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당 시집 제4권 16 문방文房
세연후희제자조洗硯後戲題自嘲
벼루를 씻은 뒤에 장난으로 써서 나 스스로를 조롱하다
우군필법전자소右軍筆法傳者少 우군右軍의 필법筆法은 전하는 이 적고
한림시호침강수翰林詩豪沈江水 한림翰林은 시호詩豪로 강물에 빠졌건만
여독하위포괴기汝獨何爲抱瑰奇 넌 홀로 무엇하러 진기함을 안고서
일사위언천만지日寫危言千萬紙 날마다 준엄한 말 천만 장을 쓰는가?
유래다어중소기由來多語衆所忌 전부터 말 많은 건 여러 사람이 꺼리던 것
종여능언역미기縱汝能言亦未技 비록 네가 말 잘 한대도 그 역시 하찮은 재주
삼대유훈재방책三代遺訓載方册 삼대三代적 남긴 훈계 대쪽[方冊]에 실려 있어
로수산정장벽리魯叟刪定藏壁裏 노魯나라 늙은이 산정刪定해서 벽 속에 감추었어도
조룡분훼화위신祖龍焚燬化爲燼 조룡祖龍이 불에 태워 재로 화해 버림에
함양원상성진토咸陽原上成塵土 함양咸陽의 언덕 위에 진토가 되었다네.
자운폐문저태현子雲閉門著太玄 자운子雲이 문을 닫고 <태현경太玄經>을 지을 때
창천중연수장부蒼天重淵搜膓腑 푸른 하늘 깊은 걸 중히 여겨 창자를 뒤져냈네.
나감후인멱장부那堪後人冪醬瓿 후세 사람이 장독 덮고 경서 넣는 부문에
역불수입경서부亦不收入經書府 넣지도 않았으니 어찌 차마 견디랴?
로여정신제여고勞汝精神祭汝藁 네 정신을 위로하고 네 원고에 제 지내려면
불여안좌부조양不如安坐負朝陽 편히 앉아 아침 햇빛 쬐는 것만 못하리라.
궁수저서이자견窮愁著書以自見 궁함에 근심하며 글 지어 스스로 보이려도
불여고와북창량不如高臥北窓涼 북창 서늘한데 높이 누움만 못하리라.
고금진적개가수古今陳迹皆可數 고금의 묵은 자취 다 헤일 수 있네 마는
불과담성각등배不過膽姓刻藤背 성명 써서 등藤 조각 등[背]에다 새기는 데 불과하네.
찬하족희훼하증讚何足喜毀何憎 칭찬한들 기쁠 거며 헐뜯는 다 미울 손가?
분명원상봉토괴分明原上封土塊 분명한 건 언덕 위에 흙덩이를 봉하는 걸세.
원이탑연공중당願爾嗒然拱中堂 원커니 네 말 막힌 듯 中堂에 팔짱끼고
응신명목서황당凝神瞑目鋤荒唐 정신 모아 눈감고 황당한 것 없앨 것이니
백체종령약면수百體從令若俛首 백체百軆가 명령 따르기를 머리 숙이듯 할 것이라.
유여망물준기강有如芒芴遵紀綱 망물芒芴이 법의 기강紀綱을 쫓는 것과 같을 걸세.
아이양춘위아포연경俄而陽春爲我布煙景 조금 있다가 양춘陽春이 날 위해 구름 경치 펼쳐 주고
대괴가아정문장大塊假我呈文章 천지가 내게 文章 주는 걸 빌린다면
백화경발가목방百花競發佳木芳 백 가지 꽃 다투어 피고 아름다운 나무 꽃다워서
풍광료아수시복風光撩我搜詩腹 풍광風光이 날 움직여 시 나오는 창자를 더듬으리라.
좌중시측삼사배座中侍側三四輩 좌중에 모시고 있는 서너 벗들
개유기예상등양皆有技藝相騰驤 기술과 재주 모두 있어 서로 날고뛰는데
홍농세면로복와弘農洗面露腹卧 홍농弘農 벼루는 낯을 씻고 배 내놓고 누웠으며
객경요수마기흉客卿搖首磨其胸 객경客卿 먹은 머리 저으며 그 가슴을 어루만지고
저랑고의여설상楮郞高義如雪霜 저랑楮郞 종이의 높은 의리 눈서리 같아
절선중구참량공折旋中矩參兩公 꺾고 도는 게 법규에 맞아 두 公에 참례하네.
말석하처중서군末席何處中書君 말석末席 그 어디에 중서군中書君이 있어
현하리자여상봉懸河利觜如霜鋒 강물 쏟듯 예리한 입이 서리 칼날 같은데
저랑견와불출상楮郞堅臥不出床 저랑楮郞은 굳이 누워 책상 밖에 나가지 않고
중서치취섬계방中書馳驟剡溪傍 중서군은 섬계剡溪 곁에서 달리고 뛰는구나.
재예수수의즉동才藝雖殊意則同 재주와 기능은 다르네만 뜻인즉 같아서
개조표일릉운기皆助飄逸凌雲氣 다 표일飄逸한 걸 도와서 구름 기운을 능가했네.
토출명주삼백곡吐出明珠三百斛 밝은 진주 삼백 섬을 토하여 내는데
척지금성부족귀擲地金聲不足貴 땅에 던져 쇳소리 나는 것 귀하달 것 없네.
난자추퇴사불민難者趍退謝不敏 어려운 이는 빨리 물러가며 불민한 걸 사례하니
안전경물우번화眼前景物尤繁華 눈앞에 경물景物이 더욱 번화하여라.
안득도경령상운安得陶景嶺上雲 어떻게 도홍경陶弘景 고개 위 구름을 얻어
탄위옥전지금화송철攤爲玉牋之金華宋鐵 펼쳐 놓아 옥전玉牋의 금화金華·송철宋鐵되게 하며
천장마애위단계지금형千丈磨崖爲端溪之金烱 천길 마애磨崖로 단계端溪의 금형金烱 되게 하겠는가?
섬서복리장동정蟾蜍腹裏藏洞庭 두꺼비 뱃속에 동정호를 간직하고
독진중산천수영禿盡中山千首頴 중산中山의 천수千首 빼어남을 모 질러 다하게 할까?
자조래지송赭徂徠之松 조래산徂徠山의 소나무를 빨갛게 베어
제인향지병製印香之餅 인印을 친 향기로운 떡을 만들어
조이장강지삭操以長杠之槊 긴 장대 창처럼 꼬나 잡고서
체여경전지영掣如驚電之影 번개에 놀란 그림자처럼 휘둘러 대어
기휘야풍소운취其揮也風掃雲聚 휘두르는 게 바람 쓸고 구름 모이듯 하며
기예야두전하회其曳也斗轉河廻 끄는 건 북두北斗도 돌고 은하수도 돌게 하여
갱금알옥상명鏗金戛玉相鳴 쇳소리 쨍, 옥이 댕그랑 하듯 서로를 울리고
노예갈기훤력怒猊渴驥喧曆 성난 사자, 목마른 준마 떠들듯이 하겠는가?
장양헌부일사회長楊獻賦日斜回 장양궁長楊宮에 부賦 올리고 해 기울어 돌아오니
란가쟁하진기재攔街爭賀真奇才 거리 막으며 참말 기재奇才라 다투어 하례하네.
►자조自嘲 자기自己를 비웃음.
●자조自嘲/벽송지엄碧松智嚴(1464-1534 세조10~중종29)
벽송당리지우자碧松堂裏之愚子 벽송당 속에 있는 어리석은 놈
돌돌소용백불능咄咄踈慵百不能 멀리하고 게을러서 모든 것에 능하지 못 하다네
지득행행암하로只得行行巖下路 석굴 아랫길을 다니고 다니면서
대모운외박천붕擡眸雲外搏天鵬 눈 들어 구름 밖으로 나온 하늘을 나는 붕새를 붙잡으려 한다네
/<벽송당야로송碧松堂野老頌>
●백발자조白髮自嘲/침우당枕雨堂 장지완張之琬(?-? 朝鮮後期)
인증발백아환련人憎髮白我還憐 남들이야 하얀 머리 싫다 해도 나는 좋다네
구시유성소주선久視猶成小住仙 한참 살펴보면 잠시 머무는 신선 같지 않소
회수기인능도차回首幾人能到此 둘러보면 그 몇이나 이 정도 살았겠소
흑두쟁거북망천黑頭爭去北邙阡 검은 머리도 앞 다투어 북망산에 가는 걸
/<침우당집枕雨堂集>
►우군필법右軍筆法 왕우군王右軍의 필법筆法
진晋나라 때의 명필 왕희지王羲之의 다른 이름.
우군장군右軍將軍을 지내 사람들이 왕우군王右軍으로 불렀다.
왕희지王羲之(307-365) 동진東晉 낭야琅邪 임기臨沂 사람. 자는 일소逸少,
동진 왕조 건설에 공적이 컸던 왕도王導의 조카이고 왕광王曠의 아들이다.
비서랑秘書郞으로 출발했다.
회계내사會稽內史를 지냈다.
왕술王述과 불화하여 사직하고 회계 산음山陰에 머물면서
산수를 유람했는데 오두미도五斗米道를 섬겼다.
중국 고금古今의 첫째가는 서성書聖으로 존경받고 있다.
종요鍾繇와 함께 ‘종왕鍾王’으로 불린다.
해서와 행서, 초서의 각 서체를 완성함으로써 예술로서의 서예의 지위를 확립했다.
예서隸書를 잘 썼고 당시 아직 성숙하지 못했던
해ㆍ행ㆍ초偕行草의 3체를 예술적인 서체로 완성한 공이 있다.
현재 그의 필적이라 전해지는 것도 모두 해ㆍ행ㆍ초의 3체에 한정되어 있다.
오늘날 전해오는 필적만 보아도 그의 서풍書風은
전아典雅하고 힘차며 귀족적인 기품이 높다.
해서의 대표작으로는 <낙의론樂毅論>과 <황정경黃庭經>
행서로는 <난정서蘭亭序>
초서로는 그가 쓴 편지를 모은 <십칠첩十七帖>이 옛날부터 유명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인대해왈二人大駭曰 두 사람이 크게 놀라며 말했다.
부도금일득견왕우군수서不圖今日得見王右軍手書
오늘 왕우군의 글씨를 보게 될 줄은 몰랐다/<삼국사기> 권제48 김생
<조선朝鮮 4대필가四大筆家>
조선필법筆法을 안평安平 자암自庵 봉래蓬萊 석봉石峰을 4대가라 이르되 석봉을 제일로 삼는다.
⓵안평대군安平大君(1418-1453 태종18~단종1)
자 청지淸之. 호 비해당匪懈堂, 매죽헌梅竹軒
조선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이며 둘째 형 수양대군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시문·서·화에 모두 능해 삼절이라 불렸으며 당대 제일의 서예가로 유명하다.
도성의 북문 밖에 무이정사를 짓고 많은 책과 서화 명적들을 수장하여 시회를 열고
서화가를 후원하는 등 당대 서화계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황보인·김종서 등 문신들과 제휴, 수양대군측 무신 세력과 맞서 조정의 배후 실력자로 등장했으나
1453년 계유정난으로 대신들이 살해된 뒤 강화도로 귀양 갔다가 교동으로 옮겨져 사사되었다.
