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經/비파사나 수행

마음지킴(sati)의 위상과 용례에 대한 재검토

마음지킴(sati)의 위상과 용례에 대한 재검토

/임승택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2014-01-21 00:49:28

 

I. 시작하는 말

 

초기불교의 수행론에 관련한 최근의 학술적 논의에서 가장 크게 부각된

논점 중에 하나를 꼽으라면 ‘마음지킴’ 즉 ‘sati(念)’에 대한 문제일 것이다.

 

여러 연구자들이 이 용어의 의미와 쓰임 그리고 우리말 번역에 대해

각기 다른 입장을 가지고서 몇 년에 걸친 논의를 해왔다.¹

 

[1) ‘sati’에 관련한 내용을 담고 있는 그간의 논문들로는 拙稿

<Paṭisambhidāmagga 無碍解道의 수행관 연구; 들숨․날숨에 관한 논의를 중심으로>

동국대학교 박사학위청구논문 2000

<초기불교의 경전에 나타난 사마타와 위빠싸나>인도철학 제11집 2001

<사띠(sati)의 의미와 쓰임에 관한 고찰> 보조사상 제16집 2001

<마음지킴의 차제적 성격에 관한 일고찰>

한국불교학결집대회 제1집 하권 2002 등과 더불어 조준호

<초기불교에 있어 止觀의 문제> 한국선학 제2집 2000 조준호

<위빠싸나(vipassanā)의 인식론적 근거> 보조사상 제16집 2001 인경스님

<초기불교의 지관과 사선> 보조사상 제16집 2001 미산(현광)스님

<근본불교수행의 요체와 지성의 발현> 가산불교문화연구원 학술포럼 2001 등이 있다]

 

필자는 그간의 논의에 적극 가담한 당사자로서 이 문제에 대한

나름의 정리가 요구되는 시점에 와 있다고 판단한다.

따라서 본 고를 통해 실천․수행의 도상에서 ‘sati’가 지니는

위상와 용례를 다시 한 번 종합적으로 점검해 보고자 한다.

그리하여 이것을 둘러싼 그간의 논의에 대해 일단의 막을 내리고자 한다.

 

필자는 이제까지의 논의를 통해 이 용어에 대한 어느 정도의 조명이 이루어졌다고 판단한다.

따라서 본 고는 그간의 연구성과를 근거로 하면서 새롭게 부각된

몇 가지 사항들을 첨가하는 형식을 취하고자 한다.

필자는 본 고를 통해 정리된 내용을 최종적인 견해로 삼을 것임을 밝힌다.

 

II. 마음지킴(念)의 위상

 

1. 사념처와의 관계²

[2) 본 소절은 마음지킴과 사념처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의도된 것이다.

필자는 이 부분에 대한 논의를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행하였고

상당 부분이 기존의 연구물에 실린 내용과 중첩된다는 사실을 밝힌다.

특히 본 소절에서 정리하는 내용은 졸고 <대념처경의 이해><대념처경의 수행이론과 실제>

근본불교수행도량 2002 pp.32-34에 실린 것을 임의적으로 첨삭한 것이다]

 

우선 ‘sati’에 대한 번역어로 제시된 ‘마음지킴’에 관해서부터 살펴본다.³

[3) 기존의 연구물에서 필자가 정리한 ‘마음지킴’의 의미와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마음지킴’이란 “특정한 대상을 지속적으로 ‘관찰하거나(anupassī)’

‘따라가는 것(anugacchanā)’으로서 마음의 방황을 멈추게 하고 나아가서는 부차적으로

‘감지되는(viditā)’ 여러 현상들을 통해 ‘연기의 이법’ 등 진리에 대한 자각을 유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의는 이 용어가 ‘사마타(止 samatha)’와 ‘위빠싸나(觀 vipassanā)’

양자 모두에 대해 깊은 연관이 있음을 나타낸다.

즉 ‘마음의 방황을 멈추게 하는 것’이라는 말은 ‘사마타’와 직결된 것이고

‘연기의 이법 등 진리에 대한 자각’은 ‘위빠싸나’와 통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내용에 관해서는 <마음지킴의 차제적 성격에 관한 일고찰> 앞의 논문집 pp.102-104; 졸고

<선정의 문제에 관한 고찰> 불교학연구회 제13차 학술발표회자료집 pp.8-10 등 참조]

 

<마음지킴의 차제적 성격에 관한 일고찰> 등에서 이미 밝혔듯이 ‘마음지킴’이라는

번역어는 필자 자신이 고안한 말로서 ‘지키다’라고 하는 기본형에 근거를 둔 말이다.

 

우리말 사전에 따르면 ‘지키다’의 의미는

① ···을 잃지 않도록 살피다. 수호하다.

②출입을 감시하다.

③ ···을 주의하여 살피다.

④절개를 굽히지 않고 지니다. 이다.⁴

[4) 김민수․홍웅선 편, 다목적 종합 국어사전, 어문각 1968 p.1398]

 

따라서 ‘sati’에 대한 번역어로 고안된 ‘마음지킴’에는

‘살피다(to see, to observe)’ ‘수호하다(to protect, to guard)’

‘감시하다(to watch, to observe)’ ‘주의하다(to look, to pay attention)’

‘지니다(to keep, to bear)’ 등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마음지킴’이라는 번역은 Nikāya에 나타나는 말씀으로서

“비구여, 문지기란 곧 그와 같은 사띠를 두고 하는 말이다”⁵라고 하는 용례를 지니고 있다.

[5) “‧‧‧ Dovārikoti kho bhikkhu satiyā etaṃ adhivacanaṃ.”

SN, vol.4. p.194; AN, vol.4. p.111]

 

또한 Visuddhimagga에는

“(사띠란) ‧‧‧ 눈의 문(眼門=根門) 등을 지키므로 문지기와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⁶는

보다 직접적인 언급과 함께

“이것(sati)은 들뜨지 않음을 특징으로 하고 잊지 않는 것을 기능으로 한다.

보살핌을 나타남으로 하고 또한 대상을 향한 상태를 나타남으로 한다.

견고한 생각을 직접적인 원인으로 하고

몸 따위에 대한 사띠의 확립을 직접적인 원인으로 한다”⁷는 문구가 등장한다.

이들 모두는 우리말 ‘지키다’에 근거한 ‘마음지킴’이라는 번역을 강력하게 뒷받침 해주는 전거이다.

 

[6) “‧‧‧ cakkhudvārādirakkhaṇato dovāriko viya ca daṭṭhabā‧‧‧”Vism. p.464.

7)“sā apilāpanalakkhaṇā, asammoharasā, ārakkhapaccupaṭṭhānā,

visayābhimukhabhāva-paccupaṭṭhānā vā :

thirasaññāpadaṭṭhānā, kāyādisatipaṭṭhānapadaṭṭhānā vā‧‧‧”Vism. p.464]

 

‘sati’에 대한 기존의 한역어들 중에는 ‘守意’라든가 ‘意止’ 따위의 용어가 있다.

