寒山의 詩世界 硏究-禪文學的 입장에서
李日宰(慈明) 東國大學校 大學院 1993 寒山詩 博士學位論文
Ⅲ. 寒山詩의 形成背景
한 인간의 思想을 이해하는 데는 반드시 그 역사적, 사회적
또는 인간관계의 배경을 알아야만 제대로 이해 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어떤 경우든 인간은 사회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寒山의 경우에 있어서도 그의 유일한 시집 외에는 아무것도 생애를 정확하게 전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그 주변적인 배경을 살펴봄으로 해서 그의 文學과 思想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역사 속에서 태어나기에 어떤 경우든 역사의 제약을 받게 마련이다.
寒山의 생존 연대는 설이 구구하다.
그러나 대략 8세기를 전후한 인물인 점에서는 크게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寒山이 살았던 역사의 시대적 배경을 먼저 살펴보자.
우선 그 시대의 개괄적인 면을 보고 寒山詩의 서문을 썼다고 전해지는 여구윤閭丘胤에 대하여
알아보고 그의 지기인 豊干과 拾得과의 인간관계에 대하여도 살펴보고
또 王梵志와 白話詩의 관계를 살펴보며 그 당시 寒山이 은거하였던
天台山의 환경에 대하여 살펴봄으로서 寒山의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寒山의 佛敎思想的 배경은 무엇인지를 알아보고
마지막으로 隱逸思想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寒山이 살았던 시대의 역사적 환경을 정확히 집어보아 그의 시세계의 바탕을 풀어 가보자.
寒山이 담고 있는 세계는 여러 가지로 복합적이지만
그의 사상적 근간은 역시 佛敎思想이라 할 수 있다.
1. 傳記 및 人間關係
寒山의 전기는 분명하지가 않다.
그는 완전히 不世出의 隱遁 詩人으로 살았으며 그의 시가 세상에 남아
전해질 수 있었던 것도 閭丘胤이라는 사람과 國淸寺 스님 도교道翹에 의해서이다.
그는 언제 출생하여 언제 죽었는지 정확한 자료를 찾을 길이 없다.
종래에는 당 초기 7, 8세기의 인물로 보았지만
물론 이러한 견해의 확실한 자료가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는 그의 시에 있어 언어 사용을 비춰 볼 때
8세기 이후의 인물로 보는 것이 가능하리라고 본다.
현재 寒山에 관한 기록으로 가장 오랜 것은 風穴語錄과 太平廣記라 할 수 있다.
太平廣記에는 寒山이 大曆(766-799)년간에 天台 취평산翠平山에 은거했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石樹 제악濟岳의 <和三聖詩自序>에는
거여삼백년지상去余三百年之上 유초석有楚石 내가 간지 300백년 위에 楚石이 있고
거초석오백년지상去楚石五百年之上 유삼성有三聖 楚石이 간지 500백년 위에 三聖이 있으니
시이사이時移事易 시절을 따라 일을 바꾸니
풍운약합부절風韻若合符節 풍속과 운이 신표처럼 꼭 들어맞았다.
피재성당국초자彼在盛唐國初者 그들은 盛唐 초기에 있었다. 라고 말하고 있다.
楚石의 생존년대가 1296년에 태어나 1370년에 入寂하였으니
이보다 500년 앞을 따져보면 700~800년 사이가 될 것이다.
그리고 盛唐은 玄宗 開元부터 代宗 大曆까지의 唐詩가
가장 성하던 시기를 말하고 있으니 대개 8세기 초에서 말엽까지라 할 수 있다.
그의 생애를 알려주는 전기적 자료는 그의 시집인 <寒山子詩集>의 序文이 유일하다.
<寒山子詩集>의 서문은 閭丘胤에 의해 쓰여 지고 있는데
이에 대한 사실성 여부는 뒤에 가서 살피기로 하자.
<寒山子詩集>의 사실성은 거의 역사적으로 의심되지 않고 받아들여지는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寒山詩를 직접 살펴보자.
무엇보다도 한산 스스로의 목소리를 통하여
한산의 모습을 알 게 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이 시는 드물게 寒山 자신이 그 자신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는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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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년춘조명去年春鳥鳴 지난 해에 봄새가 울 때에는
차시사제형此時思弟兄 형과 아우를 생각했더니
금년추국란今年秋菊爛 금년에는 가을 국화 만발해
차시사발생此時思發生 태어나던 시절을 생각하나니
록수천장인綠水千場咽 푸른 물은 굽이굽이 흐느껴 울고
황운사면평黃雲四面平 누른 구름은 사방에 자욱하네.
애재백년내哀哉百年內 슬프다 한평생 백년 동안을
장단억함경腸斷憶咸京 함양 서울 생각해 애를 끊나니.
그는 아마도 고향을 생각하는 시름에 젖어 두고 온
옛 고향을 생각하는 시를 적었으리라 보여 진다.
그의 시에서도 정확히 전기를 밝힐 수 있는 단서는 없지만 어느 정도 윤곽은 알 수 있는 시이다.
그러나 한산의 생애를 정확히 밝힌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 하겠다.
자료가 거의 전해지지 않을 뿐더러 전해지는 자료조차
상당부분 신화적으로 각색 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의 자취는 알 수 없어도 그는 분명히 역사의 바깥에서 철저히 자유를 추구하며 고독하게
살았던 시인인 점은 분명하고 그의 그러한 활달한 사상의 자취는 시로서 남아 있는 것이다.
寒山詩는 옛부터 禪家에서 많이 읽히고 애송되어 왔다.
寒山詩가 담아내고 있는 세계는 자연과 삶의 세계를 道를 통하여
새롭게 통일 시키고 그러한 도에 따라 살아갈 것을 말하고 있다.
寒山이라는 이상경을 상정하여 산중에 사는 즐거움을 노래하고 있으며
때로는 세상에 대한 비판을 들어내기도 하고
승가에 대하여 반성을 촉구하기도 하며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중요한 내용은 언제나 진정한 도를 깨우치는 것에 있음은 물론이다.
그가 시로 읊고 있은 것은 자연의 세계가 큰 흐름을 이루고 있지만
때로는 현실 사회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보이기도 한다.
寒山에 대하여는 역사적인 접근은 매우 어려운 형편이다.
그의 삶의 생애와 기록이 전혀 밝혀지지 않은 은둔자로 살다 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동안 학계에서 많은 硏究가 진척되어
그의 생애에 대한 硏究는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고 있다.
文學的인 측면의 硏究 또한 그런대로 꾸준히 이루어져 왔지만
그러나 그의 佛敎 思想的인 硏究는 오히려 부진한 편이다.
최근 일반적으로 寒山이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지 근래에 나온 佛敎辭典을 살펴보자.
‘寒山 拾得’
唐 8-9세기 경, 天台山(浙江省) 國淸寺에 은서隱棲하였던 豊干문하 風狂의 高僧, 寒山과 拾得.
寒山은 산중의 寒巖幽窟에 머물고 拾得은 豊干에게 주워 다 길러짐으로 인연된 이름이라고 한다.
실재인물인가 어떤가는 不明하지만 9세기에는 전설화 되었다.
寒山이 찬撰했다고 하는 <寒山詩集>(付 拾得, 豊干의 詩)은 그의 선기禪機가 풍부한 脫俗性,
時俗에 대한 諷刺라고 하는 詩風이 宋代 소옹邵雍의 격양집擊壤集의 一派에 繼承되었다.
이와 같이 寒山 拾得에 대한 일반적 이해는 최근에까지 대부분 高僧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사전에도 나와 있는 바와 같이 8, 9세기 사람으로 9세기경에는 이미 전설화 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그의 시의 영향이 후대에도 계승되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혹자는 寒山의 실재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가공인물로 보기에는 그의 시가 주는 인상은 사실적인 면이 너무나 확실하다.
그의 연대에 관한 기록은 매우 다양하지만
그가 살았던 시기는 중당이나 그 후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는 아마도 중당의 어지러운 혼란의 시기에 과거를 통하여 정치에 나갈 기회를 얻지 못하고
강남과 북쪽을 방랑하다가 세상을 떠나 은둔의 길을 택했을 것이라고 보여 진다.
寒山詩 자체에서 드러내고 있는 점을 미루어 볼 때
이와 같은 추측은 어느 정도 가능할 수 있으리라 본다.
그의 여러 시편에서 그런 불우한 선비의 심경을 노래한 시가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의 시의 배경에는 禪의 정신이 가장 보편적으로 짙게 드리워져 있고
이는 그의 은둔수행자로서의 삶의 모습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동시에 그는 세속화 되어진 佛敎界에 상당한 비판의식을 드러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한편 그는 도교적인 사상의 일단도 드러내고 있으며
유교적인 소양도 상당히 갖춘 것으로 짐작 된다.
그러면 그의 생애를 알려주는 유일한 전기적 자료로서
<寒山子詩集>에 실려 있는 閭丘胤 序文에 대하여 살펴보자.
1) 閭丘胤 序文
寒山의 생애를 전해주는 유일한 자료는 <寒山子詩集>의 閭丘胤 序文이다.
서문에 실린 寒山의 모습을 보면 風狂之士로서 寒山에 은거하며
國淸寺에 내려와 拾得을 만나 음식을 얻어가기도 하고
國淸寺 스님들에게 꾸지람을 듣기도 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주관과 자존심이 뚜렷하여 당시 승려들이 꾸짖으면
하하 크게 웃고 혹 침묵하다가 가기도 하고 했다고 전한다.
늘 가난했고 몸은 초췌하고 깡말랐다.
그러나 偈頌과 시를 짓고 말이 이치에 부합됐다고 한다.
서문에는 寒山이 한암의 바위굴 속에 들어가 자취를 감춘 후 閭丘胤이 國淸寺 스님
도교道翹에게 寒山詩를 모아 시집을 만들도록 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내령승도교乃令僧道翹 國淸寺 스님 道翹에게 명하여
심기왕일행장尋其往日行狀 寒山의 행장과
유어죽목석벽서시唯於竹木石壁書詩 대나무, 나무, 석벽에 써 놓은 시
인가청벽상소서문귀삼백여수人家廳壁上所書文句三百餘首
또 촌가의 벽에 써 놓은 글귀 300여수와
급습득어토지당벽상서언게及拾得於土地堂壁上書言偈
拾得이 토지신 묘의 벽에 써 놓은 게문들을
병찬집성권幷纂集成卷 모두 모아 편집하여 책으로 만들었다.
이처럼 閭丘胤이 國淸寺 스님 道翹에게 명하여 寒山이 산간의 나무나 대나무, 바위벽,
혹은 촌의 곳간이나 인가의 관청 벽 위에 적어 놓은 시와
拾得이 사당의 벽에 써 놓은 偈頌을 모으도록 하여 시집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여기에는 다분히 閭丘胤과 道翹의 손을 거친 寒山의 모습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寒山의 전설 중에 가장 일찍 나온 것은 <寒山子詩集>의 권두에 보이는 서문으로
실제 閭丘胤이 보고 쓴 것이라기보다 村老나 道翹에 의해 들은 이야기를
옮겨 적은 것이라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寒山의 貞觀(627-649) 생존설은
奉恩寺本板本을 보면 閭丘胤 序文에는 나타나 있지 않고 拾得詩의 서문격인
拾得錄과 이 시집의 뒤에 있는 志南의 <天台山國淸禪寺三隱集記>에 나타나 있다.
