寒山詩 194
가외윤회고可畏輪廻苦 윤회輪廻의 고통은 두려워할 만하니
왕부사번진往復似翻塵 갔다가 돌아오는 것이 바람에 날리는 티끌 같네.
의순환미식蟻巡環未息 개미가 쉬지 않고 이어 돌듯
육도난분분六道亂紛紛 윤회하는 여섯 가지 세계를 어지럽게 오가네.
개두환면공改頭換面孔 머리가 달라지고 얼굴이 바뀌어도
불리구시인不離舊時人 옛날 그 사람에서 벗어나지 못하네.
속료흑암옥速了黑暗獄 빨리 껌껌하고 어두운 지옥地獄에서 벗어나
무령심성혼無令心性昏 타고난 마음씨가 어두워지지 않도록 해야 하네.
可畏輪回苦 두렵고 무서운 게 輪廻의 苦痛이니
往復似翻塵 몸 얻었다 재 되기를 끊임없이 反復하네.
蟻巡環未息 그 苦痛 개미가 줄지어가듯 쉬는 날 없어
六道亂紛紛 여섯 가지 生의 길을 어지러이 오가네.
改頭換面孔 머리가 달라지고 얼굴이 바뀐다한들
不離舊時人 옛 사람의 成業에서 멀어질 수 없으니
速了黑暗獄 어서 빨리 어리석음의 暗獄에서 벗어나
無令心性昏 다시는 그 마음에 어둠 없게 해야 하네.
두려워라, 윤회의 고통이여!
가고 돌아옴 날리는 먼지 같구나.
개미가 돌고 돌며 쉬지 못하듯
6道에서 어지러이 흩날리네.
머리 바뀌고 얼굴 달라져도
옛날 그 사람 그대로구나.
어서 빨리 흑암지옥 벗어나
心性을 어둡게 하지 말라.
►윤회輪廻
중생이 천인, 인간, 아수라, 축생, 아귀, 지옥의
육도에서 생사를 되풀이하기를 마치 수레바퀴가 끝없이 도는 것과 같다.
유정有情(마음이 있는 중생)들이 육도에서 윤회하며
태어나기를 마치 수레바퀴가 끝도 시작도 없는 것과 같다.
/<대승본생심지관경> 권3
<윤회개념의 성립>
싼스끄리뜨의 삼사라(saṃsāra)를 번역한 말로
전생轉生ㆍ재생再生ㆍ유전流轉이라고도 한다.
BC600년경 우빠니샤드(Upaniṣhad)의 문헌에서 비롯되어 대중에게 전파되었다.
이와 같은 생각은 인도의 업설(業說)과 결합되어 고대 우빠니샤드시대로부터
중세 베단타(Vedānta)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전해졌다.
이 사상은 힌두교에까지 전해져 보편적인 사상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특히 불교에서 輪廻轉生)이라 부르며 사상적인 한 축을 이루고 있다.
인도 바라문교의 우빠니샤드에서는 인간의 행위를 선과 악이라는
도덕적 요청에 의하여 규정하고 전생의 업에 의해 현생의 과보를 만들고
현생의 업에 의해 미래가 결정되는 윤회전생의 사상을 발전시키는데
초기의 윤회설이 오화이도설五火二道說이다.
오화이도는 오화설과 이도설이 합해져서 이루어졌는데
오화설은 사람이 죽어 화장하면 달에 가서 비가 되어
지상에 내려와 곡식이 되고 이 곡식을 섭취함으로써
남자의 육체에 들어가 정자가 되고 모태에 들어가 재생한다는 설이다.
이것은 당시의 강우현상과 화장관습이 결합하여
연기를 타고 천계에 오른 아트만이 비가 되어 다시 지상에 내려온다는
순환의 모습에 의거해 윤회를 설명하는 소박한 사상이다.
이도설은 신도神道와 조도祖道를 말한다.
신도란 수행자가 오화설을 알고 산림 속에서 고행하여 범계에 태어나
다시는 이 지상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것에 반해 조도란
제사와 보시를 행하는 사람은 오화설에 의거해 윤회한다는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번진似翻塵 끊임없이 반복함을 비유한 말.
‘번진翻塵’ 바람에 날리는 먼지[티끌].
►의순환蟻巡環 의순환蟻循環. 개미가 바퀴를 돌다.
중생이 육도에서 생사 윤회함을 비유한 말.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生死에서 길 잃고 헤매고 있다.
생사는 마치 돌고 도는 개미와 같다.
오고 오고 가고 가고 한가로이 쉴 틈이 없다.