따라서 ‘마음지킴’이라는 번역은 충분한 용례와 전거를 지닐 뿐만이 아니라

유사한 번역의 사례까지 갖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간 국내에서는 이 용어에 대해 수많은 번역어들이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필자가 파악하는 한 이상과 같이

직접적으로 경전적 근거를 제시하는 번역의 사례는 없었다.⁸

 

[8) ‘마음지킴(sati)’의 의미와 쓰임에 관련하여 이상과 같은 용례와 쓰임이 있다는 사실은

이 개념에 대해 우리말 번역을 시도했던 이전의 번역자들이 간과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정은 그러한 내용을 줄거리로 한

<사띠(sati)의 의미와 쓰임에 관한 고찰(졸고, 앞의 논문집)>이 발표된 이후에도 마찬가지이다.

이에 관련해서는 인경 스님 <초기불교의 지관과 사선> 앞의 논문집; 미산(현광) 스님

<근본불교수행의 요체와 지성의 발현> 가산불교문화연구원 학술포럼 발표문 2001 등 참조]

 

‘sati’의 번역에 관련한 그간의 논쟁은 이 분야에 대한 학술적 관심도를 높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에 이르러서는 상당히 진부하게 흐르는 듯한 느낌 또한 배제할 수 없다.⁹

 

[9) 이 문제와 관련하여 조준호 선생은 <대념처경의 이해(앞의 논문집)>에 대한 필자의 논문에 대해

논평을 행하면서 무려 10페이지 분량에 이르는 반론적 성격의 글을 개진한 적이 있다.

물론 조준호 선생의 입장에는 얼마간의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조준호 선생의 그러한 견해는 니까야와 주석서에 나타나는 여러 ‘sati’ 관련 언급들을

임의적으로 취사․선택한 바탕 위에 성립해 있다는 취약점을 지닌다.

여기에 관해서는 본 고를 진행해 나가면서 다시 한 번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따라서 필자는 ‘마음지킴’이라는 번역어로써

이 문제에 관련한 스스로의 입장을 최종적으로 매듭짓고자 한다.

이러한 최종적인 결심은 ‘마음지킴’이라는 번역에 대해 호감을 표명한

‘우 빤디따 사야도(U Paṇḍita Sayadaw)’의 말씀에 힘입은 것이기도 하다.¹⁰

 

[10) ‘근본불교 학술대회(2002)’의 종합토론에서 미얀마의 큰스님 ‘우빤디따 사야도’는

다음과 같이 ‘마음지킴’이라는 번역에 대해 호감을 표한 적이 있다.

 

“[사띠에 대한 다양한 번역어들 중에서] 굳이 한 가지를 고른다면 ‘마음지킴’이 좀 더 가깝다.

사띠는 우리 마음이 대상과 일대일로 밀착돼 있는 상태로서

이 상태는 탐진치 등 번뇌가 들어올 기회를 주지 않는다.

즉 한 가지 대상에 마음이 머물러 있어 마음을 지켜주기 때문에

‘마음지킴’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가깝다.”

<현대불교> 제393호 14면 보도기사 인용]

 

그러면 이제 본론으로 돌아와 ‘마음지킴(sati)’과 사념처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마음지킴’과 사념처의 관계를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관련 경문을 인용해 본다.

 

비구들이여, 바른 마음지킴(正念)이란 어떠한가?

이 [가르침] 안에 한 비구가 있어 몸에 관련하여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身隨觀)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지킴을 지니고서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느낌(受)에 관련하여‧‧‧ 내지‧‧‧ 마음(心)에 관련하여‧‧‧ 내지‧‧‧ 法에 관련하여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法隨觀)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지킴을 지니고서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비구들이여, 이것을 바른 마음지킴이라 한다.¹¹

 

[11) “Katamā ca bhikkhave, sammāsati:

idha bhikkhave, bhikkhu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vedanāsu ‧‧‧ citte‧‧‧ dhammesu dhamm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Ayaṃ vuccati bhikkhave, sammāsati”

SN. vol.5. pp9-10; MN. vol.3. p.252; DN. vol.2. p.313 등]

 

인용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바른 마음지킴’의 실제 내용은 곧 사념처이다.

따라서 사념처의 수행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곧 ‘바른 마음지킴’의 수행이 된다.

이와 같이 마음지킴은 사념처의 수행체계 자체를 대변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사념처 수행의 원리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마음지킴’ 이외에 또 다른 용어들이 등장한다.

 

즉 “‧‧‧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지킴을 지니고서‧‧‧

(kāy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라는 내용이 그것이다.

 

거기에서 ‘열렬함을 지닌(ātāpī)’‘알아차림을 지닌(sampajāno)’‘마음지킴을 지닌(satimā)’

따위는‘[몸․느낌․마음․법을] 따라가며 보는 것(anupassī)’과 동일한 주격으로 사용되어

사념처의 수행을 가능케 하는 3가지 요인으로 설정된다.

 

그런데 이들 중에서도 맨 처음의 ‘열렬한(ātāpī)’은

사념처를 실천하는 수행자의 태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즉 열렬하게 사념처에 임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에 반해 ‘알아차림’과 ‘마음지킴’은 사념처를 이루어 나가는 실제적 기능이라 할 수 있다.¹²

[12) 졸고 <위빠싸나의 원리와 실제>

전강련 불교학술대회 논집, 전강련 불교학술대회 조직위원회 2546년 pp.76-84 참조]

 

그러한 까닭에 사념처를 일컬어 ‘알아차림’과

‘마음지킴’에 의한 수행이라고 하는 부르는 것 또한 타당하다.

 

따라서 ‘마음지킴’ 즉 ‘sati’는 사념처 자체를 나타냄과 동시에

사념처를 가능케 하는 용어로서의 이중적 성격을 지닌다.

전자를 넓은 의미의 ‘마음지킴’이라고 한다면 후자를 기능적 용어로서의 ‘마음지킴’이라 할 수 있다.

더불어 전자는 경우는 단독으로 사용되는 ‘마음지킴’의 용례가 거기에 해당되며

후자는 ‘알아차림’과 짝을 이루어 사용되는 경우라 할 수 있다.

 

2. 위빠싸나와의 관계

 

이상과 같이 ‘마음지킴’은 사념처 자체를 나타냄과 동시에

사념처를 가능케 하는 하나의 기능이기도 하다.

 

필자는 기존의 연구물에서 이러한 사념처 수행의 핵심을 마음지킴(念)과 알아차림(知)에 의해

‘몸․느낌․마음․법을 따라가며 보는 것(隨觀 anupassī)’으로 지목한 적이 있다.¹³

[13) 졸고 <대념처경의 이해> 앞의 논문집, 참조]

 

그리하여 ‘일어나고 사라지는 법을 따라가며 보는 것

(生滅隨觀 samudayavayadhammānupassī)’ 등에 의해

일체의 현상적 존재가 지닌 특성을 자각하는 데에 사념처 수행의 목적이 있음을 규명하였다.

