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빠나사띠 숟타 16 단계
첫 번째 단계 - 준비
고요한 장소를 정한다.
편안하게 앉는다.
마음-깨어있음을 확립한다.
<선정에 드는 12 단계>
1 긴 숨을 알아차리기
2 짧은 숨을 알아차리기
3 호흡의 전과정을 알아차리기
4 호흡을 고요히 하기/몸을 고요히 하기
5 환희심을 불러일으키기 또는 경험하기
6 행복감을 불러일으키기 또는 경험하기
7 마음의 작용을 경험하며 호흡
8 마음의 작용을 고요히 하기
9 마음을 경험하기
10 니미타를 밝히기/마음을 기쁘게 하기
11 니미타를 유지하기/마음을 집중하기
12 마음을 자유롭게
<선정에서 나와서 취해야 할 네 가지 단계>
13 무상에 대해 반조하기
14 무욕에 대해 반조하기
15 소멸에 대해 반조하기
16 포기에 대해 반조하기
붓다는 높은 경지의 명상에 들기 위해서는 세속의 잡다한 일을 포기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5가지 감각과 5가지 감각이 닿는 수많은 인상들은
우리가 단 한 가지 주제에 집중함으로 자연스레 포기되어진다.
붓다는 이 방법으로 호흡에 집중할 것을 권한다.
두 번째 단계 - 긴 호흡을 경험하기, 짧은 호흡을 경험하기
아나빠나사띠 숟타의 첫 번째 단계는
긴 들숨이 일어나면 그것을 긴 들숨으로 알아차리고
긴 날숨이 일어나면 그것을 긴 날숨으로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것이 전부다.
다음 단계는 짧은 들숨을 짧은 들숨으로 알아차리고
짧은 날숨을 짧은 날숨으로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 경우는 긴(들)숨, 짧은(들)숨 등으로 명칭을 붙여주며 알아차리는 것이 좋다]
이 처음 두 단계의 요점은 많은 것들에 산만해졌던 마음을 오직 호흡에만 집중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수행자가 해야 하는 일은 오직 하나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세 번째 단계 ; 호흡의 몸 전체를 경험하기
세 번째 단계는 벌써 깊은 상태이다.
우리는 이제 호흡의 전 과정을 경험해야 한다.
빨리어로 sabbak-ayapatisa.mvedi(삼바카야파띠상웨디) 호흡의 몸 전체를 경험하는 것.
이 말은 길고 짧은 상태만을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라
호흡이 시작하는 부분에서부터 그 끝나는 부분까지 알아차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침묵 속에서 시작되어 진행되고 그 정점에 이른 뒤에는 사라져 간다.
그 호흡이 완전히 가라앉을 때까지.
수행자는 관찰되어진 그 만큼의 명료함을 얻게 된다.
심지어는 호흡과 호흡 사이의 정적도 알게 된다.
들숨은 끝났다.
날숨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거기에 정적이 있다.
이제 날숨이 일어나고 진행되며 그 정점에 이르러서는 아무것도 없음 속으로 사라져 간다.
이것이 바로 호흡의 몸 전체를 경험하는 것이다.
그대가 호흡의 몸 전체를 보고 있을 때 그때가 바로 호흡에 대해 진정으로 명상하고 있는 때이다.
거기에는 호흡과 당신의 알아차림 사이에 어떤 놓쳐짐도 없다.
이것이 하나의 대상 (에카가타 ekaggat-a)에 매끄럽게 지속되는 알아차림이다.
모든 것은 사라지고 오직 호흡만이 있다. 호흡 뿐 !
네 번째 단계 - 호흡을 고요히 하기
수행자가 호흡의 전 과정에 대해 완전한 알아차림을 가지게 되면
다음 단계는 축복과 아름다움이 일어나게 된다.
파상바양카야상카라(passambhayamkayaasankhaaram)라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명상의 대상인 호흡을 고요하게 한다.
그냥 하는 그럼 평범한 호흡에서 지금은 신중하게 의지를 가지고
‘고요하게, 고요하게, 고요하게’라고 마음을 기울이며 호흡을 고요하게 한다.
이제는 이전의 평범한 호흡에서 호흡은 점점 더 부드럽고 부드러워진다.
일반적으로 명상자들은 호흡이 더욱 부드러워짐에 따라
황홀할 정도의 아름다운 느낌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많은 명상자들이 이전 단계인 호흡의 전 과정에 대한 완전한 알아차림 없이
호흡을 고요하게만 하려함으로 이 단계로 진보하는 것을 방해한다.
서두르지 말고 우선 호흡의 전 과정에 대해 완전히 알아차리는 것을 익히도록 한다.
그런 알아차림이 완전해지면 자연히 마음의 안에 있는 그 대상도 고요하게 된다.
