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經/비파사나 수행

사띠(念 sati) 개념의 현대적 해석 양상에 대한 재검토

사띠(念 sati) 개념의 현대적 해석 양상에 대한 재검토

/임승택 경북대 철학과

2014-01-21 00:50:42

 

Ⅰ 시작하는 말

 

붓다(Buddha)는 탐욕이라든가 아집과 같은

번뇌에 사로잡힌 상태를 정신적 질환의 일종으로 간주하였다.¹

따라서 그의 가르침은 마음의 병을 다스리기 위한 치료적 성격을 띤다.

사띠(念 sati)는 바로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 고안된 불교 명상의 핵심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1) 붓다는 번뇌가 제거된 아라한을 제외한

모든 인간들을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환자로 보았다.

다음의 경구가 그것을 나타낸다.

“비구들이여,

신체적 질병에서 1년, 2년, 3년··· 10년, 20년···

100년 동안 자유롭다고 인정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아라한을 제외하고는 단 한 순간도 정신적 질병에서

자유롭다고 인정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AN. II. 143쪽;

최훈동(2006)<지관의 심리치료적 의미고찰> <불교와 심리 심포지엄 자료집> 32쪽 재인용]

 

한편 서구의 심리치료 역시 정서적 괴로움이라든가

신경증과 같은 마음의 질병을 해소하고자 발달해 왔다.

 

이제 명상과 심리치료라는 두 영역은 긴밀한 교섭 관계에 있으며 특히 최근 개발된

일련의 심리치료 프로그램들에서 나타나는 양자의 유사성은 간과할 수 없는 수준이다.

 

Paul R. Fulton과 Ronald D. Siegel은 사띠와 현대의 심리치료 사이에는

최소한 두 가지 분명한 관계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²

 

첫째, 사띠는 정신적 괴로움을 완화시키기 위해 고안된

정교한 실천 방법으로서 서양의 심리치료와 충분히 비교․대조될 수 있다.

 

둘째, 사띠는 현재의 경험을 수용적 태도로 알아차리는 심리적 기능으로 이것은

서양 심리학과 불교 명상 양자 모두에 대해 공통적으로 기여하는 요인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러한 언급은 동양과 서양의 이질적인 접근법 속에서 사띠 기법이

공히 그 중요성을 인정받기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아비달마(Abhidharma)의 분석에 따르면 사띠란 심리적 요인(心所 cetasika)의 하나이다.³

그런데 이것은 여타의 심리적 요인들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예컨대 탐욕이나 분노 따위의 부정적인 심리적 요인들을 지긋이 주시하다 보면

그들이 저절로 누그러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이러한 사띠에 대해 내려지는 일반적 정의는

“특정한 대상을 지속적으로 관찰하거나(anupassī)

따라가는 것(anugacchanā)으로서 마음의 방황을 멈추게 하는 것”이다.⁴

 

이러한 개념 규정은 불교 문헌에 근거한 것으로 대부분의 불교학자들에게 용인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현대의 심리치료에서는 과학적 방법론에 입각하여 이것에 대해 접근해 들어간다.

 

즉 사띠의 치료적 효능을 임상적으로 입증하는 것에 주력하며 또한 그렇게 해서 얻어진

데이터를 근거로 경험적으로 유용한 조작적 정의(operational definition)를 시도한다.

이러한 접근은 종교적 색채를 배제하고 그 실용적 가치만을 따진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이 과연 온당한지에 대해서는 엄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

 

장구한 세월에 걸친 전래의 과정에서 이러한 방식으로

사띠의 용도가 한정된 사례는 없었던 듯하기 때문이다.

사띠는 병증의 치료를 위해 개발된 것이 아니라

깨달음이라는 종교적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제시된 방법이었다.

 

그간 시도된 명상과 심리치료의 교섭은 심리학자

혹은 심리치료자들에 의해 주도되는 편중된 양상을 보였다.

즉 불교학 전공자들 중에서 여기에 관심을 기울인 경우는 많지 않았다.

따라서 현재의 인력 구성에서 드러나는 쏠림 현상은 개선될 필요가 있다.

인적 구조의 불균형이 연구 내용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심리치료자들은 사띠를 가시적인 치료적 효능에 제한하려는 경향을 보인다.⁵

 

그러나 문헌학적 입장에서는 이것의 용례가 여타의 심리적 요인들을 다스리는 용도뿐만 아니라

계율(sīla)의 준수와 같은 처신의 문제에서까지 광범위하게 나타난다는 점을 간과하지 않는다⁶

이점을 고려할 때 심리치료자가 이해하는 사띠와 불교학자가 생각하는 그것은 다를 수 있다.

 

전통적인 불교 명상은 2500년에 이르는 오랜 세월에 걸친 검증의 과정을 통과했다.

거기에는 일시적인 병증의 완화 차원을 넘어선 영속적이고 근본적인 치유책들이 담겨 있을 수 있다.

 

이러한 부분들을 밝혀내고 규명하는 작업은

불교학 전공자들이 효과적으로 수행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급변하는 현대 사회에서 전통적인 명상 기법이

유일무이한 만병통치약으로 남아 있을 수만은 없다.

 

바로 이점과 관련하여 기존의 방법들에 내포되어 있을 수 있는 문제점과 한계를 들추어내는 데서는

심리학이나 심리치료를 전공하는 이들이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불교 명상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파생된 문제와

갈등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다.

이러한 취약점은 현대 심리치료의 도움을 통해 보완되거나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⁷

 

[7) 명상과 현실 삶의 조화 문제를 다룬 주목할 만한 문헌으로는 잭 콘필드(이균형 옮김)의

<깨달음 이후 빨랫감>(서울: 한문화, 2006)이 있다. 특히 이 책은 인간간의 관계 문제에서

전통 명상이 현대 심리치료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잘 묘사하고 있다.]

 

과학적 방법론에 기초한 현대의 심리치료는 전래의 명상이 지닐 수 있는

비효율적인 측면들을 극복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장구한 생명력의 불교 명상은 현대의 치료 기법들에 대해

그 내구성을 보완해주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명상과 심리치료는 서로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양 방향에 걸친 연구의 누적은 그들 모두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

문제점을 색출하고 해소하는 데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본 연구는 이러한 취지에서 의도된 것으로 동서양의 이질적인 접근법들 속에서

공히 그 중요성을 인정받는 사띠 개념에 일단의 초점을 모은다.

 

이것에 대한 기존의 논의들을 재검토하고 그간의 문제점을 진단하는 속에서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올바른 활용 방안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Ⅱ. 기존의 논의에 대한 재검토

 

본 소절에서는 그간 불교학 연구자들에 의해 논의되었던

사띠(念 sati) 개념에 대해 재검토하고자 한다.⁸

 

[8) 이에 관한 국내 연구자들의 논의 동향은 임승택의

<마음지킴(sati)의 위상과 용례에 대한 재검토>(2003)와

<사띠(sati)의 의미와 쓰임에 관한 고찰>(2001) 등에 상세히 소개되어 있다.

 

한편 이후 발표 논문으로는 정준영의 <대염처경에서 보이는 수념처의 실천과 이해>(2003)와

조준호의 <간화선과 위빠싸나: 교리적 연결고리를 위한 탐색>(2008) 등을 주목할 만하다.]

 

이것은 그러한 논의들이 심리치료 분야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간과할 수 없다.

 

이제까지 시도된 사띠에 대한 불교적 논의의 대부분은

관련 문헌들에 근거한 개념 규정의 문제에 집중되었다.

 

그러한 논의의 이면에는 실제 수행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 전제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것에 대한 불교학 연구자들의 견해 차이는 현격했다.

그러한 만큼 일반인으로 하여금 오해와 혼돈을 조장한 측면이 없지 않다.