閭丘胤 서문은 연대를 밝히고 있지 않지만 志南의 記에서는
분명히 宋 孝宗 淳熙16年(1189)으로 연대를 밝히고 있다.
비록 志南이 기를 쓴 연대는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틀림없겠으나
그가 말하고 있는 한산의 貞觀 생존설에 대하여는 많은 의문을 갖게 한다.
寒山詩의 내용을 보면 貞觀說은 도저히 맞지 않는다고 보인다.
그러나 志南은 記에서 오히려 傳燈錄이
잘못되었다(今傳燈所錄誤矣)고 지적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서 志南이 말하는 전등록의 잘못된 내용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말하고 있지 않지만 傳燈錄에서
한산의 연대를 모른다고 한 말에 대하여 지적하고 정관설을 내세운 것이라고도 보인다
사실 내용을 볼 때 志南의 記와 傳燈錄과
여구윤 서문의 내용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志南의 記와 閭丘胤 서문간의 관계는 분명하지가 않지만 상당히 내용이 비슷함을 많이 갖고 있다.
어떤 이는 閭丘胤 서문을 후대의 僞作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寒山의 연대를 지금 와서 정확히 밝힐 수 있는 자료는 없다.
그리고 과연 拾得詩의 서문을 閭丘胤이 썼는지도 알 길이 없다.
閭丘胤이라는 이름은 당 高宗에서 宜宗 때 사이 도선道宣의
<續高僧傳> 권25에 智嚴條에 閭丘胤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한산자시집> 서문의 작자와 동일인인지는 알 수 없다.
閭丘胤이라는 인물의 실재성에 대하여 이러한 문제를 최초로 제기한 사람은 다름 아닌 胡適이다.
그는 寒山을 白話文學의 시인으로서 매우 중요하게 취급하면서 王梵志의 후예로 보고 있다.
과연 閭丘胤이 실재 인물인지 혹은 가탁된 인물인지는 정확히 알 수 가 없다.
그러나 현존하는 자료로 寒山의 생애를 밝히는 가장 오래 된 자료는 바로 閭丘胤의
<寒山子詩集> 서문이 유일한 것이니 달리 자료를 의지할 수 가 없는 것이다.
寒山의 생애의 불분명한 사실은 시집의 서문에서조차 마찬가지로 말하고 있다.
그래서 서문은 다음과 같이 시작 되고 있다.
寒山子는 어떤 사람인지 상세하지 않다.
고로들이 보아 온 이래 모두 가난하고 광기 있는 사람이라고 이야기되고 있다.
天台山 당흥현 서쪽 칠십 리에 있는 한암이라는 곳에 은거하고 있었다.
대개 그곳에 살았지만 때로는 國淸寺에 가기도 했다.
國淸寺에는 拾得이 절 부엌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평상시에 음식 찌꺼기를
대나무 통에 담아 두었다가 寒山이 오면 그것을 짊어지게 해서 보냈다.
<한산자시집서寒山子詩集序>
상부한산자자詳夫寒山子者 부지하허인야不知何許人也 한산자는 어떤 사람인지 상세하지 않다.
자고로견지自古老見之 개위빈인풍광지사皆謂貧人風狂之士
古老들이 보아 온 이래 모두 가난하고 광기 있는 사람이라 이야기되고 있다.
은거천태당흥현서칠십리호위한암隱居天台唐興縣西七十里號爲寒巖
天台山 唐興縣 서족 70리에 있는 寒巖이라는 곳에 은거하고 있었다.
매어자지每於玆地 시환국청사時還國淸寺 대개 그곳에 살았지만 때로는 國淸寺에 가기도 했다.
사유습득寺有拾得 지식당知食堂 국청사에는 拾得이 절 부엌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심상수저여잔채재어죽통내尋常收貯餘殘菜滓於竹筒內
평상시에 음식 찌꺼기를 대나무 통에 담아 두었다가
한산약래寒山若來 즉부이거卽負而去 한산이 오면 그것을 짊어지게 해서 보냈다.
여기서 우리는 寒山에 대한 여러 가지 사실들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이미 寒山의 생존시부터 그는 존재를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는 天台山에 은거하여 살았다는 것.
그리고 寒山의 생존 년대를 측정하는데 문제를 삼게 된 縣의 이름에 대하여서 밝히고 있다.
위의 閭丘胤의 서문에 나타난 寒山의 모습은
閭丘胤이 간접적으로 들은 이야기를 옮겨 적은 것이다.
古老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옮겨 적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閭丘胤 서문에 나타난 寒山의 모습은
고로들의 눈에 비친 寒山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고로가 누구인지는 드러나 있지 않다.
당시의 天台山의 國淸寺 老長들일 수도 있을 것이고 혹은 산중 마을의 촌로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의 눈에 비친 寒山은 가난하고 광기에 서린 선비(貧人風狂之士)로 보였던 것이다.
광기 서린 가난한 선비야말로 寒山이 세속적인 눈에 비친 모습이었다.
그리고 寒山의 전기에 있어서 혼선을 일으키는 것 중에 하나는
과연 寒山이 出家를 했느냐의 문제이다.
후대의 여러 자료들은 대부분 寒山을 출가한 스님으로 보고 있으나
현대에 와서 일부 학자에 의해 의문이 제기 되고 있다.
위에서와 같이 寒山은 단지 風狂之士로 비춰졌던 것이다.
뒤에 역사적 자료를 보면
일반적으로 선사로 지칭되기도 하고 시승으로 말하여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寒山은 일생을 절에서 보내지 않고 그가 한평생 은거했던 천태산 국청사 뒷산의 한암을
토굴 삼아 그곳에 머물면서 가끔 國淸寺의 拾得을 찾아와 음식을 얻어 가곤 하였다.
寒山이 출가를 하였는가의 문제는 寒山詩를 해석함에 있어 중요한 관건이 된다고 볼 수 있다.
한산을 꼭 출가자가 아니라고 부정할만한 근거 또한 희박한 것도 사실이다.
이 점은 현재의 상황에서 결론을 내리기는 자료가 불충분하다고 보이며
차후에 다시 정확한 자료를 의거하여 살펴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본다.
다른 한편의 寒山 모습을 전하는 것을 보면 전혀 상반된 것을 알 수 있다.
寒山의 비참한 꼴은 거지와 같고 얼굴은 여윌 대로 여위었지만
그의 일언일구는 모두 진리를 담고 있어서 깊이 생각해 보면 이치에 합당한 것이다.
대략 그의 말이 나타내는 것은 빈틈없이 현묘하고 깊은 뜻이었다.
차상여빈자且狀如貧子 형모고췌形貌枯悴
한산의 비참한 꼴은 거지와 같고 얼굴은 여윌 대로 여위었지만
일언일화一言一話 이합기의理合其意
그의 一言一句는 모두 진리를 담고 있어서
침이사지沉而思之 은황도정隱況道情
깊이 생각해 보면 이치에 합당한 것이었다.
범소계언凡所啓言 동해현묵洞該玄黙
대략 그의 말이 나타내는 것은 빈틈없이 현묘하고 깊은 뜻이었다.
/<한산자시집서寒山子詩集序>
이처럼 寒山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진리에 부합하지 않음이
없다고 말하는 모습을 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느 것이 진정한 寒山의 모습에 가까운 것인가?
물론 寒山은 文殊의 화현으로 신화화 될 만큼 비범한 존재였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범속한 세속인의 눈에는 미치광이로 보였을 수 도 있다.
마치 광기의 역사에서처럼 세속의 논리에 찌든 눈에는 보살의 화현인
寒山의 가난한 모습이 제대로 보일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寒山 자신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그의 시를 통하여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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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출차어寒山出此語 寒山이 무슨 말을 내면
부사전광한復似顚狂漢 그만 모두 미치광이라 하네
유사대면설有事對面說 일이 있으면 맞대놓고 말하기에
소이족인원所以足人怨 그러므로 항시 남의 원한을 산다
심진어출직心眞語出直 마음이 참되면 말이 바로 나오나니
직심무배면直心無背面 곧은 마음에는 겉과 속이 없기 때문
임사도내하臨死度奈河 죽음에 다달아 내하를 건널 적에
수시루라한誰是嘍囉漢 거기에 무슨 잔말 있을 수 없는 것을
명명천대로冥冥泉臺路 아득히 어두운 황천으로 가는 길
피업상구반被業相拘絆 그저 제가 지은 업에 끌려갈 뿐이니라.
모두들 寒山을 미치광이라고 손가락질 하지만 실은 바른 말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리석음과 잘못된 소견일 뿐이다. 참된 말은 내외가 따로 없기 때문에 항상 바로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업을 짓고 황천에 끌려갈 때를 생각하면 寒山의 삶은 참으로 올바른 것이다.
정말 잘못된 것은 세속의 업을 짓고 있는 그들이다.
누구나 죽음이 다가오면 허물어지고 마는 것임을 잘 알아야 할 일이다.
우리는 여기서 寒山의 성격이 대단히 직선적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기에 스스로도
‘일이 있으면 맞대놓고 말하기에
그러므로 항시 남의 원한을 산다.
마음이 참되면 말이 바로 나오나니
곧은 마음에는 겉과 속이 없기 때문’
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얼마나 솔직한 성격의 소유자인지를 알 수 있게 한다.
다음 시 역시 한산의 이런 면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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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견한산時人見寒山 요즘의 세상사람 한산을 보고
각위시풍전各謂是風顚 저희끼리 이르기를 미치광이라 하네
모불기인목貌不起人目 얼굴은 남의 눈에 띄지 않고
신유포대전身唯布袋纏 몸에는 언제나 누더기 감았을 뿐
아어타불회我語佗不會 내 말은 세상사람 알지 못하고
타어타불언佗語我不言 남의 이야기 나는 말하지 않네
위보왕래자爲報往來者 내 한마디 알리나니 오가는 사람이여
가래향한산可來向寒山 이리 오려무나, 이 한산을 향해 오라.
세상 사람들은 한산을 향해 모두 미치광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한산은 매우 주관이 뚜렷하고 자신이 있어 모든 사람을 향해 한산으로 오라고 말하고 있다.
위에서 우리는 한산의 현실적 갈등과 고민을 알 수 있게 된다.
모든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예외 없이 현실과의 괴리를 겪게 되는 것이다.
현재 우리에게 전해지는 한산의 모습은 상당히 신화화 되어 있다.
寒山의 신화적 요소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를 생각하고 여기서 새로운 신화 분석의
틀을 갖고 寒山의 신화를 다시 해석할 때 여러가지 문제를 풀어낼 수 있을 것이다.
寒山의 신화는 송대 이후의 작업이라고 보여 진다.
唐末 이전에는 매우 소박하고 사실적인 寒山의 단순한 모습만 보인다.
寒山의 신화화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시집 서문의 閭丘胤이라 할 수 있다.
그가 寒山을 文殊의 화현이라는 신화로 윤색된 寒山을 적고 있음도 사실은
道翹를 비롯하여 國淸寺의 스님들로부터 듣고 적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寒山 신화의 많은 부분은 아마도 國淸寺 스님들에 의해 지어진
가상적 인물일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견해도 있다.