가고 가고 오고 옴이 항상 이와 같다./<돈황유서>
►불리구시인不離舊時人
중생이 육도에서 윤회하는 중 나고 죽기를 반복하면서 머리와 얼굴이 바뀌어도
心性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기 때문에 ‘옛 시대 그 사람’이라고 했다.
이 몸에는 비록 生滅이 있어도 心性은 無始 이래로 일찍이 생멸이 없었다.
몸이 나고 죽는 것은 용이 환골換骨하고
뱀이 허물을 벗고 사람이 옛 집을 벗어나는 것과 같다.
즉 몸은 무상無常하나 마음은 항상 그대로인 것이다.
/<경덕전등록> 권28/innerlight34님의 블로그
<無我인데 어떻게 윤회輪廻가 가능한가?>
무아無我(anatta)란 ‘나’ 혹은 自我에 대한 부정을 의미한다.
윤회輪廻(saṁsāra)란 ‘나’ 혹은 自我가 생사를 반복하면서 지속됨을 뜻한다.
따라서 이 둘은 모순적 관계로 볼 수 있다.
실제로 많은 불자들이 이 둘의 관계에 당혹감을 느끼고 있다.
만일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윤회가 가능하겠는가.
혹은 윤회가 사실이라면 윤회의 주체인 자아가 전제되는 셈이 아닌가.
그렇다면 모순이 아닌가. 이러한 당혹감이 문제의식으로 떠오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확실히 해 두어야 할 것은 무아= "내가 없다"가 아니다.
무아란 “고정불변 하는 ― 항상 존재하는 실체로서의 내가 아니다”는 뜻이다.
대부분 불자들이 ‘무아=나가 없다’는 잘못된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이 무아를 ‘내가 없다‘는 개념으로 이해하면 잘못된 무아론에 빠져버린다.
무아란 덮어놓고 ‘나’라는 게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無我에서 ‘아我’라는 것은 영원성을 의미한다.
無我의 뜻은 ’나‘라는 게 없다는 단순한 뜻이 아니고
‘나‘라고 여기는 몸과 마음에 내재된 영원성을 유지하는 실체가 없다는 뜻이다.
몸과 마음은 변화해갈 수밖에 없다.
변화한다는 것은 곧 그 안에 어떤 영원성이 내재해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많은 분들이 無我를 한자 無에 얽매여서 그냥 단순하게
‘나’라는 존재가 없다는 식으로 잘못 해석한다.
내가 없다면 이 글을 쓰는 ‘나’는 누구인가?
따라서 무아를 ‘내가 없다’고 해석하면 안 된다.
불교 교의의 두 기둥이 無常과 無我인데 無常과 윤회輪廻의 개념은
부처님 당시 브라만교나 자이나교에서 이미 다루고 있었다.
그러나 無我만은 석가모니불이 성도한 후 최초로 설파한 가르침이다.
빠알리어 atta는 ‘참나’이다.
따라서 anatta(무아)란 참나가 아니란 말이다.
제법무아諸法無我에서 무아는 불교 근본교리로서 고대 인도에는
브라만 교설에 의해 아트만(atman-我)사상이 보편화돼 있었으므로
부처님은 일차적으로 그 ‘아트만(我)’의 관념을 부정하기 위해 무아설을 주장했다.
즉 당시 우파니샤드철학이 我를 실체 시 하는데 반해
부처님이 이런 견해를 거부한 것이 초기경전에서 말하는 無我(anatta)이다.
‘anatta, skt. anatman’
(무아)는 atman이 아니란(an) 말이다.
아트만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무아라고 해서 ‘나’의 실존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비록 假我이지만 ‘나’는 존재한다.
아트만(atman)이란 실체를 뜻하고
무아란 존재론적으로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말이다.
당시 브라만교에서는 고정 불변의 자아(skt. atman)를 인정하고
그러한 자아를 터득하고 그것과 하나 되는 것을 그들의 제일의 교의로 삼았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러한 자아사상을 단지
‘자아가 있다는 인식[我相]’일 뿐이라며 전면적으로 부정했다.
그러므로 人無我ㆍ法無我를
"나의 본질은 없는 것이며
대상으로서의 사물들(삼라만상)의 본질도 없다"와 같이 해석할 수 있다.
내가 없고 대상으로서의 존재자도 없는 空無란 말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종교도 필요 없고 선행도 다 헛된 것에 불과 할 뿐이며
깨달음을 얻는 것도 다 헛된 일일 뿐이다.
불교의 무아의 사상은 空無의 사상이 아니다.
무아를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와 같이 해석하지 말고 本質이 없다,
실체가 없다와 같이 해석해야 한다.