 

‘따라가며 보는 것(隨觀)’ 즉 ‘anupassī’라는 말에서

접두어 ‘anu’는 ‘-을 따라(along, after, behind)’라고 하는 의미를 나타낸다.

 

즉 대상에 대해 거스르지 않고 그것을 수동적인 입장에서 따라가며 본다는 의미이다.¹⁴

[14) 이와 관련하여 Paṭisambhidāmagga(vol.1. p.164)에는

“들숨을 따라가는 것 그리고 날숨을 따라가는 것이 마음지킴이다

(anugacchanā ca assāsaṁ passāsaṁ anugacchanā sati)”는 문구가 있다.

‘anupassī(따라가며 보는)’ 혹은 ‘anupassanā(따라가며 보는 법)’에 상응하는 말로서 ‘anugacchanā

(따라가는 것)’라는 보다 사실적인 표현이 사용되는 경우가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현상적 존재가 지닌 본성으로서 ‘일어남’과 ‘사라짐’의 원리를 통찰하기 위해서이다.

이미 살펴보았던바 이러한 과정 전체를 일괄하여

‘마음지킴의 수행’이라 부르는 것 또한 언급했던 대로이다.

 

앞 소절의 인용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따라가며 보는 것(隨觀)’은

‘몸’이나 ‘느낌’ 등에 대한 사념처 수행의 구체적 양태를 지칭하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열렬함과 마음지킴과 알아차림’에 의해 ‘몸을 관찰하는 것’을 일컬어

‘까야누빠싸나(身隨觀 kāyanupassanā)’라 하고

‘느낌을 관찰하는 것’을 ‘웨다나누빠싸나(受隨觀 vedananupassanā)’라 한다.

 

따라서 사념처의 수행을 일컬어

‘따라가며 보는 법(anupassanā)’의 수행이라 부르는 것 또한 타당하다.

 

Nikāya의 도처에서는 이러한 ‘따라가며 보는 법(隨觀 anupassanā)’을 일컬어

‘무상을 따라가며 보는 법(無常隨觀 aniccānupassanā)’

‘소멸을 따라가며 보는 법(滅隨觀 nirodhānupassanā)'

‘달라짐을 따라가며 보는 것(變易隨觀 vipariṇāmānupassanā)’ 등으로 세분화하여 풀이한다.

 

‘까야누빠싸나(身隨觀)’ 등이 관찰되는 대상에 근거하여 ‘anupassanā’를 구분한 것이라면

‘무상을 따라가며 보는 법(無常隨觀)’과 같은 용어들은 그러한 관찰을 통해

‘체득되는 내용’에 초점을 맞추고서 ‘따라가며 보는 법(anupassanā)’를 분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들 ‘따라가며 보는 법(隨觀 anupassanā)’에 대한 2가지 분류법은

동일한 행법을 각기 다른 측면에서 분석해 들어간 것이다.

 

즉 ‘관찰의 행위’와 ‘관찰의 내용’이라는 2가지 측면에서 구분해 놓은 것이다.

그런데 이들 모두는 실제 수행에서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관찰의 행위’와 ‘관찰의 내용’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찰의 내용’에 초점을 맞춘

‘따라가며 보는 법’의 용례는 다음과 같이 사념처의 관련 경문 내에서도 발견된다.

 

이와 같이 혹은 안으로 몸[․느낌․마음․법]에 관련하여

몸[․느낌․마음․법]을 따라가며 보면서(隨觀) 머문다.

혹은 밖으로, 몸[․느낌․마음․법]에 관련하여 몸[․느낌․마음․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혹은 안팎으로, 몸[․느낌․마음․법]에 관련하여 몸[․느낌․마음․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혹은 몸[․느낌․마음․법]에서 일어나는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集法隨觀) 머문다.

혹은 몸[․느낌․마음․법]에서 사라지는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滅法隨觀) 머문다.

혹은 몸[․느낌․마음․법]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集滅法隨觀) 머문다.¹⁵

 

[15) “iti ajjhattaṃ vā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bahiddhā vā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ajjhattabahiddhā vā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Samudayadhammānupassī vā kāyasmiṃ viharati,

vayadhammānupassī vā kāyasmiṃ viharati.

Samudaya vayadhammānupassī vā kāyasmiṃ viharati.” DN. vol,2, pp.292 ff]

 

사념처의 경설에는 이러한 ‘법에 대한 관찰(法隨觀 dhammānupassī)’의

과정이 정형구의 형식으로 여러 차례 반복된다.

 

이 대목은 ‘몸’이나 ‘느낌’ 등을 매개로 하여 ‘체득되는 관찰의 내용’에 초점을 맞추고서

‘법에 대한 관찰(dhammānupassī=anupassanā)’의 과정을 풀이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법에 대한 관찰’의 과정이야말로 ‘몸에 대해 따라가며 보는 것(身隨觀)’

등의 실제 내용임과 동시에 사념처 수행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와 같이 ‘체득되는 내용’에 초점을 맞춘 용례로서의

‘법에 대한 관찰’의 과정은 Paṭisambhidāmagga에서 18가지 유형으로 정립된다.¹⁶

 

[16) “무상을 따라가며 보는 법(無常隨觀)을 철저히 알아야 한다.

고통을 따라가며 보는 법(苦隨觀)을 철저히 알아야 한다.

무아를 따라가며 보는 법(無我隨觀)을 철저히 알아야 한다.

싫어하여 떠나 따라가며 보는 법(厭離隨觀)을 철저히 알아야 한다.

탐냄을 떠나 따라가며 보는 법(離貪隨觀)을 철저히 알아야 한다.

소멸을 따라가며 보는 법(滅隨觀)을 철저히 알아야 한다.

버리고 따라가며 보는 법(捨離隨觀)을 철저히 알아야 한다.

다해 없어짐을 따라가며 보는 법(盡滅隨觀)을 철저히 알아야 한다.

사라짐을 따라가며 보는 법(衰滅隨觀)을 철저히 알아야 한다.

달라짐을 따라가며 보는 법(變易隨觀)을 철저히 알아야 한다.

드러나지 않음을 따라가며 보는 법(無因相隨觀)을 철저히 알아야 한다.

바램없이 따라가며 보는 법(無願隨觀)을 철저히 알아야 한다.

공성을 따라가며 보는 법(空性隨觀)을 철저히 알아야 한다.

탁월한 혜로써 법을 보는 법(增上慧法觀)을 철저히 알아야 한다.

있는 그대로 알아보는 법(如實智見)을 철저히 알아야 한다.