유필로 <세종대왕영릉신도비世宗大王英陵神道碑>가 전한다.
⓶자암自庵 김구金絿(1488-1534) 조선 초기의 문신, 서예가.
자는 대유大柔), 호는 자암自庵 또는 삼일재三一齋
김굉필에게서 배웠다 하나 <전고대방典故大方>의 문인록에 의하면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이었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음률에도 능통해 악정樂正에 임명된 적이 있으며 글씨에도 뛰어나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양사언楊士彦·한호韓濩 등과 함께
조선시대 전기 서예계의 4대가로 손꼽힌다.
서체가 매우 독특해 김구가 살았던 인수방의 이름을 따서 ‘인수체仁壽體’라고 했으며
중국 사람들까지도 김구의 글씨를 사갈 정도였다고 한다.
저서에 <자암집自庵集> 작품으로 <자암필첩自庵筆帖> 등이 전한다.
⓷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1517-1584 중종12~선조17)
자 응빙應聘. 호 봉래蓬萊, 해객海客
형 양사준楊士俊 아우 양사기楊士奇와 함께 글에 뛰어나
중국의 삼소三蘇(소식·소순·소철)에 견주어졌다.
아들 양만고楊萬古도 문장과 서예로 이름이 전한다.
1546년(명종 1) 문과에 급제하여 대동승大同丞을 거쳐 삼등三登(평안남도 강동 지역)·
함흥咸興·평창平昌·강릉江陵·회양淮陽·안변安邊·철원鐵原 등 8고을의 수령을 지냈다.
자연을 즐겨 회양의 군수로 있을 때는 금강산에 자주 가서 경치를 감상했다.
만폭동萬瀑洞의 바위에 ‘봉래풍악원화동천蓬萊楓岳元化洞天’ 글씨를 새겼는데 지금도 남아 있다.
안변의 군수로 있을 때는 백성을 잘 보살펴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品階를 받았고
북쪽의 병란兵亂을 미리 예측하고 말과 식량을 많이 비축해 위급함에 대처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릉智陵(이성계 증조부의 묘)에 화재가 일어나자 책임을 지고
해서海西(황해도의 다른 이름)로 귀양을 갔다.
2년 뒤 유배에서 풀려나 돌아오는 길에 세상을 떠났다.
40년간이나 관직에 있으면서도 전혀 부정이 없었고 유족에게 재산을 남기지 않았다.
한편 남사고南師古에게서 역술易術을 배워 임진왜란을 정확히 예언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한시는 작위적이지 않고 표현이 자연스러워 더 이상 고칠 데가 없이 뛰어나다는 평을 들었다.
가사歌辭로는 <미인별곡美人別曲>과 을묘왜란乙卯倭亂 때
軍을 따라 전쟁에 나갔다가 지은 <남정가南征歌>가 전한다.
시조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는 지금도 널리 애송되고 있다.
<미인별곡>은 현재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해서楷書와 초서草書에 뛰어났으며
安平大君·김구金絿·한호韓濩와 함께 조선 4대 서예가로 일컬어진다.
특히 큰 글자를 잘 썼다고 전한다.
문집으로 <봉래집蓬萊集>이 있다.
⓸석봉石峰 한호韓濩(1543-1605 중종38-선조38)
자 경홍景洪. 호 석봉石峯, 청사淸沙.
조선시대 글씨로 출세하여 사자관寫字官, 서사관書寫官을 역임한 서예가.
그의 묘갈墓碣(묘비)에 의하면
“송도松都에서 났으며 占보는 사람이 말하기를
‘옥토끼가 동쪽에 났으니 洛陽의 종이 값이 높아지리라.
이 아이는 반드시 글씨를 잘 써서 이름이 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자라면서 글씨 쓰기에 힘썼고 꿈에 왕희지王羲之에게서 글씨를 받아 이로부터 마음속으로
자부自負하고 법첩法帖(체법體法)이 될 만한 명필의 서첩)을 대할 때마다 神이 돕는 것 같아
마침내 해서楷書·행서行書·초서草書에 그 묘妙를 다하지 아니함이 없었다.”고 하였다.
그의 書法은 조선초기부터 성행하던 조맹부趙孟頫의 서체를 따르지 않고 왕희지를 배웠다.
그러나 그가 배운 것은 진위眞僞가 문제되는 <악의론樂毅論><동방삭찬東方朔贊>
<황정경黃庭經> 등의 소해小楷(작고 깔끔하게 쓰는 해서체의 하나)에서 시작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조법趙法(조맹부의 서법)보다 뒤떨어져서 진당인晉唐人의
높고 굳센 기운氣韻이 모자라는 저속한 구렁으로 떨어졌다.
또한 한미寒微한 출신으로 오랫동안 사자관으로 있었기 때문에
예술적인 타고난 재질을 발휘하지 못하고 틀에 맞추려는 노력이 앞섰다.
<동국금석평東國金石評>에는
모든 글씨체에 숙달되기는 하였으나 속되다고 비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로부터 국가의 문서를 다루는 사자관의 특유한 서체 즉 사자관체寫字官體가
창출될 만큼 그의 영향은 컸으며 또 이로부터 사자관제도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서체를 중국에서는 간록체干祿體라 한다.
양주에 있는 <김광계비金光啓碑><황주서대수비黃注書大受碑>
<이윤식비李允湜碑><이별제공즙비李別提公楫碑>
고양에 있는 <권도원수대첩비전면權都元帥大捷碑前面>기응세비奇應世碑>
장단長湍 <윤감정변묘표액尹監正忭墓表額>
과천果川 <유용비柳容碑><허초당엽묘표음許草堂曄墓表陰>
포천抱川 <이판서몽량비李判書夢亮碑>
남양南陽 <홍영상섬비洪領相暹碑>
용인 <정의흥희린갈鄭義興姬鄰碣><정대헌유비鄭大憲裕碑>
개성 서화담경덕비徐花潭敬德碑>
합천 박사간소갈朴司諫紹碣>
평양 <기자묘비箕子廟碑> 등을 썼다.
►한림시호침강수翰林詩豪沈江水 한림翰林은 시호詩豪로 강물에 빠졌건만
‘한림시호翰林詩豪’ 이백李白을 말한다.
이백은 태자빈객太子賓客으로 있었던 하지장賀知章, 벗 원단구元丹丘, 옥진공주玉眞公主 등의
추천에 힘입어 현종의 후기 집권기 천보연간天寶年間(742~755)이 시작되던 742년 43세에
현종의 칙령을 받아 한림공봉翰林供奉 벼슬을 맡게 되었다.
천보天寶 초 長安에서 한림공봉翰林供奉을 지내던 중 정치현실에 크게 실망한 이백은 744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짧은 벼슬 생활을 마감한다.
‘한림翰林’ 한림원翰林院. 한림학사翰林學士.
1)신라 때에 임금의 말과 命令을 글로 짓는 일을 맡아 하던 벼슬.
경덕왕景德王 때 상문사詳文師를 고친 것이다.
2)‘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을 예스럽게 이르는 말.
3)유학자儒學者의 모임.
4)고려시대에 학사원學士院ㆍ한림원翰林院에 속한 正四品 벼슬.
임금의 조서詔書를 짓는 일을 맡아보았다.
5)당唐나라 때에 한림원翰林院에 속하여 조칙의 기초起草를 맡아보던 벼슬.
6)당唐나라 中期 以後에 주로 詔書를 起草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官衙.
‘시호詩豪’ 매우 뛰어난 大詩人.
‘침강수沈江水’
이백은 말년에는 양자강 중하류를 떠돌다가 친척의 집에 머물다가 생을 마감했다.
달이 좋아 달을 노래한 이백의 민간설화에는 동정호수에 배를 띄우고 술을 마시며
놀던 이백이 호수에 비친 하늘의 달을 건지려다 물에 빠졌고
물에 빠진 이백을 고래가 등에 태워 승천했다고 한다.
►여독하위포괴기汝獨何爲抱瑰奇 넌 홀로 무엇 하러 진기함을 안고서
‘여독汝獨’ 붓을 말한다.
‘괴기瑰奇’ 아름답고 기이하다.
►삼대유훈재방책三代遺訓載方册 삼대三代적 남긴 훈계 대쪽[方冊]에 실려 있어
‘삼대三代’ 하夏은殷주周
‘방책方冊(方策)’
목판木板과 죽간竹簡. 서적.
방법方法과 꾀를 아울러 이르는 말.
►로수산정장벽리魯叟刪定藏壁裏 노魯나라 늙은이 산정刪定해서 벽 속에 감추었어도
‘로수魯叟’ 공자
‘산정刪定’ 쓸데없는 글자나 句節을 깎고 다듬어서 글을 잘 정리整理함.
종이가 없던 옛날에 대나무 쪽 따위에 글씨를 써서 冊을 만들었던 데에서 나온 말이다.
‘장벽리藏壁裏’ 벽 속에 감추다.
<여원분서장벽실慮遠焚書藏壁室>
진秦 시황始皇)이 서적을 불태우는 것을 염려하여 책을 벽 속에 넣어 두었다.
공등孔騰의 자는 자양子襄인데 진 나라 법이 엄함을 염려하여
상서尙書ㆍ효경孝經ㆍ논어論語를 공자가 살던 옛집 벽 속에다가 넣어 두었다.
/<孔子家語>
이것을 뒤에 한漢 문제文帝 때에 노魯 공왕恭王이 공자의 옛집을 헐다가 찾아내니
여기에서 나온 상서尙書를 ‘고문상서古文尙書’라 하며
진秦의 박사博士였던 복승伏勝은 진나라가 책을 불태우자 벽 속에 상서尙書를 넣어 두었는데
뒤에 난리가 나서 피난을 갔다가 한漢나라가 천하를 평정하자 복승은 그 책을 찾아냈는데
수십 편이 없어지고 다만 29편을 얻었다.
이것을 ‘금문상서今文尙書’라 한다/史記 卷121 儒林列傳>
►조룡분훼화위신祖龍焚燬化爲燼 조룡祖龍이 불에 태워 재로 화해 버림에
►함양원상성진토咸陽原上成塵土 함양咸陽의 언덕 위에 진토가 되었다네.
‘조룡祖龍’ 진시황秦始皇의 별칭別稱. 祖는 처음[시始]이요 龍은 人君의 형상을 뜻함.
금년조룡사今年祖龍死 이 해에 조룡이 죽었다./<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조룡유적부수기祖龍遺迹復誰記 진시황의 유적을 누가 다시 기억하리
석각박락태문반石刻剝落苔紋斑 돌에 새긴 글자는 닳아 벗겨졌고 이끼만 무늬 이루었네.
/이숭인李崇仁 <사문도회고沙門島懷古>
‘분훼焚燬’ 불 살라 태움.
<분서갱유焚書坑儒>
분서는 BC213년에 발생했다.
