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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조론肇論

열반무명론·구절십연자九折十演者 핵체覈體 제2

핵체覈體 제2(覈 사실을 조사하여 밝히다)

여기서는 유명이 질문을 일으켰는데 구절 가운데 첫 번째이다.

앞의 개종 제1에서 말하기를 ‘열반의 자체는 실유도 아니고 실무도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 때문에 지금 이 문제를 절변하여 ‘그렇다면 열반의 자체는 끝내 어디에 있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핵체라고 말하였다.

 

즉 열반의 실체는 유여의와 무여의의 명칭에 나아가서 있는 것이며

무명은 아니라고 따졌음을 말하였다.

 

 

유명왈有名曰 유명은 말한다.

[名家는 명칭에서 열반의 의미를 조사해 보고 명칭의 실제를 따졌다.

그 때문에 상대방의 입장을 꺾고 질문을 일으킨 것이다]

 

부명호불허생夫名號不虛生 명호는 부질없이 나오지 않는다.

[명칭이 있으면 반드시 그 명칭에 걸 맞는 실제가 있는데

어찌 실제는 없는데 이름이 나타나겠는가함을 말하였다]

 

칭위부자기稱謂不自起 칭위는 스스로 일어나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명칭은 스스로 명칭을 붙이지 못하고 반드시 사람들이

명칭을 붙일 만한 것이 있음을 보기 때문에 그에 따른 명칭이 붙게 된다]

 

경칭유여열반무여열반자經稱有餘涅槃無餘涅槃者 개시반본지진명蓋是返本之真名

경전에서 유여의열반, 무여의열반이라고 호칭했던 것은 근본으로 되돌아가는 진실한 명칭이며

[이는 부질없는 헛된 칭호가 아니라고 하였다]

 

신도지묘칭자야神道之妙稱者也 신령한 열반의 도를 오묘하게 호칭한 것이다.

[신령한 도는 오묘하여 그를 호칭할 수가 없다.

그 때문에 열반이란 명칭을 붙였는데 이것이 오묘한 호칭이다]

 

청시진지請試陳之 시험 삼아 이 문제를 진술해 보리라

[열반을 조사해 보았더니 유여의열반과 무여의열반이라는 명칭이 있었다.

이는 열반에 명칭이 있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열반엔 명칭이 없다고 말하는가.

우선 유여의열반을 논변하여 질문을 일으켰다]

 

유여자有餘者 위여래대각시흥謂如來大覺始興 법신초건法身初建

유여의열반이란 대각이 처음 일어나고 법신이 최초로 건립됨을 말한다.

 

<주해註解>

여기서는 유여의열반을 의지하여 열반의 명칭을 단정하였다

우선 여래, 대각, 법신이라는 열반의 果德을 들어 인지수행因地修行의 유여의를 나타냈다.

다른 곳에서의 유여의열반은 모두가 삼승인이 증오한 이치는 원만하지 못하고

二惑을 끊음이 극진하지 못한 편에 의지해서 말하였다.

 

지금 이 논문 가운데서는 부처님의 과덕으로 중생을 이롭게 하는

유여의의 인연이 다하지 않은 편에서 홑으로 이것만을 요약하여 설명하였다.

 

논문의 의미를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여기서 말하는

열반은 權敎의 34心으로 번뇌의 結使를 끊고 성불한 果號였다.

이는 권교인 소승에서 보는 부처님이지 법신과 보신이 하나로 그윽히 합치한 극과極果는 아니다

논문에서는 소승의 견해인 부처님은 出生入死가 있다 한데에 의지해서 질문을 수립하였던 것이다

 

지금 말하는 如來는 十號 가운데 하나로서 여실한 도를 타고 三界로 오신 것을 말한다.

大覺은 과덕에 나아가 수립한 명칭인 바 여래는 自覺과 覺他와 覺行이 빠짐없이 원만함을 말한다.