寒山의 신화화 되는 과정은 민간 신앙과 결부되어 나타났으리라고 생각된다.
寒山詩集 서문에 나타나 있듯이 寒山은 文殊의 화현으로 拾得은 普賢의 화현으로
또 豊干은 阿彌陀의 화현으로 되어 있는 것은 아마도 후대의 일이라고 보여 진다.
또한 國淸寺에 豊干의 자취가 남아 있고 호랑이의 발자국이 있으며
豊干이 평소에 호랑이를 타고 다녔다고 전해지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閭丘胤의 문제는 여려 사람에 의해 제기되고 있다.
그의 실재 여부와 생존 년대에 관해 아직까지 뚜렷하게 단정을 내릴만한 입장은 아니다.
閭丘胤의 이름은 <續高僧傳> 권25의 智嚴傳에
麗州자사로 이름이 나오지만 전혀 관계없는 인물이라고 보인다.
閭丘胤 서문의 관직명은 이름 상에는 아무런 허점이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높은 지위에 올랐던 인물의 이름이
당시 어떤 자료에도 나타나 있지 않은 사실이 알 수 없는 일이다.
비슷한 이름으로 閭丘均이 있어 五祖 弘忍禪師碑를 찬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일인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확실한 근거는 없다고 보는 견해들이 있다.
한편 이에 반하여 그가 貞觀 16년부터 4년간 臺州刺使로 있었던 것이 사실임을
<적성지赤城志>를 통하여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입장을 보이기도 한다.
그의 존재를 사실적으로 보는 입장도 있으니 閭丘胤은 실재인물이다.
그는 <寒山子詩集>의 서문을 썼다는 것은 결정적이다.
이로서 역사적 실재 인물임을 알 수 있다고 역사적 사실성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閭丘胤의 서문은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많은 문제를 갖고 있다.
그런 문제 중에 地名의 문제와 연대의 문제를 빼놓을 수 없다.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는 당흥현唐興縣을 당초의 이름이었던 시풍현始豊縣으로 한 것은
<續高僧傳>에 의해 閭丘胤이 그때 사람으로 보여 서문의 縣名을 썼던 것으로 보인다.
寒山이 貞觀 시대란 설에 대하여 부정하는 입장을 뒷받침하는 것이 唐興縣이라는 지명이다.
이 지명이 개명된 것은 高宗 上元 2년이라고 한다.
그러기에 閭丘胤의 서문은 당 高宗 上元 2년 이후의 작품이며
이는 후대에 閭丘胤을 가탁한 작품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唐興縣의 지명이 처음 쓰이기 시작한 것이 高宗 上元 2년(675)이기에 7세기 下代가 된다.
그러기에 貞觀初라는 閭丘胤의 서문은 역사성이 없다고 보고 있다.
이같이 한산의 생애에 관해 貞觀說은 南宋의 사문 志南의 후서에서 주장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寒山의 생애는 閭丘胤의 서문에 의한 자료를 통해 볼 때
많은 의문을 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5代나 北宗에서 편찬된 여러 가지 僧傳이나 禪籍에도
주로 선승과의 관계에 있어서 寒山 拾得을 서술 기록하고 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寒山의 출생에 대한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한데 이를 두루 살펴보면
1. 貞觀說(633) 2. 正元說 3. 선천설宣天說 등이 있다.
또 慧能이 태어난 때가 貞觀 12년(638)이니 寒山이 慧能의 후임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大曆(766-779) 년간 天台山에 은거했다고 말하기도 하고
당 玄宗(713-714) 때에 태어났다는 설도 있다.
심지어 서단보胥端甫는 寒山을 隋末 唐初의 호걸 중에 하나가 아니었을까 보고 있다.
일개 지사로서 영웅적 신분으로 天台山 寒岩에 숨어들어
영웅적인 말로를 보여주고 있다고 그는 본다.
이는 매우 비사실적인 상상이라고 보여 진다.
또 혹자는 寒山의 姓은 방龐, 名은 임운任運, 夾西 咸養人 출신으로 부유한 농가출신으로
소년시 풍류와 방탕을 즐기고 학업을 이루지 못해 과거에 낙방하여 출세 길이 막히고
가난해졌으며 가족의 냉대를 받게 되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위와 같은 견해는 매우 비현실적이며 근거가 희박한 것이기도 하다.
특히 성과 이름이 龐이며 任運이라는 것은 너무나 잘못된 주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름을 任運이라 한 것은 특히 그렇다.
여기서 任運은 선가에서 자유자재한 해탈의 경지를 나타내는 말이지
결코 寒山의 이름을 의미한다고 볼 수는 없다.
任運은 오히려 寒山의 독특한 禪思想을 나타내는 말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최근의 자료 평가를 살펴보면 寒山의 또 다른 한 단면을 엿볼 수 있게 한다.
唐末의 詩僧 관휴貫休(832-912)의 詩 중에 赤松山에 머무는 서도사에 준 시의 귀절 중에
<그대는 寒山子를 좋아하고 노래는 오직 낙도가이다.>
라는 귀절이 있는데 이 시는 850년 전후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당말의 시인 李山甫도 시에서 寒山子를 多才의 시인,
수도자로 晋代의 대표적인 산수시인 謝靈運과 나란히 칭송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 시승 제기齊己의 작으로 <저궁을 묻지 말라>는 연작시중 제 15수로서
여기서 自心自了의 경지에 도달한 자신은 寒山의 게를 읊는 것도 필요치 않다고 말하고 있다.
다음은 寒山이 貞觀시대의 인물이 아님을 증명하는 시가 寒山詩 중에 있으니 한번 보자.
291
여견승요성희기余見僧繇性希奇 내 보니 장승요는 뛰어난 성질
교묘간생양조시巧妙間生梁朝時 묘하게도 양나라에 태어났고
도자표연위수특道子飄然爲殊特 도자 또한 보통에서 뛰어난 솜씨
이공선회수호휘二公善繪手毫揮 휘두르는 저 붓끝은 익숙하게
령화도진의기이逞畵圖眞意氣異 진실을 나타내는 특별한 의기
용행귀주신외외龍行鬼走神巍巍 용과 귀신 달리는 높은 그 정신
요모허공사진적饒貌虛空寫塵跡 허공을 모양 뜨고 티끌 자취 그리어도
무인화득지공사無因畵得志公師 끝내 지공 모습은 그리지 못했나니.
만약 위 시가 寒山이 지은 것이 확실하다면 위시는 바로
寒山이 貞觀 이후의 인물임을 증명해주는 시라고 할 것이다.
위의 시에서 장승요張僧繇는 구름과 용 인물의 그림을 잘 그리던 梁나라 때의 화가이고
그에 의해 나온 화용점정畵龍點睛의 고사는 유명한 것이다.
그리고 道子는 吳道子를 일컬으며 당의 玄宗 때 사람으로 그림의 성인이라고 불려졌다.
誌公은 양나라 때 고승으로 梁武帝의 존경을 받았던 스님이다.
張僧繇에게 誌公和尙의 초상을 그리게 했으나
誌公和尙이 12관음의 상을 나타내자 끝내 그리지 못했다고 한다.
여기서 문제는 道子가 시에 나오는 것이다.
道子의 연대는 확실히 貞觀 이후건만 시에 나오는 것을 보면
寒山이 貞觀 때라고 하는 주장은 시대적으로 맞지 않음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다.
다음 시 또한 시대적 상황을 잘 알 수 있는 시중에 하나이다.
寒山詩 중에는 매우 예외적인 시라고 할 수 있다.
169
자문양조일自聞梁朝日 내 들으니 양무제의 조정에는
사의제현사四依諸賢士 사의의 모든 어진 선비들
보지만회사寶誌萬廻師 보지와 만회사
사선부대사四仙傅大士 사선과 부대사
현양일대교顯揚一代敎 부처님 한평생의 가르침을 드날리고
작지여래사作持如來使 스스로 여래의 사자라 생각했네
건조승가람建造僧伽藍 스님들 위해 큰 절을 이룩하고
신심귀불리信心歸佛理 부처님의 교리를 깊이 믿었네.
바로 이 시도 寒山이 貞觀 때의 인물이 아님을 증명하는 시라고 할 수 있다.
寒山이 어느 시대에 생존하였는가의 문제는
이제까지 胡適이후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논의되어 왔다.
그렇지만 아직 뚜렷한 결론에 이르지 못한 것은 확실한 근거를 찾지 못한 때문이다.
모두들 자기 견지서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전체를 보는 시각이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편 영국의 동양학자의 눈을 빌려 寒山을 바라보면 어떨까?
잠시 Waley 의 평을 들어보자.
중국 시인 寒山은 8, 9 세기 사람이다.
그와 그의 형제는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그의 형제와 인연을 끊고 처자와 이별하고 여러 지방을 방랑하면서 많은 책을 읽었다.
그 후 마침내 寒山에 숨어서 寒山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은거지는 사원과 도관으로 유명한 天台山에서 25마일쯤 되는 곳이고 寒山도 가끔 방문했다.
그의 시중에 하나로 100세가 넘은 자신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다분히 과장된 것이지만 그가 장수한 것만은 확실하다,
그의 시에 있어서 <寒山>은 지명이지만 또 하나의 심경을 나타내는 경우도 많다.
객관적 입장에서 상당히 정확한 사실을 충실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보여 진다.
신비적이거나 신화 속에 감춰지지 않은 寒山의 모습을 나타내려고 노력한 것을 알 수 있다.
閭丘胤 서문에서 전하는 寒山은 상당히 신비화 된 모습이다.
이는 이미 신화화 된 寒山의 모습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寒山을 文殊의 화신으로 拾得을 普賢의 화신으로 신화화 시킨 것은
아마도 후대의 가탁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매우 타당하다고 보여 진다.
그리고 寒山이 생존했던 시대의 문제에 있어서도 많은 의문점을 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閭丘胤의 서문은 많은 점에서 사실을 벗어나 신화적으로 윤색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 이면에 깔려 있는 寒山의 소박한 은자의 모습을 다시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寒山의 진정한 모습과 또 그의 文學이 올바른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그의 인간관계에 대하여 살펴보자.
2) 交遊關係
寒山을 이해하는 데는 豊干과 拾得과의 관계를
잘 알아야 만이 寒山의 세계를 바르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위 3인은 어쩌면 한 세계를 공유하였다고 보여 지기도 한다.
정신의 세계에 있어서 3인이면서 동시에 한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세 사람의 관계는 많은 부분이 신화화 되어 있다.
寒山과 拾得과 豊干과의 사이를 읊은 寒山詩를 보자.
39
관거은유처慣居隱幽處 그윽한 곳에 숨어 살기 길들어
사향국청중乍向國淸中 잠깐 國淸寺로 찾아가 본다.
시방풍간노時訪豊干老 때로는 豊干 노인 찾아도 보고
잉래간습공仍來看拾公 이내 拾得의 처소도 찾아본다.
독회상한암獨廻上寒巖 홀로 돌아와 찬 바위에 오르니
무인화합동無人話合同 마음 털어 이야기 할 아무도 없구나.
