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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詩/寒山詩

寒山의 詩世界 硏究 Ⅳ. 寒山詩의 分類

寒山의 詩世界 硏究-禪文學的 입장에서

李日宰(慈明) 東國大學校 大學院 1993 寒山詩 博士學位論文

Ⅳ. 寒山詩의 分類

禪詩를 어떻게 분류하는가의 문제는 禪文學 硏究 방법론상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학문의 분류에 있어서도 그 분류방식에 따라 성격이 달라지기 마련이다.

 

예컨대 문헌을 분류하는 방식이나 혹은 전공영역을 나누는 방법에 따라

그 학문의 성격이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다음은 구체적으로 禪文學 중에서 가장 대중화 되어 있는 禪詩의 분류를 살펴보고

寒山의 禪詩를 분류하고 또 그의 비판시에 대하여도 살펴보자.

 

1. 禪詩의 分類方法

 

이제까지 禪詩의 분류법에 제일 먼저 보편적으로

소개된 것 중에 하나는 두송백杜松柏의 이론이다.

 

禪文學에 대한 硏究는 일본보다도 중국에서 먼저 앞서가고 있다고 보여 진다.

硏究의 입장도 일본과 중국의 입장과 태도가 약간의 차이를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중국의 杜松柏의 <禪學與唐宋詩學>의 방식을 따르는 경우가 많다.

이종찬 교수와 인권환 교수의 경우도 많이 참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杜松柏과 이종찬교수의 분류방식을 비교하여 살펴보고

선가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가능한지를 알아보자.

 

1) 一般文學의 分類方式

中國의 杜松柏과 韓國의 이종찬이 분류방식에서 드러내주는 차이는 무엇인지를 알아보자.

杜松柏의 경우는 선가의 입장과 시가의 입장에서 禪詩를 분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선과 시가 융합되는 과정을 설명하면서 당송의 시대에 선학이 크게 일어나고

처음 당의 초기 東山法門이 시작되면서 시와 결합을 하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으며

禪家의 입장에서 다음과 같이 禪詩를 분류하고 있다.

 

1. 示法詩

2. 開悟詩

3. 頌古詩

4. 禪機詩

 

위와 같이 선가의 입장에서 禪詩를 분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다음은 시의 입장에서 禪詩를 분류하는 것이다.

 

1. 禪理詩

2. 禪典詩

3. 禪迹詩

4. 禪趣詩

 

이처럼 시적 입장에서 나누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다음은 이종찬의 禪詩 분류를 살펴보자.

 

그의 禪詩에 대한 硏究는 禪文學 硏究분야에 새롭게 방향을

모색하는 단계에서 괄목할만한 평가를 받을 만하다.

그가 禪詩를 나누는 유형을 살펴보자.

 

그는 어디까지나 文學的 입장에서 禪詩를 보고 있음을 먼저 밝히고 있다.

禪詩를 유형별로 나눔에 있어 작자의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고 전제하여 말하고 있다.

 

禪詩 자체가 선가에서 오묘한 선지를 표현하기 위하여 방편상 빌러 온 것이 시의 형태였다면

형식은 시에서 빌러 오고 그 내용에 선지를 담았다는 것이 된다.

 

이때는 작자가 모두 선가일 수밖에 없다라고 작자의 문제를 나누어서

선가의 입장과 일반 文學的 입장으로 분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면서 홍기삼과는 다르게 동기나 방편이야 어떤 경로에서 이루어졌던 간에

이러한 禪詩가 있음으로 해서 시의 내용이 풍부해지고 이는 시로서의 가치나

혹은 종교적 의미 이상으로 인정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그는 먼저 선가의 입장에서 禪詩를 분류하고 있으니

1. 示法詩

2. 悟道詩

3. 拈頌詩

4. 禪機詩

위와 같이 나누고 있다.

 

한편 文學의 입장에서 선적 사유의 깊이를 시로 끌어다

그 깊이를 심화시키는 입장도 있는 것이다.

 

선가에서 진리를 담아내기 위하여 그릇으로 빌려온 것이 시라면

시 속에 선지가 담겨 있는 것이고 이것이 禪詩가 되는 것이다.

 

시인의 입장에서는 선가의 사유방법을 빌려오는 방법이 있으니

이는 선적 함축을 지닌 시가 될 것이다.

이 같은 시를 다음과 같이 나누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 禪理詩

2. 禪事詩

3. 禪趣詩

 

그는 결론적으로 시는 시로서 존재하여야 한다며 시에서 선을 원용해 오든,

선에서 시를 빌러 오든 둘 사이에 흔적이 없는 융섭이 가장 바람직한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禪趣詩가 적절하다고 보고 있다.

 

위와 같이 이종찬의 분류법과 杜松柏의 분류법은 얼마간의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인권환은 고려시대 佛敎詩의 硏究에서 禪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선과 시의 상즉성과 禪詩의 발생의 계기를 다음과 같이 네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선과 시의 본질적인 정신적 상통성

둘째, 선가에서의 시의 산출되는 경우

셋째, 話頭와 禪詩와의 관계

넷째, 禪詩의 기원

 

이와 같이 나누어 설명하면서 둘째 번의 선가에서의 시가 창작 되는 경우를 설명하고

그에 따른 여러 가지 禪詩에 대하여 들고 있다.

 

먼저 선승들이 오도적 체험이나 증도의 과정,

그리고 법열적 경지나 行住坐臥나 선적인 생활을 시로서 표현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선승은 오랜 동안의 수행을 통하여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면 悟道詩 또는 開悟詩를 읊는다.

證道의 희열을 證道歌로 나타내며 심산고찰 속의 산중생활을 선취가 가득 담긴 山居詩로 표현한다

 

선의 오묘한 철리를 禪理詩로 말하며 마지막 세상을 떠나면서는 臨終偈나 涅槃詩를 남긴다.

이처럼 선승은 출가에서부터 수도 개오 전법 열반의 전 생애를 온통 시적인 과정 속에 보낸다.

 

역대의 佛敎人들 가운데 선가에서 시인이 많이 배출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또 이와 같은 개인적 생애 외에도 선승은 사찰에 있어서의 대소 의식이나

사자간 선법전수의 방편으로 禪詩를 사용한다.

 

上堂이나 示衆 示人을 통하여 示法詩를 남기며 학인들과의 대화에서도 詩偈가 사용된다.

결국 선가의 언어는 거의 시적인 것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와 같은 점에서 선승과 시창작과의 밀접한 관련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2)禪家의 立場

선가의 입장에서 禪詩의 분류는 좀 다르게 이루어져야 할 점이 많이 있다.

선학의 입장에서 볼 때는 오히려 시가 이루어지는 순간이 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禪詩가 하는 기능과 역할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분류되어 이름 불려 지게 된다.

 

禪詩에 있어서도 깨달음의 세계를 읊은 悟道詩, 법을 전하는 傳法偈, 임종에 다다라 읊는 臨終偈,

수도의 과정을 그리는 修道詩, 산중 암자에서의 생활을 읊은 艸庵歌,

도 닦는 기쁨을 읊은 樂道歌등 내용에 따라 여러 형식으로 나뉘어 불려 질 수 있는 것이다.

 

또는 선 문헌에 입각하여 보면

語錄, 着語, 別語, 代語, 評唱, 偈頌, 歌語, 艸庵家 등으로 나누어 볼 수도 있다.

 

이러한 禪詩의 분류방식에 있어 선의 입장에서 示法詩, 悟道詩. 拈頌詩, 禪機詩,

시의 입장에서 禪理詩, 禪事詩, 禪趣詩로 나누는 경우도 있다.

이같이 禪詩의 분류 방법은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禪詩의 분류에 있어 그 기준을 어떻게 잡느냐는 그 성격을 규정짓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이에 매우 엄격한 태도를 보이는 입장 중의 하나가 이원섭의 경우라 할 것이다.

 

그는 禪詩의 요건으로 선적인 수행과 깨달음의 의미가 담겨있어야 함을 강조하여 말하고 있다.

선사의 시라고 다 禪詩로 볼 수 없다는 견해다.

 

그의 입장은 매우 단호하다.

禪詩의 조건을 엄격히 함으로서 잘못된 길을 막으려는 그의 태도는 높이 평가할만하다고 하겠다.

 

2. 寒山의 禪詩 類型

 

한산시를 분류함에 있어서 <한산자시집>의 체제를 잠시 살펴보면

우선 형태상으로 볼 때 5언율이 가장 많이 있으며 이는 대부분 시집의 앞에 실려 있고

다음은 7언율을 싣고 있으며 끝에 3언시를 싣고 있다.

