 현실계를 벗어나 산수간에 은거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일일一日 홀우감개지사忽遇感慨之事 어느 날 갑자기 개탄스러운 일을 당하고는
이위남아생사세以謂男兒生斯世 남자가 이 세상에 태어나
도가행칙결신란륜道可行則潔身亂倫 치야恥也
도를 행할 수 있는 세상이라면 결신난륜潔身亂倫한다는 것이 부끄럽지만
여불가행如不可行 독선기신獨善其身 가야可也
도를 행할 수 없는 세상일진대 독선기신獨善其身하는 것이 옳다고 여겼다.
욕범범어물외欲泛泛於物外 물외物外에 떠다니면서
앙모도남사막지풍仰慕圖南思邈之風
도남圖南(陳搏)과 사막思邈(黃彦遠)의 풍모를 사모하고자 했으나
이국속차무차사而國俗且無此事 유예미결猶豫未決 나라에 이러한 풍속이 없어 머뭇머뭇하였다.
일석一夕 홀오약염치위산인忽悟若染緇爲山人 즉가이새원則可以塞願
그러다 어느 날 저녁에 만약 장삼을 걸치고 산인이 된다면
소원을 풀 수 있을 것이라고 문득 깨달았다.
김시습은 당시 정치현실의 혼란, 유가적 이념의 붕괴 등을
‘개탄스러운 일’이라는 통분의 말로 뭉뚱그려 표현하였다.
그는 북송 때 도가 사상가였던 진단陳搏의 풍모를 사모하였다.
하지만 도인이 되는 것은 나라의 풍속과 맞지 않다고 여겨 승려의 행색을 취하기로 하였다.
사실 그에게는 유ㆍ불ㆍ도의 어떠한 종교도 부분적 의미밖에 지니지 않았다.
그는 이제 자신의 본래성을 추구하는 고독한 방랑길에 나선 것이다.
산수에 방랑하면서 좋은 경치를 만나는 대로 시를 읊고 구경도 하고자 하였던 것은 그것이
곧 현실의 구속을 벗어나 자유로운 인간일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라고 자각했기 때문이었다.
홍진의 명리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를 결심한 직후 마음의 평화를 얻는 듯하였다.
그로서는 도학을 공부하는[問道] 유교 공부와
마음을 들여다보는[觀心] 불교 공부가 그리 큰 차이가 없었다.
그래서
우보현사寓普賢寺 보현사에 붙어살면서
서회증인書懷贈人 가슴속 생각을 적어 어떤 사람에게 주다
라는 제목의 시에서
이아방외인以我方外人 “나는야 방외의 사람으로서
종유방외선從遊方外禪 방외의 선사를 따라 노니나니
문도도유경問道道愈梗 도를 물으면 도가 더욱 억세지고
관심심경연觀心心更硏 마음 보면 마음 더욱 닦이누나” 하였다.
불교에서 말하는 관심觀心도 이미 마음을 대상화하므로
그것은 절대경지에 이르는 좋은 방법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의 김시습은 마음의 대상화가 절대경지에 도달하는 데에
장애가 될 것이라는 점을 심각하게 반성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로서는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이 더욱 문제였다.
그렇기에 잠정적으로 그는 현실 공간을 평화스런 세계로 인정하고 질끈 눈을 감으려고 하였다.
<탕유호남록宕遊湖南錄 후지後志>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단성화융흡但聖化融洽 인택방타仁澤滂沱 성상聖上의 교화가 흡족하고 어진 은택이 흘러
해우창생海隅倉生 망불번서罔不繁庶 바닷가 창생이 번성하지 않음이 없게 되었다.
기부방곡 旣富方穀 잘 살게 되어야 착해진다는 말이 있듯이
인인진학人人進學 사람마다 학문에 나아가
변강강지속變強剛之俗 억세고 뻗대는 습속을 바꾸어
위효제렴치지역爲孝弟廉恥之域 효제孝弟와 염치廉恥의 지역으로 되었다.
대출량재代出良材 세보왕실世輔王室 대대로 훌륭한 인재가 나서 왕실을 보필하니
변경무우邊境無虞 랑연돈식狼煙頓息 변경에는 근심이 없어지고 난리를 알리는 봉홧불도 멎었다.
차성조지치지일서야此聖朝至治之一瑞也 이것은 성스런 왕조의 상서祥瑞라 하겠다.
눈여겨 볼만한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인간의 온전한 가치 실현이 불가능한 결함계缺陷界다.
현실의 일용응연처日用應緣處는 이미 원만구족한 본래성의 추구를 방해하였다.
그렇기에 김시습은 그 속에 몸을 담글 수는 없었다.
김시습은 외모가 볼품없었으나 매몰찬 데가 있었으며
예절을 잘 따지지 않아서 위엄이 적었다고 한다.
그는 성격이 소탕해서 구속되는 것을 너무도 싫어하였고
충의의 분노가 수시로 일어나 하루라도 그저 되는 대로 살지를 못하였다.
김시습은 승려의 신분과 평민의 차림으로 명산을 편력하면서 가슴속에 쌓인 불평을 발산하였다.
4) 김시습은 금오산에 정착하고는
김시습은 29세에 호남 지방을 두루 보고 나서 서울로 책을 사러 갔다.
이때 세조는 <연화경蓮花經>을 언해諺解하려 하였다.
김시습은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추천으로 열흘 동안 內佛堂에서 譯經 사업을 돕게 된다.
1463년 가을의 일이다.
31세 때인 1465년 봄에 김시습은 경주로 내려가
남산의 용장사茸長寺 부근에 山室을 짓고 칩거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3월 그믐에 효령대군이 원각사圓覺寺 낙성회에 참가할 것을 종용하였다.
김시습은 잠시 망설였으나
“좋은 모임은 늘 있는 것이 아니고 번창하는 세대는 만나기 쉬운 것이 아니다.
달려가 치하하고 곧 돌아와 여생을 마치리라” 하고서 날짜를 다투어 상경하였다.
원각사 모임의 찬시讚詩도 지으면서
그는 당대의 현실을 성대聖代로서 인정하고자 마음먹었다
【송석하宋錫夏의 구장본인 필사본 <매월당고梅月堂藁>에 보면 이렇게 읊고 있다.
급원초폐시가전給園初敝市街前 급원(祈園精舍)이 시기에 버려져 있었거늘
성력홍도만만년聖曆鴻圖萬萬年 임금님 큰 계획으로 몇 만년을 가게 되었네
취복원로봉축일毳服圓顱逢竺日 취복法服에 까까머리로 부처님 만나는 날이지만
치건곡령송요천緇巾曲領頌堯天 치건에 단령團領 입고 요순시대를 송축하네,
향연뇨뇨수룡가香煙裊裊隨龍駕 피어오르는 향 연기는 임금님 수레 따라가고
서기면면요불변瑞氣緜緜繞佛邊 연속되는 서기는 불상을 감싸네,
수신일민참성회誰信逸民參盛會 은둔하는 자가 여기에 올 줄 누가 알았으랴,
오운타리희주선五雲朵裏喜周旋 오색구름 꽃 속에 기꺼이 예법을 차리노라】
하지만 끝내 세간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다시 경주 남산으로 향하였다
【1465년 4월에 김시습은 서거정을 방문하여 <금오정사제시金鰲精舍題詩>를 청하였다.
얼마 뒤 서거정은 시를 지어 주었는데 <사가집四佳集 시집>권12에 실려 있다.
<서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나는 진작에 설잠 승려를 알고 있었는데 만나보지 못한 지 24년이나 되었다.
하루는 나를 방문하고는 이야기 끝에 말하길
‘내가 계림 남산에 땅을 가려 서너 칸 되는 정사를 짓고
도서를 좌우에 벌여두고는 그 사이에서 소요하고 음영하고 있소이다.
산중 사계절의 맛을 이루다 말할 수가 없을 정도라오.
나는 이곳에서 장차 늙을 예정이고 또 이곳에서 입적할 생각이오.
근자에 천리 멀리 여행길을 떠났다가 서울에 당도하였는데
내일이면 지팡이를 돌릴 것이오.
부디 선생께서 한 말씀을 해 주셔서 내 정사를 빛내주시길 바라오’라고 하였다.
나는 오랫동안 병을 앓고 있던 뒤끝이라
붓을 내던지고 시 읊기도 정지한 지 여러 날이 되었으나
스님의 부탁을 어기기 어려워 붓을 달려
근체시 여섯 수를 적어서 스님에게 올리는 바이다.”】.
일민逸民을 자처하였다.
심지어 그가 법회에 왔다가 절 뒷간에 스스로 빠지자
승려들이 미쳤다고 여겨 그를 내쫓았다고도 한다.
