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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詩/매월당집梅月堂集

매월당 시집 제4권 13-7

매월당 시집 제4권 13-7

13 서화書畫 글씨와 그림

 

7 독춘추시讀春秋詩 <춘추>를 읽은 시

 

위재대성근엄필偉哉大聖謹嚴筆 위대하여라, 큰 성인의 근엄한 필치筆致여!

작어아망왕적멸作於雅亡王跡滅 아雅가 망하고 王의 종적이 없어진 뒤에 지었네.

수건대의존천자首建大義尊天子 맨 먼저 큰 의리 세워 天子를 높였는데

대서특서왕정월大書特書王正月 왕의 正月이라 큰 글자로 특별히 썼네.

 

양이토적정기강攘夷討賊整紀綱 이적夷狄을 배척, 역적을 성토해 기강을 세웠으니

자자화곤여부월字字華袞與鈇鉞 글자마다 화려한 곤룡포요 칼이요 또 도끼일세.

명호주철불부서鳴呼周轍不復西 슬프다! 周나라 수레 서편으로 다시 못 가

대부천정후전벌大夫擅政侯專伐 대부大夫가 정치를 멋대로 하고 제후들 마구 싸우는데

 

천왕지명옹허기天王之名擁虛器 천왕(天子)의 그 이름은 빈 그릇만 쥔 것

위재급호여류철危哉岌乎如旒綴 위태롭구나! 뒤뚝뒤뚝 기폭旗幅을 세운 것 같네.

하릉상체공헌이下陵上替貢獻弛 아래는 능멸하고 위는 쇠잔한데 공貢 바침마저 해이해

구거구금구부절求車求金求不絕 수레와 금을 요구하여 구하는 게 그치질 않았네.

 

오패질흥사존주五霸迭興似尊周 오패五覇가 차례로 일어나 주나라를 높이는 듯했네마는

쟁내사력비진실爭奈詐力非真實 어찌하랴? 거짓과 폭력일 뿐 진실이 아니었네.

욕협천자령제후欲挾天子令諸侯 천자를 끼고서 제후에게 명령을 하려는 것뿐이었으니

호가호위백수굴狐假虎威百獸屈 여우가 범의 위력 빌려 온갖 짐승을 굴복시킴일세.

 

시고부자대상탄是故夫子大傷嘆 이래서 孔夫子께서 크게 슬퍼 탄식하며

왈무의전증유설曰無義戰曾有說 의로운 전쟁은 없다고 일찍이 말씀하셨네.

이적불여화하례夷狄不與華夏例 이적夷狄이야 중국과 예例를 함께 하지 않네마는

오초자시련왕실吳楚自是連王室 오吳와 초楚는 본시부터 왕실에 연결 있었기에

 

재이필서의칙궐災異必書疑則闕 재변災變 있으면 꼭 썼네만 의심나면 빼버렸네.

월식불서필서일月食不書必書日 월식月蝕은 쓰지 않아도 일식은 꼭 썼으니

차개성인경후세此皆聖人警後世 그건 다 성인이 후세를 두고 경계함이라.

우지야심려지절憂之也深慮之切 근심함도 깊었고 염려 또한 간절했네.

 

대건백왕불역법大建百王不易法 크게 백대의 임금으로 바꾸지 못할 법 세웠는데

서수획린시종결西狩獲麟是終訣 서쪽으로 사냥 갔다 기린 잡았다는 게 끝말일세.

지성죄성재차서知聖罪聖在此書 성인을 알고 성인을 죄 주는 건 이 글에 다 실려 있으니

유여화공운신술猶如畫工運神術 화공畫工이 정신과 지모를 운용함과 같은 걸세.

 

수사요요천재하遂使遙遙千載下 드디어 멀고 먼 천년 뒤 지금까지

란신적자개굴슬亂臣賊子皆屈膝 난신亂臣과 적자賊子들을 다 무릎 굽히었네.

오호공곡전기와嗚呼公穀傳其訛 어허! 공양公羊과 곡량穀梁씨 그 잘못된 걸 전했고

좌씨부과불경출左氏浮夸不經出 좌씨의 뜬소리는 과장된 것 경經에서 나온 게 아닐세.

 

후인의필실기진後人疑必失其真 후세 사람들 반드시 그 참 뜻 잃은 걸 의심하리니

간편단착다유궐簡編斷錯多遺闕 대쪽 엮은 것 끊어져 뒤섞인 게 많았네.

창려속전구유경昌黎束傳求遺經 창려昌黎는 전傳을 묶어 유실된 경經 구했고

림천단란무가질臨川斷爛無可質 임천臨川은 끊어지고 썩은 걸 질정質正할 데 없었네.

 

한유명언대일통漢儒明言大一統 한漢의 선비들 분명히 대일통大一統을 말했는데

분분력력의론별紛紛歷歷議論別 분분하고 역력하게 의논함이 달라졌네.

자종호씨일산번自從胡氏一刪煩 호씨胡氏가 한 번 번거로운 것 깎아 버린 뒤로는

표출대의凜상설表出大義凜霜雪 큰 의리 표명해 내어 서리 눈보다 늠렬凜烈하네.

 

아본천재연조사我本千載燕趙士 내 본디 천년 전 燕趙의 선비로

무검격축비오열撫劔擊筑悲嗚咽 칼 어루만지고 장구 치며 슬퍼서 흐느꼈네.

피상일독일장탄披床一讀一長嘆 책상에 펼쳐 놓고 읽곤 한번 탄식하는데

서풍위아취절절西風爲我吹浙浙 서풍이 날 위해 쓸쓸하게 불어오네.

 

►춘추春秋

1)봄과 가을을 아울러 이르는 말.

2)‘해’를 문어적文語的으로 이르는 말.

3)어른의 나이를 높여 이르는 말.

 

<春秋>는 春秋時代 노魯의 은공隱公 元年(BC722)에서 애공哀公 14년(BC481)까지

12代 242년 동안의 歷史를 편년체編年體로 기록하고 있다.

 

기원전 5세기 초에 孔子(BC552-BC479)가

노魯에 전해지던 史官의 기록을 직접 편수編修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학儒學에서 五經의 하나로 여겨지며

東周시대의 전반기를 春秋時代라고 부르는 것도 이 책의 명칭에서 비롯되었다.

 

孔子가 편수編修하기 이전에 이미 노魯에는 <春秋)>라고 불리는

史官의 기록이 전해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孟子>에는 春秋時代의 列國들이 각각 史官을 두어 事跡을 정리했는데

진晉에는 ‘승乘’ 초楚에는 ‘도올檮杌’ 노魯에는 ‘春秋’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노魯에 전해지던 기록을 孔子가 스스로의 역사의식과 가치관에 따라

새롭게 편수編修한 것으로 알려진 것이 오늘날의 <春秋>이다.

 

사마천司馬遷(BC145?-BC86?)의 <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篇에는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해진다.

 

“군자는 죽은 후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을 것을 걱정한다.

나의 도가 행해지지 않았으니 그럼 나는 무엇으로 후세에 이름을 남기겠는가.

