陶淵明과 寒山子의 歸隱 樣相 比較
/李鮮熙 배재대학교 전임강사
1. 서 론
宋代 시인 黃山谷은 寒山詩를 좋아하여¹ 늘 붓글씨로 쓰고 애송하였다.²
뿐만 아니라 그의 시를 매우 높이 평가하였는데 일본의 白隱禪師가 펴낸 〈한산시천제기문寒山詩闡提紀聞〉에 기록된 黃山谷과 회당보각선사晦堂寶覺禪師와의 대화에서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다.
¹) <山谷集>別集卷2
전신한산자前身寒山子 후신황노직後身黃魯直
파조속인뇌頗遭俗人惱 사욕입석벽思欲入石壁
즉 황산곡은 자신을 한산자의 後身이라 표현하며 그처럼 "入石壁"하고자 했다.
그 밖에도 황산곡의 한산자에 관한 문장은 산곡집 여러 군데 보인다.
즉 <山谷集> 外集卷9 〈서왕효자손한산시후書王孝子孫寒山詩後〉에서는
東川孝子耳目聰明 ··· 觀寒山之詩, 亦不暇寢飯矣 ···
라며 발분망식 열심히 한산시를 읽는 小孫을 칭찬하고 있다.
또한 <山谷集>別集12 〈발한산시증왕정중跋寒山詩贈王正仲〉에서는
차개고인옥중생업화지구此皆古人沃衆生業火之具, 여문왕정중余聞王正仲,
폐관불교조시지사閉關不交朝市之士, 기자주其子鑄, 참선학도參禪學道,
불락화택지락不樂火宅之樂, 인여질의구서因余姪檥求書, 고서유지故書遺之.
즉 한산시를 "개고인옥중생업화지구皆古人沃衆生業火之具"로 평하고 있다.
그 밖에 〈재답병간강국형제사수再答幷簡康國兄弟四首〉에서는
한산을 "묘설한산일거사妙舌寒山一居士"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²) <石门文字禅>卷27 〈又诗〉 “산곡상희서지山谷尝喜书之 ···”
또한 "대만 고궁박물원에서 발행한 <古宮書法> 第10輯下 pp18-24에도 한산시 2수가 실려 있다.
아견황하수我见黄河水 범경궤도청凡经几度清 수류여급전水流如急箭 인세약부평人世若浮萍
치속근본업痴属根本业 무명번뇌갱无明烦恼坑 륜회궤허겁轮回几许劫 지위조미맹只为造迷盲
한산출차어寒山出此语 복사전광한复似颠狂汉 유사대면설有事对面说 소이족인원所以足人怨
심진출어직心真出语直 직심무배면直心无背面 림사도내하临死度奈河 수시루라한谁是喽罗汉
명명천태로冥冥泉台路 피업상구반被业相拘绊
이 책에서 황산곡은
“앞으로 10년 더 시를 쓰고 글공부를 하면 혹 陶淵明의 수준은 따라갈 수 있을지 몰라도
寒山子의 시는 죽었다 다시 태어나도 따라 갈 수 없을 것”³)이라며 한산시를 격찬하였다.
회당이 다시 황산곡에게 한산시로 和韻해달라고 부탁하자 이렇게 말했다.
³) 관련내용을 보면
석보각선사昔寶覺禪師, 상명태사산곡도인화한산시嘗命太史山谷道人和寒山詩,
산곡낙지山谷諾之. 급엄순부득일사及淹旬不得一辭.
후견보각왈後見寶覺曰 ; 갱독서작문십년更牘書作文十年, 혹가비도연명或可比陶淵明,
약한산자자若寒山子者, 수재세역막능급雖再世亦莫能及.
<編年通論>第20卷 白隱禪師著 <寒山詩闡提紀聞>
魏子雲〈寒山識小錄〉 P21<中國詩季刊>4卷 5期에서 재인용.
“옛날 杜甫는 한산시를 보고 입을 다물었는데, 제가 어찌 감히 和韻을 할 수 있겠습니까?
넉넉히 잡아 한평생 혹 다음 생까지 시를 쓴다 해도 杜詩의 경지에 이르기도 힘들 텐데,
하물며 한산자라니요? ⁴”
이는 황산곡이 한산시를 얼마나 높이 평가하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4) 회당운晦堂云 ;
정견금이시율명천하야庭堅今以詩律鳴天下也, 위한산시자爲寒山詩者, 갱운득화부賡韻得和否?
로직답운魯直答云 ; 두소릉일람한산시결설이杜少陵一覽寒山詩結舌耳,
오금세감용이가화운재吾今歲敢容易可和韻哉!
직요수일생이생直饒雖一生二生, 이작시음而作詩吟, 난도노두경계難到老杜境界,
신역한산시재矧亦寒山詩哉! 위와 같음.
한편 宋나라 승려 각범覺範의〈友詩>를 보면
황산곡이 한산자를 도연명의 亞流로 인식했다는 기록이 보인다.⁵).
이러한 평가는
“10년만 더 시를 쓰고 글공부를 하면 도연명은 따라갈 수 있겠지만
한산자는 죽었다 다시 태어나도 따라 갈 수 없다”
는 황산곡의 말과 일견 모순을 이루는 것처럼 보인다.
⁵) “山谷論詩, 以寒山爲淵明之流亞”, <石门文字禅> 卷27
본고가 한산자를 도연명의 ‘아류’라고 평한 황산곡의 견해를 주목하는 이유는 한산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틀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기대가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한산자를 도연명의 아류라고 한 주장의 근거에 대한 정확한 규명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東晋과 唐代라는 각기 다른 시대를 살았던 두 사람의 공통점과 상이점을 비교하여야 한다. 또한 한산시의 분석을 통해 도연명과의 연관성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 특히 도연명과 관련하여 주목할 점은 한산자의 歸隱이다. 도연명과 한산자 모두 중년이후 귀은 하였고, 훌륭한 작품은 대부분 이 때에 나왔다는 공통점을 지녔다. 단순히 ‘隱逸’의 관점에서만 보면 도연명과 한산자는 여러 유사성이 있어 ‘한산자는 도연명의 아류’라는 황산곡의 평가가 일단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도연명과 한산자는 활동했던 시대가 다르고, 환경이 달랐던 만큼 그들의 삶의 양식 또한 큰 차이가 있다. 특히 두 사람의 성품과 귀은 과정, 그리고 귀은 이후의 생활은 공통점 못지않게 차이점 역시 적지 않다. 즉 도연명은 몇 번에 걸쳐 관직에 진출하나 얼마 못가 그만두고 귀은 하지만, 한산자는 끈질기게 관직진출을 시도하다가 무산된 후 귀은하였다. 도연명이 自意的 歸隱인 반면 한산자는 사실상 他意的 歸隱인 만큼, 양자 간에는 분명 큰 차이가 있으며, 결과 또한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한산자는 도연명의 아류’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따라서 이에 대해서는 보다 세밀한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그렇다면 宋代 黃山谷이 唐代 寒山子를 東晋 陶淵明의 아류라고 주장한 이유에 대한 면밀한 분석도 필요할 것으로 본다. 본 논문작성의 동기는 비록 황산곡의 한산시 평가가 계기가 되었지만, 이를 계기로 唐代의 隱逸詩人 한산자와 六朝시대의 田園詩人 도연명과의 비교만으로도 매우 의미가 있는 시도라고 생각된다.
2. 중국의 隱逸文化와 陶淵明 및 寒山子
1) 唐 이전의 隱逸文化와 陶淵明
隐逸문화는 봉건전제군주사회에서 传统 사대부들이 오랫동안 선망해왔던 문화의 하나이다. 隱士는 군주는 물론 일반인으로부터도 존중을 받았다. 隐逸이란 정치적 대격변의 과정에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주류문화와의 타협을 거부하고 자신의 자유를 추구하거나, 혹은 그 문화가 주도하는 사회에 대한 이견 등으로 현실사회에서의 활동을 접고 자연으로 회귀하는 행위나 심리상태⁶)를 의미하고, 隱士는 재능과 덕을 갖추었음에도 관직을 마다하고 자신의 자유를 구가하기 위해 은거한 인사를 가리키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⁶) “혹은거이구기지或隐居以求其志,혹곡피이전기도或曲避以全其道,
혹정이이진기조或静已以镇其躁,혹거위이도기안或去危以图其安,
혹구속이동기즉혹상或垢俗以动其即或牀,혹자물이격기청或疵物以激其清”
/<후한서后汉书 일민렬전서逸民列传序〉
중국에서 隱逸의 역사는 許由와 伯夷, 叔齊 등으로부터 그 연원을 찾을 수 있겠으나, 문화로서 형성된 것은 春秋戰國시대 이후이며, 兩漢을 거쳐 淸談思想이 풍미했던 魏晉시대에 극성하였다. 이때까지의 은사의 성격은 대체로 대동소이하였지만⁷) 唐代에 이르면 크게 변하게 된다.
⁷)《新唐書》에서는 당대 이전의 은사에 대해 3개의 부류로 구분하고 있으나
〈後韓書. 逸民列傳序〉의 내용과 큰 차이가 없다. 참열參閱,《新唐書》〈隱逸傳〉참고.