 

내용적으로는 앞부분은 주로 사회적이며 세속적인 정서를 나타낸 시를 싣고 있고

뒤에는 불교사상과 자연 속에서 선 수행을 읊은 시를 싣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상당히 시집의 체제를 치밀하게 짜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판본에 따라 많은 출입과 차이를 나타내고 있기도 하다.

 

寒山詩는 판본에 따라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三聖二和尙集>은 寒山詩가 307수 拾得시가 49수 豊干시가 2수 실려 있다.

<天台山 國淸寺三隱集>은 寒山詩가 309수 拾得시가 49수 豊干시가 2수 실려 있다.

<全唐詩>의 <寒山詩集>에는 寒山詩가 310수, 拾得詩가 54수, 豊干詩가 2수 들어 있다.

<汲古閣本(宗板)>의 寒山詩에는 寒山詩 311수, 拾得詩 54수, 豊干詩 2수가 들어 있다.

 

가장 많은 시를 수록하고 있는 寒山詩集은 김달진 역의 <寒山詩>이다. 모두 314수가 들어 있다.

奉恩寺本에는 한산시가 310수 들어 있다.

 

김달진 역본은 봉은사본을 저본으로 삼아 번역한 것으로 보이는데

김달진 역본과 봉은사본과는 약간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김달진 역본에 들어 있으나 봉은사본에는 없는 시가 4수 있는데

김달진 역본의 번호로 100, 312, 313, 314번이 차이가 난다.

 

이 중에 313과 314는 四部叢刊集部 판본에는 拾遺二首로 싣고 있고 대부분 다른 판본도

한산시로 싣고 있는데 봉은사본에서는 拾得詩 끝에 들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봉은사본에서는 366번 自從此到天台寺 이하를 모두 한산시와 대동소이하며

語意가 서로 相涉되었다고 밝히고 있다.(此下與寒山詩大同小異語意相涉)

 

그런데 김달진 역본에만 있는 312는

어느 판본에서도 보이지 않는데 어디에서 가져 왔는지 알 수 없다.

 

그의 시는 대부분 5言詩로 되어 있다.

간혹 7言詩와 3자시가 있기도 하다.

 

시 형식도 주로 古體詩에 가깝고 近體詩와 律詩와 絶句는 얼마간 있다.

그의 문체를 볼 때 그는 상당히 자유주의자였다고 생각 된다.

 

과거의 전통적인 면에서 매우 다른 시도를 보여주는 것이

3言詩를 쓰고 있는 것을 보면 그의 비전통적 태도를 짐작할 수 있다.

이는 한산 이전에는 거의 볼 수 없는 새로운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特記할 것은 한산의 楚辭에 관해서다.

봉은사본에는 天台山國淸禪寺三隱集記라고 하여 志南의 記가 있는데

이 記 끝에 한산이 썼다고 밝힌 楚辭가 한 수 들어 있다.

 

유인혜산영有人兮山楹 산속 굴에서 사는 사람 있네/有人兮山楹(作陘)

운권혜하영雲卷兮霞纓 구름 걷히자 노을이 걸리네.

병방혜욕기秉芳兮欲寄 향기 좋은 꽃 꺾어서 보내고자 하건만

노만혜난정路漫兮難征 그 길이 너무 멀어 가기 어렵네路漫漫兮難征

 

심추창호의心惆悵狐疑 실의와 의심으로 망설이다 보니/心惆悵兮狐疑

연로이무성年老已無成 나이만 들고 이룬 것은 없네.

중악이사건衆喔咿斯蹇 모두 들 나를 보고 어리석다 하겠지만/泉喔咿斯/本無此九字)

독립혜충정獨立兮忠貞 내 뜻은 변함없고 나는 홀로 꿋꿋하네/蹇獨立兮忠貞

 

楚辭란 楚나라 민간에서 여러 신들을 제사지낼 때

부르던 노래를 屈原이 듣고 개작한 것이라고 한다.

이를 볼 때 한산의 시가 매우 다양한 시 형식을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寒山詩는 중국 詩文學史의 흐름에서 볼 때 완전히 독자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中國文學의 흐름은 杜甫類의 유교적 사상과 陶淵明류의 도가적 사상의 두 흐름이 있는데

寒山은 완전히 독자적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寒山이 진실로 추구하는 바는 진여의 자성에 이르는 것이지

결코 시적인 세계에서 끝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다음과 같은 싯귀에서 이러한 정신을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산지재도寒山志在道 부재시不在詩

군능회아시君能會我詩

진시여래모眞是如來母 그는 곧 여래의 어머니니라.

 

다음 시를 보면 寒山子 스스로 6백여수의 시라고 자신의 시를 통하여 밝히고 있다.

이를 보면 후대에 많이 유실되었음을 알 수 있다.

 

285

오언오백편五言五百篇 닷자배기 오백 편

칠자칠십구七字七十九 일곱자배기 칠십 구

삼자이십일三字二十一 석자배기 이십 일

도래육백수都來六百首 모두 합쳐 육백 수

 

일예서암석一例書巖石 전부 보기로 바위에 쓰면서

자과운호수自誇云好手 스스로 좋은 솜씨 자랑할거나

약능회아시若能會我詩 만일 누가 있어 내 시를 알면

진시여래모眞是如來母 그는 곧 여래의 어머니니라.

 

寒山 자신의 말을 빌리면 자신의 시는 모두 6백여수이다.

그러나 현재 전하는 시는 3백여수 남짓이다.

 

寒山詩 중에 지금 전하지 않는 시가 있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것이 風穴延昭의 인용시이다.

현재 風穴선사가 인용하였던 시는 어느 판본에도 들어 있지 않은 것으로

아마 지금 전해지는 판본 외에 다른 판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寒山子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600여수에 이르는 시가 지금 300여수 남짓 전하는 것은

수집과정에서 누락되었는지 아니면 판본이 후대에 전해지지 않는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寒山詩에서 7言律詩가 5言絶句에 비해 매우 적은데

이는 아마도 寒山 당시에 7언율시의 형식이 갖춰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고 있기도 하나

그러나 楚石선사는 그 후 수백년 뒤인데도 역시 7언 율시가 거의 없음을 볼 때

이는 哲理詩가 7言律詩로는 적합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 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寒山과 楚石을 비교하는 것은 별로 좋은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초석은 寒山의 시를 그대로 모방하여 시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5언시가 가장 많은 것은 寒山詩의 특징으로 꼽을 만하다.

현존 시집은 閭丘胤과 서령부徐靈府가 편집한 것으로

위의 사실은 寒山詩가 이 외에 더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寒山詩에 있어서 가장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은

자연과 어우러진 선사상을 나타내고 있는 禪詩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한산은 그만이 보여줄 수 있는 광채를 발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은 구체적으로 寒山詩의 내용상 어떻게 분류할 것인가의 문제로 들어가 보자.

기왕의 시도로는 선학대사전에서 문헌분류의 일부로서 禪文學을 분류하고 있으나

매우 협소한 의미로 다루고 있어 포괄성을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다.

 

 

寒山詩의 분류를 나누기 전에 전체적인 寒山詩를 조망하면

크게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는 것이다.

 

첫째는 警世的인 시이고

둘째는 자기 自由의 경지를 읊은 시이다.

 

경세적인 것 안에는 무상관을 읊기도 하고 인간의 죄악을 읊기도 한다.

또한 사회와 승가에 대한 비판적인 시도 다수 있다.

한편 교훈적인 시도 상당수 보여 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절대 자유의 경지를 읊은 시에서 그는 선과 자연의 세계를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寒山詩에서 가장 탁월한 성공을 거두는 것은

禪思想을 바탕으로 쓰여진 자연과 어우러진 禪詩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선시를 오도시, 시법시, 임종시, 산거시로 나누어 살펴보자.

물론 이러한 나눔에는 무리한 점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선시에서 위에 든 이름의 시들은 매우 중요한 것이라 하겠다.

 

1) 悟道詩

깨달음은 佛敎에서 가장 중요한 생명이라 할 수 있다.

깨달음이 전제 되지 않는 佛敎는 佛敎의 본질을 상실한 것이다.

이 점에서 깨달음의 문제는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러기에 깨달음이 순간에 오느냐 천천히 오느냐의 문제와

깨달은 후에 닦음이 필요한가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여기에서 깨달음이 頓悟頓修라고 하는 주장이 있기도 하고

또 頓悟漸修로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입장이 나오기도 한다.