이렇게 호흡이 가라앉으면
이제는 호흡이 점점 세밀해지고 몹시 평화로운 느낌에 빠져들고 모든 것이 부드럽게 진행된다.
아주 당연히 행복한 것,
이것이 이 현상에 대한 아주 자연스런 마음의 상태이다.
이것이 이렇게 평화로운 행복임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이런 행복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이런 행복이 여기 이렇게 항상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들을 흥분케 하는 것,
여흥이나 자극 같은 것들을 행복이라고 여기는데 길들여져 있어 이런 것을 알 수가 없다.
명상에서 오는 이런 행복은 정말 다른 것들이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그것 자체가 이런 행복을 이해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만일 호흡이 그렇게 고요하게
고요하게 가라앉았는데도 아직 행복감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바로 이 지점에서 붓다는 다음 단계 5-6 단계를 가르치시고 있는 것이다.
다섯째 & 여섯째 단계 - 환희와 행복감의 일어남
아나빠나사띠의 다섯번째 단계는 고요한 호흡으로 인한 정선된 환희(piti)가 일어나는 단계이다.
여섯 번째 단계는 고요한 호흡으로 인한 행복(sukha)감이 일어나는 단계이다.
이 기쁨과 행복감은 바로 호흡 속에 있다.
당신은 이것을 일순간에 알아차리지 못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 환희와 행복감은 흥분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평화의 환희와 행복감이다.
이것은 마치 록음악을 듣던 사람이 클래식 음악회에 간 것 같은 그런 느낌이다.
그들은 사람들이 왜 그런 것들에 돈을 지불하는지 의아해 할 것이다.
마음이 아직 그 클래식 음악의 특성에 익숙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음은 아주 거친 상태였는데 지금 막 매우 정선된 그런 것을 만나고 있다.
아니면 어떤 사람이 늘 인스탄트 음식만 먹다가 별 다섯개의 프랑스 레스토랑에 간 기분이랄까?
그들은 왜 사람들이 그런 음식에 그렇게 많은 돈을 투자하는지 의아해한다.
왜냐하면 아직 그들의 접시는 그 음식을 감상할 만큼 정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 후, 당신은 아주 정련된 당신의 ‘정신적 접시’mental plate를 가지게 된다.
그러면서 즉각 그 평화로운 행복을 이해하게 된다.
다섯째 & 여섯째 단계는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것
수행자가 그런 고요한 호흡을 가지게 되면 환희와 행복감이 일어난다.
만일 이것이 자연스럽게 일어나지 않으면 5-6단계를 적용해도 좋다.
수행자는 면밀히 환희심과 행복감을 찾아보도록 한다.
호흡은 여전히 고요하고 미세하여 평화로운데도
행복감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것을 찾아보아라.
만일 그대가 명상의 자세로 산다면 사는 것은 놀이가 된다.
놀이 속에는 행복과 환희가 있다.
모든 생활 속에서 행복과 환희를 찾아내라.
이제 생활은 더 이상 일터가 아니다.
이제 그것은 놀이터가 되었다.
Meditation is the greatest bliss you can experience in the world
명상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이다.
명상을 하다가 우리는 그런 축복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지점까지 이른다.
그런데도 축복은 계속 쏟아져 내린다.
아마도 당신은 이것은 '내가 견디기에는 너무 심한 축복이다'라고 여길지도 모른다.
그래도 여전히 축복은 퍼부어진다.
당신은 아마도 축복 때문에 폭발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것이다.
나는 당신이 그 축복을 찾아낼 수 있도록 이렇게 진지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축복을 찾아내는 단계가 바로 아나빠나사띠 명상의 5-6 단계이다.
붓다는 그대가 그것을 하도록 권유하고 있다.
호흡이 평화로울 때 그 축복을 찾아보아라,
그러면 거기서 그대는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
호흡은 거기 그렇게 있다.
그런데 너무 아름다운 호흡이다.
정말 매력적이다.
아, 그것은 환희 그것 자체이다.
행복으로 넘쳐 오른다.
당신은 왜 진즉에 이것을 찾지 못하고 쓸데없는 다른 것을 찾아다녔는지 의아해한다.
이런 호흡은 꽃이나 석양보다도 아름답다
아, 정말 쾌적한 것이다.
이제 당신은 이 아름다운 호흡, 이 환희와 행복의 느낌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한다.
일곱번째 단계 - 마음의 대상으로서의 호흡을 경험하기
그렇게 고요하고 평화로운 호흡이 정립되면 우리는 마치 호흡이 사라진 것 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
아름답고 지속적인 평화는 거기 그렇게 있는데도 호흡이 보이지를 않는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물론 당신은 여전히 숨을 쉬고 있다.