기존의 연구 성과를 종합해보면, 唐代 이전의 은사는 대개 4개의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다⁸).
첫째 유형은 부정한 세상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자연에 귀은한 은사이고,
둘째 유형은 관직에 뜻은 있으나 적응에 실패하고 귀은한 인사이다.
셋째 유형은 일신상의 안전을 위해 귀은한 정치권 인사이고,
넷째 유형은 흔히 종남첩경終南捷徑으로 불리 우는,
즉 은거를 자신의 출세의 발판으로 삼고자 귀은한 은사이다.
⁸) 이효천李曉茜, 서영흔徐永昕,〈전고중적중국고대은사문화典故中的中國古代隱士文化〉
PP12-13 語文學刊, 第11期 2005년
이중 당대 이전까지는 첫 번째에서 세 번째까지의 유형이 주류를 이루었고
네 번째 유형은 당대 이후 그 숫자가 크게 증가한다.
위 4개 유형 중 도연명은 전형적인 두 번째 유형의 은사이다.
〈归园田居〉〈飮酒〉〈桃花源记〉〈五柳先生传〉등의 作品은 그의 대표 작품이지만 귀은의 정서 등이 잘 표출되어 있어 隱逸문학의 대표작이라고도 불리 운다. 이들 작품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한 연구가 이루어져 본고에서는 더 이상의 중복을 피하고자 한다. 다만 본고에서는 논지의 취지에 맞추어 주로 한산자 귀은의 원인과 과정, 그리고 결과를 중심으로 살피보고, 이를 도연명과 비교하는데 주안점을 두고자 한다.
2) 唐代 隱逸문화와 寒山子의 歸隱
唐朝에 들어와 隱逸문화는 크게 변하기 시작한다.
특히 唐朝가 隱士를 존중함에 따라 사대부 사이에서는 은사로 처신하며 출사 기회를 노리는 은사들이 증가한다.
이러한 唐代 은사풍토의 大變은 기본적으로 과거제도의 시행과 깊은 관련이 있다. 과거제도가 사대부들에게 출세의 관문이 되면서, 전국의 수많은 인재들이 과거를 준비하기위해 조용한 곳을 찾게 되었다. 이에 따라 많은 사대부들이 은거하게 되면서 그 수가 크게 증가한다. 게다가 과거에서 낙방한 인사들이 돌아가지 않고 은사로 남음으로서 더욱 그 수가 증가하였다. 이들을 분류해보면,
첫째는 출사를 위해 일찍부터 은거하며 과거를 준비한 은사,
둘째는 출사를 미루면서 은일한 은사,
셋째는 과거실패 또는 파직 등으로 은거한 은사 등 3개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⁹).
⁹) 오재경吳在慶〈담당대은사적은일동기여귀은지로談唐代隱士的隱逸動機與歸隱之路〉
주구사범대학학보周口師範大學學報, 第21卷 第4期 PP27-33.
엄밀한 의미에서 이들은 대부분 출사의 뜻이 있어 순수한 의미의 은사는 아니다.
한산자는 이들에 대해 文武를 배웠지만 文으로도 상을 받지 못하고 武로도 훈장을 받지 못한 자 들이라고 묘사하기도 하였다¹⁰).
¹⁰)
“일위서검객一爲書劍客, 이우성명군二遇聖明君. 동수문불상東守文不賞, 서정무불훈西征武不勳”
<新唐書>와 <舊唐書>에는 29명의 은사를 기록하고 있는데, 그중 10명은 끝내 출사하지 않았다고 기록하였지만, 長安에 은거하며 봉록을 받은 손사막孫思邈이나 과거에 실패하여 은사가 된 2명을 제외하면 출사와 무관한 순수한 은사는 7명에 불과하였다. 나머지는 陶淵明처럼 대부분 출사와 은거를 반복하였다. 따라서 唐代 은사들에게는 왕왕 終南捷徑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칭호가 붙기도 하였다.
당시 은사들에게 隱과 仕를 결정하는 중요한 변수는 대체로 생계문제였고, 唐代 隱士의 순수성 쇠미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상당수의 은사들은 풍족한 생활을 경계하고 청빈한 생활을 유지하였으며, 사상적으로는 儒彿道 三敎가 함께 유행하던 唐代 학술환경에 따라 대부분의 은사들도 儒彿道를 넘나드는 폭넓은 사상적 행보를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한산자는 어느 유형에 속할까?
한산자는 귀은 전까지 長安에서 과거를 준비하였다.¹¹)
¹¹) 한산자의 관적貫籍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장백위張伯偉은《한산시여선종寒山詩與禪宗》에서, 이진걸李振杰은《寒山和他的詩》에서 함양설咸陽說을, 그리고 전학렬錢學烈은《寒山詩校注》에서 長安說을 주장하고 있는데, 정황으로 보아 장안설이 근거가 있다고 본다.
그러다가 계속된 과거 실패로 인해, 나이 30여세 때 가족들과 함께 浙江省의 天台山 기슭에 귀은한다.¹²)
¹²) 唐 至德一年(756) 安史의 난의 혼란을 피하여 많은 中原人士들이 南下하여 “移民潮”를 이루었는데 이때 한산자도 南遷移民중의 한사람으로 天台山으로 옮겨오게 되었다.
라시진羅時進〈한산적신분여통속시서술각색전환寒山的身分與通俗詩敍述角色轉換〉《江海學刊,》2005. 2
하지만 한 차례도 출사하지 못한 탓에 귀은 후에도 한동안 출사에 대한 미련으로 출사의 기회를 엿보곤 한다. 그러다가 모든 것을 포기하기에 이르고 가족과도 이별한 채 산 속으로 들어간다.
이처럼 한산자의 귀은은 두 단계에 걸쳐서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한산자의 귀은도 두 단계로 나누어 인식해야할 것이다. 한산시에는 처음 귀은했던 천태산 자락의 집을 70년 만에 방문했다는 시¹³)가 있는데, 이를 통해 그의 귀은 기간이 대개 70년 정도임을 알 수 있다.
¹³)
“석일경행처昔日經行處, 금복칠십년今復七十年. 고인무왕래故人無往來, 매재고총간埋在古冢間”.
그렇다면 70년간의 귀은 생활도 크게 1차 귀은과 2차 귀은의 두 단계로 나누어 살펴야 할 것이다.
1차 귀은이 과거 실패 이후 황당한 상황에서 생계를 위해 가족과 함께 농사짓던 시기라면, 2차 귀은은 가족은 물론 세상과 완전히 결별하고 산중에 들어가 儒彿道를 넘나들며 역은역승亦隱亦僧, 또는 신선처럼 자유자재의 경지에 도달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¹⁴
¹4) 한산자 말년의 정신세계에 대해서는 拙文 <寒山子의 精神世界>
<인문논총>11-1집 1997. 11. 배재대 인문과학연구소를 참고 바람.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면 한산자의 1차 귀은은 隱士의 순수성이 쇠미했던 당대 隱士문화가 반영된 시기였고 2차 귀은은 儒彿道를 넘나들며 隱士의 순수성을 회복하여 진정한 자유를 구가한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한산시 대부분은 2차 귀은 이후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2차 귀은 이후 자유자재의 은사생활을 영위한 한산자에 대한 존숭尊崇이 性理學을 추구했던 宋代에 들어와 평가되기 시작한다. 따라서 황산곡의 한산자 평가 또한 이러한 송대의 문화 환경과 깊은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3. 天性과 失意-陶淵明과 寒山子의 歸隱 過程 비교
1) 出仕와 歸隱
도연명과 한산자는 둘 다 어려서부터 經學을 공부하며¹⁵) 經世의 포부를 품었지만 모두 포부를 이루지 못한 채 귀은 하였다.
¹⁵) 음주飮酒 其16
“소년한인사少年罕人事, 유호재육경游好在六經”
한산시
“옹용미소년雍容美少年, 박람제경사博览诸经史. 진호왈선생尽号曰先生, 개칭위학사皆称为学士.”
이 점 만을 보면 두 사람의 생애는 유사하지만, 귀은까지의 과정은 사뭇 다름을 볼 수 있다.
중국사대부에게 관직진출은
첫째는 자신의 정치적 이상 실현의 기회를 갖는다는 의미이고,
둘째는 현실적인 생계문제를 해결한다는 의미가 있다.
기본적으로는 자신의 정치적 이상실현이 우선이라면, 생계는 부차적이었다.
도연명의 출사는 29세에 江州 祭酒, 34세에는 당시 重臣이던 환현桓玄의 막료, 40세에는 鎭軍參軍,
41세에는 建威參軍을 역임하고 그 후 팽택령彭澤令에 오른 것을 마지막으로 42세에 귀은 하였다.¹⁶)
¹⁶) 차주환<陶然明全集>서울대학교출판부 2002, PP320-329
그는 63년 생애 중 겨우 13년 동안 관직에 있었다. 이 짧은 기간에도 그는 네 번에 걸쳐 출사와 귀은을 반복한다. 길게 한 것이 2년 정도(桓玄幕下)이고, 가장 마지막 관직이었던 彭澤令은 불과 80여일 만에 그만두고 만다. 왜 이토록 도연명은 출사와 귀은을 반복 하였을까?