심구무원수尋究無源水 근원 없는 물 깊이 찾으니
원궁수불궁源窮水不窮 근원은 끝이 나도 물은 끝이 없어라.
寒岩에 숨어 살면서 가끔 拾得과 豊干을 찾아 國淸寺로 갔다 와서
아무도 더불어 이야기를 나눌 이 없는 외로움을 시로 읊고 있다.
그는 홀로 산의 바위굴에 사는 심사를 이와 같이 읊조리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을 벗어나 3인은 참으로 진경 속에 살다 갔다.
이와 같이 豊干과 拾得은 寒山과의 관계에서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그래서 이 세 사람을 신화화 되여 각각 文殊 普賢 阿彌陀의 화현이라고 말해지고 있는 것이다.
다음은 拾得의 시를 통하여 寒山과의 관계를 살펴보자.
寒山이 拾得의 형의 위치에 있었음을 나타내는 시이다.
332
종래시습득從來是拾得 원래 이 습득이란
불시우연칭不是偶然稱 우연한 일컬음이 아니다
별무친권속別無親眷屬 따로이 친한 권속은 없고
한산시아형寒山是我兄 한산 그이가 내 형이네
양인심상사兩人心相似 두 사람 마음이 서로 같나니
수능순속정誰能徇俗情 세상 인정을 누가 따르랴
약문년다소若問年多少 만일 나이의 많고 적음 물으면
황하기도청黃河幾度淸 황하 몇 번이나 맑았더냐고.
위 시에서 拾得은 寒山을 언제나 형으로 불렀던 것이다.
이로 보아 한산이 위였음을 알 수 있다.
진전좌우길津田左右吉은 신화성에 대하여 寒山의 설화가 발전함에 따라
시도 부가되어 첨가된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고 지적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상당히 역사에 충실하게 寒山을 硏究하고 있는 것이다.
天台山 國淸寺와의 관계와 豊干, 拾得과의
교섭을 말하는 시는 이 같은 과정의 윤색을 보여주고 있다.
선승의 偈와 다른 詩의 경우도 대개 뒤에 포함된 것으로 생각 된다고 보고 있다.
그의 인간상이 신비화됨에 따라서 그와 같은 신비한 말과 같이 높은 상징성을 부여하고 있다.
<五臺山記>에 보면 豊干이 寒山에게 오대산에 함께 가자고 하며
같이 가면 同流가 될 것이고 자기와 더불어 가지 않으면 동류가 못될 것이라고 한다.
그러자 寒山은 안가겠다고 한다.
豊干은 너는 나와 동류가 아니다 라고 하자 寒山이 묻기를 오대산에 뭐 하러 가느냐고 한다.
豊干이 말하기를 文殊菩薩을 친견하러 간다고 한다.
寒山이 다시 말하기를 그대는 나와 동류가 아니다고 대답한다.
閭丘胤이 寒山을 만난 것은 國淸寺에서 寒山과 拾得을 마지막으로 한번 보았을 뿐이다.
이내 寒山과 拾得은 곧 한암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추었다.
이 때 사람을 시켜 약과 옷을 보냈으나 寒山은 이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로는 한암의 바위는 영원히 닫혔고 아무도 寒山과 拾得을 본 사람이 없었다.
寒山의 설화가 윤색된 부분을 보면 豊干과의 관계에서 豊干이 閭丘胤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미리 예언을 한다는 대목과 또 마지막 한암이 갈라졌다는 것은 물론 사실성과는 거리가 멀 것이다
그리고 많은 부분이 의문의 여지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寒山詩의 서문 중에 신화화 된 모습을 보여주는 대목중 하나는
閭丘胤이 단구丹丘의 관리를 제수 받아 臨地로 떠나기 전에 두통에 시달리게 된다.
그래서 의사를 불러 치료를 받았지만 별 효험이 없을 뿐만 아니라 더욱 아프고 심해졌다.
그때 豊干이라고 하는 禪師가 나타나 天台山 國淸寺에서 왔다고 말했다.
豊干선사에게 치료를 부탁하자 물을 뿌려 났게 하였다.
자사가 감사한 마음으로 台州에 가는데 그곳에는 스승으로 우러러 모실만한 분이 누가 있는지
소개를 부탁드리자 豊干선사는 그 분은 보게 되어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알아차리는 힘이 있어도 아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만약 보려고 한다면 그 겉모습에 의해 보지 않아야 볼 수 있게 됩니다.
寒山은 문수보살인데 國淸寺에 몸을 숨기고 있습니다.
拾得은 보현보살입니다.
그 모습은 거지나 미친 사람과도 같습니다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이처럼 상당히 신비한 모습으로 윤색되어진
寒山과 拾得과 豊干의 관계를 閭丘胤은 서문에서 그리고 있다.
그러나 많은 부분이 신화적으로 윤색되었다 하더라도
寒山이 존재했던 그 역사적 사실 자체를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윤색되기 이전의 소박한 寒山의 모습 속에 담겨 있는
原型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것이 寒山의 세계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현재 우리에게 알려진 寒山의 모습은 아마도 國淸寺 스님 道翹의 눈에 비친 인상이
閭丘胤의 손을 거쳐 우리에게 전해진 것이라고 보여 진다.
豊干은 國淸寺에서 절을 위해 쌀을 모아 오기도 하고
밤이 되면 노래를 부르며 혼자 즐거워하기도 하며 살았던 스님이고
拾得은 豊干선사가 주워 다 길러서 拾得이라고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하여 진다.
寒山과 拾得과 豊干이 서로 어울려 아무도 모르지만
높은 경지를 스스로 즐기는 것을 拾得의 시를 통하여 살펴보자.
331
한산자한산寒山自寒山 한산은 제 한산이요
습득자습득拾得自拾得 습득은 제 습득이다.
범우기견지凡愚豈見知 어리석은 이들 어찌 보아 알거냐
풍간각상식豊干却相識 풍간이 있어 서로 알아주리라
견시불가견見時不可見 볼려면 볼 수 없으니
멱시하처멱覓時何處覓 찾을 땐 어디서 찾을꼬?
차문유하연借問有何緣 묻나니 이 무슨 인연인가
향도무위력向道無爲力 내 말하노라 무위의 힘이라고
세 사람의 관계를 잘 나타내주는 시이다.
이 세 사람의 세계를 이어주는 인연은 다름 아닌 무위의 힘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는 세속적인 어떤 관계가 아니라 바로 도의 세계에서 서로 만나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寒山과 拾得의 이상한 모습을 아무도 세상 사람들은 알지를 못했다.
오직 豊干만이 그를 알고 이해하여 주었다.
세 사람의 시의 세계도 매우 비슷하여 한 세계를 이루고 있다고 보이며
때로는 서로의 시가 모방된 모습도 보이고 있다.
다음 시도 그러한 예 중에 하나가 된다.
한산시와 습득시를 비교하여 보자.
162
한자방고승閑自訪高僧 혼자 한가로이 높은 스님 찾나니
연산만층층烟山萬層層 연기 산은 층층이 몇 겹이던가
사친지귀로師親指歸路 스승이 친히 돌아갈 길 가리키니
월괘일륜등月挂一輪燈 달은 어느새 둥근 등을 달았네.
361
한자방고승閑自訪高僧 스스로 한가로이 높은 스님 찾으나
청산여백운靑山與白雲 푸른 산에는 흰구름 모여 드네
동가일치자東家一稚子 동쪽 집에는 한 놈 어린애더니
서사중군군西舍衆群群 서쪽 집에는 뭇 놈들 모였구나
오봉용운한五峰聳雲漢 오봉은 허공에 높이 솟았고
벽락수징징碧落水澄澄 벼락은 맑은 물이 넘쳐흐르네.
사지령귀거師指令歸去 스승의 지시 따라 돌아가나니
월하일륜등月下一輪燈 달은 떠 한 수레바퀴 동불일러라.
앞의 시는 寒山의 시이고 뒤의 시는 拾得의 시이다.
두 시에서는 어떤 고승을 찾아 가는 말로 시작 되고 있으며
마지막 또한 다 같이 밝은 달을 등불로 비유하여 마치고 있다.
그 안에 담고 있는 내용도 靑山 白雲과 더불어 살아가는 자신의 세계를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 둘이 함께 찾아 갔던 고승은 豊干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스승은 그들에게 돌아갈 길을 가리켰다는 말은
곧 법을 배웠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는 두 사람이 함께 삶을 공유하는 생활공간이 같았을 뿐 아니라
시의 세게도 서로 밀접하게 관계를 갖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음은 寒山과 王梵志와의 관계를 살펴보자.
寒山詩의 특징 중에서 白話詩的 특징을 뺄 수는 없다.
이런 白話詩는 어디서부터 영향 받은 것일까?
寒山의 白話詩의 전통은 王梵志로부터 물려받았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王梵志는 佛敎詩人으로 많은 白話詩를 남기고 있으며
王梵志와 寒山과의 관계는 백화시의 계승자라고 하는 점에서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그가 寒山과의 관계를 밝히는 자료로 최초로 역사에 남아 있는 자료는
風穴 연소延沼의 法語라고 할 수 있다.
王梵志의 생존 연대에 대하여 胡適은 590년에서 660년 사이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王梵志에 대하여 <입시의고入矢義高>는 다음과 같이 胡適과는 다른 견해를 밝히고 있다.
王梵志는 이제까지는 당의 초기 인물로 생각되어 왔지만 나는 그의 시대를 뒤로 본다.
아무리 빨라도 8세기 전반 이후의 사람이라고 본다.
당 초기라고 보기는 어렵다.
8세기 이후에는 구체적으로 천보의 난 이후가 된다.
그 전란은 당의 사회와 문화에 큰 변혁을 주었지만 佛敎역사에서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전란 이전에는 사원이 왕후와 문벌귀족의 비호 아래
고원한 교리의 탐구에 진력하고 민중의 현실적 교화를 도외시 했다.
그러나 天寶의 난은 귀족세력을 몰락시키고 그 여파로 佛敎는 널리 민중과 결속하게 되었다.
이처럼 胡適과 入矢義高와의 견해는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과연 어느 시대가 정확한 것인가를 지금 단계로서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그러나 寒山 이전의 인물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王梵志나 寒山이나 생애가 애매한 것에서는 마찬가지이다.
王梵志의 생애를 알 수 있는 여러 자료들 중에 다음 것들은 비교적 신빙성이 높은 것이다.
레닌그라드의 필사본인 敦煌本 王梵志詩集 끝에는
<大曆 6年(771) 5月 日 初 王梵志詩 一百 一十首 沙門 法忍寫之記>라고 쓰여 있다.
王梵志 詩集은 <新修大藏經>85권에 들어 있는데 이는 돈황본 자료와 함께 모아져 있는 것이다.
그는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전반의 인물로 추정할 수 있다.
그의 시에서 말하는 府兵制 시행은
6세기에서 8세기까지 시행되었던 점을 보아도 그의 생존 년대를 짐작할 수 있다.
宗密(780-841)은 그의 <禪源諸全集都序>에서 중생들의 근기에 따라
시나 노래로 이끄는 것을 宗으로 삼는 부류를 誌公, 傅大師, 王梵志등을 예로 들어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등한 존재로 寒山이 충분한 자격이 있음에도
여기에 寒山의 이름이 빠져 있음은 주의해볼 필요가 있다.