이에 공자는 역사의 기록에 근거해서 <春秋>를 지었다.

(‧‧‧)

공자는 지난날 소송안건을 심리하였을 때에도 글의 표현[文辭]을

다른 사람과 의논해야 할 때에는 결코 자기 혼자서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춘추>를 지을 때에는 결단코 기록할 것은 기록하고

삭제할 것은 삭제하였기 때문에 子夏와 같은 제자들도 한마디 거들 수가 없었다.

 

제자들이 <춘추>의 뜻을 전수받은 뒤 공자는 말하였다.

“후세에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춘추> 때문일 것이며

나를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역시 <춘추> 때문일 것이다.”

 

<春秋>는 1800여 條의 내용이 1만 6500여 字로 이루어져 있어

간결한 서술을 특징으로 한다.

 

공자는 사실을 간략히 기록했을 뿐 비평이나 설명은 철저히 삼갔는데

직분職分을 바로잡는 正名과 엄격히 善惡을 판별하는 포폄褒貶의 원칙에 따라

용어를 철저히 구별하여 서술하였다.

 

예를 들어 사람이 죽었을 때도 대상이나 명분에 따라 ‘시弑’와 ‘살殺’을 구분하였으며

다른 나라를 쳐들어갔을 때도 ‘침侵’ ‘벌伐’ ‘입入’ ‘취取’ 등의 표현을 구분해 사용했다.

 

이처럼 孔子는 <春秋>에서 단순히 역사적 사실만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大義名分을 밝혀 그것으로써 천하의 질서를 바로 세우려 하였다.

이로부터 名分에 따라 준엄하게 기록하는 것을 ‘春秋筆法’이라고 한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춘추>는 노魯의 역사를 중심으로 삼고, 周를 宗主로 하고

殷의 제도를 참작하여 夏, 商, 周 3대의 법률을 계승하고 있다.

 

그 문사文辭는 간략하지만 제시하고자 하는 뜻은 넓다.

그래서 吳와 楚의 군주가 왕을 자칭하였지만

<춘추>에서는 그것을 낮추어 본래의 작위爵位인 자작子爵으로 칭하였다.

 

천토踐土의 회맹會盟은 실제로는 諸侯가 周의 天子를 부른 것이지만 <춘추>에서는

그 사실을 피해서 ‘천자가 하양河陽으로 수렵을 나갔다’라고 기록하였다.

 

이런 사안들을 들어서 당세當世의 법통을 바로잡는 기준으로 삼았다.

이와 같은 제후들에 대한 폄손貶損의 뜻은

후에 군주가 될 사람들이 이를 참고하여 실행하게 하는 데 있다.

 

<춘추>의 대의가 행해지게 되면

곧 천하의 난신적자亂臣賊子들이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맹자孟子는

“옳지 못한 說과 포악한 행동이 행해지고, 신하로서 임금을 죽이고,

자식으로서 아버지를 죽이는 자가 있어 공자가 이런 세태를 두려워해 <춘추>를 지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춘추>는 名分에 따라 용어들을 엄격히 구별하여 서술하였고

내용이 매우 간단하게 기록되어 의미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때문에 수많은 학자들이 이해를 돕고자

그 의미를 해석하고 풀이하는 주석서註釋書인 ‘전傳’을 지어 ‘춘추학春秋學’이 생겼다.

 

반고班固(32-92)의 <漢書 예문지藝文志>에는

<춘추>에 대한 전傳이 모두 23家 948篇이나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戰國時代에 공양고公羊高가 지은 <공양전公羊傳>

곡량숙穀梁俶(穀梁赤)의 <곡량전穀梁傳>

좌구명左丘明의 <좌씨전左氏傳>을 ‘春秋三傳’이라 한다.

 

<左氏傳>은 <춘추>에 기록된 史實에 대한 역사적 실증적 해석을 중심으로 春秋大義를 규명하며

<공양전公羊傳><곡량전穀梁傳>은 經文 해석 중심으로 기록된 사실의 내재적 의미를 규명한다.

 

<춘추>는 단행본이었지만 지금은 주석서인 春秋三傳의 부속 형태로 전하고 있다.

 

‘춘추’라는 말은 시간의 추이推移를 상징한 春夏秋冬의 약어로서 ‘一年間’이라는 뜻인데

본래는 주周 왕조王朝 치하 각 제후국의 독자적인 편년사를 가리키는 통칭이었으며

<吳越春秋><呂氏春秋><十六國春秋> 등에서도 그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춘추>는 본래 노나라의 史官이 기록한 宮廷年代記였는데

여기에 孔子가 독자적인 역사의식과 가치관을 가지고 필삭筆削을 가함으로써

단순한 궁정연대기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이다.

 

유가의 문헌 가운데 <춘추>에 관한 언급이 최초로 보이는 것은

<맹자 등문공하滕文公下·이루하離婁下>로서

맹자는 당시 주왕조周王朝의 권위가 쇠미하여 道義가 행해지지 않고

君父를 시해하는 亂臣賊子가 나타나는 혼란기에 공자가 명분을 바로잡고

인륜을 밝혀 세태를 바로잡고자 <춘추>를 지었다고 했다.

 

단순한 역사적 사실만을 담고 있는 책이 아니라

사건에 의탁하여 大義名分을 피력한 책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춘추>를 경經으로 권위를 높인 것은 순자荀子다.

<순자 권학勸學·유효儒效>에서는 처음으로

<詩經><書經><禮記><樂經>과 함께 五經의 하나로서 <춘추>를 들고 있다.

 

이로부터 漢代에 이르러 비로소 <춘추>에 담겨져 있는

공자의 미언대의微言大義를 밝히려는 春秋學이 성립되었다.

 

<춘추>는 단순한 역사적 사실만을 담고 있는 책은 아니며 <춘추>의 경문 속에서는

사건이나 인물이 공자의 禮와 명분을 중시하는 정치 이념 아래 비판 또는 평가되고 있다.

 

<춘추>는 사건에 의탁하여 대의명분을 피력한 책이며

공자의 독특한 필법이 경문 전체에 일관하고 있다.

 

공자의 미언대의微言大義는

<춘추>의 서술 방식이나 용어 사용의 일정한 원칙 속에서 드러나고 있는데

경문의 내용이 지극히 간절簡切하여 그것을 해석한 傳을 매개로 하지 않고는

원 뜻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춘추삼전에 수록된 경문의 내용은 대부분이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지는 않지만

인명·지명·국명 등의 문자 상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경문의 시작이 은공 1년(서기전 722)인 것은 같지만

끝이 <공양전><곡량전>이 애공 14년(서기전 481)

<좌씨전>이 애공 16년(서기전 479)으로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한대에 이르러 <공양전><곡량전><좌씨전>의 순으로 學官에 채택되었으며

이후 삼전이 今古文學派 사이의 논쟁 속에서 太學의 교재로서 우열을 다투었으나

후한後漢의 정현鄭玄 이후에는 <좌씨전>이 가장 성행하였다.

 

현재 13경 속에는 3전이 각각 하나의 경전으로 포함되어 있으며

이 책은 주자학파朱子學派에서 사용되면서 학자들이 상당히 신봉했다.