잘못됨에 대해 따라가며 보는 법(過患隨觀)을 철저히 알아야 한다.

돌이켜 관찰하여 따라가며 보는 법(省察隨觀)을 철저히 알아야 한다.

물러나 따라가며 보는 법(還滅隨觀)을 철저히 알아야 한다

(aniccānupassanā abhiññeyyā, dukkhānupassanā abhiññeyyā,

anattānupassanā abhiññeyyā, nibbidānupassanā, abhiññeyyā,

virāgānupassanā abhiññeyyā, nirodhānupassanā abhiññeyyā,

paṭinissaggānupassanā abhiññeyyā, khayānupassanā abhiññeyyā,

vayānupassanā abhiññeyyā, vipariṇāmānupassanā abhiññeyyā,

animittānupassanā abhiññeyyā, appaṇihitānupassanā abhiññeyyā,

suññatānupassanā abhiññeyyā, adhipaññādhammavipassanāya abhiññeyyā,

yathābhūtañāṇadassanaṁ abhiññeyyaṁ, ādīnavānupassanā abhiññeyyā,

paṭisaṅkhānupassanā abhiññeyyā, vivaṭṭanānupassanā abhiññeyyā)” Ps. vol.1. p.20]

 

예컨대 ‘무상을 따라가며 보는 법(無常隨觀)’이라든가 ‘고통을 따라가며 보는 법(苦隨觀)’

‘무아를 따라가며 보는 법(無我隨觀)’은 ‘몸’이나 ‘느낌’ 등을 매개로

관찰을 지속해 나아갈 때 체득되는 내용 이외에 다름이 아니다.

 

더불어 Paṭisambhidāmagga에서는 그들 ‘따라가며 보는 법’을 일괄하여

‘위빠싸나(vipassanā)’의 하위 개념으로 분류하는데 관련 경구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무상을 따라가며 보는 법(無常隨觀)은 위빠싸나의 힘이다.

고통을 따라가며 보는 법(苦隨觀)은 위빠싸나의 힘이다.

무아를 따라가며 보는 법(無我隨觀)은 위빠싸나의 힘이다.

싫어하여 떠나 따라가며 보는 법(厭離隨觀)은 위빠싸나의 힘이다.

탐냄을 떠나 따라가며 보는 법(離貪隨觀)은 위빠싸나의 힘이다.

소멸을 따라가며 보는 법(滅隨觀)은 위빠싸나의 힘이다.

버리고 따라가며 보는 법(捨離隨觀)은 위빠싸나의 힘이다.

물질적 요소(色)에 대해 무상을 따라가며 보는 법은 위빠싸나의 힘이다‧‧‧

내지‧‧‧ 물질적 요소에 대해 버리고 따라가며 보는 법은 위빠싸나의 힘이다‧‧‧

감수작용(受)에 대해‧‧‧ 내지‧‧‧

지각작용(想)에 대해‧‧‧ 내지‧‧‧

형성작용(行)에 대해‧‧‧ 내지‧‧‧

식별작용(識)에 대해…내지‧‧‧

눈에 대해‧‧‧ 내지‧‧‧

늙음과 죽음에 대해 무상을 따라가며 보는 법은 위빠싸나의 힘이다‧‧‧

내지‧‧‧ 늙음과 죽음에 대해 버리고 따라가며 보는 법은 위빠싸나의 힘이다.

 

‘위빠싸나의 힘’이라 할 때 어떠한 의미에서 위빠싸나의 힘인가?

‘무상을 따라가며 보는 법(無我隨觀)에 의해 항상함에 대한

지각(常想)에 대해 동요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위빠싸나의 힘이다.

 

‘고통을 따라가며 보는 법(苦隨觀)에 의해 즐거움에 대한

지각에 대해 동요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위빠싸나의 힘이다.

 

‘무아를 따라가며 보는 법(無我隨觀)에 의해 나(我)라는 지각에 대해

동요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위빠싸나의 힘이다.

 

‘싫어하여 떠나 따라가며 보는 법(厭離隨觀)에 의해 즐거워함에 대해

동요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위빠싸나의 힘이다.

 

‘탐냄을 떠나 따라가며 보는 법(離貪隨觀)에 의해 탐냄에 대해

동요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위빠싸나의 힘이다.

 

‘소멸을 따라가며 보는 법(滅隨觀)에 의해 일어남(集)에 대해

동요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위빠싸나의 힘이다.

 

‘버리고 따라가며 보는 법(捨離隨觀)에 의해 취착에 대해

동요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위빠싸나의 힘이다.

 

‘무명에 대해 그리고 무명을 수반하는 여러 번뇌와 구성요소에 대해

동요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으며 움직이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위빠싸나의 힘이다.

 

이것이 위빠싸나의 힘이다.¹⁷

 

본 인용구는 앞에서 언급했던 ‘체득되는 관찰의 내용’에 초점을 맞추고서

‘법에 대한 관찰’을 분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본 소절의 테마와 관련하여 이 인용문이 지니는 의의는 이들 ‘따라가며 보는 법(隨觀)’이

‘위빠싸나(vipassanā)’를 이루는 세부 요인으로 분류된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그들 모두가

“무명을 수반하는 여러 번뇌와 구성요소에 대해

동요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으며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는

위빠싸나 수행의 진행 양태로 풀이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위빠싸나’라는 용어는 사념처 자체와 관련된 직접적인 용례를

보이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념처 전체를 포괄하는 성격을 지니게 된다.

즉 사념처 수행의 핵심적 내용인

‘법에 대한 관찰(dhammānupassī)’의 실제적 내용을 포괄하는 성격을 띠게 된다.

 

이상에서 언급한 바 마음지킴과 사념처 그리고 위빠싸나의 관계를

기술 순서대로 나열․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등식이 성립된다.

 

마음지킴(念) ⇔ 사념처(四念處) ⇔ 몸․느낌․마음․법을 따라가며 보는 것(四隨觀)

⇔ 몸․느낌․마음․법에 대한 마음지킴(念)과 알아차림(知) ⇔

몸․느낌․마음․법을 매개로 한 법에 대한 관찰(法隨觀) ⇔

따라가며 보는 법의 18가지 양태(十八隨觀) ⇔ 위빠싸나(觀)

 

이미 살펴보았듯이 이들 각각의 항목은 실제적으로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즉 ‘마음지킴’과 ‘사념처’ 그리고 ‘따라가며 보는 법’ 등은

표현의 방식이 다를 뿐 동일한 내용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사념처’의 수행을 일컬어 ‘마음지킴의 수행’이라 할 수 있듯이

이들 모두를 일컬어 ‘위빠싸나의 수행’이라 부르는 것 또한 틀리지 않다.

