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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詩/도연명陶淵明

기記 전傳 술述 찬贊 4. 독사술讀史述 7章

독사술讀史述 사기를 읽고 9편의 글을 짓다

7한비韓非

 

풍호은혈豐狐隱穴 풍성한 털을 가진 여우는 깊은 굴속에 숨어 있어도

이문자잔以文自殘 아름다운 털 때문에 스스로를 손상시키게 된다네.

군자실시君子失時 군자가 때를 놓치면

백수포관白首抱關 머리가 허옇게 세도록 관문關門이나 지킨다네

 

교행거재巧行居災 교묘한 행동은 재앙에 처하기 쉽고

기변소환忮辯召患 거스르는 언변은 환란을 불러온다네.

애의한생哀矣韓生 슬프다 한비韓非여

경사竟死<세난說難> 결국 <세난說難>으로 인하여 목숨을 잃었구나.

 

►한비韓非 전국시대 말기 한韓나라 출신이며 법가法家의 사상을 집대성한 정치 사상가이다.

한비자韓非子는 법치주의法治主義를 주창한 한비韓非와 그 일파의 논저論著이다.

 

한비는 청렴하고 결백한 사람들이 사악한 권신權臣들에 의해서 배척당하는 것을 슬퍼하며

예전 정치의 성공과 실패의 변천을 관찰하여서

고분孤憤, 오두五蠹, 내외저內外儲, 설림說林, 세난說難편 등 10여 만 자의 글을 저술하였다.

 

한비자는 말더듬이라 달변가는 아니었지만 논리 정연한 글 솜씨에 진왕(진시황)이 감탄하였으나

이사李斯와 요가姚賈가 한비자를 질투하여 한비자를 감옥에 가두어 독살시켰다.

/<史記列傳 권63 老子韓非列傳>

 

►풍호은혈豐狐隱穴 풍성한 털을 가진 여우가 깊은 굴속에 숨어 있다.

부풍호문표夫豐狐文豹 무릇 풍성한 털을 가진 여우와 아름다운 무늬의 가죽을 가진 표범이

서어산림棲於山林 산림山林 깊숙한 곳에 살며

복어암혈伏於巖穴 정야靜也 암혈巖穴 속에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은 고요함을 잘 지키는 것이다

즉 그들의 아름다운 털과 가죽이 죽음이라는 재앙을 가져온다는 뜻.

/<장자 외편 第20篇 山木> 2.빈 배(虛舟)처럼 자신을 비우면 걱정이 없다.

 

►포관抱關 문지기.

영내이문포관자야嬴乃夷門抱關者也 은사隱士 후영侯嬴은 일흔 살에 이문의 문지기에 지나지 않았다.

/<史記 권77 위공자열전魏公子列傳>

 

►교행巧行 교묘한 행동.

►기변忮辯 거스르는 언변. ‘기忮’ 거스르다.

►세난說難 유세遊說의 어려움.

한비韓非는 진나라의 옥에 갇혀서 자신의 유세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설움과 안타까움에서

‘세난편說難編’을 저술하였다./<사기 권 63. 노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傳>

 

 

제7장은 사마천의 사기史記 노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傳 중 한비韓非에 대한 평가이며

한비가 진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논리 정연한 글 솜씨로 인하여

이사李斯의 질투와 모략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을 애통해하며 지은 시이다.

 

 

●한비韓非(BC280?-BC233)

한비韓非는 중국 전국시대 호남성湖南省 서쪽에 위치했던 한韓나라의 왕족출신이었다.

전국시대 한나라는 패권을 다투던 전국칠웅戰國七雄 중에서 가장 작고 힘이 약한 나라였다.

 

젊은 시절에는 훗날 진秦나라의 책사가 된 이사李斯와 함께 성악설性惡說을 주창한

순자荀子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워 뒷날 법가法家의 사상을 집대성하였다.

 

국가의 운영을 위해서는 제도가 법제화 되어야 하고 성문화된 법은 엄격한 집행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강력하고 절대적인 왕권이 있어야 이상적인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고 했다.

또한 유가의 인의仁義을 주장하는 유세객들의 주장과 묵가의 겸애兼愛사상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비판하였다.

