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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詩/매월당집梅月堂集

매월당 시집 제4권 14-3

매월당 시집 제4권 14-3

14 문장文章

 

3 제전등신화후題剪燈新話後 <전등신화> 뒤에다 쓰다

 

산양군자롱기저山陽君子弄機杼 산양山陽의 君子가 베틀과 북을 놀려

수전등화록기어手剪燈火錄奇語 손수 등불 돋우면서 기이한 말 썼는데

유문유소유기사有文有騷有記事 문文이 있고 소騷 있고 기사記事도 있어

유희골계유륜서遊戲滑稽有倫序 유희와 익살 소리 차례와 순서 있네.

 

미여춘파변여운美如春葩變如雲 아름답긴 봄꽃 같고 변화롭긴 風雲 같아

풍류화병재일거風流話柄在一舉 풍류로운 얘기꺼리 한번 드는 데 달렸네.

초약무빙후유미初若無憑後有味 처음엔 무근無根한 듯 뒤에는 맛이 있어

가경흡사감자여佳境恰似甘蔗茹 아름다운 지경 흡사 사탕수수 먹는 것 같네.

 

룡전귀거여구치龍戰鬼車與雊雉 용龍이 싸우고 귀신이 수레 몰고 장끼 울음 같은 것을

부자불산량유이夫子不刪良有以 공부자孔夫子가 아니 깎은 건 진실로 까닭이 있네.

어관세교괴불방語關世敎怪不妨 말이 세상 교화에 관계되면 괴이해도 무방하고

사섭감인탄가희事涉感人誕可喜 일이 사람을 감동시키면 허탄해도 기쁘니라.

 

증견하간기음분曾見河間記淫奔 일찍이 하간河間에서 음분淫奔한 기록 보았고

부견모영록망시復見毛頴錄亡是 모영毛穎이 또 무시옹亡是翁을 기록한 것도 보았네.

확락대호칠원리濩落大瓠漆園吏 큰 박이 텅 빈 건 칠원의 아전이요

괴궤천문삼려자怪詭天問三閭子 괴이한 건 천문天問 했던 삼려자三閭子 굴원屈原일세.

 

우열차화종전천又閱此話踵前踐 또 이 얘기 읽어보니 앞의 발길 따른 것

기망등탁어룡무夔罔騰逴魚龍舞 도깨비는 날고뛰고 고기와 용은 춤추네.

상가굴장질한류上駕屈莊軼韓柳 위는 굴원과 장주莊周 타고 한퇴지韓退之ㆍ유자후柳子厚 넘어서니

륙륙무산주운우六六巫山走雲雨 육륙六六봉우리 무산巫山에는 비구름 달려가네.

 

도벽비사온연서陶壁飛梭溫燃犀 도陶씨 벽壁엔 북이 날고 온교溫嶠는 무소 뿔 태우고

귤수초손룡근포橘叟初噀龍根脯 귤 싶던 늙은이 처음으로 용근포龍根脯를 먹었네.

륜곤간담저조화輪困肝膽貯造化 간담肝膽 뭉뚱그려 조화를 저축했다가

담탕필하연봉오澹蕩筆下煙蜂午 맑고 넓은 붓 아래엔 낮 벌[蜂]을 연기 쏘이네.

 

김취묘전계산려金翠墓前溪山麗 김취金翠의 무덤 앞엔 내와 산이 아름답고

라조댁중태초세羅趙宅中苔草細 나조羅趙의 집 가운데는 이끼 풀이 가늘다오.

취경원외하향복聚景園外荷香馥 취경원 밖에는 연꽃 향기 향긋하고

추향정반월색백秋香亭畔月色白 추향정 가에는 달빛이 희구나.

 

사인대차심면막使人對此心緬邈 사람으로 이걸 보면 마음 아득해지거니

환포기종여재목幻泡奇踪如在目 허깨비와 거품 기이한 형적이 눈에 있는 듯하리라.

독와산당춘몽성獨臥山堂春夢醒 홀로 산당山堂에 누워 봄꿈에서 깨었는데

비화수편점상액飛花數片點床額 나는 꽃 두어 조각 상 머리에 점 찍네.

 

안열일편족계치眼閱一篇足啓齒 한 편篇만 읽어도 이를 열어 웃을 만하니

탕아평생뢰괴억蕩我平生磊塊臆 나의 평생 뭉친 가슴을 쓸어 없애 주리라.

 

 

►전등신화剪燈新話 명나라 구우瞿佑(1347-1433)의 단편 傳奇小說集.

►산양군자山陽君子 구우瞿佑

산양山陽 산의 양지 곧 山의 남쪽 편便.

산양山陽은 지명인데 <전등록剪燈錄> 원작자가 거주하던 곳으로 이름은 전하지 않고 있다.

 

山陽(淮安)은 瞿佑의 조상이 대대로 살던 곳으로 그의 祖父시절에 이미

錢塘(杭州)으로 옮겨와 살았지만 여전히 貫籍을 山陽으로 쓰고 있다.

 

하지만 그의 주변에서는 전당 사람이 대부분이었고 서로 전당 사람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또 만년에는 오랫동안 保安에서 귀양살이를 했는데 스스로 錢塘을 관적으로 쓰고 있다.

<전등신화> 판본 중에는 권두의 작자 서명에 山陽과 錢塘의

2가지 貫籍이 사용된 각기 다른 계통의 판본이 있어 주목된다.

 

►기저機杼 ‘틀 기機’ ‘북 저, 상수리나무 서杼’

⓵베틀과 북 즉 직기織機를 가리킨다. 베틀에서 베를 짤 때 나는 소리를 가리킨다.

기機는 베틀이고 저杼는 베 짜는 북이니 기서機序는 베 짜기 즉 글 짓는 공부를 말한다.

 

백리계견정百里鷄犬靜 사방에 개와 닭소리 없는데

천려기저명千廬機杼鳴 집집마다 베 짜는 소리 들리네

/이백李白 <증범금향贈范金鄕>

 

잠사진수세蠶絲盡輸稅 누에고치 뽑아낸 실을 모두 세금으로 실어가고

기저공의벽機杼空倚壁 베틀과 북만 허전하게 벽에 기대어 있네.

/류종원柳宗元(773-819 唐) <전가田家>

 

⓶문사文辭의 결구結構를 이르는 말. 문장을 구성하는 기량.

⓷가슴속에 담고 있는 일의 전말. <顔氏家訓 제10 名實편>

유일사족有一士族 어떤 한 사족士族이

독서불과이삼백권讀書不過二三百卷 책은 불과 2·3백 권도 읽지 못한데다가

천재둔졸天才鈍拙 타고난 재능도 둔하고 졸렬하였지만

이가세은후而家世殷厚 집안은 대대로 부유하여

아자긍지雅自矜持 스스로 훌륭하다고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

 

다이주독진완多以酒犢珍玩 늘 술과 송아지 고기 등 진귀하고 아름다운 것들로

교제명사交諸名士 명사들과 사귀게 되자

감기이자甘其餌者 그 미끼를 달게 여긴 자들이

체공취허遞共吹噓 돌아가면서 그에게 바람을 불어 넣었다.

조정이위문화朝廷以爲文華 조정에서조차 그를 문화文華하다고 여겨

역상출경빙亦嘗出境聘 밖의 사신으로 보내게 되었다.