그리하여 존재는
"심찰나적으로 생멸(태어나고 죽음)을 거듭하며
흘러가는 하나의 흐름"이라고 표현한다.
윤회란 반드시 "무언가가 다음 생으로 건너가야" 한다.
그것을 남방권에서는 바왕가(bhavaṅga)라고 하고
유식불교에서는 아뢰야식이라고 한다.
하지만 남방권에서는 그러한 바왕가조차도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심찰나적으로 생명을 거듭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나’라는 존재가 지금 여기 있지만
이 존재의 양상은 단 1초도 고정돼 있지 않듯이
‘나’라는 존재가 없다가 아니라 ‘나’라는 ‘고정된 존재가 없다’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나’라는 고정된 존재가 ‘있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취착하고 갈애하고 번뇌를 일으키고 업을 쌓아간다.
그런데 위와 같은 의문이나 논리는 단순히 무아를 그냥
‘내가 없다’는 정도로만 인식하는 수준에서 생기는 의문이다.
무아를 확실히 알고 실현하면 윤회하지 않는다.
본래 삼라만상은 모든 것이 실체가 없는 무아이지만
중생은 모든 게 다 실체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윤회를 한다.
수행을 하고 삼라만상의 실체가 없음 즉 무아를 깨달으면 윤회하지 않는다.
즉 무아를 깨달으면 윤회하지 않고 무아를 모르면 윤회한다.
중생은 무아를 몰라서 육도윤회하고 무아를 완전히 체득하면 해탈하게 된다.
‘무아ㆍ윤회’라는 단어의 배합은 맞지 않는다.
‘유아ㆍ윤회’ 실체가 있다고 여기면 반드시 죽으므로 생멸을 반복한다. 즉 윤회한다.
‘무아ㆍ해탈’ 실체가 없다고 깨닫게 되면 죽을 게 없으므로 윤회가 없고 해탈이 된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설법을 하실 때 두 부류로 나누어서 설법을 하셨다.
중생의 입장과 깨달은 覺者의 입장이다.
깨닫지 못한 중생들의 입장에서는 육도 윤회를 말씀하셨고
각자의 입장에서는 삼라만상의 실체를 깨달으면(무아의 개념을 확실히 깨달으면)
생노병사의 윤회를 벗어나 해탈하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불교경전에는 윤회에 대한 설법도 있고
그 반대로 윤회가 없는 해탈에 대한 설법도 있다.
無我에서 ‘我’라는 것은 ‘실체’라는 뜻이다.
단순이 ‘나’라는 뜻이 아니다.
‘나’라는 개념의 정확한 뜻은 고정 불변하는 영원한 自我를 의미한다.
그걸 ‘나’라고 부른다.
無我의 뜻은 완전히 모든 게 없다는 것이 아니라 실체가 없다는 뜻이다.
당장 내 몸은 있다. 하지만 이 몸이 영원하지 못하다.
병病ㆍ노老ㆍ사死 한다.
그러니 이 몸은 영원하다고 할 수 없다.
실체가 없기 때문에 영원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아의 본래 의미이다.
그렇다면 과연 실체가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의 몸과 마음은 있다.
그러나 이 몸과 마음이라는 것은 홀로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상호의존적으로만 존재가 가능하다.
몸이 혼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당장 공기가 없으면 죽는다.
또 음식이 없으면 죽는다.
땅이 없으면 서 있을 수조차 없다.
따라서 몸이 혼자서 스스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바깥 것들과 같이 공존 즉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한다.
이렇게 서로 상호의존적으로 존재가 가능하다는 것은
독립적인 실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체가 없기 때문에 영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변화할 수밖에 없다.
그게 늙어가는 것이고 죽는 현상이다.
마음 역시 혼자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마음의 대상이 있어야만 일어난다.
물질적 대상이든 정신적 대상이든 대상 따라 마음이 일어난다.
‘나’라고 여기는 몸과 마음,
이것이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가능하다면 변화가 없이 영생을 하게 된다.
그러나 몸도 마음도 변하고 실체가 없어 무아이다.
인간 개개인이건 삼라만상이건 모든 것의 본래 모습은 텅 비어 실체가 없으므로 무아이다.
그러나 중생은 모든 게 다 있다,
영원하다고 여긴다. 이게 전도몽상이다.
그러니 본질적으로 무아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실체가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생로병사 윤회하는 것이다.
無我는 다시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人無我 각자 개개인으로서의 나, 자아라는 실체가 없다는 뜻이다.
