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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詩/寒山詩

寒山詩와 北宋詩壇

寒山詩와 北宋詩壇

/이선희李鮮熙 배재대학교培材大學校 전임강사專任講師

 

1. 서론

 

中國詩歌史에서 唐詩와 宋詩의 비교는 오랫동안 흥미로운 연구대상이 되어왔다.

지금까지 당송시의 비교연구는 대개 兩代 시인과 작품에 대한 개별적 연구를 통해 詩作의 양식과 기법 또는 소재 등을 비교하고 그 결과에 바탕하여 唐宋詩의 특징을 도출하여왔다. 이러한 연구는 이제 어느 정도 연구 성과를 거두어 많은 부분에서 정론화가 이루어졌다.

 

기본적으로 당송시의 계승과 차별화의 발생은 唐宋의 역사적 배경과 문화적 환경의 차이와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

모든 예술 작품에는 기본적으로 작가 정신이 투영되어 있듯이 문학 작품 역시 작가의 의식세계가 투영되어 있어 작품에는 작가의 시대정신과 또한 개인적으로 처했던 현실적 상황 속에서 형성된 의식세계가 반영되어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당송시의 계승과 차별화에 대한 연구 역시 작품 중심의 접근 못지않게 역사 문화적 관점에서의 거시적 접근 또한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러한 거시적 접근방식은 당송시의 관계는 물론 중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文治國家였던 송대가 詩作 활동에 있어서는 당대에 비해 미흡했던 까닭 등에 대해서까지도 이해의 지평을 넓힐 수 있게 될 것이다.

 

필자가 본고를 쓰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王安石의〈의한산습득시이십수擬寒山拾得詩二十首〉에 대한 연구가 계기가 되었다. 북송의 재상이자 대시인이었던 왕안석이 말년에 한산시를 模作한 작품과 그 모작 배경을 파악하던 중 한산시에 대한 모작이 왕안석 뿐 아니라 송대 시단에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음을 인지하게 되었다.

 

이는 송대 시단이 한산시에 대해 매우 주목하였음을 의미하고 왕안석의 모작도 이러한 송대 시단의 조류와 관련이 있음을 파악하였다. 이에 따라 〈의한산습득시이십수擬寒山拾得詩二十首〉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인식을 위해서는 먼저 북송시단에서 한산시가 유행하게 된 과정 등을 살피고 이를 통해 북송시단과 한산시의 관계를 밝히는 것이 더 필요할 것으로 판단되었다.

 

주지하다시피 한산자에 대해서는 현재까지도 의론이 분분하다. 다만 그의 시를 통해 추론하면 청년기에는 세상을 흔들 듯 한 야망의 유생이었으나 좌절하고 산중에 은거하였으며 중년이후 도교와 불교 등에 깊이 몰입함으로서 유불도의 모든 사상체계를 섭렵하였던 시인이다.²

 

2) 寒山詩에는 도가사상과 관련된 시와 또 불교 시, 그리고 儒生의 의식이 담겨진 시가 있지만 그는 시종 유불도 어느 사상에도 치우치지 않음으로서 도교나 유가는 물론 불교 경전 어디에도 수록되지 않았다. 그 후 청대에 편찬된 <全唐詩>에서 佛敎詩로 분류되는데 한산시 중 불교 관련 시가 가장 많지만 그를 단순히 불교시인으로 규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참열參閱 졸문拙文 〈한산시에 보이는 한산자의 정신세계〉,<인문논총》제11-1집, 배재대인문과학연구소, 1997.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미치광이로만 취급하였지만 오대를 거쳐 송대에 들어오면서 그에 대한 인식이 반전하였다.

승려는 물론 문인들도 그의 시를 주목하고 애송하였으며 심지어는 模作하기도 하였다.

이같이 한산시가 돌연 송대에 들어와 주목을 받는 것은 기본적으로 송대의 문화적 상황과 깊은 관련이 있다.

 

송대 학술문화의 특징을 이루는 요인 중 하나가 성리학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또한 성리학의 발전 이면에는 중국 학술사상 유학의 철학화, 불교의 중국화, 유불도의 합류라는 중요한 역사적 함의가 담겨 있다.

 

이로부터 종교적으로는 禪宗이 송대에 전성기를 이루고 문학에서는 詩와 禪이 결합된 禪詩가 전성기를 이루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선시의 문학적 특징은 송시가 唐詩와 차별화된 특징을 형성하게 된다.

다만 송대 선종이 唐代에서 개화하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송시의 특징 또한 唐詩와 무관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송대 시인의 한산시에 대한 주목에 대한 문학사적 관점에서의 검토는 상당히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으로 본다.

 

여러 문헌을 종합해보면 송대 선시의 발전 과정에는 한산시가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엿볼 수 있으나 지금까지 이에 대한 연구는 찾아보기 힘든 실정이다. 따라서 본고는 송대 한산시 모작에 대한 연구에 앞서 한산시와 송대 시단과의 관계를 파악하고 송시의 특징이 형성되는 과정에서의 한산시의 영향을 분석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송시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함께 한산시의 문학사적 위상에 대한 재평가를 시도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본고에서는 우선적으로 한산자 선시의 특징을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산시가 송대 문단에서 주목받게 된 까닭을 살피고자 한다. 그리고 송시 발전과정에서 한산시가 미친 영향을 추론해나가고자 한다.

 

2. 寒山 禪詩의 특징

 

1) 선시의 전개과정

선종은 불교의 전래 이후 중국의 전통 사상과 결합되면서 형성된 중국화된 불교이다.

당대가 선종의 황금기였다면 송대에 이르면 토착화되어 더 이상 외래 사상이 아닌 것으로 인식된다.

그로부터 선종은 중국인들의 일상생활에서는 물론 사상과 문학예술 등 다방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시문학에 있어서는 禪과 詩가 결합된 禪詩가 크게 유행하여 禪이라는 종교철학의 영역과 시라는 문학예술의 영역이 결합하여 새로운 문학세계의 지평을 열게 된다. 그러나 禪詩도 唐代에 개화되었으니 즉 시가의 황금시대였던 唐代의 문화적 조류가 선승에게 유입되면서 禪을 시로 읊게 된 것이다.

 

본래 선종에서는 佛法은 언어나 문자로 설명할 수 없고 以心傳心되는 것이라 하여 ‘不立文字’를 강조하였다.

이는 佛道가 규격화된 言文에 의해 한정되거나 구속받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詩는 은유와 상징의 기법을 사용하고 詩語 또한 고정되거나 불변의 개념이나 의미가 아니며 또한 시인이 자신의 진심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문학형식이라는 점에서 선승들은 시라는 형식이 선종이 추구하는 불립문자의 정신과 부합한다고 인식하였다. 따라서 선종에서는 眞心이 드러나고 以心傳心되는 시를 좋은 시라고 보았다.

 

초기의 선시도 고정된 의미의 詩語가 사용되지 않았으며 표현방식 또한 제각기 달랐다.

그러면서도 대부분의 선시는 佛道나 禪理의 설명 또는 종교적 선전이 주목적이었다.

 

한 예로서 唐代 五祖禪師 弘忍이 지은 선시를 보면

유정래하종有情來下種 정情을 두면 종자를 뿌리는 격이라,

인지과환생因地果還生 인지因地에 도리어 과보가 나오는 법이요

무정기무종無情旣無種 정情이 없으면 이미 종자조차 없나니

무성역무생無性亦無生 본성本性도 또한 生滅도 없으리.