 

사띠 개념에 관한 그간의 논쟁은 크게 세 측면으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는 이 용어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번역의 문제는 개념에 대한 이해의 정도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둘째는 사띠라는 심리적 요인(心所)이 작용하는 영역의 문제에 관련된다.

특히 이 부분에서의 입장 차이는 사띠의 수행론적 위상과 관련하여 치열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마지막은 사띠가 실제 수행에서 어떠한 맥락으로 사용되는가의 문제이다.

이것은 사띠 기법이 다른 여타의 수행 혹은 명상 방법과

어떠한 관련을 지닐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로 확대되는 성질을 지닌다.

 

먼저 번역의 문제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현재 국내에서 이 용어에 대해 가장 널리 사용되는 번역은 ‘마음챙김’이다.

 

이 번역은 가장 먼저 시도된 우리말 번역으로 여겨지며

공식적인 용어로 정착되어 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⁹

 

그러나 이 번역어는 충분한 학술적 검토가 없이 채택․보급된 것이라는 점에 문제가 있다.

더욱이 이것은 아무런 문헌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할 뿐만이 아니라 유사한 용례마저 찾을 수 없다.

이점은 ‘마음지킴’이라는 또 다른 번역이 守意라든가 意止와 같은 번역 용례를 지니며

“눈 따위의 [감각의] 문을 지키므로 문지기와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cakkhudvārādirakkhaṇato dovāriko viya ca daṭṭhabā)”는

경전적 해설에 근거한다는 사실과 대조를 이룬다.¹⁰

 

마음챙김은 ‘챙기다’에 기원을 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자신의 몫을 챙긴다’라든가 ‘자기 식구를 챙긴다’와 같이

자신에게 딸린 무엇인가를 ‘소유하고 저장하고 아낀다’는 의미가 내포된다.¹¹

 

이러한 뉘앙스는 사띠의 기능이 있는 그대로(yathātaṁ)의 현상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탐욕과 집착이 제거되게끔 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충분히 문제시 될 수 있다.

 

즉 사띠는 가치 중립적 입장에서 행해지는 주의 작용이라는 점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결론적으로 ‘챙긴다’는 표현은 내면의 욕구나 감정을 배제하지 못하는 까닭에

사띠의 온전한 의미를 담아내기에 적합하지 않다.

 

한편 마음챙김은 ‘마음을 챙긴다’와 ‘마음으로 챙긴다’의 두 가지로 풀이할 수 있다.

그러나 어느 경우를 선택하더라도 곤란한 문제가 발생한다.

전자는 마음을 챙김의 대상으로 상정하여 일종의 소유물로 고착화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후자는 마음을 도구로 삼아 ‘특정한 현상을 챙긴다’는 의미가 된다.

그런데 이것 역시 그러한 현상에 대해 탐욕과 집착을 조장할 소지가 있다.

따라서 안팎의 현상에 대해 무상․무아로의 자각을 유도하는

사띠의 본래 취지와 부합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다시 한 번 확인된다.

 

마음챙김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이 사용되는 번역은 ‘알아차림’일 것이다.

이 번역은 실제 수행과 관련하여 사띠의 쓰임을 용이하게 드러내는 장점을 지닌다.

 

예컨대 <大念處經>에는 몸(身) 느낌(受) 마음(心) 法에 대한

사띠 수행의 과정을 총괄하는 四念處가 제시된다.¹²

거기에서 사념처란 4가지 대상을 끊임없이 ‘알아차리는 것(pajānāti)’에 다름이 아니다.

즉 몸(身)과 관련해서는 “‘[숨을] 길게 마신다’고 알아차린다.(dīghaṃ assasāmīti pajānāti)”라든가

“‘[숨을] 짧게 내쉰다’고 알아차린다.(rassaṃ passasāmīti pajānāti)”라는 표현이 나타나며

느낌(受)과 관련해서는 “‘즐거운 느낌을 느낀다’고 알아차린다.

(sukhaṃ vedanaṃ vediyāmī ti pajānāti)”는 따위의 표현이 반복된다.

 

이러한 표현들에 근거할 때 사띠는 ‘알아차리는 것’과 통한다.

그러나 이 번역은 삼빠쟌냐(sampajañña)라는

또 다른 유사 개념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재고의 여지를 남긴다.

 

삼빠쟌냐란 빠자나띠(pajānāti 알아차리다)라는 동사에 삼(sam 바르게)이라는

접두어가 첨가된 명사로서 바로 이것이 우리말 ‘알아차림’에 해당하는 그것이다.¹³

 

[13) 삼빠쟌냐(sampajañña)와 빠자나띠(pajānāti)는 동일하게 ‘알아차림’의 의미를 지니는데

명사형이 요구되는 경우에는 전자가 사용되고 동사형이 요구될 경우에는 후자가 사용된다.

예컨대 <대념처경>에서는 몸의 행동에 관해

“나아갈 때나 물러날 때 알아차림으로 행한다(abhikkante paṭikkante sampajānakārī hoti)”

라는 방식으로 삼빠쟌나를 사용하고 몸의 호흡에 관련해서는

“‘길게 마신다’고 알아차린다.(dīghaṃ assasāmīti pajānāti)”라는

형태로 빠자나띠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것은 ‘알아차림을 행한다(sampajānakārī hoti)’는 것과 ‘알아차린다(pajānāti)’는

표현이 실제적으로 동일한 것임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삼빠쟌냐(sampajañña)는 명사인 반면에

삼빠자나(sampajāna)는 형용사라는 점에도 유의할 필요가 있겠다]

 

이 용어와 관련하여 <대념처경>에는

“열렬함과 삼빠쟌나와 사띠를 지니고서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 머문다.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는 표현이 등장하는데¹⁴

 

바로 이것은 사념처의 요인을

① 열렬함(ātāpī) ② 삼빠쟌냐(sampajāno) ③ 사띠(satimā)의 3가지로 명시한 것이다.

따라서 사띠는 삼빠쟌냐와 구분되어야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니까야>의 여러 곳에서 삼빠쟌냐와 사띠는 서로 다른 요인으로 구분되는 용례를 보인다.

또한 양자는 하나의 세트로 취급되어 동시에 거론되는 것이 일반적이다.¹⁵

 

[15) 예컨대 다음의 경문을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다.

"어떻게 삼매 수행의 닦음과 행함으로부터

사띠(念)과 알아차림(知)[에 의한 위빠싸나]로 나아가는가?

(Katamā cāvuso samādhibhāvanā bhāvitā bahulīkatā satisampajaññāya saṃvattati?)”

DN. II. 223쪽; AN. II. 45쪽; AN. IV. 168쪽; SN. V. 180-181쪽 등]

 

그 경우 사띠는 ‘잊지 않음(asammoha)’을 주된 기능(rasā)으로 하면서

특정한 대상을 향해 지속적으로 주의를 기울여 나가는 작용을 지시하게 된다.

 

한편 삼빠쟌냐는 그렇게 해서 얻게 된 알아차림 자체를 가리키게 된다.

다시 말해서 사띠는 알아차림이 가능하도록 유도하는 원인이며

삼빠쟌냐는 그 결과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결론적으로 사띠를 단순히 알아차림으로 옮기는 것은

그러한 내적 과정을 도외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마음지킴’이라는 번역에 대해 살펴본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 번역은 守意라든가 意止와 같은 유사 번역 용례를 지니며

“문지기와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해설에 근거해 있다.

 

그간 국내에서는 이 용어에 대해 수많은 번역이 사용되어 왔지만

이러한 방식으로 그 경위를 밝힌 경우는 없었다.

그러한 점에서 이 번역은 적합성의 여부를 떠나 일단 권장할 만한 시도로 여겨진다.

 

더욱이 현재 남방불교의 위빠사나 수행계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우 빤디따 사야도(U Pandita Sayadaw)는 이 번역에 대해 다음과 같은 호감을 표한 사실이 있다.