조정 회의에서 제나라 출신인 순우월淳于越이 군현제에 반대하며
은殷, 주周 시대의 봉건제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그러자 승상丞相인 이사李斯는 이를 비판하며 황제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사사로운 학문으로 도당을 이루지 못하도록 엄격히 통제할 것을 주장했다.
그의 건의로 협서율挾書律 제정되었다. 협挾은 소장한다는 뜻이다.
의약, 복서, 종수 등의 분야를 제외한 시서, 제자백가의 서적은
박사관이 가지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군수와 군위가 수거해 모두 불사르게 했다.
명령을 받고 30일이 지나도 태우지 않으면 묵형과 성을 쌓는 일에 징발하는 형벌을 주게 했으며
무리를 지어 시서를 논하면 처형한 뒤에 시신을 길거리에 버리는 기시의 형벌을 주었다.
맏아들인 부소가 유생들을 지나치게 탄압해 민심이 불안해질 것이 우려된다고 간언했으나
진시황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를 몽염이 주둔하고 있던 상군으로 내쫓았다.
분서가 실제로 얼마나 엄격히 시행되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지만
협서율은 진나라가 멸망하고 한나라가 들어선 뒤에도 유지되었으며
유학의 정치 이념이 본격적으로 부활되는 전한前漢 혜제惠帝 4년(BC191년)에 폐지되었다.
이때 유가의 육경 가운데 하나이던 악경樂經이 산실되어 오경 체제가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이듬해인 기원전 212년 진시황은 불사의 선약을 얻기 위해 후하게 대우하던
후생과 노생이라는 방술사들이 자신을 비난하며 도망치자 어사를 시켜 함양에 있는
유생들을 조사해 자신을 비판하는 자를 찾아내게 했다.
그리고 유생들이 서로 고발하여 금지를 어긴 460여 명을 찾아내자
그들을 구덩이에 파묻어 모두 죽이고 그 사실을 세상에 널리 알렸다.
이 두 사건을 합쳐 분서갱유라고 한다.
►자운폐문저태현子雲閉門著太玄 자운子雲이 문을 닫고 <태현경太玄經>을 지을 때
►창천중연수장부蒼天重淵搜膓腑 푸른 하늘 깊은 걸 중히 여겨 창자를 뒤져냈네.
►나감후인멱장부那堪後人冪醬瓿 후세 사람이 장독 덮고 경서 넣는 부문에
►역불수입경서부亦不收入經書府 넣지도 않았으니 어찌 차마 견디랴?
●자운子雲 양웅揚雄(楊雄 BC53-AD18) 前漢 말기의 사상가이며 문장가.
四川省 成都에서 태어나 山西省 장안(西安)에서 죽었다.
젊어서부터 박식하였으나 말을 더듬었기 때문에 서적만을 탐독하며 사색을 하였다.
30여 세에 비로소 대사마大司馬인 왕음王音에게 문재를 인정받아 성제成帝의
給事黃門郞(궁중의 제사를 관장하는 관원)이 되어 왕망王莽과 유흠劉歆과 동렬에 있었다.
나중에 궁정 쿠데타로 왕망王莽이 신新의 왕실을 일으키자 정권을 찬미하는 글을 써
노년의 선비로서 大夫라는 직책에 취임하여 죽는 해까지 머물렀다.
이 점에 대해 宋代 이후의 절의관節義觀으로부터 비난을 받았거니와 원래 정세와 함께
부침하면서 일신을 보전하는 말하자면 권력에는 겸유謙柔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본래 성품이 기이한 것과 새로운 것을 좋아했다.
집안이 가난했지만 부귀를 맹목적으로 좇지는 않았다.
일찍이 선진先秦(춘추전국시대) 노장철학老莊哲學에 정통했던 엄군평嚴君平에게 배웠다.
엄군평嚴君平의 저서 <도덕지귀道德指歸>는
내용이 매우 광범위하고 철학적 사변성이 강한데 이것이 양웅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양웅은 유가와 도가 사상을 융합하여 엄밀하고 상세한 철학체계를 창조했다.
이는 중국 철학 발전사에 보기 드문 일이었다.
또한 당시 유행했던 천인감응, 귀신도식 등의 미신적 사상을
유물주의唯物主義 관점에서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先秦(춘추전국시대) 유학에서 중시한 이성과 도덕 실천 정신을 부흥시키려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상은 동한의 유물주의 철학가 왕충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당시의 지배층에 현저하였던 陰陽五行說에 의한 유교의 신비화에 불만을 품은 그는
<老子>와 <역易>에 의거하여
범신론적인 선진先秦시대의 도가의 자연과 객관을 중시하는 경향을 발전시켰다.
著作으로 <주역周易>을 모방한 <태현경>과 <논어論語>를 모방한 <법언>이 있고
젊었을 때 동향의 선배 사마상여司馬相如를 사모하여 〈우렵羽獵>〈장양長楊〉 등
장문의 부賦와 〈해조解嘲〉〈해난解難〉 등 산문의 사부를 남겨 세론을 풍자하였다.
말년에 시에서 철학으로 관심을 돌렸는데 철학에서는 유가와 도가의 영향을 받았다.
반면 장자, 묵자, 한비자 등 제자백가의 학설은"사설"이라고 매도한다.
한의 왕위를 찬탈한 왕망에 대해서는 "양이 호랑이의 가죽을 뒤집어쓴 것"이라고 풍자하기도 했다.
그 외에 언어학상 귀중한 <방언方言><훈찬편訓纂篇>을 남겼고
또 <난개천팔사難蓋天八事>의 천문학설을 저작하였다.
철학 방면의 <태현경太玄經>10권은 <周易>의 형식을 모방한 15편의 수필로 이루어져 있다
현玄은 천지 만물의 기원, 태太는 그 공덕의 형용을 뜻한다.
當代의 고문가古文家에 영향을 준 고풍적이고 난해한 문체를 사용하였다.
전국 시대의 제자諸子의 사상가에 비교하여 독창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법언法言>은 윤리와 역사에 대한 글로서 공자와 맹자를 계승한다고 자처한
양웅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과 묻고 대답한 것을 토대로 저술했다.
<법언法言>에서는 원시 유가의 인위적인 도덕 교화의 필요를 말하면서
선악 양성의 인성론을 주장하였고 그에 상응하는 합리주의적인 윤리사상을 강조하였다.
내용도 공맹사상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또 이 책은 왕망의 위선적 성격을 비판하는 곳이 보인다.
양자법언揚子法言 일부를 소개하면
인지성야선악혼人之性也善惡混 사람의 본성은 선과 악이 섞여 있으니
수기선즉위선인修其善則爲善人 그 선함을 닦으면 선인이 되고
수기악즉위악인修其惡則爲惡人 그 악함을 닦으면 악인이 된다.
사람에게는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음을 보여주는 말이다.
다만 그 기질이 혼탁의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주변의 상황과 자신의 노력에 따라
선과 악을 행하는 기로에서 자유의지를 통제하는 능력에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평소의 수행을 선에 방점을 두라고 암시하고 있다.
<양웅揚雄/사마상여司馬相如>
촉강도청류蜀江導淸流 촉강蜀江은 맑은 물을 이끌며 흐르고 있는데
양자읍여휴揚子挹餘休 揚子雲은 그 흐름의 좋은 점 취한 것 같이 선현의 미점을 받아드렸네
함광절후언含光絶後彦 안으로 빛을 품은 그의 인격은 후세의 선비들을 뛰어 넘어 빛나고
담사막전수覃思邈前修 깊은 사색을 담은 그 앞에는 감히 필적하는 선현도 좀처럼 보이지 않는데
세경구불상世輕久不賞 그를 세인들은 가벼이 여겨 오래도록 찬양하지도 않고 버려두었고
현담물무구玄談物無求 그가 설한 太玄의 철리를 사람들은 무용지물이라고 구하지 않았다네.
당도사권총當塗謝權寵 정치의 요로要路에 서서도 권력과 총애를 사퇴하고
치주득한유置酒得閑遊 술을 앞에 두고 연회를 열며 느긋하게 놀이를 했다네.
<해조문解嘲文> 세상의 조롱을 스스로 해명하는 글
한漢 나라 양웅揚雄이 태현경太玄經을 지을 때 권세에 아부하여 출세한 자들이
그의 담박한 생활 태도를 비웃자 이를 해명하는 글을 지어 “해조解嘲”라고 명명하였다.
►로여정신제여고勞汝精神祭汝藁 네 정신을 위로하고 네 원고에 제 지내려면
‘짚 고藁’ 짚. 마른나무. 원고原稿, 초고(≒稿)
►진적陳迹 지난날의 자취.
►명목瞑目 눈을 감는 것. 눈이 어두운 것. 편안便安한 죽음을 비유
►망물芒芴 물망芴芒. 천지가 아직 生成되지 않았을 때를 말한다.
고량무위상합故兩无爲相合 그러므로 이 하늘과 땅 두 무위가 서로 합쳐질 때
만물개화생萬物皆化生 만물은 모두 변화되는 것이다.
망호물호芒乎芴乎 황홀하구나,
이무종출호而无從出乎 그것들이 어디서 생겨나는지 알 수가 없으니
물호망호芴乎芒乎 황홀하구나,
이무유상호而无有象乎 그 모습이 있는 듯하면서 없으니
만물직직萬物職職 만물이란 무수히 많은 것으로
개종무위식皆從无爲殖 모두 무위에 의해 번식한다.
고왈故曰 그러므로
천지무위야天地无爲也 이무불위야而无不爲也
"천지는 무위이면서 하지 않는 게 없다"고 한다.
인야숙능득무위재人也孰能得无爲哉
그러나 사람으로서 누가 능히 무위를 터득할 수 있을까.
/<莊子 외편外編 지락편至樂篇>
►좌중시측삼사배座中侍側三四輩 좌중에 모시고 있는 서너 벗들
‘시측삼사배侍側三四輩’ 문방사우文房四友로 지필연묵紙筆硯墨(종이ㆍ붓ㆍ벼루ㆍ먹)
문인의 삶에 늘 가까이 있는 만큼 사람처럼 묘사한 문학 작품들이 다수 전하는데
가장 원조격의 작품이 바로 당나라 대문호 한유韓愈가 붓에 대해 쓴 <모영전毛穎傳>이다.
“모영毛穎이 강주絳州사람 진현陳玄과 홍농弘農사람 도홍陶泓과
회계會稽사람 저楮선생과 친하게 벗으로 지내며
서로 밀어주고 이끌어주면서 그 나아가고 머물기를 반드시 함께 하였다.”
붓이 ‘모영毛穎’인 것은 동물의 털로 만들었기 때문에 ‘털 모毛‘가 들어간 것이고
‘강주絳州’는 먹의 명산지이며
’진현陳玄’은 오래 묵을수록(陳) 더욱 현묘해지는(玄) 먹의 검정색을 표현하는 이름이다.
‘홍농弘農‘은 하남성에 있는 벼루의 명산지 ‘홍농泓農’을 말한다.
‘도홍陶泓‘은 도자기로 만든 벼루인데 벼루 가운데
물이 모이는 곳이 있어 ‘웅덩이(泓)’라고 표현하였다.