 

동래왕한진명독호문학東萊王韓晉明篤好文學 동래왕 韓晉明은 문학을 독실히 좋아하던 자였다.

의피제작疑彼製作 그런데 그는 그 사족의 작품이

다비기서多非機杼 거의가 알고 쓴 것이 아니라고 의심하여

수설연언遂設燕言 드디어 잔치를 벌여

면상토시面相討試 그를 마주 대하여 시험해 볼 작정이었다.

 

기저일가機杼一家 스스로 연구하여 독특하고 훌륭한 문장이나 언론 따위를 지어 냄.

<위서魏書 卷82 조영열전祖瑩列傳>

조형은 남들에게 말하기를

문장수자출기저文章須自出機杼 ‘문장이란 모름지기 機杼에서 뽑아져 나오면

성일가풍골成一家風骨 반드시 一家의 風骨을 이루어야 하는 것인데

하능공인동생활야何能共人同生活也 어떻게 남들과 함께 살 수가 있겠소?

 

►소騷 ‘떠들 소騷’

한시漢詩의 한 체體. 초楚나라 때 文人 굴원屈原의 <이소離騷>에 따른 옛 文體이다.

 

►골계滑稽 말이 매끄럽고 익살스러워 웃음을 자아내는 일.

►윤서倫序 정定하여진 基準에서 말하는 前後, 左右, 上下 따위의 次例關係.

►춘파春葩 봄 꽃. ‘꽃 파葩’

►화병話柄 이야깃거리. 화제.

►무빙無憑 빙거憑據가 없음. 증명할 수 있는 근거가 없음.

무빙가고無憑可考 증거로 삼아 상고詳考할 만한 것이 없음.

 

►감자甘蔗 사탕수수. ‘사탕수수 자蔗’ ‘먹을 여茹’

‘자蔗’는 사탕수수인데 <진서晉書 고개지전顧愷之之傳>에

 

개지매식감자愷之每食甘蔗 고개지는 매번 사탕수수를 먹을 때

항자미지본恒自尾至本 항상 끝부분부터 먹기 시작하여 중심부분에 이르렀다,

인혹괴지人或怪之 사람들은 그것을 괴이하게 여겼는데

운云 점입가경漸入佳境 고개지가 이르길 ‘점입가경’이다.

고개지顧愷之​(344-406)는 東晉시대의 화가로

중국 미술의 기틀을 닦은 인물로 평가 된다.

 

고개지는 사탕수수 씹어 먹기를 좋아했는데 매번 먹을 때 마다

당도가 덜한 가장자리부터 당도가 높은 중심 쪽으로 먹었다.

 

대다수 사람들은 단 쪽부터 먹는 게 일반적이었던 듯

"아니 자네는 왜 반대로 먹는 겨?" 하자

그는 "이리 씹어 먹으면 씹어 먹을수록 더 달거든"

 

►구치雊雉 커다란 재앙을 의미함.

<書經 상서商書>에

고종융일高宗肜日 월유구치越有雊雉 고종이 융제肜祭를 지내는 날 꿩이 날아와 울거늘

조기왈祖己曰 조기가 말하기를

유선격왕惟先格王 “임금께서 먼저 자신의 잘못을 바로 잡으면

정궐사正厥事 그 일도 바로잡힐 것입니다.”라고 한데서 유래한 말.

 

►부자불산夫子不刪 공부자가 깎지 않다

<詩經>의 詩가 311篇인데 그보다 훨씬 많은 것을 공자가 깎아 없애지 않았다는 말.

 

►불방不妨 무방하다, 괜찮다.

►증견하간기음분曾見河間記淫奔 일찍이 하간河間에서 음분淫奔한 기록 보았고

 

‘음분淫奔’ 남녀男女가 야합함. 음탕淫蕩한 行動을 함.

또는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은 男女가 사통私通하는 일.

 

‘하간河間’ <詩經> 중에 하간河間ㆍ복상濮上의 2편의 시는 음란한 詩로 유명하다.

이 句와 註는 잘 못된 것 같다.

 

<상간복상桑間濮上>

'상간복상'의 원래 의미를 보면 '복수濮水 주변의 뽕나무 숲에서 나온 음란한 음악'이다.

옛날에는 뽕나무밭이 남녀가 몰래 만나기 쉬운 장소였다.

그리하여 그런 곳에서 나온 음악을 '상간복상'이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이 음악은 단순한 음란한 음악을 넘어 '망국의 음악'으로까지 불리게 되었다.

 

원채당의爰采唐矣 새삼(唐) 캐기를

매지향의沬之鄕矣 매읍의 시골에서 하도다

운수지사云誰之思 누구를 그리워하는 고.

미맹강의美孟姜矣 어여쁜 강씨네 큰 아씨로다

기아호상중期我乎桑中 나와 상중桑中에서 만나자 기약하고

요아호상궁要我乎上宮 나를 상궁上宮에서 맞이하고

송아호기지상의送我乎淇之上矣 나를 기수淇水 가에서 전송하였도다.

/<詩經 국풍國風 용풍鄘風 상중桑中 뽕나무 밭에서>

 

위속음란衛俗淫亂 위衛나라 풍속이 음란하여

세족재위世族在位 세신世臣의 집안으로 지위에 있는 자들이

상절처첩相竊妻妾 서로 처첩妻妾을 훔쳤다.

고차인자언故此人自言 그리하여 이 사람이 스스로 말하기를

장채당어매將采唐於沬 “매읍에서 새삼을 캐면서

이여기소사지인而與其所思之人 그리워하는 사람과 더불어

상기회영송相期會迎送 서로 만나기로 약속하며 맞이하고 전송하기를

여차야如此也 이와 같이 했다.”라고 한 것이다.

 

►악기樂記에 말하였다.

“정鄭·위衛의 음악은 亂世의 음악이니 만慢에 가깝고

<상간桑間·복상濮上>의 음악은 亡國의 음악이니

그 정사가 산란散亂하고 그 백성이 유리流離되어

윗사람을 속이고 私를 행하여 그칠 수 없었다.”

 

►부견모영록망시復見毛頴錄亡是 모영毛穎이 또 무시옹亡是翁을 기록한 것도 보았네.

‘모영毛穎’ 털붓. ‘털로 만든 붓’이라는 뜻으로 붓을 달리 이르는 말.

 

붓. 모영은 중산인中山人이라./<한유韓愈 모영전毛穎傳>

<모영전>은 "모영毛穎" 이라는 붓을 주인공으로 의인화한 작품.

 

천재옥혼초불반千載玉魂招不返 천년의 임포林逋와 서시西施의 옥같이 맑은 넋 불러도 아니 오니

시장모영토청유試將毛穎討淸幽 붓을 잡고는 시험 삼아 맑고 그윽한 경지를 찾아보려 하네.

/강희맹姜希孟 <작묵희팔폭제기상증김태수作墨戱八幅題其上贈金太守>8首

 

‘무시옹亡是翁’ 망亡은 무無자 이다.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자허부子虛賦>에 오유선생烏有先生과 무시옹亡是翁과의 문답이 있다.