 

[사띠에 대한 다양한 번역어들 중에서]

굳이 한 가지를 고른다면 마음지킴이 좀 더 [원래의 의미에] 가깝다.

 

사띠는 우리 마음이 대상과 일대 일로 밀착돼 있는 상태로서

이 상태는 탐냄․성냄․어리석음 등의 번뇌가 들어올 기회를 주지 않는다.

즉 한가지 대상에 마음이 머물러 있어 마음을 지켜주기 때문에

마음지킴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원래의 의미에] 가깝다.¹⁶

 

마음지킴이라고 할 때 ‘지킴’이란 ‘지키다’에 근거를 둔다.

이것의 사전적 의미는

① 잃지 않도록 살피다. 수호하다.

② 눈여겨보다. 조심하여 보살피다.

③ 절개나 정조를 굽히지 않고 굳이 지니다.

④ 약속, 규칙, 법, 예의 등을 어기지 않고 그대로 준수하다”이다¹⁷

 

이러한 마음지킴 또한 ‘마음으로 지킨다’와 ‘마음을 지킨다’의 두 가지로 풀이 할 수 있다.

여기에서 ①과 ②를 전자에 적용하면 ‘마음으로 잊지 않고 살피는 것’

혹은 ‘마음으로 눈여겨보는 것’이 되며, 후자에 적용하면 ‘마음을 잊지 않고 살피는 것’

혹은 ‘마음을 눈여겨보는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이러한 측면들을 고려할 때 마음지킴이라는 번역은

사띠의 본래 의미와 쓰임을 비교적 원만하게 반영해 준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Lous O. Gomez는 사띠의 용례가

계율(sīla)의 준수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였다.¹⁸

 

③과 ④는 바로 그러한 경우를 충족시킨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청정도론>에서는 이 용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그것에 의해 [다른 사람들이] 기억하거나 혹은 스스로 [다른 사물을] 기억한다.

혹은 단지 기억 자체를 사띠라 한다.

이것은 들뜨지 않음을 특징으로 하고 잊지 않는 것을 기능으로 한다.

보살피는 것을 나타남으로 하고 대상에 직면한 상태를 나타남으로 한다.

견고한 지각을 직접적인 원인으로 하고 몸 따위에 대한 사띠의 확립을 직접적인 원인으로 한다.

대상에 대해 확고히 서는 것이므로 기둥과 같은 것이며

눈 따위의 [감각의] 문을 지키므로 문지기와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¹⁹

 

앞에서 언급한 우리말 번역을 여기에 적용하면

우선 알아차림이라는 말은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인용문의 어디에도 이것이 알아차림을 의미한다는 언급은 없다.

한편 마음챙김은 알아차림보다 적합한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도 ‘대상에 직면한 상태(visayābhimukhabhāva)’라든가

‘견고한 지각(thirasaññā)’ 따위를 충실히 담아내지는 못한다.

이들에 비해 마음지킴은 전체 내용을 빠짐없이 포괄하는 장점을 지닌다.

 

특히 이것은 ‘대상에 대해 확고히 서는 것(ārammaṇe daḷhapatiṭṭhitattā)’이라든가

‘문지기(dovāriko)’ 따위를 적절히 반영하고 있다.

 

마음지킴은 마음챙김이 이미 보급된 연후에 고안되었다.

따라서 그 그늘에 가려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또한 특별히 나은 번역으로 여겨지지도 않는 듯하다.

그러나 새로운 번역이 친숙하지 않다고 해서 그 적합성마저 간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예컨대 양자에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평가가 있다.

 

마음챙김이 마음지킴보다 더 잘 어울리는 것으로 보인다.···

개인적으로 ‘마음지킴’이라고 하면 뭔가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엄숙하고 비장해지는 것 같고

‘마음챙김’이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정신을 차리는 느낌이 든다.²⁰

 

그러나 초기경전 내에서 사띠는 문지기(dovāriko) 이외에도 indriyasaṁvara(감관의 억제)

indriyasaṃyutta(감관의 통제) indriyesu guttadvāro(감관의 문을 지킨)

indriyesu guttadvāratā(감관의 문을 지키는 것)

‘rakkhati cakkhundriyaṃ(눈의 감관을 지킨다)’ 등과 함께 사용되는 용례를 보이곤 한다.²¹

 

이것은 사띠가 ‘지키는 일’을 주요 임무로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점을 고려할 때 “뭔가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엄숙하고 비장해지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 오히려 사따의 본래적 측면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제 두 번째 논점으로서 사띠의 위상에 관한 논쟁으로 넘어간다.

이것은 사띠가 과연 어떠한 심리 상태에서 작용하느냐에 관한 것으로

연구자들 간에 치열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것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하여 제기된 독특한 주장의 하나는

“사띠란 네 번째 선정(第四禪)의 단계를 거친 연후라야 비로소 완성된다.”는 것이다.²²

 

이 입장에 따르면 사띠란 주관적인 감정이 가라앉은 상태에서 행해지는 것이며

모든 존재가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 경지에 다름이 아니다.

따라서 여기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에서 행해지는 사띠를 논하는 것은

그것의 온전한 의미를 훼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이미 몇 차례 지적되었다시피 Anupadasutta라든가 Paṭisambhidāmagga 등에는

첫 번째 선정(初禪)의 단계에서부터 사띠가 행해진다는 내용이 나타난다.²³

 

그러한 가르침들은 사띠 행법이 고원한 선정의 상태에 국한될 수 없음을 드러낸다.

더욱이 <사문과경>에는 계의 구족(sīla-sampanna) → 사띠와 삼빠쟌냐(sati-sampajañña)의 실행

→ 다섯 장애의 제거(pañca-nīvaraṇā-pahīnā) → 첫 번째 선정(paṭhamajjhāna)

→ 두 번째 선정(dutiyajjhāna) → 세 번째 선정(tatiyajjhāna) →

네 번째 선정(catutthajjhāna) 등의 일련의 수행 단계가 구체적으로 묘사된다.²⁴

 

또한 해당 경전의 후반부에는 뒤에 등장하는 단계들이 앞서 묘사된 단계들보다

더욱 뛰어나고(abhikkantatara) 수승한 것(paṇītatara)이라는 설명이 뒤따른다.²⁵

 

[25) 예컨대 ‘첫 번째 선정’에 관한 설명이 있고 난 연후에

“대왕이여 이것이 현생에서 [얻을 수 있는] 사문의 공덕으로서 앞에서

[설명한] 현생에서 [얻을 수 있는] 사문의 공덕보다 더욱 뛰어나고 수승한 것이다

(Idampi kho mahārāja sandiṭṭhikaṃ sāmaññaphalaṃ purimehi

sandiṭṭhikehi sāmaññaphalehi abhikkantatarañca paṇītatarañca)”라는 언급이 뒤따른다.

이러한 언급은 두 번째 선정 → 세 번째 선정 →네 번째 선정 등에

관한 설명이 있고 난 연후에도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묘사된다]

 

따라서 사띠는 네 번째 선정에 도달하기 훨씬 이전부터 행해지는 것이며

그것의 위상 또한 선정의 경지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확인이 된다.

 

사띠는 삼빠쟌냐와 더불어 사념처의 수행을 이끌어 가는 핵심 기제가 된다.

바로 여기에서 마지막 논점으로서 다른 수행과의 관계 문제가 부각된다.

사념처를 행하는 와중에 정신적 고요함이 부각되면 그것을 곧 사마타(止 samatha)라 할 수 있다.

 

예컨대 수념처의 마지막 항목에 해당하는

“세속적이지 않은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은

고원한 선정 상태에 도달한 연후라야 비로소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²⁶

 

따라서 사념처의 실천이 사마타의 경지를 포함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편 사념처를 진행해 나가는 와중에 진리에 대한 통찰이 강조되면

그것은 곧 위빠사나(觀 vipassanā)라 할 수 있다.