 

과연 어느 쪽이 더 중생의 근기를 알맞게 이끌어

깨달음에 이르도록 해주는 것인지는 엄밀한 검증의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주굉朱宏같은 선사의 주장도 頓悟漸修를 주장하고 있다.

먼저 깨닫고 습기를 제거하여 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확실히 중생의 근기에 초점을 맞춰 가르치고 있다고 보여 진다.

 

頓悟頓修와 頓悟漸修의 차이는 중생의 근기에 따라

어떤 길을 선택하는가의 문제와 더불어 풀어가야 할 문제라고 생각된다.

이런 관점에서 普照의 돈오점수의 가르침은 매우 설득력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능엄경>에서도 다음과 같이 頓悟漸修와 비슷한 입장의 말을 하고 있다.

이즉돈오理卽頓悟 승오병소乘悟倂銷

이치로는 돈오하면 깨달음과 동시에 모든 번뇌가 사라지지만

 

사비돈제事非頓除 인차제진因次第盡

사실(그릇된 습기)에 있어서는 일시에 제거되지 않고 차례대로 없어진다.

 

이같이 중요한 깨달음의 순간을 시로 읊은 오도송은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러면 寒山詩에서 悟道頌은 어떻게 전해지는가?

 

寒山의 오도시를 보기 전에 붓다의 悟道頌으로 전해지는 偈頌을 먼저 보자.

이 偈頌은 법구경에 들어 있다.

 

붓다의 悟道頌이 <담마파다>의 偈頌 153, 154이다.

이 偈頌은 최초의 悟道頌이 되는 것이다.

 

붓다께서 제따와나 수도원에 계시던 어느 때

아난다 테라의 요청에 따라 다시 반복해 주신 것이다.

 

한량없는 세월의 생사윤회 속에서

집을 짓는 자가 누구인지 알려고

찾아 헤매다 헤매다 찾지 못하여

계속해서 태어났나니 이는 두카였네.

 

아 집을 짓는 자여! 나는 이제 너를 보았노라!

너는 이제 더 이상 집을 짓지 못하리라!

 

이제 모든 서까래는 부서졌고

대들보는 산산이 조각났으며

나의 마음은 닙바나에 이르렀고,

모든 욕망은 파괴되어 버렸느니라.

/담마빠다(法句經)

 

153.

집 짓는 자를 찾아

많은 생을 윤회하면서

나는 부질없이 치달려왔다.

거듭되는 태어남은 괴로움이었다.

 

154.

집 짓는 자여, 마침내 그대는 드러났구나.

그대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리.

그대의 모든 골재들은 무너졌고

집의 서까래는 해체되었다.

이제 마음은 업의 형성을 멈추었고

갈애의 부서짐을 성취하였다.

/붓다(Buddha)의 오도송

 

(Dhp.153)

Anekajāti saṃsāraṃ

sandhāvissaṃ anibbisaṃ,

gahakārakaṃ gavesanto

dukkhā jāti punappunaṃ.

 

여러 생을 윤회하며 찾아 헤매었다,

‘나’ 라는 집 짓는 이,

너를 좇아…

고통의 생애

거듭, 거듭 이었다.

 

[깨달은 분의 Udāna]

(Dhp.154)

Gahakāraka diṭṭho ‘si

puna gehaṃ na kāhasi,

sabbāte phāsukā bhaggā

gahakūṭaṃ visaṃkhitaṃ,

visaṃkhāragataṃ cittaṃ

taṇhānaṃ hayam ajjhagā.

 

“오, 집짓는 이여,

네 모든 것이 보인다.

이제 다시는 집 짓지 못 하리.

네가 사용하는 모든 골재는 부셔졌고,

집의 상량은 무너져 조각났다.

 

나는 체득 했도다.

‘지음 없는 마음’,

‘욕망들의 완전한 소멸’을!"

 

붓다의 깨달음은 완전한 것이며 성스러운 진리를 얻음으로 하여

인간계와 천상에서 가장 위대한 으뜸가는 스승이며 성인이 되었다.

위 시는 바로 이런 장엄한 순간을 붓다 자신이 읊은 것이다.

 

깨달음의 세계는 중도(Majjhimapatpada)의 세계이며 열반(Nibbana)의 세계인 것이다.

이 중도는 구체적으로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로 설명된다.

 

이러한 깨달음을 성취한 붓다의 통찰력으로 읊은 悟道頌이야말로

더 없이 깨달음의 세계를 잘 드러내주는 시이다.

 

禪詩의 진정한 생명력은 오도의 순간을 偈頌으로 읊는 悟道頌에 있다.

寒山詩에서 정확히 오도시로 전해지는 것은 알 수 없다.

 

寒山詩 전체가 제목 없이 쓰여 졌기에 어느 것이 悟道頌인지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이 시에 대하여 아무런 설명도 남기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오도의 한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시는 찾아 볼 수 있다.

 

굳이 오도시를 꼽으라면 다음의 시를 들 수 있을 것이다.

寒山의 悟道頌으로 볼 수 있는 시로서 첫째로 들 수 있는 것이 다음과 같은 시이다.

 

50

오심사추월吾心似秋月 내 마음은 가을 달인가

벽담청교결碧潭淸皎潔 내 마음은 맑은 물인가

무물감비륜無物堪比倫 어느 것에도 비할 수 없거니

교아여하설敎我如何說 어떻게 내게 말하라 하는가.

 

깨달음은 어떤 언어로도 다 드러낼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위 시처럼 어떻게 말로 할 수 있겠는가고 반문하고 있다.

 

마음은 아무것에도 비유할 수 없는 것인데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무엇으로도 설명이 될 수 없는 마음의 지극한 경지는 어떤 언설로도 접근이 불가능하다.

 

그의 이러한 경지는 선의 깊은 체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위 시는 寒山의 경지를 잘 나타내는 시이다.

 

寒山詩 중에서 오도시를 선택한다면 이 시가 가장 오도시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확인할 길은 없다.

 

다만 여타의 시보다 더 깨달음의 경지를 잘 드러내주고 있음을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오도송으로 간주 될 수 있는 다음 시를 하나 더 보자.

 

80

벽간천수청碧澗泉水淸 푸른 시내에 샘물이 맑고

한산월화백寒山月華白 찬 산에는 달빛이 희다

묵지신자명黙知神自明 가만히 앎에 정신이 절로 밝고

관공경유적觀空境逾寂 공을 관하매 경계 더욱 고요하다.

 

위 시 또한 悟道頌으로 볼 수 있는 시이다.

물론 정확히 悟道頌인지는 증명할 수 없지만 그러나 寒山詩중에서

오도시에 가장 가까운 시를 든다면 또한 이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오도의 순간은 어떤 언어로도 담아 낼 수 없는 깊은 세계이다.

이러한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 수행의 과정을 걸어가고 있다.

 

한산시 중에서 분명히 오도송을 가려낸다면 시의 내용으로 보아

깨달음의 경지를 드러내고 있는 위 시를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이는 한산시에서 오도송을 밝혀서 전해줄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함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한산의 생애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가 설령 깨달음을 성취하여 오도송을 읊었다 하더라도

스스로 말하여 전하지 않으면 후대에 아무런 자료도 근거할 수 없는 점을 십분 이해할 수 있다.

 

오도의 순간을 담아내기에는 세상의 어떤 형상적인 언어 문자로도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말을 떠나 달리 뜻을 전달할 수단이 없는 것이기에

불가불 언어를 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한산시가 오랫동안 선가에서 애송되었음은 한산시가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고 한산시가 오랜 수행의 과정을 통하여 쓰여진 선시일진대

그 깨달음의 경지를 담아내는 오도송을 남기고 있을 것이다.

 

2) 示法詩

선사나 수행자는 법을 후학들에게 가르치는 과정에서 때로는 시를 통하여 법을 보이기도 한다.

이럴 경우 示法詩라고 할 수 있다.

示法詩는 선사가 후학들에게 법을 보이는 禪詩를 말하는 것이다.

 

寒山詩에서 寒山이 누구에게 직접 법을 가르치기 위해 시를 쓰지는 않았다.

그러나 寒山이 법을 나타내기 위해 쓴 시를 볼 수는 있다.

 

寒山詩에 있어 示法詩에 해당되는 시는 다음과 같은 시들이 있다고 보여 진다.

佛敎의 진리를 나타내는 시로서 마음 닦는 길을 바르게 살아가야 함을 잘 가르쳐 보이고 있다.