무시공無是公은 문선文選의 자허부子虛賦에서는 망시공亡是公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漢 나라 문인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자허부子虛賦’는

자허子虛, 망시공亡是公, 오유선생烏有先生 간의 문답으로 이루어진 바

‘헛것[자허]이 이런 것이 없다[망시공]. 어찌 있으리오[오유].’라는 뜻임.

/<한서漢書 사마상여전司馬相如傳>

 

►확락대호칠원리濩落大瓠漆園吏 큰 박이 텅 빈 건 칠원의 아전이요

‘확락濩落’ 확락廓落. 텅 비어 있음. 마음에 먹었던 뜻을 펴지 못함.

 

거연성확락居然成濩落 그렁저렁 확락이 되어

백수감결활白首甘契闊 센 머리로 가난을 달게 여기네.

/두보杜甫 <자경부봉선현영회5백자自京赴奉先縣詠懷五百字>

 

확락문항공濩落門巷空 문과 거리는 텅 비어 있네./<한유韓愈>

고표괘수일엽경孤瓢挂樹一葉輕 표주박 하나 나무에 걸려 있어 이파리 하나같이 가벼우니

풍취확락야유성風吹濩落夜有聲 바람 불어 올 때 흔들리는 소리 텅 빈 듯 밤에 들리누나.

/<왕길무王吉武>

 

왕도일이미王道日以靡 왕도가 날로 쓰러져 가니

성인종부기聖人縱復起 성인이 비록 다시 일어난들

확락무소시濩落無所施 확락하여 손 쓸 길이 없겠구나.

/김시습金時習 <무제無題>

 

►대호大瓠 ‘박 호瓠’ 큰 박

<莊子 內篇 逍遙遊>

혜자위장자왈惠子謂莊子曰 혜자가 장자에게 말했다.

위왕魏王 태아대호지종胎我大瓠之種 위왕이 큰 박씨를 주어

아수지我樹之 그것을 심었더니

성이실오석成而實五石 자라나 5석이나 들어갈 정도의 열매가 열렸소.

 

이성수장以盛水漿 기견불능자거야其堅不能自擧也 물을 담자니 무거워 들 수가 없고

부지이위표剖之以爲瓢 둘로 쪼개 바가지로 쓰자니

즉호락則瓠落 무소용無所容 납작하고 얕아서 아무것도 담을 수가 없었소.

 

비불악연대야非不咢然大也 오위기무용이배지吾爲其無用而培之

확실히 크기는 했지만 아무런 쓸모가 없어 부숴버리고 말았소.

 

장자왈莊子曰 그러자 장자가 말했다.

부자고졸어용대의夫子固拙於用大矣 선생은 큰 것을 쓰는 방법이 매우 서투오.

 

‘칠원리漆園吏’ 장자莊子.

장자가 일찍이 몽蒙 땅에서 옻나무를 심는 밭의 벼슬아치가 되었기 때문이다/<史記 老莊傳>

 

<칠원선리회조궤漆園仙吏恢弔詭>

칠원의 선리仙吏는 곧 일찍이 몽蒙 땅에서 칠원의 벼슬아치를 지낸 莊周를 높여 이른 말인데

<莊子 齊物論>에

“공자도 그대와 함께 모두 꿈을 꾸고 있다.

또 그대에게 꿈을 꾼다고 말하는 나도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나의 이런 말을 일러 ‘지극히 의문스러운 것’이라고 한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기망夔罔=기망량夔罔兩. 夔와 罔兩.

‘기夔’는 산림에 있는 요정. <山海經 大荒東經>에

동해 7천리 안쪽에 있는 流波山에 소처럼 생겼으되 몸통은 푸르고 뿔이 없으며

다리가 하나인 ‘기夔’는 짐승이 있는데 물 밖으로 나오면 반드시 비바람이 불고

그 눈빛은 해와 달처럼 밝고 울음소리는 우레처럼 크다고 하였다.

황제가 ‘기夔’를 잡아 가죽으로 북을 만들고 雷獸의 뼈로 북채를 만들어 치니

그 소리가 5백리 밖까지 퍼져 온 천하를 두렵게 했다.

 

‘망량罔兩’은 ‘망량魍魎’인데 산 속에 사는 도깨비로 사람을 현혹시킨다./<國語 魯語>下

 

►등탁騰逴 뛰고 날다.

‘오를 등騰’ 오르다 도약跳躍하다. 뛰어오르다

‘멀 탁逴’ 멀다, 아득하다. 넘다, 뛰어넘다. 비추다

 

►한퇴지韓退之ㆍ유자후柳子厚

한유韓愈 한퇴지韓退之(768-824) 자후子厚 유종원柳宗元(773-819)

 

►륙륙무산六六巫山 6+6=12. 6*6=36

무산육육무중회巫山六六霧重回 무산 36봉우리는 안개에 겹겹이 둘려

반로첨봉자취퇴半露尖峰紫翠堆 반쯤 드러나 뾰족한 봉우리와 자색 비취 언덕

뇌각양왕고침몽惱却襄王孤枕夢 양왕의 외로운 배개의 꿈을 괴롭히지 마시게,

긍위운우하양대肯爲雲雨下陽臺 기꺼이 雲雨가 되어 양대로 내려오라.

/<金鰲新話 이생규장전李生窺牆傳>

 

의시천변십이봉疑是天邊十二峰 의심컨대 하늘가에 솟은 열두 봉우리

/李白 <관원단구좌무산병풍觀元丹丘坐巫山屛風>

(주注)

기주무산夔州巫山 유십이봉有十二峯 기주夔州의 무산巫山에 열두 봉우리가 있으니

망하望霞 취병翠屛 조운朝雲 송만松巒 집선集仙 취학聚鶴

정단淨壇 상승上昇 기운起雲 비봉飛鳳 등룡登龍 성천聖泉

신녀묘거기하神女廟居其下 신녀神女의 사당이 그 아래에 있다.

 

<십이봉十二峰> 무산巫山의 산봉우리 중에서 더욱 현저한 것.

처음에는 확정되서 말해지지 않았고 후에도 설마다 이야기가 다르다.

<사천성지四川省志>에

무산巫山은 기주夔州 무산현巫山縣 동쪽 30리에 있는데 “무巫”자와 같은 형태로 12봉이 있다.

“망하望霞, 위병翠屏, 조운朝雲, 송만松峦, 집선集仙, 취학聚鶴,

정단淨壇, 상승上升, 기운起雲, 서봉棲鳳, 등룡登龍, 망성望聖”이다.

 

이 12봉은 한데 모여 있지 않고 강이 이산을 에워싸고 그 주위에 12봉이 있어서

그리는 사람은 부득불 12봉을 하나의 그림으로 모아야 한다.

양대산陽臺山은 무산현巫山縣의 서북방향으로 치닫고 그 사이에 고구산高丘山이 있다.

 

►도벽비사온연서陶壁飛梭溫燃犀 도陶씨 벽壁엔 북이 날고 온교溫嶠는 무소 뿔 태우고

‘도벽비사陶壁飛俊’ 동진東晉의 명장인 도간陶侃(도연명의 증조부)이 강에서 고기를 낚다가

북[椒 베 짜는 북]을 얻어 벽에 걸어 놓았더니 나중에 그것이 용이 되어 날아갔다고 한다.