 

사념처를 근거로 하는 남방불교의 수행법을 통칭하여 ‘위빠싸나의 수행’라고 부르는 데에는

이상과 같은 의미 맥락이 전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¹⁸

 

[18) ‘근본불교 학술대회(2002)’의 종합토론에서 ‘우빤디따 사야도’는

‘사념처의 수행’을 일컬어 ‘위빠싸나’라 부르게 된 데에는

‘따라가며 보는 법(anupassanā)'이라는 용어가 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

그와 같은 발언은 이상에서 기술한 본 고의 내용과 부합하는 것이다.

 

또한 본 고는 그러한 사야도의 언급에 대해

직접적인 문헌적 근거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III. 마음지킴과 선정(jhāna)

 

1. 선정의 예비적 단계

 

이상과 같이 ‘사념처’와 ‘위빠싸나’라는 말에 관련하여

‘마음지킴’이라는 용어가 지니는 의의와 위상에 대해 살펴보았다.

 

본 소절에서는 그러한 마음지킴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심리적 상태에서 행해지는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고찰은 심리적 동요가 가라앉은 정도를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선정의 상태’에 대한 비교를 통하는 것이 용이할 것이다.

 

따라서 편의상 ‘선정의 예비적 단계’와 ‘선정체험의 이후 단계’에 속한

각각의 용례를 중심으로 논지를 전개해 나가고자 한다.

 

먼저 ‘선정 체험 이전의 상태’에서 행해지는 마음지킴의 용례에 대해서부터 알아보기로 한다.

관련 경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세존이시여, 여인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실천해야 합니까?

아난다여, 보지말라.

 

세존이시여, 만약 보았다면 어떻게 실천해야 합니까?

아난다여, 이야기하지 말라.

 

세존이시여, 이야기할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음지킴(sati)’을 확립해야 한다.¹⁹(원문생략)

 

인용한 경구는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기 얼마 전에 행하신 말씀으로 비구 수행자들이

일상생활에서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 밝힌 것이다.

 

만약에 이 문장에서 사용된 ‘sati’가 고원한 수행체험을 겪고 난 이후에나 가능한

그러한 성격의 것이라면 초보 수행자가 갑자기 여인을 만나게 되는 경우와 같이

돌발적인 상황에서 행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위의 인용문에 등장한 마음지킴(sati)은

본격적인 수행에 진입하기 이전의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일상적인 삶 속에서 언제라도 행할 수 있는 성격의 마음지킴임에 분명하다.

 

한편 마음지킴을 우선적으로 확립한 이후에 본격적인 수행에 들어간다는

일련의 과정을 유추해 볼 수 있는 구절들이 있다.

그 대표적인 경우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비구들이여, 마치 옷에 불이 붙어 있고 머리에 불이 붙어 있어

옷과 머리(의 불을) 끄려는 것과 같이 극단적인 바램과 노력과 정진과 맹렬함과 물러남이 없는

‘마음지킴(念, sati)’과 ‘알아차림(知, sampajañña)’을 행해야 한다.

 

바로 그와 같이 비구들이여,

비구는 그러한 선한 법을 얻기 위해 극단적인 바램과 노력과 정진과

맹렬함과 물러남이 없는 ‘마음지킴’과 ‘알아차림’을 행해야 한다.

 

바로 그러한 연후에 그는 안으로 마음의 가라앉음(內心寂止)과

탁월한 혜로써 보는 법(增上慧法觀)을 얻게 된다.

 

이 인용문에 따르면 마음지킴(念)이란 알아차림(知)과 더불어

‘사마타(內心寂止)’와 ‘위빠싸나(增上慧法觀)’를 낳기 위한 수단이다.

 

또한 이 문장에서 마음지킴은 미래수동분사형의 ‘마땅히 행해야 한다(kareyya, karaṇīyaṁ)’는

말을 받고 있는데 이러한 용례는 마음지킴이 일차적으로 ‘의지적 노력의 대상’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더불어 이 문장에는 그와 같은 마음지킴을 행하고 난 연후(aparena samayena)에

‘사마타’와 ‘위빠싸나’를 얻을 수 있다는 언급까지 등장한다.

 

따라서 여기에서 말하는 마음지킴은

본격적인 선정의 상태가 발현되기 이전에 행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선정의 단계 이전에 행해지는

마음지킴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구절로 다음과 같은 경문이 있다.

 

‧‧‧ 그는 공양을 마치고 난 후, 발우를 물리고서 가부좌를 꼬고 앉는다.

몸을 똑바로 세우고 면전에 마음지킴을 확립한 후에 [앉는다].

그는 세간에 관련한 탐욕을 버리고서 탐욕이 없는 마음으로 머문다.

탐욕으로부터 마음을 정화한다.

악의와 분노를 버리고서 악의 없는 마음으로 머문다.

모든 생명들에게 이익이 되는 자비로움을 지녀 악의와 분노로부터 마음을 정화한다.

혼침과 졸음을 버리고서 혼침과 졸음이 없는 마음으로 머문다.

 

빛에 대한 지각(光明想)을 지니고 마음지킴(念 sato)과

알아차림(知 sampajañño)을 지녀 혼침과 졸음으로부터 마음을 정화한다.

 

들뜲(棹擧)과 회한(惡作)을 버리고서 차분하게 머문다.

내부적으로 가라앉은 마음으로 들뜸과 회한으로부터 마음을 정화한다.

의심을 버리고서 의심을 극복하여 머문다.

선한 법에 대해 의문을 갖는 의심으로부터 마음을 정화한다.

 

그는 이들 다섯 장애(五蓋)를 버리고서 마음의 번뇌가 약화되었을 때에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벗어나고 선하지 않은 법으로부터 벗어나 거친사유(尋 vitakka)와

미세사유(伺 vicāra)를 지닌 떠남으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을 지닌

첫 번째 선정(初禪)에 도달하여 머문다‧‧‧‧

두 번째 선정(第二禪) ‧‧‧

세 번째 선정(第三禪) ‧‧‧

네 번째 선정(第四禪)에 도달하여 머문다‧‧‧

 

인용된 내용은 Majjhimanikāya의 도처에서 발견되며 Dīghānikāya에서도 유사한 형식으로 반복된다.

인용문의 내용을 요약하면 마음지킴이란

‘첫 번째 선정’의 장애인 ‘혼침과 졸음’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그리고 그와 같은 과정을 거친 연후에 비로소 ‘첫 번째 선정’의 상태에 진입해 들어간다는 의미이다.

 

바로 이 구절은 마음지킴의 행법이 본격적인 선정의 상태가 발현되기

이전부터 행해지는 것임을 나타내는 결정적인 전거라 할 수 있다.

 

또한 이들 구절은 Nikāya의 도처에서 발견되는 까닭에

그들 모두를 후대에 삽입된 것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필자가 판단하는 바 Majjhimanikāya에서 보여지는 마음지킴의 용례는

거의 모두가 위의 인용문에 나타나는 내용과 동일한 지평에 속한다.