도연명이 살았던 東晋시대는 九品中正制로 인해 조장된 문벌정치가 만연하여 대체로 출신 가문에 의해 관직이 결정되는 시대였다. 따라서 아무리 우수한 인재라 하더라도 寒門출신은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어려웠다. 대부분의 사대부와 마찬가지로 도연명도 젊은 시절에는 濟世의 큰 뜻을 품고¹⁷) 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러한 포부는 기본적으로 관직진출을 통해 실현될 수 있었기에¹⁸) 수차에 걸쳐 계속 出仕를 시도한다.
¹⁷) 〈의고擬古〉第九 “소시장차려少時壯且厲,무검독행유抚剑独行游.(젊어서는 씩씩하고 굳세어, 검 어루만지며 홀로 여행하였노라)” 또한〈잡시杂诗〉其五 “맹지일사해猛志逸四海,건핵사원저骞翮思远翥.(맹렬한 뜻이 사해까지 이르고, 깃을 펴고 멀리 날아오를 생각을 하였도다.)”
¹⁸)
“진덕수업進德修業, 장이급시將以及時, 여피직계如彼稷契, 숙불원지熟不愿之”
〈독사술구장讀史述九章〉에서 보듯 적극적인 출세의 뜻을 가지고 있었다.
한산자도 은거이전에는 도연명과 비슷한 인생행로를 보이고 있다¹⁹).
그가 젊은 시절 浩然之氣를 기르며 학업에 몰두한 것도 물론 과거 시험을 통해 관직에 진출하기 위해서였다.
¹⁹) 문헌에서 흔히 “隱士”로 기록하고 있지만 그가 天台山 자락에 은거한 것은 30세 이후이다,
“출생삼십년出生三十年, 당유천만리當游千万里. 행강청초합行江青草合, 입새홍진기入塞红尘起.
련약공구선炼药空求仙, 독서겸영사读书兼咏史. 금일귀한산今日归寒山, 침류겸세이枕流兼洗耳.”
글씨와 글은 모자라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벼슬을 얻지 못했구나,
시험관에게 허리가 꺾였으니, 때를 씻어가며 흉터를 찾았구나.
필경 하늘의 운수이려니, 금년에 다시 시험 보리라.
장님이 새 눈을 쏘아도, 우연히 맞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²⁰)
²⁰)
“서판전비약书判全非弱, 혐신불득관嫌身不得官. 전조피요절铨曹被拗折, 세구멱창반洗垢觅疮瘢.
필야관천명必也关天命, 금동경시간今冬更试看. 맹인사작목盲儿射雀目, 우중역비난偶中亦非难..”
어떤 가난한 선비, 가끔 南院을 살피러 온다.
나이는 삼십 남짓, 일찍 네다섯 번 뽑혔다.²¹)
²¹)
“개시하조대個是何措大, 시래성남원时来省南院. 년가삼십여年可三十馀, 증경사오선曾经四五选.”
첫 시에서는 비록 과거에 낙방하였으나 굴하지 않는 젊은이의 패기 넘치는 자신감이 느껴진다. 다음에 다시 응시하면 된다는 여유만만한 태도를 통해 젊은 시절 한산자의 낙관적 인생태도가 보인다. 그런데 두 번째 시에서는 계속된 낙방으로 암울한 분위기가 역역하다. 이 시에서 보듯이 한산자는 삼십을 넘어서까지 계속 出仕를 시도하였던 것 같다.
이처럼 젊은 시절 도연명과 한산자가 비슷한 행보를 밟은 것은 당시 사회에서는 일반적 현상이어서 두 사람 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없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도연명은 출사에는 성공하였지만 출사와 귀은을 반복하고, 한산자는 끝내 출사에 실패했다는 점이다.
도연명은 29세부터 출사하지만 그가 맡은 관직은 ‘祭酒’나 ‘參軍’과 같은 말단 하위직에 불과하고, 문벌정치의 환경에서 도저히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킬 수 없었다.²²) 따라서 곧 사직하지만 생계 때문에 다시 출사하였다가 다시 귀은하는 등 출사와 귀은을 반복하다 13년 만에 완전히 귀은하고 만다. 그렇다면 생계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는데도 왜 끝내 귀은 하였을까?
²²) 윤석우《음주시에 나타난 중국시인의 정신세계》연세대 박사논문 2005 pp41-44에 당시의 시대상황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촘촘한 그물을 엮으니 물고기는 두려워하고, 커다란 그물을 만드니 새들이 놀라게 되었다.
저 통달한 사람이야 잘 깨달아, 이에 관직에서 달아나 농사일을 하게 되었다.²³)
²³)
“밀망재이어해密网栽而鱼骇,굉라제이조량宏罗制而鸟惊。
피달인지선각彼达人之善觉,내도록이귀경乃逃祿而归耕” 〈감사불우부感士不遇賦〉
이 시에서 보면 그는 자신을 물고기와 새에 비유하면서, 작은 관직이건 큰 관직이건 성격적으로 적응하지 못하는 자신을 표현한 것 같다. 그러면서 봉록 때문에 받아야하는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를 구가한다는 의지가 보인다. 또 ;
함께 옛날 공명을 쫓던 명사들, 강개한 마음으로 한 세상을 다투지만,
일단 백년을 마차치고 나서는, 서로 북망산에 돌아간다.
(···)
영화가 참으로 귀하다지만 역시 또다시 가련하고 가슴 아프구나.²⁴)
²⁴
“고시공명사古时功名士, 강개쟁차장慷慨争此场. 일단백세후一旦百岁后,
상여환북망相与还北邙, ……영화성족귀荣华诚足贵, 역복가령상亦复可怜伤.”〈雜詩〉其四
가지는 처음에는 무성해지려는데, 갑자기 산하가 바뀌어버렸다.
뿌리와 그루는 창해에 떠돌고, 봄누에는 먹을 것 없으니,
겨울옷은 누구에게 기대하나. 본래 고원에 심지 않았는데, 오늘 다시 무엇을 후회하리.²⁵)
²⁵)
“지조시욕무枝条始欲茂 홀치산하개忽值山河改. 가협자최절柯叶自摧折 근주부창해根株浮沧海.
춘잠기무식春蠶旣無食 한의욕수대寒衣欲誰待. 본불식고원本不植高原, 금일복하회今日复何悔.”
/〈雜詩〉其九
위 시에서도 도연명은 근본적으로 관직에 대한 욕심이나 미련이 별로 없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다투어가며 공명을 쫓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에 대해 강한 회의를 보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아래 시에서는 당장의 생계에 대한 구체적 계획도 없이 관직을 버렸음에도 전혀 후회 없음을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도연명은 관직에 대해 관심과 기대는 있었지만, 천성적으로 정치적 충돌을 기피하는 소극적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문벌사회에서 자신의 역할이 매우 제한되어 있어, 그 상황에서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타인과의 정치적 충돌이 불가피함을 깨닫게 되고, 결국 포기하는 것 같다. 따라서 일찍이 관직에 대해 회의하다 결국 五斗米 봉록의 구속으로부터도 벗어날 결심을 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때 그는 나이 42세로 이미 대 가정의 가장이었다.
도연명도 이러한 자신의 천성에 대해 시인하고 있다. 시에서 그는
“본래 마음은 전원을 좋아 했노라, 인간 속세는 진실로 물러나야 하겠노라.
(정념원림호靜念園林好, 인간량가사人間良可辭)”
라며 퇴은退隱이 자신의 타고난 성격 때문임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본래 자연을 좋아하고 구속을 싫어하여 관직에 나가서도 계속 물러날 것을 생각하였던 것 같다.²⁶) 심지어 부임하는 도중에 귀은을 생각하는 시를 짓는 것²⁷)도 이러한 연유라 하겠다.
²⁶)〈경자세오월중종도환조풍어규림이수庚子歲五月中從都還阻風於規林二首〉其二
²⁷)
“진상초재금眞想初在襟, 수위형적구誰謂形迹拘. 료차빙화천聊且憑化遷, 종반반생려終反班生廬.
(처음부터 참되게 살고픈 마음은 마음에 있었으니, 누가 외형에 구속되리라고 이르겠는가. 잠시 변하는 시운을 따라 돌지만, 결국은 반선생집 같은 내집으로 돌아가리라.)”/〈시작진작군참군경곡아始作鎭作軍參軍經曲阿〉
이러한 천성이 드러나는 시는 여러 시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는 당시 유행하던 老莊사상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세속에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인데다, 산을 좋아하여²⁸), 세상에서의 出仕를 “진망塵網” 혹은 “번롱樊籠”으로 비유한 반면〈歸去來兮辭序〉에서는 자신의 귀은을 “質性自然”²⁹)이라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도연명의 귀은 생활은 물고기가 물에 돌아온 듯 활기차고 생기가 났다.³⁰)
²⁸) “소무적속운少無適俗韻, 성본애구산性本愛邱山”〈歸園田居〉其一
²⁹) 급소일及少日, 권연유귀여지정眷然有歸與之情. 하칙何則? 질성자연質性自然..“
벼슬한지 며칠이 안 되어 즉시 집으로 돌아가야 하겠다는 생각이 간절하였다. 왜 그럴까? 본성과 성품이 무위자연을 닮게 태어났기 때문이다.”
