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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조론肇論

조론肇論 반야무지론般若無知論

조론肇論 반야무지론般若無知論

현상과 본질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부반야허현자夫般若虛玄者 개시삼승지종극야蓋是三乘之宗極也 성진일지무차誠眞一之無差

無知의 허현한 반야는 삼승 모두가 종극으로 여기는 것으로서

차이 없는 진실한 眞一의 마음이다.

 

(그윽하고 신령한 반야는 상대적인 의존관계의 인식이 끊겼기 때문에 虛라고 말하고

앎이 없고 관조의 작용마저 끊겼기 때문에 玄이라고 말한다)

 

연이단지론然異端之論 분연구의紛然久矣

그러나 이단의 의론이 분분하게 어지러운지가 오래 되었다.

 

유천축사문구마라집자有天竺沙門鳩摩羅什者 소천대방少踐大方 연기사취硏機斯趣

천축의 사문인 구마라집은 어려서부터 방향을 초월한 대방의 반야도를 실천하여

그 기미를 연구하여 여기에로 취향 하였다.

 

독발어언상지표獨拔於言象之表 묘계어희이지경妙契於希夷之境

그리하여 홀로 言象의 밖으로 빼어나 중도의 희이希夷한 경지에 오묘하게 계합하였다.

(희이는 노자에서 왔는데 오묘하게 깨닫고 생사를 초월하여 홀로 우뚝 섰다는 말이다.)

 

제이학어가이齊異學於迦夷 이단의 학문을 가비라국(부처님 탄생하신 곳)에서 하나로 집합하고

양순풍어동선揚湻風於東扇 장원촉수방將爰燭殊方 이닉요요양토자而匿耀耀凉土者

순수한 가풍을 동쪽에서 드날려 다른 지방을 환하게 밝히려 하면서

양토에서 광채를 숨기고 있었던 것은

 

소이도불허응所以道不虛應 응필유유의應必有由矣

도는 헛되게 감응하지 않고 감응하는 데는 반드시 그 이유가 있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나집대사가 중국에 들어오게 된 유래를 서술. 양토는 여광이 점령하여 국호를 서량이라 한 곳.

나집대사가 진나라로 가지 못하고 여광에게 11년을 붙들려 있었다.)

 

홍시삼년弘始三年 세차성기歲次星紀 진승입국지모秦乘入國之謀

홍시3년 세차성기에 진나라에선 대사를 입국시킬 것을 도모하고

 

거사이래지의야擧師以來之意也 군사를 거행함으로써 그를 오게 할 의도를 가졌으니

북천지운수기연야北天之運數其然也 북천의 운수가 그러하였으리라.

(나집대사가 시기를 얻어 도를 시행한 유래를 서술)

 

대진천왕자大秦天王者 도계백왕지단道契百王之端 덕흡천재지하德洽千載之下

대진 천왕의 도는 모든 왕들의 으뜸에 계합하였고

그가 지닌 덕은 천년 뒤까지 흡족히 적실만 하였다.

 

유인만기游刃萬機 홍도종일弘道終日

바쁜 정사에서도 여유롭게 유인하며 종일토록 불도를 흥통하였다

(유인游刃은 장자에서 나왔다.)

 

신계속창생지소천信季俗蒼生之所天 석가유법지소장야釋迦遺法之所仗也

그는 실로 말세의 창생들이 어버이로 여기고 석가여래께서 남기신 법이 의지하는 바였다.

 

시내집의학사문오백여인어소요관時乃集義學沙門五百餘人於逍遙觀

때로 불법의 의미를 배우는 사문 오백여 사람을 소요관에 모아놓고

 

궁집진문躬執秦文 여집공참정방등與什公參定方等

몸소 한문으로 번역하면서 나집공과 함께 <방등경>을 참정하였다.

 

기소개척자其所開拓者 기위당시지익豈謂當時之益 내누겁지진량의乃累劫之津梁矣

그가 개척한 것을 어찌 당시에만 이익 되게 하였다고 말하겠는가. 영원토록 나루터가 되리라.

 

여이단핍余以短乏 증측가회曾廁嘉會

나는 재주와 덕이 부족한데도 일찍부터 아름다운 모임에 참여하여

 

이위以爲 상문이요上聞異要 시어시야始於時也

일상에 듣던 것과는 다른 심요를 위로부터 듣게 됨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이상은 <반야무지론>을 짓게 된 유래를 서술하였고 이후로 본론의 종지를 드러냈다)

 

연즉성지유미然則聖智幽微 심은난측深隱難測

그렇다면 성인의 지혜는 그윽하고 은미하여 매우 헤아리기 어렵다.

 

무상무명無相無名 내비언상지소득乃非言象之所得

이는 차별적인 모습도 없고 모습에 대한 명칭도 없어

명칭인 언어나 모습인 형상으로 얻는 바는 아니다.

 

위시망상기회爲試罔象其懷 기지광언이寄之狂言耳 기왈성심이가변재豈曰聖心而可辨哉

나의 마음을 형상이 없이 비우고 광언에 의탁해 보리니

어찌 성인의 마음을 논변한다 말하겠는가.

 

시론지왈試論之曰 시험 삼아 이 문제를 의론해 보겠다.

 

(罔象은 장자에서 나왔다.

이는 자기의 마음을 텅 비워야만 근본의 지혜, 즉 반야의 실지와 서로 호응함을 말한다.

狂言도 장자에서 나왔다.

논변이 광대하기만 해서 일상적인 범부들의 마음에 일치함이 없는 말을 말한다.

이는 겸손해서 하는 말이다)

 

방광운放光云 <방광반야경>에서 말하였다.

반야무소유상般若無所有相 무생멸상無生滅相

반야는 실제로 존재하는 모습도 없으며 따라서 생멸하는 모습도 없다.

 

도행운道行云 <도행반야경>에서 말하였다.

반야무소지般若無所知 무소견無所見

반야는 인식의 사량분별로 알 대상이 아니며 상대적으로 볼 수도 없다.