 

윗 시를 보면 비유의 기법을 사용하고 五言詩의 형식은 갖추었지만 일반적으로 시에서 느껴지는 시적 이미지를 찾을 수 없고 풋풋한 정감보다는 마치 독경하는 듯한 건조함이 느껴진다.

 

초기의 선시는 대체로 선승들에 의해 쓰여 지고 시풍도 대체로 이와 비슷한 경향을 보이고 있어 문학작품으로서의 예술성보다는 종교성이 강했다. 그러나 중당이후 禪僧 외에 문인들이 禪詩의 詩作에 참여하면서 선시가 크게 변화하기 시작한다.

 

문인들의 선시도 기본적으로는 禪理 설파가 목적이었지만 선취禪趣를 표현하려는 작품이 많아지면서 종교성 못지않게 문학적 예술성이 풍부해지기 시작하였다. 즉 종교시이면서 동시에 문학작품으로서의 균형과 조화를 잘 이루어내는 시가 출현하는데 寒山詩가 그 대표적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⁴

 

4) 황영무黃永武 〈한산시적전봉경계寒山詩的巓峰境界〉<中國詩學>(사상편), 臺灣: 巨流圖書公司, 1979, pp.237-250.

 

한산시 한수를 살펴보자.

아향전계조벽류我向前溪照碧流 앞 개울가에 나가 푸른 물에 나를 비추어보고

혹향암변좌반석或向岩邊坐盤石 혹은 바위 주변으로 나아가 반석에 앉으니

심사고운무소의心似孤雲無所依 마음은 외로운 구름처럼 의지할 바 없거늘

유유세사하수멱悠悠世事何須覓 아득한 세상사는 찾아 무엇하리요.

 

이 시에는 자신의 마음을 의지할 곳 없는 외로운 구름으로 묘사하고 부질없는 세상사에서 벗어나 개울가나 바위 주변으로 자유롭게 다니면서 자연 속에서 자신을 비추는 禪의 경지를 묘사하고 있다.

 

이 시는 일면 매우 예술성 높은 山水詩 같은 분위기를 보여주면서 한편으로는 坐禪의 느낌이 잘 드러나고 있다.

이 작품에서도 보듯이 한산시는 선시의 예술화를 이룬 선도적 작가였음을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선시는 비록 종교적 목적으로 선승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불교 대중화와 함께 문인들도 선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문인 선시의 등장은 종교시였던 선시의 예술성을 강화시키고 점차 시문학의 새로운 장르로서 등장하게 된다.

여기서 유불도를 넘나들며 사실상 역유역승亦儒亦僧이었던 한산자의 시가 선시 예술화의 전개 과정에서 상당히 선도적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2) 寒山 禪詩의 기본 성격

<사고전서총목四庫全書總目>의 〈寒山子詩集〉 제요提要를 보면 ‘佛語’와 ‘菩薩語’라는 표현을 통해 한산시를 기본적으로 불교시의 범주에 포함시키고 있으며 <全唐詩>를 비롯하여 <송대고승전宋代高僧傳> 등 한산자 관련 문헌들도 대개 이와 비슷한 경향을 보인다.

 

그런데 <송원학안宋元學案>을 저술한 명말청초의 대학자 황종희黃宗羲는 흔히 당대 선시의 교조로 불리 우는 선승 교연皎然과 영철靈澈의 선시보다도 한산습득시야말로 선시의 본색이라고 주장하였다.⁷

 

7) “寒山詩村野屋壁所抄之物, 豈可與皎然.靈澈絜其笙簧? 然而皎.靈一生學問, 不堪向天台炙手, 則知飾聲成文, 雕音作蔚者, 非禪宗本色也”黃宗羲,《南雷文約》, 卷四, 參閱, 彭多〈中國唐代禪宗詩歌的類型〉,《西藏民族學院學報》(哲學社會科學版), 第22卷 第2期, 2001. 6, p.83.

 

황종희黃宗羲가 당대의 대표적 禪詩 작가로 불리던 교연皎然과 영철靈澈보다 寒山拾得의 詩가 선시의 본류라는 주장은 상당히 의외의 주장으로 의미심장한 함의가 담긴 것으로 보인다.

 

宋元시대의 학술사를 정리한 황종희의 이같은 주장은 단순히 한산시에 대한 높은 평가의 의미를 넘어 한산시와 송대시단의 관계 차원에서 심도 있는 분석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禪宗에서는 정심淨心이 바로 佛心이라는 ‘돈오성불頓悟成佛’의 기치아래 不立文字에 의한 道의 전파를 도모하였기 때문에 禪詩는 당연히 문자적 수사修辭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眞心이 묻어나야한다고 생각한다.

 

황종희가 보기에 우선 교연皎然과 영철靈澈은 일생 동안 산중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수양하였던 관계로 내면적이든 습관적이든 저절로 문자적 조탁彫琢이 있을 수밖에 없으니 이들이 형상화한 이미지는 진정한 선경禪境일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따라서 황종희가 교연皎然·영철靈澈을 唐代 선시의 교조로서 인식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고 禪詩의 문학정신이 寒山과 拾得시에서 계승되고 있어 이들이 禪詩의 본류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는 시의 소재를 비롯하여 詩語와 詩風, 내용의 서술에 있어서 속박이 없는 자유로운 이미지의 구축이야말로 선시의 본류라는 의미가 전제되어 있다. 그리고 파격적이고 자유로운 서술방식이 송시의 중요한 특징이 형성된 이면에는 선시의 문학적 특성이 있음을 인식해야 하며 이러한 관점에서 황종희는 송시의 특징을 형성시킨 연원이 한산시라는 사실을 시사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황종희의 이러한 주장은 唐代에는 인정받지 못했던 한산시가 송대 시단에서 주목받게 된 원인을 이해하는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그렇다면 황종희가 언급한 禪詩 本流로서의 寒山詩의 특징은 무엇일까?

한산시는 기본적으로 가까운 이웃 사람들과 이야기하듯이 사람 사는 곳곳에 자신의 심정과 주장을 솔직담백하게 시의 형식을 빌러 서술해놓은 시이다. 화려한 修辭는 없지만 편안하고 참신한 느낌을 주며 쉽고 소박하지만 깊은 의미가 담겨있어 독자로 하여금 성찰하게끔 한다.

 

<四庫全書總目>의 〈한산자시집〉 제요提要에서는 한산시에 대해 공어工語, 솔어率語, 장어莊語, 해어諧語, 유생어儒生語, 불어佛語와 보살어菩薩語의 詩라고 규정하고 있다.⁸

 

8)<四庫全書總目> 卷149,〈寒山子詩集〉 提要.

 

이를 풀이하면 한산시는 문장의 뛰어난 기교성技巧性, 쉽고 편안하게 현실을 반영하는 민첩성敏捷性, 논리 전개의 엄정성嚴正性, 표현의 해학성諧謔性, 그리고 유교와 불교 등 사상의 다양성, 중생을 제도하려는 계몽성을 갖추고 있는 詩라는 의미로서 한산시의 특징을 매우 적절하게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한산자 말년에 천태산天台山 국청사國淸寺에서 기거하였던 관계로 불교계에서는 詩僧으로 부르지만 <四庫全書總目>에 언급된 바와 같이 佛語와 菩薩語의 관점에서만 한산시를 평가한다면 이는 단면적 평가가 될 것이다.⁹

 

9) 그러나 한산자의 사상적 행적을 살펴보면 출가하기 전에는 분명히 유생으로서의 유교적 사상의 소유자였고 은거한 이후에는 한때 도가사상에 몰입하였고 다시 한때는 불교에 몰입하였다. 따라서 그는 유불도를 모두 섭렵하고 종국적으로는 유불도를 넘나드는 사상적 행보를 보이며 어느 사상이나 종교로부터도 구속받지 않는 진정한 자유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국청사에서의 기거는 그가 말년 선종사상에 심취하였음을 의미하지만 그렇지만 그는 삭발하지 않았으며 승려가 되지는 않았다. 참열參閱 졸저拙著 <한산기인급기시연구寒山其人及其詩硏究> 臺灣 私立東吳大學 박사학위논문, 1992.