 

예컨대 <대념처경> 전체에 걸쳐 21차례에 걸쳐 반복되는

‘법에 대한 통찰’ 과정이 거기에 해당된다고 할 것이다.²⁷

 

따라서 사념처는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공동 지반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념처에서 가장 중요한 심리적 기능이 사띠라는 점에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즉 4가지 주요 대상에 대해 의식적으로 주의를 기울여야만 사념처 자체가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사띠의 확립’ 즉 ‘사띠빳타나(satipaṭṭhānā)’라는 원래의 의미가 그것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사띠는 사념처의 실행 원리임과 동시에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²⁸

 

[28) 다음의 인용구는 의지적인 노력을 통해 사띠를 행해나가고

또한 그것을 통해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얻게 된다는 내용을 간명하게 기술한다.

 

“비구들이여,

마치 옷에 불이 붙어 있고 머리에 불이 붙어 있어 옷과 머리(의 불을) 끄려는 것과 같이

강력한 의지와 노력과 정진과 맹렬함으로 물러남이 없이

사띠(念 sati)와 삼빠자나(知 sampajañña)를 행해야 한다.

 

바로 그와 같이 비구들이여,

비구는 그러한 선한 법을 얻기 위해 극도의 바램과 노력과 정진과 맹렬함과

물러남이 없는 사띠와 삼빠자나를 행해야 한다.

바로 그러한 연후에 그는 안으로 마음의 가라앉음(內心寂止)과

탁월한 혜로써 보는 법(增上慧法觀)을 얻게 된다.” AN. V. 99-100쪽.]

 

이점은 그간의 논의에서 사띠, 사념처, 위빠사나가 동일시되거나

혹은 혼용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반드시 유념해 둘 필요가 있겠다.²⁹

 

[29) 그간 발표된 대부분의 연구에서는 사띠․사념처․위빠사나의 관계는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김정호의 경우가 예외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또한 사띠는 임상적 맥락에서

포괄적으로 사용되고 위빠사나는 불교적 맥락에서 사용된다는 정도에서 그치고 있다.

김정호 (2004) <마음챙김이란 무엇인가>

<마음챙김의 임상적 일상적 적용을 위한 제언> 515-516쪽]

 

물론 사띠는 사념처 전체를 특징짓는 개념인 까닭에 양자를 혼용하더라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념처와 위빠사나를 동일시하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사념처는 위빠사나뿐만 아니라 사마타와도 관련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사념처와 위빠사나를 구분하려 했던 일부의 시도는 충분히 공감할 만하다.³⁰

 

이상을 정리하자면 사띠는 사념처 자체는 물론 사마타와 위빠사나

전체를 가능하게 하는 기술적 측면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현대의 심리치료에서 주목하는 내용은 바로 이러한 기술적 측면으로서의 사띠에 한정되는 듯하다.

이러한 기술적 접근의 정당성에 대해서는 별도의 논의와 점검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이상과 같은 맥락에서

이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일단 유념해 둘 필요가 있겠다.

 

Ⅲ. 심리치료적 입장에서 본 사띠

 

마크 옙스타인(Mark Epstein)에 따르면 불교 명상은

훈련을 받지 못한 일상적인 마음을 자연스러운 출발점으로 한다.³¹

또한 그것은 내부에 있는 무엇인가를 강제적으로 바꾸거나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관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수행자는 불편한 정서나 느낌 등이

자신의 의도와 무관하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체험을 하게 된다.

나아가 다양한 내적 작용들이 자기 자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조건에 따라 발생하고 사라지는 허망한 현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지속적인 주의를 의미하는 사띠란 바로 이러한 과정을 이끄는 핵심 원리이다.

 

서구 심리치료에서 사띠는 다양하게 정의되고 있으며

그간의 논의는 국내 연구자들에 의해 자세히 소개되고 있다.³²

권석만․박성현 등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기술한다.

 

먼저 Goleman은 이것에 대해

“고정화된 지각으로부터 탈피하여 매 사건을 처음 접하는 것처럼 보게 하고

있는 그대로를 수용적으로 직면하게 하는 과정”으로 정의하였다.

 

또한 Kabat-Zinn은

“현재의 순간에 주의를 집중하는 능력으로서 의도적으로 몸과 마음을 관찰하고

순간순간 체험한 것을 느끼며 또한 체험한 내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과정”으로 정의하였다.

 

한편 Teasdale 등은 이것을

“생각과 감정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여 거리를 두는 능력”으로 개념화하고

또한 “그렇게 해서 배양된 ‘메타 인지적 통찰(meta-cognitive insight)’을 통해

부정적 사고와 느낌을 단순히 지나가는 정신적 사건으로 인식하게 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서구의 심리치료자들에 의해 시도된 이러한 개념적 정의(conceptual definition)에는

주의조절, 주의집중, 있는 그대로 자각하기, 비판단적 태도, 경험에 대한 개방성,

메타 인지적 통찰 등과 같은 다양한 측면들이 포함된다.

 

특히 Teasdale 등에 의한 “생각과 감정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여 거리를 두는 능력”이라든가

‘메타 인지적 통찰’은 앞에서 살펴본 우 빤디따 사야도의

“몸과 마음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조작하거나 조절하려 하지 않고

다만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에 상응하는 것으로 전통적 가르침을

심리치료적 관점에서 명료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 장에서 살펴보겠지만 이러한 개념 규정은 현대의 심리치료에서

이해하는 사띠가 결코 피상적인 것이 아님을 나타낸다.

 

그런데 Baer는 이러한 개념적 정의가 객관적으로

측정 가능한 내용을 담보해 주지 못한다고 비판하였다.

 

그리하여 이것의 치료 효과를

조작적 정의(operational definition)의 형식으로 기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지적과 맥락을 같이하여 Dimidjian, Bishop, Hayes, Germer, 박성현 등은

사띠의 효능을 객관적으로 데이터화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³³

 

[33) 예컨대 Dimidjian 등은 사띠의 구성 요소를

① 관찰하기/알아차림(내적․외적 현상에 주의를 기울이고 민감하게 자각하는 것)

② 기술하기/명명하기(내적․외적 현상에 대해 이름을 붙이는 것),

③ 비판단적으로 수용하기/허용하기,

④ 현재의 순간에 집중하기 등으로 구분하였다.

 

또한 Bishop 등은 이것을

① 주의의 자기조절(self-regulation),

② 경험에의 지향(orientation to experience) 2가지로 구분하고서 다시 전자를

㉠ 지속적 주의(현재의 경험에 대한 자각을 유지하는 기술),

㉡ 주의의 변환(주의의 초점을 한 대상에서 다른 대상으로 옮길 수 있는 유연성),

㉢ 정교화 과정의 금지(사고․느낌․감각 등이 일어났을 때

그것에 대한 반추적 사고를 멈추는 것) 등으로 후자를

 

㉠ 수용(현재의 경험에 대한 개방성),

㉡ 탐색(사고라든가 느낌의 본질을 이해하고 관찰하기 위한 의도적인 노력) 등으로 세분화하였다.

 

한편 Hayes 등은 앞서의 Bishop 등이 제안한 내용에 ‘내적․외적 경험과의 거리두기’

혹은 ‘탈 중심적 태도(distanced or de-centered relationship)’를 추가하였다.

 

또한 Germer는 ① 현재의 경험을 ② 수용적으로 ③ 자각하여 알아차리는 것으로

이것에 대한 보다 단순․명료한 정의를 시도하였다.

 

또한 국내의 연구자로서 박성현은 이것에 대해

① 현재 자각(현재 순간에 일어나는 몸과 마음의 경험에 대한 즉각적이고 명료한 알아차림)

②주의집중(현재의 경험이나 과업에 주의를 유지하고 집중하는 것)

③ 비판단적 수용(자신의 내적 경험에 대해 사유작용을 통한 평가나

판단을 멈추고 발생한 경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허용하는 태도)

④ 탈 중심적 주의(마음의 현상에 휩싸이지 않고 관찰자의 위치에서 바라보는 것)로 정의하였다.

