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대멸명澹臺滅明(BC512?-?)
1. 보잘 것 없는 외모
춘추시대 말기 노魯나라 무성武城(현 산둥성 平邑) 사람으로 성이 담대澹台이고 이름은 멸명滅明, 자는 자우子羽이다.
孔門72賢 중 한 명이고 교육가이며 공자보다 39세 어리다.
<사기 중니제자열전>에서 담대멸명은 외모가 아주 못생긴 인물로 나온다.
공자의 제자 자유子游가 무성武城의 수령으로 있을 때 등용한 인물로 공명정대하다는 평을 받았다.
자유의 추천으로 공자의 문하에 들어왔는데
공자가 그 외모를 보고는 용모가 추해서 별다른 재능이 있을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뒷날 그가 무성武城에서 오吳나라로 이주하여 학문을 가르치자
모여든 제자만도 300명이 넘어 천하에 이름을 떨쳤다고 한다.
주고받는 것, 나아가고 물러남이 분명하여 그 명성이 제후들 사이에 퍼져나갔다.
공자가 이를 듣고는
“내가 재여의 말재주만 보고 그를 취했다가 실수했고
얼굴로 사람을 판단했다가 자우(담대멸명)에게 실수했다.”며 자신의 잘못을 뒤늦게 인정했다.
►담대훼벽澹臺毁璧
澹臺滅明이 千金에 해당하는 귀중한 璧玉을 가지고 강을 건너가는데 河神이 이를 탐내어
대파신양후大波神陽侯의 파도를 일으키고 두 鮫人(인어)으로 붙잡았다.
멸명은
“나에게 의로써 구슬을 달라고 하면 모르되 힘으로써는 빼앗지 못할 것이니라” 하면서
왼손에 구슬을 쥐고 오른손에 칼을 잡아 교인을 쳐 죽이고 강을 건넌 후
구슬을 3번이나 강에 던졌으나 하신이 강에서 뛰어올라 되돌려 주므로
멸명이 마침내 구슬을 깨뜨려 버리고 떠나갔다.
2. 천하에 떨친 명성과 덕
담대멸명은 훗날 무성에서 초나라 지역(지금의 장시江西성 난창南昌으로 이주하여
그 지역에서 학문을 전수했는데 제자만 300명이 넘는 등 천하에 명성을 떨쳤다.
<논어> 등의 기록을 보면 담대멸명은 자신의 덕을 수양하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고
길을 다닐 때는 지름길로 가지 않았으며 공적인 일이 아니면 권력자들을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서 군자가 길을 가는 데 있어서 지름길을 취하지 않고 큰 길로 간다는 뜻의
‘행불유경行不由徑’이라는 고사성어가 나왔다.
►行不由徑 길을 갈 때 지름길을 지나지 않다.
일을 편의주의에 입각하여 처리하지 않는다. 行爲가 方正함의 비유.
자유가 무성읍의 수장이 되었을 때 공자께서
"너는 여기서 인재를 얻었느냐?"라고 물으셨다.
이에 자유가 말했다.
"담대멸명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길을 갈 때 지름길로 다니지 않고 공적인 일이 아니면 제 방에 온 적이 없습니다."
당나라 때에 강백江伯으로 추증되고
송나라 진종 대중상부大中祥符 2년(1009)에 금향후金鄕侯로 추봉되었다.
명 세종 가정嘉靖 때는 선현담대자先賢澹臺子라 불리었다.
담대멸명이 죽자 그의 제자들은 그를 고향 무성에 안장했다.
유가儒家에서는 그를 취푸曲阜 공묘孔廟 대성전大成殿에 위패를 모셔 공자와 함께 배향했고
명나라 때인 1624년에는 이현사二賢祠를 지어 증삼과 함께 모셨다.
1808년(청 가정 13년)에는 무덤 앞에 묘비를 세웠다.
3. 관련 유적
담대멸명은 초나라 지역으로 가서 학문을 전파했는데
이 때문에 지금의 장시성 난창에는 그와 관련한 유적이 적지 않게 남아 있다.
이 때문에 그의 무덤은 고향인 무성 외에 난창에도 무덤이 남아 있으며 허난성에도 한 곳이 전한다.
이밖에 장쑤성 쑤저우 남쪽에 담대호라는 호수가 있는데 전하기로는 담대멸명의 집이 주저앉아 호수가 된 것이라 한다.
호수 입구에는 옥대교라는 다리가 있다.
또 담대호 대교도 있는데 대운하 남북을 연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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