 

차변지조지용此辨智照之用

이 두 경전에서는 실지 반야가 관조반야의 작용을 일으키는 것을 말하였는데도

 

이왈무상무지자하야而曰無相無知者何耶

‘모습도 없고 앎도 없다’라고 말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겠는가.

 

과유무상지지果有無相之知 부지지조명의不知之照明矣

차별적인 모습이 없이 앎과 인식의 사량분별로 알지 않고

관조하는 작용이 정말로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하겠다.

 

하자何者 부유소지夫有所知 반야는 무엇 때문에 사량분별로서 아는 세계가 없을까.

즉유소부지則有所不知

일반적으로 인식으로 사량하여 알 대상이 있다면

인식이 미치지 못하는 대상은 알지 못함이 있겠지만(이는 범부의 망정이다)

 

이성심무지以聖心無知 고무소부지故無所不知

성인의 마음인 반야는 인식으로써 앎이 없기 때문에 모를 것도 없다.

 

부지지지不知之知 내왈일체지乃曰一切知

심의식으로 사량하여 알지 않고 앎을 일체지라고 말한다.

 

고경운故經云 그러므로 경전에서

성심무소지聖心無所知 무소부지無所不知 신의信矣

'성인의 마음은 아는 것이 없으며 알지 못하는 것도 없다.'

라고 말하였는데 이는 확신할 만한 말이다.

 

시이성인是以聖人 그러므로 성인은

허기심이실기조虛其心而實其照 종일지이미상지야終日知而未嘗知也

그 마음에 번뇌의 미혹을 비우고 진실을 관조하여 종일토록 알아도 일찍이 아는 것이 아니다.

 

고능묵요도광故能黙耀韜光 허심현감虛心玄鑒

그 때문에 말없이 마음의 광채를 숨기고 번뇌가

텅 빈 마음에서 현묘한 관조반야의 조감을 일으켜

 

폐지색총閉智塞聰 이독각명명자의而獨覺冥冥者矣

인식의 지혜와 총명을 사용하지 않고 그윽하게 홀로 깨달은 분이다.

 

연즉지유궁유지감然則智有窮幽之鑑

이와 같다면 실지반야에는 그윽함을 끝까지 조감하는 관조반야의 작용이 있으나

 

이무지언而無知焉 인식의 사량으로 앎은 없으며

신유응회지용神有應會之用 이무려언而無慮焉

신령한 관조반야는 외연에 감응하여 회합하는 작용이 있으나 사려는 없다.

 

신무려神無慮 고능독왕어세표故能獨往於世表

신령한 관조반야는 인식의 사려가 없기 때문에 세간 밖에서 홀로 가장 존귀할 수 있고

 

지무지智無知 고능현조어사외故能玄照於事外

실지반야는 앎이 없기 때문에 사물 밖에서 현묘하게 관조할 수 있다.

 

(神은 방편의 작용인 관조반야이다.

방편반야로 정도를 낮추어 모든 중생의 개별적인 상황에 순종하기 때문에

감응하여 회합하는 작용이 있으며

그 상황을 따라가면서도 생각이 없이 감응하기 때문에 사려가 없다)

 

지수사외智雖事外 미시무사未始無事

실지반야가 사물 밖이긴 하나

현묘한 관조의 작용을 일으키므로 애초에 사물이 없는 것은 아니며

 

신수세표神雖世表 종일역중終日域中

신령한 관조반야가 세간 밖에서 홀로 존귀하나 종일토록 세계 속을 떠나지 않고 있다.

 

소이부앙순화所以俯仰順化 응접무궁應接無窮

그 때문에 정도에 따라 현실의 변화에 순종하면서 무궁하게 모든 중생들을 응접하며

 

무유불찰無幽不察 이무조공而無照功

그윽한 중도의 이치를 끝까지 살피지 않음이 없으나 관조하는 공능의 작용은 없다.

 

사즉무지지소지斯則無知之所知 성신지소회야聖神之所會也

이는 성인의 실지가 앎이 없이 아는 것이며

성인의 신령한 관조반야로써 실지에 회합하는 까닭이다.

 

연기위물야然其爲物也 실이불유實而不有 허이불무虛而不無

그러나 반야의 자체는 진실이긴 하나 정말로 모습이 있지는 않으며

번뇌가 텅 비긴 하였으나 실지로 없지는 않다.

 

존이불가론자存而不可論者 기유성지호其唯聖智乎

있는 그대로 간직해 둘 뿐 시비의 의론을 하지 못할 것은 성인의 지혜일뿐이리라.

 

하자何者 무엇 때문에 반야는 유·무에 소속하지 않을까.

욕언기유欲言其有 무상무명無狀無名 반야가 있다 말하려 하나 꼴도 명칭도 없으며

욕언기무欲言其無 성이지영聖以之靈 없다고 말하려 하나 성인은 이로써 신령하기 때문이다.

 

성이지영聖以之靈 고허불실조故虛不失照

성인은 반야로써 신령하기 때문에 마음에 번뇌가 텅 비었으나 관조의 작용을 잃지 않고

 

무상무명無狀無名 고조불실허故照不失虛

관조의 작용은 있으나 형상도 명칭도 없기 때문에

관조의 작용을 한다 해도 실지 자체의 텅 빈 마음을 잃지는 않는다.

 

조불실허照不失虛 고혼이불투故混而不渝

관조하면서도 텅 빈 자체를 잃지 않기 때문에

만물과 혼융하면서도 담연한 자체의 실지는 변하지 않는다.

 

허불실조虛不失照 고동이접추故動以接麤

자체가 텅 비었어도 관조의 작용을 잃지 않기 때문에

걸핏하면 세간에 나타나 중생을 제접 한다.

 

(투渝는 변화한다는 의미이며

추麤는 삼계에 몸을 나타내어 중생의 종류를 따라서 감응해 주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관조의 작용이 더욱 깊어질수록 반야의 작용은 더욱 광대해 지는 것이다)

 

시이성지지용是以聖智之用 미시잠폐未始暫廢

그러므로 성인의 실지가 일으키는 관조의 작용은 처음부터 잠시도 폐지하지 않았지만

 

구지형상求之形相 미잠가득未暫可得

이를 구체적인 형상에서 찾아본다면 잠시나마도 얻지 못한다.