³⁰)
“기조연구림羈鳥戀舊林, 지어사고연池魚思故淵. 개황남야제開荒南野際, 수졸귀원전守拙歸園田.”
/〈歸園田居〉其一
이에 비해 한산자는 젊은 시절부터 자신의 이상실현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계속된 과거의 낙방으로 꿈 한번 펴보지 못한 채 세상을 등지게 된다. 당시 그는 겨우 30살을 갓 넘긴 청년으로 꿈을 접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였다. 당시 그도 이미 가정이 있어 가장으로서 과거에만 매달릴 수 없는 처지였고, 농사라도 지어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이 과정에서 1차 귀은이 이루어지는데, 이는 부득이한 고육책이었다. 따라서 도연명과 비교할 때 도연명은 출사 13년 동안 귀은을 준비한 셈이라면, 한산자는 본래 성격도 낙관적이었고 과거급제를 자신하였기 때문에, 낙방에 대한 대비가 전혀 없었다. 따라서 매우 당혹스런 상태에서 아무도 찾을 수 없는 머나먼 천태산 기슭으로 귀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크게 보면 아예 출사를 못한 한산자나 출사했지만 출사와 귀은을 반복한 도연명이나 출사에 관한한 사실상 똑 같이 실패했다. 차이가 있다면 출사욕구가 강한 한산자는 출사하지 못한 반면, 출사욕구가 크지 않았던 도연명은 오히려 출사하였다는 점이다. 즉 도연명은 29세에 처음으로 江州의 祭酒로 잠시 임명되었다가 사직하고 다시 州에서 주부主簿로 불렀음에도 나가지 않았지만, 한산자는 30세까지 줄곧 出仕하려고 애썼다. 따라서 도연명이 현실사회에서의 적응력 부족으로 자신의 이상실현을 포기한 것이라면, 30여세의 젊은 한산자는 강한 욕구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상실현의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강렬했던 욕구를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그 결과 도연명은 귀은 이후 전원생활에 자연스럽게 적응하였지만, 한산자는 적응이 쉽지 않았을 것임은 불문가지이다.
2) 가난과 귀은
도연명은 8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쇠락하는 집안의 가장이 되었다, 따라서 그에게 주어진 경제적인 부담은 심각하였던 것 같다.³¹) 〈歸去來兮辭〉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³¹)
“약관봉세조弱冠逢世阻” 〈원시초조시방부곽치중怨詩楚調示龐簿郭治中〉“약년봉가핍弱年逢家乏”
/〈有會而作〉
“우리 집은 가난해 밭을 갈아도 자급할 수가 없다. 어린애들은 집에 가득한데 항아리에는 저장해둔 곡식이 없다. 생육하고 생활할 밑천을 마련할 방도를 알지 못하였다. 친구들이 내게 관리가 되라고 여러번 권하여....마침내는 작은 마을에 기용되게 하였다”³²)
³²)
“여가빈余家貧, 경식부족이자급耕植不足以自給. 유치영실幼稚盈室, 병무저속甁無儲粟,
생생소자生生所資, 미견기술未見其術. 친고다권여위장리親故多勸余爲長吏 ···
수견용우소읍遂見用于小邑.”
위의 글에서 그는 출사가 주로 가족의 생계 때문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첫 出仕에 대해서도 “오랜 굶주림의 괴로움(苦長飢)”으로 인해 부득이 “벼슬로 나아갔다.(去學仕)“³³) 고 진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출사는 생계문제의 해결이 1차적이었고, 자신의 정치적 이상의 실현은 부차적이었던 것 같다. 도연명이 出仕와 귀은을 반복한 근본 원인도 “家貧”에 있었다.
³³) “주석고장기疇昔苦長飢, 투뢰거학사投耒去學仕. 장양불득절將養不得節,
동뇌고전기凍餒固纏己 시시향입년是時向立年 ···”/〈飮酒〉其十九
그가 환현桓玄의 막하에 있다가 고향에 돌아와 지은 시에서
“공자의 남겨 준 가르침이 있으니, 도를 걱정하고 가난은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다”³⁴
라고 읊고 있다. 즉 歸隱 이후에도 그에게 중요한 話頭는 가난이었던 것 같다.
³⁴ “선사유유훈先師有遺訓, 우도부우빈憂道不憂貧 ···”
〈계묘세시춘회고전사癸卯歲始春懷古田舍〉其二.
35세 때에는 유뇌지劉牢之의 參軍으로 들어가 절강성 일대에서 반란을 일으킨 孫恩을 토벌하기위해 종군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지은 시에서,
“예전에 일찍이 먼 곳에 노닐어 곧바로 동해가에 이르렀다 ···
이 행로 누가 그리 시켰는가, 굶주림이 내몬 것 같구나”³⁵)
라고 읊고 있는 것 등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³⁵) “재석증원유在昔曾遠遊, 직지동해우直至東海隅 ···
차행수사연此行誰使然, 사위기소구似爲飢所驅 ···”〈飮酒〉其十
또한 그의 문집 마지막에 수록된〈自祭文〉은 그가 63세 세상을 뜨기 2개월 전에 지은 것인데, 시를 보면 다음과 같다.
나 사람으로 태어난 후 가난한 운명을 만나,
일단사 일표음으로 쌀독 자주 비었으며 한 겨울에도 거칠고 가는 베옷 입었다.
기쁨으로 골짜기 물을 긷고 땔감을 지고 가며 노래를 부르고,
어스름 사립문 안에서 아침부터 밤까지 일을 하였다.³⁶)
³⁶) “자여위인自余爲人, 봉운지빈逢運之貧. 단표누경簞瓢屢罄, 치격동진絺綌冬陳.
함환곡급含歡谷汲, 행가부신行歌負薪. 예예시문翳翳柴門, 사아소신事我宵晨”.
위에서 보듯이 도연명은 가난을 물려받아 어린 시절부터 굶주림과 추위에 떨며 지냈다. 그럼에도 그는 가난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그 운명에 순응하고자 노력하면서 결코 세상에 대해 원망하거나 격분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출사가 정치적 목적보다는 경제적 이유 때문이었다면 이는 도연명이 당시 일반적 사대부들과는 상당히 다른 의식의 소유자였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가난만 아니라면 굳이 출사하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위에서도 보듯이 도연명은 본래 자연 속에서 안빈낙도하는 성품의 소유자였다. 따라서 도연명은 가난 때문에 출사하고 천성 때문에 귀은한 셈이다. 이에 반해 한산자는 도연명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면모를 보인다.
한산자는 도연명에 비해 유식하고 부유한 가정환경에서 태어났다.
(“부모독경다父母讀經多, 전원불선타田園不羨他”)
어린 시절부터 출사를 목적으로 학업과 체력을 연마하여 문무를 고루 갖추었으며
(“소년학서검少年學書劍”, “학문겸학무學文兼學武”),
“남아대장부男兒大丈夫, 일도양단재一刀兩斷裁(사내 대장부라면 한 칼로 두 동강을 내리라)”
에도 잘 드러나듯 강한 의지와 결단력을 갖추고 자신감이 넘쳤다. 따라서 한산자에게 출사는 어릴 때부터 자신의 정치적 이상 실현을 위한 수단이었고, 사실상 유일한 인생 목표였다. 따라서 수차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출사 의지를 쉽게 접을 수 없었다. 또한 이상실현에 대한 강한 의지는 한산자로 하여금 사회에 대한 지속적 관심으로 이어졌고, 이는 귀은 이후 사회를 향한 많은 시를 쓰게 하여 현존의 600여수를 남겼다. 특히 1차 귀은에서는 출사의 미련으로 天台山에 은거하면서도, 자주 관원官園을 들락거리기까지 하였다. 이는 시종 사회진출에 소극적이었던 도연명과 비교할 때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원래 한산자의 출사 의지는 가난과 깊은 상관이 없었다. 그러다가 낙방 이후 끼니조차 잇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자 당장의 생계문제 해결을 위해 출사해야 하였다. 따라서 한산자의 가난에 대한 태도는 安貧樂道하는 도연명과 사뭇 다르다. 관직에 오른 적이 없는 그가 겪은 가난은 도연명보다 훨씬 더 심각하였다. 한산자가 가난에 대해 읊은 시는 여러 곳에 보인다.
주머니 속에는 돈 한푼 없고, 상자 속에는 시만 가득하다.
가다가 식당 앞을 지나면, 감히 잠시도 얼굴을 돌리지 못한다.³⁷)
³⁷)
“낭리무청부囊里无青蚨, 협중유황견箧中有黄绢. 행도식점전行到食店前, 불감잠회면不敢暂回面”
동전 한닢 없어 끼니조차 해결 못하는 처량한 지식인의 모습이다. 벼슬 외에는 아무런 삶의 방책이 없었던 한산자의 극한 상황이 그대로 느껴진다.
여기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사람 있는데, 타고나기를 고기와는 인연이 없다.
언제나 사당 축대 밑에 있다가는, 가끔 길모퉁이에 나와 울부짖는다.
여러 날 부질없이 밥을 생각하고, 겨울에도 속옷을 모른다.