이러한 三覺이 원만하기 때문에 大覺이라고 지칭한다.

그러나 三覺이 원만한 이 대각은 實敎의 삼신 가운데 圓滿報身을 말한다.

 

지금 논문에서는 권교에서 말하는 부처님도 역시 대각이라고 통체적으로 지칭하였는데

이는 총체적인 과덕의 편에서 요약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법신은 청정법신이 아니라 권교의 부처님이다.

 

즉 五分香으로 성취한 법신인데

오분향이란 戒香, 定香, 慧香, 解脫香, 解脫知見香을 말한다.

이 다섯 가지 법으로 훈습하여 성취한 몸인 것이다.

 

대각이 처음 일어났다 함은 부처님의 應化身이 최초로 출현하여 즉 최초로 淨飯王宮에

태자의 몸으로 태어나 6년 동안 고행을 하다가 鹿野苑에서 처음 正覺을 성취했던 역사적인

사실을 지적한 것이지 출생하기 이전 菩提場에서 대각을 성취하였음을 말한 것은 아니다

 

 

조팔해지청류澡八解之清流 게칠각지무림憩七覺之茂林

팔해八解의 맑은 시냇물에서 목욕을 하려고 칠각七覺의 무성한 숲에서 휴식을 하였다

 

<주해註解>

여기서부터는 불과를 이미 성취했던 것을 바로 듣고 나서

이를 통해 인지에 수행했던 과정을 반대로 나타냈다

 

팔해八解는 내유상외현색內有相外現色. 내무색상외현색內無色相外現色.

정해탈淨解脫. 공처정空處定. 식처정識處定.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

비비상처정非非相處定. 멸수상정滅受相定이다

 

이상의 팔해는 이혹을 끊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마치 맑은 시냇물이 빨래하고 씻는 작용이 있는 것과도 같다.

 

‘게憩’란 휴식. 七覺支는 擇法, 진進, 념念, 정定, 희喜, 사捨, 의椅를 말한다.

이 칠각법은 여래께서는 원만하게 수습하고 나서 그 가운데서 안일 하신다.

그 때문에 마치 무성한 숲 아래서 휴식을 취하는 것과 같다 하였다

이상은 불과의 원만함을 말하였고 다음부터는 수행의 인지가 원만함을 나타냈다.

 

 

적만선어광겁積萬善於曠劫 탕무시지유진蕩無始之遺塵

모든 善業을 영원한 세월에 걸쳐 쌓고 無始以來의 無明 塵勞를 남김없이 세척하였다

 

<주해註解>

여기서는 부처님이 인지의 수행에서 광대겁曠大劫 이래로

모든 선업을 광대하게 수행하셨음을 찬탄하였다

‘탕蕩’은 세척한다는 의미인데 무시이래의 무명번뇌를 남김없이 세척하였다고 하였다.

 

 

삼명경어내三明鏡於內 신광조어외神光照於外

삼명통은 내부에서 비추고 신광은 외부를 관조하였다

 

<주해註解>

부처님은 안으로는 삼명통을 증득하였는데

과거의 숙명명과 미래의 천안명과 현재의 누진명을 말한다.

 

이러한 삼명통을 갖추었기 때문에 삼세를 분명히 안다.

그리하여 중생의 상황에 따라 조감하고 설법하면서 그들에게 알맞게 자세하고도 극진하게 한다.

 

 

결승나어시심結僧那於始心 종대비이부난終大悲以赴難

처음 발심한 마음에서 승나僧那를 맺고 끝내는 대비의 마음으로써 중생의 八難을 구제하러 간다.

 

<주해註解>

범어의 僧那는 번역하면 홍서弘誓이며 보살이 최초로 발심하면

우선적으로 四弘誓願의 마음을 내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처음 발심한 마음(始心)‘이라고 말하였다.

성불한데서 이르러서는 오로지 중생의 이익이 되는 사업만을 한다.