 

고보적왈故寶積曰 그러므로 <보적경>에서 말하였다.

이무심의이현행以無心意而現行 심의식의 사량분별 없이 전5식으로 현행한다,

 

방광운放光云 <방광반야경>에서 말하였다.

부동등각이건립제법不動等覺而建立諸法 등각에서 움직이지 않고 모든 만법을 건립한다.

 

소이성적만단所以聖迹萬端 기치일이이의其致一而已矣

그러므로 성인이 감응한 자취는 만 가지의 단서나 되지만

이르러 간 이치는 하나의 중도일 뿐이다.

 

시이반야가허이조是以般若可虛而照 그러므로 반야는 텅 비었으나 관조의 작용이 가능하며

진제가망이지眞諦可亡而知 중도의 진제는 모습이 없어도 알 수가 있으며

 

만동가즉이정萬動可卽而靜

움직이면서 변화하는 현상의 모든 사물은 그 속에 나아가 고요할 수 있으며

 

성응가무이위聖應可無而爲

성인의 감응은 심의식의 작위가 없이 작위가 가능하다.

 

사즉부지이자지斯則不知而自知 이는 알지 않으면서도 스스로 알며

불위이자위의不爲而自爲矣 작위하지 않으면서도 스스로 작위 하는 것이다.

부하지재復何知哉 다시 무슨 사량분별의 앎이 있겠으며

부하위재復何爲哉 무슨 인위적인 작위가 있겠는가.

 

난왈難曰 따져 물어 보겠다.

부성인진심독랑夫聖人眞心獨朗 물물사조物物斯照 응접무방應接無方

성인의 진실한 마음은 홀로 명랑하여 사물마다를 관조하면서 일정한 방향이 없이 응접한다.

 

동여사회動與事會 물물사조物物斯照

움직였다하면 현상의 사물과 회합하여 모든 사물을 관조한다

고지무소유故知無所遺 그러므로 모든 대상의 세계를 일제히 관찰하여 빠짐없이 안다.

 

동여사회動與事會 고회불실기故會不失機 회불실기고會不失機故

움직였다하면 사물과 회합하여 그 때문에 감응하여 회합했다하면 외연의 상황을 잃지 않는다.

 

필유회어가회必有會於可會

외연에 회합하여 그때그때의 상황을 잃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회합할 만한 상황을 가려서 회합하며

 

지무소유고知無所遺故 필유지어가지必有知於可知

빠짐없이 알기 때문에 반드시 알 수 있는 마음으로 알만한 세계를 안다.

 

필유지어가지必有知於可知 고성불허지故聖不虛知

반드시 알만한 세계를 알기 때문에 성인은 부질없이 아는 것은 아니며

 

필유회어가회必有會於可會 고성불허회故聖不虛會

회합할 만한 상황을 가려서 회합하기 때문에 성인은 헛되게 회합하지 않는다.

 

기지기회旣知旣會 이왈무지무회자而曰無知無會者 하야何耶

이처럼 이미 알고 이미 회합하였는데도

성인의 마음은 앎도 없고 회합함도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약부망지유회자若夫忘知遺會者 만일 성인이 앎을 잊고 회합함을 빠뜨렸다면

즉시성인무사어지회則時聖人無私於知會 이성기사이以成其私耳

이는 성인이 앎과 회합에 사사로움이 없음으로써 자기의 사사로움을 이루었을 뿐이다.

 

사가위부자유기지斯可謂不自有其知 안득무지재安得無知哉

이럴 경우 스스로 자기의 앎을 소유하지 않는다 말할지언정 어떻게 앎이 없을 수 있겠는가.

 

답왈答曰 답하여 이른다.

부성인공고이의이불인夫聖人功高二儀而不仁 명유일월이미혼明逾日月而彌昬

성인의 자비하신 공로는 천지보다도 높지만 사랑한다고 여기지 않고

밝음은 일월을 능가하지만 더욱 어둡다.

 

기왈목석고기회豈曰木石瞽其懷 기어무지이이재其於無知而已哉

어찌 목석처럼 그 마음을 눈 멀게 하여 앎이 없는 것으로써 끝날 뿐이겠는가.

 

성이이어인자신명誠以異於人者神明 실로 성인이 일반 사람들과 다른 점은 신명 때문이다.

고불가이사상구지이故不可以事相求之耳 그러므로 事相으로써는 찾지 못할 뿐이다.

 

자의욕령성인부자유기지 子意欲令聖人不自有其知 이성인미상불유지而聖人未嘗不有知

그대의 의도로는 성인이 스스로 자기의 앎을 뽐내며 소유하지 않을지언정

성인은 미상불 앎이 있다 라고 하고 싶어 한다.

 

무내괴어성심無乃乖於聖心 실어문지자호失於文旨者乎

그대가 이것으로써 옳다고 여긴다면 성인의 마음에

어긋나서 논문의 깊은 뜻을 잃음이 없겠는가.

 

하자何者 경운經云 무엇 때문에 그대가 잘못되었는가하면 경전에서 말하였다.

진반야자眞般若者 청정여허공淸淨如虛空 무지무견無知無見 무작무연無作無緣

진실한 반야는 허공처럼 청정하여 앎도 없고 볼 수도 없으며 조작도 반연함도 없다.

 

사즉지자무지의斯則知自無知矣 이는 안다 해도 자체엔 앎이 없음을 말한다.

기대반조豈待返照 연후무지재然後無知哉

어찌 돌이켜 관조하여 단절되어 없기를 기다린 뒤에야 앎이 없겠는가.

 

약유지성공이칭정자若有知性空而稱淨者

만일 반야는 앎이 있다 해도 그 자체는 성공이라 해서 청정하다라고 말했다 한다면

 

즉불변어혹지則不辨於惑智 이는 二惑과 반야의 智를 분간하지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미혹의 번뇌도 성공이기 때문인데

무엇 때문에 유독 반야만 청정하다 하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삼독사도역개청정三毒四倒亦皆淸淨 삼독과 사전도까지도 모두가 청정하리라.