 

한산시에는 세상에 대한 비판과 인생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담은 비종교시도 적지 않지만 절반에 이르는 약 150여수가 불교 관련 詩임에는 틀림없다.

한산자의 불교시는 禪宗을 배경으로 쓰여진 禪詩가 많은데 특히 민중의 눈높이에 맞추어 쓴 게송偈頌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¹⁰

 

10) 偈頌은 본래 梵語 Gatha에서 유래되었다. 이를 한자로 음역한 偈陀의 ‘偈’와 또 이를 의역한 ‘頌’을 모두 사용하면서 게송으로 불러지게 되었다. 參閱,《大藏經》51冊, pp.882-883. 본래 偈頌은 부처의 공덕을 찬양하는 내용이었는데 이는 세속에서 君王에 대한 찬양의 세태를 불교에서 부처 찬양으로 응용한 것이다.

 

게송은 四言 六言 또는 七言 등 중국시의 기본 형식을 갖추면서도 압운押韻이나 운율韻律, 절주節奏 등 중국 전통시의 다른 격식은 과감하게 배격한 자유로운 시풍의 불교시이다. 이 같은 자유로운 시풍은 중국 詩壇에도 영향을 미쳐 특히 唐代에는 승려 외에 문인들도 偈頌 형식의 詩作을 활발하게 전개하는데 한산자 역시 많은 불교시를 남겼다.

 

한산시에는 당시 자신의 시에 대한 소회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범독아시자凡讀我詩者 무릇 내 시를 읽는 그대들이여

심중수호정心中須㨭淨 모름지기 마음을 깨끗이 하라.

간탐계일렴慳貪繼日廉 탐욕은 날로 청렴해 지고

첨곡등시정諂曲登時正 아첨은 때를 따라 바르게 되리라.

 

구견제악업驅遣除惡業 몰아드는 악업을 없애고

귀의수진성歸依受眞性 부처님께 돌아가 眞性을 받아라.

금일득불신今日得佛身 오늘 이 생에서 부처 몸 이루기를

급급여율령急急如律令 律令처럼 급히 서둘러라.

 

그리고 이러한 소회는 습득의 게송에서 보다 더 드러나고 있다.

제불유장경諸佛留藏經 모든 부처님이 경을 남긴 것은

지위인난화只爲人難化 다만 사람을 교화하기 어렵기 때문

불유현여우不唯賢與愚 오직 지혜롭고 어리석은 이 뿐 아니라

개개심구가個個心構架 사람마다 마음에 계교를 가졌네.

 

조업대여산造業大如山 업을 지은 것이 태산처럼 크거늘

기해회우파豈解懷懮怕 어찌 근심 걱정 품지 않으랴.

나긍세심사那肯細尋思 자세하고 깊이 생각하지 않고

일야회간사日夜懷奸詐 밤낮 간사하고 거짓을 생각하네.

 

윗 시에서 보듯이 그들은 보살菩薩이나 호정㨭淨, 구견驅遣, 악업惡業, 진성眞性, 불신佛身, 장경藏經 등 불교 및 禪의 개념에 대해 각종 비유와 쉬운 말을 사용하여 禪的 解脫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시의 형식에 있어서도 비록 六言詩의 형식은 갖추고 있으나 운율 등 중국시의 전통적 詩律 등은 따르지 않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자신의 의사를 용이하게 표현하면서도 동시에 자유로운 풍격이 엿보인다.

 

한산자도 이러한 통속적 시풍이 의도적임을 숨기지 않고 있다.

유인소아시有人笑我詩 어떤 사람 내 시를 비웃지만

아시합전아我詩合典雅 내 시는 고아하고 법에 맞는다.

불번정씨전不煩鄭氏箋 정현의 주석도 번거롭게 할 것 없고

기용모공해豈用毛公解 모장의 해설도 쓸모가 없네.

 

불한회인희不恨會人稀 알아주는 이 없다고 탓하지 않나니

지위지자과只爲知者寡 다만 제대로 아는 자가 적을 뿐이거늘

약견진궁상若譴趁宮商 만약 궁상을 찾게 한다면

여병막능파余病莫能罷 내 병은 영원히 그칠 때 없으리라.

 

홀우명안인忽遇明眼人 어쩌다가 진실로 눈 밝은 사람 만나면

즉자류천하卽自流天下 즉시 천하에 퍼지리라.

 

그러면서 자신의 시를 조롱하는 자들에게 당당하게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하우독아시下愚讀我詩 제일 어리석은 사람은 내 시를 읽고

불해각치초不解却嗤誚 알지도 못하고 비웃고 비방한다.

중용독아시中庸讀我詩 중간 선비는 내 시를 읽고

사량운심요思量云甚要 생각한 후에 아주 중요하다고 한다.

 

상현독아시上賢讀我詩 가장 어진 사람은 내 시를 읽고

파저만면소把著滿面笑 반기며 만면에 웃음 지리라.

양수견유부楊修見幼婦 양수는 어린 여자를 보자

일람편지묘一覽便知妙 이내 묘妙자를 알았느니라.

 

이들은 자신의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하기 위하여 偈頌의 형식과 더불어 문장은 白話體를 사용하고 소재는 日常生活에서 찾았다.

 

게송에 대해서 당대 문인들은 “의중을 드러내어 人間 世事를 논하고 통속적인 듯하지만 깊은 뜻이 담겨져 있다”¹⁵고 평하고 있는데 이는 게송의 특징을 소재의 세속성, 詩語와 내용의 통속성, 심오한 사상과 분명한 메시지 제시로 여기고 있음을 의미한다. 15) 유잠游潛 <몽초시화夢蕉詩話>

 

윗 시에서도 보다시피 이러한 특성은 한산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전하기 위해 내용과 소재 모두 현실에서 찾고 화려한 수사를 생략한 채 의사 전달의 효용성을 위해 백화문을 사용하였다. 이점이 바로 황종희가 한산시를 선시의 본색으로 규정한 진정한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자신의 생각을 꾸밈없이 자유롭게 표현하는 문학적 시도가 북송에 이르러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한산시와 송시의 관계가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결국 한산시가 송대 시단에서 주목받게 된 원인은 송대 시단이 추구한 문학적 가치가 한산시에서 발견되기 때문일 것이다. 송말 엄우嚴羽는 <창랑시화滄浪詩話>에서 송시의 3대 특징으로 ‘이문자위시以文字爲詩’ ‘이의론위시以議論爲詩’ ‘이재학위시以才學爲詩’를 제시하였는데 이중 ‘以文(字)爲詩’는 송시의 산문화 또는 세속화를 의미하고 ‘以議論爲詩’는 송시 의론화를 그리고 ‘以才學爲詩’는 송시의 전고성典故性을 가리킨다.

 

그런데 한산시가 일상생활 속에서 소재를 찾고 통속적이고 평이한 시어를 사용하여 표현의 생동성을 높이고 또한 詩意의 분명한 제시를 추구하였던 점은 엄우嚴羽가 제시한 송시의 3대 특징 중 ‘시의 통속화’와 ‘시의 의론화’와 상통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한산시는 통속시와 의론시에 관한한 후세의 전범典範이 되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고는 송시의 의론화와 통속화 과정을 중심으로 송시와 한산시와의 관계를 추적해보고자 한다.