박성현(2006) <위빠싸나 명상, 마음챙김, 그리고 마음챙김을 근거로 한 심리치료> 6-7쪽 요약]

 

이들의 시도는 아직 최종 완성 단계에는 이르지 못한 듯하지만

과학적으로 접근 가능한 사띠 개념의 정립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또한 이들의 연구는 사띠의 효과를

통계적 수치로 측정하기 위한 척도(scale) 개발과 그 궤도를 같이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Brown, Ryan, Bishop, Hayes 등에 의한 시도가 주목을 받고 있다.³⁴

 

[34) 이러한 맥락에서 Brown과 Ryan은

‘사띠의 주의 자각 척도(Mindful Attention Awareness Scale, MAAS)’를 고안하여

일반인에게 적용한 결과 높은 점수를 받을수록 다음과 같은 특성이 보이는 것을 발견했다.

 

① 내적 경험을 더 잘 알아차리고,

② 정서 상태에 더 잘 조화됨과 동시에 그것을 변화시킬 수 있고,

③ 기본적인 심리적 요구를 더 잘 충족시키고,

④ 덜 자기 의식적이고 덜 반추적이며 사회적으로 덜 긴장하고,

⑤ 몰입된 의식 상태에 덜 빠져든다.

 

이들 외에도 명상 훈련 동안의 경험에 대한 자각과 수용 정도를 측정하기 위한

‘토론토 사띠 척도(Toronta Mindfulness Scale, TMS)’,

부정적 정서에 빠지지 않고서 활동할 수 있는 개인적 능력의 차이를 측정하기 위한

‘수용-행동 질문지(Acceptance and Action Questionnaire, AAQ)’ 등

다양한 진단 범주에 입각한 새로운 측정 도구들이 지속적으로 고안․보급되고 있다.

박성현(2006) <마음챙김 척도 개발> 18-22쪽 참조]

 

이러한 조작적 정의와 척도 개발은 사띠의 효능에 대한 검증의 차원에서 시도되고 있으며

보다 개선된 적용을 위해 필수 불가결한 것으로 인식되는 분위기이다.

 

이러한 사띠의 치료 메커니즘에 대해 박성현은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³⁵

⑴노출효과(exposure), ⑵탈자동화(deautomatization),

⑶수용(acception), ⑷탈동일시(disidentification) 등이 그것이다.

 

노출효과란 통증 따위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 능력의 배양을 통해

과도한 정서적 반응 없이 그것을 경험하도록 유도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사띠 기법이 괴로움 자체를 제거해주지는 못하지만

그것에 따른 정신적 고통이나 스트레스는 완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탈자동화란 매 순간의 경험을 즉각적으로 알아차림으로써

부정적 상념이나 강박적인 집착의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차단하는 것을 말한다.

 

수용이란 모든 경험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심리적 저항감과 압박감을 해소하는 것을 말한다.

 

마지막의 탈동일시는 부정적인 생각이나 감정들을

단지 관찰해야 할 현상으로 보게 하여 자기 자신과 상관없는 것으로 분리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치료 메커니즘은 모든 육체적․정신적 현상들을 단지 관찰해야 할 대상으로 보게 하며

그것을 통해 일체의 불필요한 반응과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해준다는 점에 공통점이 있다.

 

최근의 인지행동치료(Cognitive Behavior Therapy)에서는

이러한 원리를 치료 개입(intervention) 방법으로 활용하여 프로그램화하고 있다.

 

예컨대 몸과 마음의 건강에 복합적으로 적용되는 ‘사띠에 근거한 스트레스 감소 프로그램(MBSR)’

만성적인 우울증 치료를 위해 만들어진 ‘사띠에 근거한 인지치료(MBCT)’,

경계성 성격 장애와 일반적인 정동 조절에 사용되는 ‘변증법적 행동치료(DBT)’,

불유쾌한 감각들을 대처하기 위한 ‘수용-참여 치료(ACT)’ 등이 그것이다.

 

MBSR는 좌선과 경행으로 이루어진 위빠사나 명상을 기본으로 하면서

보디스켄(body-scan) 및 하타요가(hatha-yoga) 등을 포함한다.

 

여기에서는 그룹 단위로 명상을 지도하며

순간순간의 내면적 흐름을 알아차리도록 하는 데에 역점을 둔다.

 

MBCT는 MBSR을 기반으로 개발된 치료법으로

사고에 대한 탈중심적 접근(decentered approach)을 강조한다.

 

이 방법은 우울증을 유발하는 부정적 사고가

단순한 정신적 현상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는 데에 역점을 둔다.

 

DBT는 경계선 성격장애를 갖고 있는 내담자들이

장시간의 명상 훈련을 견디는 것이 힘들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고안되었다.

여기에는 사고와 정서 및 행동상의 변화를 돕기 위해 고안된 다양한 인지 행동적 전략들이 포함된다.

 

ACT는 부정적인 사고와 경험에 자동적인 반응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는 데에 초점을 모은다.

즉 인지적 탈융합(cognitive defusion)을 통해 실제 행동에서

부정적인 사고와 경험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하는 데에 역점을 둔다.

 

사띠는 단순하면서도 보편적인 심리적 요인인 까닭에 무한히 응용될 수 있다.

초기불교의 경전에서도 이것은 육체적․정신적 괴로움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된 사례가 있으며³⁶ 또한 이것을 체계화한 사념처의 수행 역시

일반 재가자에게 개방되어 널리 행해졌다는 언급이 나타난다.³⁷

 

[36) 예컨대 <대반열반경 Mahāparinibbāna-Suttanta>에는

사띠를 행함으로써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극복하는 사례가 6차례 이상 나타난다.

(DN. II. 99쪽, 128쪽, 140쪽, 158쪽, 162쪽 등 참조)

다음에 소개하는 인용문들이 그 전형이다.

 

“세존께서는 대장장이 아들 춘다의 공양을 드시고서 격심한 이질을 앓으셨다.

죽음에 이를 정도의 강렬한 통증이 일어났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사띠(sato)와 알아차림(sampajāno)으로 고난을 당하지 않고 견디셨다

.(DN. II. 127-128쪽)”;

 

“세존께서 열반에 드시자 탐욕을 떠나지 못한(avītarāgā)

비구의 무리들은 팔을 높이 쳐들고 슬퍼했다.

절벽에 [몸을] 내던지거나 앞으로 구르거나 뒤로 굴렀다.

‘세존께서 너무나 빨리 열반에 드셨다.’

‘잘 가신 이께서 너무나 빨리 열반에 드셨다.’

‘세간의 눈이 너무나 빨리 사라졌다’[고 슬퍼했다.]

그러나 탐욕을 떠난(vītarāgā) 비구들은 사띠(satā)와 알아차림(sampajānā)으로 견디었다.

‘일체의 현상(saṅkhāra)은 무상하다. 바로 이것을 어디에서 얻겠는가’라고 [생각하면서.]

(DN. II. 157-158쪽)”

 

37) “세존이시여,

흰옷을 입은 저희 재가자들도 때때로 이 사념처 안에서 마음을 잘 닦아 머물고 있습니다.

(Mayampi hi bhante gihī odātavasanā kālena kālaṃ imesu catusu

satipaṭṭhānesu sūpaṭṭhitacittā viharāma)” MN. I. 340쪽]

 

따라서 여기에 제시된 프로그램들은 충분한 경전적 근거를 지닌다고 할 수 있으며

바로 그것의 현대적 적용 사례가 된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드러난다.

먼저 주요 요인으로 거론된 여러 항목들은

사띠 개념이 매우 포괄적으로 이해․적용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각각의 요인이 지니는 이질적인 측면들은

그들이 과연 동일한 개념을 지시하는가에 대한 의구심마저 불러일으킨다.