<춘추>의 경문은 <좌씨전>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 이래로 <좌씨전>을 유교의 주요 경전으로 삼고 애독하였다.

 

<춘추>에 관한 주요 주석서로는 唐代 육순陸淳의

<춘추집전석례春秋集傳釋例><춘추집전변의春秋集傳辨疑><춘추미지春秋微旨>

 

宋代 손복孫腹의 <춘추존왕발미春秋尊王發微> 왕석王晳의 <춘추황강론春秋皇綱論>

유창劉敞의 <춘추권형春秋權衡> 호안국胡安國의 <춘추전春秋傳>

 

元代 정단학程端學의 <춘추본의春秋本義>

조방趙汸의 <춘추사설春秋師說><춘추금쇄시春秋金鎖匙><춘추집전春秋集傳>

 

明代 육찬陸粲의 <춘추호전고오春秋胡傳考誤><춘추호전변오春秋胡傳辨誤>

靑代 고동고顧棟高의 <춘추대사표春秋大事表><여도輿圖>

홍양길洪亮吉의 <춘추십론春秋十論> 혜사기惠士奇의 <반농춘추설半農春秋說>

모기령毛奇齡의 <춘추속사비사기春秋屬辭比事記><춘추모씨전春秋毛氏傳>

임춘부林春傅의 <춘추경전비사春秋經傳比事> 장응창張應昌의 <춘추속사변례편春秋屬辭辨例編>

학의행郝懿行의 <춘추설략春秋說略> 조탄趙坦의 <춘추삼전이문전春秋三傳異文箋>

이부손李富孫의 <춘추삼전이문석春秋三傳異文釋> 등이 있다./네이버 지식백과

 

►근엄謹嚴 조심성操心性 있고 엄밀嚴密함. 점잖고 엄함.

언행에 조심성이 있고 엄숙하며 경거망동하지 아니함을 말한다.

 

►아망雅亡 아雅는 아악雅樂.

<시경詩經>의 대아大雅·소아小雅는 모두 악장樂章이었는데

그것이 周나라가 동천東遷한 3백년 후에 끊어졌으므로 ‘아망雅亡’이라 하였다.

 

►적멸跡滅=종멸蹤滅

 

●강설江雪/유종원柳宗元(773-819 唐)

천산조비절千山鳥飛絶 산에는 새들 날지 않고

만경인종멸萬徑人蹤滅 길에는 사람 발자취 없는데

고주사립옹孤舟簑笠翁 도롱이와 삿갓에 조각배 타고

독조한강설獨釣寒江雪 눈발 속에 홀로 낚싯대 드리운 늙은이

 

►대서특서왕정월大書特書王正月 왕의 正月이라 큰 글자로 특별히 썼네.

춘왕정월春王正月 <춘추>의 첫 구절

새해를 정하는 기준을 말한 것이다.

夏殷周 각 나라의 달력은 相異했다.

 

오늘날의 음력달력은 夏曆이라 할 수 있다.

한漢나라는 진秦나라의 전욱력顓頊曆을 사용하여 亥月(10월)을 歲首로 사용하였으나

사마천의 주장으로 寅月을 歲首로 하고 冬至를 11월(子月)로 하는 太初曆을 제정하였고

이후 이를 기본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다시 말해보면

주나라는 음력 11월 동짓달을 1월로 삼았고

은나라는 음력 12월을 1월로 삼고

하나라는 음력 1월이다.

 

결국 주나라의 달력인 周正으로 따진다면

동짓달 즉 음력 11월을 한 해의 시작인 正月으로 하니

춘추 원문의 '王正月'은 현대로 따지면 음력 11월이다.

 

따라서 '春王正月'은 '봄이면서 주나라 달력으로 새해 첫 달'이라는 쉬운 표현이지만

그 실체를 들여다보면 음력 11월 겨울을 정월 봄이라고 표기하는 기이한 말일 수 있다.

11월 12월 1월 2월 3월 4월
23-01 01-03 03-05 05-07 07-09 09-11
대설 동지 소한 대한 입춘 우수 경칩 춘분 청명 곡우 입하 소만
지뢰복地雷復 지택림地澤臨 지천태地天泰 뇌천대장雷天大壯 택천쾌澤天夬 중천건重天乾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13 13-15 15-17 17-19 19-21 21-23
망종 하지 소서 대서 입추 처서 백로 추분 한로 상강 입동 소설
천풍구天風姤 천산돈天山遯 천지비天地否 풍지관風地觀 산지박山地剝 중지곤重地坤

 

十二消息卦 붉은 陽이 생겨났다 사라진다

 

►양이토적정기강攘夷討賊整紀綱 이적夷狄을 배척, 역적을 성토해 기강을 세웠으니

‘양이攘夷’ 외국 사람을 오랑캐라고 하여 얕보고 배척排斥함.

존주양이尊周攘夷 주(BC1046-BC771) 왕실을 높이고 동이족을 내친다.

 

‘토적討賊’ 도둑을 침. 역적逆賊을 토벌討伐.

 

중국은 4방이 東夷 西戎 南蠻 北狄으로 싸여 있고 그 중앙이 中華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4방의 무리들은 야만인이고 그 자신들은 문명인이라 여겨 자신들을 우위에 두었다.

이것은 지금 중국인들의 행위로 나타난다.

남을 누르고 깔보며 내 것은 좋은 것이고

남의 것들은 모두 자신의 것을 본 뜬 것이라고 우쭐거린다.

 

공자 맹자 순자 주자 뭐 이런 사람들이라고 여기서 예외일 수 없다.

지구를 굽어보고 우주에 눈을 돌리고 거시와 微視世界를 보는 그런 시대가 아니었다 .

오직 문자에 流轉될 뿐

 

사람들은 여러 가지 상황과 처지, 이해타산에 따라 자신을 합리화시킨다.

도척의 개는 도척에게는 꼬리를 흔들지만 聖人에게도 짖어대고

주인이 지 밥 뺏으면 으르렁 거린다.

 

우리나란들 안 그럴까?

글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종대왕을 너무나 늦게 만났다.

세종 이전과 이후의 한글이 정착되고 지금도

그리고 늙은이 된 나도 한자문화에 예속되어 있다.

 

글로 나타낼 수밖에 없기에 글자는 나의 뇌를 한정하고 구조화 시킨다.

禪宗의 宗은 不立文字 直指人心 見性成佛이다.

 

►자자화곤여부월字字華袞與鈇鉞 글자마다 화려한 곤룡포요 칼이요 또 도끼일세.

부월鈇鉞 ‘도끼 부鈇’ ‘도끼 월鉞’

 

부월鈇鉞은 작은 도끼와 큰 도끼인데 형벌의 기구이다.

역사서에서 포폄褒貶 즉 칭찬稱讚함과 나무람. 是非善惡을 평정評定함이다.

 

제후는 천자가 궁시弓矢를 하사해야 정벌할 수 있고

부월을 하사해야 사람을 죽일 수 있다./<예기禮記 왕제王制>

 

이 句는 <춘추>의 목적과 맹자가 <춘추>를 내세운 것을 나타낸다.