경주 남산에 머물면서 김시습은 원효元曉가
속인의 삶과 승려의 삶을 절충하였다고 보고 그 삶에 동조하였다.
<무쟁비無諍碑>는 바로 무쟁대사 원효의 비를 보고 지은 시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 김시습은
아조역시선환도我曹亦是善幻徒 “우리도 환어幻語를 잘하는 무리라서
기어환어상략의其於幻語商略矣 환어에 대하여는 대략 아는 편이지만
단아호고부수독但我好古負手讀 나는 옛 도를 좋아해 뒷짐 지고 읽을 뿐
우차불견서래사吁嗟不見西來士 서쪽서 오는 분(부처)을 보지는 못하누나”라고 하였다.
불법의 이치를 글로 읽어 터득할 수는 있지만
진리를 진정으로 체득하지는 못하였다고 한탄한 것이다.
김시습은 어떤 특정한 종파가 절대 진리를 구현한다거나 지시하고 있다고 보지 않았다.
그에게 유교나 불교는 모두 부분적 의미밖에 지니지 않았다.
김시습은 이렇게 말하였다.
선禪의 이치는 아주 깊어서 다섯 해나 생각해서야 투명하게 깨우쳤다.
이에 비하여 우리 유학의 도는 본래 등급이 있어서 건강한 사람이 사다리를 오를 때
한 발을 들면 곧바로 한 층을 올라가게 되는 것과 같다.
불교처럼 돈오해서 상쾌한 즐거움은 없지만 여유롭게 차츰 젖어드는 맛이 있다.
이것은 유가의 입장에서 불교를 포섭한 논리이다.
그로서는 사실 종파적 분별의식이 그리 문제되지 않았다.
그는 전기소설까지도 인간 삶의 진리를 담는 것으로 인식하였고
또 그렇기 때문에 민간의 설화를 수집하고 허구를 가미하여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었다.
그렇다고 그는 비분강개의 뜻을 벗어던질 수는 없었다.
그것조차 망념妄念이라고 인식하면서도 그 망념에 자주 휘둘렸다.
5) 김시습이 환속하여 서울 근교에서 생활하기로 한 것은
경주 남산의 산실에서 여섯 해가 지날 무렵 어린 성종이 등극하였다.
김시습은 새 왕이 이상적인 정치를 실현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였다.
그래서 벼슬을 살 생각으로 유교 경전을 다시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젊은 시절부터 교분이 있었던 서거정徐居正은 달성군에 봉해져 예문 관대 제학을 하고 있었다.
김시습은 서거정에게 차나 부채를 예물로 보낸다든가 시를 보내어 옛 정분을 다시 확인하였다.
하지만 서거정은 그를 기이한 승려로 보았을 뿐이다.
사실 현실은 결코 이상적 가치가 실현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세조의 찬탈을 도왔던 훈구파는 그들의 세력 기반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
김시습은 서울 동쪽 수락산에 폭천정사瀑泉精舍를 짓고 은둔하였다.
그가 거처하던 곳에는 1669년에 이르러 박세당이 석림암을 두었다
【석림암石林庵은 반남 박씨의 재궁齋宮 사찰로 있다가
1698년에 홍수로 사우寺宇가 유실되었고
그 뒤 복원되었으나 또다시 1745년에 홍수로 유실되었다.
이 때문에 석림사가 그 아래 위치에 건립되었는데
6·25 때 전소된 것을 1965년에 신축하였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는 안동준의 <김시습 문학사상 연구> 한국학대학원 박사논문 1994 참조】
박세당의 <석림암기>에 따르면 그 위치는 채운봉彩雲峰 서남쪽 기슭
소향로小香爐의 북쪽이라고 하며 본래 ‘매월당’이라는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김시습은 수락산 시절에 불교와 도교의 도를 더욱 깊이 연찬하였다.
불교의 교리를 논한 <십현담요해서十玄談要解序>와
<대화엄경계도서大華嚴經界圖序>가 이 시기에 나왔다.
그러면서 그는 세속과 관계를 끊겠다고 다짐하여 도연명陶淵明의 삶을 흠모하였다.
<세만歲晚 거성동폭포지정居城東瀑布之頂 세모에 성 동쪽 폭포 머리맡에 거처하였는데
청송백석靑松白石 심협여의甚愜余意 청송과 백석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화정절귀원전시和靖節歸園田詩 나는 도연명의 귀전원 시의 뜻을 흠모하여 그 시에 화운한다>
라는 제목으로 다섯 수를 지었는데 그 제1수는 다음과 같다.
만거성동수晚居城東陲 세모에 도성의 동쪽 끝에 거처하니
수석승려산水石勝廬山 수석이 여산보다 낫도다.
복축의한암卜築依寒巖 찬 바위에 의지하여 터 잡아
궁거유수년窮居逾數年 집짓고 궁하게 산 지 서너 해
현표은남산玄豹隱南山 검은 표범은 남산에 숨고
신룡습구연神龍襲九淵 신룡은 구룡연에 잠겼다.
수아현빈문修我玄牝門 내 현빈玄牝의 문을 닦고
서아강궁전鋤我絳宮田 내 강궁絳宮(마음)을 김매어
족이보잔생足以保殘生 남은 목숨 보전하리니
기련부침간豈戀浮沈間 어찌 세상의 영욕에 연연하랴.
야록순계제野鹿馴階除 들 사슴은 섬돌에서 순하고
산조명첨전山鳥鳴簷前 산 새는 처마 머리에 지저귀누나.
독파예주경讀罷蕊珠經 예주경(도가서) 읽고 나
고전소향연古篆消香煙 향 연기는 전자篆字를 그리며 사라진다.
심방동간애尋芳東澗涯 동쪽 시냇가로 방초를 찾고
채약남산전採藥南山巓 남산 머리에서 약을 캐나니
일포리명장一拋利名場 명리 세상을 버리매
만사다한한萬事多閑閑 만사가 한가롭기만 하다.
소오북창하笑傲北窓下 북창 아래 거들먹대며
자희도도연自喜陶陶然 홀로 기뻐 희희거리노라.
남산의 표범은 안개비가 내릴 때는 털빛이 상할까봐
산을 나와 가축을 먹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열녀전列女傳>의 <도답자처전陶答子妻傳>에 나온다.
표은豹隱이라는 숙어가 있게 된 이 고사를 끌어와 김시습은
당대의 세상에서 벼슬을 사는 것을 수치로 여긴다는 뜻을 밝혔다.
그는 현빈의 문를 닦겠다고 하였는데 현빈의 문은 곧 진여眞如의 마음이다.
김시습은 탈속한 삶을 살았으되 적정주의寂靜主義에 빠지지 않았다.
진여는 현실 공간을 벗어난 다른 곳에 일층을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농사를 감독하면서 농민들의 삶에 공감하고
배불리 먹는 무리들에 대한 증오로 치를 떨었다.
그는 하궤장인荷簣丈人과 달랐다.
세상일을 과감하게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김시습은 너무 일찍 신동으로 알려졌고 성격도 거칠어서 세상에 용납되기 어려웠다.
그 스스로도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때때로 광기를 발하고 농담과 익살로 세속을 조롱하였으며
사람들이 자기의 그런 몰골을 보고 손가락질하면 더 좋아하였다.
그의 광기는 세상일에 분개하는 데서 나온 것이었다.
고위 관리의 임명 소식을 들을 때마다 그는
”이 백성이 무슨 죄가 있기에 그 사람이 그 직책을 맡게 되었는가”
라고 하면서 여러 날씩 통곡하였다.
좋은 절기를 만나면 明水와 향불을 갖추어 현인들을 예배하든지
혹은 높은 바위벽에 올라가 눈물을 흩뿌리고는 하였다.
어떤 때는 밭 갈고 김매는 농사꾼의 형상을 백여 개쯤 나무로 깎아
책상 곁에 벌여 놓고 종일토록 응시하다가는 문득 통곡하고 태워버렸다.
또 중들에게 화전을 갈도록 하고 나무통을 여러 개 만들어 그 속에 술을 담가두고는
바가지로 권하여 마시게 하고 자기도 두어 달씩 마셔댔다.
현실 공간을 벗어난 다른 곳에 절대 가치의 세계가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기에 김시습은 세상에 남아 있으면서 세상의 결함을 목도하고
애처로움을 느꼈고 그만큼 광기를 수시로 발하였다.
6) 세간의 영욕에서 벗어나
1481년에 김시습은 제문을 지어 조부와 부친을 제사지내고 安氏를 새 아내로 맞았다.
