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語錄/벽암록

벽암록 67칙 頌 評唱

【評 唱】

불향쌍림기차신不向雙林寄此身 “쌍림에 이 몸 의탁하지 않고

각어량토야애진卻於梁土惹埃塵 양나라 땅에서 티끌 먼지 일으켰다”

고 설두가 송했으니

 

부대사여몰판치로한傅大士與沒板齒老漢 부대사가 앞니 빠진 달마와 똑같이

일반상봉一般相逢 양무제를 만나 대화한 방법이 서로 비슷하다는 것이다.

 

달마초도금릉達磨初到金陵 견무제見武帝 제문帝問

달마가 처음 금릉金陵에 도착하여(512) 무제를 뵙자 무제가 물었다.

 

여하시성제제일의如何是聖諦第一義

“어떤 것이 성스런 이치[聖諦], 으뜸가는 뜻[第一義]입니까?”

 

마운磨云 확연무성廓然無聖

“텅텅 비어 성스런 이치[聖諦]라 할 것도 없습니다.”

(‘둘레 곽, 클 확廓’ 둘레, 지역地域. 외성外城, 울타리. 크다)

 

제운帝云 대짐자수對朕者誰 “나와 마주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마운磨云 불식不識 “모르겠습니다.”

 

제불계帝不契 수도강지위遂渡江至魏

무제가 이에 계합하지 못하자 달마는 드디어 양자강을 건너 북위北魏에 이르렀다.

 

무제거문지공武帝舉問誌公 공운公云

그 후 무제가 다시 이를 들어 지공에게 물으니 지공이 말했다.

 

폐하환식차인부陛下還識此人否 “폐하께서는 이 사람을 아시는지요?”

제운帝云 불식不識 “모릅니다.”

 

지공운誌公云 차시관음대사此是觀音大士 전불심인傳佛心印

“이는 관음대사觀音大士로서 부처님의 심인心印을 전수하는 사람입니다.”

 

제회帝悔 수견사거취遂遣使去取 지공운誌公云

무제는 후회하고 마침내 사신을 보내어 모셔오려고 하자 지공이 말했다.

 

막도폐하莫道陛下 발사거취發使去取

“폐하께서는 사신을 보내어 모셔오라는 말씀을 마십시오.

 

합국인거合國人去 타역불회他亦不回

온 나라 사람이 간다 해도 그는 되돌아오질 않을 것입니다.”

 

소이설두도所以雪竇道그렇기에 설두가 말했다.

당시부득지공로當時不得誌公老 “당시에 지공 늙은이가 아니었다면

야시서서거국인也是栖栖去國人 그 또한 황급히 양나라를 떠나는 사람이 되었으리.”

 

당시약불시지공當時若不是誌公 위부대사출기為傅大士出氣

당시에 지공이 부대사를 위하여 (그의 존재를 임금에게)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야수시간출국거也須是趕出國去 그도 나라를 떠났을 것이다.

 

 

지공기요설誌公既饒舌 무제각피타열만일상武帝卻被他熱瞞一上

지공이 주둥이를 나불대어 무제가 그에게 한 번 되게 속임을 당한 것이다.

 

설두대의도雪竇大意道 설두의 생각은

불수타래량사不須他來梁士 “그가 양나라 땅에 찾아와서 <금강경>을 강의하고

강경휘안講經揮案 경상을 후려칠 필요조차도 없었다.”는 것이다.

 

소이도所以道 그러므로 설두가 말했다.

하불향쌍림기차신何不向雙林寄此身 “왜 쌍림에 몸을 의탁하여

끽죽끽반喫粥喫飯 죽이나 밥이나 먹으면서

수분과시隨分過時 분수 따라 시절을 보내질 않고

 

각래량사卻來梁士 양나라 땅에 찾아와

임마지주휘안일하恁麼指注揮案一下 <금강경>을 강의 한답시고 한 번 경상을 후려치더니

편하좌便下座 바로 법좌에서 내려왔느냐?”

 

편시타야애진처便是他惹埃塵處

경상을 후려친 바로 이것이 부대사가 티끌 먼지를 일으킨 것이다.