그러나 호흡은 이제 더 이상 몸에서 일어나는 경험이 아니다.
이것은 이제 마음의 대상이 되었다.
그것은 느끼는 것으로부터 아는 것으로 바뀌었다.
감각적 대상인 육체적 접촉은 사라지고 마음이 드러나고 있다.
이것이 붓다가 아나빠나사띠의 일곱 번째 단계를 일컬어
'마음의 형성(experiencing the citta sakh-ara)을 경험하기;
knowing the breath as a mind-object' 라고 한 이유이다.
어떤 명상자는 이 단계에서 매우 혼란스러워진다.
분명하게 호흡을 알아차려야 하는데 호흡이 보이지를 않는 것이다.
그들은 마음-
깨어있음이 놓쳐져서 명상대상인 호흡을 놓치고 지금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걱정을 할 필요는 없다.
이러한 혼란을 해결하는 방법은 아직 여전히 호흡을 알아차리고 있기는 하지만
이제는 좀 다른 모습으로 알아차리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초라하고 헝클어진 모습으로 나타나던 오랜 친구가
특별한 날에나 입는 예복차림으로 단장하고 나타난 것과 같다.
처음에는 그를 못 알아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어쨌든 그는 오랜 친구임에 틀림이 없다.
이와 같은 모습으로 육체적 감각으로 다가오던 오랜 친구인 호흡이
지금 환희와 행복감으로 멋지게 단장하고 마음의 대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사실 이것은 같은 호흡이다.
그러나 좀 다른 모습으로 가장되어 나타났다.
호흡이 사라진 것처럼 보일 때 그저 그 평화로운 행복과 함께 긴장하지 말고 그냥 가만히 있어라.
이제 당신도 그 청정하고 아름다운 평화에 익숙해질 것이고
옛 친구인 호흡이 거기 있다는 것을 다시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여섯 번째 감각기관인 마음을 통하여 호흡을 경험하는 것이다.
일곱째는 목수가 톱질하듯
이 단계에서 호흡의 들고 나고 시작, 중간 끝이라는 개념이 모두 사라진다.
이러한 것들은 물리적 육체의 호흡과 관련되었던 조악한 개념이다.
이제 그런 것들은 사라져 버렸다.
당신이 아직 여전히 들고 나는 숨을 쉬고 있지만
숨을 쉬는 것에서 숨을 아는 것으로 초점이 바뀌었다.
이것은 한 방향으로만 아주 부드럽고 완만하게 지속된다.
이것은 톱질을 하는 목수에 비유될 수 있다.
목수가 나무 조각을 자르려 할 때 목수는 손잡이서부터 톱날 끝까지 보고는 있다.
그가 이제 나무를 자르려 하는데 집중하면서
그의 주의는 톱날이 나무에 닿아있는 그 부분으로 더욱 가까이 다가선다.
손잡이와 톱날의 다른 부분은 그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다.
잠시 후 그는 나무와 맞닿아있는 그 부분의 톱날만을 볼 수 있다.
다른 부분의 톱날은 그의 왼쪽이나 오른 쪽에 던져지며 그의 인지권 밖으로 떨어진다.
그는 그것에 대해 알지 못한다.
아니 알 필요가 없다.
톱날이 시작점에 있던지 그 중간에 있든지 아니면 끝에 있든 지는 이제 관심 밖이다.
그런 개념들은 초월되어진다.
같은 방법으로 이 일곱째 단계에서는 수행자는 이제 호흡의 한 점만을 알고 있다.
그대는 그것이 들숨인지 날숨인지 시작인지 중간인지 끝인지 알 수가 없다.
단지 마음이라는 감각기관으로 호흡을 명료하게 알고 있을 뿐이다.
호흡으로 인한 이 투명한 환희심과 행복감은 마음 깨어있음(sati)을 예리하고 명료하게 할 것이다.
이러한 단순명료함은 참으로 깊은 평화를 준다.
니미타의 출현 - 니미타가 더러운 사람 ; 이것은 마음을 경험하는 것이다.
선정수행에 있어서 밝고 고정되고 선명한 니미타는 필수조건이다.
니미타가 왜 탁하고 더럽고 고정되지 않는가?
이것은 매우 중요한 현상이다.
니미타는 그대 마음의 반영이다.
여기서 우리는 계율의 중요성을 상기해야 한다.
니미타가 더럽고 탁하고 고정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신-구-의 삼업을 돌아보고 그들을 청정하게 해야 한다.
베푸는 성향의 사람,
자비로운 사람,
강한 신심의 사람,
소위 말하는 순수한 사람은 아주 밝고 고정된 니미타를 얻게 된다.
니미타가 선명치 않을 때는 자신의 과거 선행을 떠올리거나
메타 수행을 하거나 불법승 삼보를 관조하며 마음을 고양시킨다.