‘회계會稽’는 닥나무로 유명한 지역이며 ‘닥나무(楮) 선생’은 종이의 재료 닥나무에서 가져왔다.
►개유기예상등양皆有技藝相騰驤 기술과 재주 모두 있어 서로 날고뛰는데
‘등양腾骧’ (말이) 치닫다. 치달리다. ‘오를 등騰’ ‘머리 들 양驤’
►홍농세면로복와弘農洗面露腹卧 홍농弘農 벼루는 낯을 씻고 배 내놓고 누웠으며
홍농弘農 홍농泓農 河南省에 있는 고을로 와연瓦硯이란 벼루의 명산지이다.
►객경요수마기흉客卿搖首磨其胸 객경客卿 먹은 머리 저으며 그 가슴을 어루만지고
►저랑고의여설상楮郞高義如雪霜 저랑楮郞 종이의 높은 의리 눈서리 같아
►절선중구참량공折旋中矩參兩公 꺾고 도는 게 법규에 맞아 두 公에 참례하네.
홍농弘農은 벼루, 객경客卿은 먹, 저랑楮郞은 종이를 말한다.
중서군中書君 붓의 이명異名.
►안득도경령상운安得陶景嶺上雲 어떻게 도홍경陶弘景 고개 위 구름을 얻어
도홍경陶弘景(456-536)을 말 함이 아니다.
►탄위옥전지금화송철攤爲玉牋之金華宋鐵 펼쳐 놓아 옥전玉牋의 금화金華·송철宋鐵되게 하며
‘펼 탄, 누를 난攤’ 펴다. 펼치다
‘종이 전牋’ 종이. 편지便紙. 상소
‘금화金華’ 금화지연金華之筵. 漢나라의 未央宮의 金華殿으로
성제成帝 때 정관중鄭寬中과 장우張禹가 이곳에서 <상서尙書>와 <논어論語>를
조석으로 진강進講한 고사에 의거하여 學士院의 별칭으로 쓰이게 되었다.
/<漢書 卷100 敍傳上>
‘송철宋鐵’ ???
►천장마애위단계지금형千丈磨崖爲端溪之金烱
천길 마애磨崖로 단계端溪의 금형金烱 되게 하겠는가?
‘마애磨崖’ 석벽石壁에 글자나 그림, 불상佛像 따위를 새김.
‘단계端溪’ 광동성 廣州시의 서쪽에 있는 시내로 최상의 연석硯石인 ‘단석端石’ 벼루가 유명하다.
광둥성廣東省 端溪에서 나는 벼룻돌은 휘록응회암輝綠凝灰巖의 하나로
돌의 질質이 단단하며 치밀緻密하고 무겁다.
검은색ㆍ草綠色ㆍ紫朱色ㆍ푸른색 따위의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가운데 자주색紫朱色과 검자주색紫朱色의 것을 가장 좋은 것으로 친다.
‘금형金烱’ ???
►섬서복리장동정蟾蜍腹裏藏洞庭 두꺼비 뱃속에 동정호를 간직하고
►독진중산천수영禿盡中山千首頴 중산中山의 천수千首 빼어남을 모 질러 다하게 할까?
►자조래지송赭徂徠之松 조래산徂徠山의 소나무를 빨갛게 베어
‘조래산祖徠山’ 산동성山東省 태안현泰安縣에 있는 산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에
“山東濟南府泰安州 租徠山 在州東南四十里 詩租徠之松 謂此也”라고 하였다.
►제인향지병製印香之餅 인印을 친 향기로운 떡을 만들어
‘제인製印’ 전각篆刻. 도장을 찍다.
►조이장강지삭操以長杠之槊 긴 장대 창처럼 꼬나 잡고서
‘잡을 조操’ 잡다, (손에)쥐다. 부리다, 다루다, 조종操縱하다. 장掌握악하다
‘장강長杠’ 길고 굵을 멜대.
‘창 삭, 욧속 소槊’ 창槍. 쌍륙雙六(놀이의 하나). 무기武器로 쓰던 긴 三枝槍.
►체여경전지영掣如驚電之影 번개에 놀란 그림자처럼 휘둘러 대어
‘끌 체, 끌 철掣’ (질질)끌다. 끌어당기다
►기휘야풍소운취其揮也風掃雲聚 휘두르는 게 바람 쓸고 구름 모이듯 하며
►기예야두전하회其曳也斗轉河廻 끄는 건 북두北斗도 돌고 은하수도 돌게 하여
‘두전斗轉’ 성이두전星移斗轉 별자리가 이동하고 북두칠성이 자리를 옮기다
'날이 가서 계절이 바뀌다'는 의미로 쓰이는 것은
별이 시간의 변화를 나타내는 사물로 널리 쓰였다.
‘하회河廻’ 은하수 주위를 돌다.
►갱금알옥상명鏗金戛玉相鳴 쇳소리 쨍, 옥이 댕그랑 하듯 서로를 울리고
‘갱금알옥鏗金戛玉’
금석이나 옥돌이 서로 부딪혀 쨍그렁 소리가 난다는 뜻으로 문장의 표현이 비범하다
►노예갈기훤력怒猊渴驥喧曆 성난 사자, 목마른 준마 떠들듯이 하겠는가?
노예갈기怒猊渴驥 문장이 틀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힘이 있음을 이르는 말.
‘사자 예猊’ 사자獅子. 부처가 앉는 자리
‘갈기渴驥’ (渴驥奔泉 목마른 준마가 샘으로 내닫는다)의 준말.
唐나라 名筆 서호徐浩가 42폭의 屛風을 썼는데 여기에는 八體가 다 갖추어진데다
草書와 隸書가 더욱 뛰어났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 書法을 형용하여 말하길
노예결석怒猊抉石 ‘성난 사자가 돌을 후벼낸 듯
갈기분천渴骥奔泉 목마른 준마가 샘으로 내닫는 듯 하다.’라고 한데서 온 말이다.
서호徐浩(703-782) 당대唐代 장성長城 사람.
자字는 계해季海. 서법書法에 능했으며 비각碑刻에 불공화상비不空和尙碑 등이 있다.
‘지껄일 훤喧’ 지껄이다. 떠들썩하다. 시끄럽다
‘책력 력(역)曆’ 책력冊曆, 달력. 역법曆法 수數, 셈
►장양헌부일사회長楊獻賦日斜回 장양궁長楊宮에 부賦 올리고 해 기울어 돌아오니
‘장양궁長楊宮’ 한漢나라의 이궁離宮.
<문선文選> 양웅揚雄 <장양부서長楊賦序>에
(‧‧‧)
농민불득수렴農民不得收斂 이때 농민들은 이 일로 인해 수확을 할 수 없었습니다.
웅종지사웅관雄從至射熊館 저는 황제를 수행하여 射熊館에 갔었습니다.
환상장양부還上長楊賦 돌아와선 <長楊賦>를 올렸습니다.
료인필묵지성문장聊因筆墨之成文章 문장은 붓과 먹이 있어야 쓸 수 있습니다.
고자한림이위주인故藉翰林以爲主人 때문에 한림翰林이란 이름을 主人으로
자묵위객경이풍子墨爲客卿以風 자묵子墨이란 이름을 빈객으로 꾸며 풍간諷諫하고자 합니다.
►란가쟁하진기재攔街爭賀真奇才 거리 막으며 참말 기재奇才라 다투어 하례하네.
란가쟁하攔街爭賀 거리를 막고 축하하려고 다투다.
란가쟁창백동제攔街爭唱白銅鞮 거리를 가로질러 다투어 백동제(梁나라 歌謠)를 노래하네.
/이백李白 <양양가襄陽歌>
●모영전毛穎傳 붓에 관한 글/한유韓愈
<解題>
홍경선왈洪慶善曰 홍경선이 말했다,
차전류자후이위괴此傳柳子厚以爲怪 “이 傳을 柳子厚(柳宗元)는 괴이하다고 하였는데
여이위자허오유지비予以爲子虛烏有之比 나는 子虛와 烏有의 部類라고 생각되니
기원출어장주우언其源出於莊周寓言 그 근원은 장주의 寓言에서 나온 것이다.
►자허子虛와 오유烏有 전한前漢 司馬相如가 지은 子虛賦에 등장하는 人物, 이 外도 亡是公.
子虛는 ‘빈 말’ 烏有는 ‘어찌 이러한 일이 있겠는가?’
망시공亡是公은 ‘이러한 사람은 없다.’ 의 의미로서 모두 가공인물이다.
우재왈迂齋曰 우재가 말하였다.
필사수습진선筆事收拾盡善 ”일을 기록하고 수습하는 것이 매우 좋으며
장무작유將無作有 무無로써 有를 만들었으니
소위이문골계자所謂以文滑稽者 이른바 문장으로 골계滑稽한 것이다.
찬우고고贊尤高古 찬은 더욱 고상하고 예스러우니
시학사기문자是學史記文字 이것은 史記의 문장을 배운 것이다.”
►골계滑稽 해학. 말이 매끄럽고 익살스러워 웃음을 자아는 말
<모영전毛穎傳 본문本文>
모영의 가계
모영자중산인야毛穎者中山人也 모영은 중산 사람이었다.
기선명시其先明眎 그의 조상은 명시라는 토끼였는데
좌우치동방토佐禹治東方土 우禹임금을 도아 동쪽 땅을 다스리고
양만물유공養萬物有功 만물을 양육하는데 공을 세워
인봉어묘지因封於卯地 묘卯땅을 봉해 받았고
사위십이신死爲十二神 죽어서는 12신의 하나가 되었다.
►모영毛穎 붓
►중산中山 안휘성安徽省 선성현宣城縣에 있는 산. 좋은 토끼털이 많이 나서 붓 산지로 유명.
►명시明眎 토끼. 눈이 밝다는 데서 유래.
►12神 12지 중 卯는 동방 땅을 의미하고 卯地에 봉해져서 12지신이 되었다 표현.
상왈嘗曰 일찍이 말하였다.
오자손신명지후吾子孫神明之後 “내 자손들은 신명의 후예이어서
불가여물동不可與物同 다른 동물과 같아서는 안 될 것이니
당토이생當吐而生 마땅히 자식을 입으로 토하여 낳을 것이다.”
이이과연已而果然 그 뒤로 과연 그렇게 되었다.
명시팔세손누明眎八世孫㝹 명시의 8세손은 이름이 ‘누’이다(토끼 새끼 누䨲)
세전당은시世傳當殷時 거중산居中山 세상에 전해지는 말로는 은나라 때에 중산에 살다가
득신선지술得神仙之術 신선술을 터득하여
능익광사물能匿光使物 빛을 숨기고 물건을 부릴 줄 알게 되어
절항아기섬서竊姮娥騎蟾蜍 입월入月 항아를 훔쳐가지고 두꺼비를 타고 달 속으로 들어가서
기후대其後代 그의 후손들은
수은불사운遂隱不仕云 끝내 거기에 숨어 살며 벼슬하지 않게 되었다 한다.
거동곽자왈준居東郭者曰㕙 동곽에 사는 자로 ‘준㕙’이란 그의 후손이 있었다.