 

기시요수승既是要殊勝 즉목시운소則目視雲霄 제대로 되려면 하늘을 바라보면서

상불견유불上不見有佛 위로는 부처가 있는 것도 보지 않고

하불견유중생下不見有眾生 아래로는 중생이 있는 것도 보지 않았어야 했다.

 

약론출세변사若論出世邊事 그러나 만일 세간을 벗어난 일을(중생교화) 의논한다면

불면회두토면不免灰頭土面 머리에는 재 쓰고 얼굴에는 흙 바르고

장무작유將無作有 무無를 가지고 有라고 하며

장유작무將有作無 유를 가지고 무라고 하며

장시작비將是作非 옳은 것을 그르다고 하며

장추조작세將麤粗作細 거친 것을 곱다고 하는 꼴이다.

 

어행주사魚行酒肆 횡념도용橫拈倒用

그러기보다는 차라리 어물전이나 술집을 이리저리 누비면서

 

교일체인教一切人 명차개사明此箇事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이 일(본분)’을 밝히도록 했어야 했다.

 

약불임마방행若不恁麼放行 이처럼 놓아버리지 않는다면

직도미륵하생直到彌勒下生 설령 미륵 부처님이 하생下生한다 하여도

야무일개반개也無一箇半箇 한 사람은커녕 반 사람도 (‘이것’) 아는 이가 없을 것이다.

 

부대사傅大士 그래서 부대사 자신은

기시타니대수既是拖泥帶水 뢰시유지음賴是有知音

진흙투성이가 되었을 텐데 다행히 지기知己인 지공이 있었다.

 

약부득지공로若不得誌公老 기호간출국료幾乎趕出國了

만일 지공이 아니었더라면 부대사 역시 양나라를 떠날 뻔했다.

 

차도즉금재십마처且道即今在什麼處

말해보라, 부대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몰판치로한沒板齒老漢 앞니가 없는 노인. ‘달마대사’

‘板齒’=판치版齒.

 

당문치當門齒 위전치야謂前齒也

당문치當門齒니 이르자면 전치前齒(앞니).

 

►출기出氣 울분을 풀다.

►열만熱瞞=열만熱謾. 속다. 바보 취급 당하다.

저실지기만著實地欺瞞 착실하게 기만함.

 

►일상一上 一場. 一番. 一回 한바탕. ‘上’ 조사助詞

►수승殊勝 지고至高의 경지. 빼어난 경지

►출세변사出世邊事 중생교화의 일

 

►횡념도용橫拈倒用=도용횡념倒用橫拈

위수의거설謂隨意擧說 자재운용自在運用

이르자면 뜻대로 거설擧說하고 자재하게 운용함.

 

지고명종사접인학인적시설指高明宗師接引學人的施設

고명高明한 종사가 학인을 접인하는 시설을 가리킴.

 

►뢰시유賴是有 다행히도 ~ 이 있다.

 

 

●부대사傅大士(497-569)

 

야야포불면夜夜抱佛眠 밤마다 부처를 안고 자고

조조환공기朝朝還共起 아침마다 함께 일어난다나네,

기좌진상수起坐鎭相隨 앉으나 서나 늘 따라다니고

어묵동거지語默同居止 말할 때나 안 할 때나 함께 있으니

 

섬호부상리纖毫不相離 털끝만큼도 서로 떨어지지 않아

여신영상사如身影相似 몸에 그림자 따르듯 하는구나,

욕식불거처欲識佛去處 부처님 간데 알고자 하는가?

지저어성시只這語聲是 다만 지금 말하는 "이것(부처)"일세!

 

부대사傅大士의 이름은 흡翕이다.

497년에 태어나 569년까지 73년을 살았다.

 

傅大士는 16세에 묘광妙光과 結婚하여 아들 둘을 두었다.

24살에 물고기를 잡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면 傅大士는 生業이 漁夫였다.

 

고기를 잡아다가는 고기를 보고 “갈려면 가고 머물려면 머물라”고 말해

주위사람들이 바보라고 놀렸다고 하니 慈悲心이 깊은 사람이었다.

 

<대승찬大乘讚>의 저자 誌公和尙이 418년에 태어나 514년에 入寂하였으니

지공대사가 입적한 때는 부흡傅翕은 아직 17살이었다.

 

부대사가 24살에 고기를 잡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청년 부흡이

誌公大師의 명성을 들을 수 있었지만 歷史的 史料를 검토해 보면 時間上으로 差異가 난다.