 

192

수청징징영水淸澄澄瑩 물이 맑고 고요하고 환히 밝으면

철저자연견徹底自然見 모든 것 속속들이 나타나는 것처럼

심중무일사心中無一事 마음 가운데 진실로 한 가지 일도 없으면

만경불능전萬境不能轉 모든 경계가 움직일 수 없느니라

 

심기불망기心旣不妄起 마음이 망령되이 일지 않으면

영겁무개변永劫無改變 영원히 옮기거나 변하지 않나니

약능여시지若能如是知 만일 그대 능히 이렇게 알면

시지무배면是知無背面 이 지혜는 등과 앞이 없느니라.

 

마음 경계를 잘 드러내어주는 示法詩라 할 것이다.

寒山의 시중에 비유적인 성공을 잘 거두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마음을 달에 비유하여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心月은 옛 부터 법을 나타내고 도를 나타내는데 가장 많이 쓰이는 상징중 하나이다.

그래서 마음달이 밝으면 만물을 모두 비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 시 역시 마음을 잘 다스려 나갈 것을 가르쳐 보이는 시라고 할 수 있다.

 

86

진시심중화瞋是心中火 성내는 마음은 마음속의 불

능소공덕림能燒功德林 공덕의 숲을 살라 버린다

욕행보살도欲行菩薩道 보살의 길을 행하고자 하거든

인욕호직심忍辱護直心 욕을 참으며 곧은 마음 지녀라.

 

성내는 마음을 참고 보살도를 행하라고 지극히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한산시 중에는 이런 시법시의 성격을 보이는 시가 무척 많다.

 

다음 시 역시 이러한 그의 법을 나타내는 시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언제나 천진한 본성을 간직하라고 가르친다.

 

299

한산정상월륜고寒山頂上月輪孤 한산 꼭대기에 외로이 동그란 달

조견청공일물무照見晴空一物無 맑은 하늘 두루 비쳐 막힐 것 없네

가귀천연무가보可貴天然無價寶 귀하구나 천연의 값없는 이 보배여

매재오륜익신구埋在五輪溺身軀 오음에 묻힌 채로 몸 안에 빠져 있네.

 

다음 시 역시 달을 마음에 비유하여 불성을 말하고 있다.

 

298

천년석상고인종千年石上古人縱 천년 반석 위에 옛사람의 발자국

만장암전일점공萬丈巖前一點空 만길 바위 앞에 한 점 푸른 하늘

명월조시상교결明月照時常皎潔 밝은 달은 비치어 언제나 환하거니

불노심방문동서不勞尋訪問東西 서쪽 동쪽 찾기에 괴로울 것 다시 없네.

 

자연 속에 침잠한 깊은 속에서 어우러진 밝은 달은 그대로 일여한 경지를 나타내고 있다.

 

297

중성라열야명심衆星羅列夜明深 별은 멀리 있고 밤빛은 깊었는데

암점고등월미침巖點孤燈月未沈 바위에 외로운 등불 달은 기우네

원만광화불마영圓滿光華不磨瑩 뚜렷이 찬 광명 이지러짐 없거니

괘재청천시아심掛在靑天是我心 하늘에 걸려 있어 나의 마음일러라.

 

다음 시는 본성을 잘 지켜 본래 불성이 깨달음에 열려 있음을 보여주는 시이다.

 

219

기어제인자奇語諸仁者 내 말을 부치나니 모든 착한 사람들아

부이하위회復以何爲懷 그대들은 무엇으로 본회 삼는가

달도견자성達道見自性 도를 깨달아 너의 본성을 보라

자성즉여래自性卽如來 그 본성이 곧 부처이니라

 

천진원구족天眞元具足 천진도 원래 두루 갖춰 있나니

수증전차회修證轉差廻 닦아 얻음 있으면 더욱 멀어지느니라

기본각축말棄本却逐末 근본 버리고 끝을 따라 찾는 것

지수일장애祗守一場獃 다만 한바탕 어리석음 지킬 뿐.

 

천진한 마음을 그대로 살아가라고 가르치고 있다.

어리석게 근본을 저버리고 새로 구하려는 마음은

더욱 도를 멀게 만든다고 경계 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한산시의 곳곳에 천진성은 숨어서 반짝이고 있음을 볼 때

이런 점도 한산시가 선가에서 애송되었던 요인 중에 하나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러면 다른 선사의 경우 示法詩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살펴보자.

다음은 汾陽善昭가 대중에게 보이는 시이다.

 

대중에게 보임

춘우여춘운春雨與春雲 봄에 이는 비와 봄에 이는 구름이

자생만물신資生萬物新 삶을 도와 만물을 새롭게 하네

청창산점점靑蒼山點點 푸르고 푸른 산은 점점으로 돋아 있고

벽연초균균碧緣艸勻勻 푸른 풀은 고르게 우거져 있네

 

우제장공정雨霽長空靜 비 개이니 기인 허공 고요만 하고

운수일색진雲收一色眞 구름 걷힌 하늘은 한빛으로 푸르네

보언수도자報言修道者 고하노니 수도하는 사람들에게

하물갱감진何物更堪陳 어느 물건 다시 있어 자성을 나타내랴

 

汾陽善昭는 寒山詩와 매우 관계가 깊다.

그는 서기 947년에 태어났다.

출가한 후 지팡이를 짚고 사방을 유람하면서 선지식을 역참 하였다.

首山省念의 법을 이어 南嶽 아래 제 9세가 되니 臨濟宗의 법계에 속한다.

宋 仁宗 天聖 2년(1024)에 시적하니 세수 78세였다.

無德禪師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의 문인 楚圓이 편집한 語錄 3권과 語要 1권이 전하여 온다.

 

위 시는 마음 공부하는 학인 대중들에게 자성을 밝혀 보이고 있는 것이다.

汾陽은 선의 거장일 뿐만 아니라 시적으로도 대단히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가 남긴 禪詩들은 매우 훌륭한 평가를 받고 있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寒山의 示法詩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교훈적 입장에서

승가에 대하여는 비판적 입장에서 수행의 올바름을 들어서 많이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臨終詩

모든 생명체는 태어나서 반드시 죽어야 한다.

붓다의 출가와 깨달음 또한 이러한 생사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생사해탈이야말로 수행의 궁극적 목적인 것이다.

선사들에 있어 마지막의 순간을 어떻게 맞이할까?

 

생사를 자유롭게 오가는 선사의 경지에서 보여주는 마지막 임종의 목소리를 열반송이라 한다.

寒山은 어떤 임종게를 남기고 있는가?

寒山은 120세까지 살았다고 전해진다.

 

정확한 나이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지만 어쨋든 寒山이 장수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다음 시는 그가 100세를 넘어 장수한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294

노병잔년백유여老病殘年百有餘 늙고 앓고 괴로운 평생 백년 남짓해

면황두백호산거面黃頭白好山居 누른 얼굴 흰 머리에 산중을 좋아하여

포대옹질수연과布袋擁質隨緣過 베옷으로 몸을 싼 채 인연 따라 지내거니

기선인간교양모豈羨人間巧樣模 어찌 인간들의 꾸민 꼴을 부러워하리.

 

심신용진위명리心神用盡爲名利 다만 명리 위해 마음을 괴롭히고

백종탐람진기체百種貪婪進己體 몸을 돌보느라 온갖 탐욕 일으키네

부생환화여등진浮生幻化如燈盡 인생은 덧없어라 등불 심지 같나니

총내매신시유무塚內埋身是有無 무덤에 들고 나면 있는 건가 없는 건가

 

그의 나이 이미 100세를 넘어 얼굴은 누렇게 변하고

머리는 허옇게 희어 산에 사는 것을 즐겨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 시는 드물게 한산 자신의 나이를 드러내고 있다.

 

閭丘胤의 서문을 보면 寒山과 拾得의 최후의 모습을 적고 있다.

閭丘胤이 國淸寺로 찾아오자 한암으로 들어가니 바위 문이 저절로 닫혔다고 한다.

 

이것이 寒山의 최후의 모습으로 이후로는 다시 볼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면 寒山의 生死觀은 어떠한지 살펴보자.

 

311

한산자寒山子 이 寒山子

장여시長如是 언제나 이러하다

독자거獨自居 스스로 혼자 있어

불생사不生死 나고 죽음 없나니.

 

이 시는 寒山의 생사 없는 경지를 잘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그에게는 이미 생과 사가 둘이 아니다.

 

用無生死의 경지라고 할까?