 

도간陶侃(257-332) 진晉나라 때의 무장. 도연명陶淵明의 증조부.

영가永嘉의 난(307-312) 때 무창을 지켜 공을 세웠고 武昌을 지켜 공을 세웠다.

명제明帝 때는 征南大將軍으로서 왕돈王敦의 반란과 소준蘇峻의 변을 평정하는 등

통군統軍 40여 년 동안 많은 공을 세워 진나라 왕실을 위하여 충성하였다.

벼슬이 시중태위侍中太尉에 이르렀고 창사군공長沙郡公에 봉해졌다/네이버 지식백과

 

온교溫嶠(288-329) 동진東晉 때 도간陶侃과 같은 시대의 장군.

결혼할 때 옥경대玉鏡臺를 예물로 삼았다 함.

원제元帝의 명으로 하삭河朔에 있는 유곤劉琨에게 보내는 표表를 받들고

江南에 가서 유곤이 나오도록 하려고 떠나려 하니

온교의 어머니 崔氏가 굳이 못 가게 붙잡으므로 옷소매를 끊고[절거絶裾] 갔다 하며

 

난 지 돌이 못 되는 환온桓溫을 보고는

‘이 아기가 기특한 골상이 있으니 시험 삼아 울려 보자.’ 하고

그 우는 소리를 듣고는 ‘참으로 영물英物이로다.’ 했음.

 

요대식성온태위要待識聲溫太尉 온 태위는 울음소리 들으려 했지만

하번마정지선사何煩摩頂誌禪師 지 선사는 구태여 이마를 만져 무엇하리.

/이규보李奎報 <하금평장득외손차운賀琴平章得外孫次韻>

 

재소미족명청덕才疎未足銘淸德 서투른 재주라서 그 맑은 덕을 옳게 비명으로 쓰지 못했으니

누쇄당년옥경대淚洒當年玉鏡臺 사위로서 결혼 당시 예물 받던 생각하며 눈물 뿌리네.

/이제현李齊賢 <국재권문정공만사國齋權文正公挽詞>

 

<진서晉書 온교전溫嶠傳>

조의장류보정朝議將留輔政

조정의 의논은 장차 (온교를) 머무르게 해서 정사를 보필하게 하려 했으나

 

교이도선제소임嶠以導先帝所任 온교嶠는 王導가 先帝에게 맡겨진 바이기에

고사환번固辭還籓 굳게 사양하고 번籓으로 돌아갔다。

 

부이경읍황잔復以京邑荒殘 거듭 경읍京邑이 황폐해져

자용불급資用不給 재물이 넉넉하지 않으니

교차자축嶠借資蓄 온교嶠는 쌓아 둔 재물을 빌려주어

구기용具器用 기물을 갖추게 하였고

이후선어무창而後旋於武昌 그 후 무창武昌으로 돌아가는데

 

지우저기至牛渚磯 우저牛渚의 물가에 이르러

수심불가측水深不可測 수심을 잴 수 없었는데

세운기하다괴물世雲其下多怪物 세간에서 ‘그 아래 괴물이 많다’ 하니

교수훼서각이조지嶠遂燬犀角而照之 온교嶠는 서각犀角을 태워서 이를 비추었다.

 

수유須臾 견수족복화見水族覆火 잠시 후 물의 종족들이 불을 끄는 것을 보았는데

기형이상奇形異狀 형상이 모두 기이했으며

혹승마차저적의자或乘馬車著赤衣者 어떤 이는 마차를 타고 붉은 옷을 입었다.

 

교기야몽인위기왈嶠其夜夢人謂己曰 온교嶠의 그날 밤 꿈에서 한 사람이 자신에게 말하였다

여군유명도별與君幽明道別 ‘군君과 이승과 저승의 길을 나누었는데

하의상조야何意相照也 어찌 서로 비추려 하셨소?‘

 

의심악지意甚惡之 뜻이 심히 불길했다.

교선유치질嶠先有齒疾 온교嶠는 앞서 치아질병이 있어

지시발지至是拔之 이에 이르러 뽑았는데

인중풍因中風 이로 인해 중풍中風이 되어

지진미순이졸至鎮未旬而卒 진鎮에 이르러 열흘을 넘기지 못하고 죽으니

시년사십이時年四十二 당시 나이 42세였다。

 

강주사서문지江州士庶聞之 강주江州의 여러 사람들이 듣고

막불상고이읍莫不相顧而泣 서로 보면서 울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귤수초손룡근포橘叟初噀龍根脯 귤 싶던 늙은이 처음으로 용근포龍根脯를 먹었네.

‘늙은이 수叟’ 늙은이. 어른. 쌀 씻는 소리

‘뿜을 손噀’ (물을)뿜다. 입에서 뿜어내다.

 

‘용근포龍根脯’/현괴록玄怪錄

유파공인有巴邛人 부지성不知姓 파공巴邛 사람은 성씨를 알 수가 없다.

가유길원家有桔園 파공 사람의 집에는 귤 밭이 있었는데

인상후因霜後 제길진수諸桔盡收 서리가 내린 뒤에 모든 귤을 거두어들일 때

유여이대길餘有二大桔 큰 귤을 두 알이 남았는데

여삼사두앙如三四斗盎 질그릇에 서너 말을 담을 크기였다.

 

읍인이지巴人異之 파공 사람은 이를 기이하게 여기고

즉령반적卽令攀摘 즉시 사람을 시켜 따도록 했는데

경중역여상길輕重亦如常桔 무게는 보통 귤과 같았다.

 

부개剖開 귤을 쪼개 보니

매길유이로수每桔有二老叟 각 귤마다 두 노인이 들어 있었는데

수미파연鬚眉皤然 수염과 눈썹은 하얗게 새어 있었고

기체홍윤肌體紅潤 피부는 붉은 윤기가 흘렀다.

 

개상대상희皆相對象戲 그 노인들은 모두 장기를 두고 있었는데

신근척여身僅尺餘 신장은 겨우 1척 정도가 넘었으며

담소자약談笑自若 태연자약하며 담소를 나누고 있을 뿐

부개후剖開後 귤이 쪼개진 후에도

역불경포亦不驚怖 역시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았고

단여결도但與決賭 다만 서로들 내기를 하고 있었는데

도흘賭訖 수왈叟曰 내기가 끝나자 그 중의 한 노인이 말했다.

 

군수아해룡신제칠녀발십량君輸我海龍神第七女發十兩

"그대는 나에게 해룡신海龍神의 7째 딸의 머리카락 10냥과

 

지경액황십이매智瓊額黃十二枚

선녀인 지경智瓊의 이마에 바르는 화장품인 액황額黃 12매와

 

자견피일부紫絹帔一副 자줏빛 비단 배자 1벌과

강대산하실산이유絳臺山霞實散二庾 강대산絳臺山의 하실산霞實散 24말과

 

영주옥진구곡瀛洲玉塵九斛 영주瀛洲의 옥가루 90말과

아모료수응주사종阿母療髓凝酒四鍾 서왕모西王母의 요수응주療髓凝酒 256말과

 

아모녀태영낭자제허룡호말팔阿母女態盈娘子躋虛龍縞襪八兩

서왕모西王母의 딸 태영낭자態盈娘子의 제허룡躋虛龍의 흰 버선 8켤레를 잃었으니

 

후일어왕선생청성초당환아이後日於王先生青城草堂還我耳

뒷날 왕선생의 청성산青城山 초가집에서 나에게 주시오"

 

우유일수왈又有一叟曰 또 다른 한 노인이 말하였다.

