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연명집陶淵明集>과 판본
<도연명집陶淵明集>에는
사언시四言詩 오언시五言詩 부賦 사辞 기記 전伝 찬賛 술述 소疏 제문祭文이 있다.
도연명陶淵明(365-427)은 동진東晉 선양船陽 채상蔡商 출신.
그의 다른 이름은 원명元明이고 자칭은 원량元良이었다.
그는 가난에 만족하고 단순한 삶을 즐겼다.
지방의 여러 곳에서 하급 관리를 지냈고 팽택의 현직을 80일 동안 지낸 후 사임하고 은퇴했다.
도연명의 일생을 3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 진晉 효무제孝武帝 태원太原 17년(392) 28세 이전.
2. 학습과 관직의 시기로 태원太原 18년(401) 29세부터 진晉 안제安帝의 의희義熙 원년(405) 41세 까지.
3. 귀향기로 진晉 안제安帝 의희義熙 2년(406)부터 송宋 문제文帝 원가元家 4년(427)까지 이다.
현재 전해지는 도연명의 시는 들쭉날쭉하여 그 총 수를 단정 짓기에는 한정적이지만 150首 내외이다.
그의 4言시는 그다지 뛰어나지 않다.
그의 5言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한·위나라 때부터 서정시와 염원을 표현하는 전통을 이어받아 발전시킨 성찰시이고
다른 하나는 전례가 거의 없는 전원시이다.
도연명의 예술적 성취는 당나라 때부터 칭찬을 받아왔고 심지어 시의 기본 원칙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도연명이 세상을 떠난 지 100여 년 후 소통蕭統은 도연명이 남긴 유작을 모아 목록화 하여
<陶淵明集> 8권으로 편찬하고 직접 서문과 전기를 썼다.
그 후 북제北齊의 양수지楊秀智(양휴지陽休之)가 소통의 本을 토대로
<오효전五孝傳>과 <48條>를 덧붙여 <도잠집陶潛集>10권으로 편찬했다.
양본陽本은 수나라 말기에 서문과 목차가 없어져 9권으로 된 책이 되었다.
그 후 다른 판본들이 잇따라 나와 10권으로 만들기 위해 경쟁했다.
북송北宋 때 송상宋庠은 <도잠집陶潛集>10권 본을 다시 출판했는데 이는 陶潛의 시집 중 가장 이른 출판본이다.
위의 책들 중 어느 것도 전해 오지 않는다.
오늘날 볼 수 있는 가장 초기의 버전은 남송南宋 시대부터 원元나라 초기까지 여러 판본이다.
주요 작품으로는 남송南宋 소희紹熙 3년에 간행된 증집曾集의 시와 수필 2권,
청清나라 광서光緒 연작 사본 1부, 남송 때 간행된 급고각汲古閣 10권,
청나라 사본 1부, 남송 때 간행된 문집 8권, 초씨焦氏 명나라 번역본 1부,
<한위칠십이가집漢魏七十二家集>중 <도집陶集>5卷, 송나라 번역본 1부 등이 있다.
이 밖에 宋나라 판의 <동파선생화도연명시東坡先生和陶淵明詩>과 元나라 판 소식蘇軾의 大字本이 있다.
도연명의 시에 주석을 단 최초의 인물은 남송南宋의 탕한湯漢이다.
元나라 이후 주석과 해설이 달린 버전의 숫자가 갈수록 늘어났다.
원나라 초기 본에는 이공환의 <전주도연명집箋注陶淵明集>10권이 수록되어 있으며
가장 흔한 것은 사부총간四部叢刊 본의 사본이다.
清나라 도주陶澍가 주석한 <정절선생집靖節先生集>10권은 사판본과 문고출판사에서 발행한 인쇄본 2가지가 있다.
현대 학자 고직古直의 <도정절시전陶靖節詩箋>이 있다.
►<도연명집陶淵明集>
1. 개요
진晉나라 때의 시인이자 은사隱士인 도잠陶潛의 시문집이다.
원래 남조南朝 양梁나라의 소명태자昭明太子 소통蕭統이 편찬한 것으로 총 8권이며
詩와 산문과 부賦 등을 포함하여 총 142편이 수록되어 있다.
그의 시는 청신한 풍격과 담담한 정취를 품고 있으며
시의 제재를 농촌의 일상생활까지 확대하여 자연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활달한 심경을 표현함으로써
전원문학田園文學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창시하였다.
도잠은 29세 때 강주江洲의 좨주祭酒로 취임한 것이 첫 번째 관료생활이었으나 곧 사임했다.
35세 때 당시 晉나라 최대 北府軍團의 진군장군鎭軍將軍인 유뢰지劉牢之의 참모가 되었다가 금방 사직하였고
36세 무렵 형주자사荊州刺史 환현桓玄의 막료로 취임했다가 모친상을 당해 고향으로 돌아갔다.