아마도 寒山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王梵志보다 좀 늦지 않았나 생각된다.
王梵志에 대한 문제를 먼저 제기한 것은 역시 胡適에 의하여서인데
그는 <白話文學史>에서 王梵志와 寒山과의 관계를 다루면서
寒山을 王梵志의 후예로 보고 있는 것이다.
王梵志詩는 1900년 敦煌 藏經洞 대문이 열리면서 햇빛을 보게 되었을 때 나온 것은 필사본이다.
王梵志시집으로는 현재 돈황선종관계 자료 일람의 王梵志 시집으로 스타인본과 페리오 본이 있다
王梵志는 隋나라 文帝 때 사람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初唐 때의 사람이라고 보고 있다.
寒山은 王梵志의 전통을 이은 白話詩人으로 평가하고 있는 사람은 많이 있다.
그리고 寒山과 王梵志는 같은 지방 사람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王梵志詩가 半偈 半詩를 이루고 있는 작품이 상당히 유행했다.
胡適은 <白話文學史>에서 寒山이 王梵志의 白話文學의 계승자로 보고 있으나
이는 寒山에 대한 정당한 평가라고는 생각 되지 않는다.
물론 寒山은 王梵志의 白話詩의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나
寒山은 王梵志를 뛰어넘어 독특한 자기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寒山과 王梵志와의 관계는 白話詩의 전통을 이어가는 면을 나타내는 것을 風穴延昭의
寒山詩를 들어 설법한 시에서도 볼 수 있으나 이 시는 현재 寒山詩集 어느 본에도 들어 있지 않다.
아마도 10세기 이전 古本에서 風穴이 보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寒山은 王梵志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으며
여러 면에서 寒山과 王梵志는 유사한 점을 많이 갖고 있다.
한편 寒山은 王梵志보다 더 한층 文學이 세련되고 깊어졌으며
특히 禪思想과 인연을 맺고 있다는 점에서 寒山은 王梵志보다 더욱 발전하였다고 할 수 있다.
2. 天台山의 環境
寒山의 신비성의 윤색은 대부분 天台山의 특이한 분위기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된다.
天台寺는 天台智者大師의 창건으로 天台宗의 근거지이다.
그러나 寒山이 비록 天台山에 살았지만 天台宗과 깊이 관련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南宗의 祖師禪에 더 가까이 있다고 보여 진다.
天台山은 折江省 동북쪽에 위치하며 주위에는 翠岩山과 四明山등이 위치하고 있으며 五峰에는
지의智誼가 기초를 세운 國淸寺가 있는데 여기에서 관정觀靜, 담연湛然 등이 머물러 天台宗의
근본도량이 되었고, 일명 景德 國淸寺, 天台寺라고도 하며 이 절에는 豊干의 久地가 있기도 하다.
또한 修禪寺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다음 시는 천태산의 이러한 신비를 한산이 잘 나타내고 있는 시이다.
304
단구형용여운제丹丘逈聳與雲齊 단구는 멀리 솟아 구름과 나란하고
공리오봉요망저空裡五峰遙望底 허공 중의 오봉은 멀리 바라 나직하다
안탑고배출청장雁塔高排出靑嶂 안탑은 높이 푸른 산을 헤쳐 나고
선림고전입홍예禪林古殿入虹蜺 선림 옛집은 무지개 속에 든다.
풍요송엽적성수風搖松葉赤城秀 소나무에 바람 불어 적성산 빼어났다.
무토중암선로미霧吐中巖仙路迷 중암에 안개 일어 신선 길 아득해라
벽락천산만인현碧落千山萬仞現 푸른 기운 일천 산은 만 길에 솟았는데
등라상접차연계藤蘿相接次連谿 소나무 칡넝쿨은 골짝을 잇 덮었다.
丹丘는 天台山을 말하며 雁塔은 탑이 서있는 모양이 기러기 날아가는 모습을
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한데서 나온 말이며 赤城은 천태산 남쪽에 있는 산이다.
禪林은 國淸寺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같이 천태산은 한산이 시로 주위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듯이
매우 수려하며 오랜 전통을 갖고 있는 곳이다.
삼국시대(3세기)부터 佛寺의 건립이 성황 되었고
그 이후 道敎와 佛敎의 성지로서 중요한 지위를 점하게 되었다.
6세기경에 天台智者대사가 天台宗의 법문을 여기서 열은 것은 天台敎學의 근본도량으로
서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대개의 고승은 반드시 한번은 여기를 방문하고 수행을 쌓는 것이다.
또한 절도 많이 건립되었으며 575년(陳의 太建7년)에
天台智者가 여기에 입산한 이후 중국 天台宗의 근본 도량이 되었다.
天台宗이라는 명칭도 山名에서 유래한 것이다.
산록山麓에는 隋 양제煬帝(재위604-618)에 의해
명명된 國淸寺가 있어 天台宗의 중심지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國淸寺는 天台大師가 여기에서 선을 닦던 곳으로서 여러 곳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다.
寒山과 國淸寺와의 인연이 언제쯤 이루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이와 같은 설화가 생겨나게 된 조건을 이 절은 두루 갖추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아직까지 경내에 있는 三賢堂은 寒山과 豊干과 拾得의 제사를 재내고 있다.
또한 寒山이 머물렀다고 전해지는 寒岩(寒山)과 拾得의 유적도 아직까지 남아 있다.
이 같은 유적은 물론 寒山 설화를 윤색하기 위하여 누군가가 만들어낸 것에 불과 하겠지만
이미 기술한 閭丘胤의 서문에도 그들 세 사람이 자주 國淸寺에 왕래한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天台山의 역사 속에서 3인이 나타나는 것은
실은 閭丘胤 서문 이후의 일이고 그 이전은 아니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또 그 서문 속에 나오는 國淸寺의 스님 道翹라고 이름 하는 인물에 대해서도
이옹李邕(750年更歿)이 찬한 國淸寺碑에 寺主로 같은 이름이 보여 지고 있는데
그 밖에는 전혀 알 수 없다.
아마도 豊干은 國淸寺에서 오랫동안 주석한 스님이라고 생각되며 天台山을 중심으로 하여
寒山과 豊干과 拾得의 일화들이 이루어지고 후에 신화적으로 만들어졌다고 보인다.
다음의 시는 天台山의 추운 겨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寒山의 시이다.
307
한산한寒山寒 寒山은 추워라
빙소석氷銷石 얼음이 돌 얽맸다
장산청藏山靑 푸른 산을 감추고
현설백現雪白 흰 눈은 드러냈다
일출조日出照 해가 올라 비추면
일시석一時釋 한 번에 녹으리라
종자난從玆暖 지금부터 따스하니
양노객養老客 늙은 몸 기르겠다.
여기서 그는 눈 덮인 寒山 속에서 언젠가 햇살에 녹아
따뜻하게 되면 그때 몸을 기르겠다고 말하고 있다.
위 시는 3言詩로 되어 있다.
3言詩는 寒山이 보여주는 매우 독특한 시 형태이다.
다음 시 역시 天台山의 주위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데
四明山과 이어진 모습을 말하고 있으며 끝없이 펼쳐지는 사방의 아름다운 모습에 취하게 한다.
243
평야수관활平野水寬闊 들은 널리 뻗고 물은 느린데
단구연사명丹丘連四明 단구는 사명산에 연이어 있다.
선도최고수仙都最高秀 그 중에 선도 가장 높이 빼어나
군봉용취병群峰聳翠屛 뭇 봉우리 푸른 병풍 둘러쳐 있다
원원망하극遠遠望何極 멀리 바라보아 아스라이 끝없고
올올세상영矹矹勢相迎 굽이굽이 그 형세 서로 잇닿네.
독표해우외獨漂海隅外 외로이 바다 밖에 홀로 떠 있어
처처파가성處處播嘉聲 아름다운 그 이름 두루 떨친다.
그가 天台山에 입산한 것은 정확히 언제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대략 30세를 전후한 시기라고 생각되는 것은 그의 시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그의 시에는 天台山을 찬양하고 길이 天台에 머물 것을 마음 정하는 시가 많이 있다.
다음 시도 그러한 시중에 하나이다.
77
복택유거지卜擇幽居地 그윽이 살 만한 땅 가려잡으니
천태갱막언天台更莫言 천태가 제일 마음에 들었다.
원제계무랭猿啼谿霧冷 잔나비 울음 골짝 안개에 차갑고
악색초문연嶽色草門連 둘레 산 빛은 싸리문에 와 닿는다.
절엽복송실折葉覆松室 나뭇잎 꺾어 소나무 지붕 덮고
개지인간수開池引澗水 연못 만들어 시냇물 끌어 온다.
이감휴만사已甘休萬事 이미 모든 일 쉬어서 만족해라.
채궐도잔년采蕨度殘年 고사리 캐며 남은 생을 보내리라.
그가 天台山을 처음 택하여 입산하게 된 동기를 밝히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입산에 즈음하여 들어갈 때 쓴 시로 보인다.
깊은 산중에서 자연과 벗하며 고사리를 캐면서 살겠다는 그의 마음은 확고한 것이다.
그가 天台山에 언제 입산했는지에 대하여는 그의 생애에 대한 아무런 자료가
남아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그의 시를 통하여 단편적이나마 편린을 엿볼 수 있다.
그의 시에는 그가 寒山에 들어 간지 30년이 되었다는 시가 있다.
48
일향한산좌一向寒山坐 한 번 寒山에 들어가 앉아
엄유삼십년淹留三十年 어느덧 삼십년 흘러 지났네.
작래방친우昨來訪親友 이제 돌아와 친구들 찾았더니
태반입황천太半入黃泉 거의 반이나 황천길 손이 됐네.
점감여잔촉漸減如殘燭 차츰 줄어들어 남은 촛불 같거니
장류사서천長流似逝川 길이 흘러 흘러가는 강물 같구나.
금조대고영今朝對孤影 새삼 외로운 그림자 마주 앉으니
불각루쌍현不覺淚雙懸 두 줄기 눈물 절로 흘러내리네.
그가 寒山에 얼마나 머물렀는지는 그의 시를 통하여 보면
적어도 30년 이상 寒山에 머물렀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세상의 俗情을 모두 끊었겠지만 그에게는 친구를 찾았으나
거의 반이나 黃泉으로 떠나 버렸으니 세상의 무상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죽음 앞에서 점점 소멸해가는 목숨은 마치 남은 초가 타 들어가는 것과 같고
또 목숨이 지나가는 것은 마치 냇물이 흐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
홀로 외로운 그림자 마주 앉으니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린다고 술회 하고 있다.
이처럼 그도 세속을 뛰어 넘은 은자의 삶을 보여주면서도
때로는 따뜻한 인간의 정을 느끼게 하는 심성의 소유자이기도 한 것이다.
다시 寒山 자신의 시를 통하여 산속에서 고독한 삶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시를 살펴보자.
天台山의 자연환경은 더할 수 없이 수도하기에 좋은 환경이었으나
國淸寺와 주위의 인간적인 환경은 몰이해와 푸대접이었다고 보인다.