이때 수천부정秀川副正 이정은李貞恩과 남효온南孝溫ㆍ
안응세安應世ㆍ홍유손洪裕孫 등 몇 사람과 깊이 교유하였다.
그 무렵 노사신盧思愼에게서 <장자>를 배운 일이 있고 뒤에 송광사 주지가 된 조우祖雨
즉 우송광雨松廣이 수락산으로 김시습을 찾아왔다.
김시습은 그에게 밥을 짓게 해놓고는 먼지를 일으켜 한 숟갈도 들지 못하게 하였다.
이것은 <월정만필月汀漫筆> 39에 전하는 일화다.
조우로부터 그 이야기를 들은 박지화朴枝華는
동봉상유박주공비탕무지의東峰嘗有薄周孔非湯武之意
“동봉은 주공과 공자를 대단찮게 여기고 湯王과 武王을 그르다고 여긴 적이 있다.
로기시행상盧其時幸相 고필여차운이故必如此云爾
그런데 노사신이 그때 총애 받는 정승이었기 때문에 이와 같이 하였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러한 김시습이었지만 남효온이 과거에 응하지 않자
“나는 영묘英廟(세종) 조의 사람으로 노산魯山(단종)의 일을 직접 보았기 때문에
지금 조정에서 벼슬하기 어렵네만
그 뒤에 태어난 자네가 벼슬하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 지나쳐!”
라고 하면서 과거 응시를 권하였다.
남효온은 생육신의 한사람으로 꼽힌 인물이다.
25세 때 단종 모[昭陵]의 복위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홍유손 등과 죽림칠현을 자처하였다.
세상일에 비분강개하여 가끔 무악毋岳에 올라가 통곡하고는 하였다고 한다.
그도 방랑을 일삼다가 39세로 죽었다.
의분을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고 김시습을 스승으로 섬겨 세상 밖에 놀았던 것이다.
이 시기에 김시습은 <북명北銘>이라는 좌우명을 지어
선비로서의 풍모와 염치를 지켜야 한다는 뜻을 다잡았다.
수일표식일단水一瓢食一簞 쪽박 물과 찬 밥을 먹을지언정
절물소찬切勿素餐 거저 먹지 말며
수일반사일력受一飯使一力 한 그릇 밥 받으면 걸 맞는 힘을 써서
수지의적須知義適 의리를 지켜야 하리라.
무일조지환이우종신지우無一朝之患而憂終身之憂
하루 닥칠 근심보다는 종신토록 근심할 일 근심하고
유불병지구이락불개지락有不病之癯而樂不改之樂
파리함을 병으로 여기지 않고 뜻 바꾸지 않는 즐거움을 누리리.
돈상사풍렴치敦尙士風廉恥 선비의 풍모와 염치를 지키도록 하고
경염속태사특輕厭俗態詐慝 세속의 간특한 짓을 미워하라.
물희긍예勿喜矜譽 뭇사람 칭찬에 기뻐하지 말고
물진훼욕勿嗔毀辱 뭇사람 깔봄에 노여워 말라.
이연순리怡然順理 기꺼이 天理를 따라
유연유득悠然有得 넉넉히 얻음이 있으리라.
무심출수지운영無心出岫之雲影 무심히 봉우리 위로 피어나는 구름 그림자같이
불아현공지월색不阿懸空之月色 사심 없이 허공에 달려 있는 달빛과도 같이
동정어묵망형해動靜語默忘形骸 일상의 동작 언어와 침묵에서 겉껍데기 육신을 잊어버려
희황상세지순박羲皇上世之淳朴 상고시대의 순박함을 보존하고
용지궤칙존상상容止軌則存想像 몸가짐과 행동에서 옛 성인의 전형을 지켜서
당우삼대지전칙唐虞三代之典則 요순과 삼대의 전형을 따르라.
기자관성冀子觀省 그대는 반성할 때마다
감어북벽感於北壁 부디 북벽에서 느끼시라.
김시습은 세간의 영욕을 벗어나 仁과 禮를 완성하는 생활을 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가 추구한 예는 개인의 삶을 외적으로 구속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내면의 참된 가치를 발현하는 일 그 자체를 뜻한다.
인과 예를 추구하는 삶이란 義와 利를 엄격히 구분해서
의를 최고 가치로 삼아 인간 본연의 주체성을 확보하는 삶에 다름 아니었다.
7) 김시습은 또다시 방랑의 길을 떠나는데
그러나 그 뒤 얼마 되지 않아 부인 안씨가 죽자 의지할 곳이 없어진
김시습은 1483년 나이 49세 때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방랑의 길에 나섰다.
1482년에 일어난 폐비윤씨廢妃尹氏 사건이
현실세계의 결함상을 다시금 환기시킨 까닭이었는지 모른다.
그는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강릉ㆍ양양 설악 등지를 두루 여행했다.
유학의 경전과 다른 고전들을 지방 청년들에게 가르치기도 하고
시와 문장을 벗 삼아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냈다.
1486년에 양양 부사로 부임한 유자한柳自漢은 그에게 가업을 일으키라고 권유하였다.
그러나 김시습은 사양하였다.
“선비는 세상과 모순되면 은퇴하여 스스로 즐기는 것이 그 본분이거늘
어찌 남의 비웃음과 비방을 받아가며 억지로 인간 세상에 머물러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그 이유였다.
유자한은 생년을 알 수 없으나 1504년의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가 배소配所에서 죽은 문인이다.
김시습은 그 뒤 관동 지방을 떠나 방랑 끝에 1493년에
홍산鴻山의 무량사無量寺에서 병을 얻어 59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감하였다.
김시습은 늙어서의 초상과 젊어서의 초상을 손수 그려두고 스스로 찬贊을 지었다.
활자본 <매월당집> 권19에 <자사진찬自寫眞贊 초상화 찬>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부시리하俯視李賀 이하李賀를 내리깔아 보아
우어해동優於海東 해동에서 최고라고들 말하지.
등명만예騰名謾譽 격에 벗어난 이름과 허랑한 명예
어이숙봉於爾孰逢 네게 어이 해당하랴?
이형지묘爾形至眇 네 형용은 아주 적고
이언대동爾言大侗 네 말은 너무도 지각없다.
의이치지宜爾置之 너는 의당 네 몸을
구학지중丘壑之中 구학 속에 두어야 하리.
당시 사람들은 김시습의 재능을 中唐 때의 시인 이하李賀(790-816)에 견주었던 것 같다.
이하는 27세의 짧은 생애 동안 주로
鬼를 중심으로 한 환상적인 시들을 남겨서 鬼才라고 불리운다.
귀계鬼界의 시인이라는 뜻이다.
그는 비애감과 염세관을 시로 담아냈으며
일상생활의 보편적 경험보다도 개인적 정감을 토로하는 데 주력하였다.
김시습은 일상생활의 보편적 경험을 노래하기보다도 현실의 결함상을
음울하게 응시하였다는 점에서 이하와 통하는 면이 없지 않다.
더구나 <금오신화金鰲新話>는 귀계를 들여다보는 자의식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이하의 음산하고 기괴한 환상과 견주어질 만한 요소를 지닌다.
물론 그 함의는 전혀 다르지만.
8) 에필로그
김시습은 숙종 25년(1699) 2월 10일에
최석정崔錫鼎의 발의로 증직이 되고 사제賜祭가 이루어졌다.
최석정은 “사인士人 김시습은 광묘光廟(세조) 때부터 입선入禪하여
머리 깎고 세상을 피하였다가 중간에 환속하여 아내를 얻었으나 자손이 없습니다.
그의 문장과 절행이 우뚝하여 숭상할 만하니
증직贈職시키고 사제賜祭해 주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김시습은 지절관 때문에 사대부의 전형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하지만 김시습은 온 세상을 흘겨보면서 산수 좋은 곳에서
휘파람 불며 거만 떨고 형체 밖에서 방랑한 그런 인물이다.
이산해李山海가 말하였듯이 그의 행동은 여유롭고 유쾌하여
외로운 구름이나 홀로 나는 새와 같았고
마음속은 환하고 맑아서 얼음 든 옥병과 가을밤의 달에 뒤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가 결코 현실 세상을 벗어난 다른 곳에서 별도의 光景을 보고자 한 것은 아니다.
현실 공간 속에 남아 있으면서 현실을 부정하였다.