 

예컨대 인내심․초심․집중․믿음 따위는 인지적(cognitive) 기능과는 무관한 것으로

정서적 태도 혹은 열의에 해당하는 용어들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비집착․허용하기․거리두기․탈중심화 등은

내면의 정서를 배제한 순수 인지적 과정을 묘사하는 기술적 용어들이라 할 수 있다.

 

다음 장에서 다시 살펴보겠지만 이러한 이질적인 측면들을 소통․해소하기 위해서는

사띠의 실천 양상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한편 이상의 심리치료 프로그램들은 사띠의 인지적 효능을 지나치게 확신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이미 언급했듯이 거기에는 내면의 태도 혹은 열의가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명상이나 심리치료의 과정이 항상 순탄하게 진행될 것으로만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며

힘든 상황에 직면하더라도 그것을 의지적으로 참고 견디는 것도 필요하다.

 

예컨대 Vitakkasanthānasutta에 묘사되듯이 부정적인 생각이 잘 통제되지 않을 때에는 관심을

다른 쪽으로 돌린다든지³⁸ 물리적인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강제적으로라도 제거할 필요가 있다.³⁹

 

[38) “비구들이여,

만약 비구가 생각의 위험성을 살피는 데도 불구하고

사악하고 선하지 않은 생각들이(발생할 수 있다)···

그럴 경우에 비구들이여, 비구는 생각에 대해 사띠도 행하지 말고 마음 냄도 하지 말아야 한다 ···

비구들이여, 마치 눈을 지닌 사람이 눈에 들어온 대상을 보지 않고자 할 때

눈을 감거나 다른 대상을 쳐다보는 것처럼···

 

39) “비구들이여,

만약 비구가 생각에 관련하여 생각의 지음을 중지하기 위해

마음을 내고 일으킨다고 하더라도 사악하고 선하지 않은 생각들이(발생할 수 있다)···

 

그럴 경우에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빨에 이빨을 붙이고 혀를 입천장에 대고

마음으로 마음을 항복시키고 제압해서 없애야 한다.···

 

비구들이여,

마치 힘센 사람이 힘없는 사람의 머리를 붙잡고

어깨를 붙잡아 항복시키고 제압해서 없애버리는 것처럼···MN. I. 120-121쪽]

 

사띠의 치료적 효능을 인지적 차원에 한정하게 되면 바로 그러한 측면들이 간과될 가능성이 크다.

도표에 나타나는 ‘주요 요인’들에 비추어

MBSR을 제외한 나머지 프로그램들은 그러한 혐의가 짙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이상과 같은 심리치료 프로그램들은 병증의 개선과 치료에 오로지 주력할 뿐이다.

그러나 사띠는 건강의 증진을 위해 고안된 것이 아니며

인간 삶의 보편적 괴로움을 극복하고자 개발된 것이다.

따라서 심리치료자들에 의해 활용되는

사띠는 그것의 본래 취지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더욱이 건강 문제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탐욕과 집착을 조장하기 십상이며

새로운 유형의 육체적․정신적 괴로움이라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심리치료 프로그램은

탐욕 따위를 근본적으로 해소하는 데에는 그다지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바로 이점은 그들이 가야할 길이 아직은 멀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일 수 있으며

또한 그들에게 불교적 가르침이 여전히 요청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Ⅳ. 사띠 개념의 올바른 이해와 활용

 

마크 옙스타인은 명상의 정신역동을 사마타(samatha)와 사띠(sati)

그리고 위빠사나(vipassanā)라는 세 가지 위계로써 설명한다.⁴⁰

 

그에 따르면 사마타는 공허하고 불완전한 자아 관념을 드넓은 공간적 관점으로 확장시켜 준다.

이것을 통해 수행자는 육체 안에 갇힌 존재로서의 자기 개념을 부수기 시작한다.

사마타의 진전과 더불어 신체적 감각은 사라지고 무한한 공간에 대한 감각만이 남게 된다.

그 과정에서 두려움이 이완되고 기쁨과 지복의 열린 영역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바른 수행자는 이처럼 확장된 자기 체험에도 한계가 있다는 점을 인식한다.

확장된 자기에 대한 체험은 ‘있음에 대한 갈망(有愛 bhava-taṅhā)’에 빠지게 할 위험이 있다.

그러한 이유에서 사마타 명상은 수행의 최종 목표를 이끌어 내기에는 불충분하다.

 

한편 사띠는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그 순간에 정확하게 알아차리게 한다.

이 단계에서 수행자는 자기 자신을 공간적 관점에서 보는 대신 끊임없이 변화하는 속에서 경험한다.

옙스타인은 바로 이것을 공간적 관점으로부터 시간적 차원으로의 전환이라고 부른다.

여러 심리치료자들에 의해 지적되듯이 부적응적 사고와 정서는 몸과 마음의 분리로부터 발생한다.

즉 자신의 존재가 현실의 삶으로부터 유리되어 동떨어진 관념 속에 놓일 때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띠는 현재의 순간에 머물 수 있도록 유도한다.

그리하여 몸과 마음의 분열을 해소하도록 돕는다.

 

그러나 옙스타인은 사띠 역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본다.

매 순간에 순응한다는 것은 치료적 관점에서는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된 해방감을 부추길 수 있고 또한 그것으로 인한 집착과 자만을 초래할 수 있다.

 

사띠라는 기교에서 벗어나 위빠사나의 통찰로 나아가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위빠사나란 일체의 육체적․정신적 현상을

순수한 마음으로 관찰하면서 그것의 본래적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다.

 

이것은 매 순간의 경험에 주의를 기울이되 거기에 매몰되지 않는 유연함을 요구한다.

이러한 통찰 수행은 일체의 괴로움이 발생하는

토대로서의 자아가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꿰뚫어 보게 한다.

이러한 과정은 거짓된 자아를 구축하려는 모든 그릇된 시도들을 멈추게 하고

또한 스스로를 속박해 왔던 그간의 왜곡된 자아로부터 자유로워지게 한다.

 

이러한 옙스타인의 명상 위계 설정은 충분히 공감할 만한 설득력을 지닌다.

수행의 입문자에게는 일단 거친 의식 상태를 가라앉히고

심리적인 안정을 얻게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사마타는 바로 그것을 주된 임무로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마타가 현실에 대한

기민한 인식을 둔화시킬 가능성은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는 사안이다.

 

예컨대 즐거움과 괴로움이 사라진 네 번째 선정의 경지에서는

알아차릴 수 있는 느낌의 영역이 그만큼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몸과 마음에서 발생하는 여러 현상들을 기민하게 알아차리는 과정을

선정 자체와 구분하여 독립된 단계로 설정해 볼 필요가 있다.

 

사띠의 주요 역할은 과거나 미래로 방황하는 마음을 현재의 대상으로 모아주는 데에 있다.

이와 같이 현재의 순간에 충실한 태도는 부적응적인 사고와 정서를 다스려 나가는 출발점이 된다.

앞 소절에서 살펴본 사띠의 치료적 효능들은 바로 여기에 근거해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점에서 불교 명상과 현대의 심리치료는 공동의 지반 위에 서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 단계는 불교와 심리치료가 달라지는 분기점이 되기도 한다.

전자는 이것을 통해 육체적․정신적 현상의 본질을 꿰뚫는 위빠사나로 넘어간다.

그러나 후자에서는 부적응적인 사고와 정서를 다스리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된다.

위빠사나의 궁극 목적은 無我(anatta)의 실현에 있다.