오직 한 묶음 풀을 가졌고, 다섯 되의 밀가루를 가졌다.³⁸)
³⁸)
“대유기한객大有饥寒客, 생장수어수生将兽鱼殊. 장존마석하长存磨石下, 시곡로변우时哭路边隅.
루일공사반累日空思饭, 경동불식유经冬不识襦. 유재일속초唯赍一束草, 병대오승부并带五升麸.”
이 시에서 겨우 내내 속옷도 없이 사당 돌기둥 밑에 살면서 때때로 길모퉁이에 나와 배고파 울부짖고 추운겨울에도 이불 없이 볏짚으로 잠을 자는 처참한 “饥寒客”으로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한산자도 도연명처럼 자신의 가난을 운명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렇지만 도연명이 “쌀독 자주 비어도 늘 편안하였다(루공상안여屢空常晏如)”³⁹)와 같이 가난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태도이지만, 한산자는 “여러 날 부질없이 밥을 생각”하며 가난에 대해 줄곧 전전긍긍하며 몸부림쳤다. 그러면서 자신에게는 수레바퀴 자욱 속에 들어있는 물고기를 살려줄 한 말(斗)의 물이 필요하다고 절절히 외쳤다.4⁰) 한 때 경세의 꿈을 품으며 남부럽지 않게 생활하였던4¹) 그에게 빈곤은 너무 큰 고통이었던 것 같다. 그는 차츰 집안의 천덕꾸러기가 되어 급기야는 아내로부터도 버림받고 결국 자신을 둘러싼 현실로부터 떠나게 된다.
³⁹)〈시작진작군참군경곡아始作鎭作軍參軍經曲阿〉
40)
“소소대경서少小带经锄, 본장형공거本将兄共居. 연조타배책缘遭他辈责, 잉피자처소剩被自妻疏.
포절홍진경抛绝红尘境, 상유호열서常游好阅书. 수능차두수谁能借斗水, 활취철중어活取辙中鱼.”
41)
“부모속경다父母续经多, 전원불이타田园不羡他. 부요궤알알妇摇机轧轧, 인롱구과과儿弄口過過.
박수최화무拍手摧花舞, 지신은조가支颐听鸟歌. 수당래탄상谁当来叹赏, 초객루경과樵客屡经过.”
젊어서는 부모에게 재산을 물려받아 부지런한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남부럽지 않게 즐겁게 전원생활을 하는 모습이다. 아마도 한산에 들어오기 훨씬 전 농촌에 살았을 때의 모습인 듯하다.
이상과 같이 한산자를 2차 귀은으로 내몬 것은 경제적 궁핍이다. 도연명의 귀은이 자의적이라면 한산자의 모든 귀은은 궁여지책의 수동적 선택이었다. 궁핍한 생활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두 사람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것도 이러한 까닭이라 할 수 있다.
도연명이 21세쯤에 지은〈乞食〉을 보면
“굶주림이 나를 몰아내지만 어디로 갈지 모르겠구나.
가다가 마을에 이르러 문 두드리고 어눌하게 말문을 연다. ···
날 저물도록 담소하며 잔 권하면 문득 마셔 버린다 ···”4²)
에서 볼 수 있듯이 도연명은 걸식하면서도 시를 주고받으며 술까지 마시는 여유와 자연스런 성격을 볼 수 있다. 반면 한산자는 남들로부터 “미치광이(전광한颠狂汉)”취급을 받았고4³) “일이 있으면 맞대놓고 말하기에, 항상 남의 원한을 산다”는 직설적인 강한 언행과 타협할 줄 모르는 성격으로 도연명과는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다. 또한 가난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면서 도연명은 끝내 남을 원망하지 않지만, 한산자는 부자들에 대해 비판과 냉소를 보내는가하면 원망과 격분을 숨기지 않았다.
4²)
“기래구아거饑來驅我去, 불지경하지不知竟何之. 행행지사리行行至斯里, 고문졸언사叩門拙言辭 ···
담해종일석談海終日夕, 상지첩경배觴至輒傾杯.“
4³)
“한산출차어寒山出此语, 복사전광한复似颠狂汉. 유사대면설有事对面说, 소이족인원所以足人怨.”
부자들 일에 정신없이 허덕이며, 일마다 승낙하려 하지 않는다.
창고의 쌀은 붉게 썩어 가도, 남에게 한 되도 꾸어주지 않는다.
게다가 갈고리 마음 가져, 비단을 사도 먼저 문체비단 가린다.
임종하는 날, 조상객은 파리만 있으리라.44)
44)
“부인다앙장富儿多鞅掌, 촉사난조승触事难碉承. 창미이혁적仓米已赫赤, 부대인두승不贷人斗升.
전부구거의转怀钩距意, 매견선간릉买绢先拣绫. 약지림종일若至临终日, 적객유창승吊客有苍蝇.”
부자들 高堂에 모였는데, 화려한 등이 휘황찬란하다.
이때 등불 없는 사람, 그 곁에 머무르기 원했다.
뜻하지 않게 배척을 받아, 다시 어두운 곳으로 감추어진다.
남을 비춘다고 빛에 무슨 손해인가, 이상해라, 남은 빛 아끼는 것.4⁵)
4⁵)
“부인회고당富儿会高堂, 화정하炜황华灯何炜煌. 차시무촉자此时无烛者, 심원처기방心愿处其傍.
불의조배견不意遭排遣, 환귀암처장还归暗处藏. 익인명거손益人明讵损, 돈아석여광顿讶惜馀光.”
두 편의 시 모두 인간의 욕심에 대해 훈계하는 내용이지만, 동시에 부자들의 옹졸함과 무정함에 대해 비난하고 야유하는 내용이다.
이상과 같이 가난은 도연명이나 한산자 모두에게 큰 고통이었다. 그리고 도연명에게 가난은 출사의 동기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가난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음에도 귀은 하고 만다. 따라서 도연명의 귀은은 가난보다는 오히려 그의 천성과 관련이 있다. 반면 한산자에게 가난은 출사 동기가 아니었다. 그러나 출사 실패로 인해 발생된 가난은 그를 감당할 수 없도록 했고, 마침내 1차 귀은에 이른다. 그러나 1차 귀은의 전원생활 적응에 실패하고, 더욱 극심해진 가난에 직면하면서 마침내 자신의 모든 것을 훌훌 털고 2차 귀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4. 安息과 彷徨-陶淵明과 寒山子의 歸隱 後 비교
한산자는 과거 실패이후 심각한 빈곤 상황에 직면하자 가족들을 데리고 고향인 陝西省 咸陽4⁶)을 떠나 머나먼 행로 끝에 浙江省의 天台山 자락에 은거한다.4⁷) 그때 그의 나이 삼십세 가량으로, 이것이 한산자의 1차 귀은이다. 그가 1차 귀은 때 살던 곳은 “촌향村乡”, “田家”로 표현된 농촌 마을이었다. 당시 그는 이름도 성도 숨기고 있는데 이는 그가 과거실패로 인한 정신적 충격이 얼마나 컸는가를 보여준다.4⁸)
4⁶) 라시진羅時進, 《당시연진론唐詩演進論》 PP115-116 江蘇. 古籍出版社 2001
4⁷)
"복택유거지卜择幽居地, 천태경막언天台更莫言. 원제사무랭猿啼厍雾冷. 악색초문련岳色草门连.
절협복송실折叶覆松室, 개지인간천开池引涧泉. 이감휴만사已甘休万事, 채궐도잔년采蕨度残年."
4⁸)
"아주재촌향我住在村乡, 무야역무낭無爷亦無娘. 무명무성제無名無姓第, 인환작장왕人唤作张王.
병무인교아并無人教我, 빈천야심상贫贱也寻常. 자령심적실自怜心的实, 견고등금강坚固等金刚."
한산자는 귀은 후 어떻게 지냈을까? 도연명처럼 농사를 지으며 편안하게 지냈을까?
도연명은 귀은 이후
“네모진 택지는 십여 무, 초가집은 팔구 간.
(방택십여묘方宅十餘苗, 초옥팔구간草屋八九間.)”,
“뜰 안에는 티끌 먼지 없으며, 텅 빈 방은 한가롭다."
“방택십여묘方宅十餘苗, 초옥팔구간草屋八九間.”,
“호정무진잡戶庭無塵雜, 허실유여한虛室有餘閒”4⁹)
에서 보듯이 속세를 벗어난 자유로움과 한가로움이 베어난다. 심지어 가족에게 유난히 자상했지만 자식들이 글공부에 게을리 해도 운명에 맡기자는 무위자연의 유유자적한 태도를 보인다.⁵⁰)
4⁹) 〈歸園田居〉其一
⁵⁰)〈責子〉
반면 한산자는 은거 중에도
“말이 없으면 뒷사람들이 어떻게 진리를 펴겠느냐.
숲속에 숨어 살기만 하면 지혜의 경지는 어디서 생기겠는가.
(묵묵영무언默默永无言,후생하소술后生何所述。은거재림수隐居在林薮,지일하유출智日何由出.)”라며
“한가한 때 즐거이 시를 짓고, 끙끙거리며 心力을 다해 글을 썼다.