연산군 때 ‘오물경세傲物輕世 세상을 경멸하면서’
깨끗한 삶을 살았던 홍유손은 제문[제금열경시습문祭金悅卿時習文]을 지어
“그 분의 말씀이 보통 사람과 같았지,
결코 괴상한 행동을 하고 홀로 해괴한 짓을 한 것이 아니었음을 생각하면 비록
마음속에 쌓인 것을 말하지 않았다 해도 그 깊은 속을 누가 모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김시습은 결코 색은행괴索隱行怪(은미하고 편벽된 이치를 찾고 괴이한 행동을 함)의
무리가 아니며 세상을 등졌으나 그 마음이 신묘하여 깊은 이치를 온축하였다고 말하였다.
김시습은 가치가 전도되고 아무 전망도 지닐 수 없는
혼돈된 세계를 음울하게 응시하였던 것이다.
3. 판본의 문제
1) 조선시대 초기 목판본 <금오신화>가 발견되었다
<금오신화金鰲新話>는 그동안 주로 일본 목판본을 이용하였다.
그런데 1999년 여름에 고려대학교 중문학과 최용철崔容澈 교수가
중국 따렌大連 도서관에서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 목판본을 발견하는 쾌거를 올렸다
【최용철 교수는 논문
<금오신화 조선간본의 발굴과 그 의미>/중국소설연구회보 39호, 1999
<금오신화 조선간본의 발굴과 판본에 관한 고찰>
<동아시아 전기소설의 전파와 수용>
/동방비교문학연구회 제92차 학술발표회 논문초록집, 2000에서 이를 밝히고 있다】
따렌 도서관의 이 책은 총 54엽에서 앞장과 뒷쪽이 떨어져 나가 52엽이 남아 있다.
판심[大黑口, 上下內向黑魚尾]의 특징과 을해자 활자의 자양字樣과 유사한 글자체로 볼 때
이 책은 선조 연간에 재주 갑인자(학자에 따라서는 경진자라고도 함)로
<매월당집>이 간행되기 이전에 간행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 책의 권수제卷首題는 ‘매월당梅月堂 금오신화金鰲新話’이고
판심제板心題는 ‘금오집金鰲集’이다.
그 다음 줄에는 ‘파평후학坡平後學 윤춘년尹春年 편집編輯’이라고 되어 있다.
이 책은 윤춘년이 명종 연간(1546-1567)의 말기에
교서관제학을 겸하고 있을 때 간행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렌 도서관의 이 조선 목판본은 일본의 문록文祿·경장慶長 연간에
의사 곡직뢰정림曲直瀨正琳(1565-1611)의 양안원養安院에 들어갔다가
율전만차랑栗田萬次郞이라는 사람의 손을 거쳐 따렌도서관에 수장藏된 것으로 보인다.
【일본 소장자에 대해서는 순천향대학교 중문학과 박현규朴現圭 교수의 견해에 의한다】
이 초기 목판본은 다음과 같이 배열되어 있다.
① 윤춘년 <매월당선생전梅月堂先生傳> 단, 앞 1쪽이 떨어져 나갔다.
② 목차
③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ㆍ<이생규장전李生窺墻傳>ㆍ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ㆍ<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ㆍ<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
④ <서갑집후書甲集後 갑집의 뒤에 적다> 시 2수
⑤ <유금오록遊金鰲錄>의 후지後志 단, 끝 1쪽이 떨어져 나갔다.
이 조선 목판본은 그간 통용되던 일본 목판본과는 글자의 차이가 꽤 있다.
다만 일본 목판본에 원래 작품의 모습이 변형된 예는 없다.
일본 목판본들은 그 초기 판본에서부터
조선 목판본을 저본으로 삼아 원 모습을 비교적 충실하게 전하였다
2) <금오신화金鰲新話>는 언제, 몇 편이 지어 졌는가
김시습은 경주 남산의 용장사 부근에 은둔하던
1465년(31세)부터 1470년(36세)까지 사이에 이 소설집을 엮었다.
그는 당시 자연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하는 동시에 인간 삶의 조건을 깊이 숙고하고 있었다.
<금오신화金鰲新話>가 창작된 시기와 장소에 대해서는 이설이 있었다.
하지만 따렌 도서관 소장의 조선 목판본에 <유금오록遊金鰲錄>의 후지가 그대로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김시습이 30대에 경주 남산에서 저술하였다는 설이 더욱 유력해졌다.
이미 권문해權文海(1534-1591)도 1589년에 편찬을 끝낸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에서
금오산재동도金鰲山在東都 “금오산은 동도(경주)에 있으니
김동봉상주차산金東峯嘗住此山 김동봉이 일찍이 이 산에 거주하면서
효전등신화効剪燈新話 저금오신화수권著金鰲新話數卷
<전등신화>를 본받아 <금오신화金鰲新話> 수 권을 저술하였다하여
<金鰲新話>가 경주의 금오산에서 이루어졌다는 전승을 문헌으로 기록하여 둔 바 있다.
종래에 통용되던 일본 목판본의 뒤에 ‘갑집甲集’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그 저본底本이 되었을 이 조선 판본에도 마지막에 ‘갑집’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金鰲新話>의 목판본은 달리 더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 저본인
필사본이나 원래의 고본本은 5편 이외에 더 많은 작품을 수록하였던 것일까?
어쩌면 김시습은 <전등신화剪燈新話>와 유사하게 20편을 창작하고 각 5편마다
갑집ㆍ을집의 순으로 명명했지만 윤춘년이 목판본을 간행할 때에는 갑집만 남아 있었거나
윤춘년이 갑집을 간행하고 나서 실각한 탓에 후속권이 간행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다만 ‘갑집’이라는 표시는 동일 저술의 일부임을 알려주는 것만은 아니다.
이를테면 조선시대의 경연經筵에서 주요한 텍스트로 사용된 진덕수眞德秀의
<대학연의大學衍義>는 <진서산독서기眞西山讀書記> 가운데 을집乙集ㆍ上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동일 저자의 저술을 단행본으로 나눌 때에 갑ㆍ을을 사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윤춘년 이 간행한 조선 목판본 <금오신화>는 판심板心의 서명이 ‘금오집’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금오신화>가 ‘금오집’의 일부라는 의미가 아닐까 한다
【윤춘년은 김시습이 ‘금오’에서 저술한 시문을 망라하여 간행하고자 하여 <금오신화>를
갑집으로 삼고 이를테면 시집 <유금오록遊金鰲錄>을 을집으로 분류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현재 <매월당집> 권12의 <유금오록遊金鰲錄> 뒤에 있는 후지는 윤춘년의 간행본에서는
<금오신화> 뒤에 있었던 것인데 선조의 왕명으로 <매월당집>이 재편집될 때
<금오신화>는 수록하지 않으면서 그 뒤에 있던 후지를
<유금오록遊金鰲錄> 뒤로 옮겼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의문에 답할 확증은 없다.
요컨대 김시습의 원고는 5편 이외에 더 있었을지 모르지만
조선 목판본에서부터 <금오신화金鰲新話>는 다섯 편만 전하는 것이다.
3) <금오신화金鰲新話>를 목판으로 처음 간행한 윤춘년은 어떤 인물인가
<금오신화>를 목판으로 처음 간행하였던 윤춘년은
본관이 파평坡平이고 자는 언구彦久 호는 학음學音ㆍ창주滄洲이다.
그는 참판 윤안인尹安仁의 아들로 1534년(중종 29년) 생원이 되고
1543년(중종 38년)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역임하였다.
그런데 명종 즉위년(1545)에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친족인 소윤 윤원형尹元衡과 합세하여 대윤 일파를 제거하는 데 앞장섰다.
1546년에 병조좌랑이 되어 윤원로尹元老를 제거하였으며
윤원형의 총애를 받아 이조정랑, 장령, 교리 등을 거쳐 1553년 대사간에 발탁되었다.
2년 뒤 부제학을 거쳐 대사헌이 되었으나
윤원형의 서얼허통론庶孼許通論을 반대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다.
1558년 한성부 판윤을 역임하였으며 그 해에 동지주청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윤춘년의 문집 <학음고學音稿>에는 무오년戊午年(1558)으로 계년繫年된
<부경동행축기赴京同行軸記>가 실려 있는데
북경을 오고 간 행적을 그림으로 남겼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역관譯官은 장한걸張漢傑이었고 화사畫師는 함윤덕咸潤德이었다】.
1565년 예조판서로 재직 중 윤원형이 제거되자
파직 당하였고 향리에서 병을 얻어 1567년에 죽었다.
혹자의 말에 의하면 그의 집에 요사스러운 일이 생겨 정신이 이상하게 되어서
밤이면 밀실에서 혼자 북 치고 춤추며 귀신에게 제사하다가 죽음에 이르렀다고 한다.
윤춘년의 문집으로는 일본 텐리天理 도서관에 필사본 <학음고>가 전한다.
【<학음고>는 이마니시 류우(今西龍) 문고에 소장되어 있다.