그러나 모든 심리치료자들이 그러한 궁극의 목적에 동의한다고 볼 수는 없다.⁴¹

 

[41) 한편 이 문제와 관련하여 마크 옙스타인은

“먼저 치료를 통해 자아를 굳건히 하고 난 후 명상을 통해 자아를 극복한다.”는 일반적인 견해에

반박하면서 무아의 가르침이 곧바로 정신치료 상황에 적용되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그리하여 모든 문제의 근본 해결을 위해서는 ‘자기’라는 실체가 없다는 것

다시 말해 무아의 도리를 깨우쳐야 한다는 점을 일관되게 역설한다]

 

이상과 같은 옙스타인의 견해는 사마타 → 사띠 → 위빠사나를

일련의 수행 위계로 설정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단계적 전략은 불교 명상의 특징적 측면들을 실제 수행과 연관하여

용이하게 드러낸 것이라는 점에서 일단 긍정적인 평가가 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위계는 초기불교에서의 사띠가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낳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즉 사띠는 사마타 이후에 행해나가는 수행 단계가 아니라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양자를 가능케 하는 심리적 요인이었다.

 

나아가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순서 또한 고정적인 선․후 관계로만 묘사되지는 않았다.

예컨대 <앙굿따라니까야>에는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순서가

가능한 모든 방식으로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이 상세히 기술된다.⁴²

 

따라서 초기불교 경전에 나타나는 수행 양상은

옙스타인의 단계적 명상 전략에 비해 더욱 유연한 면모를 지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대부분의 심리치료 기법에서 도외시되는 불교 명상의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이 있다.

앞에서도 부분적으로 언급했듯이 

그것은 명상의 전체 과정이 계율(sīla)의 기반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계율의 문제와 관련하여 <상윳따니까야>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한다.

 

이로운 법(善法)의 처음은 무엇인가.

계율의 청정이며 견해의 올바름이다.

 

그와 같이 비구가 계율이 청정하고 견해가 올바르게 된다면

그대 비구는 계율에 의지하고, 계율 위에 서서, 사념처를 세 겹으로 닦아야 한다.

 

사념처란 무엇인가.

그대 비구이여,

이 [가르침] 안에 한 비구가 있어, 안으로 몸(身)에 관련하여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삼빠쟌나와 사띠를 지니고서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머문다)‧‧‧⁴³

 

인용된 내용은 사띠만을 거론하는 것이 아니다.

즉 계율을 청정히 하고 견해를 올바르게 하는 것이 ‘이로운 법(kusalānaṃ dhammānaṃ)’

중에서 처음(ādi)이 되는 중요한 사항임을 서술하고 있다.

 

그런데 이 대목은 사념처라는

사띠 수행의 전제 조건이 계율이라고 밝힌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을 끈다.

즉 “계율(戒 sīla)에 의지하고 계율 위에 서서 사념처를 닦아라.”라고 하는 언급이 그것이다.

 

현대 심리치료의 기법들은 불교도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며

심리적 문제로 인해 고통을 받는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한다.

따라서 계율의 문제를 배제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수긍할 만하다.

특히 자유분방한 현대인에게 계율의 준수를 권하는 것은 무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수행의 과정에서 요구되는 계율은

방탕한 생활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덕목들로 이루어져 있다.⁴⁴

 

또한 계율은 명상의 치료적 능력을 증대하기 위해서라도 고려될 필요가 있다.

더구나 계율의 준수는 명상의 효력이

불건전한 방향으로 악용되는 것을 차단시켜 주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 계율의 문제를 강조하는 심리치료 프로그램은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이러한 사실은 현대의 기법들이

가시적인 병증의 치료에 주력하는 데서 기인하는 태생적 한계일 수 있다.

 

바로 이점은 명상을 기반으로 한 현대 심리치료 기법들이

추후의 보완과 개선을 위해 반드시 관심을 가져야 할 대목으로 파악된다.

 

마지막으로 사띠 자체에 내재하는 차별적 양상 혹은 수행론적 위상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사띠의 위상에 관해서는 여러 이견이 존재한다.

 

일부에서는 이것을 네 번째 선정(第四禪)의 단계에 연결시키기도 하고

다른 일부에서는 첫 번째 선정(初禪) 혹은 그 이전부터 행해질 수 있다는 주장을 한다.

 

그러한 이견들은 나름의 문헌적 근거에 입각해 있는 까닭에 일방적인 평가가 곤란하다.

또한 그들 모두는 사띠의 특징적 측면들을 구체화하는 데에 나름의 기여를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수행의 절차와 위상을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사문과경>에 의하는 한 사띠는 선정 이전의 단계에서부터 행해지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또한 그러한 이해야말로 열렬한(ātāpī) 마음으로 사념처를 행해 나가야 한다고 가르치는

<대념처경>의 본래 취지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사띠가 수행의 초보적 단계에서부터 요구되는 요인이라는 점은 이미 언급한 대로이다.

그러나 그 경우 사띠가 지속적으로 유지된다는 보장은 없으며

여러 가지 장애에 의해 흔들릴 위험성이 있다.

 

예컨대 내면의 탐욕과 분노가 발생했을 때 그것을 알아차림의 대상으로 처리하지 못하고

거기에 휩쓸리게 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따라서 처음 수행하는 수행자는

강렬한 의지로써 동요됨이 없는 태도로 사띠를 행해 나갈 필요가 있다.

 

예컨대 <앙굿따라니까야>에 기술되듯이

“강력한 의지와 노력과 정진과 맹렬함으로 물러남이 없이

사띠와 삼빠자나를 행해야 한다.”라는 경우가 거기에 해당한다.⁴⁵

 

이러한 의지적인 사띠에 힘입어 초보 수행자는 그간의 방일한 상태를 벗어나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수행이 진척되면 좀 더 유연하게 사띠를 행할 필요가 있다.

즉 초보 단계에서는 ‘호흡’이나 ‘느낌’ 따위에 강력히 집중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얼마간의 집중이 이루어진 상태에서는 ‘호흡’이나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의

와중에 주변적으로 발생하는 상념이라든가 욕구 따위에 대해서도 깨어있어야 한다.

 

즉 특정한 하나의 대상에만 몰입하려는 의지적 노력을 줄이고 개방된 태도로써

몸과 마음에서 발생하는 현상들을 기민하게 알아차리는 것이 필요하다.

 

이와 관련하여 마하시 사야도(Mahasi Sayadaw)는

“초보적 수행단계에서는 특정 대상을 중심으로 관찰을 해야 하지만

수행이 진척되면 6근의 영역 전체로 관찰대상을 확대해야 한다”⁴⁶고 가르쳤다.

 

Kabat-Zinn 또한 이러한 상태를

“어떤 특정한 것에만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가만히 앉아서 무엇이든 떠오르는 것에 모두 집중하는 것”으로 언급하였고

또한 이것에 숙달되기 위해서는 수년에 걸친 연습이 요구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⁴⁷

 

그런데 이러한 상태에 익숙해지면 몸․느낌․마음․법이라는

사념처의 4가지 대상에 대한 구분은 큰 의미를 잃는다고 할 수 있다.

 

즉 감각에 와 닿는 모든 현상들에 대해

‘선택 없는 깨어있음(choiceless awareness, choiceless mindfulness)’을 행하게 된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의지적인 노력에 의해 사띠를 행하던 그간의 수행 양상에서 변화가 발생한다.

즉 특정한 대상을 임의적으로 선택하여 사띠를 행할 필요가 없어지고

오히려 관찰되는 대상이 사띠를 이끌어 주는 상황이 전개된다.

의지적으로 사띠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행해지는 사띠를 체험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이와 관련하여 쉐우민 사야도(Shwe Oo Min Sayadaw)는

“처음 수행을 해 나갈 때는 ‘내(puggala)가 무엇을 한다’는 생각으로 하지만

수행을 오래 하다가 보면 법(dhamma)이 저절로 드러나 이끌어 준다”고 언급하였다.

 

이러한 양상의 사띠에는

일체의 부정적․긍정적 자극에 흔들림 없는 거리두기가 전제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대념처경>에는 “탐욕이 있는 마음을 ‘탐욕이 있는 마음’이라고 알아차리고 ···

혹은 성냄이 있는 마음을 ‘성냄이 있는 마음’이라고 알아차린다 ···”는 언급이 나타난다.