254
억득이십년憶得二十年 이십년 전 일을 생각하면서
서보국청귀徐步國淸歸 천천히 걸어 國淸寺로 돌아오네
국청사중인國淸寺中人 國淸寺에 있는 모든 사람들
진도한산치盡道寒山癡 寒山이 어리석다 서로 이르네.
치인하용의癡人何用疑 어리석은 사람 무슨 의심 있으랴
의불해심사疑不解尋思 의심을 가졌어도 생각 할 줄 모르네
아상자불식我尙自不識 나는 아직도 내 스스로 모르나니
시이쟁득지是伊爭得知 어떻게 이것을 알 수 있으랴
저두불용문底頭不用問 머리를 낮추어 물을 것 없고
문득부하위問得復何爲 물어 본대야 또 무엇 하리
유인래매아有人來罵我 어떤 사람이 있어 나를 꾸짖되
분명요요지分明了了知 분명히 환하게 알면서 그런다고
수연불응대雖然不應對 그러나 나는 대답하지 않나니
각시득편의却是得便宜 이것이 얼마나 내게 있어 편리한가.
이 시는 寒山의 세속적인 삶과 유리된 모습을 자신의 말을 통하여 엿볼 수 있는 시이다.
세속 사람들에게 모르는 척 해버리는 것이 얼마나 편리한가라고 말하는 것은
寒山이 세상과 단절 된 삶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어차피 이 세상에 살면서 저주받은 운명으로 살아가야 함은 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있다.
李白도 자신을 일러 적선謫仙이라고 하였으니 시인은 이 세상에서는
귀양살이 온 신선의 신세라고 스스로를 말하고 있다.
寒山도 이와 같이 시인의 비극적 운명성을 그 시 속에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天台山은 바로 寒山에게 있어 비극적 생을 숨길 수 있는 은둔의 適地였던 것이다.
한산이 이런 천태산에서 적어도 100세를 넘겨 오래 살았음을 알 수 있는 시를 보자.
275
석일경행처昔日經行處 여기는 옛날부터 경행하던 곳
금부칠십년今復七十年 내 여기 이제 또 칠십년이 지났거니
고인무래왕故人無來往 예날 그 사람들 이제 어디 갔는가
매재고총간埋在古塚間 자초 무덤 속에 쓸쓸히 누워 있네
여금두이백余今頭已白 나도 이제 늙어 머리는 흰데
유수편운산猶守片雲山 혼자 흰구름 산을 지키고 있다
위보후래자爲報後來子 내 알리나니 뒤에 오는 사람들아
하부독고언何不讀古言 왜 옛 어른의 말을 읽지 않는가.
위 시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한산은 天台山을 70년이 넘게 경행하였으니
30세를 전후하여 입산하였다고 하더라도 100세를 넘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머리는 희었는데 옛적에 살던 사람은 누가 남아 있는가?
오직 흰구름만이 산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또한 <祖堂集>에는 天台山에 얽힌 이야기가 있는데
黃蘗이 그와 함께 天台山으로 가던 벗의 신통 부리는 것을 보고 꾸짖는 이야기가 나온다.
선승들에게도 天台山은 중요한 순례의 도량이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高僧傳>권11에 스님들이 北魏의 폐불을 피하여
長安의 서남에 있는 寒山으로 도망친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두타습선의 전통이 뒤에 이 산을 중심으로 하는 達磨系의
선종의 융성을 초래하게 된 것으로도 생각될 수 있다고 보고 있기도 하다.
이같이 天台山은 오래전부터 佛敎의 성지로 이름 나 있었으며 특히 天台宗의 발상지인 점에서
佛敎의 매우 중요한 곳이고 寒山은 바로 이런 天台山을 자신의 은거지로 택하였던 것이다.
寒山의 신화는 바로 天台山과 더불어 함께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3. 佛敎思想的 背景
寒山의 佛敎思想적 배경은 어떠한가?
寒山詩가 보여주는 佛敎思想의 배경을 살펴보자.
寒山이 살았던 시대의 佛敎의 역사는 매우 중요한 전환기적 시기라고 할 수 있다.
印度佛敎가 중국에 처음 들어올 때는 교학이 먼저 들어왔다.
교학 중에서도 中觀과 唯識보다는 天台와 華嚴이 성하게 된다.
寒山詩 사상의 기본을 이루는 佛敎思想으로서 교학으로는
法華思想, 維摩經 思想, 般若經 思想이 크게 연관되어 있고
禪思想으로는 南宗禪 계통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들 수 있다.
이 장에서는 교학적인 면을 살펴보고 禪思想에 대하여는 다음 장에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寒山詩에 나타난 大乘經典의 경우는 <法華經>과 <維摩經>이 깊게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般若經>도 상당히 영향 받고 있음을 시에서 엿볼 수 있다.
寒山詩와 가장 관계가 깊은 사상은 法華思想이라고 할 수 있다.
寒山은 <法華經>에 많이 의거하고 있음을 그의 시를 통하여 알 수 있다.
<法華經>은 <華嚴經>과 더불어 대승경전 중에서 一乘圓敎로 존중받는 최고의 경전으로
諸法實相의 妙法을 나투며 會三乘歸一乘의 근본정신을 갖고 있는데 모두 28品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속에는 비유로 중생을 이끄는 가르침이 많이 있는데
옛 부터 일곱 가지 비유를 들어오고 있는데 원래는 아홉 가지 비유가 들어 있다.
경유구유經有九喩 경에 아홉 가지 비유가 있으니
謂火宅 窮子 藥草 化城 繫珠 鑿井 王髻 父少 醫師
화택 궁자 약초 화성 계주 착정 왕계 부소 의사이니
구유언칠유舊唯言七喩 전에는 오직 일곱가지 비유만 말하고
유각착정부소이유遺却鑿井父少二喩 착정과 부소의 두 가지 비유를 버렸다.
이 중에서 특히 유명한 것은 火宅의 비유, 窮子의 비유, 繫珠의 비유 등을 들 수 있다.
한산은 시에서 특히 火宅과 繫珠의 비유를 많이 들어 나타내고 있으니 火宅의 比喩란
<法華經> 3번째 품인 비유품에 나오는 것으로 중생이 살고 있는 3界가 다 불난 집이라는 것이다.
경에 나오는 비유의 이야기는 어느 날 장자의 집에 불이 났는데
집안에 있는 아이들이 불 난 줄도 모르고 놀이에 취해 있었다.
장자는 방편으로 아이들을 구해내기 위해 아이들이 좋아하는
양의 수레, 사슴의 수레, 소의 수레를 주겠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모두 불 난 집에서 나오자 장자는 아이들에게 크고 좋은 흰 소의 수레를 주었다.
중생들이 모두가 불난 집 속에서 五慾樂에 취하여 불타는 줄도 모르고 취하여 살고 있음을
불쌍히 여겨 불보살이 방편으로 중생들을 이끄는 것을 비유적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이 유명한 <法華經>에 나오는 火宅의 比喩이다.
다음 시를 보자.
185
최잔황초려摧殘荒草廬 어지러이 쓰러진 거치른 풀집
기중연화위其中烟火蔚 거기 불이 일어 연기 자욱하여라
차문군소아借問群小兒 소꿉장난 열심인 어린애들아
생래범기일生來凡幾日 너희들 언제부터 여기 살았나
문외유삼거門外有三車 문 밖에는 세 가지 수레가 있어
영지불긍출迎之不肯出 그들을 맞이해도 나오려 않는구나
포식복팽형飽食腹彭脝 배부름에 취해 다른 생각 또 없나니
개시치완물箇是癡頑物 저들 진실로 어리석은 사람이여.
불난 줄도 모르고 소꿉장난에 열심인 아이들이 가련하여 3가지 수레를 장만하여
아이들을 밖으로 이끌어내는 것이 바로 三乘의 사상이며
聲聞, 緣覺, 菩薩의 삼승은 마침내 一佛乘으로 회향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어리석은 중생들이 화택을 나오려 하지 않으니!
불보살은 이를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한산 역시 이를 가엽게 여기고 있다.
天台山은 天台智者 대사가 天台宗을 개창한 곳이고
國淸寺는 바로 天台宗의 총 본산이 되는 도량이다.
寒山의 <법화경>과의 인연은 이런 상황과 전혀 무관치는 않을 것이다.
<法華經>의 사상은 寒山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음을 시를 통하여 잘 알 수 있다.
다음 시 역시 <法華經>의 火宅의 比喩를 나타내고 있는 시이다.
251
세사요유유世事繞悠悠 세상 일 뒤얽혀 길고 길어라
탐생미긍휴貪生未肯休 생을 탐해 일찍이 그칠 줄 모르는구나
연진대지석硏盡大地石 이 땅의 돌을 갈아 다해도
하시득헐두何時得歇頭 진정 쉴 때는 얻을 수 없겠구나
사시주변역四時周變易 사시는 돌고 돌아 바뀌어 변하고
팔절급여류八絶急如流 팔절은 빨리 흘러 물과 같으니
위보화택주爲報火宅主 내 불난 집 주인에게 알리나니
로지기백우露地騎白牛 바깥에 나와 흰 소를 타라고.
화택의 비유는 중생이 輪廻의 고통을 받고 있는 사바세계에서
불보살이 얼마나 철저히 자비로서 구제하려는 그 사상을 잘 드러내고 있다.
흰 소는 一佛乘을 나타내고 있으며 불난 집 주인은
다름 아닌 바로 불보살이고 아이들은 우리들 중생을 말하는 것이다.
三乘은 방편이고 一佛乘만이 大乘實敎라고 하는데 여기서 三車說과 四車說의 양론이 있다.
이러한 화택의 비유와 3수레가 상징하는 삼승에 관한 시가 상당히 많이 시속에 나타나고 있다.
다음 시 또한 그러한 三乘을 의미하는 세 수레를 말하고 있다.
235
여권제치자余勸諸稚子 내 너희들에게 권하나니 어린애들이여
급난화택중急難火宅中 얼른 그 불 난 집을 빠져 나오라
삼거재문외三車在門外 세 수레 저 문 밖에 있어
재이면풍봉載爾免諷蓬 너희를 실어다 화를 면케 하리라
로지사위좌露地四衛坐 네거리에 나와 맨 땅에 앉았으면
당천만사공當天萬事空 머리 위에 하늘 있어 만사는 비어 있고
시방무상하十方無上下 시방의 위아래 모두 없거니
래거임서동來去任西東 오고 가기는 동서에 맡겨 두고
약득개중의若得箇中意 만일 그 가운데의 한 뜻을 알면
종횡처처통縱橫處處通 가로 세로 어디고 두루 통하리.
불난 집 밖으로 나오면 불의 화도 면하고 해탈을 얻을 수 있다는
화택의 비유는 중생들의 고통의 현실을 적절히 나타내고 있다.
한산시에 있어 <法華經>의 많은 비유 중에
한산이 제일 많이 드는 비유는 화택의 비유라 할 수 있다.
다음 시는 의리계주衣裏繫珠의 비유를 나타내고 있다.
이 비유는 법화경 제 8품의 五百弟子授記品에 나오는 비유이다.
어느 날 가난한 사람이 친구 집에 들렀다.
주인은 친구가 가난한 것을 불쌍히 여겨 옷 속에 보물을 달아 주었다.