 

따라서 마음지킴 즉 ‘sati’라는 용어를 두고서 이것이 ‘네 번째 선정(四禪)’

이후에나 가능하다는 일부의 주장은 근거 없는 낭설에 불과하다.

 

더불어 인용문의 전반부에는

“그는 공양을 마치고 난 후 발우를 물리고서 가부좌를 꼬고 앉는다.

몸을 똑바로 세우고 면전에 마음지킴을 확립한 후에 [앉는다] ”라는 문구가 등장한다.

 

이 구절은 사념처의 수행을 대변하는

Mahāsatipaṭṭhāna-Suttanta(大念處經)에서도 똑같은 형식으로 반복된다.

따라서 이와 같은 용례들을 고려할 때 마음지킴이란 비단 ‘선정의 상태’ 뿐만이 아니라

‘사념처의 위빠싸나’를 행하기 이전부터 행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마음지킴을 우선적으로 확립한 연후에 본격적으로

사념처의 ‘몸․느낌․마음․법을 따라가며 본다(隨觀)’는 의미이다.

 

이상에서 인용한 경문들은 수행도의 전 과정에서

마음지킴이 지니는 위상과 성격을 잘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중에서도 맨 앞에서 인용한 경구는 특정 수행법과 상관없이

일상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인 반면에 뒤에서 인용한 두 경구는 본격적인

‘선정의 수행’과 더불어 ‘사념처의 수행’에 들어가기 이전에 행하는

초보적 단계의 마음지킴을 나타낸 것이다.

 

마지막으로 본 소절을 마치는 시점에서 이러한 마음지킴의 성격을

이제까지와는 좀 다른 관점에서 드러내는 구절 하나를 소개한다.

마음지킴이라고 하는 용어에 대해 치우침이 없는 이해를 도모하기 위해서이다.

관련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 그러한 모습(因相)이 아닌 선함을 갖춘 다른 모습에 대해 마음낼(作意) 때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수반한 악하고 선하지 않은 사유(尋)가 끊어지고 소멸한다.

그것이 끊어짐으로 인해 내부적으로 마음이 고정되어 가라앉고 하나가 되어 삼매에 들어간다‧‧‧

 

비구들이여,

만약에 비구가 그와 같이 선함을 갖춘 다른 모습에 대해 마음 냄에도 불구하고

성냄과 어리석음을 수반한 악하고 선하지 않은 사유가 발생한다면

 

비구들이여, 비구는 그들 사유(尋)의 잘못됨(過患)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

[그리하여] 그들 사유의 잘못됨을 살펴 볼 때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수반한 악하고 선하지 않은 사유가 끊어지고 소멸한다.

그것이 끊어짐으로 인해 내부적으로 마음이 고정되어 가라앉고 하나가 되어 삼매에 들어간다‧‧‧

 

비구들이여, 만약에 비구가 그들 사유(尋)의 잘못됨(過患)을 살펴봄에도 불구하고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수반한 악하고 선하지 않은 사유가 발생한다면

 

비구들이여,

비구는 그들 사유에 대해 마음지킴(念)과 마음냄(作意)을 행하지 말아야 한다.

 

그와 같이 그들 사유에 대해 마음지킴과 마음 냄을 행하지 않을 때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수반한 악하고 선하지 않은 사유가 끊어지고 소멸한다.

그것이 끊어짐으로 인해 내부적으로 마음이 고정되어 가라앉고 하나가 되어 삼매에 들어간다.

 

비구들이여, 비유하자면 눈을 지닌 사람이 눈에 보이는 사물을 보고 싶지 않을 때

눈을 감고서 다른 것을 떠올리는 것과 같다‧‧‧

 

인용문의 후반부에 나타나는 내용에 따르면 ‘마음의 집중(禪定 adhicitta)’을 이루기 위한

실천․수행의 과정에서 마음지킴(sati)은 상황에 따라 장애가 될 수도 있다.

그러할 경우에는 마음지킴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이 경문의 요지이다.

바로 이 대목은 마음지킴이 지닌 방편적 성격의 한 단면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실천․수행법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방편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마음지킴 역시 그 자체를 절대적인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될 일이다.

 

전체적인 수행의 도상에서 적극 행해 나가야 하는 것이지만

때에 따라서는 과감히 내려놓을 수 있는 운용의 묘미가 있어 할 것이다.

 

이상에서 거론한 마음지킴의 용례들은 모두 선정의 예비적 단계에 속한 것으로

수행의 초보자들에게 해당되는 그것으로 분류할 수 있다.

 

2. 선정체험 이후의 단계

 

이상과 같이 선정의 예비적 단계에 속한 마음지킴의 용례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모든 마음지킴이 선정을 체험하기 이전의 초보적 단계에 국한된 것은 결코 아니다.

Nikāya 상에는 ‘세 번째 선정(第三禪)’과 ‘네 번째 선정(第四禪)’에 관련한 정형구가

여러 차례 등장하는데 거기에도 역시 마음지킴이 등장한다.

관련 경구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여기에 한 비구가 있어‧‧‧]

기쁨을 떠나 평정(捨)이 머무는, 마음지킴(念)과 알아차림(知)을 지녀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거룩한 이들이 말하는 바 ‘평정과 마음지킴을 지녀 즐거움이 머문다’고 하는

세 번째 선정(第三禪)을 얻어 머문다.

 

즐거움이 끊어지고 고통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이 사라진 고통스럽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을 통한 마음지킴의 청정을 지닌 네 번째 선정(第四禪)을 얻어 머문다.

 

이 내용은 선정의 상태와 관련하여 Nikāya에서 무수히 등장하는 정형구이다.

인용문에 따르면 ‘마음지킴’은 ‘세 번째 선정’을 이루는 심리적 요인임과 동시에

‘네 번째 선정’을 특징 지우는 성격을 지닌다.

 

따라서 앞서 살펴보았던 초보적인 수행 단계의 마음지킴이

이들 선정의 상태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존속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러한 마음지킴은 ‘세 번째 선정’

이후의 상태에 국한하여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만약 이들이 ‘세 번째 선정’과 ‘네 번째 선정’의 상태에 한정되어 작용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앞 소절에서 살펴보았던 “마음지킴과 알아차림을 행한 연후에 안으로

마음의 가라앉음과 탁월한 혜로써 보는 법을 얻게 된다”는 내용과 모순된다.

 

따라서 그 이전의 단계에서부터 지속적으로 작용하던 마음지킴이

‘세 번째 선정’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언급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필자는 ‘첫 번째 선정(初禪)’의 상태에서 기능하는

마음지킴의 용례로서 다음의 구절을 지목한다.

 

존자여,

어떻게 해서 삼매 수행의 닦음과 행함으로부터

마음지킴(念)과 알아차림(知)[에 의한 위빠싸나]로 나아가는가?