그 때문에 '어려움에 다다른다.'고 하였는데 즉 八難을 구제함을 말한다.

 

 

앙반현근仰攀玄根 부제약상俯提弱喪

우러러 현근玄根을 부여잡고 아래로는 약상弱喪을 이끌어

 

<주해註解>

수행의 인지 가운데서 위로는 佛果를 구하여 실지반야로써 진여의 이치를 증득한다.

그 때문에 '우러러 현근을 부여잡는다.' 말하였다

 

방편반야로는 중생들을 교화한다.

그 때문에 '아래로는 약상을 이끈다.'고 말하였다.

즉 중생들이 생사에 잠겨 미혹함이 마치 어려서 집을 잃고

유랑하는 사람과 같기 때문에 약상이라고 말하였다.

 

 

초매삼역超邁三域 독도대방獨蹈大方

삼역을 멀리 초월하고 大方을 홀로 밟았다.

 

<주해註解>

삼역三域은 삼계三界를 말하는데

부처님은 삼계를 멀리 초월하고 높이 무위법을 증득하였음을 말한다.

 

'대방大方'은 증오할 진여의 이치에 비유하였다.

소승에서는 싣달태자가 성불한 것만을 인정하기 때문에 '홀로 밟았다'라고 말하였다.

 

 

계팔정지평로啟八正之平路 탄중서지이도坦眾庶之夷途

八正道의 평탄한 길을 열고 중서衆庶의 빗나간 길을 평탄하게 하였다.

 

<주해註解>

'팔정'은 팔정도인데 正見, 正思惟, 正語, 正業, 定命, 正精進, 正念, 正定 등을 말한다.

부처님을 따라서 衆庶를 개도하는데

'서庶'는 얼孼의 의미이며 모든 異見을 지닌 외도들을 가리킨다.

'이도夷途'는 사도라고 해야만 하며 이는 부처님만이 평탄하게 할 수 있다.

 

 

빙륙통지신기騁六通之神驥 승오연지안거乘五衍之安車

육신통을 신령한 천리마를 달리듯 하고 오연五衍(五乘)의 편안한 수레를 타셨다

 

<주해註解>

부처님이 六神通으로 중생들을 몰고 가는 것이

마치 신령한 준마 즉 천리마를 달리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오연의 '연衍'은 범어로 연나衍那인데 乘이라고 번역한다.

삼계 내의 인승人乘, 천승天乘과 삼계를 벗어난 출세간의 삼승을 합하면 오승五乘이 된다.

 

부처님은 이들의 상황에 따라 감응하여 설법을 하면서

중생들을 싣고 운반하여 두려움 없는 열반의 처소에 이르게 한다.

그 때문에 '편안한 수레'라고 말하였다.

 

 

지능출생입사至能出生入死 여물추이與物推移

출생하고 入死하는 경지에 까지 이르러 중생들과 함께 추이推移하였다

 

<주해註解>

여래는 상황 따라 감응하여 중생들을 이롭게 하면서

중생들의 느낌이 있으며 나타나고 인연이 다하면 사라짐을 말하였다

그 때문에 '출생입사'라고 말하였으며

그들의 상황에 알맞게 수순隨順하기 때문에 '추이'라고 말하였다

초사楚辭에는 말하기를 '성인은 세속과 함께 추이하여 사물에 응체凝滯되지 않는다.’ 했다.

 

 

도무불흡道無不洽 덕무불시德無不施

도는 흡족하게 적시지 않음이 없었고 덕은 시행하지 않음이 없었다.

 

<주해註解>

한결 같은 비를 뿌려(一乘) 보편하게 윤택시켜 충만하게 흡족시키지 않음이 없었으며

삼단三檀 즉 재보시, 법보시, 무외보시를 평등하게 베풀어 중생들을 이롭게 하지 않음이 없었다.