필사본 <학음고>의 표지 안쪽에는 정조 3년(1779)에
강산연초彊山硯樵 즉 이서구李書九(1754-1825)의 평문이 있다.
텐리 도서관 소장의 <학음고>에 대하여는
최용철 <금오신화, 조선목판본의 간행과 전파>에 설명되어 있다】
윤춘년은 음률에 밝았고 시학에 깊은 관심을 두었다.
1552년에는 명판본 <시법원류詩法原流>를
【원나라 지치至治 연간(1321-1323)에 양중홍陽仲弘이 四川에 가서 두보杜甫의
후손 두거杜擧로부터 시의 작법을 전수받아 기록하였다고 서문에서 밝혔다.
권말에 명나라 성화成化 연간(1465-1487)에 회열懷悅이 쓴
후서(<詩法原流 後序>)가 있으므로 명판본을 저본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복간覆刊하고 시론을 첨부하면서 발문을 썼다(당시 통정대부 대사간의 직함이었다)
【이 책은 현재 일본 內閣文庫에 간본刊本이 소장되어 있고 고려대학교에 사본이 소장되어 있다】
또 수호자垂胡子 임기林芑와 함께 1547년부터 <전등신화구해剪燈新話句解>를 집해集解하다가
자신이 외직으로 나간 뒤 1559년(명종 14년)에 임기가 단독으로 집해를 완성하자
그것을 정정하여 1564년(명종 19년)에 간행할 때 발문을 썼다.
(당시 정헌대부 형조판서 예문관제학의 직함이었다).
윤춘년은 윤원형에게 아부하여 을사사화 때
많은 선비를 추방하였기 때문에 경망하다는 평을 면하지 못하였다.
또 ‘불교와 도교의 찌꺼기’들을 주워 모아 자칭 道를 얻었다고 자랑하였다는 혹평을 받았다.
그러한 그가 김시습을 ‘동방의 공자’라고 하였고
”공자를 못 보면 열경悅卿을 보면 된다”고까지 하였다.
즉 1551년에 쓴 서한(<학음고 答鍾城叔玉書ㆍ辛亥>)에서 김시습의 기괴한 행적에도 불구하고
그를 성인(공자)에 비유한 것은 부당하다고 하는 비난에 대해
년지이김열경위근어성인자年之以金悅卿爲近於聖人者 억유설언抑有說焉
“제가 김시습을 성인에 가깝다고 한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할 말이 있습니다.
비이기적非以其迹 이기심이以其心耳
저는 그의 행적을 두고 말한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가짐을 두고 말한 것입니다”라고 밝혔다.
김시습을 지극히 존경하여 한 말이다.
윤춘년은 1551년(명종 6년) 가을에 <유관서관동록서遊關西關東錄序>를 적었다.
아마도 그 무렵에 김시습의 <관서록>과 <관동록>을 간행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또 <매월당집>과 <금오신화>의 권두에 실려 있는 그의 <매월당선생전梅月堂先生傳>이
<학음고>에 <매월당서>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금오신화>를 간행하는 해에 지은 듯한데 어느 해에 이 글을 썼는지는 알 수가 없다.
<선조수정실록>의 선조 원년(1568) 10월 5일 기록에 윤춘년의 졸기卒記가 실려 있다.
윤춘년은 사람됨이 가볍고 허황되어 스스로 학도들을 모아 놓고
詩文을 강설하기 좋아하였으나 담론하는 것은 모두 佛老의 이야기였다고 한다.
그는 성인이란 천심과 부합되는 자를 말할 따름이라고 하여 의리는 따지지 않고
무엇인가 일을 이루기만 하면 그것으로 천심과 부합된 것이라고 하였다.
요승 보우普雨가 학업에 대해 질문하자
“보우는 禪으로 마음을 깨치고 그칠 곳을 알았다.
다만 정성定性의 경지에 미치지 못했을 뿐이다”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사상적으로 허탄하였다고 비판받았지만
윤춘년은 결코 주색과 뇌물은 좋아하지 않아 칭송을 받았다.
대사헌으로 있을 때는 법을 공정하게 집행하였고 판서직에 있을 때 개혁한 것도 많았다.
스스로 도를 실천하는 사람이고자 하였다고 한다.
4. <금오신화金鰲新話>의 텍스트로는 또 어떤 것들이 있나
<금오신화>는 완성된 직후에는 비교적 널리 읽혔던 것 같다.
김안로金安老(1481-1537)의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를 비롯한
몇몇 문헌들을 통하여 그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 중기에 이르러 희귀본이 되고 말았다.
조광형趙光亨은 송시열宋時烈(1607-1689)에게 답한 서한에서
<금오신화>가 자기 집에 있다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였다.
아마 송시열도 금오신화를 읽고 싶어 하였으나
돌아다니는 판본이 희귀하였기 때문에 읽지 못하였던 것 같다.
국내에서 일찍 사라진 이 책은 오히려 일본에 전하였다.
즉 일본의 오오까(大塚) 집안에 220년 동안 보관되어 오던 것이
1653년 중춘에 곤산관도가처사崑山館道可處士에 의하여 목판 간행되었다.
이것이 일본 국회도서관 내각문고內閣文庫에 소장되어 있다.
이 책에는 일본식 훈독을 위한 가에리(返り點)과 오꾸리가나(送り假名)가 붙어 있다.
겉표지의 제전題箋에는 ‘도춘훈점道春訓點’이라고 쓰여 있다.
도춘은 1600년대 일본의 저명한 유학자 하야시 라잔(林羅山,1583-1657)의 法名이다.
그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고문으로서 에도막부江戶幕府의 창업에 기여한 바 있으며
임진왜란 때 쿄토(京都)에 억류 중이던 조선의 유학자 강항姜沆과 교류하며
조선의 성리학을 수학하여 일본 주자학의 단초를 열었던 인물이다
【이노구치 아쯔시(猪口篤志)의 <일본한문학사>(심경호 외 역, 소명출판사, 2000) 참고】
훈점을 붙일 만큼 그가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열심히 읽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일본에서는 1660년(일본 萬治 3년) 중하에 간기刊記를 개각한 판본이 나왔다.
이 판본은 곤산관도가처사 간행본을 저본으로 삼아 도춘훈점까지 그대로 복각하였다.
일본 텐리(天理)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또 1673년(일본 寬永 13년) 중춘에는 승경 2년의 출판소 이름을 지우고
‘복삼병좌위문판행福森兵左衛門板行’이라는 간기를 붙인 판본이 나왔다.
역시 텐리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러다가 일본 판본 <금오신화>는 1884년(일본明治 17년)에
東京 매월당에서 상ㆍ하권 2책으로 재간되었다.
이 재간본에는 책의 윗부분 광곽匡廓 안에 평어가 적혀 있고
광곽 밖에 인명ㆍ지명ㆍ시일 등에 대한 주注가 붙어 있다.
그리고 당시의 일본 한학자들이 서ㆍ발ㆍ비평을 적었다.
발문 2편 가운데 1편은, 한말의 정계 및 종교계에서 활동했던 이수정李樹挺이란 인물이 썼다.
이 책에도 일본식 훈독 표기가 붙어 있다.
일본의 여러 도서관과 한국 국립중앙도서관에도 소장되어 있다.
동경 매월당의 재간본은 1927년에 최남선崔南善(1890-1957)에 의해
<계명啓明> 19호에 영인 수록되었다.
이로써 국내에서 <금오신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한편 1952년에 정병욱鄭炳昱 님은 필사본 전기소설집 속에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와 <이생규장전李生窺墻傳>이 전재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필사본은 신독재愼獨齋의 수고手稿인데
신독재는 조선 중엽의 학자 김집金集(1574-1656)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 소설집의 필사 시기는 1656년 이전이 되는 셈이다.
하지만 이 신독재가 곧 김집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리고 <금오신화>의 현대어 역주본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이가원李家源 역, <금오신화金鰲新話> 현대사 1953.
이가원 역, <금오신화金鰲新話> 통문관 1959.
조선고전문학선집 <김시습작품선집> 조선문학예술총동맹 1963년
【이 책은 김시습의 <금오신화>와 함께 시와 산문을 초록하여 번역하였다】
이재호李載浩 역, <금오신화金鰲新話> 을유문화사 1972년 초판.