 

►‘멋대로 할 천, 선양할 선擅’ 멋대로 하다. 제 마음대로 처단하다.

►위재급호여류철危哉岌乎如旒綴 위태롭구나! 뒤뚝뒤뚝 기폭旗幅을 세운 것 같네.

‘높을 급岌’ 높다, 높이 솟다. 위태危殆롭다.

 

‘유철旒綴’=철류綴旒. ‘깃발 류(유)旒’

유旒는 깃술이고 철綴은 매단다는 말이다.

곧 깃술이 바람 따라 흔들리며 왔다 갔다 하는 것처럼

임금이 권위를 잃고 신하에게 끌려 다니는 것을 말하는데

주로 국가의 위태로움을 비유할 때 사용한다.

 

►춘추오패

1)제환공齊桓公((재위BC697-686)

2)진문공晉文公(재위BC636-628)

3)진목공秦穆公(재위BC659-621)

4)초장왕楚莊王(재위BC613-591)

5)吳王 부차夫差(?-BC473 재위496-BC473)

6)월왕越王 구천勾踐(?-BC465 재위BC496-BC465)

 

<순자荀子>에 의하면 5패는

제齊 환공桓公, 진晉 문공文公, 초楚 장왕莊王, 吳王 합려闔閭, 越王 구천勾踐인데

진秦 목공穆公, 宋 양공襄公이나 오왕 부차夫差 등을 꼽기도 한다.

 

<맹자孟子고자告子> 下에

“五覇者 三五之罪人也”라 하고 주註에

“五覇者 大國直道 以率諸侯 齊桓 晉文 秦穆 宋襄 楚莊公是也”라 하였는데

<백호통白虎通>에는 “五覇謂 齊桓公 晉文公 秦穆公 楚莊王 吳王閭也"라 하였다.

 

기원전 770년, 周나라 평왕이 洛陽으로 천도하였다.

천도 이전을 西周, 이후가 東周시대이다.

 

동주시대는 春秋時代(BC770-BC403)와 戰國時代(BC402-BC221)로 나뉜다.

춘추시대는 주나라 왕조가 도읍을 옮긴 때로부터 진晉나라의 大夫인 한韓, 위魏, 조趙

삼씨가 진나라를 분할하여 제후로 독립할 때까지(BC403)의 시대이다.

 

전국시대는 그 이후부터 진秦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기원전 221년까지이다.

춘추春秋는 공자가 엮은 노魯나라의 역사서 <춘추春秋>에서 유래했고

전국戰國은 한漢나라 유향劉向이 쓴 <전국책戰國策>에서 유래했다.

 

춘추오패春秋五覇는 5인의 覇者로 오백五伯이라고도 한다.

諸國間 혹은 諸侯間에 맺어지는 회합이나 맹약을 會盟이라 하며

회맹의 맹주盟主가 된 자를 패자라 한다.

 

이들 패자는 모두 존왕양이尊王攘夷를 내세웠는데 이는 춘추시대가 패자들이

당대 최고의 실력자이긴 했지만 주 왕실을 쓰러뜨려 천하를 잡으려고 하기보다는

‘존왕尊王’의 기치를 내걸고 주나라 왕을 정신적인 지주로 인정하던 시대임을 보여준다.

 

►‘재이災異’ 재앙災殃이 되는 괴이怪異한 일. 천재天災와 지이地異.

►서수렵린西狩獵麟 서쪽으로 사냥 갔다가 기린을 잡았다

노魯나라 애공袁公이 14년에 서쪽으로 사냥 갔다가 기린을 잡았다는 고사.

 

십유사년춘十有四年春 서수획린西狩獲麟

14년 봄, 서쪽에서 사냥하여 기린을 잡았다.

 

<춘추> 애공哀公 14년조에 ​'획린'이라고도 불리는 춘추의 마지막 부분이고

아래는 <춘추좌씨전> 주註이다.

 

린자인수麟者仁獸 기린은 인자한 짐승으로

성왕지가서야聖王之嘉瑞也 성왕의 아름다운 상서이다.

 

시무명왕時無明王 이때 성명한 왕이 없었는데도

출이우획出而遇獲 기린이 나왔다가 잡혔으니

 

중니상주도지불흥仲尼傷周道之不興 중니는 주나라의 도가 융성하지 않는 것에 가슴 아파하고

감가서지무응感嘉瑞之無應 아름다운 상서가 응험이 없는 것에 감분하였다.

 

고인로춘추이수중흥지교故因魯春秋而修中興之敎

그러므로 <노춘추>에 의거하여 중흥의 교화를 수명하셨다.

 

절필어획린지일구絶筆於獲麟之一句 ‘獲麟’하였다는 한 구에서 붓을 멈춘 것은

소감이작所感而作 〈본래 기린이 잡힌 것을 보고서〉 느낀 바가 있어서 짓기를 시작하였기 때문에

고소이위종야固所以爲終也 〈獲麟으로〉 끝마친 것이다.

 

동렵왈수冬獵曰狩 겨울 사냥을 ‘狩’라 한다.

 

개우인수상직蓋虞人修常職 고불서수자故不書狩者

대개 虞人(산택을 맡은 관리)이 고유의 직무를 수행하였기 때문에

사냥한 자를 기록하지 않은 듯하다.

 

대야재로서大野在魯西 고언서수故言西狩

大野가 노나라 서쪽에 있기 때문에 ‘西狩’라 한 것이다.

 

득용왈획得用曰獲

〈구기를 만드는 재료로 그 피혁‧골각‧우모를〉 쓸 수 있는 짐승을 잡는 것은 ‘獲’이라 한다.

 

►요요遙遙 매우 멀고 아득함.

►공곡公穀 공양과 곡량씨

<춘추>의 경문經文은 너무 글자를 줄여 써서 잘 해독할 수 없으므로

<춘추>를 주석한 것으로 좌씨전左氏傳·공양전公羊傳·곡량전穀梁傳이 있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좌씨춘추左氏春秋><좌전左傳>

좌전은 노魯 은공隱公 원년(BC722)부터 애공哀公 14년(BC481)에 이르는

약 242년의 역사를 다루고 있고 <국어國語>와 자매편으로 좌구명佐丘明이 집필했다.

 

<춘추>와는 성질이 다른 별개의 저서로서

<공양전公羊傳><곡량전穀梁傳>과 함께 三傳의 하나이다.

 

원본은 전국시대에 되었으나 지금 전해지는 것은 前漢 말기 유흠劉歆 일파가 편찬한 것이다.

다른 二傳이 경문經文의 사구辭句에 대한 필법筆法을 설명한 것에 비하여

이 책은 경문에서 독립된 역사적인 이야기와 문장의 교묘함 및

인물묘사의 정확이라는 점 등에서 문학작품으로도 뛰어나 고전문의 모범이 된다.

 

<공양전公羊傳>

<春秋>를 해석한 책으로 <春秋公羊傳>이라고도 불리며 모두 11권으로 되어 있다.