 

3. 寒山詩와 北宋詩風

 

1) 寒山詩의 北宋 流傳

송대 黃山谷은 한산시를 특별히 좋아하여 늘 붓글씨로 쓰고 애송하곤 하였다.

심지어 자신을 한산자의 後身이라고까지 표현하는가하면 심지어 손자들이 한산시를 보는 것도 좋아할 정도였다.

 

황산곡의 한산시에 대한 존중은 황산곡과 회당晦堂 보각선사寶覺禪師와의 대화에서 그 일단이 엿보인다.

여기서 황산곡은 “다시 10년 더 공부하고 글을 쓰면 혹시 陶淵明과 비교될지는 모르겠으나 한산자로 말하면 다시 태어나도 따라갈 수가 없을 것”이라며 한산시를 격찬하고 있다.

 

회당이 한산시로 和韻해줄 것을 부탁하자 황산곡은

“내가 감히 어찌 함부로 和韻할 수 있겠는가.

넉넉히 잡아 한 평생 혹은 다음 생에서까지 시를 쓴다 해도 杜詩의 경지에 이르기 어려울진데 하물며 한산자라니?”

라고 답하며 한산시에 대해 경의를 표하고

 

유성지자有性智者 관한산지시觀寒山之詩 역불가침반의亦不暇寢飯矣

“智人이 한산시를 보노라면 역시 먹고 잘 겨를도 없을 것”

이라며 한산시에 매료되면 모든 것을 잊을 정도로 빠져들게 됨을 고백하고 있다.

 

황산곡의 이러한 추앙은 비단 산곡만의 개인적 선호가 아닌 송대 시단의 보편적 현상임은 왕안석을 비롯하여 한산시 의작이 송대의 여러 시인들에 의해 마치 유행처럼 일어났음을 감안하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한산시가 이처럼 북송에 유전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한산시의 북송 流傳 과정에는 만당晩唐 조동종曹洞宗의 선승禪僧 조산본적曹山本寂이 편찬한 <주대한산자시注對寒山子詩>의 영향이 가장 크게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주대한산자시注對寒山子詩>는 실전되어 그 내용을 헤아릴 수는 없으나 출판 이후 선종 佛舍에서 크게 유행하여 마침내는 한산시가 선종의 새로운 경전처럼 선승들의 필독서가 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현상은 송대에까지 지속되어 禪舍마다 한산자 열풍이 불었는데 당시 한산시는 송대 선승들에게 돈오참선頓悟參禪의 도구로서 운용되기도 하고 또는 설법에 임하는 禪師들의 법어로 운용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禪舍에서의 한산시 열풍은 결국 송대 문인사회로까지 번져 앞서 언급한 황산곡은 물론 蘇軾 王安石 등 북송 문인들에게서 큰 반향이 나타나 마침내 시단에서도 한산시 열풍이 나타났다. 이러한 열풍은 남송으로까지 이어져 주희朱熹는 한산시에 대해 어느 시인도 이르기 힘든 경지라고 평가하였고,

 

유극장劉克莊은

여매위한산자하상학위시余每謂寒山子何嘗學爲詩

이시지유출어폐부자수십수而詩之流出於肺腑者數十首

한산시 수십 首는 폐부肺腑에까지 흘러들어갈 정도이며

 

일일여교장작一一如巧匠斫 양야소주良冶所鑄

작품 하나하나가 정교한 장인에 의해 재단되고 훌륭한 대장장이에 의해 주조된 것 같다며 극찬하였다).

 

이외에 여러 문인들도 한산시를 평하고 있음을 볼 수 있으니 송대 문인의 이 같은 평가는 송대 문단에서의 한산시 열풍을 반영한다.

 

송대 한산시 열풍이 선승에서 문인사대부 사회로 流傳된 배경에는 단순히 선종의 확산이라는 단편적 시각보다는 유불도의 합류와 각개 약진이라는 송대 사상계의 변화, 그리고 선승이 아니면서 많은 선시를 남긴 한산자 개인의 특수성도 상당한 영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송대에는 선종의 유행으로 선승과 문인사대부들의 교유가 활발해진다.

그 결과 송대 사회에는 禪僧의 文士化와 文人의 禪學化 현상이 나타났다.

이로 인해 선승은 문학적 우아함을 선호하고 詩作 활동을 좋아하는 詩僧이 출현하고 문인은 禪에 대한 담론을 좋아하고 세속화된 禪趣와 禪理가 농후한 선시를 쓰게 된다.

 

그런데 송대 문인은 정신적으로는 고아함을 추구하였지만 실제 생활은 당대에 비해 세속적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단지 禪적 담론을 선호할 뿐 종교적 차원의 활동에는 거리를 유지했다.

따라서 이들 문인의 선취시나 선리시에도 노골적인 종교색이 드러내지 않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경향도 전술한 바와 같이 한산시와 매우 상통하다. 한산시에 종교 차원의 형상화보다는 月․泉․靑天․蓮花․寒巖 등의 자연의 형상을 이용한 선취시가 많았던 것도 이를 증명한다.

 

예를 들면

중성라열야명심衆星羅列夜明深 별들이 펼쳐진 깊은 밤이거늘

암점고등월미침巖点孤燈月未沈 바윗가 비추는 외로운 달 기울지 않았네.

원만광화불마옥圓滿光華不磨莹 둥근 광명은 이지러짐 없는데

괘재청천시아심挂在靑天是我心 푸른 하늘에 걸려있음이 내 마음 이어라.

 

 

반타석상좌盤陀石上坐 너럭바위에 올라앉으면

계간냉처처谿澗冷凄凄 개울 물 차갑고 시원하다.

정완편가려靜玩偏嘉麗 고요히 둘러보면 못내 아름다운데

허암몽무미虛岩蒙霧迷 바위 골짜기에는 몽롱한 안개 헤매인다.

 

 

념연게헐처恬然憩歇處 편안하고 호젓하게 쉬는 곳

일사수영저日斜樹影低 해는 비스듬히 나무 그림자 낮아졌네.

아자관심지我自觀心地 내 스스로 내 마음을 바라보니

연화출어니蓮花出淤泥 연꽃이 진흙 속에서 피어나네.

 

 

고고봉정상高高峰頂上 높은 산봉우리 꼭대기에 올라

사고극무변四顧極無邊 사방을 돌아보니 끝이 없구나.

독좌무인지獨坐無人知 홀로 앉으니 아는 사람 없고

고월조한천孤月照寒泉 외로운 달은 찬 샘물을 비추고 있다.

 

 

천중차무월泉中且無月 샘물에는 달이 없나니

월자재청천月自在靑天 달은 본래 저 하늘에 있었다.

음차일곡가吟此一曲歌 이 노래 한 곡조 불러 보면

가종불시선歌終不是禪 결국 이 노래가 禪이 아니겠는가.

 

이처럼 산수자연의 형상화를 통해 높은 경지의 仙境이 표출된 寒山詩가 문인사대부들에 의해 주목받은 것은 종교색은 농후하지 않으면서 선리와 선취를 선호했던 송대 문인들의 경향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보인다. 뿐만 아니라 오랜 은거와 말년의 國淸寺 起居에도 불구하고 끝내 탁발하지 않고 隱士로서 선시를 남긴 한산자 개인의 인생역정은 세속적 생활을 영위하면서 고아한 정취를 추구했던 송대 문인에게는 경의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였다.