法無我 우리가 바라보는 모든 현상, 삼라만상이 다 실체가 없다는 뜻이다.
무아를 깨달은 자는 윤회하지 않고 무아를 깨닫지 못한 자는 윤회한다.
깨달았느냐 깨닫지 못했느냐 하는 차이이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분석하거나 사유해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머릿속으로 분석해서 될 문제가 아니다.
무아를 깨닫고 체득하면 혹시 완전히 사라져 소멸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자유롭게 되는 것이지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무아는 형이상학적 견해(見, diṭṭhi)로서 제시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사실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무아의 진리는 이성적 사고를 통해 인식 가능한 것이 아니다.
무아에 대한 통찰은 염리厭離(出離), 이탐離貪, 해탈解脫, 해탈지견解脫知見 등으로 이어진다.
이와 같은 실천적 과정이 고려되지 않은 순수 이론으로서의 무아는
부처님의 원래 취지에서 벗어난 것이며 형이상학적 견해에 해당하는 것이다.
깨닫지 못한 범부는 스스로가 五蘊이라는 경험세계를 지배하는 힘(vaso)을 지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괴로움의 현실은 자신의 의지나 바람과는 상관없이 닥쳐온다.
이 점에서 오온을 이끄는 내부의 통솔자 혹은 주재자 따위는 인정될 수 없다.
어떠한 물질현상(色=오온)이든 그것이 과거의 것이든 미래의 것이든 현재의 것이든
내부적인 것이든 외부적인 것이든 거칠든 미세하든 저열하든 수승하든
멀리 있든 가까이 있든 모든 물질현상 그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그러한 ‘나’는 있지 않다.
그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우리 존재는 전적으로 상대적이고 상호의존적이다.
거기에는 고정불변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른 종교에서는 윤회의 주체를 인정하고 있지만 불교에서는
무아를 깨친 자에겐 윤회가 없다.
원칙적으로 무아와 윤회는 양립할 수 있는 교리가 아니다.
따라서 무아인데 누가 윤회하는가라는 질문은 원칙적으로 성립할 수 없는 말이다.
범부=자아의 상태=윤회
아라한=무아의 상태=윤회 종식
즉 아라한은 무아이고 더 이상 태어남이 없는 윤회의 종식을 획득했으니
윤회의 주체에 대해서 더 이상 거론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범부들은 윤회에 종속되고 무아가 아닌 자아가 있다고 하는
정신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자아가 계속해 윤회한다.
범부가 윤회하는 것은 자아의식 때문이다.
따라서 무아인데 윤회의 주체는 누구인가 하는 말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
왜냐하면 무아라는 말은 곧 윤회를 종식시킨 아라한이라는 말인데 아라한에게는 윤회가 없다.
따라서 윤회의 주체라느니 누가 윤회하는가라는 의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남방권은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아라한 = 오온五蘊
중생 = 오취온五取蘊
따라서
아라한 = 오온 = 무아
중생 = 오취온 = 자아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중생에게는 윤회가 있지만 아라한은 윤회가 없다.
즉 중생은 자아의식을 가지고 있기에 윤회하는 것이고
무아를 깨달으면 윤회가 종식된다.
그래서 무아와 윤회란 말은 함께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의 道果가 결정되는 것은
무아를 얼마나 완전하게 아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무아를 아는 것에 따라서 집착을 끊는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이다.
처음부터 무아를 알기는 어렵다.
먼저 모든 것이 변한다는 無常을 알고 그 뒤에 무상을 안 뒤에 오는 괴로움을 통찰하고
그 괴로움이 자기 뜻대로 해결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서 무아의 진리를 봐야 한다.
그리고 무아의 진리를 봤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다.
무아이기 때문에 내가 없기 때문에 有身見이 생기지 않아서 그 결과로 집착을 하지 않는 것이다.
집착을 하지 않기 때문에 業을 생성하지 않아서 미래의 태어남이 없고
받을 것이 없어서 다시 태어나는 윤회를 끝내는 것이다.
그러나 결론은 이렇다.
윤회는 무아를 모르는 범부 중생의 바람일 뿐이다.
죽음이 두렵고 허망하니까 윤회라도 있어 다소간 위안을 받으려는 어리석은 소망이다.
무아와 관련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윤회는 없다.
부처님도 윤회는 없다고 단언하셨다.
다만 고대인도 사회에는 윤회설을 믿는 것이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그것을 후대 불교인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것이다.
특히 대승 밀교에서는 적극적으로 윤회설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윤회가 불교의
기본교설처럼 됐고 부처님께서도 윤회설을 지지하셨다고 오해를 받고 계신 것이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