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득시拾得詩 14
아권출가배我勸出家輩 출가한 그대들에게 한마디 권하나니
수지교법심須知敎法深 부처님 법 깊은 뜻을 바르게 알라
전심구출리專心求出離 마음 다해 열반의 가르침 증득해내고
첩막염탐음輒莫染貪淫 행여라도 탐욕과 음욕에 물들지 말라
대유속중사大有俗中士 세속에도 법에 밝은 사람이 있어
지비불애금知非不受金 잘못을 볼 줄 알고 돈을 좇지 않느니라(受↔愛)
고지군자지故知君子志 그러므로 군자의 뜻 바르게 알아
임운청부침任運聽浮沉 성쇠나 부침의 일 흘려듣고 놔 두거라(가라앉을 침沈=沉)
我勸出家輩 내 권하나니 집 떠난 이들이여
須知教法深 모름지기 교법의 깊음을 알라
專心求出離 번뇌를 떠나기에 마음을 오로지 전해
輒莫染貪淫 부디 탐욕과 음욕에 물들지 마라.
大有俗中士 저 세속에도 큰 선비 있어
知非不愛金 그릇됨을 알아 금金을 좋아하지 않았나니
故知君子志 그러므로 알라, 군자의 뜻을
任運聽浮沈 잘되고 못 되는 것 부침에 맡기나니.
►출리出離 떠나다. 벗어나다. 속세와의 관계를 끊다.
<육조단경六祖壇經 행유품行由品>에
조일일환제문인총래祖一日喚諸門人總來 하루는 오조께서 제자들을 모두 불러 모으시고
오향여설吾向汝說 “내가 너희에게 말하리라.
세인생사대사世人生死大事 세상 사람들에게는 생사의 문제가 큰일인데
여등종일지구복전汝等終日只求福田 그대들은 하루 종일 복전이나 구하고
불구출리생사고해不求出離生死苦海 생사의 고해에서 벋어나기를 구하지는 않으니
자성약미自性若迷 자성이 미혹하면
복하가구福何可救 복으로 어찌 구제될 수 있겠는가?”라 했다.
►탐음貪淫 끝없이 욕심을 부리다. 재물을 구하고 색을 밝히다.
►임운任運 운명에 맡기다. 되는 대로 맡겨두다.
이 시는 後漢의 양진楊震의 고사이다.
양진楊震(50?-124?)
후한 홍농弘農 화음華陰 사람. 자는 백기伯起다.
환영桓榮에게 상서구양지학尙書歐陽氏學을 익혔고 경전에 밝고 박람해서
당시 ‘관서공자양백기關西孔子楊伯起’라 불렸다.
나이 쉰에 비로소 무재茂才로 천거되어 형주자사荊州刺史와 東萊太守를 지냈다.
전에 그에 의해 형주무재荊州茂才로 천거를 받은 왕밀王密이 창읍령昌邑令이 되었는데
밤에 몰래 찾아와 금 10근을 주면서 늦은 밤이라 아무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러자 양진이
천지신지天知神知 아지자지我知子知
“하늘이 알고 귀신이 알며 내가 알고 그대가 안다.”고 대답하면서 거절했다.
이를 사지四知라 한다.
안제安帝 원초元初 4년(117) 태복太僕이 된 뒤
태상太常을 거쳐 연광延光 2년(123) 태위太尉에 올랐다.
그가 태위로 있을 때 황제 안제의 유모인 왕성王聖이 환관 번풍樊豊 등의
세력이 강하여 탐욕과 사치로 조정의 부패가 만연하였으므로
양진은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간절히 간언하였다.
번풍의 모함으로 파면 당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자결하였다.
중국 위진남북조시대 송宋의 역사학자 범엽范曄(398-446)은
상서이부랑尙書吏部郎의 관직에서 선성태수宣城太守로 좌천되면서
역사 연구에 몰두 10여 년 각고의 노력 끝에 ‘후한서後漢書’를 편찬했다.
건무建武 원년(서기 25년)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가 후한後漢 정권을 세운 후부터
건안建安 25년(서기 220년) 헌제獻帝 유협劉協이 조비曹丕에 의해 폐출될 때까지
후한 196년의 역사를 기술했다.
그가 비록 지부志部를 완성하지는 못했으나 本紀 10권, 列傳 80권의 이 기전체 역사서는
사마천司馬遷의 ‘史記’ 반고班固의 ‘한서漢書’와 더불어 중국의 ‘三史’로 꼽힌다.
문장이 유려하고 설명이 적확하기로 유명해 후한의 역사서 중 제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그는 열전에서 문원文苑, 열녀烈女, 술사術士, 일민逸民, 독행獨行, 당고黨錮,
환관宦官의 일곱 가지 새로운 전傳을 첨가해 독특함을 더했다.
‘후한서’ 권 54의 ‘양진열전楊震列傳’을 펼치면
강직한 한 관료의 ‘4지四知’에 대한 아름다운 내용이 소개돼 있다.
후한 제6대 안제安帝(재위107-124) 때의 관료 양진楊震은 자字가 백기伯起다.
관서關西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학문에 전념해 박학다재하고
인격이 출중하며 청렴결백해 ‘관서의 공자孔子’라는 칭송을 받았다.
양진楊震이 동래군東萊郡 태수로 임명됐을 무렵의 일이다.
그가 임지로 떠나던 중 날이 저물어
창읍昌邑(현재 산동성 금향현)의 어느 객사에 머물게 됐다.
객사에서 혼자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 있는데
창읍현 현령인 왕밀王密이 밤늦게 찾아왔다.
왕밀은 양진이 형주荊州에서 자사刺史(감찰관)로 있을 때 알게 된 사이였다.
그때 그의 학식과 재능을 아껴 천거해준 바가 있었다.
즉 양진楊震은 왕밀의 출세 길을 열어준 은인인 셈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밤이 깊어가는 줄 모르고
지난날 얘기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중 왕밀이 슬며시 옷깃에서 황금 열냥을 꺼내
공손하게 양진의 무릎에 올려놓았다.
왕밀은 그동안 양진의 보살핌에 대해 약소하지만 성의로 알고 거둬주기를 간청했으나
양진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러나 엄중한 표정으로 거절했다.
왕밀은 뇌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베풀어준 은혜에 대한 보잘 것 없는 보답이라 생각하고
거둬주기를 거듭 간청했으나 양진은 두 눈을 부릅뜨면서
“나는 옛날부터 자네를 알고 있고 자네의 학식과 인물에 대해서도 확실하게 기억하네.
자네는 내가 짐작했던 바대로 출세를 해 현령 벼슬에 올랐네.
앞으로도 직무에 충실하여 영전을 거듭할 것을 의심치 않네.
그러니 나에게 보은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라고 말하며 거절했다.
그러나 왕밀은 집요하게
“아니올시다. 그렇게 냉정하게 말씀하시면 제가 너무나 섭섭하고 부끄럽습니다.
게다가 이 밤중에 방에는 태수님과 저 두 사람밖에 없지 않습니까.
오직 태수님 한 분에게 이 사람이 올리는 것이니 옛정으로 너그럽게 받아주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양진은 똑바로 왕밀을 쏘아보며
“자네와 나 두 사람뿐이니 아무도 모른다는 말인가.
그러나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그 다음에 자네가 알고 또 내가 아네
(天知 地知 子知 我知 何謂無知)”라며 단호히 거절했다.
왕밀은 얼굴을 들지 못하고 물러갔다.
그 후 양진의 청렴 고결한 언행은 더욱 확고해졌고
널리 알려져 군사관계 최고책임자인 태위太尉 지위까지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