 

한비는 군웅群雄이 할거割據하는 약육강식의 전국시대에는 오히려 정치적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비는 이런 주장 때문에 권모술수權謀術數의 대가로 오해를 받기도 하였다.

 

한비는 이상적인 제도의 법제화를 통한 올바른 통치를 말한 것이며

이는 절대군주의 사사로운 판단이나 감정을 배제한 합리적이고 공개된 통치를 주장한 것이었다.

 

한비에 의하면 법은 귀족이라고 해서 예외를 두지 않고 모든 백성들에게 공평하게 적용하여

반드시 따라야만 하는 공리성公理性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형중즉불감이귀역천刑重則不敢以貴易賤

법을 집행하는 형벌이 엄중하면 귀족이 백성을 감히 업신여기지 못한다'고 했다.

 

또한 군주의 독단적인 1인 통치를 방지하기 위해 관료제官僚制를 주장했다.

권력이 집중되지 않고 분산되는 관료제는 법가사상의 이상적인 구현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주장은 한나라 왕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비는 초나라 재상 오기吳起가 법치로 나라의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성공한 사례를 들며

한나라의 상황을 한탄했으며 자신의 법가적 이상理想을 <한비자韓非子>라는 책으로 남겼다.

 

순자의 문하에서 함께 수학한 이사가 간지奸智에 뛰어난 변설가辯說家인 반면

한비는 타고난 말더듬이였으나 두뇌가 매우 명석하여 학자로서는 이사가 도저히 미칠 바 못 되었다.

진나라의 시황제는 한비의 고분孤憤 ·오두五蠹의 논설을 보고

“이 사람과 교유할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까지 감탄하였다 한다.

 

한비는 한나라의 세력이 약해지는 것을 염려하여 누누이 왕에게 간언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끝내 진의 공격을 받자 화평의 사신으로서 진나라로 갔다.

 

시황제는 한비를 보자 크게 기뻐하며 그를 진나라에 머물게 하려 하였으나

이사는 내심 이를 못 마땅히 여겨 한비를 한나라로 돌려보내면 반드시 후환後患이 있을 것이라고 모함하였다.

이사는 시황제에게 참언讒言하여 한비를 옥에 가두게 한 후 사약死藥을 내려 자살하게 하였다.

 

<한비韓非의 사상>

전국시대 말기의 사상가인 '한비韓非'는 한韓의 왕족으로 젊어서

진秦의 이사李斯와 함께 순자荀子에게 배워 뒷날 '법가法家'의 사상을 대성하였다.

 

한비는 조국 한나라의 쇠약함을 개탄하여

한왕韓王에게 여러 번 정치술에 대해 간諫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끝내 진의 공격을 받자 화평의 사신으로서 진나라로 갔다.

 

시황제는 한비를 보자 크게 기뻐하여 그를 아주 진에 머물게 하려 하였으나

진나라 이사李斯의 무고誣告로 옥사하였다.

 

한비는 타고난 말더듬이로 변설辯說에는 능하지 못하였으나

현실 분석과 대책에 뛰어나 <한비자韓非子> 등 저술을 남겼다.

 

▶한비의 사상을 정리하면

<인성이기설>

순자의 성악설性惡說을 계승하여 군신·부자·부부관계 등

인간의 일체의 행위가 이기적인 동기에서 나온다는 인성이기설人性利己說을 주장하였다.

 

<진보적 역사관>

道를 모든 사물이 운동하는 객관적 법칙으로 理를 구체적 사물이 운동하는 특수법칙으로 보고

양자는 불가분의 관계로 다 같이 사물 속에 존재하며 부단히 변화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를 통해 인류사회 역사가 끊임없이 변화하며

그 변화에 따라 법률이나 제도도 변해야 한다는 진보적인 역사관을 피력하였다.

 

<법치주의>

유가적 덕치를 바탕으로 한 인정仁政을 시대착오라고 비판하고 주관적인 지智나 신信이 아니라 객관적인

법과 세勢에 의존하는 신상필벌信賞必罰 실무본위實務本位의 법치를 주장하였다./네이버 지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