유하독존어반야有何獨尊於般若 무엇 때문에 유독 반야에만 홀로 존귀함이 있겠는가.

 

약이소지미반야若以所知美般若

가령 반야가 알 대상인 진제가 청정하다하여 이로써 반야를 청정하다고 찬미했다고 말한다면

 

소지비반야所知非般若 반야가 알 대상인 진제는 반야의 자체가 아니다.

(진제는 관찰할 대상의 세계이며, 반야는 주관적으로 관찰하는 마음이다.)

 

소지자상정所知自常淨 알 대상인 진제는 자체가 항상 청정하다.

고반야미상정故般若未嘗淨 그러므로 반야가 일찍이 청정한 것은 아니다.

 

역무연치정탄어반야亦無緣致淨歎於般若

만일 진제가 청정했던 반야에 누를 끼쳤다면 진제의 청정 때문에

반야가 청정하다는 찬탄을 이르러 오게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연경운반야청정자然經云般若淸淨者 그러나 경전에서 말한 ‘반야가 청정하다’ 했던 것은

장무이반야체성진정將無以般若體性眞淨 본무혹취지지本無惑取之知

어찌 반야의 자체 성품은 진실 청정하여 본래 二惑으로 취하는 앎은 없으며

 

본무혹취지지本無惑取之知 불가이지명재不可以知名哉

2혹으로 취하는 앎이 본래 없다 해서 진실한 앎으로서 마저 명칭하지 못한다함은 아니었으리라.

 

기유무지명무지豈唯無知名無知 어찌 아무것도 모르는 無知로써 반야는 무지라고 말하였겠는가.

지자무지의知自無知矣 알아도 스스로 앎이 없는 것이다.

 

시이성인是以聖人 이무지지반야以無知之般若 조피무상지진제照彼無相之眞諦

그러므로 성인은 앎이 없는 반야로써 모습 없는 중도의 진제를 관조하여

 

진제무토마지유眞諦無兎馬之遺 반야무불궁지감般若無不窮之鑒

진제는 삼승을 빠뜨림이 없고, 반야는 진제를 끝까지 조감하지 않음이 없다.

 

소이회이불차所以會而不差 그러므로 관조반야는 회합하여 어긋남이 없고

당이무시當而無是 일치하여도 이를 옳다고 의식함이 없으며

 

적파무지寂怕無知 이무부지자의而無不知者矣

실지반야는 고요하게 앎이 없으면서도 모르는 것은 없다.

 

난왈難曰 따져보자.

부물무이자통夫物無以自通 사물은 자체로써 소통하지 못한다.

고립명이통물故立名以通物 그 때문에 명칭을 수립하여 사물을 소통한다.

 

물수비명物雖非名 과유가명지물果有可名之物 당어차명의當於此名矣

사물은 명칭이 아니긴 하나

명칭을 붙일만한 사물이 정말로 있어야만 그러한 명칭에 일치할 수 있다.

 

시이즉명구물是以卽名求物 물불능은物不能隱

그러므로 명칭에 나아가 실체의 사물을 찾아보면 사물이 숨지를 못한다.

 

이론운而論云 성심무지聖心無知 그런데도 논문에서 말하기를 ‘성인의 마음은 앎이 없다’ 하였고

우운又云 무소부지無所不知 다시 ‘모르는 것이 없다’라고 말하였다.

 

의위意謂 나의 의도를 말해 보겠다.

무지미상지無知未嘗知 지미상무지知未嘗無知

반야는 앎이 없다고 말했다면 앎은 아니며 앎은 무지가 아니다.

 

사즉명교지소통斯則名敎之所通 립언지본의야立言之本意也

이러한 논리는 명분 있는 가르침에서 통용되는 것이며

논리를 수립하는 근본 의도이기도 하다.

 

연론자욕일어성심然論者欲一於聖心 이어문지異於文旨

그런데도 논문을 지은 사람은 성인의 마음을 하나의 중도로 만들고 싶어 하여

논문을 수립하는 깊은 뜻과는 차이가 났다.

 

심문구실尋文求實 미견기당未見其當

논문을 연구해보고 그 실제 알맹이를 찾아보았더니

그러한 논리의 온당성은 보이지 않는다.

 

하자何者 약지득어성심若知得於聖心 무지무소변無知無所辨

왜냐하면 앎이 성인의 마음에 계합했다면 무지는 변론할 필요가 없으며

 

약무지득어성심若無知得於聖心 지역무소변知亦無所辨

무지가 성인의 마음에 일치하였다면 앎 역시 변론할 필요가 없으며

 

약이도무득若二都無得 무소부론재無所復論哉

앎과 무지 이 둘 모두가 성인의 마음에 계합하지 못하였다면 다시 논변할 필요는 없으리라.

 

답왈答曰 경운經云 답하여 이르되 경전에 말하였다.

반야의자般若義者 무명무설無名無說 반야의 의미는 명칭이 없고 설명할 수도 없으며

 

비유비무非有非無 비실비허非實非虛

실유도 아니고 실무도 아니며 진실한 알맹이도 아니고 헛되게 부질없는 것도 아니다.

 

허불실조虛不失照 조불실허照不失虛

텅 비었지만 관조의 작용을 잃지 않고 관조의 작용을 하면서도 텅 빈 실지를 잃지 않는다.

 

사즉무명지법斯則無名之法 이러한 반야는 명칭이 없는 법이다.

고비언소능언야故非言所能言也 그러므로 언어로써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언수불능언言雖不能言 연비언무이전然非言無以傳

언어로는 말하지 못하지만 그러나 언어를 빌리지 않으면 전할 수가 없다.

 

시이성인是以聖人 종일언이미상언야終日言而未嘗言也

그러므로 성인은 종일 말을 해도 일찍이 말을 하지 않았다.

 

금시위자광언변지今試爲子狂言辨之

지금 시험 삼아 그대를 위하여 광언으로 이 문제를 논변해 보겠다.