 

 

궁화모지시물窮化母之始物 극현추지묘용極玄樞之妙用

만물의 시초에서 화모化母를 끝까지 추궁하고

오묘한 작용에서 현추玄樞를 극치까지 하였다

 

<주해註解>

化母는 조화에서 만물이 나오는 것을 말한다.

이로써 인연으로 나오는 만법에 비유하였는데 일체의 모든 법은 인연을 따라 나옴을 말한다.

그 때문에 '만물의 시초(始物)'라고 말하였다.

'현묘한 지도지 玄樞'는 실지반야이고 '오묘한 작용'은 방편반야이다.

실지반야에 상즉한 방편반야이기 때문에 '극치(極)'라고 하였다

 

 

확허우어무강廓虛宇於無疆 요살운어유촉耀薩雲於幽燭

한량없는 데서 우주가 확연히 텅 비었고 빛나는 살운야薩雲若로 그윽한 곳까지 환하게 밝혔다.

 

<주해註解>

마음과 세계를 확연하게 밝히고 법계의 한량을 투철하게 사무쳤다.

그 때문에 '한량이 없다'라고 말하였다.

 

범어의 살운야는 一切智라고 번역한다.

일체지로써 미진의 세계를 모두 관조하여 중생들의 심수心數를 다 본다.

그 때문에 '그윽한 곳 까지 환하게 밝힌다.'라고 말하였다.

 

 

장절짐어구지將絕朕於九止 영륜태허永淪太虛

구지九止에서 조짐을 끊고 영원히 태허太虛로 빠져 들었다.

 

<주해註解>

위에선 인연 따라 감응하면서 중생을 이익 되게 함을 말하였고

여기에서는 인연이 다하여 입멸함을 말하였다

 

'짐朕'은 조짐을 말하는데 만물이 처음 싹트는 은미한 조짐이다.

'구지'는 六凡과 三乘의 九界地인데 地는 부처님의 행리行履이다.

 

지금은 중생교화의 인연이 이미 다하여 교화했던 세계에서 자취를 끊고

태허로 영원히 빠져들어 가려 함이다. 이는 무여의열반을 가리킨다.

 

 

이유여연부진而有餘緣不盡 여적불민餘迹不泯

그러나 남은 인연이 있어 다하지 않으면 남은 자취도 끊기지 않는다.

 

<주해註解>

중생을 제도할 인연이 다하지 않으면 교화하여 인도한 자취가 원만하지 못하다.

그 때문에 '끊기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업보유혼業報猶魂 업보는 오히려 망상의 정혼精魂이고

성지상존聖智尚存 성지聖智는 그대로 존재한다.

차유여열반야此有餘涅槃也 이는 유여의열반이다.

 

<주해註解>

여기에서 한두 마디의 말을 조사해 보았더니 이 논문 가운데서 질문한 유여의열반은 천태교에서

수립한 사교四敎 즉 장통별원藏通別圓 가운데 소승 삼장교의 과두불果頭佛을 지적한 것이다.

 

이는 오주지五住地의 번뇌 가운데 枝末번뇌인

見一處住地와 欲愛住地와 色愛住地와 有愛住인 4住地의 번뇌를 동일하게

제거한 이곳에 있어선 四敎 마다의 果頭佛이 나란히 같다 한 것에 해당한다.

 

만일 오주지 가운데 근본번뇌인 다섯번째 무명주지를 조복받기만 하면

소승의 삼장교는 사교 가운데서 가장 하열한 경지가 된다.

 

왜냐하면 근본무명을 다 끊지 못하고 異熟識이 아직 다 공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삼장교의 과두불은 小乘四果의 마지막인 阿羅漢果인 것이다.

그 때문에 '업보는 오히려 망상의 정혼이다'라고 하였고 이 경지에서는 아직도 지혜로써

미세한 俱生我執을 끊어야만 하기 때문에 '성지는 그대로 존재한다.'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업보의 정혼과 성지'의 둘 모두를 유여의열반으로써 질문을 수립했던 것은 이 때문이다.