교이선주狡而善走 날래고 뜀박질을 잘하여
여한로쟁능與韓盧爭能 한로라는 개와 능력을 겨루었는데
노불급盧不及 한로가 준을 따르지 못하였다.
노노盧怒 여송작與宋鵲 한로는 화가 나서 송작이란 개와
모이살지謀而殺之 모의하여 ‘준㕙’을 죽이고
해기가醢其家 그 집안사람도 모두 죽여 소금에 절여 젓을 담았다.
►항아姮娥 서왕모의 불사약을 훔쳐 달로 달아났다는 전설 속 선녀.
►섬서蟾蜍 금두꺼비. 달 속에 살고 있다는 전설의 동물
►준㕙 교활한 토끼
►한로韓盧 한나라에서 생산되던 유명한 사냥개 이름
►송작宋鵲 명견 이름
모영이 세상에 나오게 된 배경
진시황시秦始皇時 몽장군념蒙將軍恬 진시황 때에 몽념 장군이
남벌초南伐楚 차중산次中山 남쪽 초나라를 정벌하다가 중산에 머물게 되었는데
장대렵이구초將大獵以懼楚 크게 사냥을 함으로써 초나라가 두려워하도록 만들려 하였다.
소좌우서장여군위召左右庶長與軍尉 먼저 좌우의 부대장들과 장교들을 불러놓고
이연산以連山 서지筮之 연산이란 점책으로 점을 쳤는데
득천여인문지조得天與人文之兆 하늘과 인문을 뜻하는 점괘가 나왔다.
서자하왈筮者賀曰 점장이가 축하를 하였다.
금일지획今日之獲 “오늘 잡으실 짐승은
불각불아不角不牙 뿔도 없고 이빨도 없는
의갈지도衣褐之徒 털 베옷을 입은 족속입니다.
결구이장수缺口而長鬚 입은 언챙이고 긴 수염이 났으며
팔규이부거八竅而趺居 몸에는 여덟 구멍이 있고 가부좌를 하고 앉은 게 보통입니다.
독취기모獨取其髦 다만 그의 털을 취하면
간독시자簡牘是資 편지를 쓸 수 있으니
천하기동서天下其同書 천하가 그 문자를 통일할 것이니
진기수겸제후호秦其遂兼諸侯乎 진나라는 마침내 제후들을 합병하게 될 것입니다.”
수렵遂獵 마침내 사냥을 하였는데
위모씨지족圍毛氏之族 발기호拔其豪 모毛씨 집안을 포위한 다음 그 중의 호걸을 뽑아
재영이귀載穎而歸 모영을 수레에 싣고 돌아와
헌부우장대궁獻俘于章臺宮 장대궁에서 임금에게 포로로서 바쳐졌고
취기족이가속박언聚其族而加束縛焉 그의 족속들도 모아서 그와 함께 속박하였다.
진황제사념秦皇帝使恬 진나라 황제는 몽념으로 하여금
사지탕목賜之湯沐 그에게 탕목읍을 하사 한 다음
이봉제관성而封諸管城 관성에 그를 봉하고는
호왈號曰 관성자管城子 호를 관성자라 부르게 하였는데
일견친총임사日見親寵任事 날로 황제의 총애가 두터워져 큰일들을 맡아 처리하게 되었다.
►몽염蒙恬(?-BC209) 진나라 장군.
초나라를 정벌했으며 흉노를 토벌하고 만리장성을 쌓았다.
►연산連山 련산역連山易. 주례에 언급된 三易 중 하나.
하나라 때 사용되었다고 하며 방법은 전해지지 않는다.
►결구缺口 언청이
►간독簡牘 편지
►탕목湯沐 탕목읍湯沐邑.
다른 세금을 부담하지 않고 임금의 목욕 비용만을 바치는 고을.
모영의 능력과 그 능력을 사랑한 진시황제
영위인강기이변민穎爲人强記而便敏 모영의 사람됨은 기억력이 좋고 민첩하여
자결승지대自結繩之代 태고의 결승 시대로부터
이급진사以及秦事 진나라에 이르기까지의 일들을
무불찬록無不纂錄 기록하지 않음이 없었고
음양陰陽ㆍ복서卜筮ㆍ점상占相ㆍ의방醫方ㆍ음양학과 복서술과 점술과 관상술과 의약처방과
족씨族氏ㆍ산경山經ㆍ지지地志ㆍ자서字書ㆍ도화圖畵ㆍ씨족과 산림과 지리와 字書와 회화와
구류九流ㆍ백가천인지서百家天人之書 九流와 제자백가와 천인에 관한 글들로부터
급지부도及至浮圖ㆍ노자老子ㆍ외국지설外國之說 개소상실皆所詳悉
붓다와 노자와 외국의 학설 등에 이르기까지도 모두 자세히 기록하였다.
우통어당대지무又通於當代之務 또 그 시대의 업무에도 통달하여
관부부서官府簿書ㆍ시정화전주기市井貨錢注記
공문과 장부와 사회의 문서와 돈 거래 기록과 여러 가지 기록들을
유상소사惟上所使 오직 황제가 시키는 대로 적으니
자진황제급태자부소自秦皇帝及太子扶蘇ㆍ호해胡亥 진시황제와 태자인 부소와 호해와
승상사丞相斯ㆍ중차부령고中車府令高 승상 이사와 중거부령 조고로부터
하급국인下及國人 아래로는 나라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무불애중無不愛重 그를 사랑하고 중히 여기지 않는 이가 없게 되었다.
우선수인의又善隨人意 또 사람들의 뜻을 잘 따라서
정직사곡공졸正直邪曲功拙 정직하고 삐뚤어지고 교묘하고 졸렬한 것을
일수기인一隨其人 모두 그를 부리는 사람대로 따랐다.
수견폐기雖見廢棄 비록 버려진다 하더라도
종묵불설終黙不洩 끝내 입을 다물고 아는 일을 누설치 않았고
유불희무사惟不喜武士 오직 무인들은 좋아하지 않았으나
연견청然見請 역시왕亦時往 요청이 있으면 역시 때로는 갔다.
누배중서령累拜中書令 벼슬은 중서령에 올라
여상익압與上益狎 황제와 더욱 허물없이 지내게 되었고
상상호위중서군上嘗呼爲中書君 황제가 일찍이 그를 중서군이라 불렀다.
상친결사上親決事 황제가 친히 어떤 일을 결정할 때에는
이형석자정以衡石自程 무게와 양까지도 스스로 헤아려 결정했으므로
수궁인雖宮人 비록 궁인이라 하더라도
부득립좌우不得立左右 황제의 좌우에 서있을 수가 없었으나
독영여집촉자상시獨穎與執燭者常侍 오직 모형과 촛불을 든 사람만은 언제나 시종하여
상휴방파上休方罷 황제가 쉴 적에야 그들도 비로소 쉴 수가 있었다.
영여강인진현穎與絳人陳玄 모영(붓)은 강주 사람 진현(먹)과
홍농도홍弘農陶泓 홍농 사람 도홍(벼루)과
급회계저선생及會稽楮先生 회계 사람 저선생과 친하게 벗하며
우선友善 상추치相推致 서로 밀어주고 이끌어주고 하며
기출처필해其出處必偕 나가고 머물기를 반드시 함께 하였다.
상소영上召穎 황제가 모영을 부르면
삼인자부대조三人者不待詔 첩구왕輒俱往
이들 세 명은 조명을 기다리지 않고 언제나 함께 갔으나
상미상괴언上未嘗怪焉 황제도 이상하게 여긴 적이 없었다.
►결승結繩 새끼줄을 묶어 뜻을 표현하던 문자의 원시적인 형태.
<계사전繫辭傳>에 언급된다.
►음양陰陽 음양학
►복서卜筮 거북껍질과 뼈 등으로 치던 점
►점상占相 점과 관상.
►의방醫方 의술
►족씨族氏 성씨
►지지地志 지리학
►구류九流 한漢 때의 아홉 학파.
儒家, 道家, 陰陽家, 法家, 名家, 墨家, 縱橫家, 雜歌, 農歌.
►백가百家 여러 학파. 제자백가.
►부도浮圖 부처.
►형석衡石 저울 石은 120근인데 문서를 저울로 달아서 일정량을 처리한 것이다.
당시에는 종이가 없었고 죽간과 목간을 사용하였으므로 무게로 계산한 것이다.
►진현陳玄 먹. 강絳 땅이 유명한 산지였다.
►도홍陶泓 진흙으로 만든 것, 벼루. 홍농弘農 땅이 유명한 산지였다.
►저楮 닥나무, 종이. 회계會稽 땅이 유명한 산지였다.
►출처出處 세상에 나아가 벼슬하거나 은거하여 숨어 삶.
관직생활의 마지막과 모영의 최후
후인진견後因進見 뒤에 그가 황제를 뵈었을 때
상장유임사上將有任使 황제께서 맡길 일이 있어서
불식지拂拭之 그를 뽑아 쓰려 먼지를 털고 닦아내니
인면관사因免冠謝 관을 벗고 사양을 하였다.
►진견進見 임금에게 나아가 알현하다.
상견기발독上見其髮禿 황제가 보니 그이 머리가 다 벗겨졌고
우소모화又所摹畵 또 그가 그리는 것이
불능칭상의不能稱上意 황제의 뜻에 들어맞지 않았었다.
상희소왈上嘻笑曰 황제가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중서군中書君 노이독老而禿 불임오용不任吾用
“중서군이 늙어서 머리가 벗겨지니 나의 쓰임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오상위군중서吾嘗謂君中書 나는 일찍이 그대를 중서(글쓰기에 합당하다)라고 말했었는데
군금불중서사君今不中書邪 군은 이제는 글쓰기에 합당치 못한가?”
대왈對曰 모영이 대답하기를
신소위진심자臣所謂盡心者 “신은 이른바 마음을 다하는 자입니다.”
인불복소因不復召 귀봉읍歸封邑 종우관성終于管城
그래서 다시는 불리워지지 않았고 봉읍으로 돌아가 관성에서 일생을 마쳤다.
기자손심다其子孫甚多 산처중국이적散處中國夷狄
그의 자손이 매우 많아져 중국과 오랑캐 땅에 흩어져 살게 되었는데
개모관성皆冒管城 모두 관성 사람이라 내세웠으나
유거중산자惟居中山者 오직 중산에 사는 사람들만이
능계부조업能繼父祖業 조상들의 가업을 잘 계승하였다.
모씨 가족의 내력과 진시황의 인색함
태사공왈太史公曰 태사공이 말하였다.
모씨유량족毛氏有兩族 “모씨에는 두 족속이 있다.
기일희성其一姬姓 문왕지자文王之子 그 중 하나는 희성인데 문왕의 아들로서
봉어모封於毛 모毛나라에 봉해진 사람들로
소위노위모담자야所謂魯衛毛聃者也 이른바 魯나라 衛나라 毛나라와 담聃나라의 후손들이며
전국시戰國時 유모공有毛公ㆍ모수毛遂 전국시대에는 毛公과 毛遂가 있었다.
►노위모담魯衛毛聃 주나라 때 제후국. 문왕의 아들들을 봉한 곳이다.