生死가 없는 경지를 쓰는 것이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생사에 끌려가지만 깨달은 사람은 생사를 능히 자재하는 것이다.

 

옛부터 많은 선사들이 입적에 앞서 열반송을 남기고 있다.

같은 육체의 죽음이라도 선사의 죽음은 다르다.

그들은 철저히 자신을 관조하고 스스로 죽음의 순간까지 매하지 않고 평안한 마음으로 간다.

 

중생들은 죽음에 끌려가지만 선사는 죽음을 받아들인다.

근본 자세가 다르다.

그래서 선사의 죽음을 坐脫入亡이라고 한다.

 

선사는 죽음을 철저히 무화시킨다.

그러기에 생사가 일여하다.

죽음은 본래 선사의 입장에서는 없는 것이다.

생사가 不二요. 그러기에 如是하다고 하는 것이다.

 

인생 최대의 문제는 생사문제이며 모든 사람은 생사로부터 도피할 수 없는 것이다.

생사는 깨달음으로서만이 능히 넘어설 수 있다.

수행자는 지혜해탈로 생사를 뛰어넘는 깊은 이치를 깨닫고 자기 생명을 장엄하게 된다.

 

다음은 다른 선사의 임종게를 살펴보자.

仰山慧寂의 임종게는 다음과 같다.

 

년만칠십칠年滿七十七 내 나이 일흔 일곱이 되도록

노거시금일老去是今日 늙다보니 오늘에 이르렀네

임성자부침任性自浮沈 성품 따라 오르락내리락 하니

양수반굴슬兩手攀屈膝 두 손으로 잡고 두 무릎은 굽힌다.

 

仰山의 임종게는 매우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두 무릎을 끌어안고 일원상을 만들어 나타내고 있음은 참으로 깊은 의미를 담아내는 임종게이다.

이미 말이 더 이상 끊어진 자리라고 할까.

 

仰山(840-919)이 위산의 회상에 머물 때 어느 날 위산이 설법하기를

‘내가 3년 후에 이 산 아래 단월 집에 수고우로 태어날 것인데

왼쪽 옆구리에는 위산승 아무개라는 글씨가 박혀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위산승 아무개라고 부르려면 수고우가 되고

수고우라고 부르려면 위산승 아무개가 되는 데 그러면 뭐라고 불러야 하겠는가?‘고 물었다.

 

이 말을 仰山은 사미 때 알아듣고 위산과 계합하였다고 한다.

仰山은 위산의 법을 이어 위앙종을 일으킨 종장이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맞게 되는데 수행자의 임종은 죽음 자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점에서 일반적인 죽음과 의미가 다르다.

 

임종게는 이러한 뜻을 잘 담고 있는 것이며 寒山에 있어서도

생과 사가 둘이 아닌 경지를 시를 통하여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4) 山居詩

수행의 공간은 주로 자연환경과 일치된다.

寒山에 있어서 이는 더욱 잘 어울린다.

 

天台山의 한암에 숨어 살았던 寒山이 산에 살면서 산에 관한 시를 남기고 있고

한산의 詩 중에서 가장 성공을 거두고 있는 시가 山居詩라고 할 수 있다.

 

山居詩의 의미 속에는 매우 포괄적인 뜻이 함축 되어 있다.

선과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하는 질서 잡힌 시의 모습도 나타나고 있다.

寒山詩에 있어 寒山이 담고 있는 의미 또한 대단히 중요하며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이고 있다.

 

寒山이 갖는 상징성은 다양하다.

寒山의 의미는 山名이며 人名이며 동시에 寒山詩의 상징적인 세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원래 寒山은 寒山子 살던 天台山의 바위굴이 한암이라는 이름에서 유래 되었을 뿐만 아니라

寒山은 은둔의 보편적인 세계를 나타내게 되었다.

 

대부분의 산중에 머물며 자연 속에서 쓰여진 시를 山居詩라고 이름 할 수 있다.

후대에는 山居詩集도 나오게 되었으니 永明延壽의 <山居詩竝和韻> 二卷도 한 예라 할 수 있다.

그 밖에 많은 선사들이 山居詩를 남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수행과 숲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전통은 인도에서부터 그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원래 종교를 그 발상의 지역에 따라 사막의 종교와 숲의 종교로 나누어 말하기도 한다.

 

사막의 종교는 주로 중동지역과 같은 사막지역에서 발생한 종교이고

숲의 종교는 인도와 중국 같은 농경지역에서 발생한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숲의 종교는 자연히 산과 숲을 가까이 하게 되고 그래서 자연과의 친밀감이 더해가게 된다.

 

寒山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기에 자연의 상징인 靑山과 白雲의 깊은 의미를 잘 담아내고 있는 시가 그의 작품에 많이 있다

그 중에서 하나를 들어보자.

 

28

등섭한산도登涉寒山道 寒山을 올라가니

한산로불궁寒山路不窮 寒山길 끝이 없다.

계장석뢰뢰谿長石磊磊 골짜기 길어 바윗돌 모여 있고

간활초몽몽澗闊草濛濛 시내가 넓어 풀이 더욱 파랗다.

 

태활비관우苔滑非關雨 이끼 미끄러움 비 온 탓 아니거니

송명불가풍松鳴不假風 바람 없어도 소나무 절로 운다.

수능초세누誰能超世累 누가 이 세상 번뇌를 멀리 떠나

공좌백운중共坐白雲中 이 흰구름 속에 함께 앉을꼬.

 

위 시에서 白雲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에 있어 자연은 영원한 터전이며 자연은 그와 하나를 이루고 있다.

 

寒山에 있어 寒山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그의 정신세계의 근본에는 여여부동의 진리 당체가 있으며

그것은 그에게 영원불멸의 고향이 된다.

그것이 바로 寒山의 眞面目인 것이다.

 

寒山의 세계는 이미 세속의 어떤 번뇌로부터도 벗어난 세계이며

그것은 다름 아닌 白雲과 같은 자유의 세계인 것이다.

白雲은 그에게는 靑山과 더불어 가장 근원적인 자연의 세계를 의미하고 있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는 매우 긴밀한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寒山詩에 나타나는 자연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의 시에서 寒山은 자연의 寒山이면서 동시에 영원한 이상으로서의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다음 시 역시 이런 한산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

 

289

운산첩첩연천벽雲山疊疊連天碧 첩첩한 구름 산은 하늘 높이 푸르른데

노벽임심무객유路僻林深無客遊 험한 길 숲은 깊어 사람 자취 없어라

원망고섬명교교遠望孤蟾明皎皎 눈을 멀리 바라보면 외로운 달은 밝은데

근문군조어추추近聞群鳥語啾啾 지저귀는 새 소리 귓가에 어지럽네

 

노부독좌서청장老夫獨坐棲靑嶂 늙은 지아비 홀로 푸른 산에 깃들어

소실한거임백두少室閑居任白頭 좁은 방에 한가히 흰털에 맡겨 두네

가탄왕년여금일可歎往年與今日 돌아보면 지난 때나 또 오늘도

무심환사수동류無心還似水東流 무심하기 동으로 흐르는 물 같나니.

 

산중에 사는 생활의 정경을 무심하게 나타내는 한산의 경지는

대단히 평화롭고 한가한 아름다운 풍경화 같은 느낌을 준다.

 

물은 졸졸 동으로 흘러가고 달은 밝아 휘엉청 한데

오가는 자취 없어 더욱 조용한 산중을 느끼게 한다.

 

寒山의 산거시는 매우 아름답다.

오랫동안 산에 은거하면서 자연의 깊은 내면을 잘 통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시는 산거시 중에 매운 뛰어난 시가 많다.

 

寒山詩의 眞面目은 산거시에서 볼 수 있다.

그의 산거시는 선과 어우러져 매우 특이한 광채를 발하고 있다.

 

많은 禪詩들 중에 山居詩가 가장 많은 것은

일상생활 속에서 山居詩가 많이 나오게 되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다음은 다른 선사의 시 중에 山居詩를 보자.

 

송하수연모옥松下數椽茅屋 솔 아래 두 서너간 띠 풀집 지니

안전사면청산眼前四面靑山 눈앞은 사면이 푸른 산이네.

일월승침불주日月升沈不住 해와 달은 뜨고 지고 머물지 않고

백운래거상한白雲來去常閑 흰구름 오든 가든 한가하다네.

 

위 시는 敢山德淸 선사의 시이다.

산중 생활의 한가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언제나 푸른 산은 앞에 마주 하고 있고 흰구름과 산은 벗이 되어

더불어 흐르는 해와 달 또한 매일 매일 좋은 날이 되고 있는 경지이다.