 

이것은 사념처에서 심념처(cittānupassanā)의 과정을 기술한 것으로

의지적 노력을 배제한 상태에서 행해나가는 사띠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만약 이 과정에서 의지적 측면이 지나치게 강조되면

그러한 의지 작용 자체가 일종의 탐욕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탐욕이 있는 마음’이라든가 ‘성냄이 있는 마음’

따위에 대한 냉정한 알아차림이 곤란해 질 것이다.

 

이러한 심념처는 특정한 마음 상태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고 그것의 발생과 소멸이라는

전체 과정을 관찰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인지적 탈융합(cognitive defution)

혹은 메타 인지적 통찰(meta-cognitive insight)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사띠에는 다양한 측면들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일부의 연구자는 사띠를 첫 번째 선정

혹은 그 이전부터 행할 수 있는 것으로 주장하고

다른 일부의 연구자는 네 번째 선정 이후의 단계로 한정한다.

 

그러나 이상에서 살펴본 두 가지 차원의 사띠는 그러한 대립에 대해 소통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즉 초보적 수행 단계에서부터 행해지는 사띠는 의지적인 차원의 것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고

네 번째 선정과 같은 체험 이후의 그것은 저절로 행해지는 차원의 것으로 배대해 볼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사띠 이해는 현대의 심리치료에서 거론되는 사띠의

‘주요 요인’들에 대해서도 보다 구체적이고 세분화된 조망을 가능하게 한다.

 

예컨대 앞장의 도표에서 보았던 인내심․집중, 믿음 따위는

의지적으로 행하는 사띠에 연결시킬 수 있겠고 비판단적 태도, 비집착, 허용하기, 거리두기,

탈중심화 ․ 인지적 탈융합 등은 저절로 행해지는 사띠에 친화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Ⅴ. 마치는 말

 

불교 명상은 인간이 지닌 보편적 괴로움의 해소를 목적으로 하지만

특정한 병증의 치료에는 구체적이지 않다.

 

반면에 서구의 심리치료 기법들은 스트레스․불안․우울 등과 같은

구체적인 증상의 치료에서는 강점을 보이지만 적용의 폭이 제한적이다.

 

또한 전자는 보통의 삶을 영위해 나가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반면에

후자는 정신적․정서적 문제로 괴로움을 겪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다.

따라서 양자에 대해서는 그 유사성에 못지않게

차별성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다루어 나갈 필요가 있다.

 

더욱이 김정호에 의해 소개되듯이 현대 심리치료에서는

불교적 의미와 다른 맥락의 알아차림(awareness)을 내세우기도 한다.

빠른 속도로 세분화되어 나가는 현대 심리학의 발달 양상은

양자간의 간극을 더욱 넓히는 분위기이다.

 

본고를 통해 시도된 불교 명상과 심리치료의 비교는 피상적인 것일 수 있으며

또한 그들 모두를 곡해한 것일 위험성마저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사띠 기법은 장구한 세월에 걸쳐 자체적인 검증을 받아 왔으며

인간의 성품 자체가 변화하지 않는 한 나름의 용도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한편 현대의 심리치료 역시 이것의 치료 효과를

나름의 방법론에 입각하여 착실하게 입증해 나가고 있다.

 

이들은 구체적인 적용 양상에서 몇 가지 차이를 보이는 것이 사실이지만

기본 원리에는 유사점이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불교의 영향을 심리치료 분야에서 직·간접적으로

수용해 온 그간의 과정은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따라서 어떠한 방식으로든 양자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긍정적 내용들을

비교․취합하는 작업은 필요하며 그러한 맥락에서 금번의 시도는 나름의 정당성을 지닌다.

 

Ⅱ장에서는 그간 불교학 연구자들에 의해 논의되었던 사띠 개념을 재검토하였다.

특히 여기에서는

① 사띠 개념에 대한 번역의 문제,

② 사띠가 기능하는 심리적 영역에 관한 논의,

③ 사띠와 여타의 수행과의 관계 문제 등을 다루었다.

 

①의 번역 문제에 관해서는 마음챙김․알아차림․마음지킴 등

기존의 번역에서 드러나는 단점과 장점을 언급하였다.

 

본고는 마음지킴이라는 번역어에 공감하지만 반드시 이것만이 옳다는 언급은 유보하였다.

다만 현재로서는 충분한 해명이나 근거 없이 특정 번역어를 사용해 온

그간의 관행에 문제를 제기하는 차원에서 그친다.

 

한편 ②의 논의에 관해서는 <사문과경>의 사례를 들어 사띠라는 것이

선정의 상태에 도달하기 훨씬 이전부터 행해진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확인하였다.

 

마지막의 ③의 문제에 관해서는 그것이 사념처 자체는 물론

사마타와 위빠사나 전체를 가능하게 하는 기술적 측면에 해당된다는 점을 확인하였다.

 

이러한 사항들은 매우 기본적인 것임에도 아직까지

전공자들 사이에서 합의된 결론을 도출하지 못한 실정이다.

 

Ⅲ장은 현대 심리치료자들에 의해 이해된 사띠 개념을 기술했고

특히 이것에 대한 조작적 정의와 심리치료적 적용 양상을 소개하는 데에 역점을 두었다.

 

이 대목은 박성현, 김정호, 권석만, 김재성 등에 의해 발표된

기존의 논문을 재정리하는 차원에서 기술하였다.

 

본고는 현대 심리치료 혹은 치료프로그램들에서 활용되는

사띠 개념이 충분한 근거를 지닌다는 데에 공감한다.

또한 그것이 고전적 가르침에 대한 현대적 적용이라는 점에서 긍정적 평가가 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나 그러한 사띠 이해에는 다음과 같은 난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주목한다.

 

① 현대 심리치료에서 이해하는 사띠 개념은

지나치게 포괄적이며 이질적인 내용들간의 간극이 크다.

 

② 현대 심리치료에서는 사띠의 인지적 효능을 지나치게 확신하여

거기에 담긴 태도 혹은 열의적 측면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③ 대부분의 치료프로그램은 겉으로 드러난 병증의 개선과 치료에만 주력하는 양상을 보인다.

 

본고는 이러한 문제점들이 오랜 역사를 통해 그 내구성을 입증해 온

불교적 가르침의 세밀한 이해와 수용을 통해 개선․보완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Ⅳ장에서는 사마타 → 사띠 → 위빠사나라는 위계를 설정했던

마크 옙스타인의 견해를 소개하는 형식으로 논지를 진행하였다.

 

이러한 위계는 불교 명상의 특징적 측면들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며

치료적 적용이라는 측면에서도 충분한 활용 가치가 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본고에 따르면 초기불교 경전에 나타나는 수행의 양상은

옙스타인의 단계적 명상 전략에 비해 더욱 유연한 면모를 지닌다.

 

즉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순서는 고정적이지 않으며 또한 사띠는 사마타 이후에

행해나가는 별개의 수행이 아니라 사마타와 위빠사나 자체를 가능케 하는 요인이다.

 

이러한 사실은 초기불교에서 제시되는 원래의 명상이 다양한 상황에

더욱 탄력적으로 응용될 수 있는 것임을 시사 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이 장의 후반부에서는 ‘계율의 준수 문제’ 및 ‘두 가지 차원의 사띠’에 대해 기술하였다.

계율의 문제는 현대 심리치료에서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한 것으로

차후 개선된 심리치료 기법의 개발을 위해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사항으로 파악된다.

 

한편 두 가지 차원의 사띠는 이 개념에 대한 그간의 오해와 혼란을 해소하고 또한 보다

온전한 방식으로 이 개념을 이해하고 적용하기 위해 염두에 둘 필요가 있는 내용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