 

미성심자未聖心者 유무有無의 명칭이 쌍으로 끊긴 성인의 마음은

미묘무상微妙無相 불가위유不可爲有 미묘하여 차별적인 모습이 없으므로 있다하지 못하며

용지미근用之彌勤 불가위무不可爲無 작용할수록 더욱 부지런히 움직이므로 없다하지도 못한다.

 

불가위무不可爲無 고성지존언故聖智存焉 없다 하질 못하기 때문에 성인의 실지는 존재하며

불가위유不可爲有 고명교절언故名敎絶焉 있다 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名敎가 단절되었다.

 

시이언지불위지是以言知不爲知 그러므로 안다 말해도 앎이라 하지 못함은

욕이통기감欲以通其鑑 그 조감하는 작용을 소통시키려함 때문이며

 

부지비부지不知非不知 욕이변기상欲以辨其相

몰라도 모르는 것이 아니라 한 것은 그 모습을 논변하고 싶어서일 뿐이다.

 

변상불위무辨相不爲無 통감불위유通鑑不爲有

미혹으로 취하여 앎이 없는 모습을 분별해 보면 아예 없지를 않으며

조감하는 작용을 소통시켜 보면 있는 것도 아니다.

 

비유非有 고지이무지故知而無知 비무非無 고무지이지故無知而知

취할 만한 앎이 있지 않기 때문에 알아도 앎이 없으며

진실한 앎이 없지 않기 때문에 미혹의 앎이 없이 진실하게 안다.

 

시이지즉무지是以知卽無知 무지즉지無知卽知

그러므로 앎이 바로 무지이며 무지가 즉시 앎이므로

 

무이언이無以言異 이이어성심야而異於聖心也

有知·無知의 말이 다르다 해서 성인의 마음에 차이는 없는 것이다.

 

난왈難曰 물어보자.

부진제심현夫眞諦深玄 비지불측非智不測

진제는 심오하고 현묘하여 반야의 지혜가 아니면 헤아리지 못한다.

 

성지지능聖智之能 재자이현在玆而顯

성인의 지혜로 관조할 수 있는 작용으로서의 능력이 여기에서 환하게 나타난다.

 

고경운故經云 부득반야不得般若 불견진제不見眞諦

그러므로 경전에서는 말하기를 ‘반야를 얻지 못하면 진제를 보지 못한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제진즉반야지연야諦眞則般若之緣也 진제는 能緣인 반야로 반연할 所緣이다.

이연구지以緣求智 지즉지의智則知矣

소연의 진제로써 능연인 반야의 지혜를 찾아본다면 반야는 진제를 앎이 있다.

 

답왈答曰 답한다.

이연구지以緣求智 지비지야智非知也 그대는 연회로써 반야를 구했으나 반야는 앎이 아니다.

 

하자何者 방광운放光云 왜냐하면 <방광반야경>에서 말하였다.

불연색생식不緣色生識 시명불견색是名不見色

색온을 반연하지 않고 나오는 식을 색온을 보지 않음이라 말한다.

(연회를 떠나서 아는 것은 연회로써 구하지 못한다 한 것이다)

 

우운又云 오음청정고五陰淸淨故 반야청정般若淸淨

또 ‘오음이 청정하기 때문에 반야가 청정하다’라고 하였다.

(청정은 空의 다른 이름이다. 오음이 본래 공하였기 때문에

반야도 공하며 반야가 공하였다면 연회를 떠났으므로 앎이 있지 않다)

 

반야즉능지야般若卽能知也 오음즉소지야五陰卽所知也 소지즉연야所知卽緣也

반야는 주관적인 앎이고 오음은 알 객관인데, 알 객관은 바로 연회이다.

 

부지여소지夫知與所知 상여이무相與而無

주관적으로 아는 마음은 알아야 할 객관의 경계와 서로 함께 동시적으로 의지하여 존재하고

서로 함께 일시에 없다.

 

상여이무相與而無 고물막지유故物莫之有

서로 함께 없기 때문에 주관인 마음과 객관의 진실한 경계는 실제의 모습이 있을 수가 없으며

 

상여이유相與而有 고물막지무故物莫之無

서로 함께 있기 때문에 마음과 경계는 정말로 없을 수가 없다.

 

물막지무고物莫之無故 위연지소기爲緣之所起

마음과 경계가 없을 수 없기 때문에 허망한 외연을 따라서 주관·객관이 일어나며

 

물막지유고物莫之有故 즉연소불능생則緣所不能生

마음과 경계는 정말로 있을 수가 없기 때문에 외연의 경계가 주관인 마음을 내게 하지 못한다.

 

연소불능생緣所不能生

외연을 의지하여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에

주관적인 앎과 객관의 외연이 서로 의지해서 발생한다.

 

고조연이비지故照緣而非知 위연지소기爲緣之所起 고지연상인이생故知緣相因而生

그러므로 허망한 앎과 眞知인 無知는

진실과 허망에 동시에 통하는 알 경계(所知境)에서 나온다.

 

시이지여무지是以知與無知 생어소지의生於所知矣

무엇 때문에 망지와 진지는 동시에 진·망에 통하는 소지경에서 나올까.

 

하자何者 부지이지소지夫智以知所知 취상고명지取相故名知

진실한 지혜가 주관적인 앎과 알 객관의 경계 때문에 대상의 모습을 취하였다.

그러므로 망지라고 말한다.

 

진제자무상眞諦自無相 진제는 본래 취할 만한 모습이 없다.

진지하유지眞智何由知 소이연자所以然者 진실한 지혜가 무엇을 따라서 진제의 모습을 알겠는가.

 

부소지비소지夫所知非所知

진지와 망지가 각각 있게 된 까닭은 알아야 할 허망한 소지경의 경계는

본래 공하기 때문에 본래 알 대상이 아니다.

 

소지생어지所知生於知 소지기생지所知旣生知 지역생소지知亦生所知

허망한 소지경은 허망한 앎에서 나오며

허망한 소지경이 허망한 앎을 내면 허망한 앎이 상대적으로 허망한 소지경을 낸다.