 

孔子가 저술한 것으로 전해지는 <春秋>는 매우 간결한 서술을 특징으로 하며

名分에 따라 용어들을 엄격히 구별하고 있다.

 

때문에 수많은 학자들이 그 의미를 해석하고 풀이하는 註釋書 ‘전傳’을 지으면서

이른바 ‘春秋學’이 나타났는데 반고班固(32-92)의 <漢書> 예문지藝文志에는

<춘추>에 대한 전傳이 모두 23家 948篇이나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左氏傳>은 <춘추>에 기록된 史實에 대한 역사적 실증적 해석을 중심으로

<公羊傳>과 <穀梁傳>은 經文 해석을 중심으로 한다.

특히 <공양전>은 問答 형식으로 경문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어

예로부터 <춘추>의 經文에 숨겨져 있는 공자의 뜻

곧 미언대의微言大義를 밝히는 중요한 서적으로 여겨졌다.

 

<漢書> 藝文志에는 戰國時代에 제齊 나라 사람인 ‘공양자公羊子’가 저술하였으며

<公羊外傳> 50편이 별도로 있었지만 외전은 모두 없어졌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唐의 서언徐彦은 後漢시대 대굉戴宏의 글을 인용하여 公羊子의 이름이 고高이며

공자의 제자인 子夏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아울러 공양고公羊高 한 개인이 아니라 공양평公羊平, 공양지公羊地, 공양감公羊敢 등을 거치며

대를 이어 家學으로 연구되다가 前漢 경제景帝(BC156-BC141 재위) 때에 공양수公羊壽가

호모자도胡母子都(胡毋生)와 함께 책으로 편찬했다고 밝히고 있다.

 

漢시대에는 동중서董仲舒가 <공양전>을 근거로 유교적인 사상 통일을 꾀하면서

‘公羊學’이 성행하기도 하였는데 <춘추>에 담긴 이른바

'微言大義'를 問答 형식으로 풀이하여 서한시대 金文經學의 주요 경전이었다.

 

그러나 東漢 이후로는 <좌전>에 밀려서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청나라 후기에 들어서

이 경전에 대한 연구를 통해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는 대안을 찾으려는 캉유웨이[康有爲],

량치차오[梁啓超], 쑨원[孫文] 등에게도 영향을 주어 辛亥革命의 사상적 배경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이 책의 해설서로는 동한 때 하휴何休(129-182)가 편찬한 <春秋公羊解詁>와

청나라 때 진립陳立이 편찬한 <公羊義疏> 등이 있다.

 

<곡량전穀梁傳>

정식 명칭은 <춘추곡량전>(11권)이다.

전국시대의 노魯나라 사람 곡량숙穀梁俶이 지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책이 되어 나온 것은 <공양전>(한나라의 경제 때에 나옴)보다 뒤일 것이다.

 

해석하는 형태는 <공양전>과 거의 같아서 주관적인 해석이 많으나

儒家的 名分論은 대체로 <공양전>보다 嚴正하다.

 

한나라의 선제宣帝 때부터 성행하기 시작했으나 <공양전>을 능가하지는 못하였다.

이 책은 주로 어록체語錄體와 대화체로 <춘추>의 의미를 풀이하면서

禮樂을 통한 敎化와 宗法制度 당위성, 존왕尊王 사상 등을 주장하고 있다.

 

주석서로는 진晉나라 때 범녕范寧이 편찬한 <춘추곡량전집해春秋穀梁傳集解>와

청나라 때 종문증鍾文烝이 편찬한 <곡량보주穀梁補注> 등이 있다.

 

►간편단착다유궐簡編斷錯多遺闕 대쪽 엮은 것 끊어져 뒤섞인 게 많았네.

‘간편簡編’ 대쪽 엮은 것.

옛날의 책은 대폭[簡]에 써서 가죽으로 엮었는데

그 엮은 가죽 끈이 끊어지면 대쪽이 없어지거나 뒤바뀌기도 했다.

 

‘유궐遺闕’ 예禮에 이지러진 관습을 자손에 끼침.

 

►창려昌黎 당唐나라의 문호文豪 한유韓愈(768-824)

宋代 이후 성리학의 선구자였던 중국 당나라의 문학가 겸 사상가.

 

문학상의 공적은 첫째, 산문의 文體改革을 들 수 있다.

종래의 對句를 중심으로 짓는 騈文에 반대하고

자유로운 형의 古文을 친구 유종원柳宗元 등과 함께 창도하였다.

고문은 송대 이후 중국 산문문체의 표준이 되었으며

그의 문장은 그 모범으로 알려졌다.

 

둘째, 시에 있어 지적인 흥미를 정련精練된 표현으로 나타낼 것을 시도

그 결과 때로는 난해하고 산문적이라는 비난도 받지만

제재題材의 확장과 더불어 송대의 시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사상분야에서는 유가의 사상을 존중하고 도교 ·불교를 배격하였으며

송대 이후 성리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창려선생집昌黎先生集>(40권) <外集>(10권) <遺文>(1권) 등.

 

(‧‧‧)

춘추삼전속고각春秋三傳束高閣 춘추 삼전은 다 보아서 높은 누각에 묶어 두고

독포유경구종시獨抱遺經究終始 홀로 성인이 남긴 경서를 품고 처음부터 끝까지 연구하신다

왕년농필조동이往年弄筆嘲同異 왕년에는 붓을 놀려 이름이 같음과 다름으로 조소하였고

괴사경중방불이恠辭驚衆謗不已 괴상한 말로 사람을 놀라게 하여 비방이 그치지 않았다

(‧‧‧)

/한유韓愈 (기노동寄盧仝 노동 선생에게>

 

►림천단란무가질臨川斷爛無可質 임천臨川은 끊어지고 썩은 걸 질정質正할 데 없었네.

‘임천臨川’ 송宋나라의 왕안석王安石.

‘단란斷爛’ 이지러져서 완전하지 못한 것

그는 정치나 학문에 늘 비뚤어진 의견을 제시한 것이 많아서 “斷爛無可質”이라 하였다.

 

단란조보斷爛朝報 ‘조보朝報’ 정부에서 발행하는 단편적인 공고.

끊어지고 문드러진 조보朝報라는 뜻으로 불완전한 책.

송宋 왕안석王安石이 유가儒家의 중요 경전 <春秋>를 폄하한 말에서 유래.

 

선유전주先儒傳注 일체폐불용一切廢不用

전통적으로 전해지던 선대 유학자들의 주석을 일체 무시했으며

 

출춘추지서黜春秋之書 불사렬어학관不使列於學官

<춘추>를 폄하해 축출하여 學官에 넣지 못하게 했다.

 

지희목위단란조보至戲目為斷爛朝報

심지어 장난삼아 <춘추>를 지목하여 단란조보라고 기롱하기도 했다

/<宋史 王安石傳>

 

당대 정치인이자 경학가였던 왕안석은 <춘추>를 해석하여 세상에 펴내려고 했는데

그보다 먼저 손신로孫莘老의 <춘추경해春秋經解>가 나오게 되었다.