 

 

경운經云 경에서 말하였다.

도치진재陶治塵滓 여련진금如鍊真金

진로塵勞의 찌꺼기를 도태시키고 녹여 없애기를 용광로에서 眞金을 단련하듯 한다.

 

만루도진萬累都盡 이령각독존而靈覺獨存

그리하여 모든 번뇌의 累를 다 버리고 신령한 깨달음이 홀로 존재한다.

 

<주해註解>

여기서는 유여의열반에 대해 결론을 짓고 그 증거를 경전에서 인용하였다.

진로의 찌꺼기 편에서 말한다면

'도陶'는 도淘로 해야만 하는데 씻음을 말하며

'야冶'는 용광로에서 도야하여 녹이는 것을 말한다.

 

진로의 찌꺼기는 번뇌에 비유하였으며 이를 도태하기를 마치 眞金을 녹이려면

먼저 용광로의 더러운 때를 제거하는 것처럼 한다.

 

 

무여자無餘者 무여의열반이란

위지인교연도흘謂至人教緣都訖 지인至人이 중생교화의 인연이 다하고

령조영멸靈照永滅 신령한 관조가 영원히 사라져

확이무짐廓爾無朕 확연하여 조짐이 없음을 말한다.

고왈무여故曰無餘 그 때문에 '무여의無餘依'라고 말한다.

 

<주해註解>

여기서부터는 무여의열반을 말하였다

성인은 중생이 처한 상황과 그들을 교화함이 서로가 맞부딪치기 때문에

삼계에 응화신을 나타내고 상황과 가르침이 함께 다하기 때문에

빛나는 광채를 거두고 신령한 관조가 영원히 사라진다.

 

영원히 사라진다 함은 감응과 감응했던 자취가 함께 단절한다 함이다.

그 때문에 확연하여 조짐이 없기가 마치 장작이 다 타면 불도 꺼지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무여의열반이라고 말하였다

 

 

하즉何則 부대환막약어유신夫大患莫若於有身

왜냐하면 大患은 육신이 살아 있는 것보다도 더 큰 것이 없다.

 

고멸신이귀무故滅身以歸無 그 때문에 육신을 소멸하여 무로 되돌아가며

로근막선어유지勞勤莫先於有智 근로勤勞는 지혜가 있는 것보다 우선하는 것은 없다.

고절지이륜허故絕智以淪虛 그러므로 지혜를 끊고 태허로 윤몰淪沒하기 때문이다.

 

<주해註解>

'왜냐하면'이라 한 다음부터는 무여의별반에 들게 된 원인을 묻고 풀이하였다.

육신과 지혜는 진로의 누를 끼쳤다.

그 때문에 이 둘을 함께 소멸하여 없게 한 것인데 이것이 무여의열반이다.

이는 바로 소승의 견해이다.

 

'대환은 육신이 있는 것보다 큰 것이 없다' 하였는데 노자에서 말하기를

'나에게 큰 근심거리가 있는 까닭은 나에게 육신이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육신이 없다면 나에게 무슨 근심거리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자기의 육신을 근심하고 염증을 느끼기 때문에

몸을 소멸시켜 무로 되돌아가기 때문이다

 

또 말하기를 '성인의 지혜를 끊어 버려야 한다'.라고도 하였는데

이는 지혜 때문에 육신의 형체가 수고로움을 말한다.

 

그 때문에 지혜를 끊고 허무로 빠져 들어간다.

그러므로 마음이 편안하여 진로의 누가 없는 것이다.

 

 

연즉지이형권然則智以形倦 이와 같다면 지혜는 형체 때문에 권태롭고

형이지로形以智勞 형체는 지혜 때문에 근로하면서

륜전수도輪轉修途 먼 생사의 길을 윤회 전변하는

피이불이疲而弗已 피로함이 그치지 않는다.