 

山居詩의 전통은 山水詩와 맥락을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산수시의 흐름에서 뺄 수 없는 인물이 謝靈運(385-433)이다.

그는 벼슬에 나아갔으나 뜻을 펼치지 못하여 항상 산을 찾았다고 한다.

 

그래서 한번 길을 떠나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고 가는 곳마다 항상 시를 지어 남겼다.

그가 찾는 산은 반드시 깊고 험준한 산이었으며 아무리 멀어도 마다하지 않았다.

 

<文選>에는 그의 산수시를 많이 싣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다음은 그의 산수시를 살펴보자.

그가 자연을 받아들이는 마음을 상심嘗心이라고 표현하고 있음을 유의해 볼 것이다.

 

아지수여량我志誰與亮 나의 뜻을 그 누구에게 밝힐 것인가

상심유양지賞心惟良知 오직 상심만이 이를 잘 알고 이해하리라./(文選 권 22.)

 

그가 자연을 바라보는 입장은 세상의 어려운 일을 벗어나 자연 속에 묻혀 살고저 하는 것이다.

아무리 세상이 나를 괴롭혀도 자연만은

나를 알고 이해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짙게 깔려 있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자연은 늘 그리워하는 대상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길 떠난 새는 옛 친구를 그리워하고

길 떠난 새는 옛 수림을 그리워한다.

정을 머금고 또 수고하고 사랑하니

어찌 상심을 떠날 것인가?

 

이와 같이 賞心은 인간이 자연을 대하는 근본 마음인 것을 밝히고 있다.

그래서 인간이기에 상심을 떠날 수 없는 것이다.

 

謝靈運에 있어서의 자연은 산수시를 통하여 매우 잘 드러나고 있으며

이러한 전통은 陶淵明등에 이어져 寒山으로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寒山의 山居詩는 天台山의 자연환경에서 비롯된 삶의 현실을 담아내고 있으며

동시에 중국의 산수시의 전통위에 서있는 것이다.

이러한 山居詩로서 대단히 뛰어난 시를 남긴 선사들은 무수히 많다.

 

太古普愚스님도 그러한 선사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의 <太古庵歌>를 보면 그 높은 경지를 알 수 있다.

 

내 이 암자 살면서도 나 자신 모르나니

그윽하고 깊건마는 옹색함이 없는 그 것.

(생략)

산 위에 구름 엉겨 희기도 흰데

산 속을 흐르는 물 끊임도 없어

그 누구 저 흰구름 볼 줄을 알랴?

개인 하늘 비 쏟아져 번개 치는 듯

(생략)

운문의 호병과 趙州의 차가

우리 암자 이 맛을 어찌 따르랴?

(생략)

내 암자의 추함이 이와 같거니

새삼 무어라 말을 낼 거랴?

춤 마치고 삼각산 돌아와 보니

靑山과 맑은 샘물 여전하도다!

 

<太古庵歌>는 매우 긴 詩라서 다 옮기기는 어렵다.

그러나 위에서 인용한 바와 같이 산거의 수도생활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이처럼 山居詩는 수도의 생활과 자연 속에서의 시적인 삶이 하나를 이루고 있다.

 

禪詩의 진정한 폭 넓은 대중적 수용은

山居詩 내지 산수시 속에 잘 용해되어 드러나 있다고 보여 진다.

 

이런 점에서 寒山의 山居詩는 天台山에 은거하여 수도하면서 자연과 인간의 일여한 높은 경지를

선 수행을 통하여 터득하고 또한 그의 경지를 시로 드러내고 있음이 매우 훌륭하다고 하겠다.

 

3. 僧伽 批判의 詩

 

寒山의 시세계가 보여주는 또 하나의 특징으로 비판적인 면을 빼 놓을 수 없다.

그의 비판정신은 매우 준열하고 날카롭다.

 

세상에 대하여 교훈적인 비판을 하기도 하고 신선술의 헛됨에 대하여 지적하기도 하며

승가의 타락에 대하여 그는 매우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다.

 

그의 시 속에는 저속한 승려를 준열히 매도하는 시가 상당히 있다.

이른바 비판시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런 비판시 중에는 유교와 사회와 신선술의 허상과

세상의 어리석음을 비판하며 훈계하고 있기도 하다.

 

그 뿐 아니라 南宗禪의 입장에서 북종선을 비판하기도 하고

거사적 입장에서 방주를 비판하고 있기도 하다.

 

그의 비판은 매우 통렬하며 풍자적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승가를 비판하는 시를 살펴보기로 하자.

 

283

사문부지계沙門不持戒 스님이 되어 계율도 지키지 않고

도사불복약道士不服藥 도사로써 또 약도 먹지 않는구나

자고다소현自古多少賢 옛날부터 그 많은 어질다는 사람들

진재청산각盡在靑山脚 모두 다 푸른 산기슭에 누웠나니

 

계율을 지키지 않는 승가의 비판은 매우 날카롭다.

그의 비판의 시각은 계율적인 면과 수행적인 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계율이 수행과 달리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눈에 비친

승가의 무절제한 행동과 잘못들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계율을 지키는 것은 출가자의 본분이다.

그러나 개중에는 계율을 어기는 사람들이 있었고

寒山은 이에 대하여 매우 날카롭게 비판을 가하고 있다.

집 떠난 이는 출가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寒山의 계율에 대한 인식은 어떠한가?

계율이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금하는 조목과

당연히 배우고 지켜야 할 계목을 제정하여 지키는 것을 말한다.

 

계율을 제정하게 된 동기는 꽃다발을 그냥 두면 바람에 날려 곧 흩어지지만 끈으로 잘 묶어두면

오래 가는 것과 같이 승가에 있어서도 계율로 승가를 잘 보호하면

오래 정법이 머물 것이라는 붓다의 가르침에 의해서이다.

 

현재 계율이 전해지는 것이 南方佛敎와 北方佛敎가 다르다.

북방의 한역 율장은 廣律로 <四分律><五分律><十誦律><摩訶僧祗律><根本說一切有部律> 등

五部律이 전해지고 남방에도 巴利律이 전해지고 있다.

 

寒山이 어떤 계율을 보고 그의 사상적 근거를 마련하였는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승가의 명맥은 계율에 있는 것이기에 寒山의 입장은 단호하다

북방의 계율은 남방의 계율과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남방의 佛敎는 형식적인 점을 중요시 하여 부처님이 제정한 계목에 철저한 바탕을

두고 있는데 반하여 북방의 경우는 心戒라고 하여 근본정신에 더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런 모습은 가령 남방에서 오후 불식의 계율을 철저히 지킨다든가

육식을 막지 않는 점에서 북방의 계율을 지키는 점과 서로 달리 하고 있다.

 

한산시에서의 계율적인 면에서 특히 비판적인 대상중 하나가 식육의 문제이다.

원래 식육의 문제는 인도문화권과

중국문화권의 차이에서 오는 중교적 풍습의 다름을 보여주고 있다

 

붓다 시대에도 육식의 문제는 제기되어 육식을 하는 파도 있고

육식을 하지 않는 파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식육을 반대한 파로는 제바달다와 그를 따르는 일파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우유까지 먹기를 거부하였으며 이런 주장을 따르는 일파가

현장이 인도를 순례하였을 때까지 남아 있었다고 전한다.

 

부처님은 이러한 점에서는 퍽 관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원래 근본佛敎에서는 계율상 계목으로 식육을 금하는 대목은 없다.

 

약으로 5정육을 먹을 수 있게 열어 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비구는 음식을 선택하지 않는다는 입장으로 어느 쪽에도 기울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출가자는 언제나 하루에 한번 걸식하여 식사를 하였으며

이런 전통은 남방에서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다.

 

그러나 北方佛敎로 넘어오면서 따로 범망경을 만들어

중국인의 정서에 맞게 식육을 금하는 것이 강조 되었다.

식육을 금하는 것은 다분히 도교적인 색채가 가미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다음의 시도 식육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는 시이다.

 

249

기어식육한寄語食肉漢 고기 먹는 이에게 내 한 말 부치나니

식시무두유食時無逗留 그래 고기 먹을 때 주저하지 않는가

금생과거종今生過去種 전생은 이생의 종자요

미래금일수未來今日修 내생은 이생의 결과니라

 

지취금일미祗取今日美 다만 오늘의 즐거움에 취해

불외래생우不畏來生憂 내생의 걱정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노서입반옹老鼠入飯瓮 마치 늙은 쥐 잡통에 든 것 같아

수포난출두雖飽難出頭 배는 부르나 나오기 어렵나니.