 

서로 交流했다는 것은 의문으로 남는다.

그러나 부대사의 行跡에 대한 後世 사람들의 記錄들은

誌公和尙과 傅大士가 서로 교류하였음이 여기저기 文獻들에 나온다.

 

<벽암록碧巖錄>과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는 양무제가 지공화상에게

<金剛經> 법문을 청하자 지공이 부대사를 추천하였다고 전한다.

 

法床에 부대사를 올려 모시고 지공대사가 친히 三拜를 올렸다 한다.

설령 이 말이 歷史的 사실이 아닐지라도 당시 민중들은

그렇게 했으리라고 기대하는 하는 만큼 그 의미하는 바가 매우 크다.

 

황벽선사와 임제선사의 어록과 <碧巖錄>에도 傅大士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비록 在家法師였지만 傅大士가 얼마나 傑出한 人物인지를 가늠할 수 있다.

당시 民衆들은 부대사를 彌勒의 化現이라고 불렸다 한다.

 

傅大士는 24세에 인생의 큰 전기를 맞는다.

印度에서 온 승려 숭두타嵩頭陀를 만나 佛道에 入門하게 된 것이다.

 

前生에 같이 공부했다는 이야기가 전할 정도로

傅翕의 공부는 단숨에 심오한 경지에 들었다 한다.

 

<불교사전>에 傅大士 條를 보자.

24세에 계정당稽停塘에서 인도에서 온 스님 숭두타嵩頭陀를 만나 불도에 뜻을 두었다.

송산의 쌍도수雙擣樹 사이에 庵子를 짓고 스스로 이름하여

‘쌍수림하雙樹林下 당래해탈當來解脫 선혜대사善慧大士’라 하다.

 

낮에는 품을 팔고 밤에는 아내 묘광妙光과 함께 대법大法을 연설하여

이렇게 하기 7년에 소문이 사방에 떨쳐 天下의 名僧들이 모여 들었다 한다.

 

그때부터 부대사의 詩와 偈頌을 言及하지 않은 宗匠들은 없을 정도이다.

天下 名僧들이 "욕식불거처欲識佛去處 지저어성시只這語聲是"

句를 보고 中國의 유마거사維摩居士라고 칭한다.

 

10년을 공부한 즈음, 부대사는 529년(33세)에 梁나라 임금 武帝를 만났다.

무제는 佛心天子라고 할 만큼 佛法에 대한 理解가 깊었다.

傅大士는 우선 무제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景德傳燈錄>에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량대통륙년梁大通六年(534) 6年 正月28日 양梁 대통 6년 정월 28일에

견제자부왕치서우량고조遣弟子傅暀致書于梁高祖 서왈書曰

제자 부왕傅王을 시켜 양고조梁高祖에게 글을 보내 이렇게 말했다.

 

쌍림수하雙林樹下 당래해탈當來解脫

선혜대사善慧大士 백국주구세보살白國主救世菩薩

선혜대사善慧大士는 삼가 국주 구세보살에게 아뢰나이다.

 

금욕조상중하선今欲條上中下善 희능수지希能受持

이제 상중하의 선을 가리고자 하니 잘 받아 지니기를 바랍니다.

 

기상선략其上善略 최상의 선이라 함은 줄여 말하면

이허회위본以虛懷為本 마음을 비우는 것이 근본이요,

불착위종不著為宗 집착치 않는 것이 근본이요,

망상위인亡相為因 모습을 없애는 것이 원인이요,

열반위과涅槃為果 그로 인해 얻는 과보가 열반입니다.

 

기중선략其中善略 중간의 선이라 함은 줄여 말하면

이치신위본以治身為本 몸을 다스리는 것이 근본이요,

치국위종治國為宗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조종이요,

천상인간과보안락天上人間果報安樂 천상과 인간의 안락한 과보를 받는 것입니다.