독중산지족獨中山之族 다만 중산에 사는 족속들은
부지기본소출不知其本所出 그 근본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알 수 없으되
자손최위번창子孫最爲蕃昌 자손들이 가장 번창하여 있다.
춘추지성春秋之成 <춘추>를 이룸에 있어서
견절어공자見絶於孔子 공자에 의하여 절필 당하기도 하였으나
이비기죄而非其罪 그들의 죄는 아니었다.
►견절어공자見絶於孔子 공자가 춘추를 지을 때 애공14년 숙손씨가
기린을 잡은 데까지만 기록하고 이후는 기록하지 않은 일을 말한다.
급몽장군及蒙將軍 발중산지호拔中山之豪 몽념 장군이 중산의 빼어난 털을 뽑아
시황봉제관성始皇封諸管城 진시황이 그들을 관성에 봉함으로써
세수유명世遂有名 세상에는 마침내 그 이름이 알려졌으니
이희성지모而姬姓之毛 무문無聞 도리어 희성의 모씨는 보기 힘들게 되었다.
영시이부견穎始以俘見 모영은 처음에 포로로 잡히어 황제를 뵈었지만
졸견임사卒見任使 마침내는 벼슬에 임용되어
진지멸제후秦之滅諸侯 진나라가 다른 제후들을 멸망시키는 데에
영여유공穎與有功 모영도 공을 세웠다.
상불수로賞不酬勞 그러나 그 공로에 대한 상은 주어지지 않고
이노견소以老見疏 늙었다 하여 버림받았었으니
진진소은재秦眞少恩哉 진나라는 다만 적은 은총을 베푸는데 그쳤음을 알겠다.”
●문방사우
문인들의 네 가지 벗 곧 문인들의 방에서 만들어지는 글과 글씨,
그림을 위한 가장 중요한 도구인 종이(紙)·붓(筆)·먹(墨)·벼루(硯)를 지칭.
‘벗’ 이외에 ‘사보四譜’ 또는 ‘사후四侯’라고도 불렀다.
‘사보四譜’는 송대 문인 소이간蘇易簡이 문방사우에 대한 작품을 모아 엮은 책인
<문방사보文房四譜>에서 유래하였다.
‘사후’는 <문방사보>에 실린 <문숭사후전文嵩四侯傳>에서
이것들을 ‘제후’라 의인화하여 높여 부른 말로
종이 호치후(好.候), 붓 관성후管城候, 먹 송자후松滋候, 벼루 즉묵후卽墨候가 그것이다.
이런 식으로 문방사우를 사람처럼 묘사한 작품들은 당나라 문인 한유韓愈의
<모영전毛穎傳>/<한창려집韓昌黎集> 권36, <잡문>이 대표적이다.
모영은 강주絳州의 진현(陳玄, 홍농弘農의 도홍陶泓, 회계會稽의 저楮선생과 벗으로
친하게 지내며 서로 밀어주고 이끌어주고 그 나아가고 머물기를 반드시 함께 하였다.
여기서 ‘모영’은 붓의 재료인 ‘털(毛)’에서 가져온 이름이다.
붓의 친구인 먹과 벼루, 종이를 묘사한 것들도 각기 그 재료와 명산지, 성질 등을 표현하였다.
‘강인絳人’은 먹의 명산지인 산서성 지역의 강주降州 사람임을 말한다.
‘진현陳玄’은 오래 묵힐수록(陳) 그 빛깔이 더욱 현묘해진다는(玄) 뜻으로 먹의 다른 이름이다.
‘홍농’은 하남성에 있는 벼루 산지로 유명한 지역이다.
‘도홍’은 ‘도자기로 만든 벼루’라는 뜻인데
벼루 가운데 물이 모이는 곳이 있어 ‘웅덩이(泓)’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회계’는 닥나무의 산지로 유명하며 ‘닥나무(楮) 선생’은 그 껍질로 만드는 종이를 말한다.
한유가 <모영전>에서 붓·벼루·먹·종이에 인격을 부여한 이래
후대에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문방사우를 주제로 지은 글들이 연이어 나타났다.
19세기 명필로 유명했던 조선 문인 박윤묵은 <문방사우명>을 지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문방의 네 가지 벗은 내가 아침저녁 함께한 것들로
오랫동안 서로 더불어 있었기에 자세히 알고 있다.
종이에서 그 깨끗함(潔)을 취하고 벼루에서 그 장수(壽)를 취하고,
붓에서 그 바름(正)을 취하고 먹에서 그 색色을 취하여,
그것을 자기에게 비춰보면 또한 깨닫고 힘쓰게 할 만한 점이 있기에
<사우명四友銘>을 지어 곁에 둔다.”/<존재집存齋集> 권24
이상의 문방사우에 대한 옛 글은 이것들을 가지고 시서화를 즐기는
고상하고 전아한 문인들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으로 여기에는
선비 정신이라고 할 깨끗하고, 바르고, 장수하고, 아름다운 성질이 잘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그 재료와 제조 방법,
그것을 만드는 이들의 삶에 대한 관심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문방사우文房四友
왈여질지전몽曰余質之顓蒙 나의 자질이 매우 어리석어서
막여세이과주藐與世而寡儔 보잘것없는 몸 세상에 짝이 드물어라.
처루항이자정處陋巷而自靖 누추한 거리에 살며 조용히 지내면서
기이기부전수期以企夫前修 옛 성현을 따르리라 기약할 뿐이로다.
개무인기지기慨無人其知己 안타깝게도 나를 알아주는 이 없으니
빙문장이잠심憑文章而潛心 그저 문장 짓는 일에다 마음 쏟을 수밖에
조고상호예원朝翶翔乎藝苑 아침에는 예원에서 한가로이 노닐고
석서식호사림夕棲息乎詞林 저녁이면 사림에서 머물러 쉬노라
탁말계어사우托末契於四友 이에 네 명의 벗과 교분을 맺어서
면일월이익심綿日月而益深 세월이 갈수록 우정이 깊어졌도다.
수품질지유이雖品質之有異 비록 서로 타고난 자질은 다르지만
강의기지상부羌意氣之相孚 아, 의기는 서로 매우 잘 맞았어라
혹재좌이재우或在左而在右 이 벗들이 좌우에서 늘 함께 지내니
기가리어수유豈可離於須臾 어찌 잠깐인들 곁을 떠날 수 있으랴
약부관성모영若夫管城毛穎 저 관성과 모영은
호왈중서號曰中書 호를 중서라 부르는데
총명강기聰明強記 총명하고 기억력이 좋아서
일과오차一過五車 단번에 오거서五車書를 읽고 외우지
원불택기소교爰不擇其所交 이에 사귀는 벗을 가리지 않고
역교졸지수인亦巧拙之隨人 교졸은 남이 하는 대로 따르도다.
영혜영혜穎兮穎兮 모영이여, 모영이여
오우이지능순야吾友爾之能循也 나는 그대의 남을 잘 따르는 점을 벗하노라
강인진현絳人陳玄 강 땅 사람인 진현은
시송자후是松滋侯 바로 송자후인데
마정방종磨頂放踵 머리부터 갈아서 발뒤꿈치까지 이르니
겸애지류兼愛之流 바로 겸애의 무리이라
불설설어교교不屑屑於皦皦 결백한 것만 너무 좋아하지 않고
혼재탁이무건混滓濁而無諐 혼탁한 무리에 섞여서도 허물없어라
현혜현혜玄兮玄兮진현이여 진현이여
오우이지능현야吾友爾之能玄也 나는 그대의 능히 검어질 수 있는 점을 벗하노라
회계지저會稽之楮 회계 사람 저씨楮氏는
세칭선생世稱先生 세상에서 선생이라 일컫는데
량옥기질良玉其質 그 바탕이 좋은 옥처럼 깨끗하고
추수기정秋水其精 그 정신이 가을 물처럼 맑아서
량수시이서권諒隨時而舒卷 참으로 때를 따라 펴고 말지만
역불개기소절亦不改其素節 평소의 절개는 또한 바꾸지 않아라
저혜저혜楮兮楮兮 저선생이여, 저선생이여
오우이지능백야오우이지능백야 나는 그대의 능히 희어질 수 있는 점을 벗하노라
성도명홍姓陶名泓 성은 도이고 이름은 홍이니
계출홍농系出弘農 선조는 홍농 사람이라
둔이위체鈍以爲體 둔함으로써 몸을 삼아
부자마롱不自磨礱 스스로 갈리어 닳지 않나니
기후중이불설旣厚重而不洩 이미 후중하여 발설하지 않으며
우이정이영년又以靜而永年 또 고요함으로써 오래오래 살도다 .
홍혜홍혜泓兮泓兮 도홍이여, 도홍이여
오우이지능견야吾友爾之能堅也 나는 그대의 능히 굳셀 수 있는 점을 벗하노라
약여자若余者 나로 말하자면
측호사우지간側乎四友之間 이 네 벗 사이에 끼어서
이무사우지능而無四友之能 이 네 벗과 같은 능력이 없으니
우약무이상계又若無以相戒 경계의 말이라도 해 줄 수 없다면
기하이위내구지붕호其何以爲耐久之朋乎 어떻게 오래도록 벗이 될 수 있으리요.
촉절역●促節易● 급히 달리면 거꾸러지기 쉽고
질행필궐疾行必蹶 빨리 걸으면 반드시 넘어지는 법
차재영호嗟哉穎乎 아 모영이여
계이예야戒爾銳也 그대의 날카로움을 경계하거라
인귀돈후人貴敦厚 사람은 돈후함을 귀히 여기고
속의순박俗宜淳朴 세상에서는 순박함을 좋아하느니
차재저호嗟哉楮乎 아, 저선생이여
계이박야戒爾薄也 그대의 얇음을 경계하거라
오이능전汚以能全 더러움에 섞임으로써 자신 보전하고
박고무패朴故無敗 질박하기 때문에 잘못되는 일없나니
유현여홍惟玄與泓 저 진현과 도홍은
오하위계吾何爲戒 내가 무엇으로써 경계할꼬.
기시예야박야其視銳也薄也 날카롭고 얇은 것에 비하면
성약사호자득 誠若似乎自得 참으로 훌륭한 점이 있는 듯하지만
졸동귀어일화卒同歸於一化 마침내는 모두가 하나로 융화되니
오미지기화복吾未知其禍福 나는 화인지 복인지 알지 못하겠구나
계지왈系之曰 이어서 이르노라
삼인동행三人同行 세 사람이 함께 가면
필유아사必有我師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는 법
황어사우況於四友 하물며 이 네 벗에게서야
감불상규敢不相規 서로 잘못을 바로잡지 않으리요
하자개지何者改之 그 무엇을 고칠 것인가
하자종지何者從之 그 무엇을 따를 것인가
지재아심只在我心 이는 나의 마음에 달렸으니
부부해의夫復奚疑 다시 무슨 의심을 두리요
용행사장用行捨藏 용행사장의 도리를
여아동지與我同之 나와 더불어 함께하도다
►문방사우文房四友
관성管城은 붓 대롱을 비유한 것이고, 모영毛穎은 붓의 털을, 진현陳玄은 먹을,
저선생楮先生은 종이를 의인화한 것으로 한유韓愈의 <모영전毛穎傳>에 보인다.