(한거호작시闲居好作诗,찰찰용심력札札用心力)”라고 하여 후세 사람을 위해 심력을 기울이는 현실 지향적 정치지향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차이의 발생은 벼슬에 대한 집착과 관련이 있을 것 같다. 한산자는 시종 벼슬을 구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주작가朱雀街”를 쫓아다니지만(“랑행주작가浪行朱雀街”), 도연명은 기회가 되면 한다는 정도였다(”시래구명회時來苟冥會“). 도연명에게 귀은은 자발적 선택이었다. 한산자도 표면적으로는 도연명의 歸去來兮를 표방하지만, 벼슬 실패 후 절망감과 격분에 휩싸인 채 자신의 실패를 회재불우懷才不遇로 규정하고 억울함을 토로하면서 천태산으로 입산하였던 것이다.
하늘이 백척 되는 나무를 내어, 다듬어서 긴 제목을 만들었다.
애석하게도 棟梁의 제목이, 깊은 골짜기에 버려져 있구나.
해는 오래 되었어도 심지는 오히려 굳센데, 오래되어 껍질이 차츰 벗겨지는구나.
알아주는 이 있어 가져다 쓰면, 아직도 마굿간 기둥은 될 만하다.⁵¹)
⁵¹)
“천생백척수天生百尺树, 전작장조목剪作长条木. 가석동량재可惜栋梁材, 포지재유곡抛之在幽谷.
년다심상경年多心尚劲, 일구피점독日久皮渐秃. 식자취장래识者取将来, 犹감주마옥犹堪柱马屋.“
위의 시는 출사에 실패하고 한산에서 나무를 베고 다듬으며 살아가는 한적한 농촌생활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의 재능에 대한 확신과 함께 뜻을 못 이룬 억울한 심정을 표출하면서 출사에 대한 강한 욕구와 집념이 여전함을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귀은의 한가로움을 만끽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데;
초가집에 시골사람 사는데, 문 앞에는 車馬의 시끄러움이 없다.
깊은 숲속엔 한갓 새들 모이고, 넓은 시내엔 물고기 있다.
산과실은 아이 데리고 따고, 언덕 밭은 아내와 함께 맨다.
집안에는 무엇이 있는가, 오직 한 책상과 책이 있을 뿐이다.⁵²)
⁵²)
"모동야인거茅栋野人居, 문전차마소门前车马疏. 림유편취조林幽偏聚鸟, 계활본장어溪阔本藏鱼.
산과휴인적山果携儿摘, 고전공부서皋田共妇锄. 가중하소유家中何所有, 유유일상서唯有一床书"
위의 시에서 “문전차마소门前车马疏”는 마치 도연명의 飮酒(其五)에 보이는 “초가집을 엮어 사람 사는 곳에 살아도 수레나 말의 시끄러움이 없다네.(결려재인경結廬在人境, 이무거마훤而無車馬喧)”의 귀절이 연상된다. 한산자가 전원에서 농사를 지으며 아이와 과실을 따고 집안에 책상이 있는 모습은 도연명의 은거생활의 모습과 거의 비슷하며, 자연 속에서 즐거움을 느끼며 세상 근심과 단절된 분위기가 역역하게 느껴진다. 또한《장자》〈逍遙遊〉의 “뱁새가 깊은 숲속에 집짓고 사는데 나뭇가지 하나면 된다
(초료소어심림鹪鹩巢於深林, 불과일지不過一枝)“는 문장을 원용하여 자신도 뱁새가 나뭇가지 하나에서도 편안한 것을 늘 생각한다(“상념초료조常念鹪鹩鸟,안신재일지安身在一枝”)며 安分自足의 뜻을 밝히고 있다.⁵³) 이점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현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상태에서 그는 과연 도연명과 같이 귀은을 즐겼을까?
⁵³)
"금서수자수琴书须自随 록위용하위禄位用何为 투련종현부投辇从贤妇 건차유효아巾车有孝兒
풍취폭맥지风吹曝麦地 수일옥어지水溢沃鱼池 상념초료조常念鹪鹩鸟 안신재일지安身在一枝"
한산자는 타고난 직선적인 성격과 언행 등으로 당시의 향민과 어울리지 못한다. 따라서 아무도 그를 믿지 않았고 자주 남의 원한을 사는 등 ”미치광이(颠狂汉)”⁵⁴의 취급을 받았다. 반면 도연명은 새가 둥지를 찾아 돌아오듯(〈歸鳥〉) 머물 곳을 찾아 田園으로 돌아온다. 그는 이웃과도 잘 어울렸고 농사를 지으며(“채국동리菜菊東籬, 종두남산種豆南山”) 즐거움을 찾았다.
⁵⁴
"아재촌중주我在村中住 중추무비방众推无比方 작일도성하昨日到城下
각피구형상却被狗形相 혹혐아태착或嫌哑太窄"
"한산출차어寒山出此语 차어무인신此语無人信"
"한산출차어寒山出此语, 복사전광한复似颠狂汉. 유사대면설有事对面说, 소이족인원所以足人怨"
〈경신세구월중우서산획조도庚辰歲九月中于西山獲早稻〉에서 “다만 오래도록 이 같기를 바라나니, 몸소 농사지음은 탄식할 것이 없노라.(단원장여차但願長如此, 궁경비소탄躬耕非所嘆)”라며 만족감을 표현하고 있다. 그렇지만 한산자의 시에서는 어디에도 궁경躬耕의 즐거움을 읊은 시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귀은 하자마자 현실에 대한 미련으로 방황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그의 1차 귀은은 짧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스스로 풀리지 않는 마음의 자유를 찾아 다시 산으로 들어가게 된다.
깊은 숲속에 쉬노라면, 태어날 때부터 농부이다.
처세에 이미 질박하고 정직 하며, 말을 함에는 아첨이 없었다.
내 몸을 지켜 재물 멀리 했고, 보화를 얻는 것은 그대에게 맡겨 둔다.
어떻게 함께 떠돌며, 물결위의 오리를 끝까지 바라볼 것인가.⁵⁵)
⁵⁵)
"언식심림하偃息深林下, 종생시농부从生是农夫. 립신기질직立身既质直, 출어무첨유出语无谄谀.
보아불감벽保我不鉴璧, 신군방득주信君方得珠. 언능동범滟焉能同泛滟, 겁목파상부极目波上凫."
위의 시에서 한산자는 자연에 사는 자신의 인생을 천생 농부가 농사짓는 것과 같은 차원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나 어디에도 전원생활의 즐거움이나 자연의 평화로움을 만끽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농부를 세상의 영화와 상대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는 여전히 그가 세상의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상과 같이 한산자는 도연명의 곧고 바른 처세나 언행을 자주 연상하고, 자신의 귀은을 도연명과 연결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마음속까지 귀은을 받아들이지는 못한 것 같다. 이는 한산자의 은거가 자의적 선택이 아니라 현실도피였고 출사실패에 따른 정신적 방황상태에서 이루어진 피치 못할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한산자가 농촌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던 또 다른 까닭은 도연명이 “천성적으로 質朴하고 자연스러운(質性自然)”것과는 달리 한산자는 “처신이 질박하고 곧기(”립신기질직立身既质直“) 때문이었다.
특히 직선적인 언행과 다혈질적 성격으로 향민들과 부딪치기 일쑤였다. 따라서 전원에서 즐거움과 안식을 누리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하였다. 마음으로부터는 도연명을 따르고 싶었지만 실제로는 따를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鄕民은 물론 가족과의 소통마저 단절되었고, 피폐된 상태에서 다시 寒山에 入山하면서 2차 귀은을 시작한다. 도연명은 한번의 귀은에서 바로 자연 속에서의 즐거움과 자유를 누리지만, 한산자가 정신적 안식과 자유를 얻은 것은 사실상 2차 귀은 이후 출사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린 후였다. 이 과정에서 깊은 종교적 체험을 하게 되는데, 이 또한 도연명과는 완전히 다른 양상이다.
한산자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안식과 자유를 얻고자 세상으로부터 격리된(“한산서은처寒山栖隐处,절득잡인과绝得杂人过.”) 산속으로 들어가(“은사둔인간隐士遁人间,다향산중면多向山中眠”) 2차 귀은에 들어간다. 2차 귀은에서 가족들과도 헤어져 홀로 십여년을 살면서(“십년귀부득十年归不得”) 당시 유행하던 도교에 沒入하고⁵⁶) 한동안 신선술을 추구하였다. 당시 그의 은거지는 3개의 형태, 즉 鄕村(“아주재촌향我住在村鄕)-岩下(”가주록암하家住绿岩下”)-重岩(“중암아복거重岩我卜居”)이었다.
이는 그의 귀은이 有家-離家-出家의 과정으로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⁵⁷) 또한 가족과 생활하던 鄕村을 떠나 入山하고, 홀로 도교 등 종교적 체험을 통해 초탈의 자유로운 경지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2차 귀은에서 그는 유불도를 넘나드는 사상적 자유로움을 통해 마침내 그가 바라던 자유를 찾게 된다.
⁵⁶)
“욕득안신처欲得安身处, 한산가장보寒山可长保. 미풍취유송微风吹幽松, 근은성유호近听声逾好.