 

이보다 더 나은 주석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왕안석은 오히려 <춘추>를 헐뜯어

애초에 경전 자체가 문제가 있다고 폄하하면서 교육기관에서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인재 등용의 평가 기준 항목에서도 제외 시켰다.

 

이 고사에서 전하여 단란조보라는 말은 여기 저기 헤지고 조각나 가치가 없는 책,

내용이 거칠고 엉망인 글을 가리키는 성어로 쓰인다.

 

왕안석王安石(1021-1086)

조선 세종은 왕안석을 가리켜 “재주는 많지만 소인이다”라고 평가했다.

한편, 정조는 주자학의 공식대로 왕안석을 비판하면서도

“그가 시행한 신법이 어찌 모두 잘못이었겠는가?

좋은 제도도 많은 것을 훗날 모두 폐지해 버렸으니 안타까운 일이다”라는 언급을 덧붙였다.

 

왕안석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는 유교 문화권에서 살던

전근대 동아시아인의 난제 중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대일통大一統 대통일. 전국의 완전한 통일.

一統을 중히 여긴다는 의미로 <春秋>에서 나온 말.

 

大一統이라는 단어는 <춘추공양전>에서 처음 사용된다.

<춘추>의 첫 머리인 '元年, 春, 王正月'을

 

'元年者何 君之始年也 春者何 歲之始也 王者孰謂 謂文王也

曷為先言王而後言正月 王正月也 何言乎王正月 大一統也'

라고 해석하면서 대일통이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되었다.

 

비록 대일통이라는 단어는 <춘추공양전>를 통틀어 단 한 번 밖에 나오지 않지만

<춘추>와 <춘추공양전>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의미라고 할 수 있다.

 

대일통이라는 말은 하나로 통일됨을 드높인다는 의미로

이는 공자가 바라던 주나라 천제로 모든 제후들이 통일되는 것을 의미한다.

 

대일통이라는 말은 그러므로 공자의 사상과 그가 바라던 이상 국가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한 명의 왕 아래 모든 것들이 질서 있게 유지되고

왕도정치가 실현되는 모습을 나타낸다.

 

대일통이라는 말은 漢 무제武帝 때 이르러 다시 등장한다.

동중서는 한 무제시기 때 <춘추>를 연구하는 공양학을 주도하면서 한 왕조의

정통성을 높이고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황제를 만들기 위하여 대일통사상을 사용한다.

 

이후 대일통사상은 공양학 사상의 중요한 특징이 된다.

사마천의 사기에서도 그의 대일통사상을 볼 수 있다.

그는 국가와 민족이 통일된 상태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진秦나라와 漢나라의 통일을 높이 평가하면서 통일이 갖는 중요한 의미를 나열한다.

사마천은 공양전의 대일통사상을 발전시켜

주변 외국과 소수민족을 아우르는 국가와 민족의 대일통사상을 제시한다.

 

황제를 한족은 물론 주변 민족들의 공동 조상으로 설정하여

모두를 하나로 묶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으며 통일된 상태를 강조하고

이러한 평화공존의 상태를 깨는 무리한 정벌전쟁에 비판적인 태도를 보인다.

 

●유가儒家가 독존할 수 있었던 원인

 

유가儒家의 흥기는 자학시대의 개시요,

유가의 독존獨尊은 자학 시대의 종결이다.

 

한대 초엽에 이르러 정치적으로 전에 없던 大一統국면을 열었고 춘추시대부터

개시된 사회와 경제의 각 방면의 변동이 드디어 점차 새로운 질서를 형성했다

따라서 이후의 사상도 점차 통일되는 것은 자연의 추세였다.

 

앞서 진시황秦始皇과 이사李斯가 사상통일 정책을 시행하고 뒤에 한 무제와 동중서가

사상통일 정책을 시행한 것은 모두 일종의 자연적인 추세를 대표한 것이었지

다만 한두 사람의 이상을 추진한 것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진시황의 각 학파의 학자들을 박사로 설치하기는 했지만

그 정책은 유가의 사상을 채용한 것이 매우 많았다.

 

고염무顧炎武(1613-82 亭林)는 말했다.

진시황이 새긴 비석이 모두 여섯인데

모두 자기가 6국을 멸하고 천하를 병탄한 일을 과시한 것이었다.

 

그 중에 일반 백성의 풍속에 관한 것을 언급한 것으로 泰山(양보산]의 비석에는

"남녀가 예의를 순종하며 각자의 직업을 성실하게 준봉했고

남녀의 분별이 분명하여 깨끗하지 못한 점이 없었다"고 했고

 

갈석문의 비석에는 "남자는 들일에 열심이었고

여자는 길쌈에 열중했다" 고 했는데 모두 이런 부류였다.

 

다만 회계산의 비석의 경우 그 내용은

"나쁜 짓은 숨기고 옳은 일은 밝히며 자식이 있는데도 재가하여

죽은 지아비를 배신함은 不貞이니 남녀의 유별을 엄격히 하고

음란한 행위를 금하자 남녀는 깨끗하고 성실해졌다.

 

간통한 남자는 죽여도 무죄라고 정하자 남자들은 모두 도의를 지켰고

지어미가 다른 남자와 달아나면 자식이 어머니로 여기지 않도록 정하자

여자들은 모두 교화되어 정숙해졌다"고 했는데

 

이루 다 열거할 수 없다.‧‧‧

이로써 보건대 秦이 형벌제도를 남용하기는 했어도 백성들을 단속하고

풍속을 바로잡는 취지는 실로 3대의 성왕과 다른 적이 없었다.

 

진나라는 유가의 학설을 써서 "백성들을 단속하고 풍속을 바로잡았은즉"

진나라가 분서焚書를 단행하고 私學을 금한 것 역시 도덕과 풍속의 통일을 지향하는

유가의 주장과 합치 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나 다만 그 정도가 심했을 뿐이었다.

 

진시황과 이사의 사학폐지는 사상통일의 제1단계였고

한 무제와 동중서의 백가배척은 사상통일의 제2단계였다.

 

그러나 전국 말엽에서 한대 초엽까지 각 학파의 파벌이 매우 많았는데

한 무제와 동중서는 왜 하필 유가를 정통사상으로 옹립했는가?

 

어찌 漢에서 우연히 동중서가 나왔고 또 한 무제가

우연히 동중서의 말을 채용하여 이런 결과를 초래한 것이었는가?

 

혹자는 유가가 정치상으로

‘존군억신尊君抑臣 임금을 높이고 신하를 낮출 것’을

주장했기 때문에 전제황제들이 좋아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전제황제에게 가장 편리한 학설은 법가이지 유가가 아니었다.

그 후 군주들은 대부분 "양유음법陽儒陰法 겉으로는 유가, 속으로는 법가를 따랐는데"

"속으로 법가를 따른" 것은 그렇다고 치고 "겉으로 유가를 따른"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춘추시대부터 한대 초까지 정치, 사회, 경제 각 방면은 모두 근본적으로 변화했다.

그러나 당시는 기계의 발명이 없었던 만큼 무한히 발달할 공업이 없었고

따라서 무한히 발달할 상업도 없었다.