세종대왕기념사업회 <국역 매월당집>제3책 수록 <금오신화> 1978
【이 책의 번역과 주석은 이재호 님의 역주본 내용과 유사하다】
이재호 역, <금오신화金鰲新話> 과학사 1980,
편자 미상, <김시습, 해누리 1994
【이 책은 북한 조선문학예출총동맹 출판사의 <김시습작품선집>에서
시를 빼고 금오신화와 산문 초록 부분을 표기만 바꾸어 간행한 것이다】
이번의 역주는 따렌 도서관 소장의 조선 목판본을 저본底本으로 삼고
글자의 차이가 큰 곳에는 교감 내용을 밝히기로 한다.
단 이체자의 경우에는 인쇄출판의 편의상 컴퓨터에서 통용되는 글자체를 이용하였다.
5. <금오신화金鰲新話>의 다섯 이야기는 어떤 특징을 지니는가
<금오신화金鰲新話>에 수록된 다섯 작품이 지닌 주요한 특징은 무엇일까?
첫째, 우리나라를 배경으로 우리나라 사람을 등장인물로 하였으며 시대적 배경이 현실적이다.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는 고려말 왜적의 침략을 배경으로 하였고
<이생규장전李生窺墻傳>은 고려말 홍건적의 난을 배경으로 삼았다.
이 두 작품은 외적의 침략으로 민족 구성원의 삶이 유린당한 사실을 아프게 그려 내었다.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는 옛 도읍 평양을 무대로 삼아
풍경 속에 민족사의 흐름이 스며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켰다.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는 조선초에 유행한 지옥 신앙을 소재로 삼으면서
등장인물의 대화를 통하여 올바른 이념이 실현되지 못하는 현실의 惡의 상태를 고발하였다.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은 비현실적인 환상의 공간을 그려보이되
그 개성의 박연폭포에 연관된 용 전설을 소재로 삼았다.
<금오신화金鰲新話>의 인물들은 이 체험을 하면서 일상의 희노애락을 더욱 확실하게 경험한다.
그들은 불완전한 보통 사람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이생규장전李生窺墻傳><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의 이생ㆍ양생ㆍ홍생은 물론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의 박생ㆍ한생도 실은 범부일 따름이다.
그리고 주인공은 대체로 작자 자신을 본보기로 하고 있어서
이야기 속에 자서전적 내용이 담겨 있다.
둘째, 귀신ㆍ염왕ㆍ용왕ㆍ염부주ㆍ용궁 같은
비현실적인 소재를 이용하여 현실적인 것의 의미를 생생하게 드러내었다.
비현실적 소재들로 허구화된 이야기 속에는 당시의 지식인 및
민중들이 지녔던 심리적 고통과 사상적 고뇌가 투영되어 있다.
이를테면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의 중심 내용인 귀신과의 결연담은
최자崔滋의 <보한집補閑集>에 나오는 귀교鬼交의 이야기를 계승한 측면이 있다.
또한 그 주인공 양생梁生은 남원의 토성土姓이어서
이 소설은 양씨 가문의 설화를 토대로 창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가원李家原의 <조선문학사>태학사 1995 참조】
그리고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에서 박생이 염마왕으로 취임하는 것은
이색적인 허구의 장치가 아니라 오히려 민간의 전승을 계승한 것이다.
<수서隋書>에 입전立傳되어 있는 한금호韓擒號란 인물은
죽어서 한염라韓閻羅가 되었다고 전하며
송대의 공명정대한 인물들이었던 구준寇準ㆍ범중엄范仲淹ㆍ포증包拯도
모두 죽은 뒤에 염라왕이 되었다고 믿어왔다.
이렇게 속인이 염라왕이 된다고 믿는 전승은 우리나라에도 있었을 법하다.
김시습은 그러한 민간전승을 이용하여
현실계의 부조리를 역설적으로 부각시키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또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에 등장하는 조강신神江神ㆍ낙하신洛河神ㆍ벽란신碧瀾神은
동아시아의 水神 사상의 계보를 잇되 조선 민중의 수신 사상을 직접 반영하고 있다.
그 신들이 매우 생동적이고 친근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 것도
김시습이 당시 민중의 수신 사상을 참조한 결과라고 생각된다.
셋째, 문어체 문장이나 시는 대상을 서정적으로 미화하고
등장인물의 심리, 사건 전개의 암시, 인물과 사건에 대한
작가의 심정적 평가를 섬세하게 드러내는 데 성공하였다.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는 예외이지만 다른 네 작품은 모두
시(절구ㆍ율시ㆍ배율ㆍ고시ㆍ잡언 장편고시)나 사詞ㆍ초사체楚辭體ㆍ악장樂章을 이용하여
정경과 사건의 흐름을 묘사ㆍ서술ㆍ암시하였으며 극적 긴장을 고조시켰다.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에서 여러 여인들의 심리를
각기 다른 시풍 속에 담아낸 것은 문학적 수사의 극치를 이루었다.
우리 문학에서 보면 시의 삽입은 본래 설화가 문헌으로 정착될 때
이야기의 진행이나 등장인물의 심리를 드러내는 장치로 진즉에 활용되었다.
이를테면 <삼국유사>에 수록된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의 이야기에서 아미타불의 화신인 여인은
남암南庵과 북암北庵에서 각각 칠언절구와 오언율시를 남김으로써 아미타불의 뜻을 제시하였다
<금오신화>에 시가 삽입된 것은 이처럼 설화의 전기 소설적 편성에서
축적된 문학적 전통을 계승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에서는 곽개사ㆍ현선생의 자기소개 내용을 유머러스한
가전체의 방백으로 처리하여 가전체 문학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연극적 효과를 낳았다.
6. <금오신화金鰲新話>가 창작된 배경은 무엇일까
<금오신화金鰲新話>가 창작된 배경과 관련하여 제일 먼저 생각할 것은 문학사적 전통이다.
조선초에 이르기까지 서사문학의 원초 형태인 설화가 끊임없이 발생하여 전승되고 변모되었고
신라말 고려초에는 전기소설의 요소를 갖춘 우리 소설이 발생하여 그것이 지속적으로 발전하였다.
물론 각 지역별로 설화를 정착시킨 風土記나 소설집이 실제로 발견되지는 않고 있으나
이미 고려 중ㆍ후엽에는 많은 설화문학이 소설로 변모되어 있었으리라 추정된다.
<수이전殊異傳>의 일문逸文이나 <삼국유사><삼국사기> 등에 실린
일부 설화들은 소설적인 요건들을 상당히 갖추고 있다.
곧 <금오신화>와 같은 완성된 형태의 소설이 출현할 문학사적 기반이 진즉에 마련되어 있었다.
한편 <금오신화>라는 소설집이 나오게 된 것은 사상사의 흐름에서 그 요인을 찾아볼 수 있다.
조선왕조의 건설자들은 지배질서를 확립하고 전제개혁을 단행하여 집권층의 생활기반을
확립하고자 했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소외된 일부의 지식인들은 민중의 처지에 동조하면서
새 왕조의 이념적 모순과 사회적 폐단을 비판하고 새로운 사상을 모색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김시습이었다.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에서 작가는
우주의 이치로서 正道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고자 하였다.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은 덕망이 있어야 하며 天命이 떠나버리고
민심이 이반하면 임금도 자리를 지킬 수 없음을 강조하였다.
당시의 정치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김시습은 또한 인간 개개인의 본래성이 당시의 현실 속에서 구현될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여 그 자각에서 느끼는 고통과 슬픔을 소설로 담아냈다.
<금오신화>가 출현하게 된 외래적 요인으로는
명나라 구우瞿佑(1347-1427)의 <전등신화剪燈新話>가 유통된 사정을 고려할 수 있다
【<전등신화>는 조선 전기의 시문과 전기소설에 일정한 영향을 끼친 것이 사실이다.
연산군이 1506년 4월 임술에 <전등신화>와 <전등여화剪燈餘話>의 간행을 명할 만큼
<전등신화> 등이 문장가의 모범으로 제시되었다.
명의 구준丘濬의 <오륜전비기五倫全備記>를 윤색하고 한글로 번역한 낙서거사洛西居士는
1531년에 쓴 <오륜전비기서五倫全備記序>에서
“민간의 무식쟁이들이 언자諺字를 배워 노인들이 전하는 이야기를 베껴 밤낮 떠들고 있는데
‘이석단李石端 취취翠翠 이야기’ 같은 것은
음설망탄하여 도무지 취해 볼 만하지 않다”라고 하였다.
이석단과 취취의 이야기 가운데 취취는 <전등신화>의 <취취전翠翠傳>을 가리키는 듯하다.
<전등신화>는 이미 1494년에 조선본이 나왔으니 민간에서 한문으로 전사되거나
한글로 번역되어 유통되었으며 혹은 口傳을 통해 개작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낙서거사는 아마도 환혼담還魂談 등의 전기적傳記的 요소를 두고 음설망탄하다고 하였던 듯하다.