 

寒山이 살았던 시대는 중국적인 문화 풍토에서 이미 佛敎가 정착되어 있던 때라 식육을 금했는데

일반적으로 출가자들이 육식을 하는 것에 대하여 寒山은 상당히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는 어디까지나 寒山의 눈에 비친 당시 中國佛敎의 계율이라고 할 수 있는바

이러한 寒山의 태도는 그의 시 속에 많이 나타난다.

 

181

매육혈활활買肉血活活 고기를 사면 피가 줄줄 흐르고

매어도발발買魚跳鱍鱍 생선을 사면 아직 살아 펄떡이네

군신초죄누君身招罪累 그대는 그로 인해 죄업을 부르는데

처자성쾌활妻子成快活 그대 처자는 좋아라 날뛰는구나

 

재사거편가纔死渠便嫁 그대 숨지자 그녀 곧 시집 갈 것을

타인수감알他人誰敢遏 남이 누가 감히 그걸 막으리(알遏 막다, 머무르다)

일조여파상一朝如破牀 하루아침에 부서진 상과 같이

양개당두탈兩箇當頭脫 살생과 사음을 당장 벗어나라.

 

시에서 느끼는 육식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생생하게 나타내고 있다.

살생과 사음은 佛敎계율의 4바라이로서 무거운 것이 된다.

중생들은 이런 살생을 통하여 끝없이 윤희의 고통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다음 시 역시 같은 내용으로 중생들이 맛에 취하여 잘못을 범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시이다.

 

188

령저중생병怜底衆生病 내 이 중생의 병을 슬퍼하나니

손상약불염飡嘗略不厭 먹고 맛보기를 싫어할 줄 모르는구나

증돈온산장蒸豚搵蒜醬 돼지를 잡아 마늘 장을 바르고

자압점초염炙鴨點椒鹽 오리를 구워 후추 소금 뿌리네

 

거골선어회去骨鮮魚膾 뼈를 바르고 생선을 회치고

겸피열육검兼皮熱肉臉 껍질을 붙여 살코기를 굽는다(검臉 뺨)

부지타명고不知他命苦 남의 목숨의 괴로움은 모르고

지취자가첨祗取自家甛 다만 저희들의 입맛만 꾀하는구나.

 

이처럼 중생들은 윤회의 고통을 모르고 입맛에 취하여 온갖 고기와

술을 즐겨 먹고 있으나 이 모두 업을 짓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승가의 일상생활을 통하여 잘못된 일들을 비판하는

寒山의 시각은 오늘에 있어서도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다고 생각된다.

 

寒山은 승가 비판에 있어 계율적인 면과 아울러 수행에 대하여도 준열히 법도를 세우고 있다.

그가 출가했는지는 정확하게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후대에는 거의 출가한 스님으로 보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다음은 출가자에 대한 비판 시를 보자.

그는 출가의 길이 진실로 어떤 것인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227

我見出家人 내 보니 집을 나와 스님이 된 사람

不入出家學 집 떠난 공부에는 들어가지 않더라

欲知眞出家 집 떠난 참맛을 알고 싶어 하는가

心淨無繩索 우선 마음 깨끗하여 얽매임 없어야 하네

 

澄澄絶玄妙 끝없이 맑고 틔어 현묘마저 뛰어나고

如如無倚託 언제나 홀로 있어 의지하지 않으며

三界任縱橫 三界를 가로 세로 마음에 맡겨 두고

四生不可泊 사생을 오고 가며 머무르지 않나니

 

無爲無事人 그는 마음 없고 일 없는 사람

逍遙冥快樂 시름없이 거닐어 진실로 유쾌하네.

 

집을 떠난 사람을 出家者라고 하며 이는 比丘라고 하는데 비구란 본래 三寶 중의 하나로

세속에 초연하고 고행 정진하여 자리의 지혜를 얻어 자아를 완성한 다음

傳法度生을 목적으로 삼아 수행하는 사람을 말한다.

 

한산은 여기서 진정 집 떠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를 밝히고 있다.

그는 매우 철저히 출가자의 가치를 세우고저 하는 태도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 시에서도 그런 태도가 역력하다.

 

255

語爾出家輩 그대들 출가자에게 내 이르나니

何名爲出家 어떤 것 일러 출가라 하는가

奢華求養活 호사로이 이 한 몸 기르기를 구하고

繼綴族姓家 이름난 성 받이와 사귀어 노는 것

 

美舌甛脣觜 맛난 음식으로 혓바닥 달게 하고

諂曲心鉤加 아첨하고 굽은 마음 낚시 같은 것

終日禮道場 한종일 도량에서 예배드리고

持經置功課 경을 가져 사업을 계획하는 것

 

爐燒神佛香 향로에는 신불에 향을 사르고

打鍾高聲和 종을 치며 멋지게 염불하는 것.

六時學客春 여섯 때로 마음은 바깥 경계 달리면서

晝夜不得臥 밤으로 낮을 이어 눕지 않는 것

 

祗爲愛錢財 다만 돈과 재물을 사랑하기에

心中不脫灑 마음속은 언제나 흐리어 있고

見他高道人 저 도 높고 어진 스님 만나면

却嫌誹謗罵 도리어 시기하고 비난하는 것

 

驢屎比裟香 나귀 오줌을 사향에 겨누는가

苦哉佛陀耶 아아 괴로워라 나무불타야.

 

출가해서 바르게 살지 못하고 재물과 욕락을 탐하는 잘못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돈과 재물에 끄달려 언제나 마음은 흐려져 있는 그들을 향해 바르게 마음 낼 것을 말하고 있다.

 

256

우견출가아又見出家兒 내 또 출가자 보니

유력급무력有力及無力 거기는 공 있는 자 힘없는 자 있다

 

상상고절자上上高節者 가장 위 되는 절개 높은 사람은

귀신흠도덕鬼神欽道德 귀신도 그 도덕을 사모하나니

군왕분배좌君王分輩坐 임금도 수레를 나누어 앉고

제후배영역諸侯拜迎逆 제후는 절하며 맞아들인다.

 

감위세복전堪爲世福田 그는 진실로 세상 복 밭 되리니

세인수보석世人須保惜 세상 사람은 아껴야 할 것이다

 

하하저우자下下底愚者 가장 밑 되는 어리석은 사람은

허견다구멱許見多求覓 거짓을 꾸며 이익을 구하나니

탁람즉가지濁濫卽可知 그의 흐린 정신은 알 수 있는 것

우치애재색愚癡愛財色 재물과 돈에 마음을 빼앗기네

 

저각복전의著却福田衣 복 밭의 옷을 어깨에 걸고

종전토의식種田討衣食 농사를 지어 의식을 도모하고

작채세우려作債稅牛犂 빚 주어 우양을 세로 받는다

 

위사불충직爲事不忠直 하는 일마다 진실하고 곧지 못해

조조행폐악朝朝行弊惡 날마다 악한 일 함부로 저지르며

왕왕통둔척往往痛臀脊 가끔 궁둥이나 등뼈를 병 앓는다.

 

불해선사량不解善思量 바르게 생각할 줄 알지 못하여

지옥고무극地獄苦無極 지옥의 고통은 끝이 없으리

 

일조저병전一朝著病纏 하루아침에 병에 휘몰려

삼년와상석三年臥牀席 삼년을 자리에 누워 있으면

역유진불성亦有眞佛性 비록 참 불성 갖추어 있다 해도

번작무명적翻作無明賊 그것은 도리어 무명의 적이 된다

 

나무불타야南無佛陀耶 아아 가여워라 나무불타야

원원구미륵遠遠求彌勒 멀리 미륵불이나 기다려 볼까

 

출가해서 어리석게 제대로 도를 닦지 못하는 사람의 안타까움을 지적하고 있다.

출가했다고 다 바른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중에는 훌륭한 길을 가는 사람도 있고

때로는 잘못된 길을 가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寒山의 이런 비판은 매우 세차고 날카롭고 예리하다.

 

그의 시에는 인간의 유한한 죽음 앞에서

허무하게 욕심 부리는 어리석음을 깨우치는 시를 많이 쓰고 있다.

 

무상을 말하는 것이 어찌 寒山詩 뿐이랴.

그러나 寒山은 매우 세심하고 깊은 애정으로

무상한 세상에 도취되어 잘못 사는 중생을 깨우치고 있다.