 

소지기상생所知旣相生 상생즉연법相生卽緣法

허망한 소지경과 허망으로 아는 마음이 상대적으로 발생했다면

상대적으로 발생한 것은 인연법이다.

 

연법고비진緣法故非眞 비진非眞 고비진제야故非眞諦也

인연으로 발생한 법이기 때문에 진실이 아닌 假有이며

진실이 아닌 가유이기 때문에 진제는 아닌 것이다.

 

고중관운故中觀云 그러므로 <중관론>에서 말하였다.

물종인연유物從因緣有 고부진故不眞 부종인연유不從因緣有 고즉진故卽眞

사물은 인연을 따라 있기 때문에 진실하게 있지 않으며

인연을 따라 있지 않기 때문에 바로 진실이다.

 

금진제왈진今眞諦曰眞 진즉비연眞則非緣

지금 진제를 진실이라고 말했다면 진실은 허망한 인연을 빌려서 나오지 않는다.

 

진비연眞非緣 고무물종연이생야故無物從緣而生也

진제는 허망한 인연을 빌려서 나오지 않기 때문에

인연이 아닌 진제로부터 반야의 앎이 나올 수는 없는 것이다.

 

고경운故經云 그러므로 경에서 말하였다.

불견유법무연이생不見有法無緣而生 인연이 아닌데서 발생하여 있는 법은 보지 못한다.

 

시이진지관진제是以眞智觀眞諦 미상취소지未嘗取所知

그러므로 진실한 반야로 중도의 진제를 관조하며 소지경인 진제를 취하진 않는다.

 

지불취소지智不取所知 차지하유지此智何由知

진실한 반야가 소지경인 진제의 모습을 취하지 않는데 이 반야가 무엇을 따라서 알겠는가.

 

연지비무지緣智非無知 단진제비소지但眞諦非所知 고진지역비지故眞智亦非知

그러나 반야가 소지경을 앎은 없으나, 단지 진제는 소지경이 아닐 뿐이며,

그러므로 진실한 반야도 앎은 아니다.

 

이자욕이연구지而子欲以緣求智 그런데도 그대는 허망한 인연법으로써 반야를 찾으려 하였다.

고이지위지故以智爲知 연자비연緣自非緣 어하이구지於何而求知

그 때문에 실지반야로써 안다 하였으나,

인연은 본래 인연이 아닌 진제가 아닌데 어디에서 앎을 구하겠는가.

 

난왈難曰 따져보자.

논운불취자論云不取者 논문에서 말하기를 ‘소지경을 취하지 않는 것은

위무지고불취爲無知故不取

소지경을 취하는 허망한 앎이 없는 무지이기 때문에 소지경을 취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위지연후불취야爲知然後不取耶

그렇다면 소지경이 인연법의 허망임을 안 뒤에 취하지 않는 것인가.

 

약무지고불취若無知故不取 만일 소지경을 앎이 없기 때문에 취하지 않았다면

성인즉명약야유聖人則冥若夜游 불변치소지이야不辨緇素之異耶

성인은 어둡기가 깜깜한 밤에 거니는 것처럼 흑백의 다름을 분별하지 못하리라.

 

약지연후불취若知然後不取 지즉이어불취의知則異於不取矣

만일 소경이 인연법의 허망임을 안 뒤에 취하지 않는다면

허망임을 아는 것은 취하지 않는 것과는 다르리라.

 

답왈答曰 답하여 이르되

비무지고불취非無知故不取

백지처럼 어리석게 앎이 없는 무지이기 때문에 소지경을 취하지 않는 것은 아니며

 

우비지연후불취又非知然後不取 소지경이 허망임을 안 뒤에 취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지즉불취知卽不取 관조의 앎이 바로 취하지 않음이다.

 

고능불취이지故能不取而知

그러므로 소지경의 상대적인 모습을 취하지 않고도 홀로 진실하게 아는 것이다.

 

난왈難曰 따져보자.

논운불취자論云不取者 논문에서 말하기를 ‘소지경의 모습을 취하지 않는 것은

 

성이성심불물어물誠以聖心不物於物

진실로 성인의 마음은 소지경의 진제를 사물의 모습으로 집착하여 취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무혹취야故無惑取也

미혹으로 소지경을 취함은 없다‘라고 말하였다.

 

무취즉무시無取則無是

미혹의 마음으로 소지경을 취함이 없다면

취하지 않음을 옳다고 긍정하는 의식도 없을 것이며

 

무시즉무당無是則無當

옳다고 긍정하는 의식이 없다면

마음이 소지경의 진제에 일치함도 없으리라.

 

수당성심誰當聖心 그렇다면 뉘라서 성인의 마음에 해당하겠는가.

이운성심무소부지야而云聖心無所不知耶

그런데도 ‘성인의 마음은 모르는 것이 없다’라고 말하겠는가.

 

답왈答曰 답하여 이른다.

연然 무시무당자無是無當者

그대가 따진 주관적이 긍정도 없고, 일치한 객관도 없다 한 말이 옳긴 하나

 

부무당즉물무부당夫無當則物無不當

성인의 마음이 일정한 소지경의 모습에 일치함이 없다면 일치하지 않음이 없으며

 

무시즉물무불시無是則物無不是

대상을 옳다고 인가하면서 주관적으로 취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물마다 옳지 않음이 없다.

 

물무불시物無不是 고시이무시故是而無是

사물마다 옳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옳다 해도 따로 옳음이 없으며

 

물무부당物無不當 고당이무당故當而無當

객관의 사물마다 주관에 일치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주관인 마음에 소지경이 일치한다 해도 따로 일치함은 없다.

 

고경운故經云 진견제법盡見諸法 이무소견而無所見

그러므로 경전에서 말하기를

‘모든 법을 끝까지 다 본다 해도 볼 대상이 없다’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난왈難曰 따져보자.

성심비불능시聖心非不能是 성인의 마음은 주관적으로 옳다고 긍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성이무시가시誠以無是可是 옳게 여김이 없는 것으로써 옳게 여긴다.