 

따라서 한산자의 山水詩 같은 선시의 詩作방식이 훗날 송대 선시의 중요한 특징임을 감안할 때 송대 문인사회에서의 한산시 열풍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으며 동시에 한산시가 송시에 미친 영향 또한 적지 않았을 것임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다.

 

송대의 한산시 열풍은 단순히 선종의 확산에 따른 새로운 문화 환경의 형성이라는 차원을 넘어 송시의 특징인 통속화와 의론화 및 산문화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리고 보다 적극적으로는 왕안석을 비롯하여 여러 문인들이 단순히 한산시의 애송이라는 단계를 넘어 마침내 한산시를 의작하는 풍조까지 나타났다.

 

한산시의 송대 流傳은 송대 시단으로 하여금 유가문화의 문자적 속박에서 벗어나 오랫동안 시어로서 사용이 금기시되어온 속어를 사용하는데 일정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론되며 아울러 규격화된 詩體로부터도 해방됨으로서 송시의 창조적 영역이 크게 확대되는 기반을 형성하게 되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2) 寒山詩와 宋詩 通俗化 ‘이속위아以俗爲雅’

송시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가 ‘以俗爲雅’라는 점에 별 이론이 없을 것 같다.

‘以俗爲雅’는 소재의 세속화와 시어의 통속화를 의미한다.

 

송대 시단에서 적극적으로 ‘以俗爲雅’를 제기한 인물은 蘇軾蘇軾과 황정견黃庭堅으로 이들은 본래 ‘이고위신以故爲新 옛 것을 새롭게’라는 기조위에서 ‘以俗爲雅’를 제기하였다. 그러나 以故爲新이 오랫동안 축적된 예술적 성과를 바탕으로 그 위에 새로운 창조를 추구한 것이라면 以俗爲雅는 기본적으로 통속시의 예술화를 의미한다.

 

이에 대해 황정견은 “詩는 矢다, 위에 있으면 詩이고, 아래 있으면 矢이다”라며 세속적 소재를 대상으로 高雅한 창작을 주장하였다.

 

宋代 이전의 중국 시단에서는 대체로 詩에 속어의 사용이 금기시 되어 소수의 문인을 제외하고는 시에 속어를 사용하지 않는 전통이 이어져왔. 그러나 송대에 이르면 이러한 전통이 무너져 북송 후반에 이르면 俗語의 詩語 사용이 활발하였다.

 

이에 대해 왕기王琪는 공개적으로 “시인은 속어 사용을 망설일 것이 아니라 더욱 사용하도록 연마해야 한다.”고 하는가 하면 蘇軾은 더 나아가 “길거리와 시장 바닥의 말도 모두 시어로 사용할 수 있으며 다만 사람들이 잘 용해시켜 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蘇軾은 ‘이속위아以俗爲雅’의 기치 아래 대담하게 자신의 시에 속어를 사용하였다.

예를 들면 蘇軾의 시 발광주發廣州에 보이는 “삼배연포후三杯軟飽後 일침흑첨여一枕黑甛余” 중 연포軟飽는 음주飮酒, 흑첨黑甛는 숙면熟眠을 의미하는 속어이다.

 

이러한 속어의 사용은 황정견黃庭堅의 시에서도 자주 보이는데 예를 들면 걸묘乞猫 중 “문도리노장수자聞道貍奴將數子 매어천유빙함선買魚穿柳聘銜蟬” 중 함선銜蟬는 고양이를 가리키는 속어이다.

 

소식蘇軾과 황정견黃庭堅의 북송 시단에서의 위상으로 볼 때 이러한 속어입시俗語入詩는 북송시단의 풍조로서 형성되었음을 의미한다.

 

송대의 俗語入詩 현상에 대해 북송 말 江西詩派의 한구韓駒는 “옛사람들은 方言을 많이 사용하여 시를 썼는데 요즘 사람들은 禪語를 계속 사용하여 시를 쓴다. 이는 대체로 진부함을 싫어하고 새롭게 하려는 것을 좋아한 까닭”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俗語入詩의 풍조가 일어난 까닭은 북송시단이 새로운 시도를 좋아했기 때문이고 또 송대 시단이 추구한 새로운 시도는 바로 禪語의 사용임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속어의 원천이 되는 禪語의 시어 사용은 禪宗의 확산과 깊은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선종의 확산으로 문인들이 선종의 전적典籍을 접하게 되면서 이들 전적이 그들의 의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기 때문이다.

 

禪宗의 典籍은 불교 대중화 차원에서 儒家 經典과 다른 口語體의 白話文으로 쓰여 지고 또한 ‘진속불이眞俗不二’의 추구에 따라 많은 속어를 사용하였다. 이로 인해 송대 문인은 그들이 접했던 禪宗의 典籍을 떠올리며 과감하게 자신의 작품에 속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송대 문인들은 유우석劉禹錫처럼 속어라는 이유로 詩文에 감히 ‘고糕’자를 쓰지 못하던 구속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그리고 禪語와 俗語는 언어의 성격상 공통점이 있어 시인들의 詩意 전달에도 편리하였다.

 

‘以俗爲雅’라는 송시 통속화 과정에서 주목할 점은 송대 문인들이 새로운 詩作의 典範으로 왕범지王梵志와 寒山子 및 拾得의 詩를 주요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한산자와 왕범지는³⁹ 생존 시기, 출신배경, 거주지역등의 차이로 인해 두 사람의 시풍은 유사점 못지않게 많은 차이가 있음에도 이들의 시는 모두 송대 문인들의 典範으로서 애송되는데 그중에서도 寒山詩가 가장 주목 받는다.

 

39) 寒山子가 생존했던 시대에 대해서는 아직도 설이 분분하나 중당이후의 인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그리고 王梵志는 수말당초隨末唐初의 인물로 추정된다. 그리고 왕범지는 본래 빈민출신이었지만 한산자는 서생출신으로 과거에 실패하여 은거하였다. 그리고 주로 거주했던 지역도 왕범지는 북방, 한산자는 남방이었던 까닭에 문화적 환경에서도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시는 많은 공통점이 있는데 두사람은 經典등에 구애됨이 없이 속어를 사용하여 人情과 世態를 표현하였다는 점에서 가장 두드러진 공통점은 ‘俗’이라 할 수 있다./참열參閱 육영봉陸永峰 〈王梵志詩與寒山詩比較硏究〉<四川大學學報>第1期, 1999.

 

이는 송대 시단이 추구했던 문학의 방향성이 한산시와 가장 근접했음을 시사한다.

<太平廣記>가 한산시의 주지主旨를 ‘경려유속警勵流俗’으로 규정한 것처럼 통속화는 한산시의 중요한 특징이었다.

 

이처럼 한산시가 게송偈頌의 시풍을 추구하고 속어를 사용하였음에도 소박함과 자연스러움 그리고 높은 품격을 갖추고 있었던 점은 송대 시단에서 주목받기에 충분하였던 것이다.

 

한산자 본인도 이러한 詩作 方式이 의도적이었음을 숨기지 않고 있다.

유개왕수재有個王秀才 왕 수재가 있는데

소아시다실笑我詩多失 내 시가 격에 맞지 않는다고 비웃는다.

 

운불식봉요云不識蜂腰 봉요蜂腰도 알지 못하고

잉불회학슬仍不會鶴膝 또 학슬鶴膝도 알지 못하며

평측불해압平側不解壓 평측平仄도 알지 못해 압운도 못하니

범언취차출凡言取次出 말이 모두 분명하지 못하다고

 

아소니작시我笑你作詩 나는 너의 시가 가소롭나니

여맹도영일如盲徒咏日 마치 장님이 해를 노래하는 것 같구나.