/<古文眞寶 後集>
►중서中書
글씨 쓰기에 적합하다는 뜻으로 붓의 기능을 중서성中書省의 벼슬에 비긴 것이다.
모영전에
“중서군中書君은 늙고 대머리가 되어 내가 맡기는 일을 해내지 못하겠구나.
내가 예전에는 그대를 중서라 했더니 그대가 이제는 중서가 아닌가.”
하여 오래 사용한 몽당붓이 글씨 쓰기에 적합하지 않음을 말하였다.
►원불택기소교爰不擇其所交 이에 사귀는 벗을 가리지 않고
►역교졸지수인亦巧拙之隨人 교졸은 남이 하는 대로 따르도다.
붓이 사람을 가리지 않고 사람의 솜씨가 좋으냐 나쁘냐에 따라
글씨의 좋고 나쁨이 결정된다는 뜻이다.
<모영전>에
“남의 뜻을 잘 따라 정직正直, 사곡邪曲, 교졸巧拙을 한결 같이 남이 하는 대로 따른다.” 했다.
►강絳 땅 사람
강 땅은 먹의 명산지인 산서성山西省 강주絳州이다.
강 땅 사람이란 이곳에서 나는 먹을 의인화한 것이다.
►송자후松滋侯
먹을 의인화한 것으로 소나무를 태운 그을음으로 먹을 만들기 때문에 이런 명칭을 붙인 것이다.
►마정방종磨頂放踵 머리부터 갈아서 발뒤꿈치까지 이르니
►겸애지류兼愛之流 바로 겸애의 무리이라
춘추 시대 노魯나라 사람인 묵적墨翟은 모든 사람을 평등히 사랑해야 한다는
겸애설兼愛說을 주장하였으므로 맹자는 이를 극도로 비꼬아서
“자기의 정수리부터 갈아서 발끝에 이르더라도 천하를 이롭게 하는 일이라면 한다.” 하였다.
/<孟子 盡心上>
여기서는 먹이 벼루에 갈려서 점점 닳아 없어지는 것을 비유하였다.
►홍농弘農
홍농泓農을 가리키는데 이곳은 하남성河南省에 있는 고을로 와연瓦硯이란 벼루의 명산지이다.
►졸동귀어일화卒同歸於一化 마침내는 모두가 하나로 융화되니
►오미지기화복吾未知其禍福 나는 화인지 복인지 알지 못하겠구나
붓의 날카로움과 종이의 얇음에 비하면 벼루는 두텁고 먹은 다른 것과 잘 어울리는 힘이 있어서
훨씬 나은 듯하지만 결국 이 넷이 함께 모여서 글씨를 이루어 내므로
결국은 모여서 하나로 융화되는 셈이다.
따라서 먹과 벼루의 입장으로 볼 때 그렇게 융화되는 것이 화禍인지 복福인지 모르겠다는 뜻이다.
►용행사장用行捨藏
자신의 출처出處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이치에 따르고 사심을 두지 않는 것이다.
공자가 안연顔淵에게
“세상이 써 주면 道를 행하고 세상이 버리면 은둔하는 것을
오직 나와 너만이 할 수가 있다.” 하였다./<論語 述而>
●성수적명盛水滴銘 물을 담는 연적에 대한 명
장필대시藏必待時 저장은 반드시 때를 기다리니
무심편시유심無心便是有心 마음 없음이 곧 마음 있음이네
실약허實若虛 찼어도 빈 듯하니
숙측기천심孰測其淺深 누가 그 깊고 얕음을 헤아리랴
●사우명四友銘 문방사우에 대한 명
묵마재연墨磨在硯 먹을 벼루에다 갈고
신지종횡伸紙縱橫 종이를 사방으로 펼치면
취사여탈지권取舍與奪之權 취하고 버리고 주고 빼앗는 권한이
실개앙필이성悉皆仰筆以成 모두 붓 끝을 통해 이루어지네
고론공즉필전기명故論功則筆專其名 공적을 논할 때면 명성을 독차지하니
유이자준순양능惟二子逡巡讓能 두 벗은 물러나 양보를 하곤
불감여쟁不敢與爭 감히 더불어 다투지 않네
연미이자然微二子 그러나 두 벗이 아니었다면
필역하소중경筆亦何所重輕 붓 또한 소중히 여겨지겠나
●사우리합문답기四友離合問答記
관성자管城子 중산인야中山人也 관성자管城子는 중산中山 사람이고
진현陳玄 강인야絳人也 진현陳玄은 강絳 사람이고
도홍陶泓 홍농인야弘農人也 도홍陶泓은 홍농弘農 사람이고
저선생楮先生 회계인야會稽人也 저선생楮先生은 회계會稽 사람이니
당한유작전唐韓愈作傳 당唐나라 한유韓愈가 전傳을 지으면서
이저기조소자출以著其祖所自出 그 선조의 유래를 드러내어 밝힌 바가 있다.
►관성자는 붓, 진현陳玄은 먹, 도홍陶泓은 벼루, 저선생楮先生은 종이를 각각 擬人化한 것이다.
한유韓愈가 <史記>의 필법을 모방하여 붓을 소재로 <모영전毛穎傳>을 지으면서
이 문방사우文房四友의 명산지를 출신지로 각색하여 표현하였다.
관성시봉管城始封 관성이 처음 봉封해진 것은
당진시황시當秦始皇時 진秦 시황始皇 때에 해당하니
한유소전영시야韓愈所傳穎是也 한유가 전을 지은 모영毛穎이란 자가 바로 그자이다.
한유전언韓愈傳言 한유의 전에 의하면
영여삼인구穎與三人俱 모영이 이 세 사람과 함께
시진시황위우侍秦始皇爲友 진 시황을 모시며 벗이 되었다고 하였는데
차사인此四人 기자손야其子孫也 맨 위의 네 사람은 바로 그 자손들이다.
개자영시蓋自穎時 대개 모영 때부터
이결위사우已結爲四友 이미 四友의 인연을 맺었는데
기후사가전자손其後四家傳子孫 그 뒤로 네 가문에서 전해진 자손들 역시
세수기호世修其好 대대로 우호 관계를 유지하면서
상위우常爲友 언제나 벗으로 지내오곤 하였다.
사인기초四人其初 이 네 사람도 당초에
내동서남북지산야乃東西南北之產也 동서남북 각지에서 생장했기 때문에
미상상식야未嘗相識也 서로들 안면은 없었지만
이기조세세상선以其祖世世相善 자기 선조들이 대대로 친하게 지내 온 까닭에
고일견즉환연허위우故一見則懽然許爲友 한번 보자마자 서로 기뻐하며 벗이 되고는
출입행장出入行藏 필여지해必與之偕 출입出入과 행장行藏을 반드시 함께하곤 하였다.
기업즉이모화其業則以摸畫 그들이 종사하는 생업은 모획摸畫하고
전술위사傳述爲事 전술傳述하는 일이었는데
개역기세수야蓋亦其世守也 대개 이것도 그들이 대대로 지켜 온 가업이었다.
범경전자사凡經傳子史 무릇 경전經傳과 자사子史와
사장훈고詞章訓詁 사장詞章과 훈고訓詁와
백씨지편百氏之編 백씨百氏의 글로부터
지어중기이단至於衆技異端 중기衆技와 이단異端의 글에 이르기까지
자화도화부첩계권字畫圖畫簿牒契卷 자서字書와 도화圖畫와 부첩簿牒과 계권契卷으로부터
급지방언언석及至方言諺釋 방언方言과 언석諺釋에 이르기까지
범세간사물어언凡世間事物語言 세간의 모든 사물과 언어를
개능모사지皆能摸寫之 모사模寫할 수 있었는데
이위재소사而爲才所使 재주 있는 사람에게 부림을 받을 뿐
불능자지不能自持 자기주장을 펼 수는 없으면서도
상희견용어인常喜見用於人 항상 남에게 쓰임이 되는 것을 기뻐하였다.
고자왕공귀인故自王公貴人 그렇기 때문에 위로는 王公과 貴人으로부터
하체초야한사민서下逮草野寒士民庶 아래로는 草野의 빈한한 선비와 서민들에 이르기까지
구구지苟求之 누구든 그들을 청하기만 하면
불택존비不擇尊卑 랭열개왕冷熱皆往
지위의 높고 낮음과 권세의 있고 없음을 가리지 않고 모두 찾아가곤 하였으며
왕필능여기인의往必能如其人意
일단 찾아가서는 반드시 그 사람의 뜻을 제대로 맞춰 주면서
사정곡직교졸邪正曲直巧拙 사정邪正과 곡직曲直과 교졸巧拙을
유기소욕위惟其所欲爲 상대가 원하는 대로 해 줄 뿐
무소위오無所違忤 거역하는 법이 전혀 없었다.
이시以是 천하지인무현우귀천天下之人無賢愚貴賤
그런 까닭에 천하에서 현우賢愚와 貴賤을 막론하고
개이위사인자능위오용皆以爲四人者能爲吾用 무부중지無不重之
모두 이 네 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있다고 하면서 중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연독문인유사우견친여然獨文人儒士尤見親與
그러나 그중에서도 유독 文人과 儒士들에게 남다른 사랑을 받았으므로
사인역자이위지기四人亦自以爲知己 우위지진력尤爲之盡力
네 사람도 스스로 知己로 인정하고는 그들을 위해서는 더욱 힘을 기울이곤 하였다.
사인개편유소능四人皆偏有所能 그런데 네 사람은 모두 한 가지 재능만을 가지고 있을 뿐
이불능방통而不能旁通 다른 재능까지 두루 통하지는 못하였다.
고매당찬록故每當纂錄 그래서 책을 만들어 기록할 때마다
필각효기능연후성必各效其能然後成
반드시 각자의 독특한 재능을 발휘한 뒤에야 그 일을 이루었으며
일부지즉불능성기공야一不至則不能成其功也 한 사람이라도 빠진 경우에는 성공할 수가 없었다.
여정국사명如鄭國辭命 이는 마치 정鄭나라에서 외교 문서를 작성할 적에
필비심세숙자우자산必裨諶世叔子羽子產
반드시 비침裨諶과 세숙世叔과 자우子羽와 자산子産 등
사현각출기소장이후성야四賢各出其所長而後成也
네 명의 현인賢人이 각각 자기의 장기長技를 발휘한 뒤에야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과 같았다.
►<논어 헌문憲問>에
위명爲命 “정나라에서 외교 문서를 작성할 적에는
비심초창지裨諶草創之 비침이 초고를 만들고
세숙토론지世叔討論之 세숙이 토론을 하고
행인자우수식지行人子羽修飾之 행인인 자우가 수식을 하고
동리자산윤색지東里子産潤色之 동리의 자산이 윤색을 하였다.”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고상합처이대용故常合處以待用 그렇기 때문에 항상 한곳에 모여서 대기하고 있다가
당기용當其用 쓰임이 될 때를 당해서는
각자치기기各自致其技 각자 자기의 기예를 발휘하곤 하였으며
불감사퇴추피不敢辭退推避 감히 사양하고 물러나거나 남에게 미루면서 피하는 법이 없었다.