왕선생허래王先生許來 경지부득竟持不得 "왕선생이 오기로 하였으나 기다릴 수가 없소이다.

신중지악信中之樂 불감상산不減商山 귤 속의 즐거움은 상산商山의 즐거움에 못하지 않는데

단부득심근고체但不得深根固蒂 다만 뿌리를 깊게 박고 꼭지를 단단하게 하지 못하여

위적하이爲摘下耳 하계의 사람들에게 따졌을 뿐이오."

 

우일수왈又一叟曰 그러자 또 다른 한 노인이 말했다.

복기의僕饑矣 "나는 배가 고파서

수룡근포식지須龍根脯食之 용근포龍根脯를 먹어야 하겠소"

 

즉어수중추출일초근卽於袖中抽出一草根 곧바로 소매에서 풀뿌리를 꺼냈는데

방원경촌方圓徑寸 둘레가 1촌 정도 되었고

형상완전여룡形狀宛轉如龍 구불구불한 것이 용의 모습과 같았으며

호리망부주실毫釐罔不週悉 세세한 부분까지 용의 모습을 갖추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인삭식지因削食之 노인이 이것을 깎아 먹었는데

수삭수만隨削隨滿 그 잘려진 곳은 곧바로 원상태로 회복되었다.

 

식흘이수손지食訖以水噀之 다 먹고 나자 다시 물을 뿜으니

화위일룡化爲一龍 용근포는 한 마리의 용으로 변하였고

사수공승지四叟共乘之 네 노인은 이 용에 함께 탔다.

 

족하설설운기足下泄泄雲起 용의 발 아래에서 뭉게구름이 일더니

수유풍우회명須臾風雨晦冥 잠깐 사이에 비바람이 불면서 어두워진 뒤에

부지소재不知所在 그들이 간 곳을 알 수가 없었다.

 

파인상전운巴人相傳云 파공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렇게 전해져 내려온다.

백오십년이래여차百五十年已來如此 "150년 동안이나 이와 같았다고 전해져 내려오는데

사재수당지간似在隋唐之間 아마도 수나라와 당나라 사이의 일일 것이다.

단부지지적년호이但不知指的年號耳 다만 연호를 정확히 짚어낼 수 없을 뿐이다"

 

<현괴록玄怪錄>

당唐나라 때 우승유牛僧孺가 편찬한 전기소설.

당시에 전승되어 오던 단편 소설을 모아 소설집으로 간행하는 것이 유행하였는데

루쉰은 <중국소설사략中國小說史略>에서 이것을 대표작으로 언급하였다.

 

<속현괴록續玄怪錄>

당唐나라 때 이복언李復言이 편찬한 전기 소설傳奇小說.

<현괴록>을 잇는다는 뜻으로 이 이름을 붙였다.

원본은 전하지 않으며 <신공평상선辛公平上仙><설위薛偉>

<장봉張逢><정혼점定婚店> 등의 이야기가 남아 있다.

 

<두자춘전杜子春傳>

당나라 때에 정환고鄭還古가 지은 傳奇小說.

방탕아인 두자춘이 늙은 선인의 제자가 되어

어떠한 경우에도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경계를 지키며

수행하다가 수행의 마지막에 여자로 다시 태어나 남편이 자식을 죽이는 것을 보고는

“아아.” 하며 소리를 내어 수행에 실패한다는 내용이다.

이복언李復言이 편찬한 <속현괴록>과 <태평광기>에 실려 전한다.

 

►김취묘전계산려金翠墓前溪山麗 김취金翠의 무덤 앞엔 내와 산이 아름답고

‘김취金翠’ 김취의 김金은

<전등신화剪燈新話 취취전翠翠傳>의 김정金定이란 청년이고

취翠는 취취翠翠를 말한 것.

 

취취성류씨翠翠姓劉氏 취취翠翠의 성姓은 유씨劉氏이다.

회안민가녀야淮安民傢女也 지금의 南京인 淮安지방의 평민집 딸이었다.

 

생이영오生而穎悟 能通詩書 그는 나면서부터 총명하여 詩書에 능통하니

부모불탈기지父母不奪其志 부모님도 그의 뜻을 꺾을 수가 없었다.

취령입학就令入學 학교에 입학시켜 공부를 하게 하였다.

 

동학유금씨자자同學有金氏子者 명정名定

동급생중에 金氏라는 청년이 있었는데 이름을 정定이라 했다.

 

여지동세與之同歲 역총명준아亦聰明俊雅 취취와 같은 나이로 역시 총명하고 준수하였다.

제생희지왈諸生戲之曰 여러 친구들이 농담하여 말하기를

동세자당위부부同歲者當爲夫婦 "同甲은 응당 부부가 되어야지"하고 놀렸다.

 

이인역사이차자허二人亦私以此自許

두 사람도 역시 말은 하지 않았으나 마음속으로는 그렇게 여기고 있었다.

/<취취전翠翠傳>

 

►라조댁중태초세羅趙宅中苔草細 나조羅趙의 집 가운데는 이끼 풀이 가늘다오.

‘나조羅趙’ <전등신화剪燈新話 애경전愛卿傳>에 나오는 라애경羅愛卿과 조생趙生

 

나애애羅愛愛 가흥명창야嘉興名娼也 나애애는 절강성浙江省 가흥嘉興의 명기였다.

색모재예色貌纔藝 독보일시獨步一時 그는 용모와 재예纔藝가 당시에 제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우성식통민而又性識通敏 공어시사工於侍詞 성품이 총명하고 민첩하며 詩詞에도 뛰어 났다.

이시인개경이모지以是人皆敬而慕之 이로 인하여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고 사모思慕하여

칭위애경稱爲愛卿 그를 ‘애경愛卿’이라 불렀다.

(‧‧‧)

동군유조씨자자同郡有趙氏子者 이때 같은 고을에 조생趙生이라는 자가 있었다.

제육第六 그 집안의 여섯 째 아들로

역잠영족亦簪纓族 역시 벼슬이 높고 지체 높은 가문의 자손이었다.

부망모존父亡母存 아버지는 별세하고 홀어머니만 모시고 살았는데

가자거만傢貲巨萬 재산이 억만장자였다.

 

모기재색慕其纔色 그는 애경의 뛰어난 재주와 아름다운 미모를 연모하여

납례빙언納禮聘焉 예물을 갖추어 아내로 맞이했다./<애경전愛卿傳>

 

►취경원외하향복聚景園外荷香馥 취경원 밖에는 연꽃 향기 향긋하고

‘향복香馥’ 향기

 

칠월지망七月之望 7월 보름날,

어국원상연於麯院賞蓮 등생은 국원麯院에서 연꽃을 구경하다가

인이숙호因而宿湖 서호西湖가에 자게 되어

박주뇌봉탑하泊舟雷峯塔下 뇌봉탑雷峯塔 아래 배를 대었다.

 

시야월색여주是夜月色如晝 달은 대낮과 같이 환히 밝고

하향만신荷香滿身 향기는 온 몸을 감쌌다.