 

위의 시에서도 보다시피 한산자는 자신의 시가 사대부들의 눈에는 하찮게 보일 것이라는 점을 인지하면서도 자신의 시를 지금 새로운 시도라고 주장하고 기존 문인들의 시에 대해서는 맹목적인 답습에 불과하다고 비웃고 있다.

 

이처럼 한산시가 추구한 새로운 시도는 진부함에서 탈피하여 새로움을 추구했던 송대 시단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기에 충분하였다.

 

전술한 바와 같이 중국 시에서의 속어 사용은 선전禪典의 영향이 크다.

그러나 한산자의 통속시는 선승의 일반적 선시와는 달리 종교문학의 울타리 속에 갇히지 않았다.

그는 민중의 세속적 생활에서 소재를 찾고 속어나 불교용어 등의 다양한 시어를 사용하여 詩意를 생생하게 표현하는 동시에 농후한 종교 색을 지양하고 평이한 내용을 추구하였다.

 

한산자의 통속시에서 종교와 관련된 주제를 중심으로 쓰여진 시를 보면

저흘사인육猪吃死人肉 돼지는 죽은 사람의 살을 먹고

인흘사저장人吃死猪腸 사람은 죽은 돼지 창자를 먹는다.

저불혐인취猪不嫌人臭 돼지는 송장 냄새 꺼리지 않고

인반도저향人反道猪香 사람은 돼지 냄새가 좋다고 한다.

 

저사포수내猪死抛水內 돼지가 죽으면 물에 던지고

인사굴사장人死掘士藏 사람이 죽으면 흙속에 파묻나니

피차막상담彼此莫相啖 사람과 돼지 서로 먹지 않으면

연화생비탕蓮花生沸湯 끓는 물속에서도 연꽃이 피어나리.

 

 

홍홍매어육嗊嗊買魚肉 흥얼거리며 신이 나서 魚肉을 사서

담귀위처자擔歸喂妻子 메고 돌아가 처자에게 먹인다.

하수살타명何須殺他命 어찌 다른 것의 목숨을 죽여 가며

장래활여이將來活汝已 장래 네 목숨만을 살리려하는가.

 

 

차비천당연此非天堂緣 이것은 천당의 인연이 아니요

순시지옥재純是地獄宰 오직 지옥 길의 찌꺼기일 뿐

서육어파퇴徐六語破堆 촌 늙은이 깨어진 절구를 달래는 듯

시지몰도리始知沒道理 비로소 도리가 아님을 알았노라.

 

 

아견동가녀我見東家女 내 동쪽 집 처녀를 보니

연가유십팔年可有十八 나이는 열여덟

서사경래문西舍竟來問 서쪽 집 찾아와 결혼시켜

원인부처활願姻夫妻活 부부로 살게 하자고 묻는다.

 

 

팽양자중명烹羊煑衆命 양을 삶고 온갖 생명들 볶고 지지고

취두작음살聚頭作淫殺 머리를 모아 음살계를 범하나니

함소낙가가含笑樂呵呵 즐거움에 겨워 희희락락 하다가

제곡수앙결啼哭受殃抉 눈물 흘려 울면서 그 갚음 받으리라.

 

위의 시는 모두 殺生을 주제로 시마다 담啖 홍홍嗊嗊 서육徐六 가가呵呵 등 속어를 사용하여 사실적 묘사를 극대화시킨 통속시이다. 3수의 詩意는 모두 불교의 살생에 대한 권계를 의미하는 것이지만 내용과 표현은 시마다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첫째 시는 불교의 계율을 그대로 표현하고 불교를 내세우려는 종교시의 성격이 농후하다.

 

둘째 시는 먹고살기 바쁜 세상에서 누구도 의식하지 않고 거리낌 없이 행해져 온 수많은 일상적 행위에 대한 문제점를 예리하게 제기하고 있다. 특히 천당과 지옥이라는 종교적 개념을 담론 전개의 도구로서 활용할 뿐 佛理나 禪理를 추구한다는 느낌은 미미하게 느껴진다.

 

셋째 시는 혼인과 관련된 내용으로 잔치와 살생의 불가피한 관계와 흥겨움의 이면에는 희생과 殺生이 있다는 인생사의 양면성을 차원 높게 표현하고 있다. 淫殺 등 불교용어가 보이지만 종교적 개념보다는 일반적 용어로 느껴짐으로서 종교적 색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따라서 둘째 시와 셋째 시 모두 비록 종교적 메시지가 담겨있지만 결코 불교 찬양시라기 보다는 인생사를 불교적 관점에서 새롭게 정리하여 표현한 수준 높은 통속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면은 송대 사대부가 儒彿의 겸용이라는 송대의 사상적 배경에서 선종을 선호하고 선취와 선리에 대한 담론을 좋아하였지만 결코 종교적 차원으로 접근하지 않았던 점과 상통한다.

 

송대 문인들이 선승의 선시보다도 한산시를 선호한 까닭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또 다른 한산자의 통속시를 보자.

 

유주상초음有酒相招飮 술이 있으면 서로 불러 마시고

유육상호흘有肉相呼吃 고기 있으면 서로 청해 먹어라.

황천전후인黃泉前後人 앞서거니 뒤서거니 황천으로 갈 사람들

소장수노력少壯須努力 젊어서 모름지기 힘써 일하라.

 

 

옥대잠시화玉帶暫時華 아름다운 옥대도 잠시의 영화요

금채비구식金釵非久飾 빛나는 금비녀도 오랜 장식 아니더라.

장옹여정파張翁與鄭婆 장씨네 늙은이 정씨네 노파,

일거무소식一去無消息 한번 가고 나니 소식이 없구나.

 

이 시는 두 개의 상대적 개념을 하나로 묶어 내용을 전개하고 있다. 즉 술과 고기, 늙은이와 젊은이, 권세와 부귀를 교묘하게 나열하다가 돌연 옹翁과 파婆를 등장시켜 내용 전개의 대반전과 함께 人生無常이라는 詩意를 제시하며 끝맺고 있다.

비록 黃泉이라는 불교용어가 보이지만 결코 종교적 권계라기보다는 일반적 권계의 의미가 더 농후하게 느껴진다.

 

<四庫提要>에는 한산자의 통속시에 대해 총괄적 표현으로 ‘신수념롱信手拈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한산시가 시어의 개발과 사용에 있어서 매우 능수능란하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한산시의 詩語와 관련해서는 유극장劉克莊이 <후촌시화後村詩話>에서 “조언粗言과 세언細言의 사용이 모두 깊은 통찰력에 바탕하여 정교하고 짜임새가 있다”고 평가하고 계속해서 “조언粗言과 세언細言 등 시어 사용에 대해 시시비비를 논하는 것은 참으로 황당하고 아무 의미도 없다”고 주장하였다.

 

역서 유극장은 한산시의 속어 사용의 적절성을 강력하게 칭찬함과 동시에 俗語 사용의 정당성을 강하게 제기하고 있다.

이러한 유극장의 입장은 일정 부분 한산시의 詩語에 대한 송대 시단의 일반적 평가를 대변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송대 시단에서의 속어사용이 기본적으로는 선종의 영향이지만 구체적으로는 속언俗諺을 통해 禪理나 詩意를 표출했던 한산시가 ‘이속위아以俗爲雅’의 典範으로서 송대 시단에 영향을 미쳤음은 분명하다.

 

한산시의 속언俗諺이 송대 시인들에 의해 종종 인용되었음은 이를 증명한다.