비기임즉미상호발침탈위전천계非其任則未嘗毫髮侵爲專擅計
또 자기가 맡은 일이 아니면 털끝만큼이라도 침탈하며 독점할 꾀를 낸 적이 있지 않았으며
수기극이로일불균雖其劇易勞逸不均
그 일에 비록 쉽고 어려운 점과 편하고 괴로운 점이 있는 등 공평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 하더라도
역불한노기기亦不恨怒忮忌
한스럽게 여기거나 노여워하거나 질투하거나 시기하지 않았다.
이시능구이상호以是能久而相好
그런 까닭에 오랜 세월 동안 서로 친하게 지낼 수가 있었던 것이다.
관성예이조管城銳而躁 관성管城은 성격이 예민하고 조급하였으며
도홍둔이중陶泓鈍而重 도홍陶泓은 기질이 우둔하고 묵중하였으며
진현칠흑陳玄漆黑 진현陳玄은 온몸이 칠처럼 검고 광택이 있었으며
저선생백절楮先生白晢 저선생楮先生은 얼굴빛이 희고 환하였다.
기형모성행절불류其形貌性行絶不類
그들의 형모形貌와 성행性行을 보면 비슷한 점이 하나도 없었지만
연기지부자애석이제인즉일야然其志不自愛惜以濟人則一也
자신을 아끼지 않고서 남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뜻만큼은 동일하였다.
사인거기붕四人擧其朋 이 네 사람의 친구가 한 패가 되어
래의어조씨지서실來依於趙氏之書室 조씨趙氏의 서실에 와서 몸을 의탁하고는
자이위득소상락야自以爲得所相樂也 이제 있을 곳을 얻게 되었다면서 서로들 즐거워하였다.
관성자管城子 기질우취약氣質尤毳弱 그런데 관성자管城子는 기질이 유난히 취약한데다가
이기사우번극而其事尤煩劇 하는 일이 또 더욱 번거롭고 바쁘기만 하였다.
일야규화日夜規畫 그리하여 낮이고 밤이고 정해진 계획에 따라
동작복복動作僕僕 분주하게 움직이느라
우탄기정력尤殫其精力 이시선쇠以是先衰 정력을 더욱 쏟은 탓으로 먼저 몸이 쇠해져서
일모손위독옹의日耗損爲禿翁矣
날이 갈수록 원기가 소모된 나머지 대머리 진 늙은이로 변하고 말았다.
일일一日 그래서 어느 날
주인병기불능승임主人病其不能勝任 파견지罷遣之
주인이 임무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그를 언짢게 여기고는 일을 그만두게 하고 내보내었다.
진현陳玄 묵씨지후墨氏之後 진현陳玄은 묵씨墨氏의 후손이다.
기조급어애인其祖急於愛人 그의 선조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을 급하게 여긴 나머지
상마정지종이사嘗磨頂至踵以死 정수리부터 시작해서 발꿈치까지 갈아대다가 그만 죽고 말았는데
►<맹자 진심盡心> 上에
묵자겸애墨子兼愛 “묵자는 사람들을 평등하게 사랑하였다.
마정방종摩頂放踵
그리하여 정수리로부터 시작해서 발꿈치까지 갈려서 닳아 없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리천하위지利天下爲之 천하의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일이라면 기꺼이 하였다.”
라는 맹자의 말이 나오기 때문에 이렇게 해학적으로 말한 것이다.
기자손함유조풍其子孫咸有祖風 그 자손들도 선조의 기풍을 모두 지니고는
상위인마기신常爲人磨其身 항상 사람들을 위해 자기 몸을 갈아대곤 하였다.
현역감주인지우玄亦感主人知遇 진현 역시 주인이 자기를 알아주는 것에 감복하여
욕이사보欲以死報 목숨을 바쳐 보답하려고
마지자종磨之自踵 발꿈치부터 갈아대기 시작하였는데
관성자거지후수일管城子去之後數日 관성자가 떠난 지 며칠 만에
기마진정이망其磨盡頂而亡 정수리까지 모두 닳아 없어져서 사망하고 말았으니
개재무오오월하순야皆在戊午五月下旬也
이 모두가 무오년(1618, 광해군10) 5월 하순에 일어난 일이었다.
도홍이후중연정陶泓以厚重淵靜
도홍陶泓은 후덕하고 묵중하고 못처럼 고요한 성품을 소유하고서
안거화옥지중安居華屋之中 화려한 저택 안에 편안히 거하기 때문에
독득불쇠獨得不衰 유독 몸이 쇠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이자실려지후而自失侶之後 그런데 자기의 벗들을 잃은 뒤로는
우수무료憂愁無聊 우수憂愁에 잠겨 무료無聊하게 시간을 보내는 동안
형용고고形容枯槁 안색초췌顏色憔悴 용모는 바짝 마르고 안색은 초췌해진 채
진구만면塵垢滿面 먼지와 티끌이 얼굴에 가득한데도
무의세목無意洗沐 깨끗이 씻을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저선생찬연이소왈楮先生粲然而笑曰 이에 저선생楮先生이 빙그레 웃으면서 물었다.
자하우수지심야子何憂愁之甚也 “그대는 무슨 이유로 그처럼 우수에 깊이 잠겨 있는가?”
도홍왈陶泓曰 그러자 도홍이 대답하였다.
희噫 “아,
자독부지오우호子獨不知吾憂乎 그대가 나의 우수에 대해서 유독 알지 못한단 말인가.
시오사인지환始吾四人之讙 처음부터 우리 네 사람이 즐거워하면서
천하막불문미상일일리야天下莫不聞未嘗一日離也
하루도 헤어진 적이 없는 것에 대해서는 천하에서 알지 못하는 이가 없다.
금일척일사今一斥一死 실기이언失其二焉
그런데 지금 한 사람은 배척을 당하고 한 사람은 죽는 등 둘을 잃고 말았다.
차오우수사且吾友雖四 그리고 우리가 벗한 것이 모두 네 사람이기는 하지만
차량인여아동실이식此兩人與我同室而息
그 중에서도 이 두 사람은 나와 더불어 같은 방에 거하면서
마기알골磨肌戛骨 우친밀尤親密 살을 비비고 뼈를 마주치며 더욱 친밀하게 지내었다.
금오두문독거今吾杜門獨居 그런데 지금은 나만이 문을 닫고 홀로 거하면서
사벽허무인四壁虛無人 사방을 둘러보아도 벽만 서 있을 뿐 아무도 없이 텅 비어 있으니
오안득불비수吾安得不悲愁 내가 어떻게 슬픔과 우수에 젖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저선생왈楮先生曰 저선생이 말하였다.
자가위도지기일子可謂徒知其一 미지기이자야未知其二者也
“그대는 정말 하나만 알지 둘은 모른다고 해야 하겠다.
군자여인공이유례君子與人恭而有禮 군자가 사람을 공손하게 대하면서 예의를 지키면
사해지내개형제야四海之內皆兄弟也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형제가 되는 법이다.
►사람들은 모두 형제가 있는데 자기만 없다고 사마우司馬牛가 걱정하자 자하子夏가
군자경이무실君子敬而無失 “군자가 공경하는 자세로 일관하면서 잘못되는 일이 없게 하고
여인공이유례與人恭而有禮 사람을 공손하게 대하면서 예의를 지키면
사해지내개형제야四海之內皆兄弟也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형제가 되는 법이니
군자하환호무형제야君子何患乎無兄弟也 군자라면 어찌 형제가 없는 것을 걱정하겠는가.”
라고 하였다./<論語 顔淵>
하독구인위가사호何獨舊人爲可思乎
어찌 유독 옛날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만 생각할 것이 있겠는가.
금주인절적당세今主人絶跡當世 지금 주인은 이 세상에서 자취를 끊고
독대황권성현獨對黃卷聖賢 경서 속의 성현과 獨對하면서
잠심일실潛心一室 서실 속에 틀어박혀 마음을 집중하고 있다.
인막득규기제人莫得窺其際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그 경지를 엿볼 수도 없는데
이유오사인일여지처而惟吾四人日與之處 우리 네 사람만은 날마다 그와 함께 거처하고
기소론저其所論著 주인의 論著에 대해서
인막능찬일사人莫能贊一辭 다른 사람들은 한마디도 끼어들 수가 없는데
이유오사인지력여위다언而惟吾四人之力與爲多焉
우리 네 사람만은 힘껏 도와준 것이 또한 많다.
시기심이위불가일일무오배야是其心以爲不可一日無吾輩也
그러고 보면 주인도 우리 네 사람이 하루라도 없으면
안 되겠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금장비사후폐今將卑辭厚幣
따라서 지금 말을 겸손하게 하고 예물을 후하게 준비한 다음에
갱구천하지현자이대지更求天下之賢者以代之
천하의 賢者를 다시 구해서 두 사람을 대신하게 하려고 할 것이니
오득우불원의吾得友不遠矣 우리가 머지않아 새로운 벗을 얻게 될 것이다.
자하우언子何憂焉 그러니 그대가 걱정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차범물지생且凡物之生 그리고 이 세상의 생물들은
수요부제壽夭不齊 수명壽命이 일정하지 않아서
유이일기자有以日期者 날의 단위를 기한으로 삼는 것도 있고
유이월기자有以月期者 달의 단위를 기한으로 삼는 것도 있고
유기천백년자有期千百年者 천백 년을 기한으로 삼는 것도 있다.
차개기상야此皆其常也 이 모두가 보편적인 현상들이니
하족위비희何足爲悲喜 슬퍼하거나 기뻐할 것이 뭐가 있다고 하겠는가.
어오당於吾黨 우리 동아리 중에서는
자최의수子最宜壽 그대가 당연히 가장 오래 살 것이다.
오문팽조지재세吾聞彭祖之在世 내가 듣건대 팽조彭祖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실부이득부범삼십륙失婦而得婦凡三十六 종금이왕從今以往
부인을 잃고서 다시 얻은 것이 모두 36회나 되었다고 한다.
자지실우야子之失友也 우해지삼십륙재又奚止三十六哉
앞으로 그대가 벗을 잃는 것이 또 어찌 36회로만 그치겠는가.
금시일실이우지여시今始一失而憂之如是
그런데 지금 처음으로 한 번 잃었다고 해서 이처럼 우수에 잠겨 있다면
자지우장무시이이의子之憂將無時而已矣 그대의 우수는 앞으로 영원히 그칠 날이 없을 것이다.”
도홍성실고陶泓性實固 그런데 도홍은 성격이 실로 고루해서
문차언聞此言 이 말을 듣고서도
유불능석연猶不能釋然 마음이 환하게 풀리지 않았으므로
질제주인質諸主人 이상의 내용을 가지고 주인에게 질문하였다.
주인이저선생지언위연主人以楮先生之言爲然 이에 주인이 저선생의 말이 옳다고 판정하고는
차록기출처본말급문답지사且錄其出處本末及問答之辭 이위기以爲記
그 出處와 本末 및 문답한 말들을 기록해서 <四友離合問答記>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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