 

기하선략其下善略 하급의 선이라 함은 줄여 말하면

이호양중생以護養眾生 승잔거살勝殘去殺 뭇 생명을 보호하여 남을 해치는 것을 누르고

보령백성구품륙재普令百姓俱稟六齋 살생을 버리어 온 백성이 모두 6제를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금문황제숭법今聞皇帝崇法 욕신론의欲伸論義

이제 듣건대 황제께선 불법을 숭상하신다는 말을 듣고 저의 뜻을 펴고자 하였으나

 

미수금회고未遂襟懷故 견제자부왕고왈遣弟子傅暀告曰

겨를을 얻지 못하였기에 이제 제자 부왕傅暀을 시켜 글월을 올립니다.

 

傅大士는 수행이 깊었을 뿐만 아니라 중생 제도에도 몸을 아끼지 않았다.

양무제를 만나 백성을 살리는 보살행이 곧 나라를 다스리는 왕도의 조종이라고

말한 것을 보아도 짐작할 수 있거니와 흉년이 들면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

부대사의 보살행을 보고 주위 부자들이 모두 감동하여 함께 동참하였다고 한다.

 

<경덕전등록>에는 자신의 가산을 기울여 보시한 부대사의 시를 전하고 있다.

경사위군품傾捨為群品 살림을 기울여 내놓음은 중생을 위함이요

봉공천중천奉供天中天 거룩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것이니

앙기감로우仰祈甘露雨 바라옵건대 단 이슬을 뿌려서

류주보무변流澍普無邊 중생을 두루 적셔 주소서.

 

傅大士의 명성은 당송시대의 여러 禪師들이 다투어 그의 法門을 인용한 까닭도

있었겠지만 세상 사람들이 부대사의 보살행을 칭송하여

그 이름이 널리 전해진 것도 또 하나의 큰 원인이 아닌가 생각한다.

 

<景德傳燈錄>에는 대사의 수행하는 모습을 이렇게 전한다.

대사는 송산 마루턱에 줄지어진 나무를 돌면서 도를 닦으니

칠불이 따라 감응하였는데 석가가 앞을 이끌고 유마가 뒤를 따랐다.

숲을 逍遙하며 禪定에 드신 모습이 거룩하여 여러 부처님이 함께 하는 것 같다고 하였다.

 

이 구절에서 특히 우리의 눈을 끄는 것은 “석가가 앞을 이끌고, 유마가 뒤를 따랐다.”는 대목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정법을 따라 수행하며 維摩居士의 행을 실천하였다는 것이니

이 구절이야말로 부대사의 한 평생을 나타내고 있다.

 

傅大士는 中國의 維摩居士로 추앙을 받고 있다.

부대사는 자신을 스스로 선혜대사善慧大士라고 했다.

大士는 菩薩을 뜻하는 말이다.

 

傅大士가 남긴 글은 <善慧大士語錄>이 있고 <心王銘>이 세상에 전한다.

특히 <金剛經五家解>는 금강경을 빼어나게 풀이한 다섯 분

(부대사 육조 야부 종경 규봉)의 주석을 모은 것인데 그 중의 한 분이 傅大士이다.

 

<心王銘>은 마음이 곧 부처인 자리(是心是佛 卽心卽佛)를 설하는 偈頌이다.

<心王銘>은 여타 禪師들의 偈頌과 조금 다른 면이 있다.

 

마음이 곧 부처인 도리를 설하는 가운데 특히 마음을 쓰는

"이것!"의 대기대용의 도리가 강조되어 있다.

 

傅大士가 선정에 들어 나무사이를 소요할 때 석가모니 부처님이 이끌고

維摩居士가 뒤를 따랐던 도리가 이 <心王銘> 한 편에 담겨져 있는 것이다.

 

<역사적 사실>

►지공화상誌公和尙(418-514) 수감收監은 제齊 무제 永明7년(487)

►양무제梁武帝(464-549)

►부대사傅大士(497-569) 양무제에게 <금강경>강의(535)

►보리달마菩提達磨(?-528 or ?-534?) 중국광주도착(520 or 527)

 

1. 지공은 양무제, 부대사, 달마와 전혀 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벽암록 1칙과 67칙은 새하얀 거짓말이다.

 

2. 양무제는 부대사와 달마를 만났다.

3. 부대사는 한 시대를 살았기에 지공과 달마의 이름을 들었을 것이다.

4. 달마의 중국에서의 행각은 소림사 이외는 모두 허구적이다.

그러므로 위 사람 중 오직 양무제만 1번 봤을 뿐이다.

/2014-09-28 19:5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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