하유반백인下有斑白人, 남남독황로喃喃读黄老. 십년귀부득十年归不得, 망각래시도忘却来时道.”
⁵⁷)라시진羅時進〈한산적신분여통속시서술각색전환寒山的身分與通俗詩敍述角色轉換〉
<江海學刊>2005. 2
오래 한산에 살아 몇 가을이 지났던가, 홀로 노래하며 시름 걱정 끊었다.
사립문은 닫지 않아 늘 한적하고, 단물 솟는 샘은 절로 흐른다.
돌집 마당 화로엔 진흙 솥 끓고, 송홧가루 측백나무 차 유황 담은 병.
배고파 가타약 한 알 먹으니, 마음은 어우러져 돌에 기댄다.⁵⁸)
⁵⁸)
"구주한산범궤추久住寒山凡几秋, 독음가곡절무우独吟歌曲绝无忧.
봉비불엄상유적蓬扉不掩常幽寂, 천용감장장자류泉涌甘浆长自流.
석실지로사정비石室地炉砂鼎沸, 송황백명유향구松黄柏茗乳香瓯.
기찬일립가타약饥餐一粒伽陀药, 심지조화의석두心地调和倚石头.“
한산자는 이미 몇 해 동안 한산의 石室에서 당시 유행하던 불노장생을 추구하며 가타약伽陀药이라는 丹藥을 먹으며 신선을 꿈꾸었다. 그러나 곧 불로장생을 갈구하다 실패했던 秦始皇과 漢武帝를 통해 神仙의 불가능⁵⁹)을 깨닫는다. 또한 한산시에는 寒山에 入山한지 삼십년 후 친구를 찾다가 다 죽고 없음을 보고 인생무상을 절감하는 시가 보인다.⁶⁰)
⁵⁹)
“상문한무제常闻汉武帝, 원급진시황爰及秦始皇. 구호신선술俱好神仙术, 연년경불장延年竟不长.
금태기최절金台既摧折, 사구수멸망沙丘遂灭亡. 무릉여려악茂陵与骊岳, 금일초망망今日草茫茫.”
⁶⁰)
“일향한산좌一向寒山坐, 엄류삼십년淹留三十年. 작래방친우昨来访亲友, 태반입황천太半入黄泉.
점감여잔촉渐减如残烛, 장류사서천长流似逝川. 금조대고영今朝对孤影, 불각루쌍현不觉泪双悬.”
전목선생錢穆先生은〈독한산자讀寒山子〉에서
“이때는 한산이 육순이 넘었고 함께 귀은 했던 처와 아이들과도 이미 헤어진 후였다”
라고 하였다. 따라서 도연명과 비교될 수 있는 가족과의 동거하면서 전원에 귀의하여 지냈던 과정은 그의 일차적 귀은 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기간은 별로 길지 않았던 것 같다.
당시 그는 산속에 홀로 살며 고독과 허무를 체감하였을 것이다. 佛敎로의 접근은 아마도 이러한 과정에서 이루어졌고, 오랫동안 佛理에 몰입하였던 것 같다. 한산시 중 불교 관련 시가 절반 이상 차지하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이처럼 그는 儒彿道를 넘나들며 차츰 자연 속에서 소요와 자족의 즐거움을 구가하게 된다. 따라서 현존하는 한산시 중 약 삼십여 수가 山水隱逸詩이다.
한산자가 은거하던 天台山은 여름에도 정상에는 잔설이 있어 雪巖이라고 불리우는 등 경관이 빼어나 예로부터 중국 동남의 명산으로 불리어 왔으며, 특히 智者大師가 이곳에 天台宗을 개창하여 이로부터 천태산은 佛敎의 중요한 도장이 되었다. 한산자는 인적이 드물고 외계와 단절된 寒巖(“한암심경호寒岩深更好,무인행차도无人行此道.”)에 은거하였는데, 이 또한 “사람 사는 곳에 초가집을 짓고(결려재인경結廬在人境)”살며 자유로움을 추구하였던 도연명과는 다른 양상이다. 다음의 시를 보자.
지저귀는 새 소리에 정을 못 이겨, 홀로 초암에 누워 듣고 있나니.
앵도는 알알이 붉게 빛나고, 버들은 줄줄이 드리워 있네.
아침 햇빛은 푸른 산을 머금고, 개는 구름은 맑은 못을 씻는다.
누가 저 티끌세상 벗어나, 이 한산 남쪽으로 올라올까.⁶¹)
⁶¹)
“조어정불감鸟语情不堪, 기시와초암其时卧草庵. 앵도홍삭삭樱桃红烁烁, 양류정毵毵杨柳正毵毵.
욱일함청장旭日衔青嶂, 청운세渌담晴云洗渌潭. 수지출진속谁知出尘俗, 어상한산남驭上寒山南.”
위의 시에서 한산자는 자연 속에 몰입된 자신을 자연 속의 一物로 파악하고 자연과의 일체감 속에서 유유자적하고 있다. 또한 세속을 초탈하여 자유롭고 담담한 심리상태를 보이고 있다.
푸른 시내에 샘물이 맑고, 한산에는 달빛이 희다.
말없이 앎에 정신이 절로 맑고, 空을 터득함에 境이 더욱 고요하다.⁶²)
⁶²)
“벽간천수청碧涧泉水清, 한산월화백寒山月华白. 묵지신자명默知神自明, 관공경유적观空境逾寂.”
위의 시는 언어로는 표현 할 수 없는 오묘한 정신세계를 함축적 혹은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벽간천수碧涧泉水“의 淸淨함과 ”한산월화寒山月华“의 純白을 교묘히 대비시켜 생생한 현장을 묘사하고 있는데, 한산자가 생각하는 인간의 深淵한 청정세계와 純白한 자신의 정신세계를 아름답게 대비시키고 있다. 여기서 청정과 純白한 우주에 대한 觀照는 그가 幽玄의 세계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주는데
”묵지신자명默知神自明“과 ”观空“은 그가 체득한 玄理를 표시하고 ”경유적境逾寂“은 玄理 체득을 통해 幽隱의 경지에 진입한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禪의 경지이다. 이는 禪을 통해 자신이 도달하고자 하는 이상세계, 즉 우주 자연과 일치하는 완전 自然人의 경지를 추구하였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생활은 말년까지 이어져, 한산자는 계속 거의 독립적 생활을 하였다. 國淸寺를 떠난지 이십년 후 다시 国清寺에 들렀을 때, 국청사 사람들이 그에 대해 어리석다거나 “분명히 알면서 그런다고 꾸짖지만”, “그들이 뭐라든 응대하지 않는 것이 편하다”⁶³)에서 보듯, 그는 전혀 남을 의식하지 않고 오로지 자유자재의 삶을 추구하였다. 백 살이 넘도록 구름 산을 지키며⁶4), 홀로 寒巖에서⁶⁵) 悠悠自適하며 은거하였던 것이다.
63)
“억득이십년忆得二十年, 서보국청귀徐步国清归. 국청사중인国清寺中人, 진도한산치尽道寒山痴.
치인하용의痴人何用疑, 의불해심사疑不解寻思. 아상자불식我尚自不识, 시이쟁득지是伊争得知.,
저두불용문低头不用问, 문득복하위问得复何为. 유인래매아有人来骂我, 분명료료지分明了了知.
수연불응대虽然不应对, 각시득편의却是得便宜.“
64)
“석일경행처昔日经行处,금복칠십년今复七十年。고인무래왕故人无来往,매재고총간埋在古冢间。
여금두이백余今头已白,유수편운산犹守片云山。위보후래자为报后来子,하부독고언何不读古言.”
(옛날부터 다니던 곳에 칠십 년이 지난 후에 다시 찾아 왔다. 이곳은 그가 삼십 세쯤 처음으로 천태산 자락에 들어와 은거하였던 곳이며 그 후 칠십년이 흘렀으므로 백살쯤으로 추정된다.)
65) 寒岩에서의 독립생활에 대해 한산시의 표현을 보면
“아독我獨居” “독정좌獨静坐” “독자거獨自居” “독와獨卧” “독회獨回” “독음獨吟”이다.
한산자와는 달리 도연명은 산속 아닌 마을에서 이웃과 어울려 살았다. 그는 아무리 농사를 지어도 굶주림을 면하기 힘들지만⁶⁶) 늘 “백성들 살아가자면 근면해야 하고, 부지런히 일하면 부족함이 없으리로다”⁶⁷)며 노동과 농사를 권면하였다. 그러면서도 욕심과 집착은 물론, 소유하는 모든 것의 得과 失을 잊고, 천지 만물과 一體를 이루는 삶에 도달하고 있다⁶⁸).
⁶⁶)〈雜詩〉“궁친미증체躬親未曾替, 한뇌상조강寒餒常糟糠”
(몸소 밭 갈기를 그만 둔적 없어도 춥고 굶주려 늘 술지게미와 겨나 먹는다오.)
⁶⁷)〈권농勸農〉“민생재근民生在勤, 근칙불궤勤則不匱.”
⁶⁸) “에오라지 조화를 따라 죽어 돌아가리니, 천명을 즐거워하거늘 다시 무얼 의심하리오.