 

시문대어도척어파간時聞大魚跳躑於波間 때로는 큰 물고기가 호수의 물결 위에서 뛰놀고

숙조비명어안제宿鳥飛鳴於岸際 물가에 자던 새들도 언덕 저편에서 퍼덕이며 우는 소리가 들렸다.

 

생이대취生已大醉 등생은 이미 술에 크게 취해서

침불능매寢不能寐 눈을 붙여도 잠이 오지 않았다.

피의이기披衣而起 옷을 걸치고 일어나

요제관망遶堤觀望 호수의 둑을 따라 거닐며 구경하다가

행지취경원行至聚景園 취경원聚景園에 이르러

신보이입信步而入 발 가는대로 안으로 들어갔다.

/<전등신화 등목취유취경원기滕穆醉遊聚景園記>

 

►추향정반월색백秋香亭畔月色白 추향정 가에는 달빛이 희구나.

 

추향정상계화방秋香亭上桂花芳 예전 놀던 추향정에 계수나무 꽃 향기로워

기도풍취도수방幾度風吹到繡房 몇 번이나 바람결에 비단 창에 불어 왔나?

자한인생불여수自恨人生不如樹 한스럽다, 우리 인생 저 꽃만 못하구나!

조조장단옥서장朝朝腸斷屋西牆 아침마다 서쪽 담장에서 구곡간장 끊어지네.

 

추향정상계화서秋香亭上桂花舒 예전 놀던 추향정에 계수나무 꽃 활짝 피니

용의은근종량주用意殷勤種兩株 심은 뜻도 얄궂어라, 두 나무를 심었구나!

원득타년여차수願得他年如此樹 우리 둘도 그 언젠가 저 나무와 같이 되어

금재보장호명주錦裁步障護明珠 비단 휘장 둘러치고 둘이 함께 놀았으면

/<전등신화 부록 추향정기秋香亭記>

 

►면막緬邈 ‘멀 면/가는 실 면緬’ ‘멀 막邈’

요원遙遠하다. 아득하게 멀다. 생각이 아득한 모습.

사영운謝靈運의 詩에 “면막구중연緬邈區中緣“에 대한

장선張铣의 주注에 ”면박緬邈 방불야仿彿也(흡사하다)”라고 하였다.

 

●등강중고서登江中孤嶼 강 속에 있는 외딴섬에 오르다/사령운謝靈運()

 

강남권력람江南倦歷覽 강 남쪽은 물리도록 두루 유람하였는데

강북광주선江北曠周旋 강 북쪽은 돌아본 지 오래 되었네

회신도전형懷新道轉逈 새로운 경치를 보고 싶어도 길은 더욱 멀어만 지고

심이경불연尋異景不延 이경을 찾고자 해도 해를 늘일 수 없으네

 

난유추고서亂流趨孤嶼 어지러운 물결이 외딴섬으로 달려가는데

고서미중천孤嶼媚中川 외딴섬이 강 가운데 아름답게 서 있구나

운일상휘영雲日相暉映 구름과 물이 서로 빛을 내며 비치고

공수공징선空水共澄鮮 하늘과 물이 모두 맑고 고와라

 

표영물막상表靈物莫賞 신령스러움을 드러내었으되 감상할 줄 모른다면

온진수위전蘊眞誰爲傳 참된 이치 감추인 것을 뉘 전달할 수 있으랴

상상곤산자想像崑山姿 곤륜산의 자태를 상상하니

면막구중연緬邈區中緣 인간세의 인연과는 아득히 멀구나.

 

시신안기술始信安期術 비로소 안기생의 장생술을 믿노니

득진양생년得盡養生年 양생하여 천수를 누릴 수 있겠네.

 

►안열일편족계치眼閱一篇足啓齒 한 편篇만 읽어도 이를 열어 웃을 만하니

‘계치啓齒’ 웃다. 이를 드러내고 웃는 모양.

(주로 남에게 부탁하기 위해) 입을 열다. 말하다. 이야기를 꺼내다.

 

공작公綽 처한씨妻韓氏 상국휴지증손相國休之曾孫

공작의 아내 한씨는 상국 한휴의 증손녀이다.

 

가법家法 엄숙검약嚴肅儉約 위진신가해범爲搢紳家楷範

그 집의 법도가 엄숙하고 검약하여 사대부집들의 모범이 되더니

 

귀류씨삼년歸柳氏三年 무소장無少長

유씨가 시집간 뒤 3년에 어린애나 어른 할 것 없이

 

미상견기계치未嘗見其啓齒

아직 일찍이 그가 이를 드러내며 웃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며

 

상의견소常衣絹素 항상 무늬 없는 깁옷을 입었고

부용능라금수不用綾羅錦繡 능라금수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매귀근每歸覲 친정에 근친하러 갈 때마다

부승금벽여不乘金碧輿 황금과 벽옥으로 꾸민 가마를 타지 않고

 

지승죽두자祗乘竹兜子 이청의二靑衣 보사이수步屣以隨

오직 죽교자를 타고서 두 사람의 하인이 걸어서 이에 따르게 하였다.

 

►탕아평생뢰괴억蕩我平生磊塊臆 나의 평생 뭉친 가슴을 쓸어 없애 주리라.

‘뇌괴磊塊’ 첩첩이 쌓인 많은 돌. 마음에 쌓인 걱정이나 불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가슴 억, 단술 의臆’ 가슴. 가슴뼈

 

●전등신화剪燈新話/구우(瞿佑(1347-1427)

/정용수(동아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전등신화>는 중국 명대 소설이지만

조선조 초에 이미 유입되어 왕조가 끝날 때까지 줄곧 읽혔다.

저자 구우는 원말명초 전당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책의 대부분은 오늘날 절강성 항주와

그 주변 지역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로 엮어져 있다.

 

‘하늘에는 천당, 땅에는 항주’라며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하는

이곳 항주는 예로부터 수많은 이야기가 전해오는 곳이다.

 

양산백과 축영대의 사랑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기도 하거니와

오나라와 월나라가 원수처럼 싸움질한 이야기도 있으며

인간이 되고 싶은 뱀 이야기도 있다.

 

아름다움이 미인 서시를 닮았다 하여 서호라 일컫는 아름다운 호수가 도심에 자리 잡고 있으며

유서 깊은 사찰이 인근 지역 곳곳에 늘어서 있는 곳이기도 하다.

 

몇 해 전 여름, 항주를 방문하여 서호 주변을 돌아본 적이 있다.

강가에 서 있는 뇌봉탑에 올라 멀리 서호 팔경의 하나인 단교잔설斷橋殘雪을 바라보며

그 아름다움에 감탄을 금치 못했으나 아쉽게도 구우의 흔적은 찾을 수 없어

<연방루기><등목취유취경원기><취취전> 등에 나오는 서호에 대한 기억을 묻어두었다.

 

시간의 간극을 넘어 뭐든 공유할 수 있는 행운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작자가 누렸던 은근한 멋을 전혀 느낄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등불의 심지를 자른다’는 의미가 ‘전등剪燈’일진대 얼마나 재미있으면

밤이야 늦건 말건 다시 심지를 돋울 것이라 우기겠는가?