 

이러한 [선정] 안에서 비구에게 ‘감지되는 것(viditā)’으로서 느낌(受 vedanā)이 일어난다.

감지되는 것으로서 [느낌이] 드러난다.

감지되는 것으로서 [느낌이] 사라진다.

감지되는 것으로서 ‘지각(想, saññā)’이 일어난다.

감지되는 것으로서 [지각이] 드러난다.

감지되는 것으로서 [지각이] 사라진다.

감지되는 것으로서 ‘거친사유(尋 vitakkā)’가 일어난다.

감지되는 것으로서 [거친사유가] 드러난다.

감지되는 것으로서 [거친사유가] 사라진다.

 

존자여,

이와 같이 삼매 수행의 닦음과 행함으로부터 마음지킴과 알아차림[에 의한 위빠싸나]로 나아간다.

 

인용문의 후반부에 나타나는 ‘거친사유(尋 vitakkā)’는

‘첫 번째 선정’의 상태에서만 나타나는 심리작용의 하나이다.

 

따라서 본 인용문에 나타나는 마음지킴은 ‘첫 번째 선정’의 상태와 긴밀한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더불어 Majjhimanikāya의 Anupadasutta에서는

그러한 선정의 단계에 속한 마음지킴의 용례를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이 [가르침] 안에서 사리뿟따는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벗어나고 선하지 않은 법으로부터 벗어나

‘거친사유(尋)’와 ‘미세사유(伺)’를 지닌, 떠남으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을 지닌

‘첫 번째 선정(初禪)’에 도달하여 머문다.

 

그러한 ‘첫 번째 선정’에는 거친사유(尋)․미세사유(伺)․기쁨(喜)․즐거움(樂)․

하나 된 마음(心一境性)․접촉(觸)․느낌(受)․지각(想)․의도(捨)․마음(心)․의욕(欲)․확신(勝解)․

정진(精進)․마음지킴(念)․평정(捨)․마음냄(作意) 등의 법이 있는 바‧‧‧

 

본 인용문은 ‘첫 번째 선정’의 상태에서 작용하는 마음지킴의 용례를 직접 확인시켜 준다.

Anupadasutta에 나타나는 바 ‘첫 번째 선정’의 상태를 이루는 심리적 요인으로서 ‘거친사유(尋)’

‘미세사유(伺)’ ‘기쁨(喜)’ ‘즐거움(樂)’ 등은 선정이 깊어짐에 따라 차츰 감소되는 추세를 보인다.

 

즉 ‘두 번째 선정’에서는 ‘거친사유’와 ‘미세사유’가 사라지고 ‘세 번째 선정’에서는 ‘기쁨’이,

그리고 ‘네 번째 선정’에서는 ‘즐거움’이 배제되는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Anupadasutta는 그들 각각의 선정 상태에서

마음지킴이라는 기능만큼은 한결같이 유지된다는 점을 밝힌다.

 

즉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空無邊處)’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識無邊處)’

‘아무것도 없는 경지(無所有處)’ 등에 이르기까지 마음지킴은 한결같이 유지되는 것으로 언급된다.

 

따라서 앞 소절에 살펴보았던바 마음지킴은 선정의 예비적 단계에서부터

무색계의 선정에 이르기까지 지속됨을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선정의 과정에서 보여 지는 마음지킴의 용례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제 다음 순서로서 그러한 선정체험을 마친

연후의 단계에서 나타나는 마음지킴의 용례에 대해 살펴본다.

 

초기불교의 수행론에 따르면 모든 선정체험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과정으로서의 의의를 지닌다.

따라서 선정체험을 마친 연후의 단계로는 ‘나아감(magga)’의 경지를 지목할 수 있다.

‘나아감의 경지’란 다름 아닌 깨달음의 깊이를 단계별로 구분해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초기불교에서는 이러한 ‘나아감’을 체득한 이를 ‘4쌍의 8무리

(四雙八輩 catasso purisayugāni aṭṭhapurisapuggalā)’에 포함시키는데

이 경지에서부터는 일반적으로 ‘거룩한 이(聖 ariyā)’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이들 나아감(道)에는 ‘흐름에 들어섬으로 나아감(預流道)’ ‘한번 돌아옴에 나아감(一來道)’

‘돌아오지 않음에 나아감(不還道)’ ‘아라한에 나아감(阿羅漢道)’ 등이 있다.

 

초기불교의 수행체계 내에서 최후의 관문이라 할 수 있는 나아감의 경지에서 보여지는

마음지킴의 용례로서 Paṭisambhidāmagga의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흐름에 나아가는 경지(預流道)에서는…,

한번 돌아옴에 나아가는 경지(一來道)에서는…,

돌아오지 않음에 나아가는 경지(不還道)에서는…,

아라한에 나아가는 경지(阿羅漢道)에서는…

또한 거친사유(尋)가 수반되고 미세사유(捨)가 수반되고 기쁨(喜)이 수반되고

즐거움(樂)이 수반되고 마음굳힘(攝持)이 수반되고 믿음(信)이 수반되고 정진(勤)이 수반되고

마음지킴(念)이 수반되고 삼매가 수반되고 혜가 수반된다.

 

인용문에 나타나는 4가지 나아감의 경지는 그들 각각에 상응하는

4가지 성취의 경지(果 phala)’로 진입하기 위한 과도적 상태이다.

 

주석서에서는 ‘나아감의 경지’에서 ‘성취의 경지’로 이어지는 과정을 찰라적인 것으로 설명한다.

따라서 어떤 이가 나아감의 경지에 도달했다면

그는 곧 성취의 경지를 이미 확보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인용문은 바로 그러한 나아감의 경지가 앞에서 언급했던

‘첫 번째 선정’과 유사한 심리적 상태에서 진행됨을 나타내고 있다.

 

바로 이 대목을 통해 ‘무명’을 타파하고 ‘번뇌’를 제거하는데 있어

깊은 선정의 상태에 몰입해 있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 마음지킴의 용례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①마음지킴이란 선정의 상태가 발현되기 이전부터 기능한다.

②마음지킴은 ‘첫 번째 선정’에서부터 ‘아무것도 없는 경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존속한다.

③마음지킴은 ‘흐름에 나아감의 경지’를 위시하여

‘아라한에 나아가는 경지’에 이르기까지 존속한다.

 

이상과 같이 마음지킴이란 모든 영역의 수행 단계에서 한결같이 존속하는 것임을 확인하였다.

그런데 이제까지 살펴본 마음지킴의 용례는

궁극적인 경지에 도달하기 이전의 상태에 한정된다고 할 수 있다.

 

즉 ‘선정의 상태’이든 ‘나아감의 경지’이든 간에

‘궁극적인 경지를 성취한 이’들의 그것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지금부터는 ‘수행을 완성한 이(阿羅漢)’에게서 보여지는

마음지킴의 용례를 끝으로 본 고를 매듭짓고자 한다.