예를 들면 황산곡의 시 〈차운양명숙견전십수次韻楊明叔見錢十首〉중 第八에 보이는 ‘피모박락진皮毛剝落盡 유유진실재唯有眞實在’의 두 귀는 한산시 중 ‘유수선림생有樹先林生’으로 시작하는 시의 결귀인 “피부탈락진皮膚脫落盡 유유진실재唯有眞實在”를 차용한 것이다. 또한 <산곡별집시주山谷別集詩注> 卷上에 수록되어있는 〈잡음雜吟〉을 보면

 

성중아미녀城中蛾眉女 성 안의 아가씨들

가패향산산珂佩響珊珊 차고 있는 보배 구슬소리 찰랑찰랑

앵무화전롱鸚鵡花前弄 꽃 앞에서 앵무새와 희롱도 하고

비파월하탄琵琶月下彈 달 아래서 비파도 타고

 

장가삼월향長歌三月響 삼월 꽃바람에 실려 오는 긴 노래여

단무만인간短舞萬人看 만 사람 보는데 나부끼는 춤사위

미필장여차未必長如此 이와 같은 것 오래 갈 것인가,

부용불내한芙蓉不耐寒 부용芙蓉은 추위를 견디지 못하나니

 

위 시는 한산시에도 수록되어 있는데 이에 대해 유극장劉克莊은 황산곡이 한산시를 너무 좋아하여 자주 베끼다보니 다른 사람이 잘못 수록한 것이라고 지적받기도 했다. 그리고 위 시 중 ‘부용불내한芙蓉不耐寒’의 싯귀는 여동래呂東萊 등 여러 송대 시인들에 의해 차용되고 있다.

 

또한 진사도陳師道의 시 〈차운소공서호도어삼수次韻蘇公西湖徒魚三首〉其三에 있는 ‘절동보서상작대折東補西裳作帶’는 한산시의 “여도수현원與道殊懸遠 절동보서이折東補西爾”을 차용하여 쓰여 졌는데 ‘절동보서상작대折東補西裳作帶’는 황산곡의 시에도 있는 것으로 보아 여러 시인에 의해 중복적으로 차용된 경우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 장확張擴의 시 〈시사근일초초복진詩社近日稍稍復振〉의 “욕구환골결欲求換骨訣 여앙사공전如仰射空箭”은 한산시의 “단간전사공但看箭射空 수유환타지須臾還墮地”를 차용하였다.

 

이밖에도 소동파와 구양수 등 송대 명인들에 의해 자주 사용됨으로서 사실상 송대의 유행어처럼 되었던 ‘가가呵呵’라는 의성어는 소동파에 의해 처음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앞에서 소개한 “아견동가녀我見東家女”로 시작하는 한산시의 결구에서 차용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한산시가 단순히 송시의 범위를 넘어 송대 문인사회에 광범위하게 영향이 미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3) 寒山詩와 宋詩 議論化 ‘이리입시以理入詩’

당과 송은 시대적 상황과 문화적 환경이 크게 달라 시의 특징 또한 크게 달라진 부분이 있다.

전술한 바 있는 엄우嚴羽가 <滄浪詩話>에서 제시한 송시의 3대 특징 중 ‘이문자위시以文字爲詩’는 唐詩가 감성적이고 운율 중심이었다면 송시는 이성적이고 문장 중심임을 지적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시의 산문화를 의미한다.

 

이와 관련하여 주자청朱自淸은 ‘송시에는 의론議論이 많음’이 송시의 기본적 특징이라고 강조하였다.

또한 허학이許學夷도 <시원변체詩源辨體>에서 ‘사실에 대한 서술이 상세하고 의론議論이 통쾌한데 이러한 시의 散文化(以文爲詩)는 실로 宋人이 처음으로 그 문호를 열었다’며 시의 의론화를 송시의 대표적 특징으로 꼽고 있다.

 

송시 議論化의 전개과정을 보면 宋初 매요신梅堯臣과 구양수歐陽修 등이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이후 王安石 등을 거치면서 송대 시단의 주요 시풍으로 정착되는 단계에 접어들며 蘇軾과 黃庭堅에 이르러 완성의 단계에 이른다.

 

한 시대의 문학 양식은 그 시대의 사회 문화적 환경과 깊은 연관이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唐詩는 唐代의 산물이고 宋詩는 宋代의 산물이다.

 

시의 의론화 또는 산문화도 송대의 議論 문화가 송대 사대부에 의해 시의 형식으로 표출된 것이다.

이는 격변기였던 송대의 특수한 정치 사회 문화적 환경이 송시의 특징을 형성시켰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송시의 특징에 대한 체계적 인식을 위해서는 송대에 대한 역사적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송나라는 당말 오대의 오랜 군벌 할거를 마감하고 세워진 문인중심의 국가이다.

정치적으로 문관의 수가 확대되고 관료조직이 방대해졌지만 행정 효율성은 저하되고 국방력이 취약하여 극심한 내우외환에 처하면서 개혁을 둘러싸고 의론이 무성해진다.

 

문화적으로는 유불도의 통합과 관련한 의논이 이어졌으며 사상적으로는 성리학이 발달하면서 송대에는 의론문화라는 독특한 문화현상이 나타났다. 이러한 議論문화는 시문으로 이어져 의론시라는 송시의 새로운 특징이 형성되었다.

 

작가가 현실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작품을 통해 제시하는 것은 문학의 사회성 차원에서 의미가 있으며 이런 차원에서 송시의 의론화는 송시의 생동성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의 의론화가 송대에서 처음 시작된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시의 의론화는 中唐 한유韓愈의 '이문위시以文爲詩'에서 연원한다고 하나 韓愈 이전에도 의론시는 존재하였다. 예를 들면 당대 이전에는 조조曹操의 <보출하서문행步出夏西門行>가 의론시이고 도연명陶淵明의 여러 詩가 그러하며 唐代 진자앙陳子昻의 <등유주대가登幽州臺歌>도 의론시이다. 그리고 송시 의론화의 완성자인 소동파蘇東坡도 멀게는 詩經과 東晋의 陶淵明, 唐代의 이두李杜를 비롯하여 한유韓愈 유종원柳宗元 백거이白居易 유우석劉禹錫 등의 문학전통을 계승하여 자신만의 시풍을 창조하였다.

 

따라서 송시 의론화의 문학사적 연원을 韓愈로 고정시켜 인식할 필요는 없을 것으로 보이며 이와 관련된 논의와 관련하여 특별히 한산시를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먼저 한산시에서의 의론을 살펴보면 민중 대상의 권계勸戒 차원에서 훈계하는 스승처럼 교우관계, 혼인, 자식교육, 미신 쫓기, 축재 등 다양한 세상사에 대해 시시비비를 가르치는 방식으로 진행하고 있다. 따라서 한산시의 의론에서 가장 큰 특징은 자신의 분명한 의견을 제시함에 있다. 따라서 한산시에는 我, 吾, 余,가 들어간 시가 적지 않은데 이러한 방식은 송시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먼저 我와 관련된 시어를 보면 첫구에 “我見~~人(내가 보건대 ~한 사람은 ~)”으로 시작하는 시가 상당히 많다.

이러한 시는 대체로 자신의 생각을 제시하는 경우인데 예를 들면 ‘아견세간인我見世間人 내 세상사람 보니’ ‘我見出家人 내가 중이 된 사람 보니’ ‘我見凡愚人 내 미련한 사람 보니’ ‘我見利智人 내 날카로이 지혜로운 사람 보니’ ‘아견만인한我見瞞人漢 내 남을 속이는 놈들 보니’ ‘아견일치한我見一痴漢 내 한 어리석은 사내보니’ 등이다.

 

이들 시는 모두 ‘나’라는 1인칭으로 시를 시작하고 있다.