 

<주해註解>

지혜는 인식으로 분별하여 집착하고 취하며(分別執取相)

형체는 6根과 6識과 6塵이 회합하여 二惑을 일으키고 3業을 짓는다.

 

그 때문에 생사에 윤회전변하면서 영원토록 본성으로

되돌아오지 못하는 까닭은 육신과 마음의 허물인 것이다.

 

 

경왈經曰 경에서는 말하였다.

지위잡독智為雜毒 형위질곡形為桎梏 지혜는 잡독이고 형체는 질곡이다.

연묵이지이료淵默以之而遼 심오하여 말없는 도가 이 때문에 요원하게 멀어지고

환난이지이기患難以之而起 환란이 이 때문에 일어난다.

 

<주해註解>

여기서는 지혜와 형체가 진로의 누가 되는 원인을 경전에서 인용하여 증거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란 <起信論>에서의 六추智相을 말한다.

이러한 육추지상으로 분별하고 집착하고 취하는(分別執取相) 것은 無明三毒煩惱의 근본이 된다

그 때문에 잡독雜毒이라 하였다.

 

'질곡姪梏'은 형틀인데 형체가 누를 끼치는 것에 비유하였다.

'질姪'은 발을 구속하고 '곡梏'은 손을 결박하는 형틀이다.

 

형해形骸가 본성을 자유롭지 못하게 구속함도 이와 같다.

이는 好惡의 감정으로 분별하면 변계소집의 허망한 마음이 나옴을 말한다.

 

심오하고 말없는 열반의 이치와 멀어져 생사의 괴로운 환란이 이 때문에 일어난다.

이는 육추지상의 허물이다.

그 때문에 성인은 형체와 지혜를 버리며 그 까닭에 진로의 누를 면할 수가 있는 것이다.

 

 

소이지인회신멸지所以至人灰身滅智 연형절려捐形絕慮

그 때문에 지인은 회신멸지灰身滅智하여 형체를 버리고 사려를 끓는다.

 

내무기조지근內無機照之勤

그리하여 안으로는 중생의 상황에 따라서 관조해 주는 수고로움이 없고

 

외식대환지본外息大患之本 밖으로는 큰 근심의 근본인 육신이 쉬게 된다.

 

<주해註解>

성인은 육신의 형체와 분별의 지혜가 누를 끼친다는 것을 안다.

그 때문에 몸을 불 꺼진 재처럼 하여 허무로 되돌아감으로써 그 형체를 버리고

분별의 지혜를 소멸하여 태허에 빠져들기 때문에 외연을 잊고 사려를 단절한다.

사려를 단절하기 때문에 안으로는 중생들의 상황에 따라서 관조하는 근로의 수고로움이 없으며

형체를 버리기 때문에 밖으로는 큰 근심거리의 근본인 육신을 쉬고 몸과 마음을 둘 다 잊는다.

그 때문에 큰 근심거리가 영원히 쉬고 생사를 단박에 초월하게 된다.

 

 

초연여군유영분超然與群有永分 혼이여태허동체渾爾與太虛同體

초연하여 모든 三界 25有와는 영원히 분야가 나뉘고 혼연하여 태허와 동체가 된다.

 

<주해註解>

형체와 지혜가 함께 없어졌다면 생사가 영원히 단절하여 삼계를 높이 초월한다.

그 때문에 모든 삼계 25有와 영원히 분야가 나뉘고

일진법계로 되돌아가 감응의 자취가 단절하였기 때문에 태허와 동체이다.

 

 

적언무문寂焉無聞 파이무조怕爾無兆 고요하여 소리의 들림이 없고, 담박하여 조짐이 없다.

명명장왕冥冥長往 막지소지莫知所之 명명하게 영원히 떠나 그가 간 곳을 모른다.