그러나 이 가난한 사람은 그것도 모르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다시 친구 집 앞을 지나게 되었다.
주인은 아직까지 가난하게 살고 있는 친구를 보고 옷 속의 보물을 알려주었다.
드디어 가난한 사람은 보물을 얻어 잘 살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중생들도 누구나 불성의 보배를 갖고 있으나 스스로 알지 못하고
어리석음으로 살고 있음을 불보살은 연민히 여겨 가르침을 베풀고 계신 것이다.
229
여향유일택余鄕有一宅 우리 고을에 한 집이 있어
기택무정주其宅無正主 그 집에는 옳은 주인이 없다
지생일촌초地生一寸草 땅은 겨우 한 치의 풀을 내고
수수일적로水垂一滴露 물은 한 방울 이슬을 떨구며
화소육개적火燒六箇賊 불은 여섯 놈의 도적을 불사르고
풍취흑운우風吹黑雲雨 바람은 검은 비바람을 몰아오네
자세심본인子細尋本人 자세히 그 본 주인을 찾아보라
포리진주우布裏眞珠雨 베옷 속에 한 진주 있느니라.
친구가 달아준 보물을 알지 못하고 술에 취해 여기저기 헤매면서 가난하게 거지처럼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보물을 알려준 친구의 덕으로 다시 보물을 찾아내는 비유로
중생이 자성의 보배를 알지 못하고 살다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해 자성을 깨닫게 되는
이러한 비유는 중생의 자성불을 아주 적절하게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 시 역시 이러한 옷 속의 보물을 어서 찾으라고 가르치고 있다.
264
권이휴거래勸爾休去來 네게 권하나니 오감을 좀 쉬어라
막뇌타염노莫惱他閻老 저 염마 첨지에게 시달리지 말라
실각입삼도失脚入三途 한번 잘못 딛어 삼도에 들면
분골조천도粉骨遭千擣 한없는 매질에 온 뼈가 가루 되며
장위지옥인長爲地獄人 길이 저 지옥에 든 사람 되어
영격금생도永隔今生道 다시는 이생 길에 나오지 못하리니
면이신여언勉爾信余言 부디 힘쓰라 내 말을 믿어
식취의중보識取衣中寶 너 옷 속의 보물 알아 가져라.
진정한 깨달음은 밖에서 구하려 하지 말고 자신 안에서 찾으라는 가르침이
옷 속의 보물에 담겨 있은 뜻이라고 하겠다.
이런 의미는 한산시 293번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다음은 般若思想에 대하여 살펴보자.
寒山詩에는 般若思想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되는 시도 적잖이 있다.
특히 <金剛經』>을 강조하여 말하고 있다.
<金剛經>은 대승경전 중에서도 선종과 가장 깊은 인연을 갖고 있다.
이러한 인연은 6祖 慧能대에서부터라고 볼 수 있다.
달마로부터 전해진 것은 <金剛經>보다도 <능가경>이었던 것이지만
慧能은 弘忍으로부터 <능가경>이 아닌 <金剛經>을 전수 받았던 것이다.
지금 전해지는 <金剛經五家解> 속에는
六祖의 口訣이 들어 있음은 이를 잘 반영하는 것이라 보인다.
<金剛經>과 <능가경>은 사상적 기반을 달리 하고 있다.
<능가경>은 唯識계통의 사상을 근본하고 있으며
<金剛經>은 中觀사상을 근본으로 하고 있는 점에서 서로 다르다.
그런데 寒山은 당시 선종의 분위기를 영향 받았음인지
<金剛經>과 인연을 갖고 있는 시를 남기고 있다.
다음은 寒山詩와 <金剛經>과의 관련을 엿볼 수 있는 시이다.
135
인이신위본人以身爲本 사람은 몸으로 근본을 삼고
본이심위병本以心爲柄 그 근본은 마음을 자루로 한다.
본재심막사本在心莫邪 마음이 삿되지 않아 근본이 있나니
심사상본명心邪喪本命 마음이 삿되면 본 목숨을 잃는다.
미능면차앙未能免此殃 진실로 이 재앙을 면하지 못하고서
하언라조경何言懶照鏡 어떻게 공부하기 게을리 하랴
불념금강경不念金剛經 만일 <金剛經>을 생각하지 않으면
각령보살병却令菩薩病 도리어 보살로 병 앓게 하리.
금강경의 사상은 空思想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의 四相을 벗어나는 것이 보살의 길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보살은 모살의 이름이 아니고 그 이름일 뿐이라고 한다.
한산은 이러한 중생의 집착의 병을 치유하기 위하여 금강경의 공의 가르침을 말하고 있다.
한산의 시에서 금강경과 인연은 선종이 중국 불교의 역사의 전면에 부상하는
시기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고 보여 진다.
<金剛經>과 선종과의 관계는 계속 이어져 그 후 <金剛經>이 所依經典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는 사상적인 큰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寒山詩는 <維摩經>과의 관계 또한 매우 깊게 맺고 있다.
<維摩經>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유마힐 거사와 부처님의 제자와
여려 보살들과의 문답으로부터 시작 되며 大乘佛敎의 중요한 사상이 되는 것이다.
<維摩經>의 근본사상은 不二法이라고 할 수 있다.
不二의 사상은 산스트리트로 a-dvaya 라고 하며 통일성이나 궁극적 진리를 뜻한다.
그래서 절대 평등을 의미하기도 하며 완전한 깨달음으로서
절대 무차별의 佛敎의 가장 높은 사상이기도 하다.
이는 또한 中道의 정신과 다른 것이 아니다.
불이법문으로 알려진 이 정신은 유마거사와 여러 불제자와 보살들 간의 대화로 이어지고
마침내 文殊에 의해 불이법은 말로 설해질 수 없다고 선언되며 유마에 이르러 침묵으로 나타내지고
참으로 유마의 침묵이야말로 불이법을 가장 잘 나타내었다고 칭송을 받는다.
그래서 유마의 침묵은 우뢰와 같다는 말이 나왔다.
한산시 속에 不二사상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보자.
191
불견조수로不見朝垂露 아침 풀잎에 이슬을 못 보느냐
일삭자소제日爍自消除 해 뜨면 곧 모두 사라지는 걸
인신역여차人身亦如此 사람의 몸도 이와 같아서
염부시기거閻浮是寄居 염부는 여기 붙어 있는 곳이니라
절막인순과切莫因循過 부디 한평생 어름어름하지 말고
차령삼독거且令三毒袪 삼독을 모두 끊어 없애면
보리즉번뇌菩提卽煩惱 보리는 곧 번뇌, 번뇌는 곧 보리
진령무유여盡令無有餘 그 번뇌 다시 남아 있게 하지 말라.
위 시에 나타나듯이 菩提는 곧 煩惱라고 하는 것이다.
보리가 번뇌이기에 번뇌가 보리로 될 수 있는 것이며 보리와 번뇌는 둘이 아닌 것이다.
이처럼 <維摩經>의 不二 思想이 寒山詩의 내면에 깊게 깔려 있어서
시로 용해되어 잘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위 시에서 보살이 중생을 위하여 병을 앓는 것도 바로 유마경 사상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寒山의 사상적 편력과정을 보면 처음 儒敎에서 출발하여 과거에 응하기도 하였으며
이에 실패하고 유랑의 시기에는 黃老之敎에 심취하게 된다.
天台山에 처음 입산할 때만 하여도 寒山은 상당히 道敎에 빠져 있었다고 보인다.
그러나 寒山은 점차 도교의 한계와 그 헛됨을 알고 佛敎와 禪에 입문하게 되었다고 보인다.
그런데 李善熙는 그의 박사학위 논문인 <寒山其人及其詩硏究>에서 寒山의 사상편력을
처음 유교에서 출발하여 도교로 갔다가 佛敎로 갔다가 다시 도교로 돌아간 것으로 보고 있으나
이는 매우 피상적이고 아무 근거를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라고 본다.
寒山이 만년에 佛敎의 선을 버리고 도교의 신선으로 돌아갔다는 자료나 시는 찾아 볼 수 없다.
이상과 같이 寒山의 佛敎思想적 배경을 살펴보았다.
여기서 우리는 寒山이 法華思想과 般若思想에 매우 깊이 영향을 받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4. 隱逸思想
寒山이 天台山에 隱遁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여기에는 중국의 隱逸思想적 전통에 뿌리가 깊이 닿아 있다.
물론 寒山이 은둔하게 된 배경에는 佛敎와 관련되어 있음은 사실이다.
佛敎의 출가정신은 인간정신의 절대적 자유를 추구하려는 의지의 발로이고
입산하여 수도하는 것도 세속적인 속박을 벗어나려는 발심인 것이다.
이러한 출가의 전통은 인도에서는 매우 보편화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누구나 다 입산수도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중국에서 은둔은 매우 높은 덕목이며 역사상 오래 된 隱者의 전통을 갖고 있다.
대체로 隱士란 出仕하고 있던 자가 은둔할 때를 일컫던 명칭으로서
대개 그 사람은 지식계급이었다.
지금까지 是로서 생각해 오던 仕의 장소를 불만스럽게 바라보고
이를 피하여 隱의 장소로 옮겨가는 것이 은둔이다.
이 경우 그 은둔 장소를 좋은 곳으로 생각하고
은둔을 바람직한 생활로 생각하고 시인하는 기풍이 마침내 일어나게 되었다.
<論語>의
은거이구기지隱居以求其志 은거함으로서 그 뜻을 구하고
행의이달기도行義以達其道 의를 행함으로서 그 도를 이룬다.
라던가 <孟子>의
궁즉독선기신窮則獨善其身 궁하면 홀로 그 몸을 선하게 다스리고,
달즉겸선천하達則兼善天下 달하면 겸하여 천하를 선하게 다스린다.
라는 말도 모두 은일사상을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老莊에서 훨씬 깊게 나타나고 있으니 <莊子>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는 반드시 천하를 순박한 하나로
돌이키게 하면서도 조금도 인위의 흔적이 없게 한다.
만약 시운과 부합하지 않아 천하에서 궁핍하게 된다면
성명의 근본을 깊이하고 지극한 도에 편안히 거하며
차라리 시운과 부합되어지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이것이 옛 은사가 행하던 存身之道이다.
고지소위은사자古之所謂隱士子 옛날에 이른 바 은사는
비복기신이불견야非伏其身而弗遣也 그 몸을 숨기어 드러나지 않게 하는 자가 아니고
비폐기언이불출야非閉其言以不出也 입을 닫고 말하지 않는 자가 아니며
비장기지이불발야非藏其知而不發也 그 지식을 숨기어 나타나지 않게 하는 자가 아니니
시명대류야時命大謬也 단지 시운과 부합하지 못한 자일뿐이다.
당시명이대행호천하當時命而大行乎天下 시운을 만나 천하에 이름을 크게 떨칠 때에는
즉반일무적則反一無跡 사람들을 하나로 뭉쳐 돌아가게 하되 자취를 남김이 없어야 하고
부당시명이대궁호천하不當時命而大窮乎天下
때를 만나지 못하고 운이 트이지 않아서 세상에서 크게 궁한 처지가 되면
즉심근녕극이대則深根寧極而待
자기 본성을 깊숙이 간직하고 자신의 운명을 편안히 받아들이면서 기다리시오.