심경호의 <조선시대 한문학과 시경론>일지사 1999을 참조】
김시습은 <전등신화>를 높이 평가하여 <매월당집> 권4에
<제전등신화후題剪燈新話後 전등신화의 뒤에 적다>라는 시를 남길 정도였다.
<만복사저포기>는 <전등신화>의 <등목취유취경원기騰穆醉遊聚景園記>에서 착상을 얻었고
<이생규장전>은 <위당기우기渭塘奇遇記>에서 착상을 얻었으며
<취유부벽정기>는 <등목취유취경원기기騰穆醉遊聚景園記>와 <감호야범기鑑湖夜泛記>에서
<남염부주지>는 <영호생명몽록令狐生冥夢錄>에서
<용궁부연록>은 <수궁경회록水宮慶會錄>과 <용당영회록龍堂靈會錄>에서 일부 착상을 얻었다.
소급하여 말한다면 <금오신화>의 환생담이나 귀신 설화는
중국의 지괴소설인 <수신기搜神記> 이래의 문학적 전통을 이은 측면도 있다.
하지만 <금오신화>는 <전등신화>의 모방작이 아니며
<수신기>의 지괴담을 직접 이은 것도 아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그 소재는 이미 조선 민중의 상상력의 세계에서 취하여 온 것이 많다.
또한 우리 문학사에서 전기소설이 창작될 수 있는
충분한 여건이 조성되어 있었기에 <금오신화>가 출현할 수 있었다
【벌써 나말 여초에 <아도><원광서학><연오세오><탈해왕><선덕왕>
<죽통미녀><노옹화구><보개><지귀」 등 설화적 요소가 강한 서사물에서부터
<온달><설씨녀><도미><백운제전><수삽석남><김현감호><조신><최치원> 등
소설적 허구성이 강한 작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양태의 전기 서사물이 발달하였다.
<금오신화>는 우리 문학의 그러한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것이다】
7. <금오신화金鰲新話>가 담고 있는 문학적ㆍ철학적 메세지는 무엇인가
<금오신화>의 문학적ㆍ철학적 가치에 대하여 기왕의 연구는 다음과 같은 점들에 주목하여 왔다
【<금오신화>에 관한 기왕의 연구 가운데 대표적인 것만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임형택林熒澤 <현실주의적 세계관과 금오신화> 국문학연구13 서울대학교 국문학연구회 1971.
이재호李載浩 <금오신화 고, 작자 김시습의 저항정신을 중심으로> 논문집14 부산대학교 1972.
조동일趙凍一 <초기 소설의 성립과 초기 소설의 유형적 특징> 한국소설의 이론, 지식산업사 1977.
정병욱鄭丙昱 <금오신화 서설> 한국고전의 재인식, 홍성사 1979.
설중환薛衆煥 <금오신화의 신연구> 고려대학교 박사논문 1983.
김명호金明昊 <김시습의 문학과 성리학 사상>35집, 일지사 1984.
박혜숙朴惠淑 <금오신화의 사상적 성격> 한국문학사의 쟁점, 집문당 1986.
안동준安東濬 <김시습 문학사상 연구> 한국학대학원 박사논문 1994.
박희병朴희秉 <전기소설의 미학> 돌베개 1997.
최귀묵崔貴默 <김시습 글쓰기 방법의 사상적 근거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논문 1997.
윤채근尹采根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월인 1999.
윤주필尹柱弼 <한국의 방외인 문학> 집문당 1999.
이학주李學周 <동아시아 전기소설의 예술적 특성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논문 1999】
(1)
이재호 님은 <금오신화>를 김시습의 삶과 연결시켜 단종의
손위遜位 사건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작품 속에 투영되어 있다고 보았다.
이를테면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에서 남원 여인의 환신이 삼대를 통해 양생을
받들겠다고 약속한 것은 작가가 세종에게서 받은 은총을 끝까지 보답하겠다는 염원을 보인 것이고
또 <이생규장전李生窺墻傳>의 최처녀가 도적의 칼날에 쓰러지면서까지 정조를 지킨 사실은
김시습 자신이 세조 정권에 지조를 팔지 않겠다는 굳센 의지를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에는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긴 사실과
약질인 선녀가 조상의 도움으로 천상으로 올라간다는 사건이 서술되어 있는데
앞의 것은 세조의 정권탈취를 은연 중 가리키고
후자의 선녀는 어린 단종을 상징한다고 하였다.
또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에서 박생이 염라왕의 다음 직책을 맡는 것은
찬탈자 세조를 저승에서나마 처단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에서 작가는 세종의 은총을 입은 자신의 과거를 추억하고 있으며
한생은 작가 자신을, 용왕은 세종을, 용녀는 문종과 단종을 그려낸 것이라고 하였다.
작중의 사건이나 인물을 작가의 일생과 무매개적으로 연결시킨 것은 문제점이 없지 않다.
다만 작품 곳곳에 작자 김시습의 삶이 배어 있는 것은 사실이며
그렇기에 이 설은 참고로 해야 할 측면이 있다.
(2)
정병욱 님은 ‘봉건적 속박으로부터의 인간성 해방’ 내지
‘자유 연애의 제창’이 <금오신화金鰲新話>의 주제라고 보았다.
(3)
임형택 님은 금오신화의 기본사상을 기일원론적 현실주의로 규정하였다.
즉 이 소설은 기일원론적 사유에 기초하여
“미신적ㆍ비합리적 생활의식을 비판하고 이성에 기초한
민본적 정치 체제를 구현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는 것이다.
사실 김시습은 생사와 번뇌의 현실을 초탈할 필요가 있지만
생사와 번뇌의 현실을 떠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현실주의 정신으로 불교사상을 받아들였고
그렇기에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는 불교로써 불교를 부정하는 역설적 수법을 동원하였다.
(4)
김명호 님은 김시습이 성리학에 입각하여
불교를 적극적으로 비판했다는 관점에서 <금오신화>를 해석하였다.
예컨대 <만복사저포기>와 <이생규장전>에서 다루어진 애정 갈등의 주제는 불교의 금욕주의에
맞서 인륜의 틀 내에서 인간의 정욕을 긍정한 성리학적 인성론이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고려말 이후 불교가 타락하여 그 극단적인 금욕주의의 이면에 성 풍속이 문란하게 되었는데
김시습은 이 같은 풍속 상의 갈등을 문제시하고 남녀의 애정 실현을 통해
인간성과 인륜에 대한 신뢰를 보여줌으로써 시대적 추세를 반영하였다는 설이다.
(5)
박희병 님은 <금오신화>의 주인공들은 작자의 고독과 그에 따른 심리감정을 형식화한 것이고
비극적 결말 구조는 현존하는 세계를 부정하면서 초월하기를 희망하는 작자의 심리를 반영한다고 보았다.
<금오신화>에서 현존하는 인간 세계는 대단히 부정적인 것이며
그 속에서의 인간의 삶은 고독과 우수로 점철된 비극적인 것으로 인식된다.
작자는 이계異界를 설정함으로써 현존하는 세계의 부정적 면모를 비판하는 한편
있어야 할 세계의 모습을 제시한다.
그리고 세계와 운명의 횡포 앞에 굴하지 않는 인간의 아름다움과 숭고함을 묘사하여
횡포한 세계도 인간의 자기결단과 주체적 의지만큼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했다.
(6)
역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금오신화>는 이승이든 저승이든, 속세든 용궁이든, 실재하는 현실 공간이든
상상 속에서 그려낼 수 있는 상징의 공간이든,
그 어떤 것도 독립적으로 원만구족한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는 사실을 드러내었다.
자기 자신에게, 또 분별지에 휘둘리고 있는 독자에게, 이 소설은
우리가 사는 현실세계가 결함계缺陷界일 따름이라는 사실을 아프게 환기시키는 것이다.
결함계 속에 살아가는 등장인물들은 모두가 완전한 가치를 실현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함으로써 슬픔을 느끼는 존재들이며
독자들은 이 소설을 통하여 그 슬픔을 공감한다.
하지만 그러한 자각은 결코 현실로부터의 도피를 유도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에 살면서 현실을 부정하는 자기 혁신의 고투를 개개인에게 요구한다.
김시습은 <매월당집> 권23에 수록된 <잡설>의 한 논문에서
천당ㆍ지옥의 설을 ‘허설虛設’로 규정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불교에서 敎는 방편이니 권도와 진실을 병행한 것이고
禪은 곧바로 가리키는 것[直指]이니 순전히 참된 말이다.”
이것은 선의 직지를 일정하게 평가한 말이다.
그렇다고 김시습은 선종에 몰입한 불교도는 아니었다.