(료승화이귀진聊乗化以歸盡, 악부천명부해의樂夫天命復奚疑〈歸去來兮辭〉)”
원행패袁行霈는《陶然明硏究》에서 回歸 양상의 특징을 田園, 自然, 空無의 셋으로 나누었는데⁶⁹) 만년을 空無로의 회귀라고 하였다. 〈歸園田居〉其四에 보면
”인생은 환상 같아서, 마침내 공허로 돌아가리라.
(인생사환화人生似幻化, 종당귀공무終當歸空無)“.
⁶⁹) 원행패袁行霈《陶淵明硏究》, p 112, 북경대학출판사. 1997.
또 〈형영신形影神〉신석神釋에 보면
천지는 사사롭게 힘쓰지 않으며, 만물은 절로 번성해 서 있다.
사람은 삼재 가운데 하나이니, 어찌 내가 있는 까닭이 아니랴.
(중략)
심히 걱정하면 우리 삶 상처 받으니, 마땅히 운명에 맡겨 살아가리.
큰 조화의 물결을 쫒으리니 기쁠 것도 두려울 것도 없다.
끝나야 한다면 끝나는 것이니, 다시 홀로 깊은 걱정 하지 말리라.⁷⁰)
⁷⁰)
“대균무사력大鈞無私力, 만물자삼저萬物自森著. 인위삼재중人爲三才中, 기불이아고豈不以我故 ···
심염상오생甚念傷伍生, 정의위운거正宜委運去. 종랑대화중縱浪大化中, 불희역불구不喜亦不懼.
응진사수진應盡使須盡, 무부독다려無復獨多慮”
위 시에서 자신이 있는 것도 천지 가운데 하나이니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기고 자연과 일체가 되면, 기쁨도 슬픔도 없을 것임을 주장한다. 즉 어차피 언젠가 생명은 끝나게 되어 있는데, 걱정한들 무슨 소용 있겠는가. 이는 莊子의 “天地와 내가 함께 살고, 만물과 내가 하나가 된다.”⁷¹)는 것과 상통한다.
⁷¹)<莊子 齊物論> “천지여아병생天地與我並生, 이만물여아위일而萬物與我爲一.”
이상과 같이 서로 완연히 다른 과정을 거치지만 도연명과 한산자의 귀은은 종국적으로는 동일하게 귀결하고 있다. 즉 도연명은 농촌에서 농민들과 함께 경작하며 物我一體의 자유세계에 도달하고, 한산자는 산속에서 獨居하며 종교적 체험을 통해 自由自在의 경계에 이르고 있다. 결론은 같으나 과정은 완전히 다른 셈이다.
5. 결 론
지금까지의 논의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한산자와 도연명의 귀은을 출사와 연관하여 논의하면, 천성적으로 출사에 소극적이었던 도연명은 출사에 성공한 반면, 출사에 자신의 모든 인생을 걸었던 한산자는 출사하지 못하였다. 귀은에 있어서도 도연명은 천성에 따른 자기 선택이었지만, 한산자는 과거 실패이후 심리적 공황과 극심한 궁핍으로 고향을 떠나 아무도 찾지 못할 먼 天台山 기슭에 귀은하였다. 따라서 두 사람 모두 자연에 귀은하지만, 도연명은 농촌의 전원에서 여유롭게 안식한 반면, 한산자는 외딴 산자락에서 인생의 회한을 맛본다. 이처럼 중년이후 두 사람의 운명은 근본적으로 다르게 出發하고 있다.
또한 문벌정치시대인 東晋의 陶淵明에게 출사는 생계의 방편에 불과하였지만, 唐代의 寒山子에게 출사는 자신의 정치적 이상실현을 위한 기본적 수단이었다. 한산자는 시종 “진칙사進則仕”라는 사회적 소명감과 사회계도자라는 지식인의 사명감을 포기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귀은 이후 도연명은 전원생활을 만끽하지만, 한산자는 방황의 연속이었다. 그는 쉽게 출사를 포기할 수 없었고, 목구멍을 죄는 가난과 무능한 가장에 대한 가족들의 냉소로 더욱 괴로웠다.
이 과정에서 농촌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한때 도연명을 연상하기도, 또 도연명을 따라도 해보지만 限은 풀리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도연명이 한산자에게 미친 영향은 분명히 매우 크다.
그 후 다시 산속 깊은 곳으로 귀은 하는데, 이것이 2차 귀은이다.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였기에 가족과 이웃으로부터 소외된 채 홀로 산 중에서 때론 신선술을 추구하며 도교에 몰입하는가 하면, 회한 뒤에 밀려오는 인생무상의 허무감에 불교에 몰입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신선도 승려도 되지 않았다. 그러면서 안식을 찾게 된다. 그로부터 자유자재의 날개를 달고, 천태산 암자 곳곳에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도연명이 수많은 전원시를 남기듯, 한산자도 산수시를 남기지만, 주로 社會啓導詩를 많이 남겼다. 이는 출사를 통해 이루려던 사회참여를 시를 통해 재현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두 사람 다 은일시인이라는 큰 틀에서는 도연명과 한산자를 亞流로서 논할 수 있겠으나, 그들의 구체적 삶의 역정을 보면 결코 동류라고 볼 수만은 없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산곡은 왜 그렇게 평했을까? 그것은 宋代의 문단환경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미 본문에서도 언급했듯이 亞流라는 개념은 폄하의 의미 보다는 은일시인의 원조인 도연명과 비견된다는 의미로 보인다. 흔히 한산자를 불가에서는 “詩僧”⁷²)이라 칭하는데, 실제로 2차 귀은 후 쓴 시는 불교적인 선취禪趣가 농후하다.
⁷²)《新唐書. 藝文志》에서는 석가류釋家類에 수록되었고《全唐詩》에는 唐代釋氏詩人에 귀속시켰다.
한산시는 宋初에 이르러 “집록集錄”으로 출간되면서, 佛敎的 禪趣가 濃厚하여 문단의 광범위한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 원인은 당시 많은 禪錄과 偈頌이 정리되면서 한산시도 함께 정리된 까닭도 있지만, 사상적으로 性理學의 영향으로 禪詩가 많은 한산시가 자연스럽게 관심을 끌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宋代의 詩風이 說理化, 議論化방향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한산시의 偈頌式의 說理風格이 이러한 조류와 일치하였던 것도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따라서 한산시는 많은 송대 시인들에 의해 애송되고, 당시 문학 창작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황산곡 외에도 소식蘇軾은 擬寒山十頌에 차운次韻하여 八首를 지었는가하면⁷³), 王安石은 <擬寒山拾得十二首>(《臨川文集》,卷三)를 지어 外孫에게 주었다⁷4). 즉 송대 문인들은 한산자의 說理的이며 스스로 “鄭玄의 주석도 번거롭게 할 것 없고, 모장毛萇의 해설도 필요없다.”⁷⁵) 면서 平易, 천근淺近한 언어와 백묘白描 반복反覆 對比등의 표현방법을 즐겨 쓰면서 口語化 通俗化에 주력하였던 것이다.
73)
“소주정혜장로수흠蘇州定慧長老守欽, 사기도탁계순래혜주문여안부使其徒卓契順來惠州問予安否,
차기의한산십송且寄擬寒山十頌, 어유찬인지통語有璨忍之通,
이시무도가지한而詩無島可之寒. 오심가지위화팔수吾甚嘉之為和八首”
<東坡全集>卷23〈차운정혜흠장로견기팔수次韻定慧欽長老見寄八首〉
74)
“··· 제손긍래유諸孫肯来游,,수위천무령誰謂川無舲.,고시여아시姑示汝我詩, 지가차림경知嘉此林坰.
말유의한산末有擬寒山, 각여이목형覺汝耳目熒. 인지수여계因之授汝季, 계야역숙령季也亦淑靈.
<臨川文集>卷1 〈기오씨녀자寄吳氏女子〉
75)
“유인소아시有人笑我诗, 아시합전아我诗合典雅. 불번정씨전不烦郑氏笺, 기용모공해岂用毛公解.
불한회인희不恨会人稀, 지위지음과只为知音寡. 약견진궁상若遣趁宫商, 여병막능파余病莫能罢.
홀우명안인忽遇明眼人, 즉자류천하即自流天下.“
이렇듯 宋代의 문인들은 한산시의 禪趣적인 면과 백화적인 표현 기법 등에 주목하였다. 그들이 애송했던 시는 대부분 寒山子의 後期詩로 禪趣가 있는 한적하고 淸逸한 풍격의 시였다. 그런데 이러한 한산시의 풍격은 질박하고 담백한 도연명 시의 풍격과 큰 차이가 있다.
결론적으로 도연명과 한산자 모두 은사라는 점, 한산시 중 일부에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인용한 점, 그리고 두 사람 모두 山水 田園詩를 썼다는 점 등 표면적으로는 유사성이 있다. 그러나 만약 ‘한산자는 도연명의 亞流’라는 黃山谷의 평가가 단순히 이러한 유사성에 근거하였다면 대부분 은사들도 예외일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한산자는 도연명의 亞流’라는 주장은 송대 문단에서의 한산시 열풍을 반영하고, 도연명과 같은 반열에서 한산자를 인식한다는 한산자에 대한 높은 존중의 표현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201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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