41세(405년) 때 팽택현령彭澤縣令이 되었는데 순찰사가 순찰을 올 것이니 의관을 갖추고 맞이할 준비를
하라는 관료의 말을 듣고 그날로 사임한 뒤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짓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20여 년간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고향에 은거한 지 3년째 되는 해에 갑작스런 화재로 생가가 타버리자 그는 일가를 거느리고 고향을 떠나
심양尋陽의 남쪽 근교로 이사하여 만년을 보내며 전원생활에 대한 정회를 아름다운 시로 읊어내었다.
2. 서지사항
원래 남조南朝 양梁나라의 소명태자昭明太子 소통蕭統이 편찬한 것으로 총 8권이었는데
북제北齊의 양휴陽休가 〈오효전五孝傳〉과 〈사팔목四八目〉을 더하여 10권이 되었다.
〈사팔목〉은 〈성현군보록聖賢群輔錄〉을 말한다.
그런데 양휴가 추가한 〈오효전〉과 〈사팔목〉은 후인의 위작임이 분명하므로
<사고전서총목四庫全書總目>에서는 8권이라고 확정하였다.
총 8권 중 현재 남아 있는 시는 四言詩 9수, 五言詩 115수와 산문 11편이다.
이 중 저작연대가 명확하거나 대강 알 수 있는 것은 80수뿐이다.
그 밖의 것은 중년기 이후 즉 그가 은둔생활을 보낸 약 20여 년간에 지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도연명집>은 십 수종의 판본이 전한다.
그 중 중요한 판본으로는 송나라 증집曾集이 간행한 양책본兩冊本,
명나라 초횡焦竑이 번각飜刻한 8권본,
광서光緖 연간에 장씨章氏가 급고각汲古閣에서 간행한 판본 등이다.
우리나라에서 간행된 <도연명집>은 모두 10종이 전한다.
<수계교본도연명시집須溪校本陶淵明詩集>(1483년 간행)
<전주정절선생집箋註靖節先生集> 2종
<정간보주동파화도시화精刊補注東坡和陶詩話>와 <도연명집> 8권본, 9권본 2권본, <도정절집陶靖節集> 3종 등이다.
3. 내용
권1은 〈정운停雲〉·〈시운時運〉을 비롯한 四言詩가 실려 있다.
권2~권4까지는 〈형증영形贈影〉·〈영답신影答神〉·〈의고擬古〉·〈잡시雜詩〉 등 五言詩가 실려 있다.
권5에는 〈도화원기桃花源記〉와 〈귀거래혜사歸去來兮辭〉·〈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 등이 실려 있고
권6은 〈감사불우부感士不遇賦〉·〈한정부閒情賦〉가 실려 있다.
권7은 〈선상화찬扇上畫贊〉과 〈여자엄등소與子儼等疏〉가 있다.
권8은 〈제정씨매문祭程氏妹文〉·〈제종제경원문祭從弟敬遠文〉·〈자제문自祭文〉이 실려 있다.
이 작품들 중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과 〈자제문自祭文〉은 자전문학사自傳文學史에서 중시하는 작품이다.
<도연명집>에 수록된 시의 배열은 시체별詩體別로 이루어져 있다.
4. 가치 및 영향
도잠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 손수 논밭을 일구고 가꾸면서 전원생활의 정취를 읊은 작품들은
역대 중국의 어느 시인의 작품보다도 더 많이 애송愛誦되고 그만큼 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특히 ‘화도시和陶詩’라는 특별한 시가 창작되었는데 도잠의 시에 화운和韻하는 시 형식으로
소식蘇軾에 의해 가장 먼저 시도된 이래 한·중·일의 많은 작가들이 이 형식을 빌려 시를 지었다.
한편 〈음주飮酒〉 시에서
채국동리하彩菊東籬下 동쪽 울타리 밑에서 국화를 캐다가
유연견남산悠然見南山 느긋하게 남산을 바라보네.
라고 노래한 이후 국화는 은자隱者를 상징하는 꽃이 되기까지 하였다.
또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삼경취황三徑就荒 세 갈래 오솔길은 황폐해져 가는데
송죽유존松竹猶存 소나무와 국화는 아직 남아있네.
라고 읊은 이래 동양 회화繪畫에서 소나무와 함께 서 있는 사람은 거의 대부분 도잠을 상징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화도시’를 1수 이상 지은 문인들은 약 67인이며
도연명의 〈귀거래사〉에 화답한 시를 창작한 문인까지 합산하면 약 134인 정도가 된다고 한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50세 되던 해 은퇴를 결심하고 도연명의 시에 화운和韻한 〈음주飮酒〉를 지었는데
이 점은 우리 문인들의 도잠에 대한 평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심원지자편心遠地自偏 마음이 머니 땅도 저절로 외져서라네.