 

대다수 인민은 여전히 농사를 업으로 삼았는데

그 전에는 농노였으나 이제는 자유농민이 되었을 뿐이다.

 

다수의 인민은 여전히 농민으로 그 종족끼리 모여서 그들의 밭을 경작했다.

따라서 옛날의 예교禮敎 일부는 여전히 적용할 수 있었다.

그 전에는 귀족만 사용할 수 있었으나 대부분의 평민도 사용하는 데에 불과하게 되었다.

평민은 해방되자 옛날 귀족들의 예교 일부를 즐겨 사용하면서 긍지와 기쁨을 누렸다.

 

정치적인 면에서 진秦과 한漢은 옛것을 바꾸기는(變古) 했지만

진의 황실은 여전히 고대 귀족이었고

한고조는 평민에서 일어났으나 그 뒤의 천자는 여전히 세습적이었다.

 

이 점에서 진과 한은 여전히 옛것을 전부 바꾼 것은 아니었다.

또한 인간은 환경을 떠나 홀로 설 수는 없으므로 천하에 완전히 독창적인 제도란 없다.

 

즉 진과 한은 대통일 이후 정치상으로나 사회상으로나

각종 신제도를 따로 정립하고자 할 때에도 儒者의 힘을 빌려야 했다.

 

유자는 이전의 전적에 통달하고 있었고 이전의 제도에 밝았고

또 공자 이래로 원래의 제도에 부여한 각종 이론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자 천하편>은 말한다.

고인은 얼마나 완벽했던가(備)!

神明에 짝하고 천지를 본받아 만물을 양육하고 천하를 화평시켰다.

그 은택을 모두 백성에게 미쳤고 本數(본질적인 법도)에 밝았고

그것들을 말도末度(말단적인 제도)와도 연계시켰다.

 

상하 사방 모든 곳과 大小와 정조精粗(심오한 것과 조잡한 것)를 막론하고

그들의 영향은 무소부재했다.

 

그 가운데 명확히 본수와 말도[數度]에 해당되는 것들은

옛날의 법도와 사관들의 기록 속에 아직 많이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시] [서] [예] [악] 속에 기록된 가르침들은

추노의 선비(雛魯之士)와 진신(搢紳先生)들 대부분이 통달하고 있다.

 

유자는 이전의 전적에 통달하고 이전의 제도의 밝았고 또 그것을 이상화하고

이론화하여 질서 정연하게 하고 찬란하게 빛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학파들은 정치 사회 철학이 있기는 했지만

정치와 사회에 대한 구체적인 방책이 없었고

또 있더라도 유가만큼 완전하지는 못했으므로

진한의 태통일 이후 저 "건설의 시대"에는 당연히 유가와 필적할 수 없었다."

 

또 한 가지 유가의 육예는 본래 한 사람의 家學이 아니었으므로

그 안에는 갖가지 사상의 맹아가 들어 있어서 누구든 인용하여 부회附會하기가 쉬웠다.

 

탄력성이 풍부한 이 육예는 상이한 여러 사상에 대해서

모든 것을 포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유가의 독존獨尊 이후 본래 유가와 다른 학설들도

여전히 육예라는 큰 모자 밑에서 간판만 바꾸고 그 존재를 보존할 수 있었다.

 

유가가 이미 다른 학파의 운명을 완전히 제압할 필요는 없었고

다른 학파들 역시 극력 저항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에

유가 독존의 체통은 끝까지 그런 대로 유지될 수 있었다.

/완역판 중국철학사 上/풍유란저/박성규 옮김

 

►호씨胡氏 북송北宋의 대유大儒 호안국胡安國(1074-1138)

자는 강후康侯. 호는 무이선생武夷先生. 시호는 문정文定.

 

소성紹聖 연간에 進士에 합격하여 太學博士에 임명되었다.

高宗 때에 中書舍人에 임명되고 시강관侍講官을 겸하였다.

 

일생동안 <春秋> 연구에 독실했다.

사량좌謝良佐와 양시楊時 등에게서 학문을 배워 이른바 이정二程(程明道•程伊川)

문하의 학문을 전수하여 거경궁리居敬窮理의 학문을 중히 여겼다.

 

그는 스스로 양시와 사량좌는 모두 義를 겸한 스승과 벗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宋代에는 전역에 걸쳐 나름대로의 학통을 갖춘 다양한 학파가 출현하게 되었는데

특히 남송대에는 호안국과 그의 아들 五峯, 호굉胡宏,

그리고 사량좌를 중심으로 한 ‘湖湘學派’가 유명했다.

 

호안국의 저작은 역사를 논하는 일면에 치중하였고

經書 연구도 역시 <춘추>를 위주로 하였다.

 

저서에 <춘추전><자치통감거요보유資治通鑑擧要補遺><상채어록上蔡語錄> 등.

그가 저술한 <춘추전>을 <호씨춘추胡氏春秋> 또는 <춘추호씨전春秋胡氏傳>이라 한다.

 

왕안석王安石이 <春秋>를 폐하여 學官의 대열에 끼지 못한데서

<춘추>의 학문이 쇠퇴한 것을 탄식하고 이 책을 연구하는데 20여 년을 보내며

<춘추호씨전春秋胡氏傳> 30권을 저술하였다.

 

호전胡傳

호안국胡安國이 쓴 <춘추호씨전春秋胡氏傳>을 세칭 <호전><胡氏春秋>라고 함. 30권.

 

원래 <春秋>는 경經과 사史를 겸한 대표적 경전으로

孔子가 밝혀 놓은 道德的 原理에 입각하여 정치 행위의 판단 규범을 수립한 것.

 

이 춘추에는 周의 3傳인 <左氏傳><公羊傳><穀梁傳>과는 별도로

唐•宋의 3家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호안국이 쓴 <호전>이다.

보통 좌씨•공양•곡량 3전과 더불어 4傳으로 불리워진다.

 

당시에 느낀 政事에 대하여 <春秋>에 의탁하여 풍자하였고

의론議論을 주장하여 후세의 학자들이 중요시 여겼지만 왜곡된 내용도 많다.

 

<호전>은 춘추 3전의 한계를 극복하고 그 의리를 회복했지만

경전의 해석에 지나치게 천착穿鑿한 것을 주희朱熹는 오히려 병통으로 여겼다.

 

►연조사燕趙士 연조비가사燕趙悲歌士.

우국지사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전국시대에 연나라와 조나라에는 세상을 비관하여

슬픈 노래를 부르는 선비가 많았다는 데서 유래한다.

 

하이견연조비가지사何以見燕趙悲歌之士

/강엄江淹의 <상건평왕서上建平王書>

 

연조고칭다강개비가지사燕趙古稱多慷慨悲歌之士 연나라·조나라에는 悲歌之士가 많다

/한유韓愈의 <송동소남서送董邵南序>

 

연조비가사燕趙悲歌士는 벼슬에 뜻을 얻지 못하는 선비를 가리킨다.