기유등진화멸其猶燈盡火滅 이는 마치 등불이 다하여 불이 꺼지면

고명구갈膏明俱竭 기름과 밝음이 함께 다하는 것과 같다.

차무여열반야此無餘涅槃也 이것이 무여의열반이다.

 

경운經云 경에서는 말하기를

오음영진五陰永盡 비여등멸譬如燈滅

'오음이 영원히 다한 것을 비유하면 등불이 꺼진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주해註解>

여기서는 결론을 짓고 무여의열반의 모습으로 소속시켰다.

열반의 자체는 음성이 없기 때문에 고요하여 들리는 소리가 없고

색깔이 없기 때문에 담박하여 조짐이 없으며

경험적인 지식(견문)이 끊겼기 때문에 명명하게 영원히 떠나

그가 간곳을 모른다 말하였다.

지之 자字는 간다(往)는 의미와 같다

 

형체와 지혜가 함께 끊겼기 때문에 등불이 다하여 불이 꺼지면

기름과 밝음이 함께 다하는 것과 같으며

형체와 지혜를 남김없이 다했기 때문에 '무여의열반'이라고 말하였다.

 

다음에서는 경전에서 인용하여 이를 증거 하였는데 이는 소승, 편공偏空의 열반이다.

논문에서 유명이 의도하고 절변折辯한 말은 모두가 소승의 편에서

견해를 일으켰기 때문에 문제를 따졌고 그에 대한 무명의 답변은

대승의 올바른 의미로써 그들 편공의 집착을 타파하였다.

 

 

연즉유여가이유칭然則有餘可以有稱 이와 같다면 유여의열반은 유명으로써 호칭할 만하고

무여가이무명無餘可以無名 무여의열반은 무명으로써의 명칭이 가능해졌다.

 

무명립無名立 즉종허자흔상어충묵則宗虛者欣尚於沖默

열반무명이 성립하면 허무를 숭상하는 자는 기쁜 마음으로 충허 심묵한 경지를 숭상하게 되고

 

유칭생有稱生 열반유명의 명칭이 나오면

즉회덕자미앙어성공則懷德者彌仰於聖功

부처님의 덕을 그리워하는 자들이 성인의 공덕을 더욱 우러러 보게 된다.

 

사내고전지소수문斯乃誥典之所垂文 선성지소궤철先聖之所軌轍

이는 聖經誥典에서 후세에 드리운 문장이며 선대성인들의 궤철軌轍인 것이다.

 

<주해註解>

여기서는 유명과 무명의 이익을 들어서 질문했던 의도를 결론지으려 하였다

이상과 같이 유여와 무여의 학설은 유명이든 무명이든 간에

모두가 지적하여 구체적으로 진술할 만하다.

 

가령 무명이 성립하면 허무를 숭상하는 소승들로 하여금

기쁜 마음으로 충묵허무沖默虛無의 이치로 취향하게 하고

유명을 호칭하게 하면 부처님의 성덕을 그리워하는 대승들로 하여금

그 공덕을 더욱 관찰하게 하기에 합당하다.

 

이는 유명과 무명 모두를 이치를 잃지 않는다고 찬탄하였다

이는 성경고전에서 드리우신 문장이며 선대의 성인이

무명으로 은둔하고 유명으로 나타나면서 중생을 교화했던 궤철이었다.

그 때문에 다음 문장에서 그를 책망하여 말하였다.

 

 

이왈유무절어내而曰有無絕於內 그런데도 유·무는 안에서 끊겼고

칭위륜어외稱謂淪於外 칭위는 외부에서 윤몰하여

시청지소불기視聽之所不暨 보고 듣는 것으론 도달하지 못하고

사공지소혼매四空之所昏昧 사공천四空天의 경지로도 깜깜하게 어둡다고 말하는가.