이처럼 ‘나’를 앞에 두고 자신의 의견을 진술하는 것은 한산자가 강력한 자의식의 소유자임을 의미한다.

한산시와 같이 ‘我見’을 사용한 경우는 송시에서도 적지 않음을 볼 수 있는데 황정견의 시에 6수, 왕안석의 시에 3수가 있다.

 

이밖에 ‘我’와 관련해서는 ‘我(今)有’, ‘我行’, ‘我在’, ‘我住’ 등을 넣어 쓴 시가 있으며 그 외에 ‘吾心’, ‘吾家’, 그리고 ‘余勸’. ‘余見’,‘余家’ ‘余曾’ 등이 있는데, 모두 본인을 중심에 놓고 있다. 이 같은 방식의 시를 송대의 대표적 시인인 蘇軾과 黃山谷과 王安石의 시에서만 찾더라도 적지 않게 발견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구체적으로 각각의 경우를 살펴보면

‘我(今)有’의 경우 소식 시에 5수, 황산곡 시에 31수, 왕안석의 시에는 21수가 있고

‘我行’의 경우 소식이 84수, 황산곡이 6수, 왕안석시에 23수가 있으며

‘我在’의 경우 소식 시에 44수, 황산곡 시에 4수, 왕안석 시에 4수가 있고

‘我住’의 경우 소식 시에 9수, 황산곡 시에 3수가 있다.

 

그리고 吾를 사용한 시 중 ‘吾心’을 넣어 쓴 시는 소식 시에 21수, 황산곡 시에 2수, 왕안석 시에 28수가 있고,

‘吾家’가 들어간 시는 소식의 시에 36수, 황산곡 시에 17수, 왕안석 시에 9수가 있다.

 

이밖에 余를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그 중 ‘余家’가 들어간 시가 많아 소식 시에 15수, 황산곡 시에 2수가 보인다.

또한 적지만 ‘余家’, ‘余曾’ 등을 넣어 쓴 시도 있다.

이러한 시들은 대체로 자신의 강한 자아의식을 바탕으로 의론을 펼치는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이 외에도 한산시에는 “世有~~人(세상에 ~한 사람이 있거늘)”로 시작하는 시도 적지 않은데 제3자의 관점에서 세상사에 대한 의견을 펼칠 때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면 世有多解人, 世有多事人, 世有一般人, 世有聰明士, 世有一等愚, 世儒一等流 등이다. 여기서는 1인칭이 아닌 3인칭의 관점에서 의론을 진행하고 있는데 이러한 방식도 송시에는 상당히 많아 황정견의 시에 무려 29수, 왕안석의 시에 27수가 있다.

 

물론 소식 황산곡 왕안석 등의 이 같은 詩作 방식의 연원이 모두 한산시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한산시의 시작 방식이 이들에게 이어지고 있음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송대 의론시가 대체로 송대 정치적 사안을 소재로 진행되었다면 한산시의 의론은 정치보다는 민중들의 세속적 생활을 소재로 하였기 때문에 의론의 전개방식이나 내용 등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그러나 많은 의론시를 쓴 바 있는 왕안석은 “文이란 세상에 보탬이 있도록 힘써야할 뿐이다. 사辭라는 것은 그릇에 그림을 새기는 것과 같아 솔직히 기교나 화려함은 굳이 불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은 왕안석 만이 아닌 송대 시단의 보편적 입장을 대변한 것으로 송대 시단에는 보세補世의 정신이 농후하였음을 보여준다. 송시에는 補世的 詩도, 이와 무관한 詩도 있지만 송시가 詩의 社會的 功用性을 지향하였음은 분명하다.

 

이러한 점은 詩作의 출발점 자체가 세상에 대한 관심과 권면에 있었던 한산시와 완전히 일치한다.

따라서 송대 의론시가 멀게는 詩經, 가까이는 당대 이두李杜를 비롯한 唐代 시인의 의론시를 계승했지만 여러 정황으로 볼 때 한산시가 구체적 실천의 典範으로서 상당한 작용을 하였음은 분명한 것 같다.

 

4. 결론

 

전술한 바와 같이 본고는 북송의 개혁정치가이자 대문호였던 王安石의 한산시 模作 배경을 조사하던 중 한산시 모작이 왕안석 뿐 아니라 송대 시단에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음은 인지하면서 시작되었다.

 

唐代시단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한산시가 송대 시단에서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황산곡 등 많은 송대 명인들의 애송시가 된 것이다. 북송시단에서의 한산시 열풍은 자연스럽게 송시에도 많은 영향을 미침으로서 송시의 발전과 특징의 형성에 크게 작용했을 것임은 자명하다.

 

따라서 한산시와 송시와의 관계에 대한 파악은 송시의 발전과정 및 송시에 대한 구조적 이해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학사적 영향 관계에 대한 파악을 위해 작품론 등의 미시적 접근 외에 역사문화의 거시적 접근을 시도함으로서 한산시의 지향점과 송시의 지향점을 비교할 수 있었다.

 

송대의 한산자에 대한 관심과 찬양은 역유역승亦儒亦僧이었던 한산자 개인의 성격도 주요했지만 시의 소재를 비롯하여 詩語와 詩風, 내용의 서술에 있어서 속박됨이 없는 자유로운 이미지를 구축한 한산시야말로 선시의 진정한 본색이라는 황종희의 주장과 같이 한산시가 추구한 문학적 지향성이 송대 시단에서 환영받은 가장 주된 요인이었다.

 

한산시에는 불교를 찬양하는 시도 비판하는 시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선종이라는 종교적 외투를 벗어던지고 선시의 새로운 창조를 모색하였다. 이러한 탈종교적 선시는 고루함에서 벗어나 신선함을 추구했던 송대 시단에 선시 예술화의 典範으로서 인식되었던 것이다.

 

한산시가 송대 시단에서 주목받은 또 다른 원인은 송대 시단이 지향했던 문학적 가치가 한산시와 일맥상통하였기 때문임이다. 특별히 한산시가 일상생활 속에서 소재를 찾고 통속적이고 평이한 시어를 사용한 표현의 생동성, 또한 詩意의 분명한 제시를 추구하였던 점은 송시가 지향했던 ‘시의 통속화’와 ‘시의 의론화’의 구체적 典範이었다.

 

특히 당대까지 이어진 속어 사용의 금기를 깨는 선행적 시인의 전범으로서 존중되었고 또한 의론시를 통해 社會的 功用性을 지향했던 송대 시단에 한산시는 구체적 실천의 典範으로서 작용하였다.

 

당송시의 계승과 차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시각에서 검토될 수 있겠지만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의론화와 통속화라는 송시의 중요한 특성이 형성되는 과정에는 한산시의 영향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는 중국문학사에서 한산시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필요함을 시사한다.

 

唐代에 비해 宋代詩壇의 저조 및 宋詩 議論化 등에 있어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은 송대 과거제도의 변화이다.

唐代는 기본적으로 詩賦를 과거의 시험과목으로 채택하였지만 宋代에는 科擧에서 詩賦 대신 經義와 策論을 채택하였다.

이러한 변화가 唐宋 士風이 달라지는 근본적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문치를 내세워 과거급제자 수를 크게 증가시켰음에도 당에 비해 송대 시단의 활동이 빈약했던 원인에 대해 嚴羽는 송대는 문인의 수는 많았지만 시인은 적었고 송시는 韻은 있지만 經義와 策略에 불과하여 시라고도 할 수 없다며 혹평하였다./참열參閱 엄우嚴羽 <창랑시화滄浪詩話 시변詩辨>/2021-0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