 

이와 관련하여 경전상에는 ‘수행을 완성한 이’를 대신하는 말로서

‘탐욕을 떠난 이(vītarāga)’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관련 경문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세존께서 열반에 드시자

‘탐욕을 떠나지 못한(avītarāgā)’ 비구의 무리들은 팔을 높이 쳐들고 슬퍼했다.

절벽에 [몸을] 내던지거나 앞으로 구르거나 뒤로 굴렀다.

 

‘세존께서 너무나 빨리 열반에 드셨다.’

‘잘 가신 이께서 너무나 빨리 열반에 드셨다.’

‘세간의 눈이 너무나 빨리 사라졌다’[고 울부짖으면서].

그러나 ‘탐욕을 떠난(vītarāgā)’ 비구들은 ‘마음지킴’과 ‘알아차림’을 지니고서 견디었다.

‘일체의 현상(saṅkhāra)은 무상하다. 바로 이것을 어디에서 얻겠는가’고 [생각하면서]

 

인용된 내용은 ‘수행을 완성한 이’들이 극도의 슬픔에 임했을 때

어떻게 이를 극복하는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여기에서 마음지킴은 정신적 고통을 이겨내는 요인으로 기능하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마음지킴은 육체적 고통을 극복하는 데서도 다음과 같이 등장한다.

 

세존께서는 대장장이 아들 춘다의 공양을 드시고서 격심한 이질을 앓으셨다.

죽음에 이를 정도의 강렬한 통증이 일어났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마음지킴’과 ‘알아차림’을 지녀 고난을 당하지 않고 견디셨다.

 

여기에서 인용한 두 가지 사례는 육체적․정신적 고통의 극복과 관련하여

등장하는 마음지킴의 용례들이다.

 

Mahāparinibbāna-Suttanta(大般涅槃經)에서는 이러한 마음지킴에 의해

육체적․정신적 고통을을 극복하는 사례가 6회 이상 언급된다.

이들 문구는 ‘수행을 완성한 이’들이 일상적인 삶에서 행하는 마음지킴의 용례를 묘사한 것이다.

 

한편 경전상에는 일상적인 삶에서 뿐만이 아니라 죽음에 임하는 순간이라든가

죽고 난 이후에 다른 생을 선택할 때에도 마음지킴으로써 행한다는 내용들이 기술되어 있다.

관련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아난아,

그와 같이 보살은 도솔천에서 몸이 죽고 난 후

마음지킴(念)과 알아차림(知)을 지니고서 어머니의 자궁에 들어갔다‧‧‧

 

아난아,

그와 같이 보살은 마음지킴과 알아차림을 지니고서 어머니의 자궁 밖으로 태어났다‧‧‧‧‧

 

아난아,

그와 같이 여래는 마음지킴과 알아차림을 지니고서 목숨의 형성력(命行)을 포기한다‧‧‧

 

인용된 내용은 마음지킴이 과연 어떠한 범위에 이르기까지

기능할 수 있는가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들 내용은 일상적인 삶의 영역을 벗어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와 같은 경지에 이르기까지 존속하는 마음지킴은 평범한 범부의 삶에서부터

고원한 聖者의 삶을 걸쳐 심지어는 삶과 죽음의 접점에 이르기까지 지속되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IV. 마치는 말

 

이상과 같이 마음지킴의 용례와 쓰임을 살펴보았다.

제I장의 ‘시작하는 말’에서는 필자는 마음지킴(sati)라는 용어에 관련한 그간의 논의에

적극 가담한 당사자로서 이 문제에 대한 나름의 정리가 요구되는 시점이 도래했음을 언급하였다.

 

그리고 본 고를 통해 정리된 내용을 필자 자신의 최종적인 견해로 삼을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더불어 본 고는 그간의 연구 성과를 근거로 하면서

새롭게 부각된 몇 가지 사항들을 첨가하는 형식을 취할 것임을 밝혔다.

 

제II장의 ‘마음지킴의 위상’에서는 이 용어가 ‘사념처’와는 어떤 관계에 있으며

또한 ‘위빠싸나’라고 하는 말과는 어떠한 관련이 있는가에 대해 조명하였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즉 “마음지킴(念) ⇔ 사념처(四念處) ⇔ 몸․느낌․마음․법을 따라가며 보는 것(四隨觀)

⇔ 몸․느낌․마음․법에 대한 마음지킴(念)과 알아차림(知) ⇔

몸․느낌․마음․법을 매개로 한 법에 대한 관찰(法隨觀) ⇔

따라가며 보는 법의 18가지 양태(十八隨觀) ⇔ 위빠싸나(觀)”가 그것이다.

 

이러한 필자의 이해는 ‘마음지킴’과 ‘사념처’ 그리고 ‘따라가며 보는 법’과

‘위빠싸나’에 관련한 경전의 설명에 의거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미얀마의 ‘우빤디따 사야도’는 ‘사념처’를 일컬어 ‘위빠싸나’라고 부르게 된 데에는

‘따라가며 보는 법’ 즉 ‘anupassanā’라는 용어가 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밝힌 적이 있다.

본 고는 사야도의 그러한 말씀에 대해 직접적인 전거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나름의 의의를 지닌다.

 

제III장의 ‘마음지킴과 선정’에서는 이와 같은 마음지킴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심리적 상태에서 행해지는가를 살펴보았다.

 

그리하여 ‘선정의 예비적 단계’와 ‘선정체험 이후의 단계’로 구분하여

그것의 용례를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이들 중에서 특히 1절의 ‘선정의 예비적 단계’ 후반부에는

이제까지의 연구에서 거론한 적이 없는 용례가 포함되어 있다.

 

즉 “마음지킴과 마음 냄을 행하지 말아야 한다(asati amanasikāro āpajjitabbo)”는 표현이 그것이다.

이 인용구는 마음지킴이라는 용어의 방편적 성격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본 고에서 살펴본 마음지킴의 용례를 선정체험과의 관계 속에서

재분류하면 다음과 같이 4단계로 정리할 수 있다. 그것은

①선정체험 이전의 단계,

②본격적인 선정의 단계,

③나아감(道)의 단계,

④수행을 완성한 이후의 단계이다.

 

이들 각각의 단계에서 보여지는 용례는

마음지킴의 성격과 적용범위에 관련하여 많은 점을 시사한다.

 

이들 중에서 특히 ①②③에 나타나는 용례는 ‘sati’라는 것이 ‘네 번째 선정’ 이후에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일부의 주장에 대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확인케 하는 것이다.

 

더불어 ④에서 보여지는 용례에는 마음지킴이라는 것이 비단

‘현실적인 삶의 영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의미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 주목을 끈다.

 

특히 이 부분은 기존의 연구물에서 충분히 다루지 못했던 것으로

또 다른 별도의 연구의 소재가 되기에도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