(마음이 멀리 있으면 사람 많은 곳에 있어도 그곳은 산중이나 마찬가지이네)/〈음주飮酒> 5首
중조흔유탁衆鳥欣有托 새들도 깃들 곳이 있어서 좋겠지만
오역애오려吾亦愛吾廬 나도 내 오두막을 사랑한다오.
/〈독산해경讀山海經〉
갈불위심임거류曷不委心任去留 어이해 가고 머묾을 마음대로 하지 않고
호위호황황욕하지胡爲乎遑遑欲何之 어찌하여 황급히 어디를 가려고 하는가.
/〈귀거래사歸去來辭〉
►한국본 <수계교본도연명시집須溪校本陶淵明詩集>
<수계교본도연명시집>은 수계須溪의 다른 판본들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元本 계통이므로 판본에 대한 구체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1931년에 일본인인 하시가와(橋川時雄)가 처음 이 판본의 존재를 소개한 이래 곽소우郭紹虞는 하시가와를 통해
이 판본을 알고는 있었지만 도연명집의 중국본 만을 검토하느라고 한국 본까지는 검토할 여력이 없었고
실제로 한국 본을 직접 대해볼 수도 없었다.
이 <수계본>의 가치는 결국 원문에 대한 교감으로 결정된다.
모든 판본은 서로 대동소이하며 송본인 <급고각본>과 <수계본>도 마찬가지로서 넓게 보아 <수계본>은
<급고각본>계열의 판본이지만 그 ‘小異’한 부분에서는 <급고각본>과 달라진다.
우선 <수계본>은 14군데에서 <급고각본>의 일작모를 원문으로 삼고 있으며
많은 경우 <수계본>의 원문이 더 좋다.
또 <급고각본>이 <수계본>의 원문을 일작모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급고각본>이 <수계본> 계통의 판본을
참고했다는 뜻이기도 하며 부분적으로 그 <수계본>의 원문을 <이공환본>과 <동파선생화도연명시><소체대자본>이
함께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이들 판본간의 친연성이 상정된다.
이들 판본들은 이 측면에서만큼은 <급고각본>과 대립되는 판본들이라고도 할 수 있다.
<급고각본>의 일작모 범위도 벗어나면서 <수계본>의 원문이 다르지만 호환이 가능한 예들은 모두 18군데로서
그 가운데 약자라든가 통용자, 가차자 이외에 <이공환본>과 공유하는 용례가 가장 많으며
그 다음으로는 <탕한본>과 <동파선생화도연명시><이몽양본><소체대자본><초굉본> 등을 들 수 있다.
그래서 <급고각본>의 일작모 용례들까지 함께 감안한다면 <수계본>은 <이공환본>과 가장 가깝고
<동파선생화도연명시><소체대자본>과는 일정한 관계를 상정할 수 있다.
달리 생각한다면 결국 <수계본>과 이들 판본들의 동일 조본祖本을 떠올려 볼 수 있다.
<수계본>과 다른 하나의 판본만이 새로운 원문을 공유하는 예로 보건대는
역시 <이공환본>이 <수계본>과 가까이 있으며 명대의 판본인 <이몽양본>도 <수계본>과 멀지 않다.
<수계본>과 <이공환본> 그리고 <이몽양본>의 저본은 비슷한 시기 내지는 비슷한 지역에서 간행되었을 수 있다.
결국 원문들의 정황으로 보건대 <수계본>은 <탕한본><동파선생화도연명시><소체대자본><초굉본><이몽양본>과
판본의 선이 닿아 있으며 <이공환본>과 가장 가깝다.
<급고각본>은 일작모의 예로 보아 <수계본>내지 <수계본>의 조본을 참고한 셈인데
모든 송원본들은 판본의 한 자장 속에 함께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정간보주동파화도시화> 만큼은 <수계본>과 주목할 만한 용례를 공유하고 있지 않아서
송원본 가운데 어느 정도 특이한 판본이라고 함직하다.
<수계본> 만의 새로운 글자는 모두 28군데로서 많은 경우 글자의 생김새가 비슷해서 옮겨 적는 과정에서
글자가 달라졌음을 알 수 있으며 생김새가 전혀 다른 글자는 몇몇 예에 지나지 않는다.
이 가운데 18군데는 새롭게 합리적인 문맥을 구성하고 있고 10군데는 틀린 예인데 틀린 예들을 보건대는
교정이 엄밀하지 못한 元代의 방각본으로 생각되고 틀린 예들보다 맞는 예들이 더 많다는 점에서는
<수계본>은 선본이라고 하기는 어려워도 충분히 좋은 판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수계의 교정 여부를 떠나 元本인 <수계교본도연명시집>은 여타의 판본과는 다른 새로운 판본이며
허름하다 해도 역시 송원대의 판본은 함부로 무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기초학문자료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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