수무시가시雖無是可是 옳게 여김이 없는 것이 옳게 긍정함이기는 하다고 인정해 주자.

 

고당시어무시의故當是於無是矣

그러므로 옳게 여김이 없는 것을 옳게 여기고 거기에 일치하게 된다.

 

시이경운是以經云 진제무상眞諦無相 고반야무지자故般若無知者

그러므로 경에서 말하기를 ‘진제는 모습이 없기 때문에 반야는 앎이 없다’라고 하였다.

 

성이반야무유유상지지誠以般若無有有相之知

이는 실로 반야는 허망한 有相을 앎이 없기 때문이다.

 

약이무상위무상若以無相爲無相 유하루어진제야有何累於眞諦耶

만일 無相으로써 반야의 무상을 삼는다면 무상인 반야에 무슨 누를 끼침이 있겠는가.

 

답왈答曰 성인무무상야聖人無無相也 답하여 이르되 성인은 무상까지도 없다.

하자何者 약이무상위무상若以無相爲無相 무의 모습까지도 무엇 때문에 부정되는가?

 

무상즉위상無相卽爲相 무상이라고 알고 집착하는 모습이 바로 유상이 된다.

사유이지무捨有而之無 유상을 버리고 무상으로 가는 것을

 

비유도봉이부학譬喩逃峰而赴壑 구불면어환의俱不免於患矣

비유해 보면 높은 산봉우리를 피하여 바다로 들어가는 것과 같아 양쪽 모두가 환란을 면치 못한다

 

시이지인是以至人 처유이불유處有而不有 거무이불무居無而不無

그러므로 至人(성인)은 유에 처하여도 유에 집착하지 않고

무에 거처해도 무에 집착하여 안주하지 않는다.

 

수불취어유무雖不取於有無 연역불사어유무然亦不捨於有無

유무를 취하여 집착하지 않지만 그러나 有無를 버리지도 않는다.

 

소이화광진로所以和光塵勞 주선오취周旋五趣

그러므로 塵勞의 세계에서 마음의 광채를 조화시키고 오취의 세계를 두루 돈다.

 

적연이왕寂然而往 파이이래怕爾而來 념담무위恬淡無爲 이무불위而無不爲

그리하여 고요하게 가고, 담박하게 와,

편안하고 담담하여 작위가 없으면서도 작위하지 않음이 없다.

 

난왈難曰 따져 보겠다.

성심수무지聖心雖無知 연기응회지도불차然其應會之道不差

성인의 마음은 허망을 취하는 앎이 없긴 하나

그러나 외연에 감응하여 상황에 회합하는 방편의 도는 어긋나지 않는다.

 

시이가응자응지是以可應者應之 불가응자존지不可應者存之

그러므로 감응해 줄 만한 상황에 감응을 해주고, 감응해서 안 될 것은 있는 그대로 둔다.

 

연즉성심然則聖心 유시이생有時而生 유시이멸有時而滅

이와 같다면 성인의 마음은 때로는 발생해 나오고 때로는 사라짐도 있다.

 

가득연호可得然乎 이와 같다 할 수 있겠는가.

답왈答曰 생멸자生滅者 생멸심야生滅心也 답하여 이르되, 생멸하는 것은 생멸하는 마음이다.

 

성인무심聖人無心 생멸언기生滅焉起 성인은 심의식이 없는데 생멸이 어디에서 일어나겠는가.

연비무심然非無心 그러나 무정물인 목석처럼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단시무심심이但是無心心耳 우비불응又非不應

다만 생멸하는 심의식으로써 마음을 삼음이 없을 뿐이며, 또 대상에 감응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단시불응응이但是不應應耳 감응하지 않음으로써 감응할 뿐이다.

시이성인응회지도是以聖人應會之道

그러므로 성인이 방편인 관조반야로 외연에 감응하여 회합하는 도는

 

즉신약사시지질則信若四時之質

춘하추동 사시절이 무심하게 어김없이 운행하는 실제처럼 확실하다(質은 실제의 의미이다)

 

직이허무위체直以虛無爲體 곧장 경지가 고요하고 번뇌가 사라진 허무로써 자체를 삼을 뿐이다.

사불가득이생斯不可得而生 불가득이멸야不可得而滅也

이는 발생한다 하지 못하고 사라진다 하지도 못한다.

 

난왈難曰 따져 보자.

성지지무聖智之無 혹지지무惑智之無 구무생멸俱無生滅 하이이지何以異之

성지가 없고 혹지도 없어 근본실지인 성지와 後得權智(관조반야)인 혹지가

모두 생멸이 없다면 무엇으로써 이를 다르다고 하겠는가.

 

답왈答曰 답하여 이르되

성지지무자무지聖智之無者無知 혹지지무자지무惑智之無者知無

성지가 없다 함은 앎이 없다 함이고, 혹지가 없다는 것은 허망한 앎이 본래 없다 함이다.

 

기무수동其無雖同 소이무자이야所以無者異也 이 둘이 없음은 동일하나 없는 원인은 다르다.

하자何者 무엇 때문에 이 둘이 동일하지 않겠는가.

 

부성심허정夫聖心虛靜 성인의 마음은 번뇌가 텅 비고 고요하여

무지가무無知可無 가왈무지可曰無知 무지를 알 만한 것도 없으므로 無知라는 말은 가능하나

비위지무非謂知無 미혹이 없음을 관조하여 안다함을 말한 것은 아니다.

 

혹지유지惑智有知 혹지는 관조의 작용으로 앎이 있다.

고유지가무故有知可無 그 때문에 허망의 미혹이 본래 없음을 앎이 있다.

 

가위지무可謂知無 비왈무지야非曰無知也

이는 허망한 미혹이 본래 없음을 照破하여 안다는 말은 가능해도 성지의 무지를 말함은 아니다.

 

무지無知 즉반야지무야卽般若之無也 지무知無 즉진제지무야卽眞諦之無也

성지의 무지는 반야의 무지이며 혹지의 知無는 진제의 무지이다.