자부심이야 옛날인들 오늘만큼 없었으랴!

 

이 작품을 읽은 이는 많다.

창작되고 채 50년이 못 되어 조선으로 유입된 <전등신화>를 읽고

우리 이야기를 만든 매월당 김시습은 아무래도 빼놓을 수 없다.

<제전등신화후>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김취의 무덤 앞엔 감도는 물이 아름답고

나조의 집 안엔 이끼 풀이 촘촘하오.

취경원 밖에 연꽃 향기 향긋한데

추향정 가엔 달빛마저 희구려.

 

조선 문인의 감상의 깊이를 오롯이 느낄 수 있어 좋다.

김취는 <취취전>의 김정과 취취이며

나조는 <애경전>의 나애애와 조생이다.

또한 <등목취유취경원기>에서 등목이 위방화와 사랑을 나눈 곳이 취경원이고

<추향정기>에서 상생이 채채와 사랑을 나누던 곳이 추향정이다.

 

이렇게 <전등신화>는 심심풀이로 읽던 소설책이면서

한문을 쓰는 조선인에게는 필독서가 되었던 책이기도 하다.

 

옮긴이도 읽었다.

학창 시절에 한문을 공부하기 위해 읽다가 나중에는 아예 옆에 두고 읽었다.

그래서 우리나라 규장각 소장본이 가장 오래 되었음을 밝혀내기도 했다.

그래서 더 애착이 가는 것이 아니라 중세의 질곡을 뛰어넘기 위해서

노력하는 수없이 많은 소설 속의 인물들이 언제나 오늘 우리들 주변에

여전히 그대로 맴돌고 있기 때문에 더 애착이 간다고 말할 수 있다.

지혜를 주는 책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기이하고 재미있는 21편의 이야기

 

<전등신화>는 전기소설傳奇小說이다.

전기란 명칭은 중국문학사상 唐代 이후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어 왔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전기소설이라 할 때는 당대 소설 내지는 그 계통의 소설 작품을 가리킨다.

 

주로 六朝代에 성행한 이런 이야기를 바탕으로 발전을 거듭한 당대의 전기傳奇는

창작 의식을 갖춘 작가에 의해 전해진 기이한 일이면서도

현실적 사회문제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묘사에 있어서도 훨씬 섬세하고 곡절 있으며

교훈적 주제까지 지니고 있어 작자의 개성과 사상을 비교적 분명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여기에 표현이나 기교면에서 唐詩의 난숙함과 古文의 리얼한 정신을 잘 살려냈고 불우한 문인들의

온권溫卷 풍습까지 있음으로써 훌륭한 작품을 창작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보고 있다.

 

유능하면서도 불우했던 작가들의 낭만 정신의 발로야말로 꿈과 환상이 있었고

작품 속에 의미를 담아내려 했던 유가적 재도載道 문학의 굴레를 벗어나

예술적 가치를 창조하는 쪽으로 기울면서 단편소설로서의 문학적 지위를 확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공좌와 백행간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러한 전기소설의 전통을 계승하여 당시에 유행하던

기괴한 내용들을 소재로 창작된 대표적인 명대 문언소설이 <전등신화>다.

 

내용은 비록 지괴적인 소재를 채용했지만 작가의 현실과

사상의 표현 수법 면에서는 적극적인 환상 수법이 이용되고 있다.

 

누구나 주어진 환경 속에서 자신을 적응시키는 방법을 끊임없이 모색하지만

현실적인 삶의 조건에서 좌절하거나 갈등한다.

 

그러다가 간혹 현실 밖으로 삶의 영역을 확장하다 보면

좌절도 극복하고 원망怨望도 풀리게 되는 것이다.

전기소설은 이 같은 인간 욕망을 환상이란 공간을 통해서 확장한 삶이기에 현실적이다.

 

이 책에 수록된 총 21편의 이야기는 모두 이런 내용을 다루고 있다.

‘전등剪燈’이란 이야기가 하도 재미있어 밤늦도록 등불을 켜놓고 책을 읽어가다가

등불 심지가 다 타서 불빛이 희미해질 즈음이면 심지를 돋운 다음

해가 나지 않도록 가위로 그 끝을 잘라 다시 불빛을 밝게 해가며 읽어간다는 뜻이다.

 

<연방루기><추향정기>는 현실적 바탕 속에서 이루어진 환상이지만

나머지 작품들은 아예 작자의 환상을 다루고 있다.

 

현세에 만족하지 못하거나 불우한 삶을 사는 등장인물이

요괴ㆍ괴물ㆍ용궁ㆍ도불 등을 만나 발생하는 기이하고 흥미진진한 비현실적 세계다.

 

표면상으로는 남녀 간의 애정의 문제를 다루어 낭만적 경향으로 치우치고 있는 듯 보이지만

그것은 인도주의의 발로로 인한 인간 평등의 새로운 가치관을 확립한 것이라 할 것이며

또한 인간과 귀신이 서로 교유하는 문제를 다루어 얼핏 보면 괴기적 경향으로 치우치는 면도 있지만

그것은 인간과 괴리된 별개의 귀신이 아니라 인간화된 귀신을 다룸으로써

결코 인간의 문제를 벗어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장사성의 반란 속에서 만남과 이별을 경험하는

민중들의 고뇌와 현실적 모순을 환상 체험을 통해 그리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비현실적 요소’와 ‘현실적 요소’의 교차적 관계는 작가의 주관에 의해 표현되고

구현된 독창적 환상이란 점에서 우리들에게 새롭고 신선하게 다가선다고 볼 수 있다.

 

작가 구우는 중국 절강성 전당 출신의 학자로 학식도 풍부하고

문필에도 능하여 일찍부터 문명을 사방에 떨쳤던 인물이다.

 

많은 저작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대부분 사라지고 전하지 않는다.

그는 평생토록 결코 편안한 삶을 살지 못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의 활동 시기인 원말명초는 중원 지역이 전란에 휩쓸려 대다수 민중들이

유랑의 삶을 지내야 했으므로 그도 여기에서 예외가 될 수 없었을 것이며

또 중년 이후는 18년간 귀양살이까지 했으므로 결코 평탄한 삶을 지냈다고 볼 수 없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전등신화>는 1378년(洪武 11)에 창작된다.

여기에는 자서自序가 있다.

 

이 자서에는 작품의 제명을 ‘전등록剪燈錄’이라고 했고

원래 40권이 있었으나 대부분 산일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구우의 유년시절 친구 목인계형이 홍무 기사년(1389)에 쓴 서문에

‘전등신화’라고 했으니 유통 당시부터 이미 ‘전등신화’로도 명명되었음이 분명하다.

 

이는 <제전등록후題剪燈錄後 절구사수絶句四首> 말미에 기록된

‘인열신화因閱新話’라고 한 기록이나 중교본을 편찬할 당시 작자를 직접 면담한

호자앙 등이 ‘전등신화’라고 하고 있음에도 별반 문제를 삼지 않고 암묵한 점,

그리고 각 집 뒤에 붙였던 시 네 수를 <전등신화> 뒤에 붙였던 점 등을

고려해 볼 때 둘을 별개의 작품으로 인지했다는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다만 유통 당시부터 많은 와전이 있었던 점은 부정할 수 없을 듯하다.