 

사부회덕자자절使夫懷德者自絕 그리하여 성덕을 그리워하는 자들이 스스로 끊기게 하고

종허자미탁宗虛者靡託 허무를 숭상하는 자들이 의탁할 곳이 없게 하였다

 

무이두이목어태각無異杜耳目於胎殼 이는 이목을 태각胎殼속에서 막아 버리고

엄현상어운소외掩玄象於雲霄外 현상玄象을 하늘 밖에서 가리우곤

이책궁상지이而責宮商之異 궁음宮音, 商音의 차이를 따지고

변현소지수자야辯玄素之殊者也 현색玄色, 素色의 다름을 분별하는 사람과 다름이 없다 하리라.

 

<주해註解>

여기서는 열반무명의 본론을 가리켜 이치에 어긋남을 지적하였다

유명이 질문하며 의도하고 말했던 것을 말해 보자.

 

유명을 호칭하면 성덕을 그리워하는 자들이 귀의할 바가 있게 되고

무명이 성립하고 나면 허무를 숭상하는 자들이 의탁할 바가 있게 된다.

그런데 지금 본론에서처럼 유·무를 쌍으로 단절하고 칭위를 함께 잃었다 하자.

이와 같다면 성덕을 그리워할 분야가 끊기게 되고

허무를 숭상하는 자들이 의빙할 곳이 없게 된다

이를 현묘한 세계라고 말하긴 하나 견문으로 경험할 세계는 아니다.

 

이는 이목을 태각 속에서 막아 버리고 눈뜬 봉사,

멀쩡한 귀머거리가 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현상玄象은 해와 달을 가리킨다.

그리고 다시 일월의 광채를 어두운 밤처럼 가리우고 귀로는 궁음, 상음을 분별하고

눈으로는 현색, 소색을 구별하라고 책망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는 실제의 이치와는 너무 멀다 하지 않겠는가.

 

 

자도지원추지인어유무지표子徒知遠推至人於有無之表

고운절창어형명지외高韻絕唱於形名之外

그대는 한갖 至人을 유·무의 밖으로 추앙할 줄만 알아

고상한 운치의 주장이 형체와 명분의 밖에서 단절하였다.

 

이론지경막지소귀而論旨竟莫知所歸 그리하여 논지는 끝내 귀결할 바를 알 수가 없다.

유도고자온이미현幽途故自蘊而未顯

열반의 그윽한 길이 이 때문에 온축蘊畜되고 가리워 환하게 드러나지 못하게 되었다

 

정사유심靜思幽尋 기회무소寄懷無所

고요히 생각하고 그윽하게 연구해 보았으나 회포를 의탁할 곳이 없다.

 

기소위랑대명어명실豈所謂朗大明於冥室 이를 어떻게 어두운 방에 대명을 밝히고

주현향어무문자재奏玄響於無聞者哉

현묘한 음향소리를 듣지 못하는 자에게 연주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주해註解>

여기서는 논지가 이치에 어긋남을 결론짓고 책망하여 이익이 없음을 밝혔다.

즉 유명은 무명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그대가 말하는 열반의 도는 유·무와 칭위의 밖으로 초월하여 벗어났다고 말한다.

이는 한갖 성인의 세계를 고상하게 추앙하여 형체와 명칭이 아득히 끊겼음만을 알았을 뿐이다.

그리하여 논지의 취지가 끝내는 귀결할 바를 알 수 없게 하였다.

열반의 그윽하고 오묘한 길이 이로부터 온축되고 덮여 환하게 발현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곤 有名家는 말하였다.

'나는 이 문제를 고요히 생각하고 그윽하게 연구해 보았으나 회포를 의탁할 곳이 없었다.

이는 이른바 크게 밝은 열반의 고가 겹겹이 어두운 방을 밝히고 모두 함께 보게 하는 것은 아니며

현묘한 음향을 소리의 들림이 끊긴 경지에서 연주하여 모두가 함께 듣게 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밝히려 했으나 반대로 어두워지고 이치를 소통시키려 했으나 도리어 막혔음을 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