마음이 고양되면 다시 호흡으로 돌아간다.
/아잔 브라흐마왕소의 아나빠나사띠 숟타 중에서
그래서 계율이 있은 후에 정(사마디)이 있고 정이 있은 후에 혜(지혜)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눌라
여덟번째 - 두려울 정도의 환희와 행복감
이 단계에서는 환희와 행복감의 느낌조차 흥분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이것이 완전한 평정을 방해하게 된다.
이것 때문에 붓다는 아나빠나사띠에서 호흡의 정신적 경험으로 그 여덟 번째를 말하고 있다.
정적 속에 머물러라.
그렇지 않으면 축복은 떠나갈 것이다.
신참 명상자들이 이 축복을 경험하면 아니 경험 명상자들 조차도 그들은 무심코 이렇게 내뱉는다.
“세상에 !” “어떻게 이럴 수가 !”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다.
흥분으로 몸이 흔들릴 지경이다.
그 감당할 수 없는 축복과 함께 명상자는 두려움을 느낀다.
“이건 너무 심하다. 어떻게 나한테 이런 일이” “차라리 너무 두렵다”
그러면 이 축복은 사라져 버린다.
두려움이 평정을 파괴시킨다.
여기서 수행자는 두 적을 유념해야 한다.
이 단계에서 일어나는 두려움과 흥분. 정신적 대상으로서의 호흡을 고요히 할 것을 기억하라.
이 축복은 평화에서 태어났고 정적에서 태어난 환희와 행복인 것이다.
이 축복을 일으키게 한 그 원인들을 잘 유지하라.
아홉 번째 단계 - 마음을 경험하기(cittampatisamvedi)
마음을 경험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대해 말하고 책까지 쓰곤 하지만
이곳이야말로 마음을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마음을 경험하는 방법은 바로 마음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는 니미타에 의해서이다.
마음이란 아는 그것 (knowing)이다.
How can the "knower" know itself ?
아는 자가 어떻게 아는 그것 자체를 알 수 있겠는가?
그것은 마치 거울 앞에 서있는 사람과 같다.
우리가 거울에 묻어 있는 모든 먼지들과 때를 다 걷어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모습을 비추어 볼 수 있다.
결국에 우리는 우리 모습을 보게 된다.
당신은 니미타를 통하여 마음을 경험하게 된다.
열 번째 단계 - 니미타를 밝힌다.
이 단계에서 수행의 향상을 저해하는 니미타의 2가지 문제가 드러난다.
하나는 니미타가 탁하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니미타가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장애를 제거하기 위해 붓다는 아나빠나사띠 숟타에서
열번째 단계와 열한번째 단계를 말씀하신다.
열 번째 단계인 니미타를 밝히기는
빨리어로 아비파모다양치땅(abhippamodayam cittam)이라고 하는데
문자적 의미로 보면 “마음에 기쁨을 주는 것”이라고 번역된다.
마음에 기쁨이 많으면 많을수록 니미타는 더욱 빛이 난다.
선정에 들기 위해서 니미타는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이제까지 본 일이 없는 그런 밝기를 갖추어야 한다.
니미타는 마음의 반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율을 잘 지켜야 하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순수한 사람도 경우에 따라서는 니미타가 아주 약할 수가 있다.
그것은 이 사람의 정신적 에너지가 약하거나 건강이 안 좋은 상태이거나 과로했기 때문일 수 있다.
이때는 자신이 행한 과거의 선행이나 불법승 삼보를 관하거나
메타수행을 하여 에너지가 강해지면 다시 호흡으로 돌아오는 방법을 쓸 수 있다.
<니미타를 밝히는 방법>
1.
니미타의 중앙에 마음을 고정 시킨다.
일반적으로 니미타가 선명치 않은 경우 그 주변보다는 중앙이 더 밝다.
2.
다시 한 번 마음을 현재에 확고하게 내려오도록 새롭게 자각한다.
3.
니미타에 미소 지으라.
기억하는가, 니미타는 자기 마음이 반영이다.
마음이 미소 지으면 니미타도 미소 지으며 되돌려 줄 것이다.
니미타가 탁한 것은 아마도 아직 남아있는 악의 때문일 수 있다.
그러므로 미소를 지으면 이것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4.
다시 한 번 원래의 호흡으로 되돌아간다.
아직 니미타가 성숙되지 않았을 때 호흡을 버리고
니미타로 돌아오면 그것이 지속되지 않거나 흐릿하다.
그러므로 니미타가 아주 선명해질 때까지
니미타가 나타나도 무시하고 계속 원래의 호흡을 집중한다.
그러다가 만족할 만한 니미타가 나타나면 그때는 니미타에 집중한다.
/위빠사나 수행자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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