차존신지도야此存身之道也 이렇게 하는 것이 자기 몸을 보존하는 바른 도입니다.
이와 같이 存身之道가 점차 隱遁思想과 결합하여 점차로 은둔이 정당화되기에 이른다.
세상이 어지러울 때는 더욱 은둔은 지식인들의 덕목으로 존중되게 된다.
특히 魏晋南北朝 시대는 政治와 사회가 매우 혼란스러워 지식인들이
몸을 보존하기 위하여 현실을 피하여 산림에 숨어들기를 좋아하였다.
그 결과 은둔의 文學이 성행하게 되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산림으로 은둔을 하였으니 이러한 때 晋의 장화張華는
<예문류취藝文類聚>에서 초은시招隱詩를 지어서 은둔을 찬양하고 있다.
은사는 육신을 산림에 기탁하고
세속을 피하여 참된 도리를 지킨다.
連惠를 참으로 아직 만나지 못하였으니
뛰어난 재주를 굽히고 펼치지 않는다.
라고 말하고 있어 은둔의 장소를 산림으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회적 혼란, 사람과의 경쟁, 사회와의 갈등, 권력투쟁에서 피하려는 욕구,
이런 혼란에서 은일적 행활 태도와 개인주의적 극단성을 낳고 있는 것이다.
은일생활의 근저에는 개인주의적 정신이 깊이 흐르고 있다.
사회 전체가 은일을 숭상하면 은사가 사회의 존경을 받는다.
屈原은 <離搔>에서 다음과 같은 귀절로 사회에서
지식인의 삶을 어떻게 갖아야 하는지를 간명하게 읊고 있다.
창랑지수청혜滄浪之水淸兮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가이탁아영可而濯我纓 갓끈을 씻고
창랑지수탁혜滄浪之水濁兮 창랑의 물이 탁하면
가이탁아족可而濯我足 발을 씻는다.
이러한 싯귀 속에 들어 있는 것도 지식인이 삶의 길을 택함에 나아가고
들어가는 경우를 절도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사회적 구속을 벗어나 자연인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강한 욕구를 드러내고 있다.
자연의 생활에 편안히 안주하여 한가롭게 시를 짓고 읽는 것은 은일사상과 통한다.
중국의 도교의 자연주의적 사상 속에는 은둔의 정신이 흐르고 있다.
여기에 佛敎정신과 결합하여 독특한 은일사상이 형성되고 있다.
그러나 佛敎에서는 좀 더 적극적인 모습을 말하고 있으니
보살사상은 세속을 초월하면서 동시에 세속을 아우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보살은 중생과 더불어 사바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이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어나는 것과 같음을 비유적으로 말하고 있다.
이는 바로 불보살의 보살행은 사바의 중생과 더불어 同事攝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寒山이 天台山에 은둔한 사상적 배경에는 이와 같이 은일 사상적 바탕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寒山詩에 있어서 寒山은 이미 한 개인을 지칭하기보다도
은자를 가리키는 보통명사화 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런 은일사상의 시적 흐름 또한 중국의 큰 흐름으로 꾸준히 이어지고 있어
隱遁文學을 형성하고 있으니 陶淵明, 王維 등도 그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그러면 寒山詩속에 어떻게 은일사상이 나타나고 있는지 살펴보자.
처음에 세속에서 寒山은 포부를 갖고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남북을 많이 돌아다니다 天台山에 들어가 은거하게 된다.
은거 시기는 30세 전후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다음 시는 이를 말해주고 있다.
281
출생삼십년出生三十年 내 이 세상에 난 지 삼십년 동안에
상유천만리常遊千萬里 헤매어 돌기 천만리로 놀았다
행강청초합行江靑草合 강으로 나갔더니 푸른 풀 우거지고
입색홍진기入塞紅塵起 국경에 이르매 붉은 티끌 아득했다
연약공구선練藥空求仙 헛되이 약 만들어 신선도 구해보고
독서겸영사讀書兼詠史 부질없이 시도 짓고 책도 읽었다
금일귀한산今日歸寒山 이제 비로소 좋이 寒山으로 돌아와
침류겸세이枕流兼洗耳 개울을 베고 누워 귀를 씻노라.
寒山은 30세를 전후하여 상당한 고민과 갈등으로 방황하고 여행을 하다가
드디어 天台山에 입산하여 은거를 결심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그는 시를 통하여 밝히고 있다.
다음 시 역시 은자로서의 寒山의 모습을 잘 알 수 있는 시이다.
3.
가소한산로可笑寒山路 우스워라, 내 가는 寒山 길이여
이무거마사而無車馬蹝 거마의 자국이야 있을 턱 없네
연계난기곡聯溪難記曲 시내는 돌고 돌아 몇 굽이던고
첩장부지중疊嶂不知重 산은 첩첩 싸여 몇 겹인 줄 몰라라
읍로천반초泣露千般草 풀잎 잎잎마다 이슬에 눈물짓고
음풍일양송吟風一樣松 소나무 가지마다 바람에 읊조린다.
차시미경처此時迷徑處 내 여기 이르러 길 잃고 헤매나니
형문영하종形問影何從 그림자 돌아보며 <어디로?> 물어보네.
天台山의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寒山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는 시이다.
한없이 깊은 산속에 거마의 자취야 있을 턱이 물론 없고
너무 깊은 산속에서 때로는 길을 잃기도 하는 것이다.
다음 시 역시 한산의 은자로서의 모습을 잘 엿볼 수 있는 시이다.
209
목견천태정目見天台頂 天台山 꼭대기 우러러보면
고고출중군孤高出衆群 외로이 높아 뭇 봉우리 빼어났네
풍요송죽운風搖松竹韻 바람이 오면 솔 대나무 맑은 소리
월현해조빈月現海潮頻 달이 나오면 바다 조수 잦아지네
하망산청제下望山靑際 산기슭 푸른 밑을 내려다보면
담현유백운談玄有白雲 깊은 도리 얘기하랴 흰구름 있네
야정편산수野情便山水 들 정이 산수를 우선 좋아하지만
본지모도륜本志慕道倫 본 뜻은 도의 벗을 사모하나니.
이 시 또한 은일 사상을 담고 있는 시이다.
마지막 귀절이 뜻하는 바는 산수를 좋아하나 본 뜻은 도를 사모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의 자연과 도의 정신적 태도를 말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무상한 세상에서 벗어나 어서 산으로 오라고 사람들에게 말하는
한산은 매우 따뜻한 모습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231
하이장추창何以長惆悵 무엇 때문에 늘 시름에 잠겼는가?
인생사조균人生似朝菌 사람의 삶이란 아침버섯 같은 것을
나감수십년那堪數十年 기껏 견디어 몇십년 지내는고?
신구조락진新舊凋落盡 새 것, 묵은 것 서로 갈아 다하는 걸
이차사자애以此思自哀 이것 생각해 어이 아니 슬플 것인가
애정불가인哀情不可忍 그 슬픈 정 차마 참지 못하겠네
내하당내하奈何當奈何 아아 ! 어찌할거나? 진정 어찌할거나?
탈체귀산은脫體歸山隱 모든 것 떨치고 산으로 들어오라.
이 시 또한 세속의 잡다한 슬픔을 떨치고 산으로 들어오라고 권유하고 있다.
은일사상을 역시 잘 나타내주고 있다.
위 시들은 바로 寒山이 은거하며 지내는 심경을 읊고 있는 것이다.
<寒山詩集>에 나타난 것은 寒山이 인간적인 고뇌를 고백하고 있기도 하며
때로는 산중 생활의 즐거움을 읊기도 하는 것이다.
어떤 때는 은자로서의 회의를 보이고
때로는 은자로서의 자신을 과시하고 세속의 속물근성을 조롱하고 꾸짖기도 한다.
출가 수도자에 있어서 중국적 상황은 인도와 많이 다르다.
인도는 출가 중심의 가치가 더욱 철저한 반면
중국은 세간의 국가 권력이 출가의 가치보다 우선하는 것이다.
이 점은 아마도 유교적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佛敎는 세상의 윤회를 벗어나 生死解脫하는 진리의 가르침이다.
인도에서는 출가자는 제왕에게도 스승으로 예를 받았으나 중국에서는 왕권에 예속 되었다.
항현恒玄의 출가자도 왕에 대하여 예를 올려야 한다는 주장에 대하여
廬山의 慧遠은 沙門不敬王者論을 지어 반박하였다.
가사는 세속을 벗어난 것이기에 출가자의 가치는 세속의 가치보다 우선 한다는 입장이나
뒤에 왕권의 권위와 마찰이 심각하여져서 마침내 법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은일 사상은 더 넓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래서 은사 혹은 은자라고 하면 세상을 피하여 관직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길 수 있지만 이와 달리 이상을 품고 있으면서
은둔하여 나타나지 않는 사람도 은자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이다.
중국은 은사의 전통이 매우 강한 나라이다.
멀리 伯夷 叔齊에서부터 그러한 맥은 이어져 오고 있다.
莊子는 시명이 불우하기 때문에 그 몸은 그대로 세상에 있어 언동하면서도
세상으로부터 알려지지 않은 채 은둔하며 지내는 사람들도 은사라고 부르고 있다.
또 장자는 도가 행하여지지 않는 시세에 있어서의 성인에 대하여
비록 성인은 산림 가운데서 몸은 숨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덕이 숨으며 그 덕이 숨기 때문에
몸은 숨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어 이와 같은 성인을 은사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한산의 다음 시는 숨어 사는 선비의 모습을 잘 노래하고 있다.
248
은사둔인간隱士遁人間 숨어 사는 선비들 인간을 떠나
다향산중면多向山中眠 많이들 산중에 들어가 자네
청라소록록靑蘿疎麓麓 푸른 칡넝쿨은 덤성덤성 얽히었고
벽간향연연碧澗響聯聯 맑은 개울물은 졸졸졸 흐르나니
등등차안락騰騰且安樂 기운은 맑아 편안하고 즐겁고
유유자청한悠悠自淸閑 마음은 길이 깨끗하고 한가롭네
면유염세사免有染世事 세상일에 물들기 멀리 떠나서
심정여백련心靜如白蓮 마음은 고요해 흰 연꽃 같네.
위 시 또한 숨어 사는 寒山의 심경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은자의 모습을 흰 연꽃에 비유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전통은 謝靈運과 陶淵明등으로 이어져 隱遁文學의 흐름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며
寒山 또한 이러한 전통위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寒山의 은일사상은 멀리 인도의 사문들의 출가정신과 함께
중국의 은둔사상과 맥을 함께 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상에서 우리는 寒山詩의 형성배경에 대하여 살펴본 결과 그의 인간관계와
풍간과 습득과의 관계를 통하여 그의 시 세계을 이해하게 되었고
또 한산의 신화가 어떤 역사적 과정을 거쳤는지도 살펴보았다.
아울러 천태산의 자연과 환경을 둘러보고 한산과의 인연을 알아보았다.
물론 당시의 佛敎思想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었는지도 살펴볼 수 있었다.
그가 천태산에 은둔하게 된 사상적 바탕에는 은일사상의 뿌리가 깔려 있음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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