 

시이반야지여진제是以般若之與眞諦 그러므로 반야와 진제는

언용즉동이이言用卽同而異 혹지의 작용을 말한다면 성지의 고요함과 동일하면서 다르고

언적즉이이동言寂卽異而同 성지의 고요함을 말한다면 혹지의 다름에 나아가 동일하다.

 

동고무심어피차同故無心於彼此

고요함은 혹지의 다름에 나아가 동일하기 때문에 피차에 무심하며

 

이고불실어조공異故不失於照功

작용은 성지의 고요함에 나아가 다르기 때문에 관조하는 공능을 잃지 않는다.

 

시이변동자동어이是以辨同者同於異

그러므로 성지의 고요한 측면에서 분별하면 작용의 다름에 나아가서 동일하며

 

변이자이어동辨異者異於同

혹지의 작용이 다른 측면에서 분별하면 동일한 성지의 고요함에서 관조의 작용이 다르다.

 

사즉불가득이이斯則不可得而異 불가득이동야不可得而同也

이는 성지의 고요함과 혹지의 작용을 다르다 하지 못하고 동일하다하지도 못한다.

 

하자何者 무엇 때문에 고요함과 작용을 동이로써 명칭하지 못하는가.

내유독감지용內有獨鑒之用 외유만법지실外有萬法之實

성지의 고요함 안엔 절대 홀로 작용하며 조감하는 밝음이 있고

밖으로는 만법의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만법수실萬法雖實 연비조부득然非照不得

밖으로 있는 만법이 진실이긴 하나 관조의 작용이 아니면 그 실제를 얻지 못한다.

 

내외상여內外相與 이성기조공以成其照功

안으로는 성지의 마음과 밖으로는 진실인 만법의 경계가 서로 함께하면서

관조의 공능을 성취한다.

 

차즉성소불능동此則聖所不能同 용야用也

이는 성지의 고요함이 관조의 작용과 동일하지 못함이니 작용이며

 

내수조이무지內雖照而無知

안으로는 만법의 진실을 관조하는 작용으로서의 공능이 있긴 하나 앎이 없다.

 

외수실이무상外雖實而無相 밖으로의 만법이 진실이긴 하나 진실은 모습이 없다.

내외적연內外寂然 상여구무相與俱無

내적으로 성지와 외적으로 만법의 진실이 고요하여 이 둘이 서로 함께 없다.

 

차즉성소불능이此則聖所不能異 적야寂也

이는 성지의 고요함이 관조의 작용과 다르지 못한 것이니 고요함이다.

 

시이경운是以經云 그러므로 경에서 말하기를

제법불이자諸法不異者

‘모든 작용하는 차별적인 법이 실상반야의 고요함과 다르지 않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기왈속부절학豈曰續凫截鶴 이악영학夷嶽盈壑 연후무이재然後無異哉

이는 어찌 학의 긴 다리를 절단하여 짧은 오리 다리에 잇고,

산악을 깎아서 골짜기를 메운 뒤에야 다름이 없음을 말하였겠는가.

(인위적인 조작을 의지한 뒤에 일제히 공평함은 아니다)

 

성이불이어이誠以不異於異 고수이이불이야故雖異而不異也

고요의 동일함이 작용의 다름에서도 다르지 않기 때문에

작용이 다르다 해서 고요의 동일함마저 다르진 않다.

(경계가 다르다 해서 그 마음마저 다르지 않다)

 

고경운故經云 그 때문에 경에서 말하였다.

심기세존甚奇世尊 매우 기이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어무이법중於無異法中 이설제법이而說諸法異

다름이 없는 실제법 가운데서 모든 법의 다름을 설명하시는군요.

 

우운又云 또 말하였다.

반야여설법般若與說法 역불일상亦不一相 역불이상亦不異相

반야와 모든 법은 하나의 모습도 아니고 다른 모습도 아니다.

 

신의信矣 이는 확신할 만하다 하겠다.

난왈難曰 따져보자.

 

논운論云 논문에서는 말하기를

언용즉이言用則異 언적즉동言寂則同

‘작용을 말하면 고요와 다르고 고요를 말하면 작용과 동일하다’라고 하였는데

 

미상未詳 자세히 모르겠다.

반야지내般若之內 즉유용적지이호則有用寂之異乎 반야의 안에 고요와 작용의 다름이 있는지를.

 

답왈答曰 그에 대해 답변하겠다.

적즉용寂卽用 용즉적用卽寂

작용의 다름이 바로 고요의 동일함이며, 고요가 바로 작용과 상즉관계이다.

 

용적체일用寂體一 동출이이명同出而異名

작용과 고요는 동일한 근원에서 나왔으나 명칭이 다르다.

 

갱무무용지적更無無用之寂 이주어용야而主於用也

작용 없는 고요함이 따로 작용의 주체가 되는 것은 없다.

 

시이지미매是以智彌昧 조유명照逾明

그러므로 성지가 고요히 어두울수록 관조의 작용은 더욱 밝아지고

 

신미정神彌靜 응유동應逾動

신령한 관조반야가 실지에서 고요할수록 감응의 작용은 더욱 움직인다.

 

기왈명매동정지이재豈曰明昧動靜之異哉

어찌 작용하면 밝고 고요하면 어두움이 다르다고 말하겠는가.

 

고성구운故成具云 불위이과위不爲而過爲

그러므로 <성구경>에서 말하기를 ‘작위하지 않으면서 지나치게 작위한다.’하였고

 

보적왈寶積曰 <보적경>에서 말하기를

무심무식無心無識 무불각지無不覺知

‘사량분별하는 심의식이 없지만 깨달아 알지 않음이 없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사즉궁신진지斯則窮神盡智

이는 신령한 관조반야의 작용으로써

사물의 진실을 끝까지 조감하여 실지반야로써 진여의 이치를

 

극상외지담야極象外之談也

극진히 관조한 事象밖으로 극치에 이른 담론인 것이다.

 

즉지명문卽之明文 성심가지의聖心可知矣

이러한 이치로써 나아가 논문의 종지를 밝힌다면 성인의 마음을 알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