<매월당집>에 실린 시문을 보면 그는 유가적 현실주의자의 면모가 더 강하다.
그는 현실 속에 살면서 현실을 부정하려고 고뇌하였다.
그는 “12부의 불경에서 인연으로 비유하는 따위의 일은
모두 부처가 진실된 마음에서 말한 것이 아니다”라고 단언한다.
그러한 그에게 어떠한 종교나 철학적 사상도 부분적 의미밖에 지니지 않으며
기의機宜에 곡순曲順하는 언설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그는 선사이면서도 부처를 좋아하지 않았다
【김시습보다 20세 연하로서 그를 추종한 남효온이 수락산 은둔 시절의 김시습에게 준
시 <증동봉贈東峯> 2수 가운데 첫수에서 한 말이다.
문명삼십재文名三十載 시문으로 이름 떨친 지 삼십년 되었건만
족불리경사足不履京師 서울로는 발걸음을 돌리지 않으셨네.
수락전암득水落前巖得 수락산 앞 바위는 때 만나 빼어나고
춘래정수의春來庭樹宜 뜨락의 나무들도 봄 맞아 아름답다.
선사불희불禪師不喜佛 선사께선 불법을 좋아하지 않으시고
제자총능시弟子摠能詩 제자들은 모두 시 짓기 능하도다.
자한신전박自恨身纏縛 스스로 한 스러운건 몸이 묶여 있어서
심사의미시尋師意未施 스승 찾아뵈올 뜻 이루지 못하기에
남효온은 이 시에서 김시습을 ‘시인’이라 불렀다.
물론 그 시인은 현실을 우울하게 응시하여 고통과 슬픔을 담아내는 그런 시인이었다.
남효온이 김시습과 주고받은 시에 대해서는 金性彦의 <남효온의 삶과 시>태학사 1997 참조】
김시습은 모든 상대적인 가치의 부정을 통해서 본래적 자아를 찾고자 시도하였다.
그가 보기에 자기의 본래성을 ‘직지直指’하는 일이야말로
결국 불완전한 현실성을 극복하고 본래성을 찾는 유력한 작략作略이었던 것이다.
8. <금오신화金鰲新話>는 후대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
<금오신화>는 일본의 소설 <오토기보코(伽婢子)>에 영향을 주었다.
<오코기보코>는 아사이 료오이(淺井了意 ?-1691)가 1666년에 지은 소설집이다.
이 소설집은 일본 괴담소설을 대표하며 총 68화의 번안물로 이루어져 있다.
아사이 료오이는 번안을 할 때에 오조소설五朝小說로부터 44화
<전등신화구해剪燈新話句解>로부터 18화를 이용하였고
<금오신화金鰲新話>로부터 2화를 이용하였다.
전체적으로 보면 <금오신화>에서 직접 번안한 것은 그리 많은 양이 아니다.
다만 <금오신화>와 <전등신화구해剪燈新話句解>를 중심으로 하는
전기소설의 세계가 이 작품에 주요한 영향을 끼쳤다고 말할 수 있다.
<금오신화>는 국내에서는 <운영전>과 같은 전기소설로 계승되었다.
직접적인 영향관계는 고증할 수 없으나 구성과 문제, 삽입시의 활용 등
여러 면에서 <운영전>은 <금오신화>를 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9. 김시습의 저술로는 어떠한 것이 있었다
김안로의 <용천담적기> 6에 보면
입금오산入金鰲山 “매월당은 금오산에 들어가
저서장석실왈著書藏石室曰 책을 써서 石室에 넣어두고 이르길
후세필유지잠자後世必有知岑者
후세에 반드시 나를 알아줄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남효온의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에는
“매월당이 쓴 시는 수 만여 편에 이르지만 널리 퍼져 나가는 동안에 거의 흩어져 사라져 버렸고
조신朝臣과 유사儒士들이 몰래 자기의 작품으로 삼았다”라는 기록도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주부 용장사’ 조항에서는 김시습의 저술로
<매월당시집>과 <금오신화>이외에 <역대연기歷代年記>를 열거하였다.
또한 권문해의 <대동운부군옥> 권14에 의하면 김시습의 작품으로
<금오신화> 이외에 <임천가화林泉佳話>가 있어 ‘본집’에 들어있다고 하였다.
현전하는 활자본 <매월당집>에는 <임천가화>가 수록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허목許穆(1595-1682)의 <미수기언眉叟記言>에서는
“매월당의 저작에 <사방지四方志> 1,600편과
<기산紀山><기지紀志> 200편이 있으며 따로 詩卷이 있다”라고 하였다.
<사방지>는 <사유록四遊錄>이 별행別行된 것을 가리키는 듯하다.
<기산>과 <기지>는 별행된 시권을 말하는지 확실치 않다.
1669년에 민주면閔周冕이 <동경지東京誌>를 개수하여 편한 <동경잡기東京雜記>에는
<사유록>과 <태극도설太極圖說> 두 책의 판목이 경주 정혜사淨惠社에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동경지>의 기록을 계승한 듯하다.
<태극도설>은 <매월당집>의 잡저에 수록되어 있는 <태극설>과 같은 내용이었으리라 추정된다.
또 <동경잡기>에는
“매월당은 성리性理ㆍ음양陰陽ㆍ의복醫卜 등 백가百家에 통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그 문장이 호한浩汗하고 거리낌 없다.
그의 저서 중 <매월당시집><역대연기><금오신화> 등이 세상에 널리 행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이것도 <동경지>의 기록을 계승한 것이다.
이상의 문헌 기록으로 볼 때 김시습의 <매월당시집><매월당시사유록(사방지)><기산><기지>
<태극도설><역대연기><금오신화><임천가화林泉佳話> 등이 각기 단행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김시습 문집의 간행을 처음 주청한 인물은 이세인李世仁(1452-1516)이었다.
그는 김시습이 죽은 지 18년 뒤인 1511년 3월 15일에
김시습 문집의 간행을 주청하였는데 중종이 윤허하였다.
그러나 곧바로 김시습의 문집이 간행된 것 같지는 않다.
그 10년 뒤인 1521년에 이자는 <매월당집> 서문을 쓰면서
자신이 10년간에 걸쳐 김시습의 문집 3권을 수습하였다고 적었다.
그리고 1582년 가을에 이르러
선조가 당시 대제학이었던 율곡 이이에게 김시습의 전기를 쓰게 하였다.
단 <선조수정실록> 권16에는 선조 15년 4~5월 기사에 그 사실이 언급되어 있다.
따라서 계절에 차이가 있다.
어쨌든 선조는 1582년에 이자ㆍ윤춘년이 수집하였던
김시습의 유고를 운각芸閣 즉 교서관에서 인쇄해 내게 하였다.
그 결과 이듬해 이산해가 서문을 쓴 재주갑인자본 <매월당집> 23권 11책이 세상에 나왔다.
이 활자본에 대하여는 갑인자가 아니라 경진자라는 설이 있다.
이 책은 국내에 낙질로 전하고 일본 호사분코蓬左文庫에 완질이 전한다.
그리고 이 활자본에 보유편을 붙인 신활자본이
1927년에 김시습의 후손 김봉기金鳳起에 의하여 간행되었다.
그 밖에 <매월당시사유록>이 따로 목판본으로 간행된 것이 전한다.
또한 송석하宋錫夏 님이 소장하였던 필사본 <매월당고>가 있다.
이 사본에는 문집에 실려 있지 않았던 시편들이 실려 있다.
그리고 김시습의 불교 관계 저술로
<대화엄일승법계도주>와 <십현담요해>의 두 책이 목판으로 출간되어 있다.
조명기趙明基 님의 소장본이 전한다.
이 두 책은 김시습이 수락산에 있을 때 저술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묘법연화경별찬이 <명원산고溟源散稿>에 전한다.
이것은 김시습이 내불당에서 연화경을 번역하던 무렵에 저술된 것 같다.
이밖에 <천자여구千字儷句>가 <명원산고溟源散稿>에 전한다.
김시습의 유고는 윤춘년에 의하여 일단 편찬되었으나
현전하는 시문집은 선조의 어명으로 교서관에서 재편ㆍ간행한 것이다.
윤춘년은 김시습에 관한 속설을 취하였다고 전하므로 그가 편찬했던
김시습의 선집에는 유가의 저술과는 다른 시문이 상당수 수록되어 있었을 법하다.
이에 비해 1582년 교서관에서 문집이 재편ㆍ간행되었을 때는 의리충절의 이념을
제시한다는 명목 하에 원래의 시문들이 취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교서관 간행의 문집에는 <금오신화金鰲新話>가 수록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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