 

한산의 비판은 승가뿐 아니라 사회와 도교에 대하여도 추상같다.

다음은 사회를 비판 하고 있는 그의 시를 살펴보자.

 

4. 社會 批判의 詩

 

비판은 지식인의 살아있는 양심이다.

寒山에 있어서 그 당대의 비판은 寒山이 당연히 해야 할 역할이다.

 

그는 매우 예리하게 사회의 부조리에 대하여 비판을 가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사회의 근원적인 구조의 모순을 시를 통하여 비유하여 말하고 있다.

 

다음의 시는 그런 면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인간들이 이기심으로 서로 싸우는 것을 개가 뼈다귀 하나를 놓고

서로 물어뜯는 것으로 비유를 들고 있다.

매우 놀라운 사실감을 불러일으킨다.

 

57

아견백십구我見百十狗 내 보니 열 마리 백 마리 개들

개개모쟁녕箇箇毛猙獰 그들은 털이 모두 어지러웠다.

 

와자거자와臥者渠自臥 눕는 놈은 제각기 누워 있고

행자거자행行者渠自行 다니는 놈은 제각기 다니다가

투지일괴골投之一塊骨 그러다가 고개 뼈다귀 한 개 던지면

상여애재쟁相與嘊喍爭 그들은 이빨을 드러내 서로 싸웠다.

 

양유위골소良由爲骨少 이는 오로지 개는 많고 먹이는 적어

구다분불평狗多分不平 공평하게 나눌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시는 사회주의화 된 중국에서 寒山을 새롭게 평가 하면서

사회적 계급모순을 나타내고 있는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고 한다.

 

사회를 비판하는 시로는 주로 현실적인 모순을 지적하고

또 벼슬아치나 부자들의 인색함을 꾸짖는 것이 많다.

다음의 시도 그러한 부자를 일깨우는 시중에 하나이다.

 

37

부아다앙장富兒多鞅掌 부잣집 아들 세상일에 허덕이며

촉사난지승觸事難祗承 일마다 남의 말 믿지 않는다.

창미이혁적倉米已赫赤 창고의 쌀은 좀 먹고 썩어 가도

불대인두승不貸人斗升 남에게 한 말 한 되 꾸어주지 않는다.

 

전회구거의轉懷鉤距意 그 위에 속으로 낚시 마음을 가져

매견선간릉買絹先揀綾 비단을 사도 먼저 문채비단을 가린다.

약지임종일若至臨終日 이 사람 한번 숨 거둔 뒤에는

조객유창승弔客有蒼蠅 조상꾼이란 다만 쉬파리 있으리라.

 

寒山에게 부자는 매우 부정적인 시각으로 비쳐지고 있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에게 베풀 줄을 모르는 매우 인색한 사람으로

그들이 죽은 뒤에 무엇이 남는가고 심란하게 비판하고 있다.

 

베풀 줄 모르는 사람이 죽은 뒤에는 그를 조상하는 것은 쉬파리뿐이라고

강하게 사회의 부조리하고 비윤리적인 면을 비판하고 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소유와 분배의 평등성을 어떻게 유지하느냐일 것이다.

이런 문제의 대립으로 이상적 평등사회를 실현하고자

사회주의적 세계관도 출현하는 것이고 끊임없이 갈등이 계속되는 것이다.

 

인간에 있어 분배의 평등을 완전히 실현하는 것은 영원한 이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현실의 모순을 딛고

이런 이상을 위해 나아가는 노력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 사회 속에서 인간끼리 서로 갈등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들어내고 있는

시를 보면 상당히 현실감이 있으며 동시에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85

거가일만리去家一萬里 집을 떠나 일만리 밖을 나와

제검격흉노提劍擊匈奴 검을 높이 들어 되놈을 친다.

득리거즉사得利渠卽死 네가 승리하면 그는 곧 죽을 것을.

실리여즉조失利汝卽殂 그가 승리하면 네가 곧 죽으리라.

 

거명기불석渠命旣不惜 이미 그의 목숨을 아끼지 않는 너

여명유하고汝命有何辜 또 너의 목숨인들 무슨 허물 있는가

교여백승술敎汝百勝術 너에게 언제나 이길 꾀 가르쳐 줄까?

불탐위상모不貪爲上謀 탐하지 않는 것이 최상의 꾀이니라.

 

위 시는 인간이 서로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그리고 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어쩌면 영원히 서로 투쟁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것이 인간 사회인지도 모른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말하고 있듯이 인간사회는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며 투쟁을 계속하여 가는 것이다.

 

이러한 투쟁은 인간이 욕망에 탐착하는 한 계속되는 것이다.

이 투쟁을 쉬는 방법은 탐욕을 내려놓는 길 뿐이다.

 

이것은 佛敎의 보편적인 삶의 태도이며

이러한 무욕의 세계만이 인간에게 영원한 안락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진정한 출가는 바로 모든 것을 버리는 데서 시작한다.

寒山은 바로 이 점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寒山이 꿈꾸는 것도 바로 이런 이상세계라고 할 수 있다.

 

<寒山詩集>에는 도교의 신선술에 대한 비판적인 시도 여러 편 보인다.

일찍이 寒山 자신이 젊은 시절에 老莊의 사상에 접했음을 들어내는 대목도

그 자신의 시 속에서 말하고 있다.

 

신선술로 사람을 현혹 시키는 것에 대하여 그는 매우 부정적으로 맹렬하게 비판을 나타낸다.

신선술의 허망함을 드러내는 시를 보자.

 

253

상문한무제常聞漢武帝 내 들으니 한 나라의 무제 때부터

원급진시황爰及秦始皇 진 나라의 시황에 이르기까지

구호신선술俱好神仙術 그들은 모두 신선술을 좋아해

연년경불장延年竟不長 오래 살려 했으나 끝내 얻지 못했다

 

금대기최절金臺旣摧折 금대에서 이미 목숨이 끊어졌고

사구수멸망沙丘遂滅亡 사구에서 도리어 멸망했나니

무릉여려악茂陵與驪嶽 무릉과 여악 오늘은 어떤가

금일초망망今日草茫茫 잡초만 어지러이 우거졌나니.

 

위 시는 신선술로 장수를 꾀했지만 죽음을 면할 수 없는 허망함을 드러내고 있다.

역대의 제왕도 마찬가지로 아무리 신선술을 찾아 오래 살고저 했으나

모두 묏등에는 잡초만이 무성한 것이다.

다음 시 역시 신선술의 허망함을 비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228

작도운하관昨到雲霞觀 어제 우연히 운하관 가서

홀견선존사忽見仙尊士 신선의 높은 선비 잠깐 보았다

성관월피횡星冠月帔橫 별 갓과 달 너울 비껴쓰고

진운거산수盡云居山水 모두들 사수에 산다고 했다

 

여문신선술余問神仙術 내 신선의 방술을 물었더니

운도약위비云道若爲比 어떻게 비유할 수 있느냐고 말했다.

 

위언영무상謂言靈無上 그것은 신령해 위가 없으며

묘약필신비妙藥必神秘 묘한 약은 틀림없이 신비하다고

수사대학래守死待鶴來 송장을 지키어 학 오기 기다리고

개도승어거皆道乘魚去 고기를 타고 간다 그들은 말했다

 

여내반궁지余乃返窮之 돌아와 그것을 생각해보고

추심물도리推尋勿道理 다시 생각해도 그럴 도리 없었다.

 

단간전사공但看箭射空 하늘을 겨누어 활을 쏘아라

수유환추지須臾還墜地 화살은 이내 도로 땅에 떨어지나니 수유

요니득선인饒你得仙人 너 비록 신선이 된다더라도

흡사수시귀恰似守屍鬼 송장을 지키는 귀신과 다름없다

 

심월자정명心月自精明 마음 달만 스스로 오로지 밝으면

만상하능비萬象何能比 이 세상 어느 것을 거기 겨누리

욕지선단술欲知仙丹術 선단의 법을 알고자 하는가

신내원신시身內元神是 몸 안의 본정신이 그것이니라

 

막학황건공莫學黃巾公 어리석게 황건공의 요술을 배워

악우자수의握遇自守擬 스스로 지키기를 꾀하지 말라.

 

위에서와 같이 그의 시를 보면 도교의 신선술에 대하여 상당히 비판적인 면을 볼 수 있다.

이상은 寒山의 詩世界를 불교문학의 입장에서 분류하여 살펴보았다.

 

아울러 비판시를 통하여 그가 승가와 도교와 사회의 잘못을

어떻게 비판하고 있는지도 살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