“간혹 누판한 적이 있는 것은 탈락이 더욱 심했다”고 말한

<중교전등신화후서重校剪燈新話後序>의 내용을 참작해 볼 때 중교본이 간행되기 이전까지

유통과정에서 생긴 조잡한 간본들이 한두 종류 유통되었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다가 1421년(永樂 19)에 중교본이 간행된다.

이 중교 초간본 계통이 본서에서 텍스트로 다룬 <전등신화구해>다.

현재 한국 규장각에 소장된 유일본이다.

 

애초 40권이나 되는 방대한 내용이 대부분 사라지고 총 21편이 남은 것이다.

그중 <추향정기>만은 다른 작품과 달리 부록으로 붙어 있고

또 발문까지 있는 것으로 보아 초교본 이후에 편입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15세기 이후 <전등신화>가 광범위하게 유포되기 시작하면서 <전등여화剪燈餘話>를 비롯한

다수의 소설 창작에 영향을 주기에 이르고 특히 한국, 일본, 베트남 등 동아시아 각국에서

이 <전등신화>의 영향을 받아 창작된 우수한 작품들이 등장하기에 이른다.

 

조선조 문단에 <전등신화>가 유입된 것은 창작 이후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초 <금오신화>를 창작한 김시습(1435-1493)은 <전등신화>를 읽고 난

감동을 하나하나 적어놓은 <제전등신화후題剪燈新話後>라는 글을 남겼고

또 <전등신화>의 영향을 받은 <전등여화>가 <용비어천가>에 언급된 바 있어

<전등신화>는 이보다는 먼저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시기는 이미 우리에게 <수이전殊異傳>이라는 전기소설집이 있었고

특히 전기문학의 틀을 완전하게 갖춘 <최치원>이란 작품이 창작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태평광기太平廣記>나 <설부雪郛> 같은 전기소설을 수록한 총서류가

이미 독서계에 유입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일정한 문학적 수준을 갖춘 작품을 창작하고 감상코자 하는 토대와 열의가 이미 갖춰진 상태에서

같은 성격을 지닌 <전등신화>가 유입되자 그것이 가져다주는 전기적, 환상적 감동은

더욱 증폭되어 조선 문단을 압도해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연산군은 중국에 가는 사신에게 <전등신화>를 무역하고

간행할 것을 명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읽고 대화 중에 인용하기도 했다.

 

더구나 윤춘년과 임기는 <전등신화>의 한 구절 한 구절에 주석을 붙인 <전등신화구해>라는

책을 간행하게 되는데 이 책은 조선의 식자층에 가장 널리 읽힌 책이 되었다.

 

이렇게 이 책이 유행하게 된 데는 아마도 남녀 간의 만남과 이별을 다룬 애정소설로서의 긴박성이나

인간 욕망을 구현해 줄 괴기적 환상성이 소설로서의 흥미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이 속에 담긴 무려 150여 편의 서책과 60여 인의 시문에서 다양한 문체를 참고할 수도 있었으며

삽입문으로 사용된 미려한 문체를 그대로 쓸 수 있는 실용성까지 지님으로써

이보다 더한 책이 당시로서는 없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한반도와 <전등신화>

 

구우瞿佑(1347-1433)는 중국 元말 明초 시기의 문학가로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랐으며 글재주가 뛰어났다.

 

그가 후대에 남긴 수많은 문학작품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큰 작품은 <전등신화剪燈新話>이다.

 

<전등신화>는 주로 남녀 간의 애정과 연애, 혼인을 다룬 단편소설집이다.

신화나 괴이한 소문, 놀라운 일화 등을 소재로 채택했다는 점이 <전등신화>의 특징이며

중국 문학사의 시각에서 보면 중국 위魏 진晉시대 지괴誌怪소설

당唐대의 전기傳奇와 송대 화본話本소설의 특성을 이어받았다.

 

<전등신화>는 명 말기 구어체 단편소설집인 ‘삼언이박三言二拍’이다.

‘삼언’은 <유세명언喩世明言> <경세통언警世通言> <성세항언醒世恒言>의 약칭이며

‘이박’은 <초각박안경기初刻拍案驚奇> <이각二刻박안경기>의 약칭이다.

 

<금병매金瓶梅>를 비롯해 청나라 <요재지이聊齋誌異> 등

중국의 유명 문학작품에 두루 영향을 미쳤다.

 

<전등신화>가 한반도에 전해진 정확한 시기는 고증하기 어렵다.

다만 연산군이 <전등신화>를 몹시 좋아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연산군은 1506년 명나라로 사신을 보내 <전등신화>를 구매하여

번각飜刻판을 바치라는 명을 내릴 정도로 이 작품을 애호했다.

평소에도 신하들과 <전등신화>에 등장하는 일화나 詩에 대해 자주 논하곤 했다.

 

하지만 연산군 다음에 즉위한 중종은 <전등신화>에서 묘사하는 장면이나 일화가

당시 유교사회의 가치관과 맞지 않았기 때문에 연산군처럼 <전등신화>를 애호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전등신화>는 조선 사회에 계속해서 영향을 미쳤다.

조선시대 관료 안팽수安彭壽는 이 책이 선조들의 여가 생활을 위해 탄생했으며 백성을 현혹시키고

눈속임을 통해 조정의 기강을 무너뜨리려는 글과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평가했다.

명종 때의 문신 임기林芑는  <전등신화>에 세세한 주석을 달았는데 이 판본도 세간에 널리 퍼졌다.

 

선조 때에 이르러서는 <전등신화>에 대한 관료들의 태도에 변화가 생겼다.

문신 정사신鄭士信 역시 그의 저서 <매창집梅窓集>에서

“<전등신화>를 읽어보니 사람을 그릇되고 망령되게 만드는 책으로서

유교사상에 걸맞지 않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전등신화>는 조선사회에서 금기시되기는커녕

그 영향력이 점점 커져 일본까지 전해질 정도였다.

 

조선후기 행정서인 <전객사일기典客司日記>에는 1641년 일본 사신이 조선에 하사할 것을

요청한 漢文 도서 목록 가운데 <전등신화>가 포함돼 있다는 기록이 있다.

 

<전등신화>는 조선시대 문학 창작에도 영향을 주었다.

조선 저명한 문인인 김시습의 대표작 <금오신화>에도

신화나 남녀 간의 연정과 관련된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김시습은 <전등신화>를 읽은 뒤의 감상을 漢詩로 창작한 문집인 <제전등신화후題剪燈新話後>에서

“<전등신화>는 기어奇語(기이하고 놀라운 말)로 가득하고 문학성에서나

재미와 내용 면에서나 매우 뛰어난 작품”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이어 “책이 처음에는 무미건조한 듯하나 읽을수록 구미가 당기고

재미있는 부분에서는 사탕수수를 씹듯 달콤하다”고 묘사했다.

 

한반도에서 유행한 <전등신화>는 중국과 한국 간에 이뤄졌던 방대한 문화 교류의 일부에 불과하다.

하지만 동시에 나라 간 문화 교류가 얼마나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활력을 불어넣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기도 하다.

 

/​위셴룽喻顯龍 上海외국어대학교 글로벌문명사연구소 전임연구원

인민화보사 한국어 월간지 <중국> 2021년 제1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