 

●봉협자逢俠者 협자를 만나서/전기錢起(722-780? 唐)

 

연조비가사燕趙悲歌士 연과 조의 비장한 노래하는 무사들

상봉극맹가相逢劇孟家 서로가 극맹 같은 협객 집서 만났네.

촌심언부진寸心言不盡 마음속의 할 말을 다하지 못했는데

전로일장사前路日將斜 앞길에는 해가 거의 지려하네.

 

협자검객야俠者劍客也 협자俠者는 검객劍客이다.

극음길劇音吉 극劇은 길吉이니 극맹劇孟은

한지대협漢之大俠 한漢나라 때의 큰 협객이었는데

 

기차이비협자야起借以比俠者也

전기錢起가 한나라의 길맹을 빌어서 협자를 비유한 것이다.

 

►협자俠者 임협任俠이라고 해서 정의를 위해 약자를 보호하는 협객을 말함.

►극맹劇孟 한漢나라 때 낙양의 협객. 임협任俠으로 제후諸侯에 알려 졌음.

 

연조고다강개비가지사燕趙古多慷慨悲歌之士

연燕‧조趙나라에는 예로부터 강개하여 비장한 노래를 하는 무사들로서

 

여형경섭정지류如荊卿聶政之流 형경荊卿‧섭정聶政과 같은 무리들이 많았으니

지당유성야至唐猶盛也 당唐나라에 이르러서도 그와 같은 사람들이 오히려 극성했다.

 

►형경荊卿 전국시대 제齊 사람으로서 연燕 太子 단丹의 복수를 위하여 진秦나라에 가서

후일의 始皇帝를 저격하려다가 실패하여 죽임을 당한 형가荊軻의 다른 이름

 

►섭정聶政 전국시대 韓나라 사람으로서 엄중자嚴仲子를 위하여

한나라 정승인 협루俠累를 찔러 죽이고 자살한 협객.

 

기로봉검협지사起路逢劍俠之士 전기가 길에서 칼을 쓰는 협객인 무사를 만나

인작시이증지因作詩以贈之 인해서 시를 지어 그에게 주게 되었다.

 

언자고연조지협사야言子固燕趙之俠士也

말하기를 “그대는 진실로 옛날에 연나라와 조나라에 있던 俠士이다.

 

與子로행봉어낙양도중與子로幸逢於洛陽道中

그대와 더불어 다행스럽게도 洛陽으로 가는 도중에 만났으니

 

우한대협극맹지향又漢大俠劇猛之鄕

또한 낙양이라는 곳은 漢나라의 큰 협객인 극맹이라는 사람의 고향이다.”라고 하였다.

 

어시양심상계於是兩心相契 이에 전기와 협객 두 사람의 마음이 서로 합해져서

이종담비장불평지사而縱談悲壯不平之事

비장하고 불평스런 일들을 마음 놓고 말하기는 하였으나

 

무내고담미진無奈高談未盡 기개 높은 이야기를 다하지는 못했는데

이석양이사而夕陽已斜 석양이 이미 기울었으니

우장분수이별야又將分手而別也 또한 장차 손을 나누어 이별하게 된 것이다.

 

►오열嗚咽 목메어 욺. 또는 그런 울음.

‘슬플 오嗚’ ‘목구멍 인, 삼킬 연, 목멜 열咽’

 

►절절淅淅 살랑살랑. 솔솔[바람 소리]. 일렁거리는 모양.

 

●효출동곽​曉出東郭 새벽에 동문을 나서며/성재省齋 고시언高時彦(1671-1734)​ ​

 

효장상의미曉嶂尙衣微 이른 새벽 산봉우리들 아직 희미한데

임풍취절절林風吹浙浙 숲에서 부는 바람 거세기만 하다

마시임한류馬嘶臨寒流 차가운 냇가에 다다르자 말은 우짖고

잔성낙여설殘星落如雪 하늘에 새벽별 눈처럼 흩날린다

 

 

●경새행사敬賽行師 구선지求禪旨/편양언기鞭羊彦機(1581-1644) 禪師

 

수색겸천벽岫色兼天碧 산색山色은 아름답고 하늘은 푸르며

림성여국황林聲與菊黃 숲속의 소리 黃金色의 菊花

곡허풍절절谷虛風浙浙 골짜기엔 虛虛로운 바람이 浙浙하고

송랭월창창松冷月蒼蒼 소나무는 차고 달은 蒼蒼하도다.

 

​조영계삼오​助詠溪三五 서너 댓 개울물 소리 더해주고

동루학일쌍同樓鶴一雙 한 雙의 鶴이 깃들어 함께하니

안전무속물眼前無俗物 눈앞에는 俗物이란 없고

청흥일망망淸興日茫茫 맑은 날에 해가 솟으니 茫茫하기만하다.

 

 

●거경궁리居敬窮理

정주학程朱學에 있어서의 학문과 수양의 방법.

 

고대 유교의 수양론으로는 공자의 충서와 극기복례

<중용>에서 말하는 신독愼獨과 중화中和 등이 있고

 

<대학>에서는 修齊治平이 제시되며

<맹자>의 경우 존야기夜氣氣ㆍ호연지기浩然之氣 등이 있다.

 

이처럼 고래로부터 정립되어온 유교의 수양론은 인류사회를 구제하고

개인의 도덕적 인품을 함양하는 방법으로 활용되고 있다.

 

인격 함양의 수양론은 중국 宋代에서 더욱 활발하게 거론되면서

구체적 방법론으로 제시되기에 이르렀다.

 

정주程朱의 내외 수양론인 ‘거경궁리居敬窮理’가 대표적이다.

거경居敬이 내적 수양법으로 마음을 성찰하는 것이라면

궁리窮理는 외적 수양방법으로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여 정확한 지식을 획득하는 것이다.

 

거경은 <논어> ‘옹야편’에 처음 나오는 말이며

궁리는 <주역> ‘설괘전’에 처음 나오는 말로서

정이천程伊川은 수양의 핵심을 경敬이라 하고 인식의 핵심을 지知라고 했다.

 

송대 성리학의 선구에 섰던 정이천은 학문탐구를 위한 치지를 밝히고

인격함양을 위한 경敬을 제시했다.

 

그에 의하면

“거경의 함양공부가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이에는 치지가 전제되고 있는 것이다”/이정전서二程全書 유서3.

 

주자 역시 거경궁리에 대하여

“학자들이 할 공부는 다만 거경과 궁리를 서로 활용하는 데 있다.

능히 궁리하면 거경 공부는 날로 진보하고 거경하면 궁리공부도 날로 세밀해진다”고 했다.

 

이처럼 정이천과 주자는 수양론으로 거경궁리의 방법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특히 성리학의 체계화에 앞장선 주자는

인격수련의 방법론과 인식확충의 방법론으로 거경궁리를 강조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퇴계와 율곡이 정주程朱의 거경궁리를 응용하고 있다.

율곡은 수양론의 강령을 거경ㆍ궁리ㆍ역행의 세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경敬의 철학을 확립한 퇴계에 의하면

경은 마음의 주인으로서 경에 처하면 지혜가 밝아져